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에게는 군자의 도가 네 가지 있었다. 몸소 행하면서 공손했고, 윗사람을 섬기면서 공경스러웠고, 백성을 양육하면서 은혜로웠고, 백성을 부리면서 의로웠다."

자산이야말로 군자인 신하가 갖춰야 하는 덕목을 모두 갖췄다는 칭송에 해당한다. 행기이공行己以恭, 사상이경事上以敬, 양민이혜養民以惠, 사민이의使民以義가 그것이다.

"정나라는 외교사령外交辭令을 만들 때 먼저 비심裨諶이 초안을 만들고, 유길游吉이 그 내용을 검토하고, 자우子羽가 이를 다듬고, 마지막으로 동리東里에 사는 자산이 윤색을 하여 완성시켰다."

"귀신은 조화의 자취이다. 공자가 ‘괴력난신’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귀신이 비록 바르지 않은 것은 아니나 사람들이 만물의 이치를 꿰지 않고는 그 뜻을 쉽사리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벼이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다."

하루는 자로가 귀신을 섬기는 방법을 묻자 공자가 힐난했다.

"사람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능히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자로도 물러서지 않았다.
"감히 죽음에 대해 묻고자 합니다."
공자가 거듭 책망했다.
"삶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는가!"

주희가 점복을 맹신하며 괴력난신을 완전히 뒤집어 해석할 때 이미 그런 불길한 조짐이 드러났다. 성리학은 윤리・도덕은 물론 귀신과 관련한 괴력난신과 사후의 세계까지도 탐구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고는 이를 실학實學이라고 불렀다.

이는 내심 괴력난신을 꺼린 공자의 학문을 허학虛學으로 간주한 결과다. 주희가 실학 내지 이학 및 도학 등으로 칭한 성리학이야말로 동서고금의 사상사를 통틀어 허학의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비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덕을 닦느니만 못하다."

하나는 맹자가 주장한 이른바 ‘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이다. 하늘의 이치를 뜻하는 천도가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을 뜻하는 윤리・도덕적인 인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에 기초한 것이다.

이와 대비되는 것이 순자가 얘기한 이른바 ‘천인상분설天人相分說’이다. 만물이 순환하며 운행하는 천도의 이치는 자연의 법칙이고, 세상의 흥망성쇠와 치란 등의 순환 이치는 인간 자신의 현우賢愚와 근만勤慢 등에 따른 것으로 천도와 인도는 서로 다르다는 입장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천인합일설은 진리의 절대성을 전제로 한 도덕철학의 입장이고, 천인상분설은 진리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매우 과학적인 접근임을 알 수 있다.

관중을 비롯해 공자와 순자가 바로 이런 입장에 서 있었다. 인간의 이지理智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 결과다. 이들은 동서를 통틀어 인간학 내지 인문학의 효시에 해당한다.

중국이 아편전쟁을 계기로 반식민지의 길로 치닫고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도 천인상분설의 과학 정신을 이단시한 후과로 볼 수 있다.

묵자는 원래 유가를 공부하다가 도중에 독립해 묵가를 완성한 인물이다. 공자의 ‘인’에 ‘의’를 접목시킨 것은 그의 창견이다. ‘인의’가 『논어』에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있는 데 반해 『묵자』에 29번이나 나오고 있는 게 그 증거다.

맹자는 불의한 군주는 일개 사내에 불가하므로 보위를 뒤엎고 주살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사상 최초의 폭군방벌론이다. 묵자는 천지를 거스른 나라와 백성에게 천화가 떨어지는 근거로 의를 들먹였다. 겁나는 얘기다. 제후들이 볼 때 천화가 반드시 제후의 머리 위에만 떨어지는 게 아닌 만큼 일면 여유를 보일 여지가 있다.

우리 자제를 자산이 잘 가르쳐 줬네 我有子弟, 子産誨之
우리 농토를 자산이 크게 늘려 줬네 我有田疇, 子産殖之
자산이 죽으면 누가 그 뒤를 이을까 子産而死, 誰其嗣之

"누가 자산을 죽이면 기꺼이 도와주리라"며 원성을 퍼붓던 정나라 백성들은 3년 후 자신의 자식들을 잘 이끌고 재산을 크게 불려 준 자산에게 칭송을 아끼지 않으며 그의 사후를 염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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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맹자』 「진심 하」 편에서 "백성이 귀하고, 사직은 다음이고, 군주는 가볍다"고 역설했다. 이른바 ‘귀민경군貴民輕君’ 사상이다. 안영의 행보와 닮아 있다.

"어진 사람의 말은 그 이로움이 얼마나 광대한가. 안자의 한마디 말에 제경공이 형벌을 줄였다."

