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의 집 열린책들 세계문학 118
헨릭 입센 지음, 김창화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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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은 민음사 번역본 후 다시 한 번 읽는다. <유령> 역시 이 책과 이후 동서문화사 번역본을 연달아 읽었다. 재독은 작품에 대한 친숙한 느낌과 동시에 생경한 대목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첫 읽기와 다른 이해, 첫 읽기에서 간과한 장면을 새삼 음미할 수 있다. 한편 완벽한 번역본은 없다는 씁쓸한 진실도 발견한다. <인형의 집>은 이미 단상을 남겼으므로 여기서는 <유령>만을 다룬다.

 

이 작품은 여러모로 전작과 대비된다. 전작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구성과 성격 면에서 한층 복잡하게 엮여있다. 이 작품을 통해 전작을 거슬러 살펴보면 여러 면에서 다소 나이브하였음을 알게 된다. 후반부의 주제를 향한 박진감 넘치는 돌진도 새삼스럽다.

 

<유령>의 주제의식은 다음 장면에서 노골적으로 제시된다.

 

우리 모두가 유령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들이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질뿐 아니라 모든 낡은 이론, 낡은 신념, 낡은 사물들이 우릴 따라다녀요. 살아 있는 건 아니지만, 떠나지 않고 우리 몸에 박혀 있지요......이 나라 전체에 유령들이 사는 것 같아요. 너무 많아서 바닷가의 모래처럼 깔려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모두는 불쌍하게도 빛을 싫어하죠.” (P.188)

 

유령오래된 관습내지 널리 퍼져 있는 하나의 생각”(P.233)을 지칭하는 용어다. 입센이 보기에 당대 노르웨이인들은 모두가 유령에 사로잡혀 있다. 자유롭고 눈부신 새로운 시대와 세상을 향해 힘차게 전진하는 것을 막는 고리타분하고 구태의연한 인습 같은 장애요인.

 

입센은 구시대와 신시대를 날씨를 통해 선명하게 대조하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체험하고 돌아온 오스왈드의 절망을 통해 형상화된다.

 

하루 종일 햇빛이라고는 안 줌도 없는데?” (P.201)

햇빛은 한 번도 볼 수 없어! 내 기억에 여기서 햇빛을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 (P.208)

 

유령은 햇빛을 싫어한다. 유령에 사로잡힌 이들은 삶의 기쁨과 행복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삶은 그저 감내해야만 할 의무일 따름이다. 만데르스 목사는 이러한 사고방식의 현현이다.

 

삶의 기쁨에 관해서 얘기했죠. 여긴 그 기쁨이 별로 없어요. 난 여기서 그걸 느끼지 못했어요.” (P.214)

언제나 끝없이 이 기쁨을 그렸어요. 바깥세상에는 빛이 있고, 햇살이 있어요.” (P.215)

 

오스왈드의 최후 장면에서 그가 반복하여 햇빛을 갈구하는 것은 입센의 절박감과 초조함을 그대로 반영한다.

 

햇빛.....햇빛을.” (P.241)

 

<유령>의 등장인물들은 제각기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그것이 인간의 다면성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오히려 위선적인 면을 강조하는 부정적인 효과를 더해주고 있다.

 

만데르스 목사는 전통적이며 보수적인 관습에 젖어 있는 인물의 전형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의지보다 세인의 반응에 예민하다.

 

부인, 살다 보면 다른 사람의 판단에 의지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게 다 세상 사는 방법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좋죠. 그렇지 않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되겠어요?” (P.151)

 

사람들에게 오해를 심어 줘서도 안 되고, 세상 사람들의 빈축을 살 일을 해서도 안 되죠.” (P.155)

 

고아원 건물의 보험 가입에 대한 그의 주저는 후일 화재의 참극을 예고한다. 게다가 알빙 부인의 결혼 관계에 대한 인식은 어떠하며, 개인의 행복을 희생해서라도 가족의 울타리는 지켜야 한다는 가치관도 그의 고루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언제나 인생에서 행복만을 찾으려는 건 터무니없는 생각일 뿐이에요. 어떤 권리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죠? 없어요. 우린 오직 우리의 의무를 다할 뿐입니다. 부인의 의무는 부인이 선택한 남편 곁에 있는 것입니다. 성스러운 인연으로 묶인 바로 그 사람과 함께.” (P.167)

 

만데르스: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해야 합니다!......어머니로서 아들의 이상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나요?

알빙 부인: 진실은 어쩌고요?

만데르스: 이상은 어쩌고요?“” (P.185)

 

알빙 부인은 끝내 가정을 깨뜨리지 못한 노라다. 그녀는 남편에 대한 증오와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지닌 비교적 깨인 인물이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끝내 비극을 감수하는 처지를 자초한다.

