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로봇 스누트의 모험
브라이언 게이지 지음, 캐서린 오토시 그림, 한강 옮김 / 더북컴퍼니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 로봇 도시를 배경으로 로봇을 소재로 한 동화다. 로봇간의 대결이란 면에서 <트랜스포머>를 연상시키지만, 스스로 사고하는 로봇의 저항이라는 점에서 <아이 로봇>과도 유사성을 지닌다. 다만 내용 전개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감안하면 동화라고 해도 고학년에 어울린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는 독재자 빅 브라더가 사람들의 의식과 감정을 통제한다. 그는 텔레스크린이라는 장치로 사람들을 감시한다. 이 책의 기본 토대는 로봇판 <1984>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돔 시의 로봇들은 광채 로봇, 경비 로봇, 일벌레 로봇의 계급으로 구분되며 도시를 이끄는 리더는 파더 스크린이다. 파더 스크린은 자체로 선전 도구이자 감시 기구이다. 모든 일벌레 로봇은 빛을 생산하는 작업에 매진해야 하며, 그들은 전설적 영웅 를 찬양하고 닮고자 애쓴다. 일하고 소비하고 잠자는 일상의 반복이지만 일벌레 로봇들은 행복하다.

 

어느 사회, 조직에서나 비주류, 불평불만자는 존재한다. 그들은 사회와 조직의 안녕을 깨뜨리는 저해 요인이다. 조직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신속히 제거되어야 마땅하다. 반면 그들은 외관상 평화로운 조직이나 사회에 실상은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고 경보를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다. 이 작품에서는 꼬마 로봇 스누트가 그러하다. 스누트는 호기심 가득하고 궁금증을 품고 있으며 항상 공상에 젖어 있다. 생산 능률 지상주의 사회에서는 가장 형편없는 로봇이다. 스누트는 가장 뛰어난 로봇이기도 하다. 대장장이 로봇 실로는 스누트를 뛰어난 지능을 지닌 로봇으로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었다.

 

돔 시의 로봇 사회는 철저한 독재 사회다. 파더 스크린, 즉 실로의 동생 시로가 지배하는 광채 로봇이 지배계급을 이룬 가운데 체제 위협적인 요소는 일체 통제되며 끊임없는 세뇌 공작으로 일벌레 로봇들은 자신들이 실상은 빛의 로봇이라는 사실마저 인식하지 못한 채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인간 사회에 적용시켜보면 과두 지배체제, 언론 왜곡, 교육 통제, 감시의 경찰국가, 우민화 정책, 조작된 영웅 등 독재 정권이 즐겨 사용하는 모든 기법들이 그대로 확인된다. 여기에 저항하는 개인은 국가와 민족의 반역자이자 매국노로 지탄된다. 사회에서 조직으로 범위를 축소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중이 싫으면 절을 떠나야 된다. 조직에 충성하던가 아니면 입을 다물라. 내부고발자(whistle blower)는 이론적으로 그럴듯하지만 실상은 곤란하다. 사적 이해관계에 얽매여 동기의 순수성을 의심받거나 조직과 조직 내 이웃들의 안녕을 뒤흔드는 불편한 존재로 치부되며 설사 정당하더라도 그는 조직에 머무르지 못한다. 조직과 평범한 성원들은 내부고발자를 미워하는 법이다.

 

너는 일벌레 로봇이 아니야, 친구. 너는 혁명가야!......그래, 나는 혁명가야.” (P.71)

 

스누트는 자의든 타의든 혁명가다. 그는 의문과 의심을 품고 현실에 안주하지 못한다. 정상적으로 보이지만 미묘하게 흠이 존재하는 돔 시의 체제, 그 작은 틈으로 인해 돔 시의 로봇 사회와 지배 체제는 붕괴되었다. 빛이 사라지자 스누트를 포함한 일벌레 로봇들은 물론, 광채 로봇과 경비 로봇들은 모두 멈춰버렸다.

 

동화는 속성 상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과장과 비약, 상상의 요소가 풍부하다. 이 작품의 경우 결말은 예측 가능하면서도 당혹스러움을 안겨주는데, 태양이 떠오르면서 빛의 로봇들이 모두 회생한다는 점이다. 나비로 탈바꿈한 페르난도는 자연의 위대함을 상징적으로 예증한다. 돔 시의 로봇들은 진실을 몰랐다 하더라도 실로가 이를 숨기고 있었던 점, 그리고 끝내 오브와 파편에만 주의를 환기시킨 점은 쉽사리 정리가 되지 않는다.

