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정 노트 1. 임제
《남명소승》에 영실계곡에 당도하는 모습을 남겼는데 간이용 텐트가 없던 시절이라 장막을 지고 올라가 정상에 베이스캠프를 쳤던 것 같다. 오늘날의 영실코스로 등정한 것 같으며 존자암을 거쳐 갔다. - P54

등정 노트 2. 김상헌
나라의 공무로 출장 온 김상헌은 남사일록》에 이렇게 썼다.

오백장군 골짜기는 돌 봉우리가 다투어 빼어나 말 타고 갑옷을 입은 사람같기도 하고, 혹은 칼과 창을 잡고 깃발을 나부끼는 것 같기도 하며, 푸른 절벽 위에 줄을 지어 서 있어서 오백장군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 이것이다.

오백장군은 앞의 영실계곡과 더불어 조선시대에도 대표적인 명승지였던 것같다. 김상헌은 ‘속세 바깥의 깨끗하고 기이한 취향이 많다"고 했다.
- P55

등정 노트 3, 김치
제주판관을 역임한 김치는 양력으로 5월 초순에 올랐으니 등산하기 딱 좋은절기였다.
- P55

등정 노트 4. 지그프리트 겐테
서양인 최초로 한라산을 등정한 백인은 1901년의 독일인 지그프리트 겐테(S. Genthe)다. 그가 서술한 놀라움의 한 대목.
드디어 정상이다. 사방으로 웅장하고 환상적 장관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섬을 지나 저 멀리 바다 너머로 끝없이 펼저지는 파노라마였다. 제주도 한라산처럼 형용할 수 없는 웅장하고 감동적인 광경을 제공하는 곳은 지상에 그렇게 흔하지 않을 것이다.
- P56

등정 노트 5. 정지용
시인 정지용은 아홉 편의 연작 산문시 "백록담"을 남겼다. 
한라산을 이처럼 아름답게 표현해낸 시도 드물 것이다. - P56

등정 노트 6. 그 밖의 사람들
김석익은 ‘토정 이지함이 세 번 한라산을 올랐으나 당시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육지 도인들이 불현듯 바다를 건너와 한라산으로 들어갔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등정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 P56

조선시대 한라산 등반이 유람적 성격이 강했다면 현대 등반은 일제강점기에도입되었다. 산을 정복함으로써 인간 영역을 넓히는 서구 알피니즘이 제국 일본의 프리즘을 통해 도입된 것. 알피니즘에는 당시 제국주의를 표방하던 세계 열강의 팽창주의가 숨겨져 있었다. 미지의 세계와도 같은 험준한 산을 정복함으로써 자국의 우수성을 만천하에 증명하려는 의도였다. 일제도 한반도 명산을 정복함으로써 식민지배의 정복사와 일치시키려는 통과의례로 삼고자 했으며, 한라산등반도 이의 행보에 발맞추어 이루어졌다. - P57

오름의 왕국 천의 얼굴
제주도 이해의 첩경은 오름이다.
- P59

일찍이 이형상은 《남환박물》에서 이렇게 썼다.
한라산은 한 가운데가 우뚝 솟아있고 여러 오름이 별처럼 여기 저기 벌리어있으니, 온 섬을 들어 이름을 붙인다면 연잎 위의 이슬 구슬의 형국이라 할 수있다. - P59

화산의 섬
세계 농업유산에 빛나는 돌담 - P65

땅은 평평하고 넓은 듯 하나 울퉁불퉁해서 멀리 바라보기가 어렵다. 비록 언덕의 능선이 있지만 어지러이 뒤섞여서 구분하기가 어렵고, 형세가 그물눈 같기도 하고 혹은어지러이 널려있는 분묘 같기도 하다. 돌을 쌓아 놓았지만 곱지도 않거니와 가지런하지도 않고 모두 닥딱한 광석처럼 거무튀튀하여 보기가 볼썽사납다.
- 《충암록(中錄)》 - P65

