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타이트, 점토판 속으로 사라졌던 인류의 역사 타산지석 6
이희철 지음 / 리수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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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신간 <히타이트 제국의 역사>가 읽고 싶어졌다. 그에 앞서 기존 출간된 히타이트 관련 서적을 살펴보니 개설서로는 단 두 권, 그나마 이 책이 최신판이다, 무려 20042월에 발행된 책이. 신간과 비교 차원에서 이 책을 먼저 읽는다.

 

히타이트. 세계사 시간에 배운 토막 내용이 떠오른다. 최초의 철제 무기 사용으로 강력한 군대를 이끌었으며 바빌론 왕국을 무너뜨렸다는 점, 이게 전부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이게 무리가 아니었음을 이 책을 통해 발견하는데, 이집트 등의 기록에 남은 단편적 내용을 제외하면 그들의 모든 역사는 전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부터 점토판 발굴을 통해 조금씩 부분적으로 잃어버린 역사를 짜맞추고 있는 과정이라고 한다. 이 책의 부제 점토판 속으로 사라졌던 인류의 역사는 절대 터무니없지 않다.

 

이 책에서 소개된 내용을 토대로 히타이트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기원전 2500년경부터 1700년경까지 아나톨리아 지역에 하티라는 문명국가가 있었다. 쿠사라 왕족 출신이 피타나와 아니타가 하티를 정복하고 히타이트를 건국하였다. 기원전 1700년경 시작하여 1200년경까지 존속하였다. 히타이트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그의 후손들이 흩어져 명맥을 유지했는데 후기 히타이트 시대는 기원전 1200년경에서 700년경까지를 말한다. 하티에서 시작하면 1800년간 존립하였던 서아시아에서 강력한 영역을 구축하였던 장구한 세력인데 우리는 히타이트를 거의 알지 못한다.

 

히타이트라는 말은 구약에 나오는 헷족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기게 된 말이었다.

사실, 히타이트인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고향의 이름을 따서 자신들을 하티인이라고 불렀다. (P.37)

 

히타이트인들의 유연성은 굉장하다. 나라 이름도 선주지에서 따오고, 문자와 종교도 자기의 것을 고집하지 않고 피정복 국가의 것을 그대로 수용한다. 신화와 전설 등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들의 실용성은 법률에서도 드러나는데, 흔히 함무라비 법전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복 방식을 천명하는 반면, 히타이트인들은 중죄를 제외하고는 금전적 보상을 기본 원칙으로 삼는다고 한다.

 

저자는 히타이트의 철기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약간의 철기가 있지만 제국 간 전쟁에서 우위를 점할 정도로 대량의, 고품질의 철기는 아니었다고 본다. 오히려 히타이트 전차의 우수성을 강조한다. 이집트, 아시리아를 비롯한 중동 지역의 국가는 군대 주력이 전차 부대인데 유독 히타이트가 압도적인 것은 전차를 개량하여 탁월한 기동성을 확보한 덕분이라고 하니 여기서도 그네들의 실용적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수필룰리우마 시기에 영토를 시리아까지 확장함으로써 제국으로 발전하였고, 제국 최전성기인 무와탈리 시기에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벌인 전쟁은 기원전 13세기 당시로서는 세계 전쟁에 해당하는 거대한 규모이다. 이로써 이집트의 시리아 팽창을 저지하고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일대에 해당하는 영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후대 하투실리 3세 시대에 이집트와 평화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양국 간에는 평화가 도래하였음도 특기할 만하다. 이처럼 히타이트는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가 달린 행위가 많다. 세계 최초의 철기 무기, 국가 간 조약, 세계 대전, 평화 조약 등.

 

[하투실리]의 외교 가운데 최대의 성과는 기원전 1259년에 이집트와 맺은 평화 조약이었다. 중근동의 최강대국 간에 맺은 조약으로 세계 최초의 평화 협정이었다. 이 조약은 어떤 면에서는 카데쉬 전투에서 히타이트가 승리하였음을 이집트가 간접적으로 승인하는 한편, 아시리아를 놓고 생긴 양 강대국 간의 긴장 관계가 종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P.116)

 

강성하던 히타이트가 갑자기 멸망한 까닭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집트의 기록에 따르면 북방에서 내려온 해상 민족이 원인이었다고 하는데, 이집트가 물리친 그들을 히타이트가 못 이긴 까닭은 단순히 그네들의 세력이 강대하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히타이트의 원주지 아나톨리아는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타 세력의 공격을 받았다. 북쪽과 동쪽으로는 유목민의 세력이 접근하기 좋았으며, 서쪽으로는 해상 세력이 남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집트와 달리 주변 세력과 끊임없는 다툼은 국력을 소멸시켰고, 여기에 내홍이 겹쳐 일순간에 몰락한 게 아닐까 싶다.

