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여자들에게 : 엉망인 여성해방론
다나카 미쓰 지음, 조승미 옮김 / 두번째테제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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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투 투쟁이 한참이었던 때에 신좌파 운동에 함께했던 일본의 여성들은 운동권 내부에서조차 성별 구분에 따라 남성들은 대의에, 여성들은 그 위대한(?) 대의를 위한 뒷바리지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을 것을 강요받았다. 이 책에서도 여러 번, 비슷한 내용이 반복된다.

여자들은 투쟁하는 남자들 뒤에서 투쟁 전단지를 등사기로 긁고 등사판을 밀고, 혁명가인 척하는 남자의 활동 자금을 벌고, 또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돌본다. 이렇게 투쟁에서도 생활에서도 책임이 중하고 부담이 무거운 일상을 담당한다. (이에 대해 조금 감사를 받았다 한들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이런 것에 아무런 의문 없이 여자들에게 불이익을 주면서 혁명론이나 전략, 전술을 짤 때 빙산의 보이지 않는 부분은 배제하는 게 신좌익 남자들이다. 그러면서 "나는 결혼을 한다면 운동은 하지 않는 여자랑 할 거야."라고 말하는 남자가 과연 우리 동지인가? 이런 의문을 제기해도 듣는 둥 마는 둥 흘려 버리고서는 공식 회의석상에서는 "국제 프롤레타리아주의니 뭐니 베트남 민중연대"니 뭐니 하며 뚫린 입이라고 술술 잘도 말하는 남자를 고발해야 한다. 근본적으로는 혁명파 내부에 있는 남녀 차별을 고발해야 한다. (268쪽)

이런 현상은 일본에만 혹은 우리나라에만, 혹은 일본과 우리나라의 운동권에서만 나타났던 건 아니고, 노예 해방 운동을 함께하던 백인 남성들이 백인 여성들을 회의장 입구에서 출입을 가로막았다거나 소련 혁명 성공 이후에 많은 여성들이 권력에 핵심에서 축출되었던 사례들은 이런 현상이 가부장제의 전 세계적 실천임을 확인해준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심상정 의원이 떠오르는데...

가까이에서 보거나 직접 들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남성 중심의 운동권 문화에 반발해 서울대학교 총여학생회를 만들고 초대 회장을 맡았었더라는, 가히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 막막한 현실에 포기하지 않고 그 현실 너머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만들어갔던 여성. 그런 여성, 그런 여성들이 있기는 하다. 저자도 바로 그런 여성들 중의 한 명이다.

같이 읽고 있는 파스텔 핑크의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에는 '공산주의'에 마음을 빼앗겼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고닉은 미국 전역을 돌며 과거 공산주의자로 살았던 수십 명을 인터뷰하며, 공산주의가 남긴 실패와 아이러니에 대해 말한다. 책 소개에는 이 기록이 "조직의 토대와 존재 이유를 고민하는 오늘날의 여러 급진적 사회운동과도 맞닿아 있다"고 쓰여 있다. 공산주의의 '환영'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끼게 되는건, 90년대말 한국 대학생 기독 부흥 운동의 언저리에 있었던 경험 때문이다. 현실에 발 디딘 채로 이제 막 발견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질주, 노력, 헌신. 나는 그에 대해 1, 그래, 1 정도는 아는 사람이라서, 그 때의 감정, 결심, 그리고 함께 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날 때, 아쉬움과 아련함이 동시에 일어난다.

'깨닫게 되었을 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기독교가 그렇고, 공산주의가 그러하다. 한없이 낭만적 미래를 상상하는 것도, 자신의 변화를 주위에 알리며 그들을 '포섭'하려 하는 것도 기독교와 공산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공산주의의 이상은 평등에 기초한다. 따라서, '정해진' 운명에 순응해야 한다는 이전의 관념과 문화의 반대편에 존재한다. 인권 개념과 연관지어 실천적으로 적용된다면, 인간이 탐욕과 욕망으로 가득찬 존재임를 좀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공산주의야말로 완벽한 인간 사회의 지향점이 되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공산주의의 미래는 핑크빛이 맞다. 그래서 그 이상향 실험은 이미 실패하였고.

그랬던 여성들, 혁명의 동지이며 일원이었던 여성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외침에 떨치고 일어섰던 여성들은, 자신은 혁명의 일원이 아님을, 남성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않음을 발견한다. 그녀들의 노동은 '자연적'이라고 여겨지며 그러한 노동의 지속한 수행이 여전히 여성에게'만' 강제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충격에 빠진다.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여자'임을 발견하는 순간. 그 부조리함에 대한 논증과 현실에 대한 비판, 그리고 거침 없는 반성이 반복해 이루어진다.

거친 면이 적잖이 보이고, 논리의 전개에서 아쉬운 면이 없지 않으나,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맡겨진 문제에 대면하는 그녀의 용기에 응원을 보내며 간신히 읽기를 마쳤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책을 다 읽지는 않더라도, 저자에 대한 짧은 글이라도 읽고 싶다면, 역사적인 문건이라 불리는 <변소로부터의 해방>이라도 읽기를 권하고 싶다. 저자에게 박수를, 그리고 이 책을 마저 읽은 우리 모두에게 박수를 보낸다.



