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 그해, 내게 머문 순간들의 크로키, 개정판
한강 지음 / 열림원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신진 작가 한강은 1998년에 아이오와 대학 주최의 국제창작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하여 수개월 간 미국에 머물렀다. 작가는 어떤 계기로 무슨 목적을 갖고 출국했는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뭔가에 쫓기듯 부랴부랴 떠난 듯한 인상으로 나는 작가가 창작과정에서 좌절을 겪었다든지 또는 창작욕의 고갈을 느꼈다든지 추측하였지만, 후의 내용으로 봐서는 섣부른 지레짐작이었다.

 

이 책은 사람과의 만남 글이다. 작가의 말 그대로 미국에서 마주친 사람들에 대한 스케치 혹은 크로키에 해당한다. 간결하고 소략한 글 속에서 전 세계 각국에서 온 작가들, 그네들의 일상 속에 감춰든 개성, 고통, 사랑, 삶 등이 작가의 시선과 마음을 통해 오롯이 드러난다. 소설을 쓰건, 시를 쓰건 작가이건 아니건 누구나 인간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애환을 한둘 지니고 있다.

 

인디언인 살리달에게서는 진행형인 인디언 차별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보통의 삶을 박탈당한 그녀는 자의반 타의반 스스로를 추방하여 유목의 삶을 선택한다. 그녀의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한 감정을 누가 섣불리 공감할 수 있겠는가.

 

작가가 아이오와에서 만났던 이들 중에서 마흐무드와 페이민이 유달리 언급됨을 알 수 있다. 아시아권이라는 지리적 공감대 탓일까. 팔레스타인의 유혈 역사와 불안한 정세, 미얀마의 군부독재 정권에 의해 투옥될지 모르는 불안 등이 작가는 물론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온다. 그럼에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마흐무드의 말처럼 그것이 인생이므로.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 때로는 말로 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것, 바로 그것들이 모두 인생이라는 듯이...... (P.74)

 

그럼에도 마흐무드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때로는 사랑 자체가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는 작가의 의견에 숙연히 부정한다.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이 고통스럽다며. 이별, 배신, 질투 같은 것들.

 

글쎄, 사랑을 둘러싼 것들도 사랑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본질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사랑이 순전한 기쁨과 행복만을 뜻하지는 않으리라. 왠지 모를 한숨, 슬픔, 가슴 아픔 등이 없다면 사랑은 일면적이고 획일적으로 치우쳤을 것이다. 사랑하기에 질투의 감정이 발생하며, 이별의 쓰라림을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재회의 순간을 기다리면서. 이 모든 게 바로 사랑이다.

 

페이민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고국으로 돌아가고자 결심한 동기 역시 같다. 자신의 뿌리이자 문화이고 언어가 있을 수 있는 자리가 그 땅이므로. 사랑이 있는 곳을 떠나서 그가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작가의 친구 미란의 결혼 스토리는 책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는데 일조한다.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오랜 연원을 지니기에 거의 본능에 가깝다. 마침 이 책 다음에 고 장영희 교수의 수필집을 읽고 있어서 그런지 새삼 반성하게 된다. 이런 편견에도 굴하지 않고 사랑을 쟁취해 나가는 그네들의 용기와 사랑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시간은 흘러가고 우리는 일상에 부대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릴 짬을 내지만 그저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낼 따름이다. 그저 남들처럼 물 흐르듯이 살아갈 뿐 대단한 존재도 아닌 나 따위가 끙끙대봤자 하며 방기하는 때도 있다. 그럼에도 무역회사에서 일하며 늦은 밤에만 글을 쓸 수 있는 하이도 포기하지 않는다. 제아무리 피곤해도 그 시간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 소중한 순간이므로. 글쓰기뿐만 아니라 삶도 마찬가지다, 파비앙의 성당 이야기처럼. 나처럼 미미한 존재의 그나마 미미한 행위의 무의미성에 대해서. 우리는 끝을 알 수 없다. 결과를 보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현재의 자신에 충실할 뿐이다.