 

막강한 바빌론 왕국을 정벌한 무르실리 왕 이후 히타이트가 혼란에 빠진 까닭도 인간의 변하지 않는 속성이 권력욕 아니었던가.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무법적 살인극은 결코 역사의 후배들에게 뒤지지 않는다. 오죽하면 훗날 왕위 계승 순서를 법으로 정해 놓았겠지만 세상사가 어디 법대로만 되는가. 그런 면에서 창궐하는 전염병에 인간적 약점을 그대로 노출하는 무르실리 2세의 기도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한 호소력을 지닌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탐험가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토록 히타이트의 모든 것은 너무나 낯설고 신기한 경험을 안겨주었다. 점토판의 문자를 하나하나 해독하여 불완전하나마 이렇게 한 거대 제국의 영욕을 윤곽이나마 그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앞으로 계속되는 발굴의 성과에 따라 히타이트의 참모습은 더욱 달라질 수 있다는 기대감도 존재한다.

 

아직 가보지 못한 튀르키예에 가게 된다면, 히타이트 역사를 찾아볼 수 있는 보아즈칼레(하투샤), 야즐르카야,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 알라자회윅, 퀼테페 등 이 책에서 소개된 주요 명소를 꼭 방문하고 싶다. 우선 당장은 신간 <히타이트 제국의 역사>과 비교하여 읽는 재미를 누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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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초니에레 민음사 세계시인선 13
프란체스카 페트라르카 지음, 김효신 외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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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뒤표지에 페트라르카 탄생 700주년 기념 국내 최초 번역본이라 표기하고 있다. 200410월에 펴냈으니 20년 전의 일이다. 이 책이 다른 번역본과 구별되는 점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칸초니에레> 366편 중 1편부터 50편까지를 모두 담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소네트뿐만 아니라 발라드, 세스티나, 칸초네도 포함하고 있어 페트라르카의 다채로운 시 형식을 눈여겨볼 수 있다.

 

다음으로 번역문과 함께 원문도 나란히 싣고 있다. 영시와 한시는 원문 수록이 장점으로 평가되기 마련인데, 이탈리아어 등과 같은 여타 외국어는 관점에 따라 긍정과 부정 의견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원문과 번역문을 비교하여 감상할 수 있는 독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로 보면 실효성이 미약하다. 어쨌든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소네트 등과 같은 정형시의 경우 시의 형식과 운율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그대 들어보구려, 흩어진 시구로 이루어진 그 소리, 그 한탄 / 나 그 안에서 마음의 자양분 취하고 / 내 젊은 날의 첫 실수 위에 / 지금의 나와는 사뭇 달랐던 그때, (P.6, 1)

 

1편은 시집 전체의 서시에 해당한다. ‘흩어진 시구로 이루어진 그 소리, 그 한탄<칸초니에레>의 원제인 속어 단편 시모음을 지칭하고, ‘내 젊은 날의 첫 실수는 시인이 라우라에게 첫눈에 반해 이후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애달파 하고 방황하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소네트는 앞서 읽은 이상엽 번역본에서 적었듯이 14행의 정형시에 라우라를 향한 시인의 사랑을 절절하고 애절하게 기쁨과 때로는 슬픔, 희망과 절망이 어우러지는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감정을 토로한다. 시집의 전반부이므로 라우라 생전에 그녀를 향한 사랑이 주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라우라를 향한 시인의 사랑은 거침없다. 예수의 탄생과 비교(4)하며, 그리스 신화를 인용(23)하기도 한다. 어느 시를 들추더라도 시인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점은 소네트가 아닌 다른 시 형식의 작품들이다. 11편과 14편은 발라드, 22편과 30편은 세스티나, 23, 28, 29, 37편과 50편은 칸초네라고 한다. 발라드는 4행과 10행으로 구성되어 있고, 세스티나는 66, 31연으로 비교적 긴 시다. 칸초네는 긴 시인데, 특정한 형식이 엿보이지 않는다. 시인의 뜨거운 시상을 소네트라는 제한된 형식으로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기에 보다 자유롭고 길게 자신의 감정을 분출하기 위해 이런 형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절제미 대신 자유로움을.

 

페트라르카의 시선이 오로지 라우라에게만 향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작품 중에서도 이슬람 세력에 대한 반감을 보이는 시가 몇 편 눈에 띈다. 교황이 주도한 대규모의 십자군은 종료되었지만, 이후로도 여러 차례 소규모 십자군이 출범하였던 만큼 사제인 페트라르카가 기독교 세력의 단결을 요구한 건 당연하리라.

 

그대들의 겸손하고 온순한 양은 야만스러운 늑대들을 / 물리치리라. 그리하여 신성한 이들을 분열시키는 자는 / 그 누구든 갖은 고초를 겪게 되리니. (P.70-72, 27)

 

아랍인, 투르크인 그리고 칼데아인, / 홍해 바다 저편에 있는 / 이방의 신들을 믿는 모든 이들이, / 얼마나 보잘것없는가를 그대는 알게 되리라. (P.78, 28)

 

시인은 평생에 걸쳐 이 시집의 원고를 다듬고 또 다듬었다. 작가 연보에 따르면 사망한 해인 1374년에 아홉 번째 원고를 수정하였다고 하니 이 시집에 대한 시인의 집착과 애정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그토록 라우라를 향한 시인의 사랑은 그녀의 죽음과 상관없이 평생에 걸쳐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이다. 라우라는 유부녀라고 한다. 그녀는 시인의 사랑을 받아들였을까, 아니 알아차리기나 했을까, 시인은 끙끙거리며 속앓이만 하며 일방적 사랑에 그친 게 아닐까. 라우라는 시인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던 듯하다.

