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태양꽃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어른을 위한 동화 16
한강 동화, 김세현 그림 / 문학동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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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위한 동화의 유효성을 감히 평가하지 못한다. 정의상 모순되는 개념이지만 동화의 창작 목적을 감안하면 어른들도 간간이 동화 이야기를 읽으면 좋겠다. 재미와 아울러 생각지 못한 감성을 발견하는 때도 있다.

 

한강은 동화를 상대적으로 많이 쓰는 작가다. 그의 동화는 경쾌하고 유머 넘치는 입담을 구사하지 않는다. 밝고 화려한 분위기도 없다. 동화의 주인공은 한결같이 작고 움츠린 소위 별 볼일 없는 존재들이다. 사람이건 식물이건. 그들이 낮은 목소리로 가만가만 읊조리는 이야기는 가슴 한켠을 촉촉이 적신다.

 

이 작품에서도 담장 뒤 그늘에서 초라하게 자라는 꽃풀 한 줄기가 화자다. 음지에서 빛을 갈구하며 담장 너머 눈부신 세상을 동경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투명한 꽃잎. 소외감은 꽃잎의 아픔과 상처와 결부되어 화를 촉발한다. 그나마의 향기와 꿀마저 변질된다. 그는 그렇게 시나브로 시들어갈 운명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도 좋아.” (P.50)

 

틀림없이 그러했을 것이다, 얼굴모를 풀의 힘겨운 삶을 알지 못했더라면. 실패해도 실망하고 포기하지 않으며 희망의 씨앗을 간직한다. 성공하지 못해도 남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자신의 소박한 소망을 향해 쉼 없이 노력하는 마음자세. 불공평한 운명과 차가운 세상에 불평과 적대만 내비치지 않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대견해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

 

““넌 더 강해져야 해. 더 씩씩하게 견뎌야 해. 그리고 무엇보다,”

풀은 잠시 말을 멈추었습니다.

너 자신을 사랑해야 해.”” (P.60)

 

세상에서 가장 추하고 볼품없는 꽃이 마음을 추스르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향기와 꿀이 원래 이상으로 회복되었다. 어느덧 투명한 꽃잎은 일찍이 없었던 아름다운 꽃으로 거듭났다. “태양처럼 샛노랗고, 태양보다 눈부신 꽃”(P.102)으로.

 

잠자리 날개처럼, 해파리처럼 아니면 말미잘 촉수마냥 이상한 모양의 투명한 꽃잎은 타인이 인지와 인정을 받지 못할 정도로 미미한 존재를 가리킨다. 투명함은 비어있음을 말하므로 채워지지 않은 빈 영혼을 의미할 수도 있다. 꽃잎이 투명하게 시들거나 황금빛으로 빛나든지 그것은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한강이라는 작가의 산문에서는 운문의 향기가 풍긴다. 절제된 문체, 나직한 어조, 여운을 남기는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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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다센카
카렐 차페크 지음 / 나제통문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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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페크는 작가이면서 정원가이자 동물애호가였다. 순문학작품을 떠나서 이런 유형의 책자를 대하고 나면 자칫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작가의 인간적이며 일상적인 면모에 친근감을 갖게 된다.

 

다센카의 품종은 와이어 헤어드 폭스테리어다. 삽화와 사진을 보면 털이 약간 복슬복슬하지만 날렵한 자태로 영리하게 생겼다. 다센카의 탄생, 성장, 그리고 장난에 이르는 일련의 생장과정을 보면 누구라도 귀엽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가뜩이나 호감을 갖게 되는 다센카에게 더욱 미소를 짓게 만드는 것은 차페크의 유머러스한 문체라고 하겠다. 다센카의 짓궂은 모든 장난에도 그는 줄곧 따스한 시선을 보낸다. 다센카의 입양 보내기로 전반부는 마감된다.

