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권을 완독한 사람과 사랑에 빠진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아니고, 댓글에 라틴어라고 구체적으로 쓰기는 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에게 매력을 느낀다. 영어는 너무 흔하고(그 흔한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나의 괴로움) 기타 외국어 능통자가 부럽고, 참말로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이 책에서 이런 문단을 만났다.
경험 연구로서의 이 책은 10년 이상 다국적 아카이브에서 영어·폴란드어·독일어·일본어 · 한국어 자료를 수집·분석하고 연구한 결과물이다. 히브리어 자료를 읽지 못한다는 한계는 아프게 인정하지만, 공식 외교문서부터 학계와 언론 등 공론장에서의 논쟁, 증언 자료, 신문·잡지 기사, 영화·만화·소설·드라마 등의 대중문화 장르, SNS 등 인터넷 미디어에 이르기까지 지구적 기억 공간의 구석구석에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서사를 생산·유통·소비하는 양상을 원자료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노력했다. (12쪽)
그러니까 저자 임지현은 영어, 폴란드어, 독일어, 일본어와 한국어 자료를 원자료 중심으로 읽고 살펴보았다는 것인데,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겠으나, 생각해 보니 에바 일루즈도 7개 국어 능통자이고, 핀란드 시골 출신인 마리 루티도 프랑스에서 줄리아 크리스테바 지도하에 석사를 마치고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했다. 인문학 하는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언어를 잘하는구나. 아니면, 그런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인문학을 깊게, 넓게 공부할 수 있구나 하는, 슬프고도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출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홀로코스트, 식민주의 제노사이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에서 자신들이 더 ‘우월한’ 희생자임을 경쟁함으로써 민족의 단합을 강화하는 21세기 민족주의의 한 형태이다. 맨 처음 다루는 대상은 폴란드이다. 폴란드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민족 중의 하나로서 자칭 ’십자가에 못 박힌 민족’(75쪽)이라는 평가받기도 했다. 폴란드는 가장 큰 규모의 희생자를 내었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가장 큰 손해를 입었다. 나치의 엘리트 말살 정책에 따라 교육 수준이 높은 지식인과 엘리트 그룹일수록 타격이 커서 변호사의 56.9%, 의사의 38.7%가 죽었고, 대학 졸업장을 가진 사람 중 약 3분의 1이 희생되었다(73쪽)고 한다.
학살자도 희생자도 아닌 폴란드인 대부분은 침묵으로 일관한 방관자였다. "살인자는 죽이고 도살자는 도살하고 희생자는 죽어가는데", 비단 폴란드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침묵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은 "증오로 건설되고 무관심으로 포장되었다." 침묵과 무관심은 적극적 공범 행위는 아니었지만, 결과론적 동조 행위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희생자였던 폴란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누구도 자신 있게 폴란드인이 방관자였다고 손가락질하거나 죄를 물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폴란드인이 도덕적 자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86쪽)
순백의 순수한 피해자 의식이 공격받은 건 1987년 1월 17일 폴란드 문학평론가 얀 브원스키가 <가련한 폴란드인 게토를 바라보네(Biedni Polacy patrza na getto)>라는 에세이를 발표한 직후다. 이 글에서 브원스키는 폴란드 시골에서 팽배한 반유대주의와 그들의 행태에 대해 썼는데,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유대인 이웃에 대한 폴란드인의 숨겨진 죄의식의 고발이 엄청난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피해자였으며, 피해자여야만 하는 폴란드인들이 이 역사적 비극의 가해자는 아니었더라도 적어도 방관자였다는 주장에 폴란드 사회는 크게 분노했다. 폴란드의 사례를 제 3자의 위치에서 관찰하면 음, 그럴 수도 있겠군, 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일이 내 일, 우리의 일이면 생각은 달라진다.