재산 보전과 상속을 목적으로 한 경제 체제는 여자의 성적 욕구를 남자와 가정에 매어 놓음으로써 순혈주의를 유지하려고 한다. 여자한테만 적용하는 일부일처제가 그것이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마음과 몸의 영위 과정에 반하는 일부일처제는 여자와 아이가 남자에게 의존하게끔 하는 경제 구조를 바탕에 깔고 있다. 또 체제에 위기가 오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의 핵심에 성을 더럽고 천하고 부끄러운 것으로 경멸하는 의식 구조가 자리 잡도록 해서 지금까지 위기를 극복해 왔다. 일부일처제는 본질적으로 여자의 경제적 자립과 성적 욕구를 틀어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성을 업신여기는 의식 구조는 여성에 대한 억압을 더 강하게 한다. (345쪽)

계급사회란 ‘누구하고도 제대로 만날 수 없게 하는 체제‘를 말한다. 아픔을 아프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실제로 아프지 않은 사람이 아니고, 언제까지나 자신이 빛 쪽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이다. 아픔을 아프다고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주문에 걸린 사람이다. - P191

여성해방이란 여자들이 힘을 모아 여자가 살기 힘든 현실을 깨부수는 것이며, 동시에 서로 갈등하고 미워해 온 여자와 여자의 관계성 속에 에로스를 되살리면서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자에게 에로스는 나의 자궁, 즉 나의 자연과 내가 서로 소통하는 가운데 나온다. 소통은 ‘여자인 것‘에서 오는 아픔과 대화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 P214

몇 차례나 되풀이하지만, 우리에게는 항상 두 가지 본심이 있다. 체제의 가치관에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은 나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나 이런 두 사람이 항상 공존한다. 속마음과는 달리 우리는 체제의 가치관을 뿌리칠 것이냐, 받아들일 것이냐를 놓고 고민하다가 겉으로는 체제의 가치관을 뿌리치는 척하고, 살아 있는 자신의 내면은 체제의 가치관에 계속 종속하게끔 내버려둔다. 이런 금욕주의는 어김없이 내 안에서 고름으로 변한다. - P277

우리는 여성의 해방 문제를 성의 해방 문제로 제기한다. 성을 부정하는의식 구조에서 자신을 해방할 것을 제기한다. 스스로 내부에 있는 발기부전(=성을 부정하는 의식 구조가 규정하는 정신적인 다양한 무기력함)을 해체하기 위해, 남자와 권력에 대한 투쟁을 결의하자. 그 결의를 호소한다.

여자에서 여자로, ‘변소‘에서 ‘변소‘로!
단결이 여자를 강하게 한다.
같이할까요? - P358

여자들은 투쟁하는 남자들 뒤에서 투쟁 전단지를 등사기로 긁고 등사판을 밀고, 혁명가인 척하는 남자의 활동 자금을 벌고, 또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돌본다. 이렇게 투쟁에서도 생활에서도 책임이 중하고 부담이 무거운 일상을 담당한다. (이에 대해 조금 감사를 받았다 한들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이런 것에 아무런 의문 없이 여자들에게 불이익을 주면서 혁명론이나 전략, 전술을 짤 때 빙산의 보이지 않는 부분은 배제하는 게 신좌익 남자들이다. 그러면서 "나는 결혼을한다면 운동은 하지 않는 여자랑 할 거야."라고 말하는 남자가 과연 우리동지인가? 이런 의문을 제기해도 듣는 둥 마는 둥 흘려 버리고서는 공식 회의석상에서는 "국제 프롤레타리아주의니 뭐니 "베트남 민중연대"니 뭐니 하며 뚫린 입이라고 술술 잘도 말하는 남자를 고발해야 한다. 근본적으로는혁명파 내부에 있는 남녀 차별을 고발해야 한다. - P370

여자에게 결혼이란, 또 결혼식이란, 아내로 엄마로 암컷의 생을 살아 내기 위한 결의를 세상에 알리는 창구이다. 생각건대 공인된 포르노인 결혼은 거리에서 남녀 간 성행위 퍼포먼스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더욱 우스운 것은 거리를 지나며 그 퍼포먼스를 본 사람들이 누구도 성행위를 보지 않았다고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와 비슷하게 입모아 거짓말을 하는 꼴이다. 이렇게 결혼 포르노가 상연되어 왔다. 그러니까 모두가 결혼이 포르노인 것을 알고 있는데도, 포르노라고 외친다면 이 세상의 중심 뼈대에 금이 갈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이 공인된 포르노 ‘결혼‘이 계속 상영될 수 있다는 소리이다. 이런 속임수를 숨기려고 ‘예술이냐 외설이냐‘ 왈가왈부한다. 마치 결혼 이상으로 외설적인 것이 있는 것처럼 여기게 하고서 체제를 정비한다. - P63

그러나 고통은, 어둠은, 그것을 고통으로, 어둠으로 느끼는 개인에게는 항상 절대적인 것이다. 물론 이것이 아픔에 한 번 매달리게 되면그것에서 떠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어둠은 이 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에서 자신이 벗어나고 말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래서 어둠을 어둠으로 제대로 느끼고 따지며 묻는 중에 이 사회의 가치관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인지 깨달을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새로운 가치로 창조할 수 있을 터이다. 스스로 오직 어둠을 향해 달리는 가운데, 진정한 주체성이 확립된다. 이것은 관념론이 아니고, 분명 변증법적인 발전이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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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2-02 1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느라 고생하셨고 완독하심을 축하드립니다. 글을 적어주셔서도 감사드리고요.
공산주의 로맨스..는 저도 살까말까 계속 고민중인 책입니다. 제가 고닉을 좋게 읽은 경험이 없어놔서리... 그런데 공산주의 로맨스.. 너무 읽고 싶은 제목이고 말이지요. 흠흠.

단발머리 2024-12-02 16:07   좋아요 0 | URL
이렇게 또 한 권을 완독 리스트에 올리게 되네요. 엄청 뿌듯합니다.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는 딱 고닉 같은 책이어서요. 인터뷰 모음집, 정확히는 인터뷰 후기 같은 건데 저는 고닉 좋아해서 잘 읽어가고는 있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책이 예뻐서. 파스텔 핑크!

