럼두들 등반기
W. E. 보우먼 지음, 김훈 옮김 / 마운틴북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정유정의 히말라야 여행기에서 언급되어 비로소 존재를 알게 되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대체 무슨 책이기에 산악인들에 사이에서 무림비급처럼 전해 내려온단 말인지. 아무래도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에 결국 책장을 펼쳐들고 말았다.

 

어릴 때 세계의 불가사의를 소개한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 중에 세계 최고봉이 에베레스트가 아니며, 중국에 있는 암네마친 산이 해발 9천 미터를 넘는데 다만 공인받지 못하였을 뿐이라는 기억이 난다. 이후 냉전 시대를 맞이하여 중국 측에서 일체의 접근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는 말을 덧붙이며... 이후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은 신비는 사라졌지만 우주에 닿을 듯 우뚝 솟아있는 장엄한 산봉에 대한 환상은 여전하다.

 

요기스탄에 있는 해발 12,000미터가 넘는 최고봉 럼두들 산을 등정하기 위한 팀이 꾸려진다. 팀원 소개와 럼두들 산을 등반하기 위한 준비 작업, 등정 과정과 우여곡절 끝에 임무를 성공리에 완수하고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이 등반대장인 바인더에 의해 기록되었고 그것이 이 책이다.

 

다소 간의 의아스러운 점을 제외하면 이 작품은 진지한 등반기에 가깝다. 물론 인물들 이름과 그들의 특이한 행동, 요기스탄의 풍물과 포터들에서 영어식 해학을 시도하고 있지만 요절복통할 지경까지는 아니고 약간은 어이없고 황당한 감을 이끌어낼 뿐이다. 작가는 인물마다 개성적인 유머 장치를 설정한다. 길잡이 정글은 항상 길을 잃고 헤매며, 촬영기사인 셧은 불운과 사고로 촬영필름을 모두 못쓰게 되었다. 벌리는 항상 피로증에 걸려 있다. 바다 피로증, 열 피로증, 골짜기 피로증 등등 가는 곳마다 족족 피로증에 걸린다. 의사인 프로운은 어떤가. 그는 항상 뭔가 병에 걸려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판이다. 과학자 위시의 모든 측정 수치는 숫자 153과 관련된다. 언어학자인 콘스턴트의 잘못된 발음으로 포터의 숫자가 삼천 명(그것도 엄청난 숫자인데!)이 무려 삼만 명의 군중이 되어 대기하는 장면은 압도적이다.

 

이야기의 축은 대원들과 대장 바인더의 속임 관계, 등반대와 요리사 퐁 간 갈등 관계로 이루어진다. 럼두들 등정은 퐁의 음식을 회피하려는 대원들의 처절한 진저리로 가속화된다. 바인더와 콘스턴트가 전진기지에서 제1캠프를 건너뛰고 단숨에 제2캠프를 설치할 고도에 다다른 것은 전적으로 퐁의 덕택이었다. 언제나 소화불량을 일으켜야 하는 이상한 음식을 감내해야 한다는 설정은 자못 비현실적임에도 그것이 1950년대임을 감안하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한편 들기도 한다.

 

한편 모두들 아는 사실을 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대장 바인더는 등반대의 축인 동시에 왕따라고 할 만하다. 대원들은 정상 등정에는 관심이 없다. 어떡하면 제 한 몸 온전히 돌아갈 수 있을 지에만 전전긍긍한다. 그래서 온갖 핑계를 다 대면서 잔류하려고 애쓰며 의학용도로 가져간 샴페인으로 흥겨운 시간을 보낸다. 대원들을 신뢰하면서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며 등반대의 목표 달성에 헌신하는 바인더, 그에 대한 대원들의 태도는 비웃음과 조롱에서 종내 자성과 존경으로 바뀐다. 바인더는 크레바스 속의 샴페인 사건과 제1캠프 발견 실패의 이유를 결코 알아내지 못하였음에도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바인더는 럼두들이 아닌 노스두들을 등정하였고, 엉뚱하게도 프로운이 포터에게 실려서 럼두들 정상에 올라선다. 누가 올랐던 어쨌든 성공이다.