 

타락한 남편을 보여주기 싫어서 어린 아들을 일찌감치 외국에 보내지만, 그것이 오히려 자신과 아들을 속이는 행동이었음을 그녀는 알지 못한다. 아들의 눈에는 알빙 부인 또한 유령의 일원으로 보인다.

 

엥스트란드의 간교하기 이를 데 없는 허위와 위선은 말할 것 없고, 레지네의 태도 반전은 극적이다.

 

나도 인생의 기쁨을 찾고 싶어요, 부인......아무려면 어때요. 될 대로 되라죠.” (P.231)

 

착하고 얌전한 듯 보이는 레지네는 실상 삶의 열정과 기쁨을 향유하려는 욕망으로 펄펄 끓는 젊은 아가씨였다.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 알빙 부인 자택을 박차고 뛰쳐나가는 그녀의 태도는 당당하면서도 일말의 불안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녀가 만약 엥스트란드에게로 향할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여기서 작품 전개의 일대 전환점이 되는 고아원 화재의 원인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극중에서는 만데르스 목사의 실수로 화재가 발생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만데르스 목사가 실화자인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엥스트란드: 하지만 난 분명히 봤습니다, 목사님. 등불을 받아 손으로 심지를 끊어서 등불을 끄시고, 그 꺼진 심지를 대팻밥이 쌓여 있는 곳에 버리셨어요.” (P.221)

 

만데르스: 끔찍하군! 부인, 이건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집에 대한 심판입니다.” (P.218)

 

엥스트란드의 증언에 더하여 목사 자신의 발언은 나아가 방화의 의도마저 풍긴다. 만약 방화로 확인된다면, 목사에 대한 저간의 평가는 재논의가 필요하리라.

 

한편, 엥스트란드도 용의선 상에서 배제할 수 없다. 그는 만데르스 목사의 실화에 대한 유일한 목격자이며, 이를 기화로 목사를 자신의 목적에 동의하도록 은근히 유도하고 있다. 우리는 앞서 공사장에서 화재가 생길 뻔했고 엥스트란드에게 혐의가 있었음을 알고 있다.

 

사람들 말로는 가끔씩 그가 성냥불을 아무데나 버린다더군요.” (P.156)

 

이를 확대 적용해 보면 엥스트란드는 실수든 고의든 고아원 화재의 원인자인데 이를 목사에게 뒤집어씌운 셈이다.

 

마지막으로 고아원과 선원의 집의 명칭에 담긴 역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알빙 부인이 세운 고아원의 명칭은 알빙 대위 기념관이다. 겸손한 미덕 속에 감추어진 허위를 인식하자. 반면 엥스트란드는 선원들의 집을 알빙 대위의 집으로 명명한다. 그런데 이것은 명백한 오역으로 보인다. 타 번역본에서는 의전[시종] 장관 알빙의 집으로 번역한다. 영문판으로는 Chamberlain Alving's Home으로 표기되어 있다. 의전 장관 알빙은 타락한 인물이다. 진실을 담고 있지만 그것은 타락한 진실이다.

 

작품해설은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요약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가 사회적 관습에 의해 어떻게 파괴되어 가는지, 그리고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과거와 현재의 <관념적 유령>에 희생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P.251)”

 

<인형의 집>의 노라는 유령을 뿌리치는 데 성공한 반면, <유령>의 알빙 부인은 유령을 극복하는데 실패한다. 그것이 이 작품이 비극으로 자리매김하는 연유다. 하지만 <유령>을 단선적으로만 파악하기 보다는 주제 구현을 위한 갖가지 상징과 복선 장치, 인물들의 다면적 성격의 충돌과 대립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보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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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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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주목할 만한 대목은 책장 끝을 살짝 접는데, 해설과 연보를 포함하여 140면이 채 되지 않는 얄팍한 책에 접힌 곳이 십여 군데에 달한다. 그나마도 나름 특히 인상 깊은 경우로 한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전은 역시 고전임을 새삼 알게 된다. 특히 마지막 대목에서 노라의 통렬한 웅변은 가슴 깊은 곳을 절절히 울린다.