 

후반부는 다센카를 위한 8개의 옛날이야기로 작가가 다센카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에너자이저 장난꾸러기인 강아지를 진정시키려는 작가의 노력이 가상하다. 그래야 사진 찍는데 움직이지 않고 잠시라도 멈춰있다고 하는데...

 

이야기 자체는 순전히 개의 자긍심을 돋워주는 내용이다. 다센카의 조상 포크시의 전설적 영웅담, 폭스테리어가 땅을 파헤치는 사유는 선조가 묻은 잘라진 꼬리를 찾기 위해서라는 것, 천국에 살던 폭스테리어의 가장 선조인 폭스가 천상에서 지상으로 쫓겨나게 된 이유 등. 폭스테리어와 다른 종의 개와 탄생 신화의 차이도.

 

인간이 무리를 지어 살기 시작한 것은 개를 따라했기 때문이라는 설명과 인간과 개의 친연성을 강조하는 대목에서는 우리 자신이 개들에게 떳떳한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함께 생활하는 인간이 개들의 동료인 셈으로, 개들은 인간을 몹시 사랑하고 따르지.” (P.98)

 

인간과 너는 피보다 더 끈끈하고 강한 것으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것은 바로 신뢰와 애정이다.” (P.101)

 

부록으로 실려 있는 강아지 사진찍기와 다센카의 앨범은 별미다. 오래된 흑백사진들이지만, 대작가에게서 애정을 듬뿍 받고 동화책의 주인공 자리마저 차지한 장난꾸러기의 당당한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작가의 덕택으로 다센카는 불후의 성명을 남기게 되었으니 이를 알면 저승에서도 기뻐하리라.

 

* 이 책은 오래전에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하기가 힘들었다. 이제 용산도서관에서 간신히 찾아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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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꽃 이야기 - 時設: 시적인 이야기
한강 지음, 우승우 그림 / 열림원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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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어머니가 부처를 믿으시기에 초파일에 몇 번 절집에 가본 적이 있다. 경내를 온통 둘러싼 연등 무리와 본전 내 천장에도 그득하게 널려 있는 무수한 연등. 한켠에서는 아기 부처를 목욕시킨다고 열심히 물을 끼얹는 사람들의 줄이 늘어서 있다. 나는 알지 못한다, 연등이 점화되었을 때의 휘황한 정경이 어떠한 감상과 소회를 가져오는지. 절집 방문은 낮 동안에 잠시 한정될 뿐이므로.

 

작가 한강이 불교 소재의 글을 쓰다니 약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문학상을 수상한 중편도 불교 소설이다. 이 작품은 불교적 소재를 다루었으되 본격 구도 소설은 아니다. 차라리 일종의 성장소설로 이해하고 싶다. 백여 쪽 남짓한 얄팍한 분량의 작품이지만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생의 빛과 그늘의 폭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어른이 되어 회상하는 빛나는 유년시절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진실로 생의 굴곡과 애락을 겪지 않고 기쁨의 집에 사는 특혜를 누린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고달픈 가계, 형제자매 간의 갈등과 다툼. 무엇보다도 가까운 존재와의 영원한 작별이 주는 심리적 외상.

 

이승에서의 삶이 천국과도 같은 기쁨과 즐거움만으로 가득 차 있다면 종교가 발붙일 여지는 없으리라. 종교는 인간이 스스로 견디거나 제어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서 발현한다. 인간은 누구든지 종교적 성향을 일정부분 지니게 된다. 자신을 무신론자 내지 무교주의자라고 지칭하는 이들조차도 마음속에 믿음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종교적 인간이 곧 종교인이 되지는 않는다. 세속과 풍진의 삶을 버리고 탈속과 피안을 추구하는 일은 심대한 결단이 필요하다. 속계의 인연을 끊는 일은 그만큼 지난하기에 우리는 승려와 사제를 존중하고 예우하는 게 아니겠는가.

