"산속에 들어가면 나무나 바위 뒤편에서, 길을 걷고 있으면 마을의 집 모서리에서, 집에 돌아오면 봉당의 구석이나 들보 위에서 그냥 빤히 그 사람을 엿보는 거지.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몇 주만 지나면 완전히 정신이 이상해져버린다고 하더라."

"그래, 맞아. 언젠가부터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야오토시 가에 ‘노조키메’라는 괴물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어."

"엿보는 나무의 아이인 노조키네가 엿보는 눈이란 뜻의 노조키메로 변하고 거기서 다시 엿보는 여자란 뜻의 노조키메가 된 건가. 이 경우에 계집 녀(女)자는 어머니와 같이 생매장당한 소녀를 나타낸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그런데 다음날부터 서로 민속조사 준비에 바빠져서, 제대로 얼굴도 마주하지 못한 채로 각자의 조사지로 떠나게 되고 말았다. 그때 하숙집에서 술잔을 주고받았던 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사야오토시 소이치가 조사지에서 객사했다는 것을 안 것은, 내가 민속조사를 마치고 도쿄에 돌아온 뒤였다.

"자기도 모르겠다더군. 다만 사야오토시 군에게는 그 무엇인가가 보였던 것이 아닐까……라고 했어. 왜냐하면 조사지인 하하(爬跛)촌이 있는 소류고(蒼龍鄕)는 옛날부터 빙의물 신앙이 번성했기 때문이라나. 정말이지, 민속조사를 뭘로 생각하는 건지……."

"빙의물 신앙……."

노조키메도 일종의 빙의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일단 그런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와버렸다. 이 지방에, 이 마을에, 이 집에.

아니, 지금도 늦은 것은 아닐지 모른다.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을 짬이 있다면, 곧바로 여기에서 도망쳐야 하는 게 아닐까.

지도상으로는 소나이 촌에 가기보다 토모라이 촌의 난라이를 향하는 것이 가깝겠지만, 스쿠자 산지의 지형이 그것을 허락지 않는다. 그것 때문에 기차의 선로는 우회에 우회를 거듭할 수밖에 없어서, 승객은 멀찍이 돌아가는 것을 강요받게 된다.

놀랐던 것은 소나이 촌이 예상 밖으로 번화한 마을이었기 때문이었다. 산속의 조금 큰 마을 정도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꽤 활기찬 마을이었다. 이 정도라면 제대로 된 여관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나는 안도했다.

"아뇨, 평범하겠죠. 다만 토모라이 촌이란 곳은 토무라이 촌이라고 불리고 있는 동네거든요. 장례 지내는 마을이란 뜻으로. 그런 마을에서 장례식을 하는 날에 장래가 창창한 학생 같은 사람이 일부러 갈 건 없어요."

산길을 내려간 끄트머리 쪽에, 어느새 모였는지 십여 명 정도의 어린아이가 한데 모여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정도의 숫자가 있는데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다. 어느 아이의 눈동자에도 예외 없이, 무서운 것, 꺼림칙한 것, 더러운 것, 경멸스러운 것, 소름 끼치는 것이라도 보는 듯한 기묘한 빛이 또렷하게 떠올라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있는 쪽이 안전한 장소고 내가 향하려 하고 있는 곳이 금기의 땅인 것처럼…….

산길은 의외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마차나 승용차가 달리는 것은 힘들겠지만, 말이나 소에게 짐차를 달아 끌게 할 수는 있어 보였다. 이것은 토모라이 촌과 소나이 촌 사이에 적지 않은 왕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 사실을 내가 얼마나 든든하게 느꼈는지 모른다.

그런데 산길을 나아감에 따라 그런 안도감이 차츰 엷어지면서 다시 불안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처음에 산길에 들어섰을 때는 하늘이 보였는데, 어느샌가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들어와 있어서, 아무리 걷고 아무리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지나도 깊은 숲에서 나갈 기미가 전혀 없었다.

안도한 것도 잠시뿐. 이번에는 길이 뱀처럼 갈지자를 그리기 시작한 탓에 앞길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왼편의 깎아지른 듯이 솟은 산자락과 오른편의 덤불 너머로 뻗어 있는 경사면, 그리고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산길뿐. 그것이 마냥 이어지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고독에 젖어 있으면 사람은 감각이 이상해지는 듯하다.

‘유령의 정체 알고 보니 마른 참억새, 라는 속담이 있지…….’