 

여성해방 운동의 문학적 정전과도 작품. 페미니즘에 관심 없는 내 입장에서는 굳이 읽을 만한 동기부여를 갖지 못한다. 보봐르의 <2의 성>과 마찬가지로. 섣부른 선입관은 그래서 무섭고 어리석은 법. 이 책에서 여성만을 주목하는 독자는 편협한 독서를 한 셈이다. 물론 여성해방도 무게 있는 주제다. 하지만 입센은 여기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제기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노라와 헬메르는 당대 노르웨이의 전형적인 부부상을 대표한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이지 못하며 성숙한 일개 인격체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제2의 성으로서의 여성. 노라는 내심 불만을 품고 있지만 그것은 표면화되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다. 소소한 불만은 개인과 가정과 아이들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 꾹꾹 눌러 가라앉힌다. 대다수의 결혼한 여성들은 그러하다. 남성들도 그러하다. 결혼 생활에서 완전한 화합과 행복은 이념형에 불과하다.

 

독자적인 사회적, 법적 지위도 인정받지 못하고 언제나 남성(아버지와 남편)에게 의지하며,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인형처럼, 종달새와 다람쥐처럼 재롱을 피워야 하는 존재, 그러면서 이러한 현실과 처지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안주하는 여성들. 그것이 노라가 맞닥뜨린 사건을 통해 각성한 사회와 가정에서의 여성의 현실이다. 그녀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지만 진실은 사랑과 행복을 세뇌시키려는 무의식적인 노력이었을 뿐이다. 노라에게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 가정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위장된 행복은 감소하고 억눌린 자아에 대한 불만은 갈수록 팽배하였을 것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당신들은 나를 사랑한 적이 없어요. 당신들은 나에 대해 애정을 갖는 게 즐겁다고 생각했을 뿐이죠.” (P.115)

 

아니요. 행복한 적은 없었어요. 행복한 줄 알았죠. 하지만 한 번도 행복한 적은 없었어요......

우리 집은 그저 놀이방에 지나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의 인형 아내였어요. 친정에서 아버지의 인형 아기였던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그리고 아이들은 다시 내 인형들이었죠. 나는 당신이 나를 데리고 노는 게 즐겁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놀면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토르발, 그게 우리의 결혼이었어요.” (P.116)

 

노라의 남편 헬메르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이었으리라. 기껏 있을 수 없는 사고를 친 아내를 아무 일도 없듯이 용서해주겠다고 했는데 가정을 떠나겠다고 선포하고 있으니. 당대적 관점에서 그는 지극히 평범한 타입의 남편에 해당한다. 오히려 모범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내를 더없이 사랑하고, 도덕적으로 올바르도록 애쓰며 사회적 지위와 명예에 높은 가치를 두고 있는. 다소간의 권위적 태도와 형식적인 친절, 지나칠 정도의 결벽이 인정되지만 이 정도를 가지고 인간성을 탓할 수는 없다. 그의 커다란 흠결이라면 결정의 순간 아내 대신에 사회를 선택했다는 점인데, 그로서는 아내의 사고와 행동은 상대적으로 가치가 덜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 외견상 아무 일도 없는 양 보여주기 위한 위선적 태도를 보인다.

 

당신에 관한 일은, 우선 우리 사이는 전과 똑같은 것처럼 보여야 해. 물론 세상의 눈에만 그렇다는 거지. 당신은 계속 이 집에 있어야 해. 당연히 그렇지. 하지만 당신에게 아이들을 키울 권리를 줄 수는 없어. 당신에게 그건 맡기지 못하겠어.” (P.110)

 

자기 아내를 전심으로, 거짓 없이 용서했다는 것 말이야. 그럼으로써 여자는 두 배로 그의 소유물이 되니까. 그는 아내를 이 세상에 다시 낳아 준 거야. 아내는 어떻게 보면 그의 아내이면서 그의 아이이기도 하지. 힘없고 무력한 존재인 당신은 앞으로 나에게 그런 존재가 될 거야. 나에게 마음을 열기만 하면 나는 당신의 의지와 양심이 되겠소.” (P.113)

 

당대 노르웨이 사회에서는 여성은 남성의 부속물로 대우받았다고 하며 당연히 법적 권리도 지극히 제한된 것이었다. 아이와 남성 어른의 중간적 존재 정도. 이러한 제도와 관습 속에서 수많은 노라와 헬메르는 교육받고 세뇌 당한다. 그것이 그들에게 당연히 준수되어야 할 성 역할이자 의무로서 말이다. 이런 점에서 노라와 헬메르 부부는 모두가 피해자다. 미약한 한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법률과 도덕과 종교 등의 거대한 체제의 위력. 입센은 노라로 하여금 계란을 던지도록 하였다. 노라는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또 다른 노라가 줄줄이 뒤를 잇는다면 가능하리라. 그리고 그것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이 작품이 가정극으로 분류되지 않고 사회극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노라에게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책임은 소중하지만 그녀는 더 거룩한 의무가 있다. 그것은 주체적 자아로서 개인을 인식하는 일이다.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이에요......나는 내가 우선적으로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고 믿어요. 최소한, 그러게 되려고 노력할 거예요.” (P.118)

 

입센은 상대적 소수자로서 여성의 입장에서 반론을 펴고 있지만, 헬메르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헬메르에게도 사회적 속박과 구속에서 온전한 자신을 재발견할 필요성은 절실하다, 남편과 아버지라는 책임과 의무를 초월한.