 

시설(詩說)은 시적인 이야기다. 책표지에 따르면 시처럼 깊고 산뜻한 그림소설이란다. 일반적 소설의 절박한 다그침이 안보여 읽는데 편안하다. 선이의 생은 조용히 흘러간다. 흐르는 물결 속에 윤이의 죽음, 앞집 할머니와 어머니의 노쇠, 작은오빠의 투병, 그리고 자신의 입산이 스며든다. 큰오빠의 결혼과 임박한 출산도. 절집에서는 노스님의 입적과 다비식, 상행자의 환속과 자신의 수계가 이어진다. 선이를 불가로 이끈 것은 어릴 적 동생과의 일화였다. 흰 꽃과 붉은 꽃이 어우러진 연등. 동생 윤이가 가장 예쁘다고 가리킨 흰 꽃 영가등. 사미니가 인도하는 커다란 붉은 꽃에 홀린 선이. 이때 이미 생과 사의 인연 나뉨이 시작된 것이다. 그가 작은오빠의 물감으로 그린 붉은 꽃, 화선지에 붉은 물감으로 그린 꽃, 학교를 떠날 때 뜨거운 아랫배에서 붉게 젖은 속옷, 그리고 산문 입구의 자목련 나무.

 

인생이란 마주침과 헤어짐의 인연이 겹겹이 쌓여 이루어진다. 다가오는 인연을 꺼리거나 피하지 않고 담담히 감내할 때, 빚어지는 상처와 치유로 우리는 성숙해진다. 그리고는 불현 듯 알게 된다. 지등 속의 불꽃이야말로 붉은 꽃의 실체이며, “어두우나 밝으나 오롯이 거기 있었던, 늘 거기 있었던 마음 한 자리”(P.100)이라는 사실을.

 

불빛은 제가 불빛인 줄을 알았을까. 붉은 꽃 속에서 제가 밝혀져 있었던 것을 알았을까.”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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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상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어른을 위한 동화 18
한강 지음, 봄로야 그림 / 문학동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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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평균 수명이 남성보다 긴 현상을 설명하는 사유 중에 여성이 남성에 비해 눈물을 자주 흘린다는 의견이 있다.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충격을 눈물로 완화시켜 신체에 부담을 덜 준다는 것이다. 이 의견의 진위는 알 수 없으나 일견 그럴듯해 보인다. 학창시절에 배운 기억을 되살려보면 비극의 효과는 카타르시스에 있는데, 곧 슬픔의 표출을 통한 감정의 배출이다. 비극을 보면서 관객은 심적인 정화를 얻게 된다.

 

눈물을 흘리는 원인은 다양하다. 눈물은 감정의 모든 국면에 대응한다. 슬프거나 아플 때는 물론, 기쁘고 반가울 경우 화날 때도 사람은 눈물을 흘린다. 눈물 앞에서 무심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눈물의 양도 중요하다. 눈물이 메마른 사람은 남에게서 비난을 받기 마련이다. 비인간적이라고. 눈물이 헤픈 사람도 좋은 평판은 얻지 못한다. 울보라고. 눈물은 연약함에 결부되기 쉽다. 그럼에도 꼭 맞는 상황에서 적절하게 흘리는 눈물은 고래로 칭송을 받는다. 이슬, 진주 등 고귀한 존재로 형용된다. 동양에서는 옥루(玉淚)란 표현도 사용된다.

 

겉으로 드러나는 눈물만이 전부는 아니다. 속으로 흘리는 눈물이 더 뜨겁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거나 눈앞이 뿌옇게 되는 경험을 누구나 하게 되는데, 작가는 이를 그림자눈물이라고 일컫는다. 사람과 그림자가 함께 흘리는 눈물이 참다운 눈물이다. 그림자는 울지 않는데 사람이 흘리는 눈물은 거짓이며,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사람은 그림자눈물샘이 얼어붙어 있다. 작중의 할아버지는 눈물상자 아저씨와 눈물단지 아이의 덕택으로 잃어버린 눈물과 삶을 회복하였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눈물상자 아저씨는 여전히 울지 못하므로.