 

산악인들이 이 소설을 애지중지한 연유는 일차적으로 희소성에서 기인하였으리라. 수많은 문학작품 중에서 산악, 특히 등반을 소재로 삼은 경우는 과문이지만 없는 듯하다. 자기네가 좋아하고 빠져있는 등산을 다루었으니만치 호기심과 친근감이 남다르지 않겠는가. 근엄하고 딱딱한 책이 아니라 가볍고 유쾌하며 해학적이고 흥미로우니 금상첨화다. 등반대가 들고 다니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에 딱 적합하다. 그리고 이 작품 의외로 진지하다. 산악인들이 높고 험준한 이역의 산을 등반할 때 갖게 되는 개인들의 심적 태도와 대원들 간의 역학 관계가 비교적 세밀한 등반 과정과 함께 단순한 허구가 아닌 실제 자신들의 체험과 같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고지식하고 우직한 바인더는 허황한 이야기로 새기 쉬운 소설에 적당한 무게와 진실을 부여하여 독자의 지지를 받는다. 그는 항상 대원들 간 신뢰와 단결을 강조하는데 등반 같은 단체행동에 있어 최고의 금언이라 할 만하다. 그는 대장으로서 모래알 같은 등반대를 결속시켜 팀으로 유지하는데 성공하였다. 팀원들의 개인사(그것이 꼭 약혼녀에 대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를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헌신과 공감과 이해의 자세.

 

나는 진실과 직면하고 기꺼이 받아들여야 했다. 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삶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경우 삶 그 자체가 내게 보답할 것이다. (P.206)

 

책표지도 그러하고 코믹산악소설이라고 타이틀에 앞에 붙여져 있어 상당한 기대를 했지만 사실 그럭저럭 볼 만할 정도였다. 인수봉이나 울산바위 리지에서 읽다가는 추락할 수도 있으리라는 주의 문구는 아무래도 과장되었다고 볼 밖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꼬마 백만장자 삐삐 시공주니어 문고 2단계 16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롤프 레티시 그림 / 시공주니어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발표된 지 반세기가 훌쩍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삐삐 시리즈가 우리들에게 여전히 친숙하고 인기를 끄는 이유가 궁금하다. 단지 과거에 TV시리즈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고 하면 본말이 전도된 해석이다. 이미 상당한 인기를 모은 작품이기에 TV시리즈물로 제작되었다고 보는 게 올바를 것이다.

 

어른 입장에서 삐삐는 불온한 아이다. 기존의 사회와 문화적 틀을 수용하길 거부하며 당돌하게도 어른들과 맞서 절대 지지 않는다. 역으로 보면 이런 점들이 또래의 아이들을 더욱 열광시키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후속 작에서도 삐삐의 그런 면이 여실하다.

 

삐삐는 부자다. 돈의 가치를 잘 알지 못하는 아이가 사탕과 장난감 등을 사는데 금화를 거침없이 내민다. 해당 장의 표제도 도전적이다. ‘근검 절약은 나빠’. 사치와 낭비를 죄악시하고 근검과 절약을 미덕으로 삼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언급할 것도 없고 대다수 서민들로서는 삐삐의 행동과 경제관념을 아이들이 모방할까 걱정될 뿐이다.

 

삐삐 역시 또래와 똑같은 아이다. 학교 소풍에 따라가서 아이들과 괴물 놀이를 하느라 온통 법석을 피우지만 즐겁기 이를 데 없다. 삐삐의 무한 매력은 가식 없는 순수함에 있다. 무거운 짐마차를 끄느라 허덕이는 지친 말에 인정사정 두지 않고 채찍을 휘두르는 사람을 향한 삐삐의 분노는 고귀하기조차 하다. 잘난 척하는 이른바 어른의 몰인정성, 잔인성과 무자비함과 아이들의 순수성이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토미와 아니카가 삐삐와 어울려 노는 데 흠뻑 빠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일탈의 즐거움에 있으리라. 부모를 포함한 가족과 사회는 아이들을 양육하고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그들에게 거의 무조건적인 금지와 일방적 지시를 퍼붓는다. 금지된 것일수록 더욱 재밌고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른들만이 아니다. 그런데 삐삐는 이를 과감하게 깨뜨린다. 아이들에게 삐삐는 대리만족이자 영웅이다.