제주도 돌담은 과학적이기까지 하다. 치밀하게 쌓기는 하되 자세히 보면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틈새를 주지 않고 완벽하게 쌓으면 거친 바람에 돌담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바람이 틈새로 빠져나가면 돌담은 끄떡없이 제자리를지킨다. 삶의 지혜다. 송악 같은 덩굴류가 돌을 든든하게 붙여주는 역할을 한다.
제주도민이 만들고 가꾸어온 민속지식의 힘이다. - P68

제주사람에게 돌담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시도 눈길에서 놓을 수 없는상징이다. 아예 ‘돌에서 왔다가 돌로 돌아가는 사람들‘ 이다. 돌 구들 위에서 태어나고 죽어서는 산담에 둘러싸인 작지왓자갈밭)의 묘 속에 묻힌다. 살림채 벽체가 돌이며, 울타리와 올레, 수시로 밟고 다니는 잇돌(디딤돌)이 모두 돌이다.
산길은 물론 밭길, 어장길도 돌밭이다. 그래서 제주사람은 짚신 아닌 질긴 칡신을 만들어 신었다. 그 돌담의 미학을 제대로 읽어낸다면 제주도의 아름다움을절반은 이해한 것으로 간주해도 좋다. - P70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할 돌담에 관해
하나, 집 안팎의 집담과 통담, 올레 - P70

둘, 밭을 둘러싼 밭담
가장 많은 담은 역시 밭담이다. 밭담은 우마 침범을 막고 화산토가 날리지 않게 치밀하게 쌓았다. - P71

셋, 신당을 둘러싼 당담 - P78

넷, 무덤을 둘러싼 산담 - P78

무덤은 산담으로 인해 고유의 영역을 보장받으며, 오름의 품안에서 영원의 잠을 청하는 망자의 집으로 비로소 완성된다. - P79

다섯, 목장을 둘러싼 잣담제주도 최대의 토목공사였던 잣담(혹은 잣성)도 중요하다. 잣성은 조선 초기부터 한라산지에 설치된 국영 목마장의 상하 경계다. - P82

여섯, 바다를 둘러싼 원담바다에도 돌담이 있다. 밀물 따라 들어온 고기가 썰물에 갇혀서 빠져나가지못하게 만든 돌담을 육지에서는 돌발로 부르며, 제주도에서는 원담(혹은 갯담)이라고 부른다. 원담 명칭은 지역에 따라서 다르다.
대정읍, 제주시: 원담, 조천, 구좌, 성산: 갯담 - P84

일곱, 용천수를 둘러싼 물통담 - P86

여덟, 섬 전체를 둘러싼 만리잣담
최대의 돌담은 만리잣담인 환해장성이다.
- P86

여자의 섬
정말 남자보다 여자가 많을까 - P92

제주는 아득히 먼 바다 가운데 있어서 수로로 9백여리고 파도가 사납기 때문에 공물실은 배와 장사하는 배가 끊임없이 오가는 가운데 표류하고 침몰함이 열에 다섯이나여섯 가량 됩니다. 제주사람으로서 앞서 가다 죽지 않으면 반드시 뒤에 가다 죽습니다. 그러므로 제주 경내에는 남자 무덤이 매우 드물고 마을에는 여자 많기가 남자의세 배입니다. 부모된 자가 딸을 낳으면 반드시 이 아이가 내게 효도를 잘 할 아이라고 말하고, 아들을 낳으면 이 아이는 내 자식이 아니고 고기밥‘이라고 말합니다.
최부, 《표해록》 - P92

태풍이 지나간 후 해녀들이 높은 파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바다에 나가 파도에 밀려온 해초를 목숨 걸고 ‘건져내고있다. 1980년대 중반 안덕면 사계리 해안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사진) - P99

