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시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구판) 1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지음, 남수인 옮김 / 열림원 /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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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면에서 이채로운 소설이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남성 동성애를 작품의 제재로 선택하였다. 다음으로 이십대 중반의 여성 작가가 동년배 남성의 심리를 예리하게 포착하였다. 더욱이 인생의 깊은 의미를 통찰하고 있어 새삼 작가의 나이를 잊게 만든다.

 

이 중편소설은 남성 주인공 알렉시가 아내 모니크에 보내는 장문의 서신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자신이 아내 곁을 떠나야 하고 떠날 수밖에 없음을 어릴 적부터 거슬러 올라가 차분하고 담담하게 독백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차분하고 담담히!

 

민감한 제재를 다루고 있지만 말초적 관능을 자극하거나 거부감을 일으킬만한 묘사나 표현은 일체 배제하고 있다.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동성애 묘사가 아니라 한 평범한 남성이 동성애에 이끌리게 된 과정이며, 끊임없이 죄의식에 시달리다가 스스로의 길을 선택하는 내면 묘사에 있다. 따라서 작가가 언급하고 있듯이 이 소설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화자의 목소리다. 그 깊고 내성적인 울림은 독자의 심중을 파고들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1인칭으로 쓰여진 이야기가 다 그러하듯, <알렉시>는 목소리의 초상이다. 이 목소리에다 고유의 음역을, 고유의 음색을 남겨놓는 것이 필요했다. (P.11)

 

예나 지금이나 동성애는 민감한 이슈다. 물론 과거보다 많이 개방되어 일부 유럽과 미국에서는 동성애자 간 결혼까지도 법적으로 인정하는 지역도 있다. 국내에서도 일부 연예인들이 커밍아웃을 선언하고, 소수인권 보호 차원에서 권리를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적 인정과 보호는 요원해 보인다.

 

개인적으로 동성애에 부정적이다. 인간은 단성생식이 아닌 양성생식을 하는 생명체이며, 자웅동체가 아니므로 이성 간의 결합에 매력을 느끼고 추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본성이라고 믿는다. 동성애의 존재 자체를 외면할 생각은 없다. 자연에는 다양한 현상들이 공존하므로 소수의 예외적 현상도 언제나 존속해 왔다. 동성애 사안이 현대에 와서 갑자기 발생한 게 아님을 누구나 알고 있다. 묵인은 하지만 공인하지는 않는 게 여태껏 인류의 대응 방침이며 향후에도 유효할 것으로 믿는다.

 

어떻게 한 학술 용어가 한 인생을 설명하겠소. 용어란 하나의 실상도 설명해내지 못하고, 단지 지칭할 뿐이오. 한 사람의 인생에서도 그렇지만, 각기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서는 똑같은 두 가지 일이 없는데 말이오. (P.35)

 

현상으로서 동성애는 쉽게 발언할 수 있지만 개별적 체험으로서의 동성애는 어렵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으리라. 남성이 여성에게, 여성이 남성에게 매혹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드러내고 싶은 반면 남성이 남성에게, 여성이 여성에게 이끌리면 감추고 최대한 공개되지 않도록 전전긍긍한다. 그 사이 당사자에 닥치는 인간적 고통은 섣불리 예단할 수 없다.

 

우리의 영혼, 우리의 정신, 우리의 육체는 자주 상호 상반되는 요구를 가졌고,......나는 내 행위들을, 내 소극성만으로도 충분한 원인이 되는데, 형이상학적 설명으로 미화시키고 싶지는 않소. (P.76)

 

아내에게 자신의 은밀한 욕망의 내력을 토로하는 심경은 곤혹스럽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부끄러움, 혹시라도 충격과 혐오를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공인받지 못하는 불순한 욕망에 대해 나름대로 해명하고자 하는 의도, 이것이 구차한 자기변명으로 비쳐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등등. 그래서 화자는 직접적으로 털어놓지 못하고 아주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서 자신의 반생을 회고한다. 그럼으로써 인간적 연민을 불러일으키면서 화자 말대로 시간을 벌려고 한다.

 

내가 체험했었던 것은 사랑과는 무관했소. 열정도 아니었소......나는 그 실수를, 이를테면 나 자신과 분리시켜서, 하나의 우발적인 일로만 간주했던 것이오. (P.62)

 

알렉시의 욕망과 행위를 사랑으로 간주할 수는 없으리라. 그는 동성의 파트너에게 애정을 느끼지 않았다. 때때로 발현하여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 때 일시적 성욕의 충족이면 충분하였다. 그는 순수한 동성애적 사랑을 갈구한 게 아니라 육체적 동성애 욕망을 갈구하였을 뿐이다. 아내를 포함한 여성에게도, 그리고 남성에게도 지속적 사랑의 교감을 느끼지 못하므로 그는 외로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그는 말한다. 아내와 결혼 당시 자신 없이 행복했다고, 곧이어 행복하지 않았다고.