 

작고 약한 아이들의 시각에서 보면 덩치 큰 무뢰한을 가뿐하게 들어 올리고 공기놀이를 하듯 던질 수 있는 삐삐는 선망의 대상이다. 공부를 제외하면 삐삐가 하지 못하는 일은 없다. 천하장사의 힘은 기본이고 백발백중의 사격 솜씨, 공중제비, 큰 뱀과 호랑이를 제압할 용기와 담력 등.

 

어릴 적에 무인도에 표류하여 나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싶은 소망을 품은 적이 있다.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마음대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천국의 섬. 실제라면 무섭겠지만 삐삐와 함께라면 안심하고 무인도 생활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와 15소년 못지않게.

 

아이들은 기쁘지만 어른들은 두렵다. 삐삐가 옳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인정하고 실행할 용기가 없음을 자각해서다. 책을 통해서나마 아이들이 자유롭고 행복하기를 바랄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크 청춘 3부작
김혜나 지음 / 민음사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작가의 전작과 여러모로 대비되면서 유사한 맥락을 지닌 작품이다. 표제 정크는 쓰레기라는 의미. 표준적 시각에서 볼 때 작가 김혜나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회의 쓰레기로 분류되어야 마땅하다. 쓰레기에 대응하는 손쉬운 방식은 우선 싹 쓸어버린 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묻거나 치워버린다. 시각적으로도 심미적으로도 깔끔하고 상쾌하다. 쓰레기의 존재를 일체 거부한다. 반면 작가의 생각은 다른 듯하다.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쓰레기의 발생은 불가피하다. 사람과 사회가 존속하는 한 쓰레기의 완전 배제는 불가능하므로 차라리 쓰레기를 인정하고 본질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엄마와 아버지 모두 나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는 생각이 확고해 보였다. 나에게는 늘, 무언가를 망쳐 버리는 힘이 있었다. 처음부터 나는 아무 필요도, 쓸모도 없이 인생을 망쳐 버리기만 하는 쓰레기 같은 새끼로 태어났으니까 말이다. (P.221)

 

전작의 이름 없는 지방야간대학의 여대생은 이제 성재라는 번듯한 이름의 젊은 남성으로 대치되었다. 전작에서 가족 관계의 부재는 여전하다. 성재의 어머니는 첩이고, 성재의 아버지는 성재를 글자그대로 결연하게 절대적으로 외면한다.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는 성재의 어머니와 성재는 단순한 동거인 이외에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그래도 성재는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적극적인 행동 면모를 보인다. 전작에서 음주와 피어싱, 그리고 섹스가 작품을 이끌어가는 동인이었다면 여기서는 물뽕과 화장술, 그리고 다른 유형의 섹스가 동일한 역할을 맡는다.

 

작가는 사회적 일탈 내지 성적 소수자의 현상에 관심을 지닌 듯하다. 전작에서 여주인공과 노래방 남성도우미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더니 여기서는 성재와 성재의 애인 민수 형이 작품 전체를 구성하는 골격을 형성한다. 그렇다, 남성 동성애 관계. 책을 읽다 보면 막연히 상상만 했던 그들의 구체적인 역할과 성행위, 관계망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 의도치 않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성재의 민수 형에 대한 감정과 바램은 대상이 동성이란 점을 제외하면 이성에 대한 감정 못지않게 진지하고 열렬하다. 일찍부터 이성보다는 동성에 사랑과 성욕을 느끼는 사람들. 그들을 비난하기는 쉬운 일이지만, 인류 역사에서 동성애의 역사가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염두에 두면 자연현상은 다수의 정상 가운데 소수의 비정상 현상을 언제나 병치시키고 있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이 소설은 동성애의 말초적 호기심 자극을 넘어서 인간 본질에 연관된 질문 제기다.