강인한 제주여성의 슬픈 역사 - P100

장가 조차 못가는 포작(作)은 누구일까. 포작은 《조선왕조실록》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때로는 포작간, 포작인, 포작한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포작은 제주도뿐 아니라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를 비롯해 황해도 등지로 숨어들어갔다. 포작은 고기잡이와 해산물 채취를 주업으로 남도 연안을 돌아다니며 살아가는 제주 출신 남자 어부다. 포작이 깊은 바다에서 전복을 잡아 진상하는 역할을 맡았다면, 해녀는 미역 등 해조류 채취에 전념했다. 포작과 잠녀가 부부로가족을 구성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 P101

내가 진심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사회에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일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버트란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 P103

대정에 귀양 온 김정희는 은혜의 빛이 여러 세대로 이어진다는 의미의 ‘은광연세(恩光世)‘ 라는 글로 뜻을 기렸다. 재물을 잘 쓰는 자는 밥 한 그릇으로도 굶주린 사람의 인명을 구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썩은 흙과 같다. - P110

제주 근현대사가 빚어낸 성비 파괴도 ‘여자 많은 제주도신화‘를 창조하는데 기여를 했다. 그러한즉, 삼다라고 하여 여자 많음을 어찌 한가롭게 자랑만 할 수 있으랴.
- P115

귤의 섬
원한의 과일에서꿈의 과일로 - P117

행실을 삼가지 않는 무리가 스스로 해외임을 믿고 함부로 탐욕스럽게 빼앗고 백성을대할 때의 행동이 무리하매 섬백성이 원통한 마음을 펴지 못한다. 한번 서울에 가서 조금이라도 괴로운 사정을 위에 알리고자 하지만 수령이 자기의 악행이 알려짐을 싫어하여 물건을 가지고가는 자를 제외하고 섬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를 금하고 있다.
김상헌, 《남사록》 - P117

천년 이상 지속된 원초적 플랜테이션 - P118

제주도에서는 같은 민족이지만 이와 같은 원초적 플랜테이션이 근 천년 이상 지속되었다. 1894년에 이르러서야 감귤 진상이 해제되었음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한즉 아름다운 감귤에는 제주 사람의 보이지 않는 눈물이 배어 있으며, 감귤의 역사를 이해함은 곧바로 본토와 제주도의 상관관계를 이해하는 첩경이다. - P120

귤나무는 고통나무 - P120

박정희는 1961년 9월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자격으로 제주도를 방문해 서귀포의 감귤농원을 시찰했다. - P130

토종감 뷔페를 고대하며 - P131

2004년 1월 15일, 제주항에서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다. 한국 국적 킹스기호에 북한으로 보내는 감귤 2500톤을 선적했다. 제주도와 남북협력 제주도국민운동본부‘는 1998년 100톤을 보낸데 이어 해마다 감귤을 실어 보냈으며주로 파나마 선적을 이용했다. 아리랑공연 관람차 평양에 갔을 때, 그 귤을 먹어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너무 귀하고도 귀해 그만 배급받은 그 굴을 차마 먹지 못하고 바라만 보다가 끝내 썩히고 말았다고 한다. 귤나무를 구경도 못한 북녘에서 받아들이는 귤에 관한 태도는 남녘사람과 다르다. 과잉생산으로 남아돌아서 버려지는 감귤이 가난한 북한 사람들 식탁에서 편안하게공유될 날을 기다려본다. - P134

곶자왈과 숲의 섬
곶과 자왈이 숲을 이루다 - P135

인간의 눈에 침묵의 숲으로 다가올 뿐, 숲에서는 매일매일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나무와 풀이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는 거친 싸움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식생이 안정적으로 갖추어진 숲에서는 일종의 휴전협정이 맺어져 있다. 비교적 안정적 조건에서 서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며(차마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리라!)숲의 공동체를 이끌어나가고 있다.
펠릭스 (Felix R. Paturi), 숲 - P135

모든 숲 속의 빈터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 P136

생태환경의 허파
곶자왈은 ‘덩굴과 암석이 뒤섞인 어수선한 숲‘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시덤불과나무들이 혼재한 ‘곶‘과 토심이 얕은 황무지인 ‘자왈‘이 결합된 단어다. - P139

