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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 사랑이 내게 온 날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ㅣ 장영희의 영미시산책
장영희 지음, 김점선 그림 / 비채 / 2006년 4월
평점 :
시를 읽어본 지 꽤 오래됐다. 예이츠를 집중적으로 읽을 때 그의 시집을 여러 편 본 게 마지막이었으니. 그때 영한대역판 또는 번역판으로 읽으면서 시도 나름대로 재미를 느낄 수가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일종의 선입견이겠지만 시는 원어로 읽어야 제 맛을 음미할 수 있다는 지론이다. 산문에 비해 운문의 경우 번역을 통해서는 도저히 원작의 향기를 느낄 수 없다는. 그렇다면 우리 시는 읽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므로 결국 시를 안 읽는 핑계에 대한 일종의 자기 정당화랄 수밖에. 그것이 예이츠를 읽으며 번역시도 어쨌든 시인의 감성과 이미지를 부분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제법 소득이다. 이 책에서도 예이츠의 시 두 편이 소개된다.
시인은 모두 “삶에 대한 사랑을 노래”(P.6)하는 이들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예민한 감각과 감성을 통해 “자기의 심장으로 우리를 대변해주는 사람”(P.6)들이라고. 여러 사랑 중에서 시인의 감수성을 가장 잡아당기는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이다. 그래서 이 책의 표제도 “사랑에 눈떠 영혼이 다시 태어나는 날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을 부여받는 생일”(P.7)을 뜻한다고.
이제야 내 삶이 시작되었으니까요.
내게 사랑이 찾아왔으니까요. (생일, 크리스티나 로제티, P.17)
사랑은......아주 작은 방이라도 하나의 우주로 만드니까요......
우리는 하나의 세계. 각자가 하나이고 함께 하나이니. (새 아침, 존 던, P.41)
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다른 아무것도 아닌 오직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주세요......
영원함으로 당신이 언제까지나 사랑할 수 있도록. (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엘리자베스 배릿 브라우닝, P.49)
우리는 함께여야 합니다. 그대와 나 (그대와 나, 헨리 앨포드, P.103)
활짝 편 손에 담긴 사랑, 그것밖에 없습니다. (활짝 편 손으로 사랑을, 에드너 St. 빈센트 밀레이, P.107)
사랑은 조용히 오는 것......
사랑은 천천히 오는 것 (사랑은 조용히 오는 것, 글로리아 밴더빌트, P.181)
이성 간의 애잔하고 절절한 사랑은 새봄의 꽃잎처럼 화사하게 피어나는 듯 하다가 시샘하는 바람과 추위로 시련을 겪기도 한다. 사랑의 기쁨은 항상 슬픔과 동행한다. 절기가 언제나 봄철일 수 없듯이 눈부시게 찬란할 정도로 아름다운 사랑도 변하게 마련이다. 나이가 들어서 옛 모습을 잃거나 영원한 이별이라는 운명의 타격을 마주하기도 한다.
......사랑이란 바람 한 번 불면
떨어지고 마는 활짝 핀 꽃뿐이란 걸......
가슴을 늦게야 배운다는 것, 그것만 가여워하세요. (가여워 마세요. 에드너 St. 빈센트 밀레이, P.45)
그녀에게도 8월이 지나갔네......
그녀도 중년이 될 테니. (찻집, 에즈라 파운드, P.123)
사랑은 영원히 계속될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소용이 없으니까요. (슬픈 장례식, W. H. 오든, P.87)
가버린 나날들을 생각하네. (눈물이, 덧없는 눈물이, 앨프레드 테니슨, P.99)
워낙 영미시에 문외한인지라 소개된 작품을 물론 시인들로 이름만이라도 들어본 이가 있으면 다행일 정도다. 처음 듣는 시인들이 부지기수다. 저자는 이 책을 딱딱하게 만들 의도가 전혀 없다. 순전히 시 소개와 시의 이해를 위한 저자의 감상을 수록하였을 뿐 시인 소개와 해설은 매우 간소에 그친다. 중요한 것은 시를 읽는 독자의 가슴이리라. 이른바 심금에 다가오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명시라고 해도 그에게는 아무런 울림도 지니지 않는다. 화가 김점선의 삽화라고 쉽게 칭하기에는 비중과 노력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그림들도 책의 분위기에 크게 일조한다.