 

아래로 향한 그녀의 시선은 / 자만과 모욕감으로 모든 기쁨 앗아가고, / 때 이른 내 죽음의 원인이 되리라. (P.118, 38)

 

청춘의 불같은 열정과 사랑의 정념은 인정하지만, 이것이 노년에 이르기까지 대상이 오래전에 사망하였음에도 변함없이 이어진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라우라에 대한 시인의 사랑은 현실적인가 아니면 관념적인가. 어리석은 독자는 불순한 의구심을 품는다.

 

뜻깊고 흥미로운 책이지만, 모호한 대목을 간단히 언급하고 마치겠다. 옮긴이는 작품 해설에서 서시에서 언급한 젊은 날의 과오를 라우라가 아닌 한 여인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얻은 일을 가리킨다고 풀이한다. 시인이 늘그막에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서시에서 과연 시 내용과 거리가 먼 그 일을 굳이 언급하였을까 회의적이다. 늙은 사제에게 과오는 여인에 대한 사랑에 빠져 주님을 향한 헌신에 매진하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그녀에게 우아한 복수를 하려 하네, / 어느 날엔가 숱한 사랑의 모독에 앙갚음하려고, / 남몰래 사랑의 화살을 당겼다네, / 때와 장소를 기다려 상처를 주기 위해. (P.6-8, 2)

 

위 시구는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다. 누가 복수를 한단 말인가, 시인이 라우라에게? 아니면 사랑, 즉 아모르가 라우라에게 복수를 하려고 시인에게 화살을 쏘아 자격도 없는 그가 그녀를 사랑하도록 만들었단 말인가? 사랑, 즉 아모르의 화살에 맞은 이는 분명 시인 자신이다. 다음의 시구를 보면 화살에 맞은 시인의 고통과 벗어나려는 헛된 노력이 구구절절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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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무늬영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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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회복하는 인간

훈자

에우로파

밝아지기 전에

왼손

파란 돌

노랑무늬영원

 

2003년부터 2012년까지 긴 시간에 걸쳐 발표한 단편 작품집이다. 전체를 하나로 관통하는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쓴 작품들이 아니다 보니 일관된 통일성이나 주제 의식을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는 작가 특유의 작품관을 확인할 수 있으니, 폭력적 남성성에 대한 거부감이 우선적으로 눈에 띈다. 작품 속 여자의 결혼생활은 가정 폭력과 결부된 사례가 제법 있다. 여자가 우호적 공감으로 추억하는 남자의 모습은 여성적 남성이다. 그들은 때로 여성이 되기를 꿈꿀 정도다.

 

작중 여자들은 여러 사유로 절망과 고통의 상황에 놓여 있다. 가정 폭력으로 비롯한 결혼생활의 실패, 교통사고, 가족 간 단절, 팍팍한 가정생활 등 원인은 다양하지만 칠흑 같은 한밤중의 막막한 처지에 놓여 있음은 유사하다. 하지만 작가는 이들을 방치하지 않는다. 비록 대낮처럼 환하지는 않더라도 어스름한 새벽빛이나마 그들에게 비춘다. 어쨌든 삶은 방기하지 않고 계속 영위할 가치는 있어야 한다면서. 이러한 경향성에서 벗어난 작품이 <왼손><에우로파>라는 점은 시사적이다. 양자 모두 화자이자 주인공이 남자라는 공통점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하 각 작품에 대한 소회는 지극히 개인적이며 피상적이다. 솔직히 읽는 도중에도, 읽은 후에도 작가가 글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확연히 다가오지 않아 그냥 내 맘대로 얼토당토않게 몇 자 억지로 끄적거린다.

 

<노랑무늬영원>

 

표제를 한창 오독하였다. 영원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도롱뇽과를 지칭하는 구체명사다. 노랑무늬영원은 실제 도롱뇽의 한 종이다. 난데없이 영원이 등장하는 이유는 뭘까.

 

개를 피하려다 교통사고로 왼손을 못 쓰게 되고 오른손도 간신히 움직일 뿐이며 척추도 다친 여자. 그녀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었다. 인생의 중심을 차지하던 그림을 더는 손댈 수 없게 된 그녀. 일상생활조차 혼자의 힘으로는 해나가기 어려운 신세가 된다. 여자와 남편 사이도 점차 불편하고 냉랭해진다. 부부 사이란 원래 그런 법인데 여자의 사고는 이를 가속하였다. 이건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다.

 

정말로 소중한 존재는 그것을 상실했을 때 비로소 알게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녀는 삶의 중심에서 주변부로 밀려나면서 삶에 대한 소외감을 절감한다. 그녀와 같은 상황에 놓였다고 해서 모두가 그녀처럼 느끼지 않는다. 예술가로서 그녀의 예민한 감각은 상실과 소외를 확장 수용하면서 허무감에 빠져든다.

 

그곳은 내 집이 아니다. 나에게는 집이 없다. 이 삶은 나의 삶이 아니다. 어떤 정서적 유대도 느낄 수 없다. 어떤 장소, 어떤 기억, 어떤 미래에 대해서도. (P.241)

 

삶의 무의미성에 허우적대는 그녀는 옛 친구의 우연한 연락으로 거의 잊히다시피 한 등산과 남자, 사진의 추억을 회상한다. 추억 속 남자의 죽음 소식을 알게 된 그녀는 문득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반불구가 된 오른손의 감각을 회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도롱뇽의 잘린 앞발이 새로 생겨나는 것처럼 새로 태어나게 해야 한다, 처음부터.