숲이 사라지면 물도 사라진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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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력의 시대에 바람이 없었던들 대항해가 불가했으며 자연과 문명의 씨앗을 실어나르지 못했을 것이란 결론이다. 멜라네시아에서 폴리네시아, 심지어 이스터섬에 이르는 장대한 대항해는 바람의 길그 자체였다. 태평양문명만 그러한가?
- P12

제주의 역사 동력 역시 바람이었다. 한반도에서 제주도만큼 바람의 길에 절대적 운명을 건 공간이 또 있을까. 물론 육지의 그 어떤 항로도 바람 없이는 불가했다. 그러나 바람이 불러온 문명 교류와 전파의 강도에서 제주라는 섬을 능가할 수 없다. - P12

제주의 바람은 문명의 네트워크 - P13

저 멀리 바다 건너 봉래(蓬), 방장(大), 영주(臟)의 삼신산(三神山)에 신선이 사는데, 동남동녀를 데리고 가서 모셔오고자 합니다. 시황은 크게 기뻐하여 동남동녀 수천을 뽑아 그에게 주고 바다로 나가 신선을 찾아오게 했다.
- 《사기》 진시황본기 - P13

서복의 전설은 중국, 탐라, 일본 사이에 고대의 바닷길이 있었음을 증명한다.(서귀포 서복기념관) - P15

탐라순력도에 수록된 한라장촉 (1720) 에는 제주도는 물론이고 조신 남해안, 중국 영파 · 소주 - 양주 · 산동, 일본과 유구, 심지어 베트남 · 말레이반.
도·태국이 명기되었다. 제주도에서 부는 바람의 길은 이처럼 바람만큼이나 강하게 뻗어나갔다. 제주도가 항상 본토의 지배 하에만 있었던 것 같은 육지중심사관에서 벗어나야한다. - P16

바람이 빚어낸 폭낭의 미학 - P18

1932년 해녀 투쟁을 다룬 현기영의 소설 제목은 《바람 타는 섬이다. 너무도 적절한 제목이다. 혹시라도 제주도를 따스한 남쪽나라 정도로 안다면 오산이다. - P18

여우가 하루에도 수십 번 시집을 가는 섬이 제주도다. - P18

기후는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하기도 하여 변화무쌍하다. 바람은 따뜻한 것 같지만 사람에게는 심히 날카로와 사람이 입고 먹는 것을 조절하기가 어려워서 병 나기가 쉽다. 구름과 안개가 항상 자욱하여 개인 날이 적고, 눈먼 바람과 괴이한 비가 때도 없이 일어난다.
- 김정, 《풍토록》 - P18

한라산 북사면은 북풍이 강하기 때문에 나무가 남향으로 심하게 편향되어있다. 바람이 강하게 불 때는 해수가 비 오듯 흩날리고, 해안 초목은 모두 소금기에 절여 있을 정도다. 한라산 북쪽은 강한 바람으로 하늘과 바람이 뒤집히는 듯해도 남쪽은 세초도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바림이 약하다.
- 임제, 남명소승) - P18

임제의 기록은 편향수(偏向)와 조풍해(朝風害), 바람의 지역차 등을 잘 기술한다. 실제로 제주도에는 바람 타는 나무들이 서있다. 이름하여 풍향목(風向木), 김수영의 시 풀잎에 바람이 불면 잠시 엎드리는 풀이 등장하지만, 풍향목은 엎드리기를 거부한다. 바람에 맞서는 행위는 그 저항의 강도 만큼이나 충격도 크다. 저항하던 나무들은 바람 반대 방향으로 몸을 굴절시켜 풍향목으로 변신한다. - P20

중심을 잡고 완강하게 버틴다. 해풍 탓에 제주도 폭낭은 대체로 바다에서 한리산을 향한다. 한마디로 제주도 폭낭은 ‘폼나는 나무다. 바람으로 인한 고통의 댓가로 멋진 나무가 되었다. - P20

