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지나간다.
덧없다.
무정하다.
내가 이 세상 어디에 무슨 소용인가.
때로, 써 놓은 내 글 속으로 들어가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나는 원한다. - P5

풀씨를 어둠 속으로 던지다
내가 사는 마을은 산과 산사이로 강물이 흐르는 곳이다. 마을이 작다.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진다. 뒷산에 바짝 붙은 우리집은 더 일찍 해가 진다. 한겨울 세시반이면 산그늘이 집으로 내려온다. - P17

바람이 왔다. 어제와는 다른 바람이.
나는 그 바람 속을 걸어갔다. - P20

몸이 활발하다. 새벽에 비가왔다. 빗방울은 차갑지 않았다.
디딤돌 파인 곳으로 물이 고여 있다. 어린 빗방울들이 만드는파문을 본다. - P20

글을 쓰다가, 강가에 서 있는
느티나무를 내다보았다.
실가지들이 꼿꼿하고 팽팽하다.
어제와는 다른 색을 가져왔다.
봄이 내 앞으로 한 발 더 다가왔다.
저 나무는 슬픔을 어떻게 표현할까.
나무 밑으로 강물이 흘러간다. - P21

비를 쫓는 비
다리의 중간쯤을 건넜을 때,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엉성한내 머릿속으로 떨어진다. 곧 시멘트 다리 위에도 빗방울 자국이 툭툭 정확하게 생겨난다. 빗방울이 많아졌다. 느티나무 밑으로 뛰어 들어갔다. - P23

소리가 빨라진다. 소란스럽다. 비가 점점 더 많이 내린다.
빗방울 소리는 절정으로 치닫는 음악 소리처럼 빨라진다.
아무래도 비가 더 쏟아질 모양이다.
비가 비를 강 건너로 쫓는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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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메에 있는 쓰쿠모 류마의 도장이야말로 이른바 상류층이라 주목받는 사람들의 전후 부패와 타락의 결정체였던 것이다.

"그렇군요. 다이도지는 아무리 도모코 씨에게 반했어도 부녀관계인 이상 절대 어떻게도 못 하죠. 거기에 그 남자의 심각한 고뇌가 있었던 거로군요."

하지만 기누가사는 알고 있었다. 오늘의 태양은 저물어도 내일은 또 젊은 태양이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싱그럽게 떠오를 것이라고.

www7.ocn.ne.jp/~yokomizo/haiyaku/jououbati.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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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伊豆)의 시모다(下田)에서 남쪽으로 해상 7리쯤 떨어진 곳에 지도에도 없는 작은 섬이 있어, 그 이름을 월금도(月琴島)*라고 한다.

월금도…….

물론 이렇게 불리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고, 옛날에는 바다 섬이라는 극히 흔해빠진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지금도 그것이 이 섬의 진짜 이름이다.

‘그 아가씨 앞으로 많은 남자의 피가 흐를 것이다. ……그녀는 여왕벌이다. ……접근하는 남자들을 차례차례 죽음에 이르게 할 운명이다…….’

도모코여,
섬으로 돌아가라.
그대가 도쿄에 와 봐야 좋을 일이 없다.
그대의 신변에는 피 냄새가 난다.
그대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도모코여,
섬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두 번 다시 그곳을 떠나서는 안 된다.

패닉이란 그리스의 목양신 판에 사로잡힌 상태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인이 생각한 바에 의하면 사람들이 판에게 사로잡히면 당황해 어쩔 줄 모르고 지독한 공황상태에 빠진다고 하는데, 그러고 보니 그날 호텔 쇼라이소는 분명 판이 사로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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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는 너도 괴물 중 하나잖아."

"적? 적이 누군데."
"자기 자신의 불민함."
"어이, 그런 현학적인 대사는 집어치워. 그보다 당장 우린 뭘 하면 좋지?"

류 님은 전에도 말했듯 인형처럼 아름답다. 교토인형처럼 오목조목하고 섬세하다. 교토인형처럼 차갑고 새침하다. 하지만 이런 타입의 여자들일수록 성적인 욕구는 보통이 아닌 사람이 많은데 류 님도 그런 인상이었다.

아,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센고쿠 데쓰노신, 그도 역시 몽유병자였던 것이다.

그는 서른네다섯쯤 되어 보였는데 이렇다 할 장점이 없는, 말하자면 평범한 생김새를 한 사람이었다. 열차 안의 혼잡함 때문에 후줄근해진 모직 옷에, 이 또한 오래된 것인 듯 낡은 하카마를 입고 있었고 약간 더러워진 펠트 중절모 아래로는 더벅머리가 비어져 나와 있었다. 아무리 봐도 그다지 출중한 생김새는 아니었다. 키도 작고, 평범함을 넘어 궁상맞았다. 나는 한눈에 그가 마을사무소 서기일 거라고 짐작했다.

단지 신경 쓰이는 것은 남자의 눈매였다. 눈만은 아주 아름답고 맑았다. 맑을 뿐만 아니라 예지의 빛마저 어려 있었다. 그렇다고 차갑지는 않았다. 은은한 온화함을 띠고 가라앉아 있었다.

"혹시 당신들, 귀수촌(鬼首村)의 후루가미 댁에 가시는 거 아닙니까?"

이상한 남자가 내민 명함을 보니 긴다이치 코스케(金田一耕助)라고만 적혀 있었다.

이번 사건의 충격이 나오키의 몸 안에 잠복해 있던 병을 유발시킨 모양인지 그는 이른바 조발성치매증이라고, 살아 있는 시체나 마찬가지인 상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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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곤란해. 어쨌거나 제대로 된 상황이란 생각은 안 든다. 미쳤어, 정말이지. 뭐...... 옛날부터 제멋대로인 성격이긴 했지.

하지만 그 운모 속에서 뭔가 영문을 알 수 없는 기묘한 위협이 뜨겁게 엿보이는 게 느껴져, 이 자식 진짜 취한 게 아니군...... 하고 퍼뜩 경계심이 들었다. 나오키도 그런 내 기분을 알아차렸는지 당황해서 눈을 내리깔더니 다시금 위스키를 따랐다.

대상이 되는 실체를 공들여 묘사하는 것은 자연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에도 사상이 없으면 안 된다. 사상이 없는 소설은 실없는 글에 지나지 않는다. 사상이 없는 그림도 마찬가지로 실없는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그림을 보고 모르겠다는 놈이 있는데, 그런 놈들은 사상이 없다는 걸 자백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실은 말이지......."
하고 개처럼 입술을 날름 혀로 핥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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