 

그는 욕망을 끊을 수 없는 육체를 혐오하고 지긋지긋해 하지만 떨구어 낼 수 없다. 죄의식에 고뇌하던 그는 철저한 금욕을 통해 죄의 감행을 억제하려고 한다. 순결한 정신의 지배를 거부하고 제멋대로 돌출하는 육체를 징벌한다. 그는 차분함과 평온함을 겪으며 자신이 성공했다고 믿기도 한다. 우리는 안다. 육체의 욕망은 생명의 자발적인 분출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반영하고 있을 뿐임을. 생식의 본능의 지시에 따르는 현상은 이성에 선행하는 생명의 본원적 현상임을. 육체에 대한 비난과 경멸과 가혹한 징벌은 그래서 부당함을.

 

이쯤에서 알렉시에게 묻고 싶어질 것이다. 차라리 독신으로 살 것이지 모니크와 결혼하여 어찌하여 그녀에게 부당한 슬픔과 불행을 안겨준 것인지? 이것은 우문에 가깝다. 절박함에서 몸부림치는 그에게 모니크의 존재는 마지막 구원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결혼을 통해서 그는 자신이 범죄 행위라고 일컬었던 일탈에서 평범한 정상의 삶으로 복귀할 한 가닥 기대를 품었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따뜻한 그녀의 체온을 통해 인간적 위안을 얻고 싶었던 것인지도.

 

알렉시의 토로처럼 천성을 바꾸지 않는 한 그의 평온은 위태롭기 그지없다. 오랫동안 멀리했던 피아노의 건반을 불현 듯 건드리는 순간 모든 거짓의 성이 무너진다. 그는 깨닫는다, 절대적인 도덕적 견지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음을. 그의 행위가 다수의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점, 그것만이 명확할 뿐이다.

 

내 유일한 잘못은 모든 사람보다 가장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점이라고 자부하기에 이르렀소......결국 나는 어쩌면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나 자신을 괴롭혀왔던 셈이오. (P.122)

 

그는 고백을 통해 자신의 성적 취향이 남과 다르게 된 사실이 불가피했음을 정당화시킨다. 자신은 능동적 선택으로 동성애를 선호하게 된 것이 아니다. 자신의 타고난 천성과 자라온 환경이 자신을 그런 방향으로 이끌었다라고. 그는 커밍아웃과 떠남이라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주변에 둘러친 거짓의 울타리를 과감히 허물고자 한다. 작가의 말처럼 철저한 성적 자유를 찾아 떠나려고 한다. 알렉시의 말처럼 앞날은 여전히 행복스럽지 않겠지만 최소한 가식과 허위로부터 벗어난 자유와 평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삶이 나를 이런 사람으로 만든 것이오,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나 이제 체념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본능의 포로로 만든 것이오. 그리고 이 순응이 내게 행복은 아닐지라도 마음의 평온을 가져다주리라. (P.135)

 

이 작품에서 알렉시의 삶과 고뇌의 여정을 되새겨본다. 동성애라는 성적 취향의 사안을 배제시켜 놓고 보면 그의 고백과 갈등은 보다 보편화될 수 있다. 그것은 올바른 삶, 진정한 사랑, 진실과 자유와 행복에 대한 자기 성찰의 아포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십대 중반의 젊은 여성에게서 묵직하면서도 잿빛으로 그슬린 듯한 인생론을 발견할 수 있는 점이 이색적이기에 오히려 인상 깊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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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사냥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2
J.M.바스콘셀로스 지음, 박원복 옮김, 김효진 그림 / 동녘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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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르뚜가의 죽음 앞에서 오열하던 나이어린 제제의 영상이 도저히 잊히지 않는데, 어느덧 제제는 열두 살의 소년이 되었다. 중산층의 의사 가족에게 입양되어 더 이상 가난에 고통 받지도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제제는 여전히 행복하지 않다. 전작의 기본 구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밍기뉴와 뽀르뚜가는 꾸루루 두꺼비 아담과 모리스 아저씨로 대치되었으며, 언제나 너그럽게 제제를 포용하는 파이올리 수사도 있다.