 

작가는 이 장편 동화 한 편에 너무나 많은 메시지를 담고자 했던 게 아니었을까. 작가 자신의 이념, 자유와 정의의 본질, 개체와 조직, 사회의 관계, 인공과 자연, SF적 요소와 극적 재미 등. 조금만 욕심을 덜 부리고 스토리라인을 압축하였다면 어떨까 생각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책을 보게 된 것은 옮긴이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작가가 번역을 하는 경우는 간혹 있으므로 특이할 게 없지만 동화도 쓰는데다가 외국 동화도 번역을 하니 무슨 작품을 어떻게 번역하였을지 궁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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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하멜표류기
강준식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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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책에는 하멜에 관해 간략한 기술만 언급된다. 하멜 일행이 조선에 표류했는데 십여 년간 억류되었다가 일본으로 탈출하였다라고. 그리고 벨테브레(우리 이름으로 박연)도 함께 언급한다. 우연찮게 읽게 된 이 책을 통해 새삼 하멜을 포함한 화란인 선원들이 조선에 오게 된 연유, 그들이 조선 땅에서 보고들은 것들과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사유를 되짚어 보니 그네들의 표류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책에 관해 먼저 이야기하자면 하멜의 기록을 토대로 조선왕조실록과 개인 문집 등의 자료를 토대로 보완하여 하멜의 조선생활을 재정리하였다. 부록으로 하멜표류기의 본문 번역을 수록하고 있다. 17세기 이방인이 남긴 많지 않은 기록만을 가지고 현대의 우리가 내용 이해와 공감을 갖기란 부족할 것이다. 저자는 이 점에 착안하여 단지 해설을 덧붙이지 않고 표류기를 다시 쓰고 있어 하멜의 표류와 탈출 이후까지도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좋은 기획이다.

 

하멜 일행이 무려 13년간이나 조선에 억류되었던 사연이 먼저 궁금하다. 그네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인도적 배려였을까 또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에서 이루어진 행위였을까? 인도적 고려라고 호의적으로 보기엔 이후 그네들에 대한 처우와 궁핍한 나날이 설명되지 않는다. 통행 자유를 일정 부분 허용하면서 동래 왜관에 접근 금지령과 청나라 사신들이 올 때마다 원근 지역으로 소개된 사실 등을 보았을 때 정치적 목적을 지닌 것으로 해석된다.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했단 말인가? 앞선 벨테브레와 같이 소위 남반국의 무기와 기술을 활용하려고 했던 것이라면 북벌 정책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화란인들의 신분과 지위는 무엇일까? 포로, 죄인 아니면 난민? 응당 난민으로 간주되어야 하나 실상은 그러하지 못했다. 그네들을 희망에 따라 일본으로 보내지 못했다면 최소한 조선에서 정착시키기 위한 법적, 제도적 지원이 뒤따라야 할 텐데 매우 미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청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신경 쓰인다고 전원 죽일 것인가를 무려 사흘간이나 조정에서 논의했다는 자체가 어이없다. 게다가 소위 좋은 사령관, 나쁜 사령관이라는 하멜의 기록처럼 지방수령의 개인적 성향과 방침마다 그네들에 대한 처우는 천차만별을 보인다.

 

화란인들은 어쨌든 십년 이상이라는 기간 동안 조선에 정착하였다. 그네들이 불현 듯 조선 땅을 떠나게 계기가 어떠한 것인지 알고 싶다. 기록을 보면 하멜 일행은 분명히 정착의도를 지녔다. 불가피한 현실을 인정하고 타협을 했을 것임은 자명하다. 1656년에 도성에서 전라도로 내려와 전라병영에 정착한 후 1663년에 분산 수용되기까지 그네들은 7년간 한곳에 정주하였다. 그들이 분산수용된 것은 수년 간 지속된 장기 흉년의 여파였다.

 

우리는 이렇게 헤어지는 것을 몹시 슬퍼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곳에 정착해서 이 나라 방식에 따라 집과 가구, 작은 정원 등을 살 만하게 장만해 왔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장만하느라 힘깨나 들었는데, 이제 다 버리고 떠나야만 했습니다.” (P.248)

 

진한 아쉬움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조선 여인과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은 이들도 있었다고 하니 분명히 그네들은 조선에 영구 거주할 의향도 다분히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네들에게 탈출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까? 그렇다. 그들은 포로도 죄인도 아닌데 노예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일생을 노예로 살 바에는 차라리 목숨을 각오했던 것이다.

