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가 노예 해방의 세기, 20세기가 보통선거권과 여성 참정권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성소수자들의 해방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땅에 만연한 무지와 편견, 차별과 배제에 시달리는 성소수자에게 동시대인으로서 미안함이 앞서기 때문이다. 또한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지 못한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선한 사람의 무관심이 악을 키운다"는 18세기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의 말을 내 가슴에 새기고 있기 때문이다.

법안 통과 직후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2019년 5월 17일 대만에서 사랑이 이겼다. 진정한 평등을 위한 큰 걸음을 내디뎠고 대만을 좀 더 좋은 나라로 만들었다."

북한에 대한 공포 마케팅을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해온 한국의 극우 세력은 공포의 대상을 이민자, 난민 등 외부자로 확장하여 혐오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이질적 내부자인 성소수자로 확장하여 "피땀 흘려 세운 나라, 동성애로 무너진다"는 공포의 구호를 낳는다. 이런 모습은 개신교의 확장성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착한 방관자는 비겁한 위선자

"광주 사람은 소수민족인가, 이교도인가?"

1980년 5월의 일주일 동안, 프랑스 공영 티브이의 저녁 8시 뉴스는 광주 민주항쟁을 연일 톱으로 보도했다

뉴스를 접한 프랑스인의 반응 중 하나가 "광주 사람은 소수민족인가, 이교도인가?"였다. 그들의 눈에는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두 손을 뒤로 묶여 굴비처럼 엮이고, 팬티 바람으로 트럭에 끌려가고, 마구 쏜 총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일반 시민일 수 없었다. 그보다는 한나 아렌트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자들"로 칭한 ‘파리아(pariah)’에 가까운 존재였다.

특히 혐오는, 전두환 무리가 그렇듯이, 탄압은 물론 살육까지 마다하지 않는 세력에게 양심의 짐을 없애준다.

9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아베 정권을 비롯하여 일본의 극우 세력이 과거를 부정하고, ‘위안부’ 문제에 사죄할 뜻이 없는 것도 ‘혐한(嫌韓) 감정’으로 양심의 짐을 벗어던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혐오의 정치가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켜서 시민들을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결과적으로 혐오스러운 정치인이 정치를 계속 독점하게 하는 부수적 효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놓쳐선 안 된다.

혐오는 가진 자, 힘센 자, 다수파가 없는 자, 약한 자, 소수파에 대한 차별, 억압, 지배를 관철시키는 감정기제로서 한쪽 방향으로만 작용한다.

"정치는 본디 고귀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사회적 연대의 실현을 기본 소명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혐오 옆의 ‘착한 방관자’는 ‘비겁한 위선자’일 뿐이다. 많은 정치인들 사이에서 정치 지도자가 아쉽다.

오, 위대한 영이여! 내가 상대방의 모카신을 신고 1마일을 걷기 전에는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우리는 우리 각자의 눈으로 사물과 현상을 본다. 예멘 출신 난민을 향한 혐오감정은 그들에게 투사된 우리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거기에 담겨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한편에는 ‘지디피(GDP) 인종주의’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 소수자이고 약자인 그들에게 잠시 편견과 혐오감정을 내려놓고 눈길 한번 주면 안 될까. 인간은 감성을 가진 사회적 동물이기에, 사소한 냉대와 불친절을 당해도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느낌을 갖는 반면, 한순간의 눈길 교환만으로도 상대방이 겪은 삶의 층위를 느끼고, 그 깊이와 폭에 대한 공감, 아니 공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신뢰를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의 과거를 오늘날 보여주고 있는 당신들, 부디 꿋꿋하게 살아내시길…. 비록 소수지만, 제주도에서 "타자를 존중하고 타자와 윤리적 관계를 맺어야 ‘나’라는 존재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말을 실천하고 계신 분들이 고맙기 그지없다.

다수와 소수의 관계가 서로 ‘다른’ 관계가 아닌 바름과 틀림, 정상과 비정상의 관계로 치환될 때, 다수는 다수에 속하는 것만으로도 바르고 정상인 자리에 서게 되고, 소수는 소수에 속하는 것만으로도 틀리고 비정상인 자리에 계속 머물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본디 소란스러운 것이라서 사회적 갈등이 공론의 장에서 표출·토론되고 조정되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더욱이 차별을 금지하는 것은 인권과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 아닌가.