 

입센은 인물 간 대화와 지문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무대 배경을 이용해서 작중 분위기와 사건 전개를 암시하고 있어 연극적 장치를 잘 활용하고 있다. 1막의 무대는 아늑하게 잘 꾸몄지만 수수한 거실”(P.9)이지만, 갈등이 심화된 2막의 무대에서는 더 이상 안온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피아노가 있는 구석에 크리스마스트리가 서 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이미 장식을 빼앗겼고, 초도 다 타버렸다.” (P.54)

 

노라와 헬메르는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것일까? 작자는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진정한 결혼”(P.124)이 가능하다면. 작품에서는 기적에 대한 한 줌의 희망을 피력하고 있지만, 부부 간에 진정한 결혼이 가능할 것인가?

 

 

 

1막 중간에 도저히 요령부득인 대목(P.34)이 있다.

 

(노라) , 이제 정말 아주아주 행복해요. 이제 세상에서 간절한 소원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랑크) 그래요? 그게 뭔데요?

(노라) 토르발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하나 있어요.

(랑크) 그럼 왜 말을 안 하죠?

(노라) 용기가 안 나요. 나쁜 얘기니까요.

(린데 부인) 나쁜 얘기라고?

(랑크) , 그럼 이야기하지 않는 게 좋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할 수 있잖아요? 토르발에게 그렇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뭔가요?

(노라) 죽어 버리라고 너무너무 말하고 싶어요.

(랑크) 제정신이 아니군요!

(린데 부인) , 저런, 노라!

 

헬메르에 대한 노라의 숨겨진 감정이 표출되는 장면으로 이해되는데, 노라는 남편이 죽어버리기를 욕망하고 있었단 말인지 혼돈스럽다. 그래서 다른 번역본들을 찾아보았더니 제각기 개성적인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난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모두 지옥으로 꺼져 버려!>” (김창화 옮김, 열린책들)

나는 말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요. “이 개자식아!”하고 말예요.” (김진욱 옮김, 범우사)

, 말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해 죽겠어요. ‘뭐야, 빌어먹을하고.” (곽복록 옮김, 신원문화사)

, 말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뭐야, 빌어먹을!’ 하고.” (이경석 옮김, 홍신문화사)

난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지옥으로 꺼져 버려!”” (소두영 옮김, 동서문화동판)

 

내친 김에 영문판에서는 어떤 표현을 사용했는지 알아보았다.

 

“I should just love to say Well, I’m damned!”

 

입센에 대한 본격 연구서인 <헨리크 입센> (김미혜 저)에서 해당 작품론을 확인해본다.

 

남편이 자신의 이가 나빠질까봐 마카롱을 금지한다는 말을 한 후 노라는 꼭 남편 앞에서 빌어먹을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한다. 꼭 남편 앞에서 말하고 싶다는 이 한 단어는 모든 것을 남편의 기준에 맞춰 사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노라가 자신의 내적 감정을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인데도 그 속임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비로소 머릿속이 명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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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학고재 산문선 16
최순우 지음 / 학고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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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로 생전에 누리지 못한 압도적인 대중적 인기를 사후에나마 누리는 혜곡 최순우 선생은 진정 행복한 분이다. 그의 성북동 옛집은 시민문화유산 1호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한국미의 아름다움을 지속적으로 설파한 공이 보답을 받는 셈이고 우리 것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매우 성장하였음을 보여준다.

 

이 책의 의의와 성격을 출판사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서 활짝 피어난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엿본 독자라면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에서 드디어 우리 것을 아름답게 꽃피우게 한 마음씨를 알게 될 것이다.” (책머리에서)

 

이 책은 앞선 책과 짝을 이루면서 미진하였던 저자 자신의 체취를 좀 더 짙게 드러낸다. 앞선 책에서 한국미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절치부심하며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독자에 따라서는 분량이나 소개되는 유적과 유품의 양에 힘겨워하기도 하고 글쓰기의 초점이 사물지향에 가까웠다는 인상을 받았다. 여기서는 어깨에 힘을 빼고 다소 느긋한 마음가짐과 잔잔한 어조로 우리 옛것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자신의 개인적 심경을 토로하거나 신변잡기적 일화도 소개하여 인간지향에 근접한다.