 

하멜 일행이 배를 구하고 탈출하여 나가사키 항에 들어가서 일본 관리를 대면한 장면은 이전 조선의 사례와 확연한 대조를 보인다. 무려 53항목에 달하는 질문을 두 번 반복하였던 것인데 화란인들에 대한 것은 물론 상당수가 조선의 현황과 정세에 관한 철저한 조사와 심문과정이었다. 당대 조선과 일본 양국의 국가 역량의 차이를 여기서도 알 수 있다.

 

하멜이 남긴 기록은 비록 제한적이지만 대체로 사실에 근거하여 신뢰성이 높은 편이다. 그는 위로는 임금에서 아래로는 천민에 이르기까지 온갖 계층의 당대 조선인들을 만났다. 표류기 자체는 물론 별도의 조선왕국기를 읽다 보면 마치 인류학자가 미지의 원시 부족들을 방문하고 상세한 기록을 남겨놓은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그들은 두려움과 호기심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지니고 충실한 인류학적 문명기록을 후세에 전승하였다. 오늘날 우리들이 서양인의 시각을 통해 수백 년 전 선조들 사회의 단면을 생생하게 보게 되니 생경과 친숙이 공존하는 낯선 문명을 접하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든다.

 

코레시안은 훔치고 거짓말하며 속이는 경향이 아주 강합니다. 그렇게 믿을 만한 사람들은 되지 못합니다. 남을 속여넘기면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주 잘한 일로 생각합니다.......그들은 여자같이 나약한 백성입니다......그들은 피를 싫어합니다.” (P.292)

 

매우 적확한 관찰이며 요즘도 여전히 유효한 지적이다. 그렇다고 하멜 일행이 조선인들을 깔보고 무시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착하고 남의 말을 곧이듣기 잘합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들에게 우리 말을 믿게 할 수 있었습니다.” (P.292)

 

모처럼만에 읽은 좋은 책이다. 먼지 쌓인 고전에 숨결을 불어넣은 저자 겸 역자에 감사를 표한다. 독자는 대수롭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었지만 이런 책을 쓰기까지의 헌신과 연구는 지난하였으리라.

 

문득 하멜 일행이 벨테브레(박연)과 상면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역만리 미지의 나라에서 생사를 점칠 수 없는 불안하고 두려운 순간에 대면한 같은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동향인의 존재. 참으로 반가우면서도 한없는 감사의 념을 가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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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메르 솔롬 - 헨릭입센희곡 전집 3
헨리 입센 지음, 이주상 옮김 / 예니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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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다. 뭔가 알 듯 말 듯 손에 잡힐 듯 말 듯 하여 내가 이해하고 파악했다고 생각한 내용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인지 아니면 일개인의 전적인 오독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상당 부분 입센 자신에게서 비롯하는데, 그가 사회극에 신비와 상징적 요소를 가미하기 시작한 후기에 해당한다.

 

입센은 <민중의 적>, <들오리>에서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본격적으로 던지기 시작하였다. 당대 노르웨이의 사회와 정치적 정세를 반영하듯이 그의 작품에는 이념(보수/진보)간 갈등, 세대(/)간 갈등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여기에서는 크롤과 모르텐스가드가 대립적 구도에 놓여 있으며, 로즈메르는 레베카의 영향력에 의해 보수에서 진보로 전향 중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작품을 보면 이념적 갈등이 상호비방을 넘어서 물리적 대립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입센의 이른바 타락한 좌파언론인에 대한 신랄한 비난은 여전하다. 모르텐스가드가 로즈메르의 전향을 환영하면서도 그의 신앙포기는 정치적으로 불리하다고 은닉할 것을 요구하는 대목에서 그러하다.

 

로즈메르는 전직 목사로서 저택의 주인이다. 지주로 판단되지만 작중에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으며, 다만 지역 주민들의 여론형성에 커다란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신분임은 확실하다. 작품명은 단순히 로즈메르의 집을 가리키지 않고 그의 저택이 갖는 어둡고 황량한 분위기와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로즈메르솔롬은 배경에 그치지 않고 존재 자체가 작중 인물과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레베카: 이곳 로즈메르솔롬에서는 한시라도 편안한 날이 없어요. 항시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 다니는 것 같아요.” (P.32)

 

헬세스부인: , 아가씨, 갓난아이들이 로즈메르솔롬에서 우는 법은 없어요......어른이 되면 웃는 법도 없데요. 살아있을 동안 대체 웃는 사람이 없다고 해요.” (P.107)

 

레베카는 진보 이념의 신뢰자로서 로즈메르의 전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녀는 로즈메르의 죽은 아내 비타의 친구이다. 여기서 로즈메르와 비타, 레베카의 묘한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비타는 정신병으로 자살한 것으로 작중에서 처리된다.