"오직 예禮만이 이를 막을 수 있습니다. 예에 부합하면 사적으로 베푸는 은혜는 국가 단위에서 베푸는 은혜만 못합니다. 그리되면 백성들은 함부로 이주하지 않고, 농민은 땅을 떠나지 않고, 상공인은 하는 일을 고치지 않고, 선비는 도의를 벗어나지 않고, 관원은 직무를 태만히 하지 않고, 대부는 공가公家의 이익을 사적으로 취하지 않게 됩니다."

"자산에게는 군자의 도가 네 가지 있었다. 몸소 행하면서 공손했고, 윗사람을 섬기면서 공경스러웠고, 백성을 양육하면서 은혜로웠고, 백성을 부리면서 의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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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를 비롯한 유가는 명신을 얻어 덕정을 베풀면 군주는 베개를 높이 베고 자는 고침이와高枕而臥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한비자를 비롯한 법가는 상과 벌을 제대로 사용해야 고침이와가 가능하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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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하나의 완전한 인간이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 앞에 누워 있었다.
감동에 찬 나머지 나는 불멸의 영혼이 이 육체에서 떠나 버렸다는 사실을 잠시 동안 잊었다.” _ 요한 페터 에커만 “
『이탈리아 기행』은 장소, 사람, 물건에 대한 묘사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중요한 심리학적 기록이다.” _ W. H. 오든

1. 작가를 말하다
Johann Wolfgang von Goethe
요한 볼프강폰 괴테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 등 불후의 명작을 남긴 문학가이자 독일 바이마르 공국의 정치인, 철학자, 과학자이다. 괴테는 근대 독일의 문화적 기틀을 다진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괴테는 어려서부터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불어, 영어, 이탈리아어 등을 배웠고, 그리스 로마의 고전 문학과 성경 등을 읽었다. 괴테는 16세 때 아버지의 뜻에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에 진학해 법률을 공부했다.
그러나 괴테의 관심은 오직 문학에 있었다. 그는 법학 공부는 뒤로하고 시학 강의를 즐겨 듣고 예술가들과 사귀는데 몰두했다. 21세 때 다시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 들어가 법률을 공부했으며, 이듬해 학위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변호사 개업을 했다. 그러나 문학에 대한 열정은 놓지 않았다.
괴테를 유럽 전역으로 유명하게 만들어 준 작품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이 작품에는 친구 약혼녀 샤를로테 부프를 짝사랑하다 실연당한 괴테의 체험과 친구 부인에게 연정을 품다 자살한 공사 서기관의 실화가 담겨 있다. 이 소설은 당시 유럽 젊은이들 사이에 절망적인 사랑으로 인한 자살을 유행시키기까지 했다.
괴테는 1775년 칼 아우구스트 공의 초청으로 바이마르로 이주하여 그곳을 문화의 중심지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10여 년간 행정가로 국정에 참여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고 식물학, 해부학, 지질학 등 모든 분야의 학문에 관심을 기울 였다.
이탈리아를 여행한 후, 괴테는 바이마르로 돌아와 『파우스트』 2부를 쓰기 시작한다.
1805년 오래도록 우정을 나눈 실러의 죽음으로 “존재의 절반을 잃은 것 같다.”라고 말할 만큼 큰 충격에 빠지지만 창작 활동과 연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2. 작품을 말하다
Italienische Reise
『이탈리아 기행』은 새로운 작가 정신을 찾아 떠난 혼자만의 여행 기록으로, 자연과 인간, 예술에 대한 괴테의 깊은 성찰을 담은 최고의 여행 문학으로 손꼽힌다.
1775년 바이마르 공국의 장관으로 초빙된 괴테는 오랜 공직 생활로 고갈된 창작력을 충전하기 위해 여행을 계획한다. 유럽 문명과 예술의 원천을 찾아 1786년 9월부터 1788년 4월까지 이탈리아에서 머물다 그해 6월 독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은 괴테에게 선물같은 시간이었다.
괴테는 베네치아와 로마,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여행하면서 수많은 편지를 썼고, 이후이 편지를 토대로 『이탈리아 기행』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의 예술과 역사, 식물과 풍광,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기록한 일기라 할 수 있다. 괴테가 정신적 위기를 극복하고 위대한 작품을 쓸 수 있는 영감을 얻게 되는 과정도 고스란히 담겼다.
카르스바트에서 로마까지 여정을 담은 제1부는 시간 순서에 따라 쓰였고, 나폴리에서 시칠리아까지 여정을 담은 제2부는 주로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제3부는 두 번째 로마 체류기로 일상의 일이나 생각은 편지로, 특별한 사건은 보고 형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3. 세계를 말하다

그랜드 투어
17세기 이후 유럽 국가들은 식민지에서 유입되는 재화를 바탕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해졌다. 계몽주의 사상이 널리 퍼져 영국과 독일의 귀족과 상류층 사이에서는 교육 과정의 일부로 해외여행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특히 교육의 마무리 단계로 후계자를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보내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두어 해 동안 선진 문화를 배우도록 했는데, 이를 ‘그랜드 투어’라고 불렀다.
그랜드 투어는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크게 유행했는데 볼테르, 몽테스키외, 스탕달 등 당시 유럽 계몽주의의 대문호들까지 동참하면서 유럽 전체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은 ‘그랜드 투어’와는 그 성격이 달랐다.

