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이리저리 바쁘고 이제야 짬이 나서 책 펼쳤는데, 오늘이 8월 22일이라고 한다.



경술국치는 1910년 8월 29일인데, 조약을 맺은 건 오늘이라는 걸, 오늘 알았다.



그 조약이 무효가 됨으로 해서, 일본의 한국 지배는 불법이다. 당연히 보상과 배상이 따라야 했는데, 우리가 승전국이 되지 못함으로 해서 결국 과거사 해결은 지지부진해지고. 우리는 작금의 현실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 역시나 첫 단추가 중요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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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을 먼저 쓴다.

명예살인이 가진 여성 폭력, 가정 폭력, 아내 폭력의 측면보다는 '살인'임을 강조할 것.

히잡은 가부장제 억압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자기표현 중 하나로 인식될 수 있음을 인정할 것.

히잡 착용을 금지할 것이 아니라, 히잡을 자의대로 벗겠다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대책을 마련할 것.

하려던 말을 다 썼다.

앤 필립스와 사비트리 사하르소는 ... 젠더 평등 원칙이 주류 사회의 인종차별주의적 편견을 정당화하고 다문화주의를 공격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며, 이를 피하기 위해 논의의 프레임은 문화가 아닌 여성의 권리 보호에 초점이 맞춰져 구성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문화주의와 페미니즘』, 57쪽)

타문화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지지만, 이의 실천은 여전히 요원하다. 문제는 타 문화권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 있고, 저출산의 암울한 그림자에 이어 사회적 동력마저 잃어버리기 직전, 멸종의 위협 속에 있는 반만년 역사 단군의 후예 한많은 한민족은 이제 곧 유럽이 처한 모든 이민 문제를 끌어안게 될 가능성이 높다.











『타자로서의 서구』에서 임옥희는 스피박의 사티 해석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티라는 관습을 놓고 벌인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영국은 사티가 여성을 살육하는 것으로 규정 지음으로써 여성을 살육의 대상으로 구성한다. 그리하여 영국의 백인 남성은 이런 살해의 현장에서 인도 남성으로부터 인도 여성을 구출하는 교양 있는civil 신사가 된다.(『타자로서의 서구』, 139쪽)

서구 유럽이 제국주의 침략을 통해 각 국가의 전통문화와 미풍양속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인도 여성을 구하는 '왕자님'으로서 기능한다는 지적인데, 사티의 잔인함과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사티에 대한 인도인 내부의 다른 의견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확실한 듯하다. 그것을 외부자의 시각으로 판단하는 것과는 별개로, 당사자들은 그 상황을 자신들만의 방식과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미'를 '아름다울 미'로 표기하는 한국의 국민으로서는 이러한 당당함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명예살인을 그런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에 대한 대상화와 집안 간의 화목과 연합을 위한 재산으로서 여성이 간주되는 문화, 문화 현상, 그 결과에 대해 침잠하기보다는, 그런 행위가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살인 행위'에 해당하며, 이는 문화적 개별성이나 차이점과는 상관 없는 보편성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임을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신체와 생명에 대한 위해는 가장 강력하게 처벌받아야 할 범죄임을 강조해야 한다. 명예살인의 무자비함과 야만성을 규탄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스토킹 범죄'로 통칭되는 예전 애인, 배우자, 파트너에 대한 여러 물리적 위해, 협박, 폭행, 성폭행, 살인 역시 가볍게 여겨지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히잡에 대해서는, 나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아직 베일 편을 읽기 전이라 읽은 후에는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다) 히잡 문제를 생각할 때, 나는 나 자신을 예전부터 유럽에 거주하던 백인 여성으로 상정했던 것 같다. 자기들(이민자들)이 남(프랑스에 살고 있던 백인들)의 땅에 살려고 한다면, 여기 문화를 따라야지. 히잡을 벗어야지, 라고 말이다. 하지만, 히잡 착용 거부의 자유 못지 않게 중요한, 히잡 착용의 자유에 대해 생각하던 중, 이전의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히잡을 보는 것, 히잡을 착용한 여성을 보는 것은 불편하다. 그것은 억압적 가부장제의 상징이고, 여성의 복장을 규제하고, 여성의 생활반경을 크게 제약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히잡은 그들의 전통문화의 일부이며, 그들은 히잡을 통해 자긍심을 느끼며, 결정적으로 그들은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런 그들에게, 이건 그게 아니야. 그건 네가 뭘 몰라서 그래, 라는 자세를 취할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어른도 아이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나를 좋아하고 나에 관한 거라면 뭐든 좋게 보는 어떤 친구는 팔다리가 긴 것이 내 특징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 그렇지는 않고, 나는 그냥 키가 큰 거다. 내 생각에, 내 신체의 주요한 특징이라고 한다면 배가 많이 나왔다는 건데, 친구가 크게 보는 내 장점과 내게 크게 보이는 내 단점을 잘 조합하면, 루즈한 스타일의 옷보다는 타이트한 스타일이 잘 어울리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짧은 치마를 자주 입는데(응?), 내 생각엔 그게 내 장점을 부각시키고 내 단점을 가리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주의 사항: 흰색 상의 입지 말 것. 아랫배가 부각됨) 내가 아주 짧은 치마를 입는 건 아니지만, 보통의 40대 후반 대한민국 여성이 선택하는 치마보다는 훨씬 짧기 때문에, 교회의 친한 언니는 '야! 너, 치마 왜 이렇게 짧아? 어?"하면서 단발머리 전용 선도부를 자청하신다. 그럼 또 나는 공손히, '네, 언니! 다음 주에는 더 짧은 거 입고 올게요!' 라고 말하면서 폴더인사를 건네는데......