 

우리들의 존재는 이 광활한 우주 속에서 하나의 먼지 같은 것이지만, 그 먼지 하나하나가 최선의 선의를 품고 존재하는 데에 그 미세한 에너지들의 힘이 있는 것 아닐까. 그렇게 해서, 그 보이지도 않을 만큼 조그만 개개의 존재들 속에 고요히 우주가 깃드는 것 아닐까. (P.36)

 

프로그램을 마친 후 참가자들은 저마다의 곳으로 돌아갔다. 이제 꿈에서 현실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비록 가끔씩 이메일을 주고받겠지만 그들은 모두 알고 있다. 서로 간에 앞으로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으리라는 사실을. 그걸 알면서도 그들은 아낌없이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작가의 마음은 영원히 한없이 풍요로울 것임을 우리는 안다. 그가 아이오와에서 얻은 것은 값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이었기에.

 

정말 귀중한 것은 값나가고 어려운 것들이 아니라, 숨쉬는 공기와도 같았던 것들, 가장 단순하고 값나가지 않는 것들, 평화, 우정, 따뜻함 같은 것들이었나 보았다. (P.226)

 

이 글의 진면모는 미국 체류를 전후하여 타국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삶과 내면, 일화 등을 통해 서른 즈음 작가에게 길게 드리워진 반향일 것이다. 어쩌면 작가의 청춘 시절과 (작가를 떠난) 수수한 일상에 대한 크로키라고 볼 수도 있다.

 

2003년에 초판으로 낸 책을 2009년에 개정판으로 새롭게 다듬었다. 장정, 지질, 편집이 내용과 어울려 정갈하면서도 예쁜 느낌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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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고든 핌의 모험 환상문학전집 3
에드거 앨런 포 지음, 김성곤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아문센과 스코트 대령에 의한 1911년 남극점 도달로 정점에 달한 남극대륙 탐험을 소재로 에드거 앨런 포가 모험소설을 발표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른 1838년이다. 쥘 베른도 아닌 에드거 앨런 포라니 놀랍기 이를 데 없다. 시는 물론이고 탐정소설, 환상문학에서도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던 그가 모험문학 장르에서도 명작을 만들어냈다.

 

이 작품에서는 후대의 스티븐슨과 베른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해양모험 소설의 요소가 모두 들어있다. 대양 항해, 폭풍우, 선상 반란 등. 어디 그뿐인가? 포의 전매특허인 공포와 괴기적 요소도 빠뜨릴 수 없다.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을 연상케 하는 유령선과의 마주침. 이것만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작가는 후반부에서 남극대륙 탐험이라는 유례없는 대도전을 감행한다. 사실과 가상이 교묘히 뒤섞여 있어 흥미와 긴박감을 안겨주는 탐험일지. 미지의 땅에서 만나는 낯선 원주민들. 그는 선배인 디포도 잊지 않았다. 이어 종결부는 너무나도 아스라한 환상 자체를 보여준다.

 

약 이백년 가까이 경과한 옛 모험소설에 진부함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깊이 매료된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뛰어난 글쓰기 덕택일 것이다. 한 치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 잇따른 사건의 연속과 긴장감 넘치는 팽팽한 구성, 고어적 폭력과 유혈을 상세히 묘사하여 끔찍한 처절감을 안겨주는 과감성. 언제 어떻게 쌓았는지 모르지만 해양 항해와 지리에 관한 풍부한 지식이 주는 사실감. 남극해 주변의 섬들의 방문과 위도와 경도의 제시 등이 창작인지 실제인지 궁금해서 구글 지도를 통해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사실에 근거한 자료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가의 순전한 상상력이 창조한 세계는 한계위도 이하에서부터이다.

 

그러자 탈출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내 마음속에서 마치 그림자처럼 희미해졌다. 다음 순간 나는 떨어지고 싶은 강렬한 유혹에 빠졌다. 그것은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욕망, 열망, 그리고 정열이었다. (P.219)

 

포라는 작가의 특색은 여일하다. 일상에 대한 비일상, 밝음에 대한 어둠, 평온 대신 불안, 인간의 어두운 내면에 대한 천착, 현실을 넘는 환상과 괴기스러움, 죽음을 향한 무의식적 본능. 이런 속성들이 유명한 단편들뿐만 아니라 이 장편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그가 아니라면 감히 시체의 살을 뜯어먹는 거대한 갈매기의 피범벅된 부리와 완전히 썩어빠진 시체의 처참한 모습을 몸서리치게 묘사할 수 있겠는가. 그가 노리는 효과는 분명 공포이다.

