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말 부끄럽지만, 사실이 그렇고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니까. 요즘에도 요가를 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체육이 싫었다. 산책도 조깅도 별로인 걸로 봐서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일주일에 겨우 2-3번 체육 시간인데도 하라는 실기 연습 안 하고 나무 밑에서 놀다가 선생님께 여러 번 걸리기도 했다. 5-6년 전쯤에 동네에서 주민 대상 무료 요가 강좌가 있었는데, 그 수업도 독서모임 언니가 접수해줘서 다녔다. 언니는 이미 인터넷으로 접수하셨는데, 접수 안 한 나를 데리고 가려고, 순수하게 나를 데리고 가려고, 언니가 대신 줄 서서 현장 접수를 해주셨다. 그렇게 2년을 다녔다. 처음에는 무료였고, 1년 후쯤 유료로 바뀌었는데 그것도 3달에 만원이니까, 거의 무료 수준. 근처에 사는 친한 전업주부 중에 운동을 좋아해서 회원제로 운영되는 수영, 요가, 필라테스, 줌바댄스 클래스에 다니는 분들도 많은데, 농담 반 진담 반, 나는 누가 ‘돈을 주면’ 다니겠다고 말한다. 누가 대신 ‘회비를 내어 주면’이 아니고, 운동 다니는 내게 누가 ‘돈을 준다면' 운동 다닐 의향이 있습니다, 이런 마음.
암튼 그런 나도 3월부터 요가를 하고 있다. 집에서 한다. 아무도 돈을 안 내줘서 어쩔 수 없이. 정확히는 요가도 아니고 요가 스트레칭이지만, 아무튼 월수금 식구들이 모두 집을 나서면 거실에 매트를 깔고 요가를 한다. <요가소년 421>,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개운한 스트레칭 (기초요가, 힐링 요가, 전신 스트레칭 / 러닝타임 34분 30초). 겸사겸사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자세 소개해본다. 이 자세의 명칭은 따로 없는 것 같은데, 내가 지어줬다. 꽃받침 자세. 사실 이 자세 때문에 <요가소년 409>에서 이리로 옮겨온 거다.
그저께 잠깐 숙였다 일어서는데 왼쪽 허리가 삐끗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원래 유연성이 한참 떨어지는 사람이라 그러려니 했는데 허리를 돌릴 때마다 살살 아파오는 거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무척 바쁜 주일 아침인데, 어쩔 수 없이 요가 매트를 꺼내서 요가소년 421, 전신 스트레칭을 했다. 그 쉬운 <고양이 자세>에서 ‘들이마시는 쉼에 가슴을 활짝 열고 등허리 살짝 오목하게’가 안 된다는 걸, 몸이 알려줬다. 아, 이런. 당연히 ‘내쉬는 숨에 등허리 둥그렇게 마는’ 것도 불가능했다. 살살 몸을 달래가며 요가 스트레칭을 이어간다. <잠자는 백조 자세>에서 오른쪽은 괜찮은데 삐끗한 왼쪽으로는 자세를 따라 하는 게 불가능했다. 아무튼 그렇게 요가를 했다. 요가 중에 호흡을 조절하면서 다음 동작에 가기 전에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을 때, 요가소년은 여러 말을 해 주는데, 보통은 그런 때 기도를 한다. 손 뒤로 올릴 때도, 태양경배자세할 때도, 사바사나 할 때도 기도를 한다. 내 기도는 짧고 단순하다. 주님, 도와주세요. 주님, 함께해 주세요.
오늘 아침에도 이렇게 기도를 하려는데, 어젯밤에 읽었던 책의 한 문장이 자꾸 떠올랐다. 내가 이 글을 쓴 이유가 이제 나온다.