 

제제가 맞닥뜨린 현실은 과거와는 또 다른 것이다. 낯선 가정, 학교, 도시, 세상은 냉혹하며 자비를 보이지 않는다. 혼자서 감당하기엔 너무 벅차다고 생각되었던지 아담과 모리스 아저씨가 제제의 우군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제제가 열다섯 살이 되어 홀로서기가 가능할 때까지 그를 지켜주고 돌봐준다. 이 점에서 제제는 행복한 인물이다. 세상의 많은 아이들이 고통과 역경에 힘들어 할 때 그들을 위로하고 힘을 보태 줄 누군가를 찾는 것은 대개 요원하다. 제제는 학교에서도 파이올리 수사를 비롯한 그에게 동정적인 수사들이 여럿 있지 않은가.

 

제제는 딱한 아이라고 할 수 있다. 남달리 예민한 감수성과 뛰어난 지능, 분방한 상상력을 타고난 그는 환경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는 가족 중에서 자신을 이해하여 줄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의 어릴 적 심한 장난이 뽀르뚜가를 만나면서 줄어들기 시작하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특히 아빠의 부재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내내 지속적으로 그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는 전작의 말미에서 자신의 생부를 부인하였다. 이 작품에서도 그가 아빠와 화해하고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소위 그가 철들고 난 시기 이후이다. 그동안 제제는 뽀르뚜가에게서, 그리고 모리스 아저씨와 파이올리 수사에게서 아버지상의 대역을 구하고 있다. 제제가 바라는 아버지상은 별게 아니다. 너무나 소박하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반적인 아빠의 모습, 자신에게 진실한 감정과 애정을 품고 쓰다듬어 주는 그런 존재. 현실의 아빠들은 그렇지 못한 반면, 그들은 제제를 몽쁘띠니 슈쉬 같은 애칭으로 부르고 있어 대조적이다.

 

아빠란 이런 분이야. 내 몸이 안정을 되찾았다고 느낄 때까지 내가 잠든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 (P.182)

 

아빠라는 거 바로 그런 거야. 일을 많이 해서 피곤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내가 하루를 어떻게 보냈나 알아보고 잘 자라고 말씀하시는 거. 그게 바로 아빠야. (P.204)

 

이 작품에 이르러 작가는 성장소설의 성격을 분명히 한다. 아담과 모리스는 자신들의 역할과 체재 기간을 사전에 밝히고 있다. 아담은 제제가 더 이상 슬퍼하지 않도록 외롭지 않도록 그를 돕고 보호해 줄 것이며, 제제가 씩씩하고 용감하게 자라나면 떠날 것이다. 모리스 아저씨는 제제의 온갖 사건과 푸념들을 지겨워하지 않고 따뜻한 눈과 귀로 들어줄 것이며 토닥여 줄 것이다. 제제가 혼자서도 처신을 할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사랑을 알게 될 때까지.

 

제제의 말과 행동에 무조건적 공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전작의 여섯 살 꼬마 제제와의 차이다. 제제의 악동 본능은 뽀르뚜가 이후 잠시 주춤했다가 여기서 다시 활짝 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자신 속에 악마가 들어있다고 스스로 말하였듯이 그의 장난과 돌출 행동은 강화된 측면이 다분하다. 심한 장난에 따른 처벌에서는 스스로 피해자이고 약자인 듯 행동한다. 그래서 우리는 소년 제제가 꼬마 제제와 동일한 행동과 불평을 반복하는 장면에서 오히려 의아함을 느낀다. 제제는 수년의 시간 동안 전혀 변하지 않았던 것인가 하고.

 

, ......차라리 죽고 싶어요. 차라리 화학 실험실의 진열장 유리를 부수고 그 안에 있는 독약을 먹고 죽고 싶어요. 그러면 어느 누구도 저를 더는 괴롭히지 못하겠죠. (P.92)

 

다시 태어나면 단추가 되고 싶어요. 아무 단추나요. 팬티의 단추라도 상관없어요. 인간이 되어 이렇게 고통받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을 거예요...... (P.267)

    

제제의 일탈이 상당 부분 성장기의 불안과 온건한 가족 역할 모델의 부재로 인하다고 볼 수도 있다. 애정 부족과 정서 불만이 과잉 행동으로 표출된다고. 그렇더라도 전작의 어린 제제에 비해 공감도는 훨씬 감소한다. 제제는 외적 요인에 책임을 돌리지만 결국 핵심은 제제 자신이다. 제제의 어린 가슴에 남겨진 어릴 적 트라우마가 계속 작용을 하여 마누엘 마샤두 숲의 낯선 소리를 불러내는 것이다. 아담과 모리스 아저씨의 존재는 제제의 순수한 마음이 자기 방어를 위해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해석 가능하다.