그렇다. 내게는 짧은 치마가 어울리고, 그래서 나는 짧은 치마를 즐겨 입는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지금은 1920년대, 신여성이 등장한다. 신식 교육을 받은 여자들 혹은 서양식 차림새를 한 여자들이 신여성으로 불리우며 크게 주목받았다. 자세한 내막까지를 살필 수 없으니, 이번에도 '의복'으로만 한정해 보자. 신여성의 복장은 이러하다.


종아리를 드러냈다. 꽁꽁 싸매던 옷차림이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맞게 된 것이다. 신여성의 복장에 환호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경제성, 활동성에서 신여성들의 복장은 큰 호응을 얻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쳐다보기조차 부끄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어디, 종아리를 그렇게 내놓고, 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나이브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그런 변화의 과정 속에서 무언가를 '강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짧은 치마가 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짧은 치마를 입으면 되는 것이고, 긴 치마와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면 된다. 통이 넓은 편한 스타일의 바지를 입는 사람에게, 너 자신을 억압하는 무언의 압력에서 벗어나! 너 자신 그대로 아름답게 표현해 봐! 라고 말하는 게 억지인 것처럼,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에게, 너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에 동의하는 거야?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히잡을 벗기 싫어하는,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이슬람 여성들의 바램은 수용되어야 한다. 그것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신체에 대한 위해가 아닌 이상, 그들의 전통문화의 하나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어떤 여성들이 히잡이 남성 억압의 표시로서 작동하며, 히잡을 통해 여성을 통제하려고 하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히잡 착용을 거부할 때, 온 몸으로 저항할 때,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실질적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히잡이 보기 싫다고, 거북하다고 억지로 히잡을 쓰지 못하게 할 것이 아니라, 히잡을 자의대로 쓰지 않겠다는 사람들, 히잡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이에 관련해 조금 더 쓰고 싶기는 한데, 눈꺼풀이 자꾸 내려온다. 원래 이 시간에는 선약이 있다. 이 시간에는 보통 『유대인의 역사』를 읽는데, 어제는 <1648년 대재앙과 그 여파> 앞부분을 읽었다. 신기한 일들의 연속이다.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읽어보지 못한 역사 이야기다. 밤은 깊어가고, 풀벌레 소리는 높아간다. 눈꺼풀이 한없이 무겁다.

이렇게 써두고 올리지 못하고 책상에 쓰러져 잠들었다. 눈을 뜨니 아침이고. 그래서, 인제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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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8-22 10: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히잡, 베일에 대해 이 책 읽고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저는 단발머리 님과는 약간 다르게 생각했는데요, ‘이 땅에 살면 여기 문화를 따라야지, 히잡을 벗어야지‘ 라는 것보다는 ‘저 억압에서 벗어나야 한다!‘ 쪽이었거든요. 히잡 없이 자유로운 여성들을 보고 본인의 억압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라고 생각했던거죠. 이 책 읽으면서 제가 되게 편협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물론, 그러나, 저는 무엇보다 중요한 건 ‘히잡을 벗을 자유‘ 입니다. 본인의 종교나 신념을 드러내기 위해 히잡을 쓰고 싶다면 쓰면 되지만, 마찬가지로 그것을 벗기를 원한다면 벗을 수 있어야 하는거죠. 제가 편협하게 계속 그것을 억압이라고 생각했던 데에는, 그들에게 ‘쓸 자유‘는 있지만 ‘벗을 자유‘는 없다는 것 때문이었거든요. 벗을 자유가 없는데.. 그게 억압이 아닐 수 있나? 이런거죠.

그렇지만 여전히 복잡해요. 역시나 이것이다 저것이다 라고 정하질 못하겠는데요, 그것은 저항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그 나름대로 악용되기도 해서요. 그런데 그 악용 때문에 모두 벗으라고 해야 하나 싶어지면서 저는 트랜스젠더라며 비수술 상태로 여성 목욕탕에 침입한 남자들도 떠올랐고요. 명백한 하나의 답은 존재할 수 없는 것 같은데, 저는 역시나 생각이 조금 바뀌긴 했어요.

음 그런데 말이죠, 계속해서 끊임없이 복잡하게 생각되는건, 애초에 베일이 없었다면,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이 여기로 흘렀을까, 하는 거였어요. 베일이 강제되지 않았다면 그것을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억압이라 생각했을까. 베일을 쓰지 않았다면 여기선 베일을 벗어 라는 말이 나왔을까. 베일을 벗으라는 말에 난 쓰고 싶어 라고 저항하는 건, 말 그대로 애초에 그것이 존재했고 그 문화의 혹은 인종의 특성이 되었기 때문인거잖아요? 아, 제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을 정리가 잘 안되는데, 그러니까 이제와서 타문화권의 사람이 베일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라는 가정을 하는 것은 굉장히 부질없고 그 또한 차별적 시선이겠지만, ‘저항‘이라는 상징이 있기 전에 이미 강제가 있지 않았나 하는 거였어요. 이건 제가 좀 더 정리할 수 있는 언어로 생각해볼게요.

단발머리 2024-08-22 22:50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제가 댓글 쓰다가 길어져서 새로 글을 썼습니다.
화이트와인 맛은 어떤가요? ㅋㅋㅋㅋㅋㅋ 굿나잇~~!!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5791559

잠자냥 2024-08-22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러분들 때문에 히잡을 쓰고 싶어서 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요..
아 그리고 저 그림 올려주셔서 감사. 전 늘 부르카-히잡 이 세계가 헷갈렸는데 이젠 안 헷갈릴.... 거 같아요. (진짜?)