제주도 바람은 무섭고 섬뜩하기도 하다. 바람이 가장 강한 한경면 고산리의 최대 관측 풍속은 초속 60미터. 아름드리나무가 순식간에 뿌리 뽑히는 가공할 위력이다. 비양도같은 협재의 앞섬에서 건너오는데도 돌풍이 불어 난파하기도 한다. - P23

《조선왕조실록》 영조 38년(1768) 9월 조에, 포한(어부) 42명이 비양도에서 공납에 소요될 대를 베고 돌아오는 길에 바람을 만나 배가 뒤집힌 사건을 보면 코 앞에서 엎어진다‘는 말이 실감된다. 태풍은 수시로 제주도를 들이친다. - P23

바람은 특히나 오름에서 강하게 감지된다. 몸 가릴 곳이 없는 오름에서는 늘바람이 차다. 샛별오름을 오르니 무덤가에 억새꽃이 만발했다. 샛별오름은 최영 장군이 횡포와 반란을 일삼는 목호(牧胡)의 난을 진압한 곳이다. 죽은 영혼들이 일어서려는가, 힘차고도 힘차게 꽃이 흔들린다. - P23

제주도에는 특이한 바람도 많다. 산방산 넘어 곧추 내리지르는 동남풍 산방산내기는 뫼오리바람(자나미)이라고 하며 농작물을 말리고 바다 돌풍을 일으킨다. - P23

성산포 신양리 방뒤코지에서 터져 나오는 들바람, 농부에게 공포를 안기는 서풍인 섯가리는 햇볕 쨍쨍한 날 파도를 몰아쳐서 농작물을 까맣게 태워 삽시간에 초토화시킨다. 
- P25

회오리바람인 도이주제, 갑자기 일어나는 폭풍인 강챙이, - P25

파도가 부풀어 오르며 덮치는 동풍인 겁선대,  - P25

명주실처럼 부드러운 맹지바람,지름새, 실바람 등 제주도에는 바람의 종류만 수십 가지다.  - P25

그래서 토박이학자김순이 선생은, ‘제주의 키워드는 바람‘, ‘제주문화는 총체적으로 바람의 산물‘이라 고백한다.  - P25

바람이야말로 끊임없이 시달리면서도 옹골찬 뿌리를 깊게 내린 제주문화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 P25

초가지붕에 담긴 뜻은 - P25

초가지붕을 새로 얽어매어 둥글게 만든 것도 바람 때문이다. 바람이 세찬 날에 바람이 둥근 지붕을 타고 넘어 가능한 저항을 덜 받고 빠져나가게끔 둥글게만들었다. 직선으로 밀어닥치는 맞바람을 덜 받게끔 구부정한 돌담으로 만든 올레도 선조들의 지혜였다. 풍토가 모질면 모진만큼 인간의 지혜와 대응전략도 발전하는 법이다. 비양도 사람의 바람 이용법을 보자. - P25

바람이 불면 오름의 들풀이 살아난다(따라비 오름). - P27

제주 시인들이 관용어처럼 많이 쓰는 시어도 바람이다. 바닷바람, 산바람.
들바람, 솔바람, 저녁바람, 바람소리, 바람으로 오는 어떤 신화...... 바다와 섬과바람이 서로를 웅켜잡고 하나가 되는 곳이 제주이기 때문에, 시인인들 선택의여지가 있으랴. - P28

바람신에게 안녕을 빌다 - P28

매우: 매화꽃 필무렵 양자강 유역에 내리는 비 - P30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거느리고 온 풍백(伯), 우사(兩.
운사)의 전통, 특히 바람을 상징하는 풍배 전통이 제주도에서는 이직도 전승중이다.
- P30