생선의 경우에는 그 냄새가 부정한 것을 쫓는다고 옛날부터 믿어져 왔다. 가장 널리 보급된 사례는 절분(節分)에 정어리 머리를 현관문에 달아놓는 의례일 것이다. 그때 호랑가시나무 잎사귀도 사용하는 것은, 그 뾰족한 형태가 부적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삼나무 잎도 같은 이유라 할 수 있다. 마늘은 식물이면서도 생선처럼 강렬한 냄새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추는 볶는 게 효과적인데, 저렇게 매달아놓는 것은 붉은색이 부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아마 연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선 과연 명가인 토다테 가라고 나는 감탄했다. 저 훌륭한 연어 토막만으로 색깔과 냄새라는 두 종류의 주술을 걸고 있다.

민속학상, 일단 빗자루란 말에서 떠오르는 것은 출산에 입회하는 빗자루신(神)일 것이다. 빗자루로 임산부의 배를 쓰다듬거나 발치에 세워두거나 해서 빗자루신을 불러 무사히 출산하기를 기원하는 의식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빗자루는 장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다. 출관한 뒤의 방을 쓴다는, 그야말로 빗자루로서의 사용법이다. 물론 이것은 청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때를 문자 그대로 쓸어낸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 증거로 밖으로 쓸어내는 몸짓을 보인 뒤에는, 쓸어낸 나쁜 것이 돌아오지 않도록 서둘러 문을 닫아버린다.

결혼식 의상이나 장례식의 상복에 검은색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시대 이후부터다. 서양에서 전해진 정장의 영향일지도 모르지만, 의복의 역사에 해박하지 못한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본의 대부분의 지방에서는 아직도 백색이 주류다.

유족은 하얀색 물건을 몸에 걸치고 있기도 한다. 친족이 몸에 두르는 이 하얀색은 죽은 자가 입은 수의와 같은 색이다. 즉 저 세상으로 보내는 시신과 같은 색을 공유함으로써, 친족들은 죽은 자에게 몸을 붙이고 있다. 시신만이 홀로 저 세상으로의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함께라는 증표인 것이다. 적어도 나는 어릴 적에 할아버지 할머니께 그렇게 배웠다.

"알겠습니까? 이 집에서 뭘 보고, 뭘 듣고, 뭘 느끼더라도 무조건 모르는 체를 해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무서워요."
문득 전혀 생각도 못했던 말이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소이치 형이? 죽은 소이치 형이 무섭다는 거야?"
다시 쇼이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반상 앞으로 몸을 내민 나에게, 쇼이치는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증조할머니를 데려갔으니까……."
"……."

‘이 집에서 뭘 보고, 뭘 듣고, 뭘 느끼더라도 무조건 모르는 체를 해야 합니다.’
어째서 주지는 내가 저것을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걸까. 어째서 저것과 관계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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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죠? 왜 이 노트를 읽으면 안 된다는 겁니까?" "……오니까." "네?" "그것이 엿보러 오니까……."

세상에 기담과 괴담을 좋아하는 이는 많다. 무서운, 불가사의하고 기분 나쁜, 오싹하고 섬뜩한,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너무나도 기묘한 그런 이야기를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중에서는 너무 좋아한 나머지 직접 괴이담을 수집하기 시작한 인물도 있다. 유명한 사례로는 중국 청나라 전기에 기록된 포송령(蒲松齡)의 《요재지이(聊齋志異)》나, 일본 에도시대에 정리된 네기시 야스모리(根岸衛)의 《미미부쿠로(耳囊)》 등이 있을 것이다.

포송령은 산동 지방의 문인으로, 소년기부터 수재로 이름났었지만 장성한 뒤에는 관직시험에 몇 번이나 낙방했으며, 그 좌절한 마음이 《요재지이》로 결실을 맺었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통행본으로 전 16권, 445편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는 수많은 판본이 존재하고 있다.

네기시 야스모리는 고케닌카부(御家人株 ; 무사의 신분. 에도 시대에는 궁핍해진 무사가 신분을 파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며 표면적으로는 구입자를 양자로 들이는 형태로 권리를 넘겼다_역주)를 사서 네기시 가의 양자가 되어 그 집안의 장자권을 상속함과 동시에 두각을 나타낸 막부의 신하로, 재정을 담당하는 칸조부교나 행정 사법을 담당하는 미나미마치부교 등을 역임했다. 사도 섬을 다스리는 사도부교 시절부터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써서 남긴 것이 전 10권에 1천 편에 이르는 《미미부쿠로》다.