확증편향에서 벗어나기. 그것은 나부터 ‘회의하는 자아’가 되는 것 말고는 달리 도리가 없다. 그런 전제 아래 어렵더라도 이웃을 설득하는 수밖에. 학교와 교실에서 생각하는 교육이 펼쳐지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회의하면서 전진하자!"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구호였다. 개인도 사회도 운동도 회의하지 않으면 변화하기 어려우며 변화하지 않으면 전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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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떠들 것이다
"그러면 60만이 넘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삼성 제품을 보이콧하지 않나요?"

나의 ‘삼성 보이콧’은 내 의지의 소산이라기보다는 20여 년의 유럽 생활에서 얻은 직관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를 무시하고 노동조합을 부정하는 재벌 기업을 용인한다는 것은 노동조합원에겐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부모에게 물려받은 자본 없이 품을 팔아 생존해야 하는 노동자라도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 자존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한" 받아들일 수 없는 일 아닌가.

민주노총 조합원의 다수를 차지하는 대기업 정규직들이 기득권층에 편입되면서 변혁적 노동운동의 동력까지 상실하게 되었다.

하 수상한 시절, 갈수록 희귀종이 되어가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가. 그러면 지하철 2호선 강남역 8번 출구로 가라. 거기에 <또 하나의 약속>에서 화면 가득히 다가왔던 늠름한 황상기 씨가 있고, 반올림이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계속 떠들어댈 것이다. "한 놈만 패자!", "아픈 데를 때리자!"고.

2015. 10. 22.
결국 황상기 씨와 반올림은 승리했으나 반쪽 승리였다.

우리는 익숙함을 경계해야 한다. 나쁜 것에 익숙해지면 더 나쁜 것을 별 저항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살아 있는 생명을 내 손으로 가꿀 때 나도 삶의 의지를 포기할 수 없었다"

차광호가 동료들을 떠올리면서 생명을 가꾸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사회를 향해 ‘생명에 대한 예의’로 응답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조합원들의 소비와 소유 욕망에 밀려서 연대 정신을 팔아버린 결과가 아닐까 싶다.

법이란 "강자의 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처럼 하청 노동자들을 위한 법의 판결마저 외면하는 노동조합이라니! 노동이 노동을 무시하면서 자본의 횡포에 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조합원들의 소비와 소유 욕망에 밀려서 연대 정신을 팔아버린 결과가 아닐까 싶다.

법이란 "강자의 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처럼 하청 노동자들을 위한 법의 판결마저 외면하는 노동조합이라니! 노동이 노동을 무시하면서 자본의 횡포에 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노동자는 많지만 노동자 의식은 드문 곳에서 부당하고 억울한 일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노동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기 어렵고, 연대 의식의 토대 또한 탄탄해지기 힘들다.

2015. 7. 21.
차광호 씨는 마침내 다시 땅을 밟았다.

나는 앨라이다

"광신자들이 열성을 부리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이 열성을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다. 신중해야 하지만 소극적이어선 안 된다."

볼테르는 광신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이 말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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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장발장은행의 은행장을 맡고 있다. 회사원, 관광안내원, 택시기사에 이어 신문기자와 소수파 진보정당의 대표를 거쳐, 급기야 은행장의 직함까지 갖게 되었다. 주식도 없고 스톡옵션도 없는, 틀림없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은행장일 것이다.

홍세화(洪世和, 1947년 12월 10일~2024년 4월 18일)는 대한민국의 작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

두 가지 우연이 있었다. 하나는 프랑스 땅에 떨어진 것. 또 하나는 파리에서 빈대떡 장사를 할 자본이 없었다는 것.

실제로 나는 빈대떡을 아주 잘 부친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대신 ‘나는 빠리의 빈대떡장사’? 글쎄, 그건 나도 알 수 없다. 아무튼 두 가지 우연 과 몇 가지 필연, 그리고 서울대 출신이란 게 합쳐져서 지금의 내가 있게 되었다.

나는 『양철북』의 소년도 아니면서 나이 먹기를 거부한다. 나이 먹기를 거부한다는 게 주책없는 일임을 안다. 그렇다고 하릴없는 수작이라고까지는 생각지 않는다. 장교는 나이를 먹으면서 진급한다. 사병은 나이를 먹어봤자 사병으로 남는다.