 

예전보다는 외견상 상황은 약간 나아졌지만 여전히 우리 것에 대한 진지한 모색과, 특히 실생활에서의 반영은 요원한 분위기다. 우리의 의식주 문화는 이미 전통보다는 서구에 친연성을 느낀다. 우리말을 갈고 닦으려는 노력보다는 순수한 우리말이 외래어에 의해 멸실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해야 할 판이다. 옛것은 동물원과 박물관에서 보는 신기하고 기이한 존재일 뿐 그것이 오늘의 나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가질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그들 자신 속에 도사리고 앉은 마음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전통을 들고 나오는 작가들이나 전통을 외면하는 작가 또는 전통에 반발하는 작가 등등이 있지만, 과연 한국미의 전통이나 동양미의 전통을 깊이 체험하고 전통을 평가한 사람이 그 중에 얼마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앞서는 것이다.” (P.27)

 

옛것의 미학을 고답적으로 간주하는 견해는 과거와 단절시키는 위험성을 지닌다. 우리의 도자기 문화를 보면 대개는 고려 시대의 비색 청자와 상감 청자의 고고한 품격을 극상으로 치고 이후로는 쇠퇴하는 흐름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분청사기는 고려청자의 퇴화된 유물이며, 조선 백자는 평민 수준으로 하향화된 것으로. 기술적 관점에서는 이런 시각도 분명 가능하지만, 고려자기와 조선자기는 향수 계급(귀족과 백성)과 용도(감상과 실용) 등에서 분명한 차이점을 지닌다. (고려자기와 달리) 건강하고 소박한 아름다움, 현대에도 통용될 만한 미적 의의라는 점에서 조선 자기는 상대적으로 우월하다. 저자도 이렇게 상찬한다.

 

조선 시대 백자 항아리들에 표현된 원의 어진 맛은 그 흰 바탕색과 아울러 너무나 욕심이 없고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 한 느낌이 있다.” (P.157)

 

이 분청사기에서 가끔 볼 수 있는, 가슴 밑창부터 후련해지는 멋과 아름다움은 우리 도자사뿐만 아니라 동양 도자사에서도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색다른 아름다움으로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세계인들의 시각에 새로운 안복을 누리게 해 주고 있다.” (P.161)

 

우리 옛것을 백날 쳐다본다고 해서 새삼 숨은 아름다움이 홀연히 드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교육과 언론의 감화를 통해 관념적으로 한국미의 특성에 대해 줄줄 외울 수는 있겠지만 진실로 마음의 감흥이 촉발된 경우는 고백하면 거의 없다.

 

실상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길은 도자기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에 있으며 도자기의 마음이란 그릇에 나타난 아름다움의 의지를 말한다. 이러한 의지는 바라보고 또 만져보고 조용히 대좌하고 있으면 자기들 스스로가 그 아름다운 비밀의 문을 조금씩 열어 준다.” (P.51)

 

위 대목은 비록 도자기를 대상으로 쓴 글이지만, 건축과 회화 등 예술과 문화 전반을 아울러 통용될 수 있다. 애정과 관심을 기울여 마음을 이해하고자 애쓴다면 사물뿐만 아니라 사람의 진정마저 깨닫게 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옛것에서 찾을 수 있는 아름다움의 연원은 삶과 자연을 대하는 선인들의 마음가짐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삶의 희노와 애락은 인간이라면 뿌리칠 수 없는 요소이므로 자연스럽고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대자연에 비추어 보면 인간은 미미하고 찰나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어찌 겸손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인들은 전통미에서 철저한 정밀성과 공교로운 세밀함을 추구하지 않았다. 바싹 다가서서 감상하기 보다는 몇 발짝 떨어져서 전체적인 조화 속에서 풍겨 나오는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하였다는 것이다. 동양의 산수화에 대해서도 저자는 자연과 어울린 인간의 가치를 설명해주고 있다.