 

로즈메르는 자유인을 지향한다. 사회적 관습과 이념적 억압을 떨치고 순전한 자유의지로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사고와 행동을 하는 인물이 자유인이라고 하겠다. 작중에서 로즈메르는 명석한 두뇌와 굳건한 의지를 지닌 인물로 비쳐지지 않는다. 그는 귀가 얇은 편에 가깝다. 어려서는 가정교사 브랜델에, 성장해서는 학교장인 손위처남 크롤에게 크게 의지한다. 이제 그의 의지처는 레베카다.

 

로즈메르의 전향과 레베카와의 동거(同居)는 크롤을 필두로 한 보수파로부터 사회적, 도덕적 비난을 받는다. 여기서 비타의 사망 배경에 대한 의혹이 제기된다. 비타의 자살은 순전한 정신적 발작의 소산인가 아니면 발작을 부추긴 계기가 존재했던 것은 아닌가. 이 대목에서 극 전개는 크게 소용돌이친다.

 

비타의 죽음에서 로즈메르와 레베카는 자유롭지 못하다. 남편 로즈메르와 레베카가 정신적으로 긴밀해질수록, 소외되고 아이마저 갖지 못한 비타의 자괴감은 더해간다. 로즈메르에 대한 레베카의 사랑마저 알아차린다. 자신이 남편에게 걸림돌이 될까 우려한(극중에서는 나중에 레베카의 다음 대사로 구체화된다. “당신은 그런 결혼의 암흑 속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병들어가고 있었지요.”(P.127) 비타의 선택. 이러한 사실이 두 사람의 자유인 노력의 성공 목전에서 드러나게 되며, 로즈메르는 혼란스러워한다.

 

로즈메르와 레베카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레베카는 애정을 품었지만 로즈메르는 동지애(“레베카와 내가 공통으로 믿는 남녀 간의 순수한 동지애”(P.100)로 받아들인다. 이후 그는 깨닫는다. 그것은 우정을 가장한 사랑이었음을.

 

로즈메르: 아니, 어쩌면 레베카 우리 두 사람의 결합은 마음으로 맺은 결혼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 아마 맨 처음부터. 내가 언제나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건 그 때문인 것 같아.” (P.113)

 

로즈메르와 레베카의 동반 투신이라는 충격적 결말은 의외였기에 놀라움이 더 컸다. 그들은 도덕적인 죄의식을 지녔지만 한 점 부끄럼 없을 정도로 떳떳하고 결백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스스로의 무죄를 입증할 길도 인정받을 가능도 없다. 그들의 자살은 당대 사회에서 동기, 노력, 행위의 순수성을 인정받는 것이 불가능함과 결국 자유인은 사회, 이념, 그리고 삶으로부터 떠날 수밖에 없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비타가 로즈메르를 놓아주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였듯 레베카도 로즈메르를 자유인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모든 책임을 자신이 감수하기 위하여 투신하고자 한다. 로즈메르는 삶의 주체성을 회복할 결심을 한다. 입센의 희곡에서 <유령>을 제외하면 주인공들이 패배한 적이 있었던가? 로즈메르도 레베카도 패배로 인정하지 않는다.

 

로즈메르: 난 우리의 삶의 자유를 되찾을 결심을 했소, 레베카.” (P.155)

레베카: 그건 패배가 아니에요. 전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아요.” (P.155)

 

그들은 진정한 부부로서 하나가 되어 함께 가는 길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패배자이면서 승리자이다.

 

입센은 이 작품에는 숨겨진 차원과 상징들을 빈번하게 구사하고 있다. 비타가 최후를 맞기 전에 행한 일련의 행위들, 로즈메르의 가정교사였던 진보주의자 브랜델의 변모, 그리고 레베카의 출생의 비밀들은 자체로 생각해볼 여지를 남긴다. 백모단원, 저수지와 인도교, 무엇보다 로즈메르솔렘 그 자체는 극중의 사건과 분위기를 미묘하게 암시하고 유도한다. 백모단원의 경우 다른 입센 해설책자에서는 백마의 전설로 풀이하고 있어 약간은 혼란스럽다.