 

자기가 울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면서 흘리는...... 특별한 이유가 없지만, 또한 이 세상의 모든 이유들로 인해 흘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물이란다.” (P.17)

 

가장 순수한 눈물은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무색의 눈물이 아니라 희로애락과 존비와 청탁 등 모든 것이 혼융되어 정화된 투명한 눈물을 뜻한다. 눈물단지 아이의 눈물은 깨끗하지만 순수한 눈물은 아니다. 그는 자라고 인생을 겪어야 한다. 세상의 오탁에 물들 우려도 있으나 자신을 연마하고 단련할 수 있어야 한다. 눈물을 잘 흘리지 못할 우려도 있지만 헤픈 것은 모자란 것만 같지 못한 법. 눈물단지 아이가 울음을 참는 것도 이 점을 깨달았음이리라.

 

아이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눈물을 참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오는구나. 숨겨진 눈물을 그 가슴 가운데에서 점점 진해지고, 단단해지는구나.” (P.66)

 

어른을 위한 동화 시리즈. 관심 있는 작가에 좋아하는 장르니 망설일 필요가 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적당한 분량. 은근하면서도 차분한 정조가 무엇보다 가슴에 와 닿는다. 자신을 되돌아본다. 순수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려본 게 언제였던가, 흘린 적은 과연 있었는지. 남자는 일생에 세 번만 운다는 가정과 사회의 암묵적 억압이 여전히 수많은 남성을 옭아매고 있다. 눈물과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되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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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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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작부터 주요 장편을 세 권 읽었음에도 토로하자면 정유정은 내 취향에 썩 부합하는 작가는 아니다. 극단적인 설정과 처절한 전개는 스토리텔러로서의 작가의 역량을 십분 인정함에도 자연스러운 맛이 부족하다. 그래서일까. 최신작인 <28>을 굳이 펼쳐볼 마음이 들지 않는다. 출판사의 책소개를 보면 작가의 성향이 한층 심화된 듯싶다. 이 책을 서가에서 무심히 꺼내든 것은 항상 흥미를 잃지 않는 여행기라는 점과 더구나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이 기여한 바가 크다.

 

작가만의 미덕은 여기서도 여전하다. 술술 잘 읽히는 문장. 허세와 허식을 사양하는 솔직하며 털털한 문체. 예상치 못하게 불현 듯 끼어드는 해학 코드 등. 게다가 에세이라는 특성상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인공적 부자연스러움도 찾아볼 수 없다. 여행기를 읽는 주된 목적이 독자가 겪어보지 못한 낯선 풍토와 풍물에 대한 대리체험이라고 할 때, 이 책은 그야말로 제격이다. 독자 자신이 트레킹을 하는 듯할 정도로 실감나는 상황 묘사와 심리 기술이 일자별로 매우 친절하고 세세하다. 도대체 이 작가는 트레킹을 하러 히말라야에 간 건지 아니면 여행기를 쓰기 위해 트레킹이라는 활동에 도전한 건지 때로는 의아스러울 정도다.

 

누구나 길을 떠나면 철학자가 되고 시인이 된다는 떠도는 말이 있다. 그만큼 여행(관광이 아닌)은 자신을 내면과 회상에 연결시키는 좋은 기회가 된다. 일상에서 탈피한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다. 작가 또한 마찬가지다. 평생 해외라고는 나가본 적 없는 작가가 불현 듯 무모하게도 히말라야에 덤벼든 것도 쉴 새 없이 몰아붙였던 삶의 에너지가 순간 고갈되었음을 깨달아서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였다. 슬럼프와는 증세 자체가 달랐다. 암반에 갇힌 불길이 아니라 불씨까지 타버린 잿더미였다. 욕망이라는 엔진이 꺼져버린 것이었다.” (P.16)

 

작가가 안나푸르나에서 기대한 것은 대다수의 여행자들과 동일하다. 재충전. 또 다시 세상과 한판 치열한 싸움을 벌여볼 수 있도록 잃어버린 싸움꾼의 투지를 되살리는 것. 여정 도중 회상하는 그녀의 과거사는 자신이 투사가 될 수밖에 없음을 설명함과 동시에 작가가 아닌 인간 정유정의 진솔한 면모를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에세이를 통해 독자는 작가에게 인간미와 친근미를 갖게 된다. 더구나 여정 초반에 그녀가 내내 힘들어하는 음식과 용변 문제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흥미로운 소재가 아닌가.