<요꼬 이야기>는 일본인 작가 요코 가와시마 왓킨스의 자전적 이야기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했을 당시 11세 소녀였던 작가와 그 가족이 생명의 위협, 굶주림, 성폭력의 공포를 넘나들며 함경도 나남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는 과정을 그려냈다. 일본의 패망으로 식민 지배자에서 전범으로 신분이 추락하며 소련군의 진주와 성폭력, 일부 조선인들의 복수와 폭력(101쪽) 속에서 귀환하던 일본인들이 크나큰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다만, 일본인들이 조선의 식민 지배로 인해 누렸던 특권적 삶과 국권 침탈 후 조선 민중이 겪었을 고통이 전혀 그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동아시아 역사에 무지한 미국의 학생들이 이 이야기를 학교에서 배웠을 경우, 패망한 나라의 국민인 일본인을 피해자로, 복수심에 불타는 조선인이 가해자로 그려질 수 있다는 점을, 한국계 미국인들은 지적했다. 보스턴과 뉴욕의 한국계 미국인 학부모들은 등교 거부와 교재 사용 중단 등을 통해 강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일본은 아직도 자신의 침략전쟁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고, 현재도 대륙을 향한 침략 야욕을 숨기지 않고 있다. 일본은 패망 이후 전범과 그 추종자들이 정권을 계승한 경우다. 과거에 대한 반성을 1도 찾아볼 수 없고 정권교체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언론과 시민사회마저 제 몫을 하지 못하고 있다. 동아시아 맹주로서 자신의 역할을 찾겠다는 일본의 의지는 한결같고 굳건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국권 침탈의 비극을 겪었던 우리 나라의 대통령은 일본 총리를 만나 사진 한 번 찍기 위해 ‘찾아가는’ 서비스를 마다하지 않는 굴욕외교를 펼치고 있고, 일본 중심의, 일본 극우 언론의 주장과 똑같은 주장으로 한일관계를 바라보고 있는 듯 보인다. 대통령을 배출한 여당 비대위원장의 ‘조선은 부패해서 망했다’는 주장은 우리가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나라 역시 과거 역사에 대한 단죄와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일본 정부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제국주의 일본의 잔인함에 대한 고발뿐 아니라 지구적 기억 공간 속에서 여성 인권 문제로 도약하고 있다.(181쪽) “여성의 수치에서 남성의 범죄”로 인식되고 있으며, 성노예제, 여성의 인신매매, 강제 결혼 등 여성의 인권 침해(180쪽)를 다룰 때, 중요한 근거로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한 피해자인가’라는 물음이 따라온다. 분명코, 우리는 베트남 전쟁에서 가해자였다. 사과하지 않는 가해자가 바로 우리였다.
나는 이 책을 200여 쪽 읽었고 이제 이 책이 어디로 가게 될지 알고 있다. 혹은 알고 있다고 느낀다. 고통의 경쟁을 넘어 기억의 연대로 나아가자. 지구적 기억의 윤리를 탐색하자.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희생하자. 거기에서 한 발을 더 내디디면 어디로 가게 될까. 정희진이다.