 

<로빈슨 크루소> 이후 <산호섬> 등에서 인육을 먹는 식인종은 단골로 등장한다. 실제 사실의 반영인 동시에 독자들의 관심과 두려움을 자아내는 데 적절한 소재이며, 야만인에 대한 종교적, 문화적 우월성을 드러내는 효과도 지닌다. 그 점에서 포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극한상황에 도달했을 때 다수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소수의 생명과 육체를 희생하는 대목, 즉 문명인이 인육을 먹는 장면을 천연덕스럽게 툭 던져놓고 있다. 작가는 냉정하다. 화자인 아서 고든 핌과 동료 선원인 덕 피터스를 제외하고 그램퍼스 호배에 탔던 모든 이가 죽음을 맞이한다. 여기에는 선인도 악인도 구별을 두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을 구조하고 후에 남극 탐험에 나선 제인 호도 마찬가지의 운명에 처한다.

 

만년설과 빙산만이 가득한 남극해를 돌파하여 중심부로 깊숙이 들어갔더니 기후가 온화하며 기이한 자연현상을 보이는 낯선 섬에 도착하였다는 설정은 현대의 우리 눈으로는 코웃음만 나올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닌 당대의 독자들과 그들이 지닌 과학과 상식의 수준에서 볼 때 무리한 설정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포는 풀리지 않는 괴이한 복선을 반복하여 드리우고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이 어두운 검정색의 세계에 사는 원주민들은 흰색에 대해 병적인 공포심을 품는다. ‘테켈리 리라는 단어 속에 내재된 미지의 신비한 공포는 극점 가까이 도달한 핌 일행이 마주친 하얀 가루의 소나기를 뿜어내는 하늘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거대한 폭포에서 정점에 달한다. 마지막 장면은 두려움 보다는 신비함의 극치일 것이다.

 

322. 부쩍 어두워졌지만, 우리 앞의 하얀 휘장이 쏟아놓는 파도의 빛 때문에 그나마 좀 환했다. 거대하고 창백한 수많은 새들이 하얀 베일 너머로 끊임없이 날고 시야에서 사라져가면서 끝없이 <테켈리 리!>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 소리에 누누가 보트 바닥에서 몸을 움직였으나, 만져보니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받아들이려고 활짝 벌리고 있는 폭포의 포옹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러나 우리의 길목에 갑자기 그 어떤 인간보다도 더 큰, 수의를 입은 사람의 형상이 물 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의 피부는 마치 눈처럼 완벽하게 흰색이었다. (P.230)

 

작가는 이 대목에서 핌의 수기를 중단시킨다, 매우 현명하게도. 더 이상의 진전은 자신에게도 부담스럽겠지만 한편 독자의 흥미와 상상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시점에서 끝내는 극적 효과도 노리지 않았을까. 독자는 못다 한 결말에 대해 발을 동동 구를 뿐이다.

 

부록으로 수록된 단편 <빙원의 스핑크스>1897년에 쥘 베른이 미완결된 결말에 대한 나름대로 구상한 덧붙이기다. 역량 있는 작가이므로 제법 흥미롭고 그럴듯한 끝맺음을 보여주지만 포의 과감하고 치밀한 작품 성격과 스타일과는 판이함을 나타낸다. 자신만의 전개를 위해서 원작의 내용과 합치되지 않는 면도 존재하고 무엇보다 포가 그렇게 강조한 흰색에 대한 고려가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어 단절된 인상을 준다. 무엇보다 주인공인 고든 핌이 그렇게 허무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산전수전 온갖 역경을 헤치고 살아남은 그에게 합당한 죽음으로서 인정할 수 없다는 독자로서의 내면의 반발심을 억누르기 어렵다. 분량 면에서도 그렇고 쥘 베른이라면 더 좋은 성과를 기대해도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역자의 해설은 인간 심리와 꿈과 무의식, 흑백의 대립과 인종 갈등까지 폭넓고 심층적으로 작품 분석을 하고 있어 포의 이 소설이 단순한 모험문학이 아님을 알려준다. “자아 발견과 탐색의 여행”(P.284)라는 분석에는 일부분 동감하지만,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고 의미부여를 하는 건 아닐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단편소설과 몇몇 시 작품을 통해 문학계에 불후의 명성을 남긴 에드거 앨런 포.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무시되어 왔는데 잔인하고 어두운 작품 분위기와 모호함과 당혹감을 안겨주는 결말 부분 등 대중적 모험소설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본 듯하다. 역으로 이런 점들이 그의 이 소설에만 존재하는 특색이자 장점으로 평가받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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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자 -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3
J.M 바스콘셀로스 지음, 이광윤 옮김, 김효진 그림 / 동녘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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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의 제제는 외로운 아이였다. 가족 속에 있으면서도 그들의 이해와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의 슬픔, 그 옆에 라임 오렌지나무와 뽀르뚜가가 있다. <햇빛사냥>의 제제는 입양되었다. 새 가족 속에서 제제는 여전히 외로운 소년이었다. 그를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존재는 아담, 모리스 그리고 파이올리 수사다. 그리고 제제는 어느덧 청년으로 자랐다. 그의 곁에는 더 이상 아무도 없다, 친구 따르씨지우를 빼고는. 제제는 아직도 고독하다. 이따금 그는 세상을 향한 격렬한 슬픔과 분개를 표출한다. 동일한 행동과 반응이지만 어린 제제와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그의 내면이 새삼 낯설고 궁금하다.