 

만일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랑을 가진 인간으로서 다시 살아나가야 한다면, 내 안의 죽은 부분을 되살려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부분은 영원히 죽었으므로.

그것을 송두리째 새로 태어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것이다. (P.296)

 

그녀 자신이 인정하듯이 사고를 당한 것과, 이후의 삶의 태도가 필연적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그동안 그녀는 그림을 삶의 중심에 놓고 그림 속으로 도피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였다. 옛 친구 세 모자의 평범하지만 단란한 삶의 일상, 사진을 찍은 남자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한 과정에서 그림 이외는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삶의 양태를 그녀는 보게 되었다. 기존 작업과는 다른 그림 작업을 통해 계속 예술가로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발상조차도. 문득 그녀는 자신의 손이 도롱뇽의 그것처럼 새로 돋아나옴을 느낀다. 그것은 가장 가벼운 동시에 가장 생생한 생명력의 표출이다.

 

<파란 돌>

 

한밤중 잔잔한 독백으로 풀어내는 담담하면서도 애틋한 연가. 연인은 이승이 아닌 하늘나라에 있다. 서른일곱의 여자는 자살을 앞두고 그를 떠올린다. 대개 그러하듯 자신은 잘 지낸다고 둘러대면서. 회상 속 남자는 전형적 남성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조금만 피를 흘려도 생명에 위험이 되는, 항상 언행을 느리고 차분하게 유지해야 하는 사람. 그런데도 끝내 저세상으로 떠나간 사람. 여자였기를 바라던 남자. 칠 년여를 함께 살았던, 그리고 여자의 목을 조르던 남자와는 정반대 유형의 남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그 입맞춤 이후, 나는 어떤 남자에게서도 더 이상의 기쁨을 얻지 못했습니다. 어떤 흥분과도, 무아경의 희열과도 바꿀 수 없을 겁니다. 나이만 먹은 소년이었던 당신의 겁먹은 손이 숨죽이며 내 뺨에 머물렀던 순간을. (P.211)

 

이 작품은 남편의 가정 폭력을 배경으로, 피해자 여성과 가해자 남성의 뚜렷한 대비를 통해 폭력적 남성성을 파헤친다. 그녀의 입맞춤은 이성 간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여성 간의 사랑에 가깝다. 깊은 어둠 속에서 진행된 독백은 서서히 아침을 맞이하며 분위기도 죽음에서 삶으로 변화한다. 여자의 연인은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삶을 갈구하였다. 삶을 버리고 죽음을 바라는 여자와는 다르다.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파란빛 도는 돌]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P.212)

 

날마다 운동하는 그녀의 루틴은 알게 모르게 이미 삶을 지향하고 있다. 살아 있음을 느끼는 건 신체의 역동성과 감각에서 가장 비롯하지 않는가. 여자가 문득 연인과 파란 돌을 떠올리는 건 고통과 비참 속에서도 삶은 이어져야 함을, 삶 속에서 생명의 본원적 가치가 존재함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왼손>

 

블랙 코미디 같은 단편이다. 우스꽝스러운 동시에 섬찟함을 안겨주는 설정은 단지 주인공에게 발생한 개인적 재난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쓴다. 본능에 따른 충동만으로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남기 어렵다. 이성과 도덕률로 감정과 행동을 통제한다. 나의 왼손이 내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매우 난처할 것임은 뻔하다.

 

가장 나쁜 것은, 왼손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것이 무슨 일을 하려 하는지 그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P.157)

 

왼손은 왜 갑자기 독자적 움직임을 개시하였을까. 아이가 생기면서 아내와의 가정생활이 순탄치 않게 되어서인지, 숙면을 취하지 못하여 신경이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서인가. 예전 여자친구 선혜를 알아차리고 버스 하차 벨을 누르며, 그녀의 뺨을 어루만져 극적인 관계 진전을 이루어낸 것은 모두 왼손 덕분이다. 그렇게 보면 왼손은 주인공의 숨겨진 본능을 간취하는 능력이 탁월한 모양이다.

 

일시적 성공은 영원하지 못하다. 사람이 본능만으로 온전히 살아갈 수 없듯이 성진 또한 선혜와의 관계에 갈등한다. 그가 이성을 강하게 의식할수록 왼손의 저항은 강렬해진다. 회사에서 그리고 선혜와의 관계에서, 마침내는 아내에게서 그는 버림받고 파국에 놓인다.

 

혹시 그런 경험 해봤어? 내 안에, 전혀 모르는 사람이 들어있는 것 같은 때. (P.152)

 

이것은 선혜의 말이지만 성진의 처지를 정확히 기술하고 있다. 평범한 유부남인 성진에 발생한 사건이지만, 우리는 그를 향한 안타까운 동정심을 금할 길 없다.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라고, 그에게 근원적인 잘못이 있던가. 세상 누구도 성진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게다가 이 작품은 결혼생활에 대한 근본적 의구심을 제기한다. 성진의 결혼생활, 선혜의 결혼생활을 볼 때 과연 행복한 결혼생활이란 가능할까.