단발머리 2024-08-22 22:52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생각 자주 하는 요즘입니다. 억압의 상징이었으나 후에는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요.
전 아직도 헷갈리더라구요. 아주 긴 거만 알 거 같아요. 부르카...... 잠자냥님, 굿나잇~~!!

햇살과함께 2024-08-24 0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 보고 찾아봐야지 했는지 단발머리님이 이렇게 사진 올려주셔서~ 퍼 갈게요~~ ㅎㅎ
종류가 이렇게 많은 줄은!

단발머리 2024-08-24 17:07   좋아요 1 | URL
네네, 퍼가셔도 됩니다. 출처 남겨놓을게요. 기사도 한 번쯤 읽어볼만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1227 <˝쓰게 해줘˝ ˝벗을래˝ ... 프랑스 , 이란 정반대 히잡 전쟁, 무슨 일>
 



버튼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크게는 웃음 버튼과 울림 버튼이 있고.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루시 버튼(『바닷가의 루시』 한글판 출간, 축하드립니다!). 친구는 읽기 버튼과 쓰기 버튼 중에, 쓰기 버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야무지게 피력했는데, 나는 그만큼 중요한게 구매 버튼이라고 생각하기는 한다. 이 세상에는 읽기와 쓰기와 (책) 사기가 있는데, 그 중에 제일은 책사기니라. 

















내 읽기 버튼 중에 하나가 알릴레오 북스이다. (참고사항: 유시민 좋아하는 편, 공장초기화의 난관 속에서도 유시민 작가님과 1미터 거리에 앉아 환한 미소를 띄며 강연 듣던 사진 찾아낸 나를 칭찬합니다) 알릴레오 북스 전편을 보는 건 아니지만, 소개된 책이 무엇인지, 출연자가 누구인지는 확인하는 편이다. 최근에 올라온 책들이 모두 다 마음에 들어 내가 사는 S구와 근거리의 K구 도서관에서 검색을 해보았더니, 거의 대출 중이며, 예약자가 꽉 찬 상태다. 이 정도 기세라면 올해안에 대출해서 읽기는 어려울 것 같고, 그냥 구매를 하는게 낫겠다 싶기는 한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청소기를 돌렸다. 손으로는 청소기를 잡고 있지만, 머릿 속은 책 생각 뿐이다. 박태균 교수의 『이슈 한국사』는 일단 상호대차 신청했으니까, 그 책은 살짝 살펴보고 구매해야겠다. 제국주의와 식민지 근대론과 관련해 나는 저자의 의견에 솔깃했는데, 그러니깐 식민지가 되었던 국가들 중 한국의 특이성 부분이었다. 이에 더해서, 일본과 우리 나라의 과거사 문제도 흥미진진했고, 반유대주의와 정체성의 정치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았던 나로서는 좋은 레퍼런스가 되겠구나 싶었다. 그래, 일단 그 책을 읽어보고 나서. 


















이러고 있는데 거실 책상에 콘래드가 보인다. 아, 콘래드. 정희진의 공부 8월호 <우리가/저들이 저들을/우리를 다스릴 것인가?> 듣고 나서, 이 책 저 책 다 꺼내놓고, 요걸 좀 써봐야겠다 싶었는데, 어느 새 잊어버린 나. 비교적 최근에도 『전체주의의 기원』 읽고 '보어인의 인종주의'에 대해 쓰면서 콘래드는 살짝 언급했었다. 친애하는 알라딘 이웃님들의 댓글에서 제일 주요한 지점은 일곱 살이었는데, 내가 강조하고 싶었던 건, 26년 전. 26년 전에 읽었으니 나는 많이도 변했으리. 다시 읽고 나서 써보자, 했는데.... 는데... 



그리곤 또 다시 다른 생각에 빠져든다. 더운 여름 다 지나가는데, 아롱이 연청 반바지, 도대체 어디에 간거지? 여름 다 가기 전에 한 번은 입어야 하는데. 어디 갔지? 아니,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고. 어디 갔지? 도대체? 






큰아이 책을 반납해 주고, 서브웨이에 샌드위치를 사러 가는 길에는 정희진의 공부 8월호 <전쟁 무기로서 남성의 몸>을 들었다. 나오자마자 한 번 들었는데, 그 때는 다른 일 하면서 들었던가. 이런 문장들이 귀에 딱 꽂히는 거다. "... 일본 우익의 문제가 끊임없이 일본 내부에서 해결이 안 되면서, 서로가 인제, 한국의 민족주의와 일본의 민족주의가 적대적 공존을 하는, 그러니깐, 우리도 내셔널 히스토리를 넘어야되는데, 언제나 일본이 아직도 저러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되는 거죠." 



네, 선생님. 그게 저에요. 제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인데. 말만 한게 아니라 글로도 썼어요. 


한반도의 상황은 다르다. 나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실질적, 군사적 압력으로 북한이 존재하는 작금의 분단 현실 속에서, 군사 전체주의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일본의 침략 야욕은 노골적이고 확고하다. 용서를 바라지 않는 가해자, 자신도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가해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렇게 썼어요, 제가요. 아.... 나의 공부 버튼, 정희진 선생님! 선생님, 존경합니다! 하지만, 선생님도 아시지요. 한국은 한참동안 이걸 넘어서기 힘들거에요. 그리고, 저는요. 한국의 민족주의, 정체성의 정치를 넘어서려는 지식인들이 존재하는데 반해 일본에는 그런 사람이, 그런 지식인들이 적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그 분들을 잘 모르기는 하지요. 그래서 제가 『내셔널 히스토리를 넘어서』,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 『전쟁과 죄책』을 사서 읽어보려고는 하는데. 일단, 아직은 안 샀어요. 선생님이 저의 공부 버튼이신건, 제가 참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이기는 한데. 선생님, 제발 한 번에 버튼 한 번만 눌러주세요. 여기저기, 이 분야 저 분야 총망라해서 여기 저기 누르시면, 저는.... 어떡하나요. 네? 선생님? 저는 어떡하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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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과함께 2024-08-17 17: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도 버튼 너무 많이 눌려요 버튼 오작동?!