 

, 맙소사! 죽어 버리겠어. 죽어 버릴 거야. 없어져 버릴 테야! 이 불행하고, 고통스럽고, 보잘것없는 삶을 끝내 버리고 싶어! 아아......! (P.53)

 

스무 살을 맞이하게 될 제제의 사고와 행동에 대해 여러 추측이 가능하다. 나는 이를 독립 본능의 발현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이전의 제제가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눈물을 흘렸다면 건장한 제제는 세상에 도전하기를 열망한다. 거친 무대에 뛰어들어 열정을 불태우고 싶고, 뜨거운 사랑도 해보고 싶은 젊은이. 그는 우리에 갇힌 야생동물처럼 불안하게 서성인다. 가끔씩 포효한다.

 

그 집에서 뛰쳐나가 방랑자처럼 이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애정을 찾고, 사랑을 구하며, 나만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넓디넓은 이 세상에서 미지의 세계를 찾아 여행하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일까? (P.47)

 

국내의 경우 병역 의무와 보편화된 대학 및 대학원 진학, 취업 곤란 등의 사유로 인해 남성들의 사회 진출이 매우 늦어져 보통 이십대 후반 내지 삼십에 다다라서야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늦은 취업과 주택 마련 비용의 상승 등으로 경제적 독립과 결혼은 더더욱 지연되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반면 서구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대학 진학을 하든 아니면 취업을 하든지 간에 자식이 독립을 하는 문화가 보편적이라고 한다.

 

나는 턱을 괴고는 아버지를 향해 가만히 웃기만 했다. , 사랑하는 아버지! 어쩌면 저렇게 멋있을 수 있을까? 그러니 어찌 내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P.78)

 

제제에게 돌아가 본다. 입양된 처지에서 가족들은 그에게 온전히 친밀한 존재는 아니다. 비록 과거보다는 위의 인용과 같이 아버지와의 관계가 많이 좋아졌지만 부자가 상호 일정 양보와 타협을 한 결과일 뿐이다. 여기에는 아버지의 와병도 한몫을 거들었다. 그는 학교를 졸업했지만 장래에 대한 방향 설정을 아직 못하고 있다. 그가 살고 있는 나딸이라는 도시는 별로 큰 도시가 아니므로 여기에서 제대로 정착을 하기는 기대하기 어렵다. 대학을 중퇴한 그는 자연스레 빈둥거릴 수밖에 없는 여건에 처해진 셈이다. 이 작품에서 제제의 일과 중 상당한 분량이 수영에 할애되고 있는 연유가 그러하다.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데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고 그나마 할 수 있는 것도 제한적인 사정, 게다가 가족과의 삶은 그렇게 편치만은 않다. 그의 마음은 밖으로 시종 떠나있는 것은 당연하다.

 

마치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 방황하고 있었다. 이제 머지않아 스무 살이 되는데도 할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 (P.39)

 

그의 아버지는 제제의 심중을 다소간 이해한다. 제제의 장래 설계에 대해 특정하게 유도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인내심을 보여준다. 그토록 바라던 참다운 아버지의 태도, 즉 자식을 애정으로 토닥거리고 진실한 공감으로 이해해주는 모습을 제제는 조금씩 발견하게 된다. 다만 제제의 첫사랑에 대해서는 제외하고. 우리는 제제의 아버지가 씰비아와의 교제 중단을 요구하는 구체적 이유를 알지 못한다. 아직 연애를 하기엔 어리다고 보는 건지, 아니면 제제 누나의 말대로 그녀가 품행이 단정하지 못한 더럽고 구역질나는 계집일지도 모른다.