전투는 왜 하는가? 살아야 하므로. 척박한 땅에서 사랑하고 참여하고 연대하고 싸워 작은 열매라도 맺게 하는 거름이고자 한다. 거름이고자 하는 데에는 자율 통제가 필요치 않다. 욕망이 춤춘다. 그렇다. 나는 살아서 즐거운 ‘아웃사이더’이고 싶다.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이고 싶다.

돌아보니 어느 글에선가 20년 동안의 난민생활을 접고 귀국한 뒤 내 정서를 지배하는 것은 분노보다는 슬픔, 슬픔보다는 쓸쓸함이라고 쓴 적이 있다. 세월호는 거기에 미안함을 얹게 했다. 아니, 내 안에는 세월호 훨씬 이전부터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이 있었다.

남민전의 선후배와 동료들이 겪어야 했던 일이 나에겐 가위 눌리는 악몽에 머물렀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워낙 심약했기에 설령 목숨은 아직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나일 수 없을 만큼 무너졌을 것이다.

운 좋게 망명도생할 수 있었는데,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가난의 질곡이라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 만큼의 물질적 여유까지 허용했다.

이를테면 나의 미안함은, 요행으로 살아남은 내가 그 요행이 없었더라면 살아남지 못했을 나에게 느끼는 미안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가 대물림된다면 그 반대편에 가난의 대물림이 있는데, 가난이 죄인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발언할 수 없을 때, 부러움이든 시기든 부의 대물림만 바라보는 대신 대물림되는 가난을 바라보자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의 고통과 불행, 불안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목소리를 안간힘처럼 내보는 것이다.

미국의 한 정치철학자는 확신에 차 있더라도 틀렸을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오늘 한국사회는 어느 때보다도 진영논리, 확증편향의 늪에 빠져 있으므로 더욱 귀담아들어야 할 충고다.

코로나바이러스 앞에서 인간의 몸은 평등하지만, 기업의 이윤 앞에서 인간의 몸은 평등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길들여졌다.

"63세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노동 일지"라는 부제가 달린 『임계장 이야기』는 아파트 주민을 소수의 착한 사람, 다수의 무관심한 사람, 극소수의 나쁜 사람으로 분류한다.

18세기 영국의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는 "선한 사람들의 무관심이 악을 키운다"고 했다.

20세기 말에 『경제적 공포』를 쓴 비비안 포레스테는 이렇게 말했다. "무관심은 잔인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매우 활동적이며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무관심은 무엇보다도 추악한 권력의 남용과 탈선을 허용해주기 때문이다."

2020. 5. 21.
2020년 5월 29일, 김용희 씨가 철탑 농성에 오른 지 355일 만에 땅에 내려왔다. 이렇게 모진 상황을 다시는 견디지 않아도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우리가 김용균이다
"그런데 이상했어요. ‘김용균법’이 만들어진 다음에 현장 태안 분소에 갔는데 용균이 동료들이 다 술 먹고 힘 빠져 있고 화가 나 있었어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용균이법’ 안에 용균이가 안 들어 있다고,

공자는 "말은 항상 지나치고, 행동은 항상 미치지 못한다"면서 "군자는 말의 지나침을 부끄러워한다"고 했다.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1848년 2월 혁명이 루이 보나파르트의 지배 체제로 왜곡돼갔던 과정을 서술한 책이다)에서 말했듯이, "한 계급에게서 빼앗지 않고는 다른 계급에게 줄 수 없"는 것이라면, 영세업자들을 수탈하는 재벌 기업한테서 최저임금 인상분을 충당하거나 임대업자에게 매긴 세금으로 자영업자들의 버거운 임차료를 보전해주었어야 했다.

내 불온한 시선 탓인지, 이른바 문 대통령의 ‘복심’, ‘측근’, ‘실세’라 불리는 사람들이 모두 ‘민주 건달’로 보인다. 과거에 잠깐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 도덕적 우월감이라는 완장을 차고 있는 그들. 하지만 사실은 그런 도덕적 우월감이 더 위험하다.