 

성재는 철저한 비주류다. 탄생의 비밀도, 가족 관계도 그러하며, 그가 좋아하고 하고 싶어 하는 일도 그러하다. 어디 그뿐이랴, 굳이 이성을 거부하고 동성에서만 욕정을 느낀다. 그가 세상에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는 자신의 표현 그대로 쓰레기 같은 존재다. 그가 이따금씩 약물을 흡입하는 이유 또한 친구 형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를 잊어야만, 겨우 존재할 수 있었다. 쓰레기 같은 인생길 위에서 쓰레기처럼 살아가고 있는 거나, 쓰레기 같은 길바닥을 애써 외면한 채 화려하고 번듯하게 살아가는 거나 다 마찬가지였다. 잘났거나 못났거나,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우리 모두가 다 쓰레기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P.112)

 

성재가 꿈꾸고 바라는 것은 언뜻 대단찮은 일이다. 독립을 할 수 있을만한 적당한 일자리를 구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자 하는 것. 젊은 남성에게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자리는커녕 길거리 화장품가게의 아르바이트 점원에 불과하다. 사랑하는 남자는 결혼한 사람이었다. 아이까지 두고 있다. 어디에도 그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질구질한 현상을 깨뜨리려는 시도는 헛된 실패만을 반복한다.

 

어디를 가도 다 마찬가지이고, 어디에 있어도, 무엇을 해도, 현실은 절대로 끊이지 않고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아무것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달라지는 것도, 나아지는 것도 없었다. (P.77)

 

문득 성재와 민수의 관계가 궁금하다. 성재의 감정만큼 민수도 절실하게 성재를 그리워하는 모습은 작중에서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헤어지자고 한 것도 다시 만나자고 한 것도 성재이다. 민수는 사회적 활동을 위해서 직업도, 가정도 정상적으로 유지한다. 성재가 없어도 별로 아쉬워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아니, 어쩌면 사회적 가면을 뒤집어써야 하므로 민수 자신도 성재 못지않게 고통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성재와는 달리 민수는 포기하기엔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성재와 민수의 차이점일 수도. 여기에서 두 사람의 감정은 조금씩 엇갈리게 된다.

 

구질구질하고 외롭고 두려운 현실로부터 떠나고 벗어나고 달아나고 싶었지만, 사랑과 구직의 뼈저린 실패를 겪은 성재는 현실로부터 안녕을 고할 수 있는 유일한 절대적 방법을 택한다. 죽음을 쉽게 결심한 사람은 없겠지만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 대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사는 것보다 어려운 게 죽는 일이다. 안 그렇다면 무수한 사람들이 손쉬운 길을 택하였을 것이므로. 죽음을 목전에서 경험하면 인생관이 뒤바뀐다고들 한다. 죽음 앞에서 하찮치않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민수 형은, 어디에 있던 사람일까. 내가 사랑하던 그는 오로지 내 안에만 존재했던 환상이었다......그래, 그랬구나. 이제 진짜, 이별하는 거구나. 내 사랑과,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 안의 당신과, 헤어지는 거구나. 눈물이 조금 흘렀지만, 아프고 괴롭기보다는 편하고 담담한 느낌이 들었다. (P.237)

 

작품의 마지막은 화장장이 배경이다. 성재는 사고로 죽은 아버지를 찾아간다.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않았고 소리 내지 않았던 말, 아빠, 아버지를 읊조리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작가는 상실한 부성과 성재 삶의 왜곡을 바로잡으려고 시도한다. 그의 가슴 깊숙이 드리워진 원초적 슬픔과 그리움은 아버지의 부재와 불인정으로 기인한다. 여기서 성재와 아버지를 화해시킨다. 건전한 작별, 그래야 성재의 앞날은 정크에서 벗어나 정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 토대가 구축되므로. 일말 아쉽기도 하다. 작가가 다소 서두르는 감이 들었다. 성재와 민수 형의 관계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와의 관계마저 조급하게 화해시키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되었다. 오래전 아버지의 몸속에 있었고 탄생에 빚을 졌다는 사실이 이십년 간 남남으로 살아왔던 그들 부자지간이 일거에 회복되지는 못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세계 고전 명작을 집중적으로 읽고 싶을 때 작가와 작품의 선택이 난감할 때가 많다. 손쉬운 방법으로 출판사별로 경쟁적으로 나오고 있는 세계문학전집을 무작정 읽어도 나쁘지 않다. 대개 열에 여섯, 일곱 정도는 검증된 작가와 작품 위주로 선정되고 나머지는 출판사별로 독자적인 기준으로 작품 선정을 하는 듯하다. 작가와 작품에 대해 일정 지식을 갖춘 상태라면 비판적 안목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반면 초심자의 경우 편향될 우려도 있다. 또 하나 가이드북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개인적으로 <평생 독서 계획><세계문학사 작은사전>을 참조하고 있다. 이런 책들의 장점이야 다 아는 사실이고 단점을 언급하자면 지침서, 실용서에 가까운 성격이라 그 자체의 재미는 별로 없다는 점이다.