 

젊은이가 성인으로 자리 잡는 계기는 사랑과 결혼이다. 제제는 아버지의 수술을 앞두고 연애를 끊겠다는 약속을 한다. 사랑의 중단, 말은 쉽지만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다. 잃어버렸을 때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픔을 겪어야 진정한 감정이다. 제제 자신도 아버지도 제제의 감정의 깊이와 진정성을 과소평가한 셈이다. 오랜 시간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제제가 비로소 사랑을 주고받을 대상을 만났는데 강제로 이별을 해야만 했다. 그의 삶에는 더 이상의 기쁨도 의미도 없고 오직 절망뿐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조금씩 나를 파멸시키고 있었다. 그 모든 것 때문에 내 안에서는 더 살고 싶은 의욕이 도무지 일어나지 않았다. (P.138)

 

헤어짐의 고통을 절절히 깨달은 제제가 씰비아와 재회한다.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의 비난에도 굴하지 않는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 작별할 때가 다가온 것이다. 가족들하고. 자신만의 작은 세상도, 유년기 시절도 이제 이별이다. 그것은 한번 떠나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이다. 예부터 수많은 청년들이 제제처럼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났다.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건 쓰디쓴 실패의 나락을 겪어든 어차피 떠나야 할 길이다. 제제의 앞날에 축복을!

 

아버지는 나에게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활짝 열어 주었던 것이다. 갑자기 겁이 났다. 이 세상은 너무나도 넓고, 많은 비밀이 있어서 우리 인간들이 그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불쌍한 존재 하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공이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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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지기 2015-02-10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도서출판 동녘의 마케터입니다.

저희 책을 읽고 또 리뷰까지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리뷰도 해주시고 저희 출판사의 책을 읽어 주셨는데 동녘에서 진행하는 SNS 이벤트 소식을 못 받으시는 것 같아 동녘의 페이스북 주소를 알려드려요.

www.facebook.com/dongnyokpub

페이스북 페이지 좋아요를 누르시면 계속 해서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올해부터 자체적으로 여러 이벤트를 많이 진행할 예정이니 기대해 주시고, 행운까지 거머쥐셨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이 글이 불편하셨다면 정말 죄송하구요. 절대 독자님을 귀찮게 하거나 클릭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그럼 음력 새해에도 늘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라며 앞으로도 좋은 독서 하세요. 고맙습니다. ^^
 
생일 - 사랑이 내게 온 날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장영희의 영미시산책
장영희 지음, 김점선 그림 / 비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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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어본 지 꽤 오래됐다. 예이츠를 집중적으로 읽을 때 그의 시집을 여러 편 본 게 마지막이었으니. 그때 영한대역판 또는 번역판으로 읽으면서 시도 나름대로 재미를 느낄 수가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일종의 선입견이겠지만 시는 원어로 읽어야 제 맛을 음미할 수 있다는 지론이다. 산문에 비해 운문의 경우 번역을 통해서는 도저히 원작의 향기를 느낄 수 없다는. 그렇다면 우리 시는 읽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므로 결국 시를 안 읽는 핑계에 대한 일종의 자기 정당화랄 수밖에. 그것이 예이츠를 읽으며 번역시도 어쨌든 시인의 감성과 이미지를 부분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제법 소득이다. 이 책에서도 예이츠의 시 두 편이 소개된다.

 

시인은 모두 삶에 대한 사랑을 노래”(P.6)하는 이들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예민한 감각과 감성을 통해 자기의 심장으로 우리를 대변해주는 사람”(P.6)들이라고. 여러 사랑 중에서 시인의 감수성을 가장 잡아당기는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이다. 그래서 이 책의 표제도 사랑에 눈떠 영혼이 다시 태어나는 날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을 부여받는 생일”(P.7)을 뜻한다고.

 

이제야 내 삶이 시작되었으니까요.

내게 사랑이 찾아왔으니까요. (생일, 크리스티나 로제티, P.17)

 

사랑은......아주 작은 방이라도 하나의 우주로 만드니까요......

우리는 하나의 세계. 각자가 하나이고 함께 하나이니. (새 아침, 존 던, P.41)

 

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다른 아무것도 아닌 오직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주세요......

영원함으로 당신이 언제까지나 사랑할 수 있도록. (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엘리자베스 배릿 브라우닝, P.49)

 

우리는 함께여야 합니다. 그대와 나 (그대와 나, 헨리 앨포드, P.103)

 

활짝 편 손에 담긴 사랑, 그것밖에 없습니다. (활짝 편 손으로 사랑을, 에드너 St. 빈센트 밀레이, P.107)

 

사랑은 조용히 오는 것......