독서괭 2024-12-03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님의 서재 달인을 축하드립니다. 너무 당연하지만..
저도 걱정했지만 되었더라고요 ㅋㅋㅋ 단발님이 얘기해주신 거죠? 감사합니다!! ㅋㅋㅋ

단발머리 2024-12-03 18:50   좋아요 1 | URL
사실 제가 아침에 메일 넣었어요. 함께한 정이 있지 않냐… 한 달 공백 정도는 봐줘라~~ 내년에 잠사모 활동도 열심히 하시라 권할테니 이번에는 좀 ㅋㅋㅋㅋㅋㅋ🤣 축하드립니다, 독서괭님!

공쟝쟝 2024-12-04 0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밤 사이 안녕하셨습니까?.... 계엄 땜에 혹시나 서재의 글을 근거로 잡혀가진 않으셨을란가 걱정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 함께 윤씨를 정털려한 시간이 얼만데... 단발머리님을 잡아갈 거면 나도 잡아가라!!

단발머리 2024-12-04 08:26   좋아요 1 | URL
나를 고발하라! 도 아니고 나를 잡아가라! ㅋㅋㅋㅋ웃을 수 있어서 슬프고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이 촌극이 아니라 실제였는데 말이지요 ㅠㅠㅠ

공쟝쟝 2024-12-04 09:01   좋아요 0 | URL
아 잠 설쳐서 넘나 곤피허구먼요
 
유대인의 역사
폴 존슨 지음, 김한성 옮김 / 포이에마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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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서술에서 '팩트'는 규정하기 어려운 단어다. '일어난' 일에 대한 해석에 서술자의 판단이 개입되는 것은 물론이고, 사건의 '선택' 역시 서술자(만)의 것이므로 보여지는 것 너머를 '상상'해야 하는데, 과거에 대한 접근은 많은 에너지를 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팩트인가. 어떤 팩트를 '선택'할 것인가. 알아야 할 일과 몰라도 될 일. 기억해야 할 일과 잊어야 할 일. 감춰야 할 일(여당 입장에서 채상병이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과 밝혀져야 할 일(유가족 입장에서 채상병 사건과 관련된 외압).

『유대인의 역사』는 어디까지나 '폴 존슨'의 유대인의 역사다. 따라 읽다보니 나는 그 사실을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는데 일단은 내가 모르는 역사적 사건들이 주는 압박, 이를 테면 1648년 대재앙 같은 사건들.

1648년 늦은 봄, 마침내 우크라이나 농부들이 들고 일어났다. ... 툴친에서는 자기들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폴란드군이 유대인을 코사크인에게 넘겨주었다. 테르노필에서는 성의 수비대가 유대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바르에서는 요새가 무너져 모든 유대인이 몰살당했다. (447쪽)


유대인들이, 집단으로서의 유대인이 얼마나 일관되게 '박해받았는지'에 대한 확인의 과정이 내게는 무겁고 놀라웠다. 내가 모르는 역사적 사실들, 억압과 박해와 강제 이주, 살해 위협과 대량 학살의 엄중함이 나를 저자에게 바짝 붙어 있도록 만들었다. 나는 저자의 말을 완전 신뢰하기에 이르렀는데…

아, 마르크스. 마르크스에 대한 서술을 읽어가면서 나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게 되었으니, 마르크스 부분을 읽어가면서 저자 역시 인간이며(쩝, 당연한 사실을...), 인간이기에 특정 사안, 특정 인물에 대해 갖고 있을 법한 감정의 오묘함을 어렴픗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조금 뒤쪽에서는 프로이트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는데, 가장 '유대인적인' 두 사람,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한 서술은 가히 대조적이다. 마르크스에 대한 적의('마르크스의 이론은 과학적인 이론이 아니라 그럴싸한 유대인의 미신에 불과하다', 591쪽)만큼 프로이트에 대한 호의('그는 인류에게 새로운 거울을 주었다', 704쪽)가 빨간색과 파란색처럼 강한 대비를 이룬다. 이쯤에서 다시 확인하게 되는, 저자 소개. 나는 그가 충실한 가톨릭 신자임을 잊었었구나. '종교적으로 보수 성향의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해방신학을 이단으로 여기고 사제 독신주의를 옹호했으나 여성 사제 서품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던 폴 존스를. 기독교인이면서 빨갱이인 테일 이글턴, 그래서 더 소듕해.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다.

6부는 유대인의 전체 역사 가운데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홀로코스트, 반유대주의의 결정판과도 같은 비극의 역사를 다룬다. 프레모 레비의 책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나를 제일 놀라게 했던 바로 그 지점, 유대인들, 독일에 살던 유대인들 중의 많은 수가 스스로를 '독일인'이라 여겼던 그 지점을 폴 존스도 반복한다.

유대인은 독일을 고향처럼 생각했다. 독일은 학자들이 존경받는 사회이고 일부 가치관은 유대인 사회의 학자 지도 체제와 일치했다. 노력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 이 황금기에 유대인은 예쉬바에서 독일 대학으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겼다. (683쪽)

그랬던 유대인들, 독일을 고향처럼 생각했던 유대인들은 학교에서 쫓겨나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재산을 압수당하고, 출입이 제한되는 일련의 과정에 더해 급기야 이주를 '명령' 받는다.

유대인의 역사, 신학, 전통 문화, 사회, 구조, 심지어 그들이 사용하는 어휘까지도 타협하고, 값을 치르고, 애원하고, 항의하되 싸우지는 말라고 가르쳤다. (819쪽)

현재의 당면한 고난이 그들을 더욱 강하게 할 것이고, 이 고난의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는 공통의 신념, 지나한 과거로부터 선조들을 통해 얻은 경험은 '순순히' 독일 나치당의 요구에 응하도록 만들었다는 것, 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홀로코스트가 히틀러라는 이상하고 특이한 사람의 기이한 행적으로 인한 비극이 아님을 수차례 반복한다.