얼마 전 나는 20여 년간 영화 이야기를 나누고 배웠던 이들과 말을 섞지 못하게 되었다. 영원히 헤어졌다. 온몸이 흔들리도록 아팠다. 내 인생 최대의 쾌락과 의미의 공동체를 잃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오래가지 못할 관계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 시간에 감사할 뿐이다. 이후 인생 전체가 사라졌다고 느꼈지만, 그래도 매일 혼자서 썼다. (35쪽)
20여 년간 함께 해온 친구와 공동체를 잃은 아픔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 상실감과 슬픔, 외로움과 고통에 대해서. 나를 울린 단어는 이렇게 네 개. 그래도 매일 혼자서 썼다.
아픔을 이겨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네 인생사야 언제나 고난과 고통의 연속이지만 가끔은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이 있기는 하다. 어떤 사람은 환경을 탓한다. 보통의 경우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원망한다. 나는 이 방법이 반드시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한 번은 욕을 해야, 그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 욕이라도 해야 풀리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어떤 사람은 자신을 탓한다. 나는 이것이 고통과 슬픔을 견디는 가장 나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겠지만 어느 때든 그게 그 고통과 슬픔의 전부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 속으로, 내면으로만 침잠하는 사람에게는 위로조차 닿지 않을 수 있어서 더욱 그렇다. 선생님의 방법, 그래도 매일 혼자서 썼다,가 얼마나 훌륭한 방법인지에 대해 혼자 생각한다.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들을 사람이 없고, 지금 나는 혼자이고, 내 인생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아픔과 슬픔 속에 있지만, 그러한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쓴다’는 것. 감히 혼자 상상해본다.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에서 융합을 설명하면서, 저자는 양파를 예로 들었다.
내가 양파를 자주 애용하다 보니 아이들이 다른 야채는 잘 안 먹어도 양파는 잘 먹는 편이다. 싸고 보관이 편하고 어느 음식에 넣어도 잘 어울린다. 제일 중요한 점은 ‘흔하다’에 있다고 생각한다. 비싸지 않고, 어디에서든 쉽게 구할 수 야채. 하지만 양파의 효능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면 이건 뭐 단순한 식품 정도가 아니라 ‘슈퍼 푸드’의 반열에 오를 정도라는 걸 알게 된다. 이 귀한 음식이, 흔하다.
누가 나한테 돈을 줘서 유명한 요가 센터에서 득도하신 선생님에게 요가를 배우면 좋겠지만 <요가소년>도 내게는 참 좋은 선생님이다. 맛있는 거를 많이 먹고 싶고, 또 그러면서도 건강하면 좋겠지만, 올리브유에 양파만 먼저 오래 볶은 후, 미리 만들어둔 떡볶이와 잘 섞어 먹으면, 떡볶이와 어우러진 양파의 고소하고 달달한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고통을 이겨내고 슬픔을 뿌리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테고 또 가능하겠지만, 그냥 노트와 펜만 있어도 어느 때는, 그 상황에서의 점프가 가능하다. 노트북일 수도 있고, 스마트폰의 메모 기능일 수도 있겠다. 모든 아픔을 이렇게 이겨낼 수 있다고, 혹은 이겨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인생사 고락을 모르고 산 사람이다. 나는, 내가 그렇게 ‘곱게’ 자랐다는 걸 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 세상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과 그 일의 ‘어떠함’에 대해 ‘쓸 수 있다’는 것, 쓸 수 있다는 걸 ‘아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래도 매일 혼자서 썼다.” 이 네 개의 단어가 오래오래 머릿속에서, 가슴속에서 울려나왔다.
영화 감상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아는 영화도 별로 없어서 4권을 미뤄두고 5권을 먼저 읽었다. 같이 읽는 친구는, 5권이 선생님의 독서와 공부가 폭발하는 특이점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쩌랴. 4권도 너무나 막막하게 훌륭한 것이다. 5권과 막상막하다. 68쪽까지 읽어본 바로는 그렇다. 두 책 사이에 우열을 가리는 게 불가능하거니와 우열을 가릴 필요도 없다.
진정한 공부에의 참 길. 공부의 왕도, 정희진. 한번 와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