 

모든 사람의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태양 말이야. 우리들의 희망의 태양. 우리의 꿈을 뜨겁게 달구기 위해 우리가 가슴속에서 달구고 있는 태양 말이야. (P.102)

 

그들은 외롭고 심약하며 비뚤어지기 쉬운 어린 소년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태양을 뜨겁게 달구고자 출현한 것이다. 지금 제제의 태양은 아담이 말했듯이 눈물로 가려진 태양, 조금 피곤하고 나약한 타약한 태양이다. 삶의 아름다움을 깨달아야 태양도 뜨거워질 텐데.

 

아이들은 어른에 대한 환상을 지닌다. 훨씬 키가 크고 힘도 세며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 그네들의 눈에 세상은 불공평하다. 어른들은 원하는 물건을 자유로이 살 수도 있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안 해도 되는데 왜 자신들만 억지로 해야 하고 좋아하는 것은 항상 제지를 당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어른이 되면 무한한 낙원이 펼쳐질 것으로 기대한다.

 

어른. 그 말은 나에게 무척 멋있는 말이었다. 아담에게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P.168)

 

제제 또한 그러하다. 그전에 그는 오로지 자신의 관점에서만 세상사를, 양부모의 행동을 재단하고 불평하였다. 이 점을 앙브로지우 수사는 격동하는 심정으로 제제에게 일깨운다. 그가 양부를 이해하고 좋아하기 시작하게 된 것은 수년이 경과하여 보다 성숙해 진 후였다.

 

그분들은 아주 좋은 분들이에요. 너무 좋으세요. (P.396)

 

제제의 양부모가 나름대로 주의하고 신경 쓰며 양육에 노력하였고 그들에게 큰 잘못이 없음을 독자는 부인하지 못한다. 제제의 하소연은 과장된 측면도 없지 않다. 작가는 오히려 변화해야 할 것은 제제의 내면임을 에둘러 말하는 건지도 모른다. 의지가 굳고 두려움이 없는 소년으로 성장해야 함을. 인생이란 알고 보면 그럭저럭 살만 하며, 사랑을 알게 돼야 인생의 가장 아름다움을 느끼게 될 것임을. 그것은 스스로의 노력과 시간의 경과가 결부되어야 함을. 그때가 되면 아담과 모리스 아저씨의 환상 기제는 더 이상 효과가 없게 된다는 것도.

 

모리스! 모리스! 당신 말이 옳았어요. 사랑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예요. (P.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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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센 Takeout Classic 12
알도 켈 지음, 김수연 옮김 / 생각의나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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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릭 입센의 희곡 작품들을 쭉 읽는 도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개별 작품을 통해 이해한 입센이 단편적이고 단선적인 인식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몰이해 또는 오해의 결과일지 모른다. 입센의 삶과 작품세계를 전반적으로 조망한 책을 읽고 싶었다. 김미혜가 쓴 책도 있지만 분량 면에서 부담감을 주어 비교적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입센의 작품들은 인기작에 치중된 감은 있지만 어쨌든 다양한 작품들이 국내에 소개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초기작과 말기작이 소개되지 못한 점은 유감스럽기 그지없다. 이 책에서 이들 작품에 대한 개략적 이해를 구할 수 있었던 점도 유익하다.

 

입센 희곡의 혁명적 성격은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별달리 새로울 것이 없게 다가온다. 그것이 그가 작품 활동을 한 시기와 지금과 백년 이상의 시차가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그 사이에 세계 사회와 문화가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우리의 시각을 백여 년 전 노르웨이로 돌렸을 때 입센이 그의 사회극들을 쓰기 시작할 당대의 사회를 조감할 수 있도록 이 책은 정치, 사회적 배경에 대한 소개를 소상히 알려준다. 당시 노르웨이는 완전한 독립국가가 아니고 형식적으로 국가이지만 스웨덴 국왕의 지배를 받고 실질적으로 스웨덴의 자치령 정도에 불과한 수준이었다는 점. 수도인 오슬로, 당시의 명칭인 크리스티아니아를 제외하면 국민 대다수가 개발이 덜 된 시골지역에 살고 있었던 후진국 정도로 인식되었다는 점. 여성의 법적, 사회적 지위는 매우 낮아서 <인형의 집>이나 <유령> 등에서 알 수 있는 대로 기혼녀는 독자적인 법적 권리를 부여받지 못했다는 점 등을 이 책은 독자에게 알려준다.