 

문학가이드 성격을 지니면서도 자체로서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어 초심자의 길잡이 구실을 할 수 있는 책, 이것이 바로 이 책을 기획한 의도라고 하겠다. 이런 유형의 책은 한둘이 아니다. 그 점에서 지은이가 장영희 선생이라는 것은 큰 장점이다. 그의 글을 읽는 이를 자연스레 문장에 몰입하게 만든다. 기발하고 세련되며 아름답기 그지없는 어휘와 문체를 구사하지 않는다. 언제나 소박하고 겸손하며 마음씨 좋은 고모 또는 이모가 곁에 앉아서 조근조근한 어투로 구수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앉은 자리에서 한꺼번에 수십 쪽을 넘겨 읽어도 좋고 한두 장씩 천천히 읽어나가도 좋다.

 

언급된 작가와 작품들 중 상당수는 이미 읽어본 사례들이다. 예이츠, 위대한 개츠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돈키호테, 월든, 이방인 등등. 어렸을 때 청소년용으로만 읽거나 이름만 들어본 작품도 제법 있다. 주홍글씨, 세일즈맨의 죽음, 사일러스 마아너, 백경, 레미제라블, 음향과 분노,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 반면 이번에 처음 들어본 작가들도 존재한다. 영미시 시인들의 다수가 그러하며, 헨리 제임스, 손톤 와일더, 와인즈버그 오하이오 등이 그러하다.

 

아는 작가와 작품들을 장영희 선생이 자신의 개인적 일화와 감상 등을 섞어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솜씨에 빠져 새삼스레 반추해 보는 것도 재밌는 경험이다. 신문 칼럼용이라 분량,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는 만큼 심오하고 상세한 분석과 감상을 풀어놓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읽은 독자는 추억을 되살리고 안 읽은 독자에게는 소개된 작가와 작품을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깔끔하게 글을 맺고 있다.

 

에세이 류의 글이 지나치게 딱딱하면 안 되므로 글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아무래도 지은이의 개인사가 많이 언급되어 있다. 대학교수로서 수업 관련한 일화 등도 솔깃하며 쏠쏠한 즐거움을 안겨주지만, 무엇보다도 심금을 울리는 것은 지은이의 신체적 장애와 관련된 내용들이다. 지은이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하는 불편을 감내해야 하는 일상이다. 동정은 당연히 사양하겠지만 배려를 신경 쓰기는커녕 장애를 비웃고 손가락질하며 편견을 품고 박대하는 일화는 씁쓸함을 자아내며, 우리네들의 자화상이 여전히 아름답지 않음을 인식하게 한다.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하는 길들임은 서로 간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함을 가리킨다. 그것이 마음의 진실한 교류를 통해 가능하다고 할 때, 장애를 장애 그 자체로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덧붙임 없이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달라는 시인의 간절한 기원과도 상통한다. 브라우닝 부부의 러브스토리가 더없이 아름답고 가슴속을 저며 오는 연유이기도 하다. 모든 사랑이 브라우닝 부부와 같이 예쁜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한다. 에밀리 디킨슨은 사랑은 하나의 완전한 고통이며, 아픈 경험이라고 토로한다. 지은이는 문학의 주제를 이렇게 말한다.

 

문학의 주제를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어떻게 사랑하며 사는가에 귀착한다. 동서고금의 모든 작가들은 결국 이 한 가지 주제를 전하기 위해 글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66)

 

나중에 이 책에서 소개된 작품들을 읽을 때 지은이가 언급한 사랑과 삶의 시각에서 문학을 이해해보고 싶다.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내세울 것 없는 소시민 아버지의 고독과 슬픔을 이해하고 싶다. 사회와 가족의 냉대에서 갈 곳 없이 방황하는 어깨 움츠린 아버지들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리라. <위대한 개츠비>위대한은 여전히 불가해하여 다시 한 번 읽을 계획이지만 순수한 꿈과 희망이라는 설명에 이해의 단서를 찾는다. <안네의 일기>를 통해 지은이는 정의로운 전쟁은 없다고 단언한다. 명분과 이해관계를 위해서 일반론으로 접근하기 쉽지만 당사자가 본인 또는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목숨을 바치라고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내게 이름만 유명한 <황무지>가 쉬운 시가 아니라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라는 점이 오히려 호기심을 당긴다.