 

이 책을 통해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유람 코스가 아님을 비로소 알게 된다. 그것은 절대 극한의 한계상황에 다다르는 자신을 요구한다. 가벼운 고산병을 넘어 피로와 악천후에 따른 죽음마저도 감내할 정도로. 국외자는 이렇게 말하리라. 그 길을 굳이 왜 가려고 하는가?

 

답할 수가 없었다. 그저 두려웠다. 어둠 속에 고꾸라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까 봐.” (P.172)

 

이 힘든 길을 왜 가고 있는지 스스로 물으면, 머릿속 목소리는 입 닥치라고 대꾸했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이며 가지 않으면 끝낼 길이 없다고.” (P.174)

 

사람은 자신의 본성을 쉽사리 변화시킬 수 없다. 정유정은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싸움꾼이다.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다. 왜냐면 그게 정유정임을 구성하는 본질적 속성이므로. 작가는 항상 가드를 올리고 주먹을 내뻗을 자세를 갖춘 채 링 위에 서 있다.

 

안나푸르나에 오면서, 링이 아닌 놀이터에 나를 부려놓으리라. 결심했다. 죽기 살기로 몰아붙이는 습성을 버리고 가겠노라, 마음먹었다......본래 목적은 잊어버린 채 안나푸르나를 상대로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P.133)

 

그래서 그녀는 환상종주를 마치고 포카라와 카트만두에서 보내는 휴식과 회복의 시간을 못 견뎌하는 것이다. 무위와 방기는 정유정에 어울리지 않는 용어다.

 

휴식이 주는 건 편안함이 아니라 불안이었다. 해괴한 죄책감이었다. 이렇게 놀아도 되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진짜 괜찮은 건가?” (P.286)

 

내가 견딜 수 없는 건, 따분함이 아니라 목적 없는 시간이었다.” (P.287)

 

그래서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수첩의 두서없는 메모를 끄적거리기 시작한 게 이 여행기로 이어졌다고 하니 인간적으로는 딱하지만 독자 입장으로서는 다행이라고 하겠다. 그나저나 작가는 히말라야에서 해답을 얻었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환상종주를 마친 후 다시 훌쩍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났다고 하니 말이다. 확실한 건 그녀도 여행의 묘미를 알아차렸다는 것, 그리고 자칫 역마살에 빠질지도 모르는 위험한 단계에 입문했다는 점이다.

 

안나푸르나의 대답은 결국 내 본성의 대답이었다. 죽을 때까지, 죽도록 덤벼들겠다는 다짐이었다. 결론적으로 떠나온 나와 돌아갈 나는 다르지 않았다.” (P.288)

 

작가답게 여러 작가와 작품들을 곳곳에 소개하거나 인용하고 있다. 특히 나의 신으로 일컫는 스티븐 킹과 소설가 조용호의 작품이 인상적이다. 끝대목에 언급된 <럼두들 등반기>도 한번 읽어보고 싶다. 무엇보다도 정유정의 환상방황을 가능케 하였던 후배 작가 김혜나의 글을. 정유정의 눈에 프리즘 되지 않은 온전히 스스로의 글을 통해서.

 

십여 년 전에 지인과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가보려던 꿈을 품은 적이 있다. 지금도 서가 한켠에는 네팔 가이드북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자리하고 있다.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꿈으로만 그치고 말았지만. 일상에 이리저리 치이는 범인으로서는 작가의 용기가 무진장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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