단발머리 2024-08-17 22:43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저같은 경우는, 정희진쌤 추천 도서 목록은 버튼이 그냥 눌려 있는 상태라고 할까요? 눌려서 안 올라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4-08-17 18: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구매 버튼 알라딘 서재. 읽기 버튼 정희진. 쓰기 버튼 단발머리. 세 가지를 합치면 공부 버튼 이나니.
한국의 특이성에서 저도 혹합니다. 나도 저 책 따라 읽고 싶은데... 아마 못 읽겠져 날은 덥고 저는 바쁘니깐 ㅋㅋㅋ

널리 이롭게 하고 싶어 한번 더 강조하는데요. 쓰기 버튼. ‘쓰기 욕망‘은 특정하고 특이하고 특별하기가 ‘특이성‘이라 할만 하도다. 라고 생각해요... 쓰십시다. 제 욕망이 거기에 있고, 거기에 있으며, 거기에 있다는 것에 뿌듯함과 자존감 및 깊은 애정을 느낍니다. 써야하는 사람은 써야만합니다. 그게 욕망이니까.. 더는 참지 말자...ㅋㅋㅋ 단 읽히게 쓰는 것은 어렵다. 어려운 문제.

저는 한국인이고. 한국어로 사유하고 한국어로 생각합니다. 거기에 조상님 감사합니다. (갑자기?) 포스트 콜로니얼 언젠가는 공부할건데... 뭔가를 넘어서겠다는 야심은 별로 없고요... 그냥 하는 말이 신기해서 읽고 싶고 읽게되는 것 같아요. 혹시 그걸 많이 읽어서 뭐 넘어선다(?) 진정한 코스모폴리탄이 된다 한들... 제가 한국어로 사유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을 거 같아요.

마지막 일본상황 모르는데. (일반적인.... 그래도 평균이상의 독서력을 가진) 제가 아.는. 그런 지식인 희진 샘 밖에 없으시다... 물론 이제 이책 저책 참고하다 보니.. 아 그렇구나.. 하지만... 저는 정말 다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ㅠㅠㅠㅠㅠ 저 같은 태어나기를 국민으로 호명되어 국민으로 자라난 일반 시민, 이데올로기적 주체 ㅋㅋㅋㅋ의 지식 수준에 한차원 높은 경종을 울려주시는. 선생님 경애합니다. 저는 선생님을 읽고 싶어서 똑똑해지기로 했어요. 여기서 또 혼자 러브레터....쓰기 ㅋㅋㅋㅋ

단발머리 2024-08-17 23:09   좋아요 2 | URL
상호대차된 책이 도착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일단 내일, 제가 가서 받아올게요.

쟝쟝님의 ‘쓰기론‘에 동의합니다. 쓰기에 욕망이 있다는 것에 자존감과 깊은 애정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맞아요. 써야하는 사람은 써야 하죠. 그리고 결국 그 사람은 쓰게 되어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 와중에도ㅋㅋㅋㅋ ‘쓰이지‘ 못했지만 표현되는 다른 방식도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게 그게 왜 중요하냐면... 저는 예전에는 읽기만, 쓰기만, 오직 책만 그런 위치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드라마 보는 날 한심해하지 마라... 는 이야기를 친구들로부터 여러 번 들었습니다. 저는 ‘보는 행위‘의 수월성이 깊은 사고로 나아가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이제는 바뀌었습니다. 쓰기가 중요하지만, 쓰지 않는 사람 중에도 쓰기만큼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고요. 책 읽지 않아도 여전히 지혜로운 사람들이 ㅋㅋㅋㅋㅋ 책 많이 읽어도 여전히 모를 수 있고, 모르는 세계에 대해서는 모두 다 똑같다는 그런 생각이... 제 댓글 어디로 가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

한국어로 사유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셔서... 퍼뜻 생각납니다. 저는 박정희의 모델로 제시된 이순신 장군에 대해 호감이 없었는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이순신의 역할에 대해 읽노라면 ㅋㅋㅋㅋㅋ 이순신 장군 아니었으면, 우리 이 대화 전부 일본어로 하고 있을 겁니다. 그니깐, 민족과 국가라는 이데올로기로의 호명, 헌신. 이순신과 우리 조상들의 희생 덕분에 우리가 이 시간, 식민지 근대화론과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거지요. 한국어로요. 저는 그 부분이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러브레터는 내가 썼어요. 다른 점이라면 쟝님은 선생님과 통한 사이이고, 나는 불통인 사이라는 건데 ㅋㅋㅋㅋ 난 괜찮아요.
부럽지만 부럽지 않고,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웁니다!!!