자신이 억압받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정체성의 정치는 다음과 같은 요소에 초점을 둔다. 우리는 피해자이며, 힘이 없고, 이러한 사실을 인정받을 것을 (집요하게)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모든 정체성의 정치는 르상티망(ressentiment), 즉 원망(怨望)과 원한(怨恨)의 정서를 지닌다(한국의 민족주의가 대표적일 것이다). 이것은 나쁜 의미가 아니다. 문제는 정체성이라는 자각이 '머무를 때', 즉 정체성을 피해자로 본질화할 때이다.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 217쪽)
저항은 우리 자신의 변화와 성장을 위한 것이지, 피해자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이 아니다. 가해자의 권력과 지위는 피해자 없이 구성되지 않는다. 나의 고통은 상대방 권력의 크기를 의미한다. 물론 이는 군 위안부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이 피해에 대한 관점을 전환하는 의식과 문화의 탈식민을 의미한다.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 246쪽)
임지현의 사진을 찾다가 글을 하나 읽게 됐다. 조국 사태에 대한 짧은 글이었는데, 간만에 의미 있는 연구물을 만났다고 즐거워하며 책을 읽어 가던 마음이 금세 사그라들었다. 실망했다. 나는 배운 사람들의 이런 ‘관망하는’ 태도가 싫다. 내가 정치 세력에 대한 호오가 분명한 사람이라 그럴 것이다. 조국 사태에 대해,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나는 더 이상은 대꾸하지 않는다. 조국에 대한 심판, 재판 말고 심판은 이미 끝났다. 무엇을 더 보태고 무엇을 더 설명하겠는가. 그래도 가끔 생각이 난다. 한국의 고등학교에 아이 둘을 보냈고, 우리 아이들은 아니지만 친한 사람들의 아이들, 특목고 다니는 아이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아니까. 동네 아줌마, 입시 제도에 큰 관심 없는 전업주부도 아는 걸 이렇게 온 세상이 다 똑같이 모른 척 할 수 있나, 그런 생각. 아이가 졸업식 날 표창장을 받아왔다. 불쑥 내미는데 가슴이 철렁했다. 표창장? 왜? 왜 너한테 준대? 이거, 왜 주는 거래?
나는 아직도 검찰과 언론이 조국 집안을 멸문지화 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검찰은 정권의 개가 되어 정권 말기마다 퇴장하는 정권에게 피 묻은 칼을 휘두르던 집단이고, 드디어 그 집단에서는 대통령을 배출해냈다. 대통령실은 물론이고, 장관, 감사원장, 금감원장까지 모두 검사 출신이 장악했다. 언론은, 이 언론은 세월호가 좌초되었을 때 ‘전원 구조’를 내보냈던 집단이고, 아직도 사과하지 않는 집단이고, 그리고 덮어주고 가려주고 미화시켜 현재의 대통령을 만들어낸 집단이다. 우리는 딱 우리 수준의 검찰과 언론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항상 느끼듯, 그만큼이, 딱 이만큼이 내 수준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부끄러움을 알라느니,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느니, 고고한 척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난, 속으로만 말한다. 조국네처럼 당해 보면 그런 말 못할 텐데. 일주일, 아닌 3일만 털려도 공중분해 될 텐데. 죄 없는 자, 네가 먼저 돌을 들어라.
기억은 본질적으로 고정된 과거를 확인하는 수동적 학습이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하는 과거를 포착하는 인식의 과정이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지금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기억은 ‘현재‘의 역사다. "무엇을 기억하는가"라는 물음을 "누가 기억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대체하자는 폴 리쾨르(Paul Ricoeur)의 ‘기억의 현상학‘에 대한 제안은 이 점에서 주목된다." 기억은 단순히 과거 사실을 반영하기보다는 과거를 재구성하는 능동적 인식 작용이다. 누가 어떤 틀로 기억하고 인식하는가에 따라 과거가 바뀌는 것이다. 미래는 예측할 수 있지만 과거는 예측할 수 없다는 구소련의 정치 유머는, 기억의 현상학을 예리하게 드러내 준다. 기억의 현상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21세기 기억의 지구화는 집단 기억을 민족으로부터 구출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 P31
반면에 ‘숫자의 정치학‘에서는 통계가 더 중요하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서사에서 누가 더 많이 희생되었는가를 놓고 벌어지는 ‘숫자의 정치학‘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숫자의 정치학‘은 어느 편이 더 많이 죽었냐는, 그래서 어느 편이 더 큰 희생을 치렀나는 저속한 논쟁을 과학적으로 정당화한다는 착각을 주기 쉽다. 더많은 희생자를 낸 측이 더 큰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가 더 많이 죽었다며 으스대는 느낌을 받을 때도있다. 통계의 마술이다. - P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