 

동양의 풍경화란 서양 풍경화에서처럼 화가가 바라본 자연의 일각을 묘사한 그림, 즉 바라보는 풍경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자기가 들어가서 생각하고 느끼고 또 두루두루 돌아보며 즐기는 입장을 택한다는 말이 된다.” (P.197)

 

많은 내용이 앞선 책과 밀접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유산에 대한 작품 분석보다는 거기에서 찾을 수 있고 느꼈을 때 갖게 되는 아름다움 자체에 방점을 두고 있다. 더구나 저자가 생전에 마주치고 헤어졌던 고인(김환기, 장욱진, 전형필)에 대한 추억담, 한국전쟁과 이후의 어렵고 궁핍했던 시절에 얽힌 일화들(특히, 바둑이 이야기)은 회고와 애상의 정취를 드리우고 있어 전통미의 옹호자로서가 아닌 인간 최순우 선생을 보다 가깝게 이해하도록 해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은 후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보았다면 안목의 지평이 보다 넓어지고 심안도 깊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분량 면에서나 옛것의 아름다움을 대하는 마음의 태도를 갖추게 될 수 있는 점 등에서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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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차페크 평전
김규진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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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차페크 평전이 나왔다는 소식을 뒤늦게 알고 부랴부랴 책을 펼쳐든다. 여전히 편향되고 척박한 출판계 풍토에 동구권의 그다지 인기 있는 작가도 아닌 카렐 차페크에 관한 책이라니! 차페크에 대한 책을 기대했다면 다소간 실망할 수 있겠다. 엄밀히 말하면 이 책은 평전이 아니다. 전체 12개의 장 가운데 그의 삶과 문학 전반을 소개한 것은 제1장 하나뿐이며 분량 상으로도 1/10에 불과하다. 그러면 나머지 장은 무슨 내용이냐고? 차페크의 주요 작품에 대한 작품론을 담고 있다. 고로 정확히 하자면 카렐 차페크 연구또는 카렐 차페크의 문학정도가 적합하다는 개인적 의견이다.

 

2장부터 제12장까지의 작품론은 각각의 연구 논문을 다듬어 수록한 것으로 보여 차페크의 작품을 읽지 않은 초심자가 접근하기는 다소 어려운 편이다. 이 책을 통해 차페크의 세계에 다가가려는 독자보다는 그의 개별 작품을 읽은 독자가 종합적이고 전반적인 작품세계를 조망하기에 오히려 도움이 될 듯 하다. 다행하게도 소개된 작품들 가운데 국내에 번역 출간되지 않은 작품은 위경 이야기들어머니’, 단 두 편뿐이다.

 

카렐 차페크가 얼마나 탁월한 작가인지 의심하는 시각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와 동시대의 작가로서 카프카와는 달리 당대에서부터 전 유럽에서 각광을 받았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노벨문학상 후보로 언급되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나치독일과의 정치적 역학관계 때문에 수상을 하지 못하였다고 하며, 히틀러의 체코 침공 직전에 눈을 감았다고 하니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겠다. 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난 형 요세프의 운명에 비한다면 말이다. 국내 출판계에서 산발적이지만 그의 작품들이 제법 여러 편 소개된 점은 정말로 다행이다. 야로슬라프 하셰크의 유명한 병사 슈베이크 이야기는 삼십년 전에 번역된 이후 감감무소식이다.

 

차페크 문학의 양대 축은 소설과 희곡이다.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고자 할 경우 희곡을 통해 발표하였으며, 내적인 성찰과 모색에 중점을 두는 경우 소설 형식을 사용하였다. 양대 축의 접점이 바로 소설 <도롱뇽과의 전쟁>이다. 저자도 수차 지적하였듯이 차페크 문학의 테마는 인간성의 탐구와 옹호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그의 소위 철학소설 삼부작으로 결실을 맺었으며 후자는 일련의 희곡들과 도롱뇽을 제재로 한 소설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차페크는 상대주의적 인간관을 지녔다고 한다. 나와 남을 상이한 존재이므로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서로 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절대적 인간유형을 우상시하고 강요한다면 참다운 인간성은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인간성을 위협하는 요소는 도처에 편재하지만 차페크 당대에 그는 과학기술의 전례 없는 급속한 발전과,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전 세계를 휘감는 자본주의의 심화, 나치독일을 필두로 한 전체주의 체제의 팽창에 커다란 경계심을 지녔다. <RUR><도롱뇽과의 전쟁>에서 과학기술과 자본주의를 주로 삼고 전체주의를 부로 삼았다면, <하얀 역병><어머니>는 전체주의 위협에 대한 각성을 주로 삼고 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마크로풀로스의 비밀> 또한 영생의 묘약이라는 기술적 요소에서 전자와 이어진다고 하겠고, <곤충 극장>은 포괄적 인식을 개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인간과 인간의 생명 그리고 운명은 자연스럽고 주어진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초월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훼손시킨다.” (P.211)

 