실제로 학살을 자행한 것은 친위대이지만, 독일의 모든 부처와 군대, 산업계, 당이 무시무시한 범죄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역사가 라울 힐베르크가 지적한 것처럼 조직 간에 아주 완벽한 협력이 이루어져서 모든 조직이 한 몸을 이룬 거대한 기구처럼 학살 작전을 자행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832쪽)

히틀러 정부가 독일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 탄성한 합법적인 정부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에 대한 모든 정치적 박해는 법에 의거한 '합법적'인 절차였다. 독일인들은 유대인 절멸에 대한 히틀러의 집념이 신앙에 가까운 정도였음을 알고 있었다. 구두로만 지시했다는 히틀러의 여러 명령들은 그의 충실한 부하들을 통해 전해졌고, '독일의 모든 부처와 군대, 산업계, 당', 그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범죄에 가담했다.



1933년 아렌트는 정권을 장악한 나치의 박해를 피해 어머니와 함께 독일을 떠나 프라하에서 제네바를 거쳐 파리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 곳에서 중동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고국을 건설하려고 했던 시오니즘zionism 운동에 협력했다. 유대인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유대인으로서의 자기 존재의 의미, 유대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아렌트는 시오니즘 운동과는 차츰 거리를 두지만, 유대인을 처음으로 정치적 무대에 등장시켰다고 하여 시오니즘을 높이 평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아렌트가 유대인의 민족적 기치를 내걸고 연합국에 협력하는 유대군 결성에 지지를 보냈다는 사실은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정치 활동을 중시했던 그녀의 사상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한나 아렌트>, 18쪽)

1940년 6월, 프랑스가 항복하고, 독일이 파리를 점령했던 혼란의 시기에 아렌트는 기지를 발휘해 수용소에서 '걸어서' 탈출한다. 만약 그 때 머뭇거렸다면, 다른 판단을 했더라면 그녀는 독일군에 의해 다른 수용소로 이동했을 테고, 그랬다면 대부분의 유대인들과 비슷한 결말을 맞았을 것이다. 그랬던 그녀가, '정체성의 정치'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사유하지 않음'으로 인한 비극적 결과에 대해 말한다. 나는 그녀의 뜻, 의도를 정확하게,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자신의 민족이 처한 참혹한 역사 속에서도 그런 경지에까지 사고를 확장시킨것에 대해서는 무한 존경심을 표하고 싶다.

학교와 병원, 공터에서 축구하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구경하고 있는 부모에 대한 '의도적' 폭격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멸절, 팔레스타인의 절멸을 유대인들은 원하고 있다. 자신의 선조들의 고통을 그대로 되돌려주겠다는 결심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두껍고 무거운 책을 무사히 마쳤다. 가자 지구의 폭격이 계속되는 한 피로 얼룩진 유대인의 역사는 멈춰지지 않는다. 가해자인 유대인들이 멈추지 않는 한, 저주의 시간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 지옥을 끝낼 사람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들, 유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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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1-24 2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껍고 무거운 책 다 읽어내심을 축하드립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단발머리 2024-11-24 21:36   좋아요 0 | URL
감사감사감사링! 💗💕💖 <기독교의 역사>도 읽어볼까 해요. 폴 존슨의 책이 많더라고요.

다락방 2024-11-25 11:44   좋아요 1 | URL
아앗 저도 기독교의 역사도 읽어보려고 벼르고 있습니다. 물론 유대인의 역사도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고요.

공쟝쟝 2024-11-25 18: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으아.. 저 두꺼운 걸 누가 읽느냐 했더니.... 으아... 반유대주의에 지대한 탐구중인 단발님이 읽으신다 ㅋㅋㅋㅋ 대박.. 대박!

단발머리 2024-11-27 16:13   좋아요 1 | URL
완독자의 미소를 보시오 ㅋㅋㅋㅋㅋㅋㅋㅋ 브이!

그레이스 2024-11-27 16: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메노라만 봐도 그들의 고난이 떠오릅니다.
폴 존슨 <근대의 탄생>은 저 두께로 두권짜리 인데... 언제 읽을까 싶습니다. 괜히 잘 있나 책장만 뒤적거렸습니다.^^

단발머리 2024-11-27 16:14   좋아요 1 | URL
근대의 탄생이..... 폴 존슨 버전이 있군요! 저 오늘 알았는데, 그레이스님 댁에는 이미 준비되어 있는거에요?
우아, 대박입니다. 저는 폴 존슨의 <기독교의 역사>를 내쳐 읽어볼까 싶은데 가능할까 모르겠어요. 그 다음은 <근대의 탄생>으로 할까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24-11-28 0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인용에 페이지 적혀있는데 ˝819˝라고 써 놓으니까 진짜 위풍당당 장난 아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4-11-30 15:26   좋아요 0 | URL
위풍당당 얼렁뚱땅 ㅋㅋㅋㅋㅋㅋㅋ 이거 진짜 장난 아닙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4-12-01 0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닐라라떼 한 잔이 믹스커피 일곱 잔 보다 더 몸에 안 좋대요, 단발님, 이렇게 두꺼운 거 읽느라 바닐라라떼 필요한 건 알겠지만 그냥 라떼 마셔요. 책 이야기는 윗분들이 다 하셔서 난 패스~~~