공쟝쟝 2024-08-19 13:55   좋아요 0 | URL
˝쓰기가 중요하지만, 쓰지 않는 사람 중에도 쓰기만큼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고요. 책 읽지 않아도 여전히 지혜로운 사람들이 ㅋㅋㅋㅋㅋ 책 많이 읽어도 여전히 모를 수 있고, 모르는 세계에 대해서는 모두 다 똑같다는 그런 생각이...˝

<-- 정확히 반대 되는 지점에 대해서 ㅋㅋㅋㅋㅋ 요즘 생각 거슬러 오르는 중이었어요. 언제나 읽고 쓰기가 그렇게 까지 중요한 건 아니다(그럼 못 읽고 못쓰는 사람 어떡하냐?)라고 막막 입 툭튀어나온채로 읽다가... 그런 제 생각이........ 엄청나게 배아픈 왜곡(?)이었다는 걸 깨닫고... 읽고 쓰는 것이... 그런 사람들이 넘나 멋지다(이상화ㅋㅋㅋ).. 이렇게 생각 바꿔먹은 저 로서는 ㅋㅋㅋㅋㅋㅋㅋ

단발님, 드라마 보는 저를 한심해하지마세요. 저는 요즘 1. 굿 파트너 2. 돌풍 을 보고 있습니다. 결혼 혐오와 운동권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아니고요 (그런 내용 아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진짜 너무 재밌음... 드라마 너무 좋아!!!

정희진 선생님, 혹시 이 러브레터 읽으신다면... 경애합니다! 눈 밝은 선생님 팟캐스트의 부끄럽지 않은 청취자가 되기 위해 공부 중입니다!!

단발머리 2024-08-20 09:00   좋아요 1 | URL
엄청나게 배아픈 왜곡.....에 대해서 저는 동의합니다. 쟝쟝님 항상 강조하는 ‘필력 결정론‘에도 동의하고요.
장강명, 잘 썼더라구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잘 써서 내가 좋아한 거였어요. 이유를 인제 찾았어요. 하하하하하하하!

드라마 보는 사람들을 한심하다고 생각했었던 저를 회개합니다. 드라마를, 그 깊이와 넓이를 이해 못했던 저의 무지 때문입니다. <괜찮아, 사랑이야>가 종영되고 7-8년 뒤에 정주행했거든요. 어김없는 회개 타임 ㅋㅋㅋㅋㅋㅋㅋㅋ

달자 2024-08-17 18: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버튼 한 번에 한번씩 눌러주세요” 공감 꾹 하고 갑니다 ㅋㅋㅋㅋㅋㅋ 얼마전 대만 여행 때 동행자의 대만인 친구와 만나 저녁 식사를 하고 아주 즐겁고 흥미진진한 대화를 나눴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일본의 식민기를 굉장히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물어봤더니 약간 농담반 진담반으로 ‘중국에 비해선 일본이 나아서’라고 하더라구요. 어느 정도는 뭐 그럴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사실 한국인에서 나고 교육을 받고 자란 저로서는 그 정서가 확실히 이해하기가 어렵더라구요. 그리고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식민 지배를 받은 국가들의 정서는 또 다르더라구요.

단발머리 2024-08-17 23:11   좋아요 2 | URL
선생님~~ 제발 한 번에 한 번씩만 눌러주세여 ㅋㅋㅋㅋㅋㅋ

제가 위의 캡처해 놓은 책 <이슈 한국사>의 저자도 달자님 댓글 써주신 바로 그 부분을 지적했는데요. 그 요인 중의 하나로 우리나라와 일본의 근접성을 들더라구요. 가까운 이웃으로부터의 지배가 훨씬 더 싫다? 이런 느낌이요. 달자님 동행자의 대만인 친구와 같은 결인거 같아요. 대만 입장에서는 중국보다 차라리 일본이 낫겠지요. 우리 입장에서는 일본보다 차라리 영국이나 독일이 나았을 수도 있고요.

유부만두 2024-08-18 07: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글도 버튼 씨게 씨게 누르는 글인디요?

단발머리 2024-08-18 18:2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잘 문질러 주세요! 가끔 고장나면 눌렸다가 안 올라옵니다 ㅋㅋㅋ

다락방 2024-08-18 19: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버튼이 눌리는 것도 그 사람이 가진 고유한 능력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같은 자극을 준다고 해서 누구나 그 버튼이 똑같이 눌리는 건 아니니까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혀 버튼이 눌리지 않을 수 있잖아요? 단발머리 님이 눌리는 버튼이 쓰기, 읽기, 공부하기 여서 너무나 좋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쪽으로 버튼 계속 눌리시길 바라고요, 저도 같이 눌리도록 하겠습니다.

단발머리 2024-08-19 21:32   좋아요 0 | URL
버튼 눌렸을 때, 물 들어왔을 때 열심히 전진해야 하는데.... 는데.... 오늘 간만에 출근이라 좀 피곤하네요.
계속 계속 눌러주세요, 다락방님! 우리 서로서로 눌러 주고 또 눌러 주고 ㅋㅋㅋㅋㅋ 그런 ‘눌러 주는‘ 사이가 됩시다!!

독서괭 2024-08-20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매버튼이 중요하다, ㅋㅋㅋㅋㅋㅋ 너무 좋네요 ㅋㅋㅋㅋ 저도 알라딘 오면 구매버튼, 공부버튼, 쓰기버튼, 읽기버튼 다 눌리는데 그중 구매버튼은 매우 조심하고 있습니다...