차페크는 일관되게 인간 본성의 발견과 회복을 주창한다. 그가 주목한 인간성은 거창하고 추상적인 특별한 철학적 의미가 아니다. 가장 평범하고 소박한 삶에 진실한 본성이 자리 잡고 있다. 작가가 살던 당시는 유럽 세계에서 전대미문의 혼란기였다.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체코는 독립 국가를 이루었지만 정세는 여전히 어수선하고 세인들의 가치관도 붕괴되었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전체주의 세력이 사회적 혼란을 틈타 급속도로 세력을 팽창하고 있었다. 작가의 감각은 더 큰 인간성 말살이 도래할지 모르는 위험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작품 중 순문학적 관점에서 재삼 음미할 가치가 있는 것은 역시 <호르두발>, <별똥별>, <평범한 인생>으로 구성된 철학소설 삼부작이다. 각각은 자체로서도 매우 문학적 형상화가 탁월하지만 삼부작을 종합적으로 반추해보면 그의 뛰어남이 배가됨을 알게 된다. 호르두발은 철저하게 고독하고 소외된 인물이다. 미국에서도 그러하지만 귀향 후 가족과 이웃에게도 마찬가지다. 독자는 호르두발의 심경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는 자신의 속내를 쉽사리 용납하지 않는다. 죽은 이후에도 그의 진정한 사인을 알 수 없는 것처럼. 호르두발, 당신은 어떠한 사람인가?

 

<별똥별>에서 호르두발에 상응하는 인물은 비행기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환자 X. 그의 정체와 삶의 이력에 대해서 병원에 있는 사람들은 궁금해 하고 제각기 자신만의 방식을 통해 환자 X의 진실을 추론한다. 간호사 수녀는 꿈을 통해, 환자 천리안은 인식의 동화를 통해, 그리고 시인은 이야기의 창조를 통해. 여러 사람이 재구성한 그의 삶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성을 지닌다. 일말의 진실을 내포하지만 온전한 참은 아니며 진실과 진실이 아닌 수준과 경계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 환자 X, 당신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인가?

 

<평범한 인생>은 가장 심오하다. 화자는 자서전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회상할 때 지극히 평범한 인생이었음을 고백한다. 돌연 후반부에서 소설을 소용돌이친다. 또 다른 내면의 목소리는 화자에 대립한다. 그에 따르면 화자의 삶은 전혀 평범하고 평탄하지 않았으며 무수한 갈등과 억압과 타협이 깃든 끔찍한 삶이었다는 것이다. 개인의 인생은 단일한 자아의 삶이 아니라 다수의 상이하고 가능한 삶들의 집합으로서 외관상 평범한 인생일지라도 기실은 총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차페크는 삶에 있어 진실은 무엇인가하고 질문을 던지고, 개인의 진정한 정체성의 존재와 발견 가능성을 탐문한다. 작가는 개인의 삶이, 표면적으로 평범하고 단순한 인생일지라도 자아의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구현한 실체임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자신은 물론 타인의 진정한 실체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편린이나마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데 즉자와 타자를 연결하는 대자(對自)의 개념에 근접한다.

 

진테제라고 하는 <평범한 인생>에 나타나는 인간 성격에는 단일성과 복합성이 존재한다. 그 진테제는 복합성 속의 단일성이며 우리들 안에 있는 그 인간의 복합성이 바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P.115)

 

차페크의 작품에는 미스터리가 많이 반영되어 있으며, 특히 범죄의 수사와 재판에 관련된 소재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호르두발>은 전형적이지만, 나머지 두 작품도 유사성이 깊고, <마크로풀로스 사건>도 재판과 관련된다. 그의 단편 모음집인 두 호주머니 이야기에 수록된 작품들도 이후 그의 작품 경향을 짐작케 할만한 요소들이 그득하다. 어떤 범죄적 사건이 발생할 때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국외자는 표면화된 외양과 결과만을 가지고 사건을 판단한다. 객관적 증거는 내면적 심리관계를 간과하기 쉽다. 우리는 호르두발의 진심, 그의 아내와 하인 슈테판의 내면을 결코 알지 못한다. 진실은 어디에 있고 정의는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1차 세계대전의 혼란기를 겪은 후 미국에서는 소위 길잃은 세대혹은 잃어버린 세대가 득세하였다. 혼란이라면 미국보다도 격심한 체험을 한 게 당대 유럽이다. 더욱이 그들에게 혼란은 완료형이 아니라 여전히 확대진행형이다. 기존의 가치관이 전복되고, 신뢰하였던 물질적, 정신적 토대가 뿌리째 흔들리면서 인간성 말살의 극단적 체제가 임박해 오는 현실에서 남달리 예민한 작가가 체득하고 지향한 글쓰기의 과제와 목표는 차페크에게서 뚜렷이 실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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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호섬 파랑새 클래식 이삭줍기주니어 6
로버트 밸런타인 지음, 박정호 그림, 이원주 옮김 / 주니어파랑새(파랑새어린이)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로빈슨 크루소의 청소년 버전이라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십대 뱃사람 세 명이 무인도에 난파하여 겪는 체험과 모험을 담고 있는 이야기책이다. 시기적으로도 디포와 스티븐슨, 베른을 잇는 중간 무렵이다.