 

1863년 법적으로 미혼의 여성은 성인임이 인정되었지만 기혼 여성들은 그 후 25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P.87)

 

저자는 입센과 동시대의 문단과의 관계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 입센의 필생의 라이벌인 비에른손, 그와의 우정과 갈등. 그의 작품에 혹평을 퍼붓는 비평계에 대한 입센의 분개, 작가지원금의 거절로 상심한 입센이 가뭄에 콩 나듯 한 외에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조국에 정주하지 못한 점. 입센에 대한 브란데스, 가르보르 등의 평가와 함순의 입센 비난 등의 사실.

 

저자는 입센 희곡의 해독에 있어서도 의외의 관점을 보여주는데, 때로는 야멸찰 정도로 가차 없어 문득 저자의 이념적 좌표가 궁금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특히 <민중의 적>에서 스톡만 박사를 자아도취에 빠진 순진한 정의감의 소시민으로 기술한 점에서 그렇다.

 

이 절제되지 않은 진실의 전달자의 말을 통해 입센은 처음으로 사회비판적인 문학의 현저한 가치로서의 진실을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렸다. (P.138)

 

입센의 작품이 가족, 특히 부부 간의 관계 설정에 치중하다 보니 흔히 간과되기 쉬웠던 아이들에 주의를 환기한 점도 신선하다. 입센의 작품에서 어린아이들은 미래가 없다고 단언한다. 맞는 말이다. 되돌아보면 그의 희곡에서 아이들이 버림받거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문득 평생토록 외면 받았던 그의 첫아이가 떠오른다. 독자는 작품에만 만족하지 못하고 작가의 개인사마저도 궁금해 한다. 입센의 성격이 소극적이 내성적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청년 입센의 불장난과 아이의 불행한 운명에 동정을 품는다. 노년기의 입센이 젊은 여성들과 벌인 스캔들에 가까운 잇따른 교제들. 작가 입센이 아닌 인간 입센에 대한 실망과 아울러 인간적인 연민이라는 이중적 감정에 휩싸인다.

 

작가들은 더 이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지 않았고, 대신 진실을 목적으로 삼았다. 입센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진실이 아름다움 그 자체라고 믿었다.” (P.32)

 

진실 없이는 관계의 변화가 없고, 진실 없이는 자유도 없는 것이다. 진실이냐 거짓이냐, 이것은 사회와 가족들에게 던지는 물음이었다. (P.76)

 

입센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스스로 언급했듯이 진실의 추구에 있다. 보편적인 것아 아닌 작가의 눈으로 거쳐 여과된 진실, 따라서 상대적, 주관적 진실이다. 그가 보기에 개인의 표현과 의사의 자유를 억압하고 방해하는 제도, 체제, 문화, 관습 등은 타파해야 할 대상이다. 스스로 사회정의를 추구한다고 표명한 정치인과 언론이 이해관계에 따라 표리부동 하는 광경을 목도하고는 그들의 부조리함을 지적하여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견해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는다. 진실 구현을 절대시하는 게 과연 바람직하고 옳은 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민중의 적>에서 불의한 다수와 일체 타협하지 않는 스톡만 박사와 달리 <들오리>의 그레거스는 거짓의 힘으로 그나마 근근이 버티던 한 가족을 파멸로 몰고 갔다. <로스메르 저택>의 로스메르와 레베카를 에워싼 진실은 그들을 죽음으로 이끌 따름이었다. <건축사 솔네스>는 어떠한가? 여기서 진실은 은폐된다. 솔네스와 아내, 솔네스와 힐데 간의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입센 문학의 장점은 사회 저변에 암암리에 공유되던 문제의식을 표면으로 끌어올려서 무대 위에 돌출시켜 세상을 향해 외치는 강인한 힘에 있다. 극적 결말을 위해 잘 짜여진 구성으로 긴장감과 호기심을 극대화시키고 예기치 못한 파격적 결말로 독자와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독자와 관객은 작가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반추하게 된다.