단발머리 2024-08-21 13:17   좋아요 0 | URL
구매버튼을 매우 조심하고 계신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귀여운 냐옹이들이 모두 다 출동해서 괭님의 구매버튼을 사정없이 눌러주기를ㅋㅋㅋㅋㅋㅋㅋ저는 참고로 읽기 버튼을 제일 중히 여깁니다ㅋㅋㅋㅋㅋ
 
















배제와 혐오의 정서가 작동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이분법 벗어나자. 왜 두 가지 밖에 없나. 죄송해요, 지금 생각나는게 이거 두 개 밖에 없습니다) 문화의 저변에 굳건히 자리잡아 그것이 '혐오'이고, '배제'의 정서임을 철저히 감추는 방식. 그런 행동 양식이 '혐오'라고 지적했을 때, '아니, 그게 왜?', '그거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라고 말하도록 강제하는 방식. 그런 방식의 가장 강력한 실례는 당연히 5천년 인류 문명의 결정판 여성 혐오다. 남녀 평등을 표면적으로 거절하는 사람은 없지만, '여자는 여자다워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는, 훨씬 많다. 그렇다고 여성혐오가 작동될 때, 두 번째 방식이 사용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방식은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해 배제와 혐오의 정서를 폭력적으로 과시하는 것이다. 최근,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에서 일어났던 폭력 소요사태가 그에 대한 가장 적절한 예가 될텐데, 먼저 일어났던 사건의 피의자가 영국 태생의 기독교인임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짜 뉴스에 속은 사람들의 외침은 일관되었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돌아가라, 너희 나라로! 이민자들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아무런 여과 없이 그대로 표출되었다. 대낮에 길거리를 막아서서 운전자의 얼굴색, 인종을 확인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정상성을 유지하는,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야만적 행동이다.

유대인에 대한 유럽인들의 행동 양식은 이 두 가지 방식 중 두 번째 방식에 해당한다. 유럽인들은 유대인들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능욕했는데, 이는 눈빛이나 태도등의 소극적 방식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명시적인 규제를 통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








반유대주의 전설에 따르면, 빌라도에게 "그 사람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시오!"라고 외친 이래로 유대인은 치질로 고생했다고 한다. 그런데 치질을 고치는 길은 그리스도의 보혈 뿐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유대인이 그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치질에 효험이 있는 유월절 빵을 만드는 데 필요한 피를 얻으려고 매년 그리스도 대신 한 사람을 죽여야 했다는 이야기다. ... 이렇듯 한 사건에서 출발한 유대인에 대한 비난은 살인 의식에 대한 고발과 피의 비방(중세시대 유대인이 아이들을 유괴하고 죽여서 종교 의식에 쓸 피를 마련했다는 비방에서 유래한 용어로 특정 인물이나 집단에 대한 부당한 비방을 가리킨다-옮긴이)으로 뻗어나갔다. (『유대인의 역사』, 359쪽)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들을 사랑한다』를 읽고 페이퍼를 2개 썼지만, 사실 쓰지 못한 이야기가 더 많았다. 새롭게 알게 된 정보와 지식에 놀랐을 뿐만 아니라, 그걸 풀어내는 유대인 작가의 서늘한 시선에서 느껴지는 감정에 대해 쓸 수 없었다.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습격이 계속되는 요즈음, 나의 '반유대주의' 독서가 이렇게 계속되어도 되는지, 결국 이 읽기가 도착하고자 하는 궁극의 자리는 어디인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집은 여전히 만차 상태, 남은 휴일은 내일 하루, 월요일부터 출근인 사람이 취할만한 적합한 태도는 아니지만, 일단은 도서관에 상호대차로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과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를 신청해 두었다. 그리고는 다시 데어라 혼의 책을 펼친다.

<11장 샤일록과 함께하는 통학길>. 저자는 자동차라는 닫힌 공간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같이 듣게 된다. 그녀는 스스로도 그 작품을 다시는 읽고/보고 싶지 않았던만큼 어떤 방식으로든 그 사람이 그 작품을 듣지 않게 하기 위해 그를 설득했다. 하지만, 그녀의 열 살짜리 아들은 고집이 세고, 요구가 많고, 집착이 심하고, 무시무시하고, 종종 너무 똑똑해서 결국 그녀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 작품을 듣는 과정에, 아들은 날카롭고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그녀에게 퍼붓는다. 그녀는 계속해서 작품 속의 '복잡미묘한 결'에 대해 아들에게 설명하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꺼버리자'는 저자의 말을 뒤로 하고 아들은 끝까지 들어보겠다고 한다. 마침내 극이 끝나고, 그녀의 아들이 말한다. "저거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아요." "분명히 다시 듣게 될 거야."

나는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여러 층위를 포함하고 있으며 많은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인물의 불명예스러운 흉물스러움은 심지어 열 살짜리 아이에게도 명백하며, 이 희곡이 얼마나 많은 층위를 포함하고 있든 간에 그런 흉물스러움도 분명 하나의 층위이다. 학대 당하는 아내가 다정한 남편이 왜 자신을 때렸는지 설명하는 것처럼, 내가 왜 이렇게 극도로 명백한 사실에 대해 변명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껴야 하는지 궁금했다. 나 자신이 속한 민족에 대한 모욕을 단지 만화에 국한된 적이 없었고 너무도 많은 내 선조들의 존엄과 심지어는 목숨까지 앗아간 모욕을 정당화하는 이런 비뚤어진 역사적 심리 조종에 내가 왜 참여해야 하는 걸까?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315쪽)

나는, 인간이 언어의 동물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언어라는 한계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언어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유일한 종이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아' 다르고 '어' 다르고,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그녀의 열 살짜리 아들이 세계적인 문호 셰익스피어를 미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계속해서 변명한다. 열 살짜리 남자 아이도 알아들을 수 있는 명확한 혐오와 멸시의 감정을 감추기 위해 애쓴다.

