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대한민국의 주류를 형성해온 사람들이 지워버리려 애쓴 기억들을 되살리는 날이 선 글들이었기에 몇몇 독자분들은 1권을 읽고 시궁창물을 뒤집어쓴 느낌이라는 항의 편지를 보내 주시기도 했다. 그분들께는 내 소년 시절의 길잡이였던 김수영의 절창 ‘거대한 뿌리’의 한 구절로 뒤늦은 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나는 여기에 모인 글들을 쓰면서 누구보다도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사람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는 없지만 이대로 끝낼 수 없는 문제들을 붙잡고 씨름하는 인권단체, 시민단체 활동가들에게 나의 역사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러나 이런 오만한 기대와는 달리 정작 나와 같이 일하는 베트남전 진실위원회의 차미경, 김숙경, 이수효 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의 최정민, 정용욱 님을 비롯한 많은 활동가들께는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듯하는 원고 마감을 맞추어야 한다는 핑계로 내 몫의 일을 못해 오히려 부담만 준 것 같아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나야 안정된 직장에 글을 쓰면 원고료에 인세 수입도 생기지만, 말도 안 되는 활동비와 근무 여건 속에서 자신의 인권은 반납한 채 남들의 인권을 위해 애쓰는 이런 분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는 놋주발보다 더 쨍쨍한 추억을 쌓아가는 축복이었다.

대한민국사 2 | 한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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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용담에 환호하고 박수치던 아이들 중의 하나가 자라서 현대사 연구자가 되어 그 무용담에 가려진 진실의 참혹한 한 단면을 보게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 베트남 역사를 체계적으로 공부해보지는 못했으나, 베트남은 늘 내게 우리 역사를 비추는 마음의 거울이었다.

그 감춰진 역사

미국인들이 노근리를 비롯한 한국전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인정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인 것처럼, 우리가 베트남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진실과 마주서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전하는 마음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 사죄하는 것이지만, 꼭 피해자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한번도 전쟁의 상처를 치유한 적 없이 전쟁을 정당화하고, ‘기념‘해 온 우리 내면의 상처를 극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급보는 오보였다. 오보도 단순한 오보가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만주침략의 길을 닦으려는 목적으로 조선인과 중국인의 감정을 악화시키기 위해 제공한 허위정보에 속아 넘어간 역사적인 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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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350명 전사했어도 격퇴?

우리와 미국은 참으로 특별한 관계를 맺어오고 있다. 두 나라의 기구한 만남은 전쟁으로 시작되었다. 1871년의 이른바 신미양요(辛未洋擾).

이른바 ‘거중조정’(good offices) 조항인데, "만약 다른 열강이 체약국 정부에 대해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대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체약당사국은 그러한 사건에 관하여 통지를 받는 대로 원만한 타결을 위하여 거중조정을 다함으로써 그 우의를 표시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김규식은 "자국의 이타주의 지향성과 민주주의 원칙의 범세계적 적용을 그토록 떠들어온 위대한 미공화국"이 가면을 벗어던지고 "영국·프랑스·일본 등 악명 높은 3대 흡혈귀 국가와 가증할 4강협정을 체결함으로써" 흡혈귀 국가가 되었다고까지 말했다.

학살의 무덤 위에 선 대한민국을 장악한 친일파들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한탄강 일대의 들쥐들이 들녘을 뒤덮은 전사자들의 시체를 파먹고 유행성 출혈열균을 키워갔듯 학살의 무덤 속에서 후천성 반미결핍증 병원균은 걷잡을 수 없이 배양되었다.

2002년 12월14일 시청 앞 집회에서 촛불시위를 처음 제안한 ‘앙마’라는 아이디를 쓰는 청년은 ‘여러분의 오른손을 들어 왼쪽 가슴을 만지면 보이지 않는 손, 바로 여러분의 양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로 일침을 놓았지만, 나는 선후배 동료들이 숱하게 거쳐간 1970~80년대 공안기관의 어두컴컴한 조사실을 떠올렸다.