단발머리 2024-12-02 12:48   좋아요 1 | URL
이 댓글 그대로 읽어줬어요, 식구들한테.... 옳은 말만 하는 친구라고 하던데요.
이제 라떼도 몸이 안 받아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제 나도 아메리카노의 세계로 들어가야 할 터인가. 나는 이제 어른이 되려고 그러는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4-12-02 13:31   좋아요 1 | URL
케이크 먹으면 아메리카노 마셔도 돼 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4-12-02 13:36   좋아요 1 | URL
네에 ㅋㅋㅋㅋㅋㅋㅋ🤣
 
















아렌트의 이 사진을 보고 친구는 덕질하기 참 좋은 철학자라 했는데 나는 아렌트의 박사 논문을 보완한 그 책의 아렌트 사진을 더 좋아라 한다. 며칠 전에 큰애가 자기 책을 내 칸에서 찾다가 ‘이 비닐도 안 벗긴 책 뭐냐‘ 물어서 아렌트라고 답했다. 언제나 아렌트는 ‘읽을 예정’. 읽으려고 샀단다.







덕질하기 좋은 배우는 계속 작품하는 배우이듯 진짜 좋은 저자란 신간이 계속 나오는 사람 아닌가 싶다. 체슬러 좋아하지만 <여성과 광기> 개정판 이후에는 조용하고 (조용하지 맙시다, 출판계여…) 이미 절판된 책이 남았고, 다른 책은 알아서 원서로 읽으라는 건가요.



그런 의미에서 아렌트가 덕질하기 좋은 철학자라는 말은 맞는 말인듯 하다. 그래서 오늘은 아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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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1-23 1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 어제 중고서점 갔다가 아렌트 책 샀는데요!!(월요일 페이퍼 등장 예정) 여기서 이렇게 아렘트를 똭!!

단발머리 2024-11-23 10:58   좋아요 0 | URL
어머! 아렌트 책 뭐 사셨을까 궁금하네요~ 이제 중고서점까지 싹슬이 하시는 겁니까? ㅋㅋㅋㅋ 저 중고서점 안 가본지도 어언…. 한 번 나가 봐야겠어요. 팔 책 있나 찾아보고요 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4-11-23 12:40   좋아요 1 | URL
기대한다락방!

단발머리 2024-11-23 12:54   좋아요 0 | URL
잠자냥님의 과한 기대에 ‘좋아요!‘ ㅋㅋㅋㅋㅋㅋㅋ 겁나좋아락방!

그레이스 2024-11-24 0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덕질하기 좋은 철학자!^^

단발머리 2024-11-24 21:01   좋아요 2 | URL
후후훗ㅋㅋㅋㅋㅋ 맞습니다! 덕질하기 좋은 철학자에요, 아렌트요!!

공쟝쟝 2024-11-24 0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 어쩜 책 색깔도 초록초록~! 제 앞에 저 세트 하늘🩵푸코 있다용!

단발머리 2024-11-24 21:03   좋아요 1 | URL
아렌트만큼이나 어쩌면 아렌트보다 더 덕질하기 좋은 철학자가 푸코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누가 하이데거를, 후설을, 칸트를 덕질할 것인가.
누가 알튀세르를, 라캉을 ㅋㅋㅋㅋㅋㅋㅋㅋ근데, 있더라구요. 알튀세르, 라캉, 데리다 좋아하는 사람 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4-11-24 21:04   좋아요 1 | URL
주디스 버틀러요? ㅋㅋㅋ 🤦🏻‍♀️

단발머리 2024-11-24 21:09   좋아요 1 | URL
앜ㅋㅋㅋㅋㅋ 버틀러ㅋㅋㅋㅋ 버틀러는 사랑이죠! 💕
다른 건 모르겠고, 일단 그것만 말씀드리고 싶어요. 위의 다른 분들꺼는 ㅋㅋㅋㅋ 프랑스어, 아님 독일어 배워야 ‘원서‘로 읽을 수 있죠. 버틀러꺼는ㅋㅋㅋㅋㅋㅋ 영어 알죠? 영어로 읽을 수 있다고 합니다. 메롱!

공쟝쟝 2024-11-24 21:1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오우 노우 ㅋㅋㅋㅋ
 












일단 목차를 살펴보자면.

살펴봐야한다. 왜냐하면, 현재상태 품절이고 근처 도서관, 3개구 20여개의 도서관에서 찾을 수 없는 책이기에, 소중한 책이기에. 목차부터 살펴봐야한다.

1부 식민주의들

1장 세계를 상상하기

2장 지식과 권력

3장 권력의 경관

2부 포스트-식민주의들

4장 새로운 질서?

5장 코카콜라인가 메카-콜라인가?

글로벌화와 문화 제국주의

3부 포스트식민주의들

6장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7장 포스트식민 문화

8장 안락의자를 떠나며?

제목에 걸맞게 포스트 식민주의와 지리에 관련된 부분이 포함되어 있기는 한데, 공간감각능력이 현저하게 부족한 나로서는 이해가 어려워서 설렁설렁 읽을 수 밖에 없었다는 슬픈 이야기.