어쨌거나 사랑을 한번이라도 해본 사람들은 행복하다. 사랑의 추억은 그의 가슴속에 영원한 따뜻함을 남겨줄 것이므로. 그것이 숨겨놓은 사랑이든, 설익은 풋사랑일지라도 기쁨보다 슬픔이 더 많은 사랑이었다 할지라도, 그는 결코 자신의 사랑을 후회하지 않는다. 사랑을 함으로써 그의 인생은 더없이 풍요로워졌으니.
......나를 경멸하다가도......
그대의 사랑을 생각하면 곧 부귀에 넘쳐
내 운명, 제왕과도 바꾸지 아니하노라. (소네트 29, 윌리엄 셰익스피어, P.61)
내 열정은 깨어나 격렬하게 싸우지만
당신은 여전히 평화롭기만 하군요. (그 누구에게, 조지 고든 바이런, P.143)
......사랑을 좇다가 삶을 마친다. 그것뿐이다. (사랑에 살다, 로버트 브라우닝, P.153)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고, 잠들지 않았습니다......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습니다, 죽지 않았으니까요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매리 프라이, P.165)
어디 사랑뿐이겠는가- 일상과 생존의 늪에 빠져서, 성공의 빛에 눈이 멀어서, 우리는 삶을 힘겹게 영위하는데 급급해할 뿐이다. 저 앞에 둥실 떠있는 무지개의 허상을 좇아서 우리는 쉴 틈도 없이 옆을 살피거나 뒤돌아 볼 여유도 없이 허겁지겁 달음박질에 매진한다. 그것이 만길 낭떠러지로 이어지는 가파른 한줄기 내리막길임을 알지 못한 채. 당사자에게는 진지하고 절박한 생존의 몸부림이 시인의 눈에는 어이없게 비친다. 그들에게 사람들은 하멜른의 피리 소리에 영혼이 홀린 생쥐와 아이들 마냥 보일 뿐이다.
과학이여! (과학에게, 에드거 앨런 포, P.127)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하지만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 (눈 오는 저녁 숲가에 서서, 로버트 프로스트, P.173)
무슨 인생이 그럴까, 근심에 찌들어
가던 길 멈춰 서 바라볼 시간 없다면 (여유, W. H. 데이비스, P.119)
나는 숲속으로 가리라
눈같이 활짝 핀 벚나무 보러. (나무 중 제일 예쁜 나무, 벚나무, A. E. 하우스먼, P.195)
이 책에 수록된 시들도 아름다운 작품들로 엄선되었지만, 책과 시를 더욱 빛나게 만든 것은 저자 장영희의 맛깔스런 감상이다. 그의 문체는 은근하고 겸손하면서 다가서기 어렵게 고고한 척 젠체하지 않는다. 밝고 친근한 어조로 우리들에게 좋을 것을 권하고 행여나 우리들이 그것을 외면하고 진가를 알아채지 못할 까 노심초사 전전긍긍하는 소녀 적 이미지를 간직한 이웃 누님 같은 분위기를 전해준다. 오직 영혼이 맑은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성품이 문장에 배어있어 글을 읽는 자체만으로도 상쾌함과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암으로 투병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그를 보면서 훗날의 일을 아는 우리는 괜스레 가슴 한켠이 찌릿하다. 그렇기에 아래의 시구들은 저자 자신을 노래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삶은 아주 멋진 것들을 팝니다......
전 재산을 털어 아름다움을 사세요.
사고 나서는 값을 따지지 마세요. (물물교환, 새러 티즈데일, P.33)
나 죽어갈 때 말해주소서......
모든 아름다운 걸 사랑했노라고......
삶을 삶 자체로 사랑하며......
아이들처럼 노래했노라고. (기도, 새러 티즈데일, P.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