그녀만 그런 것이 아니다. 『베니스의 상인』 전반에 전시된 반유대주의에 대한 비판은 '수준 낮게 징징거리는 인간들'(300쪽)의 것이라 치부되고, 그 작품의 원래 의도, 즉 자본주의 비판과 '타자'에 대한 논평이 이 작품에 대한 '제대로된' 해석이라는 주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게 현실이다. 열 살 남자 아이도 단번에 알아듣는 그 진실을, 사람들은 모른체 하고, '예술 작품' 속 다양한 층위를 설명하는 하나의 장치라 여긴다. 그렇다고 말한다. 열 살 남자 아이도 단번에 알아듣는 그 진실을. 모두 다, 모른 척 한다. 여전히 셰익스피어는 옳고, 틀리지 않은 상태가 계속 되고 있다.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배제는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공권력의 힘을 동원한 실제적인 억압으로, 문화의 탈을 쓴 교묘한 속임수로. 여성, 이민자, 장애인, 성소수자 이에 더해 이제는 어린이와 노인에 대한 혐오마저도 부끄러워 하는 기색도 없이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유대인은 핍박받는 피해자에서 가해자의 위치로 탈바꿈한 거의 유일한 집단이다. 그들은, 가자 지구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 경기를 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어린이들과 이를 구경하려 온 피난민들에게 폭탄을 투하하면서도, 자신들이 피해자라 생각할 것이다. 정체성의 정치에 매몰되어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라 믿으며, 피해의식의 경쟁에 올인할 때,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은 무너질 수 밖에 없다. 네타나휴의 이스라엘에는 희망이 없다.

하지만.

한반도의 상황은 다르다. 나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실질적, 군사적 압력으로 북한이 존재하는 작금의 분단 현실 속에서, 군사 전체주의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일본의 침략 야욕은 노골적이고 확고하다. 용서를 바라지 않는 가해자, 자신도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가해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윤석열 정권의 국영방송 KBS는 광복절 새벽 0시에 <나비부인>을 상영함으로써, 기미가요를 부르는 여배우를 비춰줌으로써 하나의 답을 제시했다. 화해와 협력, 그리고 공동 번영. 내 생각이 여전히 '정체성의 정치'에 함몰되어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순간이다. 내 나라 보다 일본을 더 위하고, 내 나라보다 일본을 더 사랑하는 윤석열 정권 하에서, 나의 '정체성의 정치 공부'는 좀처럼 전진하지 못할 듯하다. 그런 예감이, 불길한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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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8-16 09: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한줄한줄 따라가면서 읽었습니다. 이번 호 정희진의 공부를 들으면서 새삼 알게 된 사실은. 전범국가 일본은 피폭 때문에 자신들을 피해자라고 여기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면서 저는 이상한 감정이 갈등한다는 걸 느꼈거든요. 저 핵폭탄이 떨어질 때. 일본인들은 그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단발님의 이 글을 읽으니 혐오는 촘촘했고 배제의 역사도 인간의 역사였지만. 그것이 ‘대량 생산‘되는 시스템에 대해서 물은 사람. 그 자신이 유대인이자 난민이었음에도 그 정서를 끊어내면서 사유해야한다고. 말했던 사람. 그게 세계 사랑이라고 말했던 사람. 현시점의 조건을 탐구하면서 사유는 위험하지만 그것만이 방법이라 말한 우리 아렌트의 탁월함이 계속 떠올라요... 멈춰서 숙고하고 생각해야하는데... 전체주의의 기원을 너무너무 읽고 싶은 데... 지난달 밀린 읽기들 때문에 맘이 바쁜 나날들입니다. 먼저 훨훨 가시는 단발님 글 읽고 저도 찬찬히 따라갈게요.

“(179) 내 생각에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심사숙고하는 거예요. 그리고 사유한다는 말은 항상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거예요. 실제로 모든 사유는 엄격한 법칙, 일반적인 확신 등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건 기반을 약화시켜요. 사유하다가 일어나는 모든 일은,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건 비판적으로 검토할 대상이 돼요. 즉, 사유 자체가 그토록 위험한 일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위험천만한 사유란 존재하지 않아요. 이걸 어떻게 확신하느냐면….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거든요.” - 한나 아렌트의 말

단발머리 2024-08-16 10:17   좋아요 4 | URL
일본은 자신들을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죠. 원폭의 피해자인건 사실이고요. 문제는 이전의 악행이 그걸로 덮히느냐하는 문제고요. 그런 피해자인 일본이 그 일의 직접적인 가해자인 미국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뭐랄까요, 저는 일본이야말로 ‘힘의 외교‘에 완벽하게 반응하는 국가 같아요. 강제 개항시키고 원자폭탄 떨어뜨린 미국에 대한 굴종, 맹목적 굴종. 가깝고도 먼 나라, 맞습니다.

아렌트의 탁월함을 떠올리셨다면, 그건 제대로 된 독해일 것입니다. 제 글과의 연관성 보다는 ㅋㅋㅋㅋㅋ그냥 우리 아렌트님의 천상계 이론과 사유. 그 넓이와 깊이와 폭을 우리가 쪼금이라도 맛볼 수 있다면, 사고 실험과도 같은 우리의 읽기와 쓰기가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전,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끝까지 읽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ㅋㅋㅋㅋㅋㅋ 그 책이 어디로 갈지 예상되었으니까요. 전 그런 결론에 동의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친밀한 적>을 읽고 나서는, 다르게 볼 수도 있다는 걸, 다르게 설명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걸 알아보고 생각해 볼 여유가 제 안에 생겼습니다. 조금 더 읽어보겠습니다.

공쟝쟝 2024-08-16 10:47   좋아요 2 | URL
친밀한 적을 읽기에는 너무도 서구화되신 한국인 단발님께 데리다를 함께 읽자고 권합니다. 메롱!