유럽인들은 다른 민족과의 조우 과정에서 그들을 괴물 인종으로 묘사한다. 방점은 유럽인과의 차이(35쪽)였는데, 비교함에 있어서 기준점은 언제나 유럽인이었다. 옳고 정상적인 상태의 유럽인과 그러지 않은 다른 민족을 비교했던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사이드(1978: 72)에 따르면, 오리엔탈리즘에서 동양인은 '그에 상응하는 유럽인에 대해 대칭적이지만, 항상 그들과 정반대로 열등한 존재이다'. 서구 사상사에서 차이에 대한 분류학은 '다르지만 동등한' 존재를 한 번도 허락한 적이 없다. 서구 사상은 이분법적 쌍에 가치를 부여함에 있어서, 항상 어느 하나에 다른 하나보다 더 우월한 지위를 부여했다. 어떤 경우에는 서양의 가치가 정의되고, 동양은 그것으로부터 이탈됨을 의미했다. 또 다른 경우 서양의 가치는 보편화되어 어떤 행위의 '유일한' 길로 정의되고, 그것에 상당하는 동양의 대립물은 단순히 잘못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44쪽)

남성과 여성,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탈식민주의 공부의 시작점은 양쪽으로 구분된 두 개념이 동일한 가치를 부여받지 못했다는 걸 이해하는 데 있다. 남성에게 있어 여성은 다른 성의 소유자가 아니라, '남자가 아닌 성'이다. 서양에게 있어 동양은 '서양이 아닌 모든 것'과 마찬가지이다. 정희진쌤의 말을 그대로 가져 온다.












이분법은 반반으로 분리된 상황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체와 타자가 하나로 묶인 주체 중심의 사고다… 주체(one)가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삼아 나머지 세계인 타자(the others)를 규정하는 것, 다시 말해 명명하는 자와 명명당하는 자의 분리, 이것이 이분법(dichotomy)이다. 즉 이분법은 대칭적, 대항적, 대립적 사고가 아니라 주체 일방의 논리다. … 젠더(gender)는 남성의 여성 지배를 의미한다. 양성은 두 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성성 하나만 존재한다. 남성성은 젠더가 아니다. 남성적인 것은 남성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33쪽)

같은 이야기를 도나 해러웨이는 이렇게 썼다.












섹스/젠더, 자연/문화가 그런 이원론에 포함된다. 한쪽을 특정하거나 이해하는 일은 다른 쪽을 규정하는 매우 세부적인 사항과의 차이에 의존한다. 다른 것과 구별되며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위치 혹은 대상은 독특함과 우월성이라는 의미의 측면에서 부차적인것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보다 열등한 것, 즉 자원으로 낙인찍힌 쪽 없이는, 보다 위대한 것, 문화의 비범한 특질인 쪽도 자신이 이야기하고 규정하는 것, 자신이 체현하고자 하는 것이 될 수 없다.(『도나 해러웨이』, 61-2쪽)

왼쪽, 그러니까 남성과 서양, 유럽인과 식민지배인이 판단의 '기준'으로 작동하게 되었을 때, 여성과 동양, 유럽 외 지역의 모든 피억압자들은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기에 열등함의 범주에 갇혀 버리게 된다. 남성/인간/문명/서양/백인은 위대하고 비범한 존재로, 여성/동물/자연/동양/유색인은 열등하고 평범한 존재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이는 '동양에 대한 판단'을 근거로 서구 유럽이 스스로를 창조했다는 것이고, '나 이외의' 모든 세계에 대해 '비도덕적이다' 혹은 '미신적이다'라고 규정할 수 있는 힘을 서구 유럽이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책을 찾아봐야겠다 했던 건, 표지의 이 사진 때문이었다. 얀 반 데르 스트라에의 <아메리카>



식민지배자와 피식민지배인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보인다. 옷을 제대로 차려 입고 서 있는 남성과 벗은 몸으로 누워 있는 여성. 침략자이며 계몽 군주를 자처하는 서양이 위풍당당한 남성의 모습으로, 자연이며 미개를 상징하는 동양(혹은 피식민지)이 나른한 모습의 여성으로 투영되어 있다.


책 속의, 사진 설명에서는 '아메리카에 도착한 콜럼버스가 어떻게 재현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의미로 이 사진을 사용하고 있다. 얀 반 데르 스트라에의 <America>를 검색하다 보면, <그 사람 콜럼버스가 아니고 아메리고 베스푸치로 밝혀져...> 이런 속보를 접하게 된다.




주의해서 보고 싶은 부분은, 옷 입은 남성과 옷 벗은 여성의 사이, 저 멀리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사람들이 모닥불에 뭔가를 굽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하반신... 평화롭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그들은 반드시 미개한 풍속을 갖고 있을 거라는 유럽인의 망상, 기대, 희망이 이런 방식으로 '현실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현장이다.

광고 속에서 만들어지는 식민주의적 관점과 건축과 도시 건설이 권력의 경관을 만들어가는 과정, 스피박의 전략적 본질주의에 대해서도 잠깐씩 언급하고 있는데, 그 부분은 일단 스킵하도록 하자. 투어리즘에 대한 부분이 기억에 남는데, 이제 당당한 제1세계의 일원이며, 그 어느 때보다도 해외여행이 보편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외국을 '여행한다'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자본주의, 소비주의와 맞닿아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이 책의 백미라고 한다면, 포스트식민주의 페미니즘에 관한 부분인 듯 싶다. 미국의 대통령 조지 부시는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을 정당화하며 자신들의 침략/침공/전쟁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해방될 수 있을 거라 주장한다. 이에 대해 인도의 소설가이자 정치 활동가인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 2002)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전쟁의 핵심은 탈레반 정권을 와해시킴으로써 아프가니스탄 여성을 부르카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달리 말해 미국 해병대는 페미니스트 미션을 수행 중에 있다는 주장을 믿도록 요구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 (미국의 동맹국인 사우디아라비아나 남아시아의 일부 지역과 같이 여성이 심각하게 학대받고 있는 다른 지역들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렇다면 '그들'도 폭격되어야 하는가? 델리, 이슬라마바드, 다카도 파괴되어야 하는가? 인도를 폭격하여 그러한 (여성에 대한) 극심한 편견을 없애 버리는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목적을 통해 페미니스트의 천국으로 가는 길을 만들 수 있는가? (201쪽)