"서초동 집회가 부럽더라. 왜 노동자들이 죽는 문제로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촛불을 들고 나오지 못할까. 우리도 어떻게 하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어쩌면 더 심각한 문제이지 않나. 한 해에 몇천 명의 노동자들이 일하다가 죽는 거니까. 그리고 그게 매년 반복되니까. 만일 노동자가 죽는 일로 그만큼 사람들이 모이면 분명 사회가 달라질 것 같은데 말이다."(<오마이뉴스>)

권두섭 민주노총 법률원 대표변호사의 안타까운 술회가 내 가슴을 적신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곧 잊힌다(Out of sight, out of mind)." 미디어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알려주고 우리가 봐야 할 것을 보여주고 있을까? 우리의 의식 세계를 지배하는 대중매체와 관련하여 곱씹어야 할 격언이다.

"사랑을 하자! 연장 근로 말고!"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한다는 말에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상적인 국가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욕망을 매개로 사회 구성원의 비판력과 정의감을 휘발시켜버린 ‘문화적 배경’이 바로 삼성을 그렇게까지 오만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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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해

이야기 세계 여행자이자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몽상가. 선과 악을 넘어 인간 본성을 깊숙이 다루는 소설을 쓰고자 한다. 2023년 ⟨해녀의 아들⟩로 한국추리문학상 제17회 황금펜상을 수상했다. 《한국추리문학상 황금펜상 수상작품집: 2023 제17회》, 앤솔러지 《고통과 환희의 서》, 《인덱스 판타지: 에고 웨폰》, 《네메시스》 등에 참여했다.

목을 따자.
이 자가 죽으면 사름들의 고통이 사라진다.
면도칼을 모리야마 대좌의 툭 튀어나온 목젖에 갖다댔다.

어느새 들어온 구보다가 나에게 눈총을 보내며 모리야마에게 경례했다. 구보다는 모리야마의 개다. 단어 그대로 개다.

"원래 전쟁은 미친 거야."

장르 소설도 사회·역사적인 이슈를 다룰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목호의 난, 이재수의 난, 일본군 점령, 결7호 작전, 그리고 4·3 사건, 5·16 도로 건설…. 《고딕×호러×제주》는 제주도의 슬픈 역사를 공포 소설 안에 녹여냈기에 더 의미가 깊습니다. 

서구권 고딕 호러를 제주도라는 배경에 이식하여 새로운 공포 문학을 선보였습니다. 빌레못 동굴, 차귀도, 곶자왈, 이어도, 모슬포, 송악산, 도레 오름 등 제주도 곳곳이 소설의 무대입니다.

홍정기

네이버 블로그에서 ‘엽기부족‘이란 닉네임으로 장르 소설을 리뷰하고 있는 리뷰어이자 소설가. 추리와 SF, 공포 장르를 선호하며 장르 소설이 줄 수 있는 재미를 쫓는 장르 소설 탐독가. 대표작으로는 《전래 미스터리》, 《호러 미스터리 컬렉션》, 《살의의 형태》, 《초소년》 등이 있다. 그 밖에도 《혼숨》, 《명탐정 6》, 《요괴도시》, 《#기묘한 살인사건》, 《학교 괴담 도서관의 유령》 등 다수의 앤솔러지에 참여했다.

부모님의 얼굴 따윈 모른다. 
핏덩이였던 나는 홑껍데기 이불에 싸인 채 교회 문 앞에 버려졌다. 그것도 함박눈이 내리던 한겨울에 말이다.

하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로 목사 부부가 내게 지어준 이름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물로 누리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망할 하나님이 목사 부부에게 진짜 선물을 내려주었기 때문이다. 

남동생이 생긴 뒤로 내게 향하던 애정은 놀랍도록 차갑게 식어갔다. 
하나님의 선물에서 사탄의 아들로. 내 위치는 주의 노여움을 사 천국에서 추방당한 루시퍼인 양 끝도 없이 추락했다. 

결국 이제 막 뜀걸음을 할 수 있는 나이에 부부의 손에 이끌려 지방의 보육원에 입소했다. 그 짧은 생애 동안 두 번째로 버림받은 순간이었다.