단발머리 2024-08-16 10:58   좋아요 1 | URL
정중하게 반사합니다! 메롱😜

다락방 2024-08-16 09: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진짜 알라딘이 좋습니다. 이런 글을 써주시는 단발머리 님이 계시는 알라딘이 좋습니다. 알라딘이 아니라면 제가 이런 글을 도대체 어디에서 읽겠습니까. 단발머리 님의 독서는 계속 되어야 하며 물론 쓰기도 계속되어야 하는 바, 저는 단발머리 님의 독서에 물질적으로도 도움을 드릴 수 있도록 열심히 돈을 버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단발머리 2024-08-16 10:20   좋아요 2 | URL
알라딘이 아니라면 제가 이런 글을 도대체 어디에 쓸 수 있겠습니까. 저의 알라딘 정착에 바람막이와 그늘이 되어주신 다락방님께 오늘 아침에도 찐~~~~~한 감사의 말씀을, 올려 드립니다.
저의 읽기와 쓰기는 계속되어야 하고 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님의 물질적 지원도 계속되어야 하는바, 오늘도 열일 부탁드리오며, 1인 2메뉴, 달리기, 요가, 스몰 토크, 큰고모 독서클럽. 하나도 놓치지 않고 계속해 주시기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8-16 16: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침 오늘 아침에 유대인 문학평론가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대표작 <미메시스>에서 셰익스피어 챕터를 읽었습니다. 아우어바흐는 셰익스피어의 등장인물 가운데 천민, 평민, 중인 계급 중에서 비극적 인물은 거의 없는데, 유일한 예외가 유대인인 샤일록이었다고 하더군요. 생각해보니 정말 그럴 듯해서 하루종일 기억에 삼삼했다가 단발머리 님의 이 글을 읽게 되는군요. 물론 셰익스피어도 유대인에 대해 절대 호의적이지 않았지만요.

단발머리 2024-08-17 14:23   좋아요 1 | URL
폴스타프님의 삼삼한 기억과 만나게 된 단발머리입니다^^ 저는, 셰익스피어가 호의적으로 쓰지 않았다기보다는 악의적인 면을 잘 ‘가공‘해서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평론가들이 줄창 떠들어내는 대목도 그 부분이라고, 저자는 지적하더라구요. 당시 영국 사회에서 유대인 혐오가 얼마나 방대하고 일반적이었는지를 생각하면, 양반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요.

독서괭 2024-08-16 18: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베니스의 상인 이야기 들으니. 고전문학 속 여성혐오 비판하면 꼭 따라붙는 이야기들이 생각나는군요ㅜㅜ
단발님 덕에 새로운 걸 많이 알게 됐습니다. 치질이라.. 그게 이렇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질병이었을 줄은.. 쿨럭

단발머리 2024-08-17 14:24   좋아요 1 | URL
독서괭님이 무얼 발견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걸 알게 되셨다니 저는 기쁨의 공중 3회전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치질이....... 참 역사가 오래되고 끈질기고 중요한 질병이에요. 그죠?

달자 2024-08-16 23: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런 양질의 글을 읽을 수 있어 너무 벅찹니다… 반유대주의 독서에 균형이랄까(?)를 줄 수 있는 팔레스타인 작가의 소설책 <사소한 일/ 아다니아쉬블리> 살포시 추천하고 갑니다 총총

단발머리 2024-08-17 14:27   좋아요 2 | URL
어머... 반유대주의 독서에 균형을 생각해주시는 달자님의 우정에 감사드리고요. <사소한 일/아다니아쉬블리> 야무지게 적어놓습니다. 줄 서 있는 친구들이 많이 있지만, 얼른 찾아보겠습니다. 감사해요, 달자님!

다락방 2024-08-18 20:00   좋아요 1 | URL
너무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원래는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를 마무리하고, 문학 작품에 나타난 반유대주의와 유대인 혐오에 대해 쓰려고 했다. 다음주는 개학이고, 첫날부터 바쁠 것이 예상되기에 나의 반유대주의와 유대인 탐구는 이번주까지만, 이렇게 생각하고.



무엇이 피해이고, 피해자를 규정할 수 있는 권력의 장소는 어디인가. 진영 논리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논쟁이다. 소모적인 논쟁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다. 가해 피해는 팩트가 아니라 경합의 과정이지만, 경합의조건-다양한 목소리-이 없다는 의미다. 타인을 타자로 만드는 이들은 "우리는 억울하다. 우리는 당신들을 차별하지 않았다. 오히려 존중했다(봐줬다)"고 반발한다. (해설, 357쪽)




피해자성과 피해자 정치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기에 오늘은 적당하지 않은 날이다. 나는, 인도의 피식민지배 경험과 우리의 그것이 여러 측면에서 구별된다고 생각하는데, 그 생각을 정교화하기에도 오늘은 적당한 날이 아닌 것 같다. 이에 대한 연구와 숙고가 지식인, 그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한 걸음 앞서서 나아간다는 건 그런 것일테다. 사람들은 비난할 수도, 비판할 수도 있고, 결정적으로는 그들의 주장을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으나, 그건 그대로 두어야 할 일이고,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책으로, 문장으로, 논리로 그 일을 이뤄가면 될 것이다. 




제79주년 광복절을 맞았다. 강제노동에 대해 명확히 하기 위해 전시시설에 '강제'라는 표현을 명시적으로 담아달라는 한국의 요구를 일본 정부는 거부했다. 우리 정부를 이를 받아들였고,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에 동의했다. 외교부 장관이 말하는 국익이 도대체 어떤 나라의 국익인지를 가늠하지 못하겠는 나는, 한쪽 자리가 텅빈 광복절 행사에서 대통령이 뭐라 할지 궁금해지려고 한다. 미역국을 끓이면서 기다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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