양자를 비교해가며 읽은 경우, 전자보다는 후자에서 실제로 피부에 와 닿는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국가나 시대나 문화의 차이가 아니라, 담겨 있는 이야기가 지닌 일상성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이 책의 단서는 아직 내가 간사이 지방에 머무르며 편집자 일을 하던 시절, 모 기획을 위해 몇 번이나 만나서 의논했던 ○○대학 부속 T초등학교 교사인 토쿠라 시게루(利倉成留)에게 들은 이야기다. 그 남자와는 나이도 엇비슷하고 독서 취향도 유사해서 마음이 맞은 덕분인지 금방 친해졌다. 일 이야기를 하는 사이사이에 잡담을 하는 일도 많았고, 따라서 괴담이 화제에 오를 때까지 그리 많은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토쿠라 시게루는 쇼와시대(일본의 연호 중 하나로 1926년부터 1989년까지를 말한다_역주)가 얼마 남지 않은—나중에 생각해보고 안 것이지만—학생 시절의 어느 해 여름, M지방의 임대 별장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에 무서운 체험을 했다고 한다. 아르바이트 동료들과 함께 정말 오싹한 사건에 휘말리고 말았던 것이다.

"‘제거할 필요가 있는 나무뿌리’란 뜻의 노조키네를 베면, ‘엿보는 나무의 아이’란 뜻의 노조키네란 괴물이 나온다……. 그런 얘깁니까?"

"네. 다만 괴물이라고 해도 그것이 못된 사람에게 앙화를 내리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냥 나타날 뿐이고, 특별히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씀이죠?"

"베어서는 안 되는 나무인 ‘노조키네’를 벤 자는 이윽고 누군가의 시선을 받는 듯한 기분을 느낍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그래도 누군가에게 주시당하고 있다는 감각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하루 종일, 언제 어디서나 그것의 시선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은 정신이 나가버린다……라는 모양입니다."

"안 보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노조키네에서 파생되었다고 여겨지는 것에 노조키메가 있다’라는 문장입니다."

"그 노트의 내용은, 절대 읽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처음에는 ‘내가 아이자와에게 직접 노트를 받았기 때문에 나구모가 기분이 상한 건가’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그의 어조가 미묘했다.

"어째서죠? 왜 이 노트를 읽으면 안 된다는 겁니까?"

"……오니까."

"네?"

"그것이 엿보러 오니까……."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팔뚝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다음 순간, 나는 5년 전에 있었던 기묘한 사건의 진상을 알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 의도했던 민속학적인 조사기록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 될 것 같지만, 이번 체험을 글로 써서 남겨두기로 한다.’

아이자와 소이치가 쓴 그 첫 문장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이미 완전히 빠져들어 있었다. 그대로 끝까지, 단숨에 독파해버렸다.

다만 읽어나가는 중에 어떤 우연을 깨달았을 때에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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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에 휩쓸려 굴종하지 않기 위해 현재의 조건을 바꿔나가려는 싸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인간의 존엄에 걸맞은 사회·경제적 조건을 누릴 수 있게 하는 싸움, 이런 싸움은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보편 복지에 대한 요구와도 유사한 맥락일 겁니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톨스토이는 "바로 옆의 사람이다"라고 답했습니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은 언제냐?" 이 질문에 대한 톨스토이의 답은 이미 알고 계시지요? "바로 지금이다"입니다.

굴종하지 않으면서 이런 존재들을 보듬기 위한 집단적인 연대를 고민하자. 제가 만약 프랑스에서 20년을 살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냥 한국에 남아 있었더라면 무너졌을 가능성이 높은 저에게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물론 MB정권 아래에서 집회시위의 자유라든지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 여러 자유들이 훼손당하고 있는데, 물론 이에 맞서 싸워나가야 하겠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자유는 바로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의 자유입니다.

유보하되 포기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은 시간과 함께 성숙합니다. 따라서 의지를 갖고 끝없이 긴장을 유지하면, 시간과 함께 자아를 실현하면서 생존이 담보될 수 있는 길이
열리며, 아무리 엄중한 사회라 하더라도 그런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을 절대로 배제할 수 없다는 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유보하되 포기하지 말자. 죽는 순간까지.

홍세화  학교 선배든 인생 선배든 또는 형이든 누나든 아니면 부모님이든 간에, 그래도 선배 잘못 만나서 세상 보는 눈을 뜨게 된 이런 분들이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한 민중의 표상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힘을 합쳤으면 좋겠고요.
내일 지구가 망할지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에 빗대 말하자면, 미래의 불확실성을 오늘의 불성실에 대한 핑계로 삼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톨스토이의 말처럼 나에게 소중한 사람에게 성실하고, 또 두말할 것도 없이 스스로에게 성실했으면 좋겠습니다. 소유물을 갖고 남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성숙했는지, 그리고 나의 인간관계가 오늘보다 내일 더 성숙할지, 즉 존재와 관계의 성숙을 목표로 하는 비교만 남겨뒀으면 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유배된 혹은 유배되었던 청춘끼리 공유했으면 좋겠네요.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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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인간의 존엄성에 맞는 ‘몸 자리’라는 화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몸 자리에 관심을 갖습니다. 결국은 나와 내 가족, 내 아이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인간의 존엄성에 맞는 몸 자리를 향유할 수 있느냐, 이게 가장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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