화산의 섬
하로산또를 모독하지 마라 - P39

정상이다. 사방으로 웅장하고 환상적인 장관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섬을 지나 저 멀리바다 너머로 끝없이 펼쳐지는 파노라마였다. 제주도 한라산처럼 형용할 수 없는 웅장하고 감동적인 광경을 제공하는 곳은 지상에 그렇게 흔하지 않을 것이다.
- 지그프리트 겐테(S. Genthe) - P30

제주목사로 재직하던 아버지를 찾아왔다가 남명소승을 남긴 백호 임제,
임금의 명으로 백록담에서 한라산제를 지내고《남사록》을 남긴 김상헌, 존자암에서 하룻밤 자고 백록담 등반을 완수한 김치의 유한라산기》, 이형상 제주목사의 산행기가 담긴 《남환박물》, 한라산 등반에 강한 의미를 부여하며 가마를 타고 올랐던 이원조 목사, 척사운동으로 유배 왔다가 유배가 풀리자 등반에나섰다가 《유한라산기》를 남긴 최익현, 독일인으로 백인 최초의 등반을 실현한 지그프리드 겐테, 1936년 1월 1일 경성제국대학 등반대에 의해 이루어진최초의 동계등반 및 조난사건, 1937년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최초의 집단 산행에 참여한 이은상의 탐라기행, 1938년 여름에 한라산 백록담에 오른 정지용 시인, 제주도민으로써 1937년에 한라산에 오른 제주농고 학생들의 등반 기록 등을 염두에 둘만하다. 동시에 4-3으로 인한 오랜 기간의 한라산 입산금지령도 기억해둘만하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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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탐라학 개론 인가
"제주기행‘이라는 대중적 제목을 달았지만, 이 책은 ‘키워드로 읽는 탐라학 개론‘
혹은 ‘탐라 인문교양서‘다. 제주를 알려주는 수많은 책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탐라의 내재적 관점에서 기술된 책은 드물다. 제주와 탐라의 차이는 무엇인가. 역사적 아이덴티티의 문제다. 육지에 딸린 복속된 섬‘이냐, 아니면 ‘바다로 진출한섬‘ 이냐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변방으로 바라보는 육지부 · 중심부 시각과 반대되는 탐라적 정체성이 요구된다. 엄밀히 말해 제주도 역사는 있으되 기록은제한적인 ‘유사무서(有史無書)‘다. - P6

"현재 제주는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의 유목민적 소비주의로 들끓고 있는 중이다. (…) 이 시점에서 누군가가 산업경제전략이라는 실패한 유럽사상을 넘어선 사상을 펼쳐보여 주어야만 한다. 한라산은 나에게 각성한 저개발‘이라는사상의 영감을 안겨주었다. (…) 전 지구적 규모의 혁명의 바람을 불고 오기를바라마지 않는다. 주문을 외자!"
네메스의 의견에 동의한다. 유목민적 소비주의가 팽배해 있는 상황에서 각성한 저개발을 꿈꾸어 본다. 세상의 어디나 섬은 제한적 공간이며, 연약한 피부처럼 조그마한 침범에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조금 느리게, 천천히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하이오주 톨레도개학 데이비드 네메시스 지리학 교수

유목민적 소비주의? 무슨 말인가? 대체 - P9

바람의 섬
물마루 너머 바람 타는 섬 - P11

기후는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하기도 해 변화무쌍하다. 바람은 따뜻한 것 같지만 사람에게는 심히 날카로와 사람이 입고 먹는 것을 조절하기가 어려워서 병 나기가쉽다. 게다가 구름과 안개가 항상 자욱하여 개인 날이 적고, 눈먼 바람과 괴이한 비가때도 없이 일어난다.
-김정, 제주풍토록 - P11

제주에는 언제나 바람이 분다 - P12

제주공항에 도착하면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는가? 바람이 아닐까. 늘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지않는 날이 이상할 정도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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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도토스는 이집트를 강성하게 만들기 위해 네코 2세가행한 세 가지 일을 거론한다. (헤로도토스, 299~301) - P158

첫 번째는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판 일이다. 19세기에 개통된 수에즈운하의 원조라 할 수 있다. - P159