 

주제들은 이미 존재해 있던 것이었지만 입센 이전의 그 어느 누구도 그 주제가 일상적인 대화에 파고들 정도로 진지하고 선동적으로 다루지는 못했다. (P.34)

 

입센의 문학은 부단한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초기 역사극의 시대를 거쳐 본격적 성공작이라 할 <페르 귄트>에서 그가 착안한 것은 노르웨이의 민간 설화였다. 노르웨이인의 민족성을 비판하기 위한 작품임에도 오히려 노르웨이인의 특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상반된 평가를 받게 된 점이 이 작품의 특색이다. 페르 귄트는 온갖 결점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외면하기에는 너무 매력적이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진지하고 차분함이 존중되던 당대에 잃어버린 고대 바이킹의 정신을 되살려 오히려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인간성의 전형이 되었다. 거칠고 고대적인 자유로운 영혼의 페르 귄트의 정신은 <바다에서 온 부인>의 낯선 뱃사람을 통해 후대에 이어진다. 엘리다를 사로잡은 바다의 알 수 없는 힘은 무엇보다도 자유와 동경에 대한 소망이다.

 

중기 사회극에서 독자는 주인공의 대사와 행위에 주의를 집중하게 마련이다.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는 주인공에 반대하는 소위 나쁜 인물들의 존재는 필요한 범위 내에서만 인지된다. <민중의 적>에서 스톡만 박사의 형인 시장은 악인으로 불려야 될 인물인가? 그는 <사회의 지주>의 베르니크와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그들은 선과 악의 구별과 도덕률을 인식한다. (개인적 성공은 물론이고) 도시의 번영을 위해서 그들은 진실을 왜곡하고 은폐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도시와 주민의 이익이다. 제삼자의 시각이 아닌 당사자의 입장에서 불명확한 위험보다는 가시적인 이익을 우선시하는 그들의 선택과 행위가 결코 남의 일로 여겨질 수 없으리라. 이들에 비하면 입센은 표리부동한 좌파 언론인들과 기회주의적 자본가들에 대한 비판에 오히려 날을 세운다. 입센은 그들이야말로 민중의 적으로 간주하고 싶은 듯하다.

 

이 책은 <페르 귄트>부터 <존 가브리엘 보르크만>에 이르기까지 입센의 대표작 11편을 소개하고 분석한다. 부록으로 마지막 작품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를 소개하므로 그의 주요 작품은 대부분 거론하는 셈이다. 이 중에서 <사회의 지주><존 가브리엘 보르크만>,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는 국내 미번역 작품들이다. 저자는 단순한 작품 분석에 그치지 않는다. 입센의 삶과 연관시켜 각 작품들의 개인적, 시대적 배경을 충분히 고찰하며 발표 이후 무대 상연 기록과 평단의 반응까지도 꼼꼼히 챙기고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희곡 자체만으로는 알 수 없는 보다 종합적이고 전체적 관점에서 작품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건축사 솔네스><존 가브리엘 보르크만>에게서 느끼는 정서는 남다르다. 성공과 사랑을 맞바꾼 야심에 찬 남자들, 그 후 쇠락하거나 두려움에 떠는 연약하지만 강한 체하는 늙은 남자들. 그들에게서 입센의 자화상을 들여다볼뿐더러 우리 자신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스스로는 아직도 어깨에 힘을 주고 당당하게 세상에 맞설 수 있다고 외치지만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물결은 조만간 그들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 그런 연유로 독자는 높은 탑에서 떨어지는 솔네스를 비웃을 수 없다. 과거의 영광을 반추하며 실현하지 못한 성공에의 꿈에 충만하여 스러져가는 보르크만에 애달픈 공감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에서 루벡은 예술가의 허울을 벗고 잊었던 여인 이레네와 함께 사랑의 죽음을 향해 떠난다.

 

입센 작품세계의 보다 차원높은 이해를 위해서, 일독하면 꽤 도움이 될 책이다. 다만 내용이 초심자에게 그리 친절한 편이 아니므로 입센의 작품을 읽기 위한 가이드북으로서 보다는 그의 작품을 어느 정도 읽은 후 정리와 심화를 위한 목적으로 삼으면 더욱 유용하다는 소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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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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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소중한 존재를 우리는 평상시에 잘 인식하지 못한다. 물과 공기처럼 그것이 부족하고 사라지고 결핍될 때 비로소 가치를 깨닫게 되고 다급하게 갈구하지만 대개는 버스 떠난 뒤에 손 흔드는 격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일생이 화살처럼 덧없이 순식간에 지나쳐가면 만시지탄 하리라. 우리가 놓치는 생의 가치를 희귀한 조로증에 걸린 한 소년의 눈을 통해 새삼 재음미하는 기회를 작가는 제공한다. 남보다 몇 배는 빠르게 세상을 사는 그에게 시간은 더없이 소중하며 남은 생은 안타까울 뿐이다.