 

<훈자>

 

훈자, 파키스탄과 중국 국경지대의 산간 오지. 그녀는 언제나 훈자를 생각한다. 그곳은 그녀가 일상에서 벗어나 꿈꿀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므로. 그곳을 향한 소망을 떠올리며 일상의 고단함을 버텨낸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주변인에 머무는 남편, 가계를 꾸려나갈 단 한 사람인 그녀, 그리고 돌봄을 필요로 하는 아이. 그녀는 알고 있다. 자신이 훈자에 갈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그럼에도 훈자를 꿈꿀 수 있기에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그 여자는 훈자를 생각하지 않았다.

훈자인 훈자도, 훈자가 아닌 훈자도 생각하지 않았다. (P.52)

 

그녀는 왜 훈자를 생각하지 않는가. 팍팍한 삶이 더는 훈자 생각만으로 위안 삼을 수 없도록 악화하였음이 아니겠는가. 다친 아이, 고단한 업무. 피곤 속에서 그녀는 도로 위 핸들을 굳게 다잡는다. 죽은 들고양이 따위로 무리하게 차선을 바꿀 수는 없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견뎌낼 것이다. 그녀의 모습을 두고 왈가왈부 촌평을 하는 건 적합하지 않다. 그녀는 전심전력으로 삶을 다투고 있기에.

 

불안하게 큰 커브를 돌며 그 여자는 눈을 부릅뜬다. 앞차가 뱉어 내는 브레이크 등의 불빛이, 끈덕지게 술렁이는 도로의 어둠이 핏물처럼 그 여자의 눈에 비쳐 어른댄다. (P.58)

 

<회복하는 인간>

 

괜찮아. 진짜 금방 낫는대. 시간만 지나면 낫는대. 누구나 다 낫는대. (P.31)

 

육신의 상처는 금방 나을 수 있다. 주인공인 당신 발목의 화상은 더디지만 어쨌든 회복될 것이다. 마음의 상처는 금방 나을 수 있을까. 어느 날 마음이 갈라져 버린 당신과 당신 언니의 관계는 결코 회복되지 못하였고 앞으로도 회복의 가능성은 없다. 그녀는 이 세상에 없으므로.

 

지금 당신이 겪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차가운 흙이 더 차가워져 얼굴과 온몸이 딱딱하게 얼어붙게 해달라고,... (P.34)

 

이것이 당신의 잘못인가. 그녀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되돌릴 수 없다. 독자의 눈에 결코 당신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지만, 당신은 계속 자책한다. 당신이 조금만 더 다가섰다면 관계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면서. 자전거를 타다 넘어진 그녀의 생각은 서글픔을 넘어 깊은 슬픔을 담고 있다.

 

<에우로파>

 

화자와 인아는 남사친, 여사친의 관계다. 인아는 의사 남편과 이혼하였다. 원인에 가정 폭력이 있었음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인아는 자신의 결혼생활을 장례식에 비유한다. 인아의 아름답고 낯선 노래를 들으면서 화자는 자신의 숨은 욕망을 불현듯 드러낸다.

 

(너 같은 목소리를 갖고 싶고, 너 같은 몸을 갖고 싶어. 어떤 밤에는, 그 갈망 때문에 미칠 것 같을 때도 있어.) (P.77)

 

이제 그들의 관계는 새로운 장으로 넘어간다. 두 사람은 이제는 이성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남성성의 폭력을 경험한 여자와 스스로 남성성을 버리고자 하는 남자. 두 사람에게 남성성은 부정적 요소다. 인아가 꾸는 악몽도 본질은 동일하다. 화자는 여장을 한 채 도시의 번화가를 거닐며 환상에 사로잡힌다.

 

얼음으로 뒤덮인 목성의 위성 에우로파처럼, 우리네 삶은 단단한 껍질 속에 연약한 속살을 감춰 둔 채 세상에 맞서고 있는지 모르겠다. 기쁨보다는 슬픔이, 즐거움보다는 아픔이 더 많은 삶의 순간일 것이다. 에우로파가 커다란 운석을 피하지 않듯 삶의 매 순간은 회피할 수 없다. 인아는 묵묵히 버티면서 행로를 찾아 헤맬 것이다. 하지만 화자는? 위선의 탈을 뒤집어쓴 화자의 앞날은 어떠할지 알 수 없다.

 

<밝아지기 전에>

 

남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죄책감은 은희 언니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꾼다. 아무 일 없었던 듯 맨정신으로 남들처럼 평온한 삶을 산다는 건 더는 그녀에게 불과한 일이 되었다. 수년이 지난 후 화자가 외국에 사는 그녀를 만나러 가기 직전 그녀는 시신으로 귀국한다.

 

화자는 지난 연말 K 선생님의 전시회에 갔다가 그가 말하는 그의 심장과, 그의 친구 전시회에서 본 그의 친구의 심장 얘기를 떠올린다. 거대하고 끔찍한 덩어리로서의 심장과, 아주 조그마한 0.3밀리 샤프펜슬로 나타내는 심장. 본질에 있어 크기는 중요치 않다, 고통은 마찬가지이므로.