비버공화국
괴테는 베네치아의 첫인상을 ‘비버공화국’이라고 표현했 다. 이것은 베네치아의 수로와 지형, 주거지 모습을 ‘비버’ 에 비유한 것이다.
비버는 하천과 가까운 곳의 나무를 앞니로 갉아 넘어뜨려 흙이나 돌을 보태 댐을 만들고, 못의 중심부에 진흙을 바른 나뭇가지로 돔 모양의 집을 짓는다.
베네치아 사람들이 외적의 침입을 피해 갯벌의 높은 부분에 나무로 말뚝을 박아 지반을 만들고 그 위에 광장과 골목, 주택을 건설한 모습을 ‘비버’에 빗댄 것이다.

이탈리아 기행 : 세계문학그림책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원작 · 김재홍 저자(글) · 한지영 그림/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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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놀라운 여행을 하는 목적은
나 자신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많은 것들을 보고 겪고 느끼면서
참다운 나 자신과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1786년 9월 3일 새벽 3시, 나는 아무도 모르게 휴양차 머물던 카르스바트를 조용히 빠져나왔다.
남국으로 향하는 나의 긴 여행을 누구라도 알게 된다면 꽤나 성가실 터였다.
여행의 동반자들을 꺼낼 때가 왔다.
아름답고 따뜻한 나라로 데려갈 자유로운 공기가 나의 시상을 부풀리고 이끌었다.

이 놀라운 섬의 도시 베네치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운명이었다.
나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주신 곤돌라 모양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던 것이다.
수로는 베네치아인에게 도로이자 광장이자 산책로이다.

드디어 라파엘로의 <성 체칠리아>를 보았다.
나는 그것이 그의 작품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는 사라지더라도 이 그림만은 진정 영원하기를 소망하고 싶었다.

드디어 세계의 수도 로마에 도착했다.
모든 것이 상상했던 그대로인 동시에 새로웠다.
성인들을 위한 축제인 만성절을 로마에서 맞이하기 위해 르네상스의 고향 피렌체도 세 시간밖에 머물지 않았다.
축제는 소박했지만 미사는 꽤 마음에 들었다.

원형 극장과 판테온, 카피톨리노 언덕, 성 베드로 성당의 앞마당, 베로나 광장도 달빛에 비친 모습은 꼭 보아야만 한다.
로마에서는 태양도 달도 다르게 비추는 모양이다.

만월의 달빛 아래 로마를 거니는 아름다움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나폴리, 여기는 낙원이다.
로마에 있으면 공부하고 싶어지는데 여기서는 그저 즐겁게 지내고만 싶어진다.
비옥한 땅과 풍부한 산물이 느긋하고, 행복한 나폴리 사람을 만들어 낸 듯하다.
이곳 사람들은 늘 말한다.
"나폴리를 보고 나서 죽어라!"

나폴리에는 ‘무위도식하는 떼거리’가 있다.
하지만 내가 이른 아침부터 관찰한 남국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하루 종일 일에 매달리지 않으면 만사가 끝장난다는 북방인의 편견일지 모른다.

친애하는 벗들에게 소식 전합니다.
고백컨대 나폴리를 떠나는 것은 고통스러웠지만 저는 그제 로마에 잘 도착했습니다.
저는 점점 더 내면으로 깊숙이 빠져들어나 자신의 고유한 것과 내게 생소한 것들을 구분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티슈바인이 그리고 있는 제 초상화는 잘 되어 가고 있습니다.
앙겔리카 부인도 제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신통치 못합니다.
곱상한 청년의 모습이긴 하지만 저와는 거리가 멀답니다.
이만.
1787년 6월, 로마에서

그리고 한 독일인과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중에서 누가 더 뛰어난지 논쟁을 벌였습니다.
저는 미켈란젤로가 낫다 했고 그는 라파엘로 편이었는데, 결국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다 함께 칭송했답니다.

1788년 4월, 2년 가까운 이탈리아 기행을 마쳤다.
이탈리아에 와서야 나는, 나를 쓸모없게 느끼게 만들었던 지독한 상처들을 치유했고, 예술을 향한 뜨거운 갈증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었다.
결국 나는 내가 작가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통렬하게 자각했다.
그것은 오직 작품을 써야만 한다는 절박한 깨달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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