 

노화, 즉 늙어감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작중 아름이처럼 머리가 하얗게 세고 몸이 약해지며 눈이 흐릿해지고 손에 힘이 없어 숟가락을 떨어뜨리게 될 때의 삼경 말이다. 더구나 깨닫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진행되는 게 아니고 급속하게 겪을 때의 그것. 작가는 노화의 일련의 과정을 극도로 생생하게 독자에게 보여준다.

 

소재와 설정만 놓고 보면 앞을 못 가릴 정도로 눈물을 쏙 빼놓을 만한 이야기 전개가 예상된다. 사실 그런 대목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작가가 누구이던가. 어떤 순간에도 궁핍과 슬픔 속에 함몰되지 않고 미소와 기쁨을 능청스러움 속에 낚아 올리는 주특기를 보유하고 있는 작가.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P.79)

나는 건강에 무지한 건강, 청춘에 무지한 청춘이 부러웠다. (P.97)

 

보통, 평범, 일상은 흔히 무시되고 간과되기 쉽다. 희소성의 법칙이 가치를 정하듯 귀중하지만 흔한 것은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다. 기실 소중한 것은 평범함 속에 깃들어 있는데 말이다. 병자는 일반인의 건강이 절실하게 다가오지만, 청춘이 자신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인식하지 못한다.

 

전반부는 아름이가 술회하는 어린 엄마 아빠의 이야기다. 확실히 열일곱의 나이에 부모가 된다는 것은 이를뿐더러 드문 사례다. 부모보다 신체적으로 늙은 아이는 정신적으로도 더 성숙하다. 세 가족의 역경을 통해서 우리들은 역설적으로 생의 신비와 경이를 새삼 정면으로 바라보게 된다.

 

딸랑이 소리 하나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아이. 그걸 보고 웃는 부모. 그 미소 속에는 사람에 대한 경이와 겸손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본인들로 의식하지 못했지만 정말 그랬다. (P.63)

 

아이들은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한 환상을 품는다. 어른만 되면 하고 싶었지만 금지당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다. ‘진짜 어른이 되는 것, 그것은 글자 그대로 독립을 의미한다. 거친 세상에 홀로 서서 헤치고 버티어 나가기.

 

아버지는 인생이 뭔지 몰랐다. 하지만 어른이란 단어에서 어쩐지 지독한 냄새가 난다는 건 알았다. 그건 단순히 피로나 권력, 또는 타락의 냄새가 아니었다......아버지가 어른이란 말 속에서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 그것은 다름아닌 외로움의 냄새였다. (P.67)

 

그러면 나이듦의 미덕은 무엇일까? 타인을 보다 많이 이해해 줄 수 있다는 게 아닐지. 아름이가 엄마의 가출을 용서하고 이해하듯이.

 

병원비 마련을 위한 방송 촬영 장면. 아름이 병을 처음 알게 된 날의 심정을 묻는 작가에게 언뜻 쓸데없어 보이는 답변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아빠. 이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억누를 수 없다. 요새 눈물이 너무 헤퍼져서 큰일이다.

 

후반부는 아름과 서하의 사랑의 교감으로 이어진다. 육체 연령 팔십대의 희귀병자라고 사랑의 감정을 갖지 못하란 법은 없다. 그의 나이 불과 열일곱 아닌가. 그에게는 또래 이성과의 교제가 또 하나의 절실한 필요와 욕구일 수 있음을 인정하자. 사랑의 긍정적 효과는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점이다.

 

모든 것이 의미있고, 중요해지는 날들이었다. 그애가 하는 얘기, 그애가 쓰는 단어, 그애가 보낸 노래, 그애가 가른 여백, 그런 것이 전부 암시가 됐다. 나는 이 세계의 주석가가 되고, 번역가가 되고, 해석자가 되어 있었다......내 짐작이 맞았다.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탓에 이 세상도 덩달아 좋아져버렸다. (P.233)

 

아름과 서하의 이메일 스토리는 아름다우면서도 왠지 모를 불안감을 드리운다. 아름이가 말했듯이 하느님이 새삼 이제 와서 아름에게 관심을 쏟지는 않을 텐데 하는 직감, 언제나 그렇듯이 안 좋을 예감은 적중하는 법, 밝혀지는 진실.

 

우리는 아름의 슬픔과 실망과 허탈을 이해한다. 그가 큰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니었는데. 그저 세상을 떠나기 전 영원한 추억으로 남을 자그마한 기쁨을 누리고자 했을 뿐인데. 그의 자학적인 게임 탐닉을 착잡한 심정으로 공감한다.