 

하늘은 파랗고, 차가운 햇빛이 우듬지의 윤곽을 에워싸고 있다. 한동안 고개를 뒤로 젖히고 올려다보다가, 내가 그것들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냉혹할 만큼 완전하게 은희 언니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P.104)

 

삶은 고통으로 충만하지만, 내내 어둡고 슬픈 것은 아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밤이 여위면 새벽이 다가오듯. 밝아지기 전이 가장 어둡듯이 우리는 눈앞의 빛을 알지 못한 채 당장의 어둠에만 몸부림치기에 십상이다. 두루미 종류의 흰 새의 죽음, 은희 언니의 죽음에서도 화자는 무심코 세상의 아름다움을 본능적으로 인식한다.

 

은희 언니는 돌아올 거라고 했다. 돌아오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거라고 했다. 후회와 고통만이 점철한 삶이 아닌 삶을. 자책하지 않는 삶을. 그것은 화자가 딸 윤이와 함께 하는 삶과 멀지 않은 삶이리라. 생과 사의 경계에 올라선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생명력으로 그득한 삶. 그래서 화자는 문장을 고쳐 쓴다. 회복된 것은 은희 언니만이 아닐 것이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 문장을 지우고 기다린다. 온 힘으로 기다린다. 파르스름하게 사위가 밝아지기 전에, 그녀가 회복되었다, 라고 첫 문장을 쓴다.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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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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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구성된 삼부작 연작소설이다. 이 중 <몽고반점>2005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면서 내가 한강이라는 작가를 처음으로 알게 해준 작품이기도 하다. 이후 개인적으로 한강 작가를 애호하게 되었음을 덧붙인다.

 

부커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작품을 이제사 찬찬히 읽어보면서 작품에 대한 좋고 싫음의 편차가 상당히 클 수 있겠다 싶다. 소설 내내 비치는 파격적 소재와 성적 묘사, 여성주의, 폭력성에 대한 극단적 거부감 등이 보수적인 독자를 불쾌하게 만들 여지가 충분하다. 후기작의 시적 산문 문체에 사용하지 않았기에 독서 자체는 어렵지 않다. 건조할 정도로 담백한 필체는 조만간 그의 미래를 살짝 드러내기도 하지만.

 

삼부작의 주인공은 분명 영혜이지만, 그녀는 화자로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작중에서 그녀는 말수도 적고 거의 수동적이다. <채식주의자>는 그녀의 남편, <몽고반점>은 형부, <나무 불꽃>은 그녀의 언니가 각각 화자를 맡는다. 그들의 발언과 생각을 통해 독자는 영혜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해 보지만 그것은 결코 영혜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기에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채식주의자>라는 표제는 어쩌면 다소나마 어그로를 끌려는 의도가 있지 않나 싶다. 영혜가 채식주의자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당시에도 채식주의자는 있었으므로. 다만 그녀의 선포는 너무 급작스럽고 공격적이다. 자신은 채식주의자이지만 남편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음을 영혜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가 브래지어 차는 걸 싫어하는 행동을 통해 단초를 보였음에도 남편은 그녀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 그녀의 육식 거부는 채식 자체보다도 동물성이 갖는 폭력성에 대한 거부에 가깝다. 남편과의 잠자리마저 저항하는 영혜가 내뱉는 젖가슴 예찬론은 폭력성에 대한 반감을 여실히 표출한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P.43)

 

동서와 처형이 나중에 영혜의 남편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지만, 사실 그는 평범한 유형의 남자다. 가정과 회사 생활에서 그는 어떻게든 버텨내려고 애쓴다. 그에게 부족한 점은 아내의 변신을 좀 더 심각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였고, 회사 부부 모임에 데려갔다든지 처가 식구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다든지 하는 행동이다. 그렇다고 그를 무작정 비난하는 건 온당치 못하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내의 행동이므로. 칼로 손목을 긋고 병원에서 새를 물어뜯는 아내를 받아들인다는 건 어떤 평범한 남편도 간단치 않다.

 

<몽고반점>에서 형부와 영혜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두 사람의 행위 결과는 파국으로 치달아 형부 가정은 파탄 나고 영혜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처제를 성적으로 이용하고 유린한 형부를 비난하면 충분한가, 정말로 영혜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라고 할 수 있는가. 형부가 처제 엉덩이의 몽고반점에서 보았던 환상은 무엇이고, 처제가 자신의 몸에 그린 식물과 꽃 그림을 지우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자신의 몸에 역시 식물 그림을 그린 형부와 영혜의 육체적 결합이 갖는 함의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것이 아름다운 동시에 추악한 장면이라면 작가는 그런 이중적 장면을 생생한 표현으로 그려냈는가. 식물의 섹스를 흉내 냈지만 두 사람의 행위는 역시 동물의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였음인가. 그런데 영혜는 왜 이제 꿈을 꾸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걸까.

