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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 ㅣ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구판) 1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지음, 남수인 옮김 / 열림원 / 1997년 4월
평점 :
품절
몇 가지 면에서 이채로운 소설이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남성 동성애를 작품의 제재로 선택하였다. 다음으로 이십대 중반의 여성 작가가 동년배 남성의 심리를 예리하게 포착하였다. 더욱이 인생의 깊은 의미를 통찰하고 있어 새삼 작가의 나이를 잊게 만든다.
이 중편소설은 남성 주인공 알렉시가 아내 모니크에 보내는 장문의 서신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자신이 아내 곁을 떠나야 하고 떠날 수밖에 없음을 어릴 적부터 거슬러 올라가 차분하고 담담하게 독백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차분하고 담담히!
민감한 제재를 다루고 있지만 말초적 관능을 자극하거나 거부감을 일으킬만한 묘사나 표현은 일체 배제하고 있다.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동성애 묘사가 아니라 한 평범한 남성이 동성애에 이끌리게 된 과정이며, 끊임없이 죄의식에 시달리다가 스스로의 길을 선택하는 내면 묘사에 있다. 따라서 작가가 언급하고 있듯이 이 소설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화자의 목소리다. 그 깊고 내성적인 울림은 독자의 심중을 파고들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1인칭으로 쓰여진 이야기가 다 그러하듯, <알렉시>는 목소리의 초상이다. 이 목소리에다 고유의 음역을, 고유의 음색을 남겨놓는 것이 필요했다. (P.11)
예나 지금이나 동성애는 민감한 이슈다. 물론 과거보다 많이 개방되어 일부 유럽과 미국에서는 동성애자 간 결혼까지도 법적으로 인정하는 지역도 있다. 국내에서도 일부 연예인들이 커밍아웃을 선언하고, 소수인권 보호 차원에서 권리를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적 인정과 보호는 요원해 보인다.
개인적으로 동성애에 부정적이다. 인간은 단성생식이 아닌 양성생식을 하는 생명체이며, 자웅동체가 아니므로 이성 간의 결합에 매력을 느끼고 추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본성이라고 믿는다. 동성애의 존재 자체를 외면할 생각은 없다. 자연에는 다양한 현상들이 공존하므로 소수의 예외적 현상도 언제나 존속해 왔다. 동성애 사안이 현대에 와서 갑자기 발생한 게 아님을 누구나 알고 있다. 묵인은 하지만 공인하지는 않는 게 여태껏 인류의 대응 방침이며 향후에도 유효할 것으로 믿는다.
어떻게 한 학술 용어가 한 인생을 설명하겠소. 용어란 하나의 실상도 설명해내지 못하고, 단지 지칭할 뿐이오. 한 사람의 인생에서도 그렇지만, 각기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서는 똑같은 두 가지 일이 없는데 말이오. (P.35)
현상으로서 동성애는 쉽게 발언할 수 있지만 개별적 체험으로서의 동성애는 어렵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으리라. 남성이 여성에게, 여성이 남성에게 매혹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드러내고 싶은 반면 남성이 남성에게, 여성이 여성에게 이끌리면 감추고 최대한 공개되지 않도록 전전긍긍한다. 그 사이 당사자에 닥치는 인간적 고통은 섣불리 예단할 수 없다.
우리의 영혼, 우리의 정신, 우리의 육체는 자주 상호 상반되는 요구를 가졌고,......나는 내 행위들을, 내 소극성만으로도 충분한 원인이 되는데, 형이상학적 설명으로 미화시키고 싶지는 않소. (P.76)
아내에게 자신의 은밀한 욕망의 내력을 토로하는 심경은 곤혹스럽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부끄러움, 혹시라도 충격과 혐오를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공인받지 못하는 불순한 욕망에 대해 나름대로 해명하고자 하는 의도, 이것이 구차한 자기변명으로 비쳐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등등. 그래서 화자는 직접적으로 털어놓지 못하고 아주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서 자신의 반생을 회고한다. 그럼으로써 인간적 연민을 불러일으키면서 화자 말대로 시간을 벌려고 한다.