사랑은 천천히 오는 것 (사랑은 조용히 오는 것, 글로리아 밴더빌트, P.181)

 

이성 간의 애잔하고 절절한 사랑은 새봄의 꽃잎처럼 화사하게 피어나는 듯 하다가 시샘하는 바람과 추위로 시련을 겪기도 한다. 사랑의 기쁨은 항상 슬픔과 동행한다. 절기가 언제나 봄철일 수 없듯이 눈부시게 찬란할 정도로 아름다운 사랑도 변하게 마련이다. 나이가 들어서 옛 모습을 잃거나 영원한 이별이라는 운명의 타격을 마주하기도 한다.

 

......사랑이란 바람 한 번 불면

떨어지고 마는 활짝 핀 꽃뿐이란 걸......

가슴을 늦게야 배운다는 것, 그것만 가여워하세요. (가여워 마세요. 에드너 St. 빈센트 밀레이, P.45)

 

그녀에게도 8월이 지나갔네......

그녀도 중년이 될 테니. (찻집, 에즈라 파운드, P.123)

 

사랑은 영원히 계속될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소용이 없으니까요. (슬픈 장례식, W. H. 오든, P.87)

 

가버린 나날들을 생각하네. (눈물이, 덧없는 눈물이, 앨프레드 테니슨, P.99)

 

워낙 영미시에 문외한인지라 소개된 작품을 물론 시인들로 이름만이라도 들어본 이가 있으면 다행일 정도다. 처음 듣는 시인들이 부지기수다. 저자는 이 책을 딱딱하게 만들 의도가 전혀 없다. 순전히 시 소개와 시의 이해를 위한 저자의 감상을 수록하였을 뿐 시인 소개와 해설은 매우 간소에 그친다. 중요한 것은 시를 읽는 독자의 가슴이리라. 이른바 심금에 다가오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명시라고 해도 그에게는 아무런 울림도 지니지 않는다. 화가 김점선의 삽화라고 쉽게 칭하기에는 비중과 노력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그림들도 책의 분위기에 크게 일조한다.

 

어쨌거나 사랑을 한번이라도 해본 사람들은 행복하다. 사랑의 추억은 그의 가슴속에 영원한 따뜻함을 남겨줄 것이므로. 그것이 숨겨놓은 사랑이든, 설익은 풋사랑일지라도 기쁨보다 슬픔이 더 많은 사랑이었다 할지라도, 그는 결코 자신의 사랑을 후회하지 않는다. 사랑을 함으로써 그의 인생은 더없이 풍요로워졌으니.

 

......나를 경멸하다가도......

그대의 사랑을 생각하면 곧 부귀에 넘쳐

내 운명, 제왕과도 바꾸지 아니하노라. (소네트 29, 윌리엄 셰익스피어, P.61)

 

내 열정은 깨어나 격렬하게 싸우지만

당신은 여전히 평화롭기만 하군요. (그 누구에게, 조지 고든 바이런, P.143)

 

......사랑을 좇다가 삶을 마친다. 그것뿐이다. (사랑에 살다, 로버트 브라우닝, P.153)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고, 잠들지 않았습니다......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습니다, 죽지 않았으니까요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매리 프라이, P.165)

 

어디 사랑뿐이겠는가- 일상과 생존의 늪에 빠져서, 성공의 빛에 눈이 멀어서, 우리는 삶을 힘겹게 영위하는데 급급해할 뿐이다. 저 앞에 둥실 떠있는 무지개의 허상을 좇아서 우리는 쉴 틈도 없이 옆을 살피거나 뒤돌아 볼 여유도 없이 허겁지겁 달음박질에 매진한다. 그것이 만길 낭떠러지로 이어지는 가파른 한줄기 내리막길임을 알지 못한 채. 당사자에게는 진지하고 절박한 생존의 몸부림이 시인의 눈에는 어이없게 비친다. 그들에게 사람들은 하멜른의 피리 소리에 영혼이 홀린 생쥐와 아이들 마냥 보일 뿐이다.