 

앞선 소설들에서 어렴풋하고 은근슬쩍 엿보이던 작가의 의도는 <나무 불꽃>에서 좀 더 명확해진다. 우리는 여기서 제부는 감탄하고 남편은 등한시한 영혜의 언니를 비로소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뛰어난 생활 능력과, 겉보기에 성공적인 가정생활이 사실은 끝없는 버티기 노력의 산물임을. 현실과 타협하고 수용하며 지쳐가는 그녀와 달리 원초적 본능과 목소리로 현실을 거부하는, 비록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도, 동생에 대해 부러움과 시샘의 양가적 속내를 보게 된다. 그녀에게 갖는 우리의 감정은 안타까운 동정심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역시 그녀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동류의식과도 같다.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게 된 계기인 꿈과 그에게 육식을 물리적으로 강제하려는 아버지의 행동에 있어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잔인한 폭력성이다. 개는 아버지 오토바이에 묶여 지쳐 나자빠질 때까지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간다. 딸의 입에 강제로 고기를 쑤셔놓고 뜻대로 안 되자 뺨을 때리는 행동에서 우리는 전근대적 가부장제의 유산인 뿌리 깊은 폭력성을 확인하게 된다. 폭력에 대한 그녀의 반발과 혐오감은 <채식주의자>의 충격적 결말인 작은 새를 물어뜯는 영혜의 모습에서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작가는 여기에서 육식은 동물성의 증표이며, 폭력성과도 짙게 결부하고 있다. 육식은 고기를 먹는 행위이며, 고기를 동물을 죽여야 획득할 수 있다. 그것은 생명체의 목숨줄을 강제로 끊어야 하며 피를 흘려야 가능하다. 우리는 생존을 핑계로 다른 생명체의 목숨을 앗는다.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P.61)

 

<몽고반점>은 동물성과 대비되는 식물성을 지향한다. 언뜻 식물은 정적이며 수동적인 존재로 간주되지만, 영혜의 형부는 식물과 꽃을 인간의 나체와 결합함으로써 더없이 역동적이며 생명력으로 충만한 존재로 변화시킨다. 동물성이 폭력적인 반면 식물성은 비폭력과 평화로움을 나타낸다. 동물성은 죽음으로 이어지지만 식물성은 무한한 삶과 번창으로 뻗어나간다. 형부가 처제의 몸에서 육체적 욕망을 갈망하고, 그토록 무감각하게 반응하던 처제가 성적 욕망을 느끼게 되는 것 역시 마찬가지 동인이다. 그들의 행위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것이지만, 예술적 영감과 식물적 관능에 함몰된 형부는 통념의 끈을 넘어선다. 비록 세속적 파멸이 눈앞에 있더라도.

 

언니, 내가 물구나무서 있는데, 내 몸에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P.156)

 

외딴 정신병원에 입원 중인 영혜는 식음을 거부한다. 그녀를 찾아간 언니에게 그는 비밀을 털어놓듯 자신이 더는 동물이 아닌 나무라고 속삭인다. 음식 따위는 필요 없이 햇빛만으로 충분한, 그래서 물구나무서기 자세로 거꾸로 있어야 비로소 완전한 나무에 가까워진다며. 병원 관계자와 언니가 보기에는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영혜의 논리에서는 완벽하다. 동물로서의 인간 영혜는 죽지만, 식물로서의 나무 영혜는 새롭게 자라나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받지 않고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며 대지 속에서 대지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 나무의 초록빛 불꽃은 온전한 생명의 불꽃이 아닐까.

 

여성주의가 강제와 억압의 거부이자 여성 몸의 주체로서 재인식이라고 한다면, 영혜는 여성주의자다. 그의 어머니와 언니는 봉건적 가치관에서 아직 탈피하지 못한 상태이며, 그의 아버지는 전형적 남성중심주의자다. 이 작품을 여성주의 관점에서 해독할 수 있지만, 동물을 남성, 식물을 여성으로 무리하게 비정하지 않는다면 한계에 봉착한다. 여기서 작가는 여성주의 자체보다 동물적 폭력성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이 오래 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P.201)

 

문득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은 혹시 영혜의 언니가 아닐까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각 단편에서 주요 인물들은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영혜의 남편도, 형부도, 부모도 모두. 영혜는 꾸준히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독자 누구나 알고 있듯 그를 정상적인 사고의 인물이라고 인정하기는 어렵다. 비록 그가 던지는 화두가 강렬하고 메시지가 묵직하지만. 영혜의 언니는 매 단편마다 충격적 경험을 하고 이를 수습하는 역할을 맡는다. 동생의 자해 행위, 남편과 동생의 기묘한 육체 결합, 식음을 거부하고 스스로 나무가 되기 위해 죽어가는 동생. 모두가 도망치고 이성의 끈을 놓을 때 그녀는 온몸으로 이 모든 것을 감당한다.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동생을 용서할 수 없도록 미워하면서도 포기할 수 없음을. 과연 그녀의 자각처럼 그녀는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는 건가, 자신은 이미 죽어 있는 존재인가? 이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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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소리 - 열정의 피아니스트 임현정의 나의 이야기
임현정 지음, 양영란 옮김 / 청미래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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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임현정의 자서전이다. 자서전이란 용어가 거창하다면, 임현정 삶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다. 한국, 콩피에뉴, 루앙, 파리, 벨기에, 뇌샤텔로 장을 구분하였는데, 임현정의 거주지역이자 음악의 여로를 담고 있다. 특이하게도 프랑스어로 된 글을 번역하였다. 베토벤 소나타 전집을 출시하면서 세간의 화제가 되자 프랑스 현지에서 피아니스트 개인에 대한 궁금증이 컸던 듯하다.