 

이 책의 특장점은 충실한 작품해설이다. 통상의 일반론적 해설과는 궤를 달리한다. 상징주의 연극 관점에서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 심리에 날카로운 메스를 가하여 세밀히 분석하고 있다. 파헤친 내용은 주인공들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으며, 도출해 낸 결론도 인간은 자연이나 환경에 지배당하는 존재라는 허무주의적이면 자연주의적 시각을 지닌다.

 

* 이 책도 일찍이 절판되어 구할 길이 없다가 용산도서관에서 겨우 빌려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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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 마야의 모험 비룡소 클래식 2
발데마르 본젤스 지음, 프란치스카 솅켈 그림, 박민수 옮김 / 비룡소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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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우선 현상에 안주하지 않는 모험심과 도전정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인내일 것이다. 꿀벌 마야는 안온하고 평안한 벌집의 세계를 벗어나 빛나고 아름다운 바깥 세상에 과감히 뛰어든다. 화려함 못지않게 무수히 드리운 위험과 모험의 세계. 꿀벌 마야는 다른 여러 곤충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거미줄에 걸려 하마터면 거미 테클라의 먹이가 될 뻔한 철렁한 순간을 겪기도 한다.

 

작가는 여기에서 약육강식의 자연생태계에 대한 이해와 인정을 촉구하기도 한다. 생명은 자신의 삶을 보전하고 생식하기 위해 영양분을 필요로 하는데, 육식인 경우 누군가 타 생명체의 희생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입장에 따라 불가피하게 보거나 정반대로 매우 잔인한 처사로 비치기도 한다. 특히 희생자의 처지를 동정하거나 당사자가 그런 입장에 처하는 경우라면 특히 더할 것이다.

 

쇠파리 한스 크리스토프를 잡아먹는 잠자리 쉬누크에 대한 꿀벌의 충격과 비난은 곧바로 반박을 받는다. 값싼 인도주의적 동정이라고. 여름철에 벌집에서 수벌들이 학살당하는 현상을 지적하면서. 거미 테클라의 입장에서 보면 거미줄에 걸려든 꿀벌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야 자신의 생존 연장이 가능하므로. 반면 꿀벌의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일 수밖에 없다.

 

꿀벌 마야는 다양한 체험을 통해 자연 생태계에 존재하는 상호 존중과 배려의 태도와 함께 사랑의 가치도 인식하게 된다. 신비로운 존재였던 인간에 대한 환상이 꽃의 요정을 통해 실현하게 되고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목도한다. 그것은 사랑하는 소년과 소녀, 두 연인이었다.

 

저 모습은 지금까지 내 눈으로 본 것 중 가장 멋진 것이었어. 사람들은 서로 사랑할 때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이제 알았어.” (P.179)

 

동화답게 이 작품에는 어린 독자들을 위한 다양한 교훈이 들어있다.

 

경험이란 인생의 가장 소중한 재산이며 노력해서 얻을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마야는 생각했습니다.” (P.56)

 

결과를 보지도 못하고 물러서는 것은 정말이지 부끄러운 일이잖아요. 마야도 그런 경험은 하기 싫었지요.” (P.120

 

우리는 어떤 것을 보고 비웃을 때가 자주 있지만, 나중에 알고 보면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스워 보였던 경우가 참 많아요.” (P.135)

 

겉보기에 아름다우면서도 재미있는 동화 이야기로 받아들이지만 곰곰이 반추해 볼 대목도 있다. 먼저 인간 예찬이다. 작가는 꿀벌 마야의 눈을 통해 인간이야말로 유일무이한 가장 힘세고 영리하고 숭고한 동물”(P.150)로 찬미한다. 인간의 시각에서 인간 자신이 자연과 우주를 통틀어 가장 소중한 존재임은 사실이지만 이를 자연계 전체로 확대한다면 다른 생물과 중요성은 별반 다를 바 없다.

 

마야는 벌집으로의 복귀 염원과 여왕에 대한 측량할 길 없는 충성심을 표현한다. 이야기 속의 여왕벌은 침착하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리분별이 흔들림 없으며 인정과 포용력을 보여준다. 이상적인 지도자의 전형이다. 이런 여왕이라면 목숨을 내걸고도 헌신과 충성을 바칠 만하다. 문득 전체주의 뉘앙스가 연상되는 것은 억측으로 생각될 수 있으리라. 개인보다 집단 전체의 안녕과 생존을 중시하는 꿀벌과 개미는 전체주의에 찬동하는 대중에 비길 수 있다. 이 작품이 쓰여진 시대적 배경을 살펴본다. 아직 제1차 세계대전을 겪지 않은 제국주의 전성기 시절이며 작자의 모국인 독일에서는 비스마르크를 쫓아낸 황제 폐하에 대한 충성심이 유효하던 시절이다.