 

과학이여! (과학에게, 에드거 앨런 포, P.127)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하지만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 (눈 오는 저녁 숲가에 서서, 로버트 프로스트, P.173)

 

무슨 인생이 그럴까, 근심에 찌들어

가던 길 멈춰 서 바라볼 시간 없다면 (여유, W. H. 데이비스, P.119)

 

나는 숲속으로 가리라

눈같이 활짝 핀 벚나무 보러. (나무 중 제일 예쁜 나무, 벚나무, A. E. 하우스먼, P.195)

 

이 책에 수록된 시들도 아름다운 작품들로 엄선되었지만, 책과 시를 더욱 빛나게 만든 것은 저자 장영희의 맛깔스런 감상이다. 그의 문체는 은근하고 겸손하면서 다가서기 어렵게 고고한 척 젠체하지 않는다. 밝고 친근한 어조로 우리들에게 좋을 것을 권하고 행여나 우리들이 그것을 외면하고 진가를 알아채지 못할 까 노심초사 전전긍긍하는 소녀 적 이미지를 간직한 이웃 누님 같은 분위기를 전해준다. 오직 영혼이 맑은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성품이 문장에 배어있어 글을 읽는 자체만으로도 상쾌함과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암으로 투병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그를 보면서 훗날의 일을 아는 우리는 괜스레 가슴 한켠이 찌릿하다. 그렇기에 아래의 시구들은 저자 자신을 노래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삶은 아주 멋진 것들을 팝니다......

전 재산을 털어 아름다움을 사세요.

사고 나서는 값을 따지지 마세요. (물물교환, 새러 티즈데일, P.33)

 

나 죽어갈 때 말해주소서......

모든 아름다운 걸 사랑했노라고......

삶을 삶 자체로 사랑하며......

아이들처럼 노래했노라고. (기도, 새러 티즈데일,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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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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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민주화 운동은 분명히 나와 동시대에 벌어진 사건이지만 낯설고도 먼 존재다. 광주 폭동, 광주 사태, 광주 민중 항쟁, 광주 민주화 운동 등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달라지는 호칭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사건을 바라보는 인식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이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나는 작가만큼이나 어렸고 서울에 있었다.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는 정권의 일방적인 정보만 쏟아졌다. 그 후로도 한동안 암암리에 떠도는 풍문을 통해 뭔가가 있었음을 짐작할 뿐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광주 출신인 작가에게 이 사건의 의미와 파장을 남다를 것이다. 자신이 살던 지역과 사람들, 폭력과 유혈이 낭자한 처참한 현실. 멀리서 바라만 볼 수밖에 없던 자신에 대한 근거 없는 자괴감 등. 삼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이른바 명예회복도 되었지만 그네들이 겪었을 공포와 고통, 살아남은 자들의 신체적, 정신적 외상은 쉽사리 지워지지 못한다. 게다가 그들의 가해자는 엄연히 활개를 치며 세상을 활보하고 있는 판국이니.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P.135)

 

작가는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상황을 살아있는 시각에서 재현하기 위하여 고심한다. 다큐나 역사소설이 아니므로 사건 전개의 상세하고 구체적 사실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되, 당시의 참혹한 정경과 분위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작가는 특별히 시점, 인물과 시간의 구성을 통해 새롭게 당대를 조명한다. 작가는 특이하게도 이인칭 시점을 사용한다. 1인칭의 고백체는 사태를 협소한 시각에서 주관적으로만 전달하게 되어 보편적 공감을 얻지 못할 수 있다. 3인칭은 객관적의 장점이 자칫 사태와 거리감을 두어 감정적 공유를 자아내기 어려울 수 있다.

 

작품 전개를 특정 인물에만 의존하게 되면 사태의 광범하고 다채로운 층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게 될까 봐 작가는 여러 명의 인물을 등장시켜 그들의 행동과 발언을 교차하여 제시한다. 작가가 특히 신경 쓴 부분은 사건 당시 주요 인물의 연령대가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들이라는 점이다. 군부 세력의 날조된 유언처럼 그들을 빨갱이, 폭력배, 국가전복 세력으로 매도하기에는 그네들의 아직 어리거나 젊고 순수하다. 오히려 그들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연민조차 보여주지 않고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 폭력 행위를 자행한 세력과 주어진 총마저 쏠 줄 모르는 그네들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광주의 사건을 발생 몇 일 또는 몇 달이라는 단기간으로 파악하면 올바른 진상 이해를 할 수 없게 된다. 광주는 누적되고 억압된 갈등이 일시에 폭발한 현장이다. 뿌리는 신군부의 등장과 군인 대통령의 서거를 거슬러 올라가 군부 독재의 모순을 지나서 종내에는 4·19의거와 이승만 독재, 친일세력의 제거 실패라는 건국 초기의 실패에까지 이른다. 광주의 여파는 누구나 알 듯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딱지 진 상처를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선주를 청계피복노조와 관련시킴으로써 과거와의 연계를 분명히 하며, 19805월 이후 삼십여 년의 세월 동안 참가자와 그 가족들이 겪은 고통과 현재까지 이어지는 상처를 섣불리 치료하지 않는다. 은숙, 선주, 진수와 이름이 밝히지 않은 진수보다 연상의 남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은 동호의 엄마...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P.95)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반복하여 던지는 중심적인 화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근원적 의구심이다. 인간이 차마 어찌 이리 잔인할 수 있는가-