10년 전 또는 100년 전 범죄행위를 현재 우리는 당당히 우리의 권리로 누리고 있지 않은가? 역사는 그렇게 발전해가는 것이다. 이루지 못할 것 같은 불온한 꿈을 이뤄가면서.

미국의 오만은 국경이 없다. 그래서 우리의 분노도 국경이 없다. 미국의 오만에 상처받은 사람들, 우리는 모두 하나다. 촛불의 힘으로, 아무도 감히 경험해보지 못한 평화의 힘으로 우리는 하나가 되고 있다.

징병제도는 국가와 시민 간의 계약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국가가 시민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다면 국민병제도의 장점을 살릴 길이 없다. 더구나 바람의 아들, 신의 아들, 장군의 아들 등 특권층을 중심으로 병역비리와 기피가 판을 치고, 사람의 아들들과 어둠의 자식들은 현행 징병제가 국민개병제가 아니라 ‘빈민개병제‘라고 비아냥거리는 현실을 언제까지 두고 볼 것인가?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의 발전, 시민사회의 성숙, 경제발전, 남북관계의 개선에 걸맞은 병역의무를 시행하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 현행 징병제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프랑스가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서 국민개병제에 입각한 국민군대를 형성한 성과는 나폴레옹의 유럽 석권으로 나타났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시민계급과 농민계급에 많은 정치적 양보를 하면서 국민개병제에 입각한 징병제도를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에서 징병제도 발전의 역사는 한편으로는 참정권 등 시민적 권리의 확대과정이기도 했다.

징병제도는 국가와 시민 간의 계약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국가가 시민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다면 국민병제도의 장점을 살릴 길이 없다. 더구나 바람의 아들, 신의 아들, 장군의 아들 등 특권층을 중심으로 병역비리와 기피가 판을 치고, 사람의 아들들과 어둠의 자식들은 현행 징병제가 국민개병제가 아니라 ‘빈민개병제’라고 비아냥거리는 현실을 언제까지 두고 볼 것인가?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의 발전, 시민사회의 성숙, 경제발전, 남북관계의 개선에 걸맞은 병역의무를 시행하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 현행 징병제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이런 방대한 군은 1950년대에는 국가예산의 40% 이상을, 1980년대 후반까지 30% 가량을 할당받아 물질적으로 한국사회의 다른 어떤 집단과도 비교할 수 없는 풍요를 누렸다.

상류층 자제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줄줄이 병역면제를 받는 현실에서 우리의 국민개병제는 허울뿐이고, 사실은 ‘빈민개병제’가 되었다는 비아냥거림이 나온 지 오래다. 현역 복무자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폭발 직전이다.

조선의 법제상 양반이란 신분의 개념이 아니라 문반과 무반의 관료를 뜻하는 것이며, 법제상의 신분은 양반을 포함한 양인과 천민만을 구분하는 양천제(良賤制)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하나의 이상이었을 뿐, 시간이 흐르면서 양반은 특권귀족화하였다.

중종대에 이르면 당대의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향교는 군역을 피하려는 자의 소굴이라고 개탄했을 정도로 향교는 교육적 기능을 상실했다. 더구나 군역면제의 특권이 있는 양반들은 평민들이 군역을 피하려고 득시글대는 향교에 자제들을 보내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17세기 이후 사교육기관인 서원이 발달하고, 공교육기관인 향교의 교육 기능이 붕괴한 것도 군역제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비꼬는 말이 아니라 진지하게 차라리 그대로 두는 것이 더 좋다고 말했다. 아전이라는 것들은 일이 없으면 먹을 것이 없고, 일이 있어야 먹을 것이 생기니, 군정을 닦는다고 호적을 재정리하면 아전의 이익이 될 뿐 오히려 농민에겐 부담이 될 뿐이라서, 군정수는 현명한 수령이 할 짓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다산 같은 철저한 개혁가도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정도가 된 것이다.