 

남보다 앞서고 뛰어나게 보여야 인정받고 대우받는 세상이다. 평범함은 죄악시되기 일쑤다. 우습다. 제아무리 그래봤자 인류의 대부분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보통 사람들인데 말이다. 우리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거짓된 삶을 사는 셈이다. 실버스타인의 동화는 너무 확연한 주제에도 잊혀버린 진실을 깨우치는 힘이 있다.

 

인간의 가장 크고 중요한 덕목이 사랑이라고 할진대 사랑할 줄 모르는 마음이 가장 큰 결함이다. 신체적 결함만 장애는 아니다. 사지육신 멀쩡한데 마음과 영혼의 고갱이가 빠져있는 것보다 더 큰 장애는 없다. 그래서 지은이는 의연하다.

 

까짓, 동전 구하는 거지로 오인되고 예쁜 잠옷을 안 입으면 어떠랴. 온 세상이 풍비박산 나는 듯 왁자지껄 시끄러운데, 나는 이 아름다운 봄날 가던 길 멈춰 서서 나뭇가지에 돋는 새순을 한 번 만져 보고 하늘 한 번 올려다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P.202)

 

마지막 장에서 지은이는 충격적인 고백을 한다. 수년 전 가볍게 완치된 줄 알았던 암이 척추암으로 전이되었음을. 입원과 수술을 위해 학교도 칼럼도 더 이상 지속해 나갈 수 없음을 알린다. 담담한 듯 서술하지만 그 심경이 얼마나 참담할지는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로 공감할 수 없으리라. 수십 년을 괴롭힌 신체적 장애가 이제는 또 다른 극한을 요구하는 있으니 하늘을 쳐다보고 방성통곡을 하지 않으면 이상할 지경이다. 여기서 지은이는 생명의 원초적 귀중함을 생각한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의 앞으로의 삶이 해피엔딩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지만 우리는 나중의 일을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아래의 글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모든 삶의 과정은 영원하지 않다. 견딜 수 없는 슬픔, 고통, 기쁨, 영광과 오욕의 순간도 어차피 지나가게 마련이다. 모든 것이 회생하는 봄에 새삼 생명을 생각해 본다. 생명이 있는 한 이 고달픈 질곡의 삶 속에도 희망은 있다. (P.2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 그해, 내게 머문 순간들의 크로키, 개정판
한강 지음 / 열림원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신진 작가 한강은 1998년에 아이오와 대학 주최의 국제창작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하여 수개월 간 미국에 머물렀다. 작가는 어떤 계기로 무슨 목적을 갖고 출국했는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뭔가에 쫓기듯 부랴부랴 떠난 듯한 인상으로 나는 작가가 창작과정에서 좌절을 겪었다든지 또는 창작욕의 고갈을 느꼈다든지 추측하였지만, 후의 내용으로 봐서는 섣부른 지레짐작이었다.

 

이 책은 사람과의 만남 글이다. 작가의 말 그대로 미국에서 마주친 사람들에 대한 스케치 혹은 크로키에 해당한다. 간결하고 소략한 글 속에서 전 세계 각국에서 온 작가들, 그네들의 일상 속에 감춰든 개성, 고통, 사랑, 삶 등이 작가의 시선과 마음을 통해 오롯이 드러난다. 소설을 쓰건, 시를 쓰건 작가이건 아니건 누구나 인간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애환을 한둘 지니고 있다.

 

인디언인 살리달에게서는 진행형인 인디언 차별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보통의 삶을 박탈당한 그녀는 자의반 타의반 스스로를 추방하여 유목의 삶을 선택한다. 그녀의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한 감정을 누가 섣불리 공감할 수 있겠는가.