저자는 이것이 '여성 무슬림을 둘러싼' 베일의 정치politics of the veil와도 관련되어 있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여성주의책 같이읽기의 『다문화주의와 페미니즘』을 읽으면서 한 번 정리한 적이 있어서, 그 글의 링크를 여기에 붙여둔다. ([다문화주의와 페미니즘] 명예살인과 히잡,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5789788)

가부장제에 따른 억압 뿐만 아니라, 글로벌 경제체제, 인종, 계급의 요소가 교차해서 이중 혹은 삼중으로 자신들의 삶을 억압하고 있음을 제3세계 여성들이 소리 높여 외칠 때, '여성 먼저'라는 말은 공허하게 들릴 수 있다. 인종주의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람이 없을 테고, 자신의 계급을 완벽하게 부정할 수 있는 사람도 없을테지만, 그 모든 혼돈과 혼돈의 해결을 그들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을테니 어떤 식으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큰 지혜와, 가끔은 그 모든 차이를 뛰어넘는 연대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혼자서만 그렇게 생각해본다.

반납일이 재깍재깍 다가오는데 이런저런 일이 많아 생각만큼 잘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이만큼이라도 정리했다는데 의의를 둔다. 나는 자주, 나를 후하게 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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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11-20 19: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 부시의… 😨 화나요… 부시 부셔버려…

단발머리 2024-11-22 11:49   좋아요 0 | URL
아들 부시, 나쁜 부시
부시 부시, 부셔 버려
부셔 부셔, 부셔 버려...

달자 2024-11-21 0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하기 힘든 책이군요 너무 읽고 싶네요.. 근데 일단은 두꺼운 오리엔탈리즘부터 빨리 읽는 걸로…(진도 너무 안나감)

다락방 2024-11-21 11:29   좋아요 1 | URL
오리엔탈리즘 읽기 너무 힘들었어요. 저는 끙끙대며 다 읽긴 했는데 기억은 하나도 안나요. 이건 읽은게 아니야.. ㅠㅠ 진도 진짜 안나갑니다 ㅠㅠㅠ

달자 2024-11-21 22:12   좋아요 0 | URL
책이 원래 어려운건지 번역이 매끄럽지 않은건지 전 영어를 못해서 알 수는 없겠지만… 암튼 한국어로 읽어도 뭔소린지 모르겠더라구요 넘 어려움

단발머리 2024-11-22 11:51   좋아요 1 | URL
오리엔탈리즘을 완독하신 분/그리고 읽고 계신 분이 제 방에 오셔서 제 방이 얼마나 고급질 것이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아할 것이며....
저는 오리엔탈리즘 반 정도 읽고 일단 다시 꽂아둔 상태에요. 언젠가~~로 미뤄두고 있는데 비밀로 좀 해주세요.
저는 사이드에 죄송한 마음에 대신 사이드 관련 책을 두어권 읽었던 거 같아요.

사이드라고 한다면......... 전 오에 겐자부로의 책에서 그 이름을 처음 들었는데, 오에가 너무나 좋아하는 거예요. 사이드를요. 그래서, 궁금하더라구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상 저의 오리엔탈리즘-사이드-오에 토크였습니다^^

2024-11-21 1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1-21 2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깜짝 놀랄만한 말들이 무수히도 쏟아지는 귀중한 책을, 읽고 있다.

책이라는 물성을 통해 만났다는 점에 방점을 찍으면 아니, 그러니깐 그게 그쪽으로 가는 건가요? 이게 논리적으로? 어떻게?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라고 묻게 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이 책의 주장이 비논리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커피 한 잔 마주하고 앉아 나보다 나이가 00살 많은 여성주의 운동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면 훨씬 술술 읽힌다.

여성주의 책 어디 한 권 쉽거나 만만할까. 각기 제각각 통쾌함과 무거움, 그리고 통찰을 가득 안고 있음이 분명한데, 아무튼 내 읽기 역사에서 제일 충격적인 문장은 바로 실비아 페데리치의 그것. 그러니깐 이런 문장.











우리는 하녀이자 매춘부이고 간호사이자 정신과 의사이다. (45쪽)

읽다 책을 덮어버리게 만드는, 책을 들고 있는 손을 덜덜 떨게 만드는, 더 읽어야하나 고민하게 만드는, 그런 문장이라 하겠다.


이 책에서는 이런 문단이 눈에 들어온다.

즉 궁극적으로 권력자는 우리의 에로스를 성기 에로스로 추락시킬 목표를 갖고 있다고 봐도 좋다. 여자에게서 경제적 자립을 빼앗고, 가족을 바탕으로 수컷 암컷이 한 쌍이 되어야 살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낸 권력의 목적은 바로 우리의 에로스를 성기 중심 에로스로 뭉개는 것이다. 말하자면, 경제적 억압은 그 수단에 불과하다. 성기 중심 에로스란 여자와 남자를 암컷 수컷으로 삼아 성기로 결합시키는 것이며, 그런 결합에서 뭔가 의미를 찾고 기쁨을 느끼게 하려는 획책이다. 여자와 남자의 관계를 성기 에로스로 떨어뜨리는 사회가 포르노그래피로 성립한 사회이다.(62쪽)

상상력의 극치인 에로스를 성기로만 묶어두려는 권력자의 획책을 저자는 통렬히 비판하는데, 나는 그의 생각에 대부분 동의하기는 하지만, 결혼한 여성 대부분의 삶을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에로스라기 보다는 '자식' 혹은 '자식에 대한 상념'이 아닌가 싶다.