나는 고아. 이미소는 부모를 여의었다. 나이, 성별, 사는 곳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그동안 간과했던 단 한 가지 공통점. 이곳에 있던 전임자들 모두 히키코모리에 가까운 외톨이였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사마란

‘괴이학회’ 소속. 먹고 살기 위해 직장을 다니고 행복하기 위해 글을 쓴다. 단편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 중 ⟨그네⟩, 《괴이한 미스터리: 초자연 편》 중 ⟨챠밍 미용실⟩, 《여름의 시간》 중 ⟨망자의 함⟩, 《오래된 신들이 섬에 내려오시니》 중 ⟨영등⟩, 《우리가 다른 귀신을 불러오나니》 중 ⟨뷰티풀 라이프⟩, 《고통과 환희의 서》 중 ⟨Virídia⟩, 《인덱스 판타지: 식사》 중 ⟨아키티투스⟩ 등을 썼고, 장편으로 《영혼을 단장해드립니다, 챠밍 미용실》이 있다.

"이상하게 여기진 말고. 군대로 치면 관심 사병 관리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너무 기를 쓰는 모습이 좀 걱정이 돼서."

고종에게 여아대(如我待), 즉 "나(고종)처럼 대하라"라는 특권을 부여받은 프랑스 신부들이 천주교 신자들의 불법 행위를 묵인하고 두둔했다. 그러자 교인을 빙자한 자들이 각종 범법 행위와 악행을 일삼고, 포교를 핑계 삼아 민군을 체포하는 등 도를 넘어선 횡포를 부리자 일어난 민란으로, 천주교인 300여 명이 참수를 당하고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프랑스 신부들의 사망으로 외교적 문제로까지 번지자 이제수와 두 명의 주동자가 책임을 짊어지고 처형당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실은 우리 공동체에 속한 아이가 많이 아파. 자네가 구마 의식을 해줄 수 있을까 해서 어려운 걸음을 부탁했어."

‘마귀가 가장 많은 곳이 어딘지 알아? 바로 성전이랑 사제관 문이야. 사제의 영혼을 노리는 마귀들이 제단이랑 사제관 문설주에 바글바글하게 붙어 있지. 유혹은 언제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시작하는 법이거든.’

전건우

2008년 단편 소설 ⟨선잠⟩으로 데뷔한 후 지금까지 여러 권의 장편 소설과 다수의 단편 소설을 발표했다. 대표작으로는 《밤의 이야기꾼들》, 《소용돌이》, 《고시원 기담》, 《살롱 드 홈즈》, 《마귀》, 《뒤틀린 집》, 《안개 미궁》, 《듀얼》, 《불귀도 살인사건》, 《슬로우 슬로우 퀵 퀵》, 《어두운 물》 등이 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현재 진행 중인 제주와 서귀포를 잇는 도로 공사는 당장 중단되어야 합니다.

그 도로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이는 말 그대로의 ‘안전’을 의미합니다. 좁고 구불구불한 구간이 연속적으로 길게 이어지는 도로의 특성상 야간 주행 시 자칫 사고로 이어질 확률이 높습니다. 애초에 구간 설계가 잘못되었기에 이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따라서 도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공사를 중단한 후 다시 설계해 구간을 바꾸어야 합니다.

또 하나, 이것이야말로 본론입니다만, 그 도로 공사 현장은 괴이한 존재에 의해 저주받아 더 이상의 공사 진행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제주도에는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어떤 것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것은 곶에 살고 있으며, 공사 현장에서 벌어진 인부의 대규모 실종과 수색대의 죽음에 그 존재가 연관되었다는 건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귀신일 수도, 요괴일 수도, 아니면 도깨비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제주도 사람이 그것을 이렇게 부르는 건 들었습니다.
‘그슨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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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
소설과 비평을 쓴다. 환상 문학 웹진 ⟨거울⟩의 필진이며 호러 출판 레이블 ‘괴이학회’ 소속. 《야간 자유 괴담》, 《내 유튜브 알고리즘 좀 이상해》, 《당신이 찾아 헤매는 건 책이 아니야!》, 《하얀색 음모》 등 여러 앤솔러지에 참여했다.

제주도 깊은 곳,
인간은 헤아릴 수 없는 섧고 서늘한 기척들

<말해줍서>-빗물
외조모상이 끝나고 육지로 떠난 후 수연은 섬을 찾은 적이 없다.
섬이 수연을 찾은 적도 없지만.

<너희 서 있는 사람들>-WATERS
미스터리한 사건 해결을 맡길 만한 곳으로 ‘탐정‘을 찾는사람들은 우리나라에 드물다. 탐정 사무소만큼이나.

<청년 영매_모슬포의 적산가옥>
이작이 집이 얼마 전까지 제주도청 재산이었대.
이 근방에 적산가옥이 몇 채나 있는데, 여기만.