 

솔직히 그가 연주하는 베토벤 소나타는 아직 내 취향이 아니다. 라벨의 음악(스크리아빈은 잘 모르니까)도 귀에 와닿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피아니스트로서 그를 존중한다. 앞서 읽은 책을 포함해서 이 책에서 음악을 향한 그의 진지하고 투철한 자세를 높이 평가한다.

 

타고난 재능을 논외로 할 때 지독하다는 느낌을 그에게 우선 떠올린다. 어린 나이에 홀로 프랑스 유학길을 오른다든가 말도 안 통하는 타지에서 차별에 시달리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는 모습, 자신의 직관을 따르기 위해 루앙 국립음악원에서 자발적 외톨이를 선택하는 장면 등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좌초하기 쉬운 환경에서 그는 살아남고 성공을 거두었다. 정말로 목숨을 걸 정도의 독한 마음과 행동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제아무리 뛰어난 인물도 홀로 성공의 길에 오르지 못한다. 주변에서 그를 돕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필수적이다. 그를 둘러싼 환경과 인물이 항상 호의적이지 않다. 그가 기술하는 이모네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위를 자행하였는지 궁금할 정도다. 루앙 국립음악원의 피아노 담당 교수도 제자의 성취가 못마땅하다면 어찌 교사 자격이 있을지. 반면 마르크 오플레, 콜레트 테니에르, 앙리 바르다 교수를 만난 건 천운이기에 그들을 향한 그의 지극한 사의는 온당하다. 알렉산드르 라비노비치-바라콥스키의 우연한 인연은 그의 발전을 위해 더없이 소중하다.

 

피아니스트 임현정은 개성적인 인물이다. 한국 교육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유학을 떠난 것, 퀸 엘리자베스 뮤직채플의 풍요로움을 과감히 떠난 것, 명성의 고속도로인 유명 콩쿠르에 나서지 않은 것, 음반사의 제안에 베토벤 소나타 전곡이라는 거대한 역제안을 하고 이루어낸 것. 음악적 도전을 무리일 정도로 과감하게 실행해 나가는 것 등. 이 모든 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음악 자체에 진실하고 헌신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지나칠 정도로 개성적인 그의 음악 해석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음악은 영혼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 표현은 테크닉, 혹은 속도의 인질이 되어 억압받거나 제약을 받을 수가 없다. 받아서는 안 된다. 그만큼 제일 먼저 그 표현과 나의 영혼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P.93)

 

그 소나타들의 영감이 베토벤의 심장에 뛰어들어왔을 때 뛰었던 그 심장의 템포로,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들려주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하고야 말 것이었다. 베토벤을 위해서, 우리의 삶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P.216)

 

이 책은 의외로 영성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외로움과 풍파에 시달린 그가 종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지만, 뜻밖에 불교를 받아들였음은 놀랍다. 서대산인 성담 스님을 주저치 않고 스승님이라 부르고, 에필로그에 스님을 향한 헌사를 남길 정도면 통상적 입문을 넘어서는 단계라고 하겠다.

 

많은 아이가 피아노를 배운다. 수많은 영재, 천재들이 각종 음악학교에 넘쳐난다. 유럽으로, 미국으로 음악 유학을 떠나는 학생도 많다. 젊은 음악인 중에 세계 유수 콩쿠르 입상자들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요즘 핫한 조성진, 임윤찬이 대표적이며, 여성 중에는 임현정, 문지영, 손열음 등의 언뜻 떠오른다. 그들에게 피아노는 무슨 의미고, 음악은 어떠한 존재인가. 비판적인 시각으로는 쇠퇴하는 서양 클래식 음악의 일개 연주자에 불과하다. 그것에 자신의 전 존재를 바칠 의의가 있는가. 부모의, 또는 당사자의 철모르는 극성맞음의 산물이 아닐까.

 

피아노라는 악기, 클래식 음악이라는 장르는 예술에 이르는 수단이다. 바이올린과 같은 다른 서양 악기, 가야금과 거문고 같은 전통 악기를 선택할 수 있다. 대중가요, 팝송, 국악을 전공해도 좋다. 아니 음악을 떠나서 미술, 건축, 사진, 연극 등의 다른 예술 장르에 관심을 기울여도 좋다. 중요한 건 수단이 아니라 예술의 본질에 얼마나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임현정은 불교를 통해 또 다른 깨달음의 길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기술한다. 침묵의 길.

 

중요한 것은 음악에 대한 나만의 독특하고 개인적이며 직관적인 욕망이다. 중요한 것은 내면의 침묵이다. 피아노는 그저 그곳으로 데려가주는 사공일 뿐이다. (P.36)

 

피아노는 우리가 음악을 통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는 그 공간을 열어준다. 그러면 나는 세계와 하나가 된다. (P.225)

 

전반부는 예상과 크게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임현정 개인의 삶과 음악의 경로가 솔직하게 펼쳐진다. 후반부도 대체로 그러하지만, 그의 표면적 모습과 행위가 아닌 내면의 목소리를 육성으로 토로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그는 여기서 자신을 아름답게 포장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의 솔직함과 종교적 견해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가 적어도 내면을 드러내고자 하는 과감한 용기를 지녔음을 부인하지 못하리라. 그것이 이 책을 읽은 묘미이자 뉴스와 음반 표지의 화려하고 당당함에 가려진 그의 참모습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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