 

내 안의 깊고 깊은 세계가 클리어된 동시에 문을 닫아버린 느낌. 모든 것이 해결되고 분명해졌는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기분. 신음은 그 어두운 동굴에서 길 잃은 바람처럼 터져나왔다. (P.284)

 

이 작품은 조로의 영혼이 찬미하는 인생의 청춘과, 계절의 청춘 이야기다. 스스로 아름다워,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인 줄 모르는 소년(P.335)과 그 시절. 언제 살고 싶어지느냐는 서하의 물음에 대한 아름의 답변처럼 삶의 진실한 의미와 가치는 일상의 평범함 속에 있음의 재발견. 아름에게 보통사람들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평범해서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사소한 순간들, 행위들(P.271~272)이 더할 나위 없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그리고 죽음과 새 생명이 교차하는 순간은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자연스러운 순리임을 덧붙여준다. 첫 장편 도전에 묵직한 소재와 주제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녹여낸 작가의 역량이 새삼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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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티치티 뱅뱅 - 하늘을 나는 자동차
이언 플레밍 지음, 존 버닝햄 그림, 김경미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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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릴 때 읽었던 책 중 세부적인 스토리는 기억 안 나지만 굉장히 흥미진진하여 제목이 유달리 각인되었던 동화책이 있었다. <치티치티 빵빵>이라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갑자기 그 책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하여 열심히 검색해 보니 이것이 바로 그 책이란다.

 

솔직히 놀랐다. 명성이 자자한 007시리즈의 원작자가 이 작품의 작가라는 사실. 그것도 노년에 썼으니 자신의 원숙한 작가 역량을 단번에 발휘한 셈이다. 작가의 이력을 반영하듯 이 작품에도 첩보 소설과 같은 특성이 다수 반영되어 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새삼 알아채게 된다. 특수기능이 장착된 차량, 범죄 집단, 주인공의 위기일발과 같은 흥미로운 극적 장치 말이다.

 

어른이 되면 한 가지 섭섭한 점은 어릴 적 읽었던 재밌는 동화책을 과거만큼 몰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순수성을 잃었고 작품의 내용에 끊임없는 비판과 감시의 눈초리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앞으로 쑥쑥 나아가기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현재의 위치를 확인하는데 주력한다. 그럼에도 편린이나마 그때의 느낌을 되새겨줄 수 있다면 더없이 고마운 일이다. 이 작품처럼.

 

이 동화의 주인공은 유감스럽지만 포트 가족이 아니다. 멋진 자동차, 치티치티 뱅뱅이야말로 단연 주인공이다. 생각해보라, 1960년대에 인공지능을 갖춘 자동차라. 도로에서는 달리고, 공중에서는 하늘을 날고, 바다에서는 물위를 쏜살같이 미끄러져 가는 차. 상황을 스스로 감지하여 자신의 판단에 따라 운전자에게 선택하라고 지시하며, 빨리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주저 없이 바보라고 내뱉는 그런 차다. 외관은 어떠한가? 앞뒤 똑같은 검정색 딱정벌레와는 수준을 달리하는 초록색의 멋진 레이싱카.

 

포트 중령은 작가 자신의 분신이며, 첩보원 같은 지식과 판단력을 겸비한다. 괴짜라는 점도 유사성이 있지 않을까? 제러미와 제미마 쌍둥이 남매의 용기와 재치도 빠뜨릴 수 없다. 무엇보다도 어리숙한 악당 몬스터 조 일행이다. 전설적인 은행 강도인 그네들이 꼬마들의 속임에 넘어가서 제대로 실력발휘도 못해보고 잡혀버리니 쌍둥이들을 잡아놓고 의기양양하게 온갖 젠체하던 장면이 오히려 우스워질 뿐이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에서 초콜릿을 빼놓을 수 없다. 몬스터 조와 포트 가족, 치티치티 뱅뱅이 조우하여 사건이 해결되는 장소가 파리의 유명한 초콜릿 가게라는 점에서 작가의 의도가 드러난다. 게다가 봉봉 씨가 쌍둥이에게 안겨주는 어마어마한 사탕과 초콜릿 상자는 거의 어린이들의 로망이 아니겠는가!

 

여기서는 스토리 라인의 지나치게 단선적 구조, 우연성의 절묘한 결합 등 시시콜콜한 흠을 굳이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작품에서는 언급하였지만 단지 작가의 사망으로 말미암아 멋진 자동차의 또 다른 모험이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이 오로지 아쉬울 뿐이다. 그리고 이 책이 절판이라는 점도 마찬가지로 섭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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