<구름 위에서 내려온 것>-박소해
신당은 돌담을 따라 난 올레 깊숙이 위치한 낡은 안거리 집으로,
바로 옆에 강 심방이 형석이와 같이 살던 작은 밖거리 집이 있었다.

<등대지기>-홍정기
혹시. 전임자 중에서 갑자기 실종된 사람이 있어요?

<라하밈>-사마란
아무도 없는 길가에 웬 신부님인가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죠.

<곶>-전건우
제주도에는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어떤 것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고향이었다. 고민 끝에, 수연은 엄마의 번호를 눌렀다.

"뭇 스름 다 됨이니, 이제사 옴이니?"

뭍사람, 엄마는 수연을 그렇게 불렀다. 엄마의 말은 맞을지도 몰랐다. 외조모상이 끝나고 육지로 떠난 후 수연은 섬을 찾은 적이 없다. 섬이 수연을 찾은 적도 없지만.

어릴 때 말을 타고 학교에 갔건, 인터넷을 했건, 아이폰을 썼건, 그런 건 이제 아무 상관이 없었다. 수연은 섬이 싫어서 떠났고, 엄마는 뭍이 싫어 섬에 남았다. 수연이 섬에 대해 할 말은 이제 그뿐이었다.

"야, 공기부터 다르네. 같은 한국인데도 외국 같다."

노인의 뒤에서 또 한 사람이 다가와 속닥이며 곁에 쭈그려 앉았다. 수연은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한 손으로 코를 훔치며 쪼그려 앉은 그 남자의 한 팔에 장총이 단단히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섬사람이 섬 말씨를 쓰는 게 뭐가 문제요?"

이 사람,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수연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떤 일은 경험하지 않아도 뼈에 새겨진다. 수연에겐 ‘4·3’이 그랬다. 섬 태생이라면 누구라도 그럴지 모른다. 수연의 엄마도 그랬으니까.

48년에 시작돼 54년에 끝났다고 세상이 말하는, 하지만 섬에서는 영원히 끝나지 않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수연이 등지고 걸어온 오랜 비극을.

"그런데 애당초 뭣 땜에 우리가 이렇게 숨어 있어야 되나?"

"왜놈들 물러가고 미군이 왔으니 이제 당신들은 자유요, 그러더니 그때 순사 해먹던 놈들이 그대로니, 뭐."

"누구는 죄 서북청년단 짓이라 하고, 누구는 저 서양 군인들이 뒤에 있다 하고, 누구는 왜에 붙던 순사 짓이 여전하다 하고, 누구는 반쪽 정부 세울 욕심에 시작됐다 하고. 알려주오, 처자. 당최 이 모든 일이 왜 시작됐소?"

"요 총구로 쏘고 또 쏴도 기어 나오는 저 허연 귓것은 어디서 왔소?"

―찾았다.
그 속삭임에, 바닥을 기던 수많은 손이 수연을 바라봤다.

―찾았다, 찾았어. 여기 산 사람이 있어.

―찾았네, 찾았어. 섬에 아직 산 인간이 있었어.

징그러운 손마디가 꿈틀댔다. 그래, 날 죽여. 친척들을 죽였고 마을을 불태웠듯 날 죽여. 엄마의 엄마를 괴롭혔듯, 그래서 우리를, 섬에 난 우리를 영원히 괴롭혔듯 또다시 날 죽여….

"잘 숨어 있다 다치지 말고 만나자 해놓고, 엄마는 왜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버렸어…? 응? 나는 일흔 해가 가도 그게 궁금해."

"강산이 수십 번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누구도 말해주질 않아…."

―킥킥, 찾았다….
―그때 분명 다 죽였는데, 이상하게 자꾸 다시 살아나….

‘섬’은 신비롭습니다. 신비롭고 또 외딴곳이어서 매체와 외지인은 섬을 곧잘 대상화합니다. 때로 그곳은 환상의 낙원이고, 때로는 도피처이며, 때로는 범죄의 온상입니다. 그렇다면 섬에 사는 사람들에게 외지인은 어떤 의미일까요. 특히 4·3이라는 비극을 겪어낸 제주도민에게 있어서 말입니다.