 

꿀벌 종족은 강하고 여왕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자 마야는 적에 대한 분노를 한층 더 깊이 느끼며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동족을 지켜야 한다는 각오를 다졌습니다.” (P.214)

 

이 작품은 곤충기와 교훈적 동화의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앞선 교훈들 외에 마지막으로 인상적인 장면을 소개한다. 꿀벌 마야는 꿀벌사회에 있어 사회부적응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다수의 범상한 대중들이라면 사회에서 일탈하는 꿀벌에 대한 맹렬한 비난을 정당하다고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 사회도 그렇지만 동물 사회에도 관습에 적응하지 못하는 별난 성격의 곤충이나 동물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런 곤충이나 동물에 대해서는 쉽게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그런 태도가 언제나 게으름이나 아집 때문에 생겨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런 태도는 평범한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고귀하고 좋은 것을 얻고자 하는 애타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P.148~149)

 

외톨이였던 마야가 실상 작가 본젤스 자신의 자화상이었음을 새삼 생각해 본다.

 

금년도에 꿀벌 마야라는 제목으로 이 작품이 애니메이션 영화화되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언제 짬을 내어 한번 비교 감상해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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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태양꽃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어른을 위한 동화 16
한강 동화, 김세현 그림 / 문학동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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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위한 동화의 유효성을 감히 평가하지 못한다. 정의상 모순되는 개념이지만 동화의 창작 목적을 감안하면 어른들도 간간이 동화 이야기를 읽으면 좋겠다. 재미와 아울러 생각지 못한 감성을 발견하는 때도 있다.

 

한강은 동화를 상대적으로 많이 쓰는 작가다. 그의 동화는 경쾌하고 유머 넘치는 입담을 구사하지 않는다. 밝고 화려한 분위기도 없다. 동화의 주인공은 한결같이 작고 움츠린 소위 별 볼일 없는 존재들이다. 사람이건 식물이건. 그들이 낮은 목소리로 가만가만 읊조리는 이야기는 가슴 한켠을 촉촉이 적신다.

 

이 작품에서도 담장 뒤 그늘에서 초라하게 자라는 꽃풀 한 줄기가 화자다. 음지에서 빛을 갈구하며 담장 너머 눈부신 세상을 동경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투명한 꽃잎. 소외감은 꽃잎의 아픔과 상처와 결부되어 화를 촉발한다. 그나마의 향기와 꿀마저 변질된다. 그는 그렇게 시나브로 시들어갈 운명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도 좋아.” (P.50)

 

틀림없이 그러했을 것이다, 얼굴모를 풀의 힘겨운 삶을 알지 못했더라면. 실패해도 실망하고 포기하지 않으며 희망의 씨앗을 간직한다. 성공하지 못해도 남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자신의 소박한 소망을 향해 쉼 없이 노력하는 마음자세. 불공평한 운명과 차가운 세상에 불평과 적대만 내비치지 않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대견해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

 

““넌 더 강해져야 해. 더 씩씩하게 견뎌야 해. 그리고 무엇보다,”

풀은 잠시 말을 멈추었습니다.

너 자신을 사랑해야 해.”” (P.60)

 

세상에서 가장 추하고 볼품없는 꽃이 마음을 추스르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향기와 꿀이 원래 이상으로 회복되었다. 어느덧 투명한 꽃잎은 일찍이 없었던 아름다운 꽃으로 거듭났다. “태양처럼 샛노랗고, 태양보다 눈부신 꽃”(P.102)으로.

 

잠자리 날개처럼, 해파리처럼 아니면 말미잘 촉수마냥 이상한 모양의 투명한 꽃잎은 타인이 인지와 인정을 받지 못할 정도로 미미한 존재를 가리킨다. 투명함은 비어있음을 말하므로 채워지지 않은 빈 영혼을 의미할 수도 있다. 꽃잎이 투명하게 시들거나 황금빛으로 빛나든지 그것은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한강이라는 작가의 산문에서는 운문의 향기가 풍긴다. 절제된 문체, 나직한 어조, 여운을 남기는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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