병역의무의 형평성을 파괴하여 합법적으로 특혜받는 사람들을 양산하거나, 병역의 의무를 진 젊은이들을 정권연장의 도구로 삼은 것이다. 병역특례 제도가 특권층을 위한 수단으로 쓰인 것은 전두환 집권 이후 석사장교 제도가 도입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4개월 훈련에 2개월 전방실습만 받으면 예비역 소위로 제대하는 엄청난 특혜가 있는데 굳이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 서류를 조작하거나 신검 판정을 위해 뇌물을 쓸 일도 없었던 것이다. 말 많은 이 제도는 전두환·노태우 두 군사독재자의 아들들이 혜택을 본 뒤 1990년 대학원 입학자들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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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학살을 거론하고, 맥아더의 동상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게 배은망덕이라고? 입장을 바꾸어 북한이 만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의 동상을 세웠다면 얼마나 꼴불견일까?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지만,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는 노병의 동상을 보며 나는 자꾸 숨이 막힌다.

"양쪽은 마치 휴전이 아니라 전쟁선포에 합의하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보도했다. 정전체제하의 또 다른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제는 전쟁의 달 6월을 기념하지 말고 불완전하나마 전쟁의 정지를 가져온 7월을 기억하자. 2003년은 정전협정 체결 50돌이 되는 해다. 우리는 그 불완전한 50돌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가해자 쪽인 주한미군이 뻔뻔스럽게 나온 데는 역사적·구조적 배경이 있다. 약칭으로는 주둔군 지위에 관한 협정 또는 소파(SOFA·Status of Forces Agreement), 정식명칭으로는 ‘대한민국과 아메리카 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이라는 아주 긴 이름의 협정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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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구 교수(姜禎求, 1945년 3월 18일~)는 대한민국의 사회학자이다.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후학을 양성하면서 통일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3월 18일(79세)
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창녕군 출생

김대중 정부·노무현 정부 시절
2001년 8월 17일 8·15 축전 때 만경대에 들러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 위업 이룩하자.‘라고 써 친북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 방명록으로 말미암아 그는 국가보안법상의 찬양고무죄에 저촉돼 구속 기소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만경대의 사립문

강 교수는 만경대혁명학원을 떠올리고 만경대정신을 방명록에 썼지만, 나는 아마도 김일성이 회고록에서 서술한 바 있는 만경대의 사립문 이야기를 썼을 것이다. 김일성은 “이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하직하고 고향을 떠날 때에는 모두들 나라를 찾고서야 돌아오겠다면서 씩씩하게 사립문을 나섰”지만 “그들 가운데에서 조국으로 돌아온 것은 나 하나뿐이었다”면서, “나는 그때부터 남의 집 사립문에 들어설 적마다 이 사립문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사람은 몇이며 돌아오지 못한 사람은 얼마일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하였다. 이 나라의 모든 사립문들에는 눈물에 젖은 이별의 사연이 있고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혈육들에 대한 목메인 그리움과 뼈를 에는 상실의 아픔이 있다”고 회고했다. 이국 땅에서 쓸쓸히 병사한 아버지 어머니, 유해도 찾지 못한 전사한 동생 철주, 그리고 옥사한 작은삼촌 김형권, 13년 8개월의 오랜 감옥생활 끝에 죽기 직전 병보석으로 풀려난 외삼촌 강진석 등을 그리면서 김일성은 만경대의 사립문을 보며 독립을 찾기 위해 나선 모든 가정의 사립문에 서린 아픔을 그렸던 것이다.

필자가 만경대의 사립문을 보며 살아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목메인 그리움과 뼈를 에는 상실의 아픔’을 떠올리며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면 필자도 결코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락없이 김일성 일가의 ‘날조된’ 항일투쟁을 찬양한 몸이 되었을 터이니 말이다.

대한민국사 1 | 한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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