캄캄한 산속 동굴에서 단절되었던 어머니와 할머니의 아픔을 만난 수연처럼, 저도 깊고 어두운 곳에 갇힌 순간 누군가의 얼굴을 찾아낼 수 있길 바랍니다. 저 역시 섬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영영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는 그곳이, 바로 나의 고향이니까요.

WATERS

웹소설, 장르 문학 작가 겸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 무협, SF, 호러, 판타지를 종횡무진하며 손 닿는 대로 쓰고 있다. 특별한 소재로 엮은 도전적인 발상을 꿈꾸지만, 역시 꿈은 닿기 어려운 편. 서너 편의 웹소설을 쓰고 서너 편의 앤솔러지에 참여했다. 대표작은 아직 못 냈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지금까지 겪어본 바 그 어떤 회사보다도 피고용인의 자율적인 활동을 보장해 주는 고용주였다. 일이 없을 때는 볕이 쨍하게 들어오는 자리에서 엎으려 졸아도 별말을 안 할 정도로.
그게, 제주특별자치도의 몇 안 되는 탐정 사무소에 조수로 근무하는 나기은이 자기 사장에게 매긴 평가였다.

서울 토박이. 그런 전통과 가장 먼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시댁은 집성촌이라. 아마 꽤나 적응이 어려웠을 것이다. 현대에서 말하는 상식과 전통에서 말하는 상식은 다른 점이 많으니까.

박경원은 놀랍게도 나기은 뒤에 숨었다. 노동자를 방패 삼는 고용주라니, 오소독스한 모습에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주변 상황이 웃기에는 참으로 부적절했다.

"미신은 안 두려워하셔도 되는데요."
나기은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미신 믿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셔야 해요, 사장님."

"어멍 하나, 아방 하나, 아이 하나, 이추룩 혼 가족만 바치민 되어."
"그, 그게 무슨⋯."
"더 들어가민, 내년부턴 머릿수를 늘려 맞추어사 헌단 말이라."
그게 전부였다.

이작

호러, 미스터리와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이 아주 많다. 단편 ⟨명태⟩, ⟨1940>,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4》 중 ⟨물뱀⟩, 《절망과 열정의 시대》 중 ⟨피와 로맨스⟩를 썼고, 장편으로는 《괘서》를 썼다.

그런 종류의 꿈을 꿀 때면 귀가 꼭 먹먹했다.
사각거리며 글씨 쓰는 소리나 창문 밖에서 벌이 윙윙대는 소리까지 모두 들을 수는 있지만, 오래전 녹화한 영상처럼 뭉개져서 들렸다.

예뻤다. 그리고 소름이 돋았다. 누나는 웃어봐야 소리 없이 미소 짓는 정도가 전부인 사람이었다. 그 몸을 사로잡은 존재가 누나를 흉내 내며 웃기에 모르는 척 커피를 마셨다. 가슴속은 누나가 영영 돌아오지 못할 만큼 자신을 잃었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으로 시시각각 타들어 갔다.

"에이, 귀신 붙었다는 말은 좀 오래된 집이다 싶으면 다 있지.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제주 땅 전역에 묻혀 있을 건데. 내가 보기엔 그냥 인기가 없어서 안 팔렸을 거예요. 이 근방 사람들은 거기가 뭐에 쓰던 집인지 아니까."

노인을 제대로 본 그제야 깨달았다. 노인은 나이 들어 늙은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이 경우엔 늙은 귀신이었다.

결정적으로, 드러난 발목에 족쇄를 차고 있었다. 족쇄에 이어진 굵은 쇠사슬이 언덕 위까지 뻗어 끝이 보이지 않았다.

가미카제는 뭔지 알지요? 비행기로 적함에 부딪혀서 적도 죽이고 저도 죽은 일제 비행기 조종사들 있잖아요. 배도 똑같은 게 있었지. 말 그대로 인간 어뢰. 그게 요카렌이에요. 요카렌도 배를 숨겨놓을 목적으로 해안 절벽에 동굴을 팠는데, 아시다시피 제주가 화산섬이잖아요? 땅이 다 현무암이라고. 이 돌이 단단하기가 말도 못 해서 갱도건 동굴이건 돌 파다가 죽고, 반항한다고 맞아서 죽고 했어요. 그 다케모토 중좌가 지휘해서.

"부동산 사름이 해준 말은 반만 맞아. 지지빠이지? 총각이 본 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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