 

작가가 아이오와에서 만났던 이들 중에서 마흐무드와 페이민이 유달리 언급됨을 알 수 있다. 아시아권이라는 지리적 공감대 탓일까. 팔레스타인의 유혈 역사와 불안한 정세, 미얀마의 군부독재 정권에 의해 투옥될지 모르는 불안 등이 작가는 물론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온다. 그럼에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마흐무드의 말처럼 그것이 인생이므로.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 때로는 말로 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것, 바로 그것들이 모두 인생이라는 듯이...... (P.74)

 

그럼에도 마흐무드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때로는 사랑 자체가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는 작가의 의견에 숙연히 부정한다.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이 고통스럽다며. 이별, 배신, 질투 같은 것들.

 

글쎄, 사랑을 둘러싼 것들도 사랑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본질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사랑이 순전한 기쁨과 행복만을 뜻하지는 않으리라. 왠지 모를 한숨, 슬픔, 가슴 아픔 등이 없다면 사랑은 일면적이고 획일적으로 치우쳤을 것이다. 사랑하기에 질투의 감정이 발생하며, 이별의 쓰라림을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재회의 순간을 기다리면서. 이 모든 게 바로 사랑이다.

 

페이민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고국으로 돌아가고자 결심한 동기 역시 같다. 자신의 뿌리이자 문화이고 언어가 있을 수 있는 자리가 그 땅이므로. 사랑이 있는 곳을 떠나서 그가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작가의 친구 미란의 결혼 스토리는 책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는데 일조한다.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오랜 연원을 지니기에 거의 본능에 가깝다. 마침 이 책 다음에 고 장영희 교수의 수필집을 읽고 있어서 그런지 새삼 반성하게 된다. 이런 편견에도 굴하지 않고 사랑을 쟁취해 나가는 그네들의 용기와 사랑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시간은 흘러가고 우리는 일상에 부대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릴 짬을 내지만 그저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낼 따름이다. 그저 남들처럼 물 흐르듯이 살아갈 뿐 대단한 존재도 아닌 나 따위가 끙끙대봤자 하며 방기하는 때도 있다. 그럼에도 무역회사에서 일하며 늦은 밤에만 글을 쓸 수 있는 하이도 포기하지 않는다. 제아무리 피곤해도 그 시간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 소중한 순간이므로. 글쓰기뿐만 아니라 삶도 마찬가지다, 파비앙의 성당 이야기처럼. 나처럼 미미한 존재의 그나마 미미한 행위의 무의미성에 대해서. 우리는 끝을 알 수 없다. 결과를 보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현재의 자신에 충실할 뿐이다.

 

우리들의 존재는 이 광활한 우주 속에서 하나의 먼지 같은 것이지만, 그 먼지 하나하나가 최선의 선의를 품고 존재하는 데에 그 미세한 에너지들의 힘이 있는 것 아닐까. 그렇게 해서, 그 보이지도 않을 만큼 조그만 개개의 존재들 속에 고요히 우주가 깃드는 것 아닐까. (P.36)

 

프로그램을 마친 후 참가자들은 저마다의 곳으로 돌아갔다. 이제 꿈에서 현실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비록 가끔씩 이메일을 주고받겠지만 그들은 모두 알고 있다. 서로 간에 앞으로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으리라는 사실을. 그걸 알면서도 그들은 아낌없이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작가의 마음은 영원히 한없이 풍요로울 것임을 우리는 안다. 그가 아이오와에서 얻은 것은 값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이었기에.

 

정말 귀중한 것은 값나가고 어려운 것들이 아니라, 숨쉬는 공기와도 같았던 것들, 가장 단순하고 값나가지 않는 것들, 평화, 우정, 따뜻함 같은 것들이었나 보았다. (P.226)

 

이 글의 진면모는 미국 체류를 전후하여 타국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삶과 내면, 일화 등을 통해 서른 즈음 작가에게 길게 드리워진 반향일 것이다. 어쩌면 작가의 청춘 시절과 (작가를 떠난) 수수한 일상에 대한 크로키라고 볼 수도 있다.

 

2003년에 초판으로 낸 책을 2009년에 개정판으로 새롭게 다듬었다. 장정, 지질, 편집이 내용과 어울려 정갈하면서도 예쁜 느낌을 자아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