내가 체험했었던 것은 사랑과는 무관했소. 열정도 아니었소......나는 그 실수를, 이를테면 나 자신과 분리시켜서, 하나의 우발적인 일로만 간주했던 것이오. (P.62)
알렉시의 욕망과 행위를 사랑으로 간주할 수는 없으리라. 그는 동성의 파트너에게 애정을 느끼지 않았다. 때때로 발현하여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 때 일시적 성욕의 충족이면 충분하였다. 그는 순수한 동성애적 사랑을 갈구한 게 아니라 육체적 동성애 욕망을 갈구하였을 뿐이다. 아내를 포함한 여성에게도, 그리고 남성에게도 지속적 사랑의 교감을 느끼지 못하므로 그는 외로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그는 말한다. 아내와 결혼 당시 자신 없이 행복했다고, 곧이어 행복하지 않았다고.
그는 욕망을 끊을 수 없는 육체를 혐오하고 지긋지긋해 하지만 떨구어 낼 수 없다. 죄의식에 고뇌하던 그는 철저한 금욕을 통해 죄의 감행을 억제하려고 한다. 순결한 정신의 지배를 거부하고 제멋대로 돌출하는 육체를 징벌한다. 그는 차분함과 평온함을 겪으며 자신이 성공했다고 믿기도 한다. 우리는 안다. 육체의 욕망은 생명의 자발적인 분출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반영하고 있을 뿐임을. 생식의 본능의 지시에 따르는 현상은 이성에 선행하는 생명의 본원적 현상임을. 육체에 대한 비난과 경멸과 가혹한 징벌은 그래서 부당함을.
이쯤에서 알렉시에게 묻고 싶어질 것이다. 차라리 독신으로 살 것이지 모니크와 결혼하여 어찌하여 그녀에게 부당한 슬픔과 불행을 안겨준 것인지? 이것은 우문에 가깝다. 절박함에서 몸부림치는 그에게 모니크의 존재는 마지막 구원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결혼을 통해서 그는 자신이 범죄 행위라고 일컬었던 일탈에서 평범한 정상의 삶으로 복귀할 한 가닥 기대를 품었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따뜻한 그녀의 체온을 통해 인간적 위안을 얻고 싶었던 것인지도.
알렉시의 토로처럼 천성을 바꾸지 않는 한 그의 평온은 위태롭기 그지없다. 오랫동안 멀리했던 피아노의 건반을 불현 듯 건드리는 순간 모든 거짓의 성이 무너진다. 그는 깨닫는다, 절대적인 도덕적 견지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음을. 그의 행위가 다수의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점, 그것만이 명확할 뿐이다.
내 유일한 잘못은 모든 사람보다 가장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점이라고 자부하기에 이르렀소......결국 나는 어쩌면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나 자신을 괴롭혀왔던 셈이오. (P.122)
그는 고백을 통해 자신의 성적 취향이 남과 다르게 된 사실이 불가피했음을 정당화시킨다. 자신은 능동적 선택으로 동성애를 선호하게 된 것이 아니다. 자신의 타고난 천성과 자라온 환경이 자신을 그런 방향으로 이끌었다라고. 그는 커밍아웃과 떠남이라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주변에 둘러친 거짓의 울타리를 과감히 허물고자 한다. 작가의 말처럼 철저한 성적 자유를 찾아 떠나려고 한다. 알렉시의 말처럼 앞날은 여전히 행복스럽지 않겠지만 최소한 가식과 허위로부터 벗어난 자유와 평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삶이 나를 이런 사람으로 만든 것이오,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나 이제 체념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본능의 포로로 만든 것이오. 그리고 이 순응이 내게 행복은 아닐지라도 마음의 평온을 가져다주리라. (P.135)
이 작품에서 알렉시의 삶과 고뇌의 여정을 되새겨본다. 동성애라는 성적 취향의 사안을 배제시켜 놓고 보면 그의 고백과 갈등은 보다 보편화될 수 있다. 그것은 올바른 삶, 진정한 사랑, 진실과 자유와 행복에 대한 자기 성찰의 아포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십대 중반의 젊은 여성에게서 묵직하면서도 잿빛으로 그슬린 듯한 인생론을 발견할 수 있는 점이 이색적이기에 오히려 인상 깊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