 

전반부에서 배가 폭풍우에 난파하여 겨우 세 명의 어린 뱃사공만이 남태평양의 이름 모를 산호섬에 떠밀려온다. 제일 연장자이고 경험 많은 잭을 중심으로 해서 무인도에서 그들만의 생존을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인다. 무인도 생활은 예상보다 비교적 안락하고 즐겁기조차 한 것이었으니 낯익은 문명세계로의 복귀라는 염원만 아니었다면 그들은 그곳에 정주하는데 불만이 없을 정도이다. 산호섬을 샅샅이 탐험하고, 해저 동굴도 발견하며, 앞바다의 펭귄섬까지 항해하는 모험도 감내한다. 앞선 로빈슨과 마찬가지로 열대의 무인도는 풍요롭다. 그들은 별 수고를 하지 않아도 해산물과 빵나무 열매, 그리고 야생 돼지고기를 구할 수 있다. 기후와 일기도 쾌적하여 지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소박하나마 상상 속의 이상향이라고 불릴 만하다.

 

소설이 이렇게 내내 전개된다면 주인공들은 행복할지 모르지만 독자들은 금방 지루해하기 마련이다. 후반부에서는 파란만장한 모험담이 벌어진다. 우선 주인공들이 섬에서 원주민 간 전투에 개입하여 몰살당할 뻔했던 한 부족을 구해준다. 이어 주인공 랄프가 해적선에 잡혀가 온갖 고생을 겪는다. 이 장면에서 <보물선>이 연상된다. 우여곡절 끝에 산호섬을 돌아온 그들이 망고 섬의 원주민들과 격렬한 대립을 빚다가 갑작스런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것으로 끝. 여기서는 원주민들의 식인 풍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당대 원주민 대상 무역과 기독교 전파에 따른 종교적 갈등의 현장이 생생하게 제시된다.

 

구성 상 다소간 억지스러운 면이 명확하고 인위적 설정이 자연스러운 몰입을 방해하지만, 눈높이를 청소년 수준에 맞춘다면 그럴듯한 재미를 안겨준 모험소설로 인정할 만하다. 게다가 주인공들이 십대 중후반의 동년배들이라면 마치 자신들이 주인공인 된 마냥 이입 효과가 더해질 테니. 아무리 그렇더라도 후반부에서 거대한 해적선을 한 명 또는 세 명의 어린 뱃사람들이 몰고 가는 장면은 사실성 부여에서 한계가 있다. 더구나 달랑 세 명이서 망고 섬의 원주민들과 맞서 전투를 벌이고 기독교 종교를 가진 원주민 여인을 구하려고 목숨을 거는 대목은 기사도 정신을 강조하는 목적성 설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무역 회사에 근무했을 뿐 한 번도 해양 모험을 해보지 않은 작자가 이런 소설들을 발표한 것은 당대에 상당한 수요가 존재하였음을 가리킨다. 때는 19세기 중반, 대영제국의 최전성기를 향해 나아가던 시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건설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무역과 해군력은 절체절명의 필수 사항이었다. 이국의 기이한 관습과 풍경에 대한 세인들의 호기심을 충족하고, 아울러 사람들의 흥미와 도전 정신을 고취하고 관심을 해외로 돌리고자 하는 이해관계가 상호 맞아떨어졌다. 식인 야만인들에게 기독교 문명의 세례로 정화한다는 종교적 사명감도 대외적 팽창과 정복을 정당화시켜 주었다. 그렇다고 만사를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당대의 시각에서는 그것은 분명 옳고도 정당한 사고이자 행동이었으므로.

 

이 작품을 청소년들이 읽도록 굳이 안내할 가치가 있을까? 분명 재미와 교훈적 측면에서라면 동종의 전후 작품들에 비하여 두드러진 장점은 없다. 문화적, 종교적 편향성도 분명히 드러난다. 구성과 전개의 비현실적 요소도 언급한 바 있다. 일단 이러한 한계를 인식한다면 그래도 성인들이 아닌 청소년들이 주인공이 되어 주체적인 판단과 결정으로 자신들의 앞날을 선택하는 장면, 고난과 역경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나름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대목, 그리고 무엇보다도 읽는 이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대양에서의 모험과 무인도에서의 삶 등이 주는 흥미는 일독해도 괜찮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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