 

대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인 우리는 인간 본성의 순수성과 선함을 믿거나 믿으려고 애쓴다. 자고로 순자의 성악설과 고자의 성무선악설에 비해서 맹자의 선악설이 선호되는 연유도 인간 본성에 대한 세인들의 기대를 반영한 것이리라. 이런 기대가 헛되었음을 드러내는 현상들이 평시(사이코패스를 보라!)는 물론 전시사변이나 비상사태가 발발하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대두됨을 우리는 보게 된다. 군인과 일반인, 남녀와 노소 구분 없이 무차별적으로 잔인한 가혹행위와 대량학살 등. 그들은 별종의 전혀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 누군가의 선량한 아들이고 오빠이며 형이며 동생이자 애정에 넘치는 남편이며, 우정 깊은 친구이다. 방아쇠를 당긴 손으로 뺨을 후려친 손으로 자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아내와 연인의 뺨을 어루만진다.

 

힘겨운 광주의 5월을 보낸 그네들도 평범함이라는 면에서는 마찬가지다. 그네들이 처음부터 작심하고 도청에 집결하고 농성을 하는 영웅적인 민주화 투사들이 아님은 작중 인물들의 면면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회피하지 않고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행로를 좇다 보니 역사 속의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도 있으며, 죽지 못해 치욕적인 삶을 저주하고 감내하며 지금도 여전히 버티는 이들도 분명 있다. 죽은 자와 산 자 모두 아픔을 반복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리라. 하지만 만약에 다시 유사한 상황이 전개되어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많은 이들이 동일한 행보를 하지 않을까. 그것은 인간에 대한 한 가닥 신뢰가 여전히 마음속에 잔존해 있는 탓이다.

 

스스로가 용감하지도, 강하지도 않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은 안다. 그해 봄과 같은 순간이 다시 닥쳐온다면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P.175)

 

일각에서는 광주 이야기라면 넌더리를 내는 경우도 보았다. 다 지난 과거지사인데, 그걸 자꾸 파헤쳐서 무엇을 하겠냐고, 그걸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게 아니냐며.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내가 겪은 일들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P.120)

 

그렇다, 이해하기 위해서다. 어떻게든 당시에 벌어졌던 일들을, 그네들이 겪었던 일들을, 어쩌면 우리들이 겪었을 수도 있는 일들을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 영문도 모른 채 지나갔으니 위안 삼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2의 광주가 생길 가능성을 예방하고 그럴 경우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이해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P.207)

 

작가 한강은 <희랍어 시간>에서부터 묘사와 서술을 줄이고 시어의 비중을 높이고 있다. 원체부터 문장 자체가 정제되고 시적인 뉘앙스를 풍기던 그였지만, 정갈하다 못해 투명하게까지 느껴지는 문체는 이른바 시설(詩說)을 연상시킨다. 이 소설에서도 작가 특유의 성향은 여일하다. 더구나 이인칭 시점의 화자는 인물의 내면으로 다가서다가도 어느덧 훌쩍 몇 발짝 떨어져 주변을 둘러보는 등 대상과 인물의 이동이 자유로우면서도 나직하고 침잠하는 어조로 자칫 격동에 빠지기 쉬운 제재에 균형추의 역할을 하고 있다.

 

작가가 특별히 에필로그를 덧붙인 까닭은 작품을 벗어나 소설 속에서 말하지 못한 부분을 밝히고 싶어서이리라. 그것은 광주와 작가의 개인적 인연을, 그 사건의 현재적 연속성과 유효성을 확인시켜준다. 작가는 섣부른 동정도, 긍정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다.

 

기도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묵념하지도 않았다......반투명한 날개처럼 파닥이는 불꽃의 가장자리를 나는 묵묵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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