섹슈얼리티를 섹스로만 한정해서 볼 수 없겠지. 그러면 안 될테고. 물론 이건 나만의 생각,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내 또래의 여성, 기혼 여성들의 가장 큰 화두는 <1. 자식 2. 자식 3. 자식>이어서, 이 세상 무슨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던지 모든 이야기는 '자식' 이야기로 수렴되고. 나라걱정, 살림살이 걱정을 넘어서는, 너나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자식 걱정'이 제니의 만트라처럼 후렴구로 반복, 또 반복된다.


진정한 해방은 성 해방이 아니라, 출산 거부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게 하는 '자식 걱정'의 소용돌이.

파고와 돌풍과 소용돌이를 헤치고 조금 더 읽어보자.

아내는 돈을 벌고 남자는 혁명을 하는 분업 체제가 지금 세상에서남녀가 존재하는 방식과 대체 어디가 어떻게 다르다는 말인가? 남자가 자신의 아픔을 찾으면서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면, 여자에게는 항상암컷으로, 혁명을 향한 남자의 대의를 내조하는 일로 공을 세우는 데 진력을 다하는 길만이 허용된다. 여자가 각목을 들고 싸워도, 설령 폭탄을 갖고 체제와 싸운다 한들 그렇다. 자기 아픔을 가지지 못한 남자조직에서는 암컷을 어떻게 사용하는 게 가장 효율이 좋은지 그 방식을더할 수 없이 크게 보여 준다. 그래서 여자 (혁명) 병사의 출현을 허락하는 것일 뿐이다. - P58

여자에게 결혼이란, 또 결혼식이란, 아내로 엄마로 암컷의 생을 살아 내기 위한 결의를 세상에 알리는 창구이다. 생각건대 공인된 포르노인 결혼은 거리에서 남녀 간 성행위 퍼포먼스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더욱 우스운 것은 거리를 지나며 그 퍼포먼스를 본 사람들이 누구도 성행위를 보지 않았다고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와 비슷하게 입모아 거짓말을 하는 꼴이다. 이렇게 결혼 포르노가 상연되어 왔다. 그러니까 모두가 결혼이 포르노인 것을 알고 있는데도, 포르노라고 외친다면 이 세상의 중심 뼈대에 금이 갈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이 공인된 포르노 ‘결혼‘이 계속 상영될 수 있다는 소리이다. 이런 속임수를 숨기려고 ‘예술이냐 외설이냐‘ 왈가왈부한다. 마치 결혼 이상으로 외설적인 것이 있는 것처럼 여기게 하고서 체제를 정비한다. - P63

그러나 ‘여자라는 것‘으로 입게 된 고통인 이상, 그 아픔을 부조리하다고 보는 것은 내가 ‘여자라는 것‘으로 살아가는 일의 부조리함을생각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 그런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아도 스스로가 ‘여자라는 것‘ 때문에 머리로 외워서 아는 것도 아니라서, ‘여자라는것‘으로 입은 고통을 잊어버릴 방도가 없었다. 도망칠 곳이 없는데 도망치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여자라는 것‘에서 계속 도망치려 해도 언제나 나는 ‘여자라는 것‘으로 돌아와야 했다. - P115

오르가슴 속에서 내 죄가 녹으면 나는 우주와 융합이 될 것이고한없이 자유로이 비상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생명이 있는 한 불타오르는 그 이미지는 죽음의 이미지를 뒤집은 것이었다. 살아가겠다는 것은 천국과 지옥을 간직한 그런 순간을 맛보는 것이며,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면 좋겠다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에로스를 갈구한 것이었다. - P139

생각해 보면 여자는 신좌익운동 내부에서 암컷으로 살았다. 등사판 허드렛일부터 시작해서 혁명가를 자처하는 남자들의 활동 자금을 모으려고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고, 가사 육아 빨래 등 수면 아래에 있는 거대한 빙산처럼 많은 일들을 했다. 일상을 꾸리기 위해 하는이 무겁고도 부담스런 일들을 암묵의 폭력으로 강요당한 것이다. 폭력은 금세 알 수 있는 물리적인 폭력만이 다가 아니다. 자 이제부터는 트로츠키 Leon Trotsky 28 식으로 한번 논리 전개를 해 봐." 하거나 "프롤레타리아로서 의식이 낮다"든가 하는 말로 위협하고… - P145

여자의 체면이란 애완견 수준이다. 아이에게도, 남편에게도 엄마여야 하는 여자의 삶이란 애완견 수준이다. 그래서 주인이언젠가는 애완견에게 손을 물리듯, 여자한테 모성애를 요구하는 남자는 언젠가 여자한테 뒤통수를 맞게 된다. - P154

문제는 기리시마 씨가 말한 그 충실한 생활이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충실한 생활을 이미지로 그려 보면, 그 나름대로 사회에서인정받고 그것으로 수입을 얻어서 고급 옷을 사 입고 아파트에 살면서마음이 맞는 친구들을 불러 즐겁게 지내는 것, 그것이 더없이 충실한 생활이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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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1-20 1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청아 님도 그렇고 단발머리 님도 그렇고 다른 분들도 이 책 좋게 읽고 계시는데, 저는 왜이렇게 툭툭 걸리는지. 또 짜증나는 부분이 나와서 말이지요. 제가 곧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저는 이 책 읽기 좀 힘드네요. 하하하하하.

단발머리 2024-11-20 11:33   좋아요 1 | URL
엥? 하는 순간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거 같아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저는 이 분 나이를 고려하면서 읽으니 그나마 쪼금 이해 가는 면도 있더라구요. 다락방님 글 기다릴게요!

수이 2024-11-20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으면 읽을수록 강하게 공감되는 구절들이라니 🤪

단발머리 2024-11-20 11:47   좋아요 1 | URL
그 메롱이 제가 생각한 그 메롱인지에 대해서 심도깊게 논의해볼게요. 메-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