두 번째로는 삼단갤리선 함대를 건조한 일이다. 함대의 일부는 지중해에서, 일부는 홍해에서 활동했다. - P159

세 번째 일은 아프리카 회항을 지시한 일이다. - P159

고대 지중해와 중동 지역의 역사는 페르시아와 그리스,
카르타고와 로마 등 강대 세력들 간 패권 경쟁의 역사 그리고 제국의 역사로 이어진다. 다이내믹한 역사 발전이 군사적 충돌로 귀결된 것이다. 최초의 해양 제국의 면모를보인 페르시아와 그리스 세계의 충돌이 첫 번째 국면이다. - P165

페리클레스의 말대로 "선박조종술은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예술이다. 이것은 노는 시간에 대충 연마하면 되는 종류의일이 아니다." (Paine, L., 95)

그런 정도의 무력 선단을 처음 갖춘세력은 기원전 6~기원전 5세기 초의 페르시아다. 말하자면 상설 해군은 제국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야 가능한 일이다.

페르시아제국과 그리스 세계는 결국 충돌을피할 수 없었다. 다만 이를 두고 ‘서구 문명권과 동방 문명권 간의 충돌‘ 식으로 규정해서는안 된다. 통념과 달리 페르시아군에는 수많은그리스인이 복무하고 있었다. 양쪽 세계가 완벽하게 나뉘는 게 아니라 상호 틈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지중해 중부와 서부의 여러 강국들이 운명적으로 시칠리아에서 만나게된다. 왜 그럴까? 시칠리아는 한편으로 동부지중해 세계와 서부 지중해 세계를 나누고, 다른 한편 이탈리아에서 아프리카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브로델 1권, 140) 즉, 동서 방향으로나 남북 방향으로나 지중해 세계의 여러세력이 만나고 충돌하는 중간 지점이다. 지정학적으로 핵심 위치에 있는 이 섬을 차지하는것이 강대국 간의 핵심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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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이키아(apoikia)를 식민화‘ 라고 번역하면 이 활동이 지니고 있는 원래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결과가 된다. 굳이 하나의 용어를 정한다면 디아스포라(diasporas, 유대인의 이산을가리키는 Diaspora와 구분하기 위해 소문자 · 복수형을 쓴다)라는 말이 더 낫다. 이 말은 원래 바람결에 종자를 흩뿌리는 행동을 나타낸다. 고대 지중해 사람들이 확산해갈 때 그 형태는매우 다양하며, 개인적일 수도 있고 집단적일 수도 있다.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은 상인, 장인, 용병 등 부류가 실로 다양했다. 어떻든 국가가 주도하여 의도적·계획적으로 주민들을 내5보내 영토를 차지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 P153

호메로스로부터 알렉산드로스 시대까지그리스 혹은 더 크게 보면 지중해 세계 전체가 여러 방향을 향한 항구적인 움직임의 세계였다.
- P154

이런 허구적 설명의 뒤에는 페리클레스 시절에 만들어진‘우리(문명)‘와 ‘그들(야만)‘ 간의 대립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이 작용한다. - P155

다시 정리하면, 지중해 세계는 지리적 환경에 영향을 받는단일한 구조가 아니며, 페니키아와 그리스 민족의 해상 활동을두고 해양 식민 ‘제국‘을 건설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Antonaccio, 220~223) 그보다는 올리브기름, 포도주, 직물, 도자기, 철, 은 같은  상품이 이동하고,  건축, 문자, 시가 등 문화 자산들이 전달되는 해상 네트워크들의 중첩으로 그리는 게 타당하다. 
- P156

지중해 해안 지역은 일종의 세포막(membrane)이다. 선박이 해안까지 오면 강들이 모세혈관 역할을 하여 상품과 문화 자산들을 내륙으로 흡수해간다. 이렇게 해서 물질문화, 관습, 이데올로기, 음식 그리고 사람의 유전자까지 전파되어갔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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