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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메르 솔롬 - 헨릭입센희곡 전집 3
헨리 입센 지음, 이주상 옮김 / 예니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다. 뭔가 알 듯 말 듯 손에 잡힐 듯 말 듯 하여 내가 이해하고 파악했다고 생각한 내용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인지 아니면 일개인의 전적인 오독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상당 부분 입센 자신에게서 비롯하는데, 그가 사회극에 신비와 상징적 요소를 가미하기 시작한 후기에 해당한다.
입센은 <민중의 적>, <들오리>에서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본격적으로 던지기 시작하였다. 당대 노르웨이의 사회와 정치적 정세를 반영하듯이 그의 작품에는 이념(보수/진보)간 갈등, 세대(구/신)간 갈등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여기에서는 크롤과 모르텐스가드가 대립적 구도에 놓여 있으며, 로즈메르는 레베카의 영향력에 의해 보수에서 진보로 전향 중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작품을 보면 이념적 갈등이 상호비방을 넘어서 물리적 대립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입센의 이른바 타락한 좌파언론인에 대한 신랄한 비난은 여전하다. 모르텐스가드가 로즈메르의 전향을 환영하면서도 그의 신앙포기는 정치적으로 불리하다고 은닉할 것을 요구하는 대목에서 그러하다.
로즈메르는 전직 목사로서 저택의 주인이다. 지주로 판단되지만 작중에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으며, 다만 지역 주민들의 여론형성에 커다란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신분임은 확실하다. 작품명은 단순히 로즈메르의 집을 가리키지 않고 그의 저택이 갖는 어둡고 황량한 분위기와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로즈메르솔롬은 배경에 그치지 않고 존재 자체가 작중 인물과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레베카: 이곳 로즈메르솔롬에서는 한시라도 편안한 날이 없어요. 항시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 다니는 것 같아요.” (P.32)
“헬세스부인: 아, 아가씨, 갓난아이들이 로즈메르솔롬에서 우는 법은 없어요......어른이 되면 웃는 법도 없데요. 살아있을 동안 대체 웃는 사람이 없다고 해요.” (P.107)
레베카는 진보 이념의 신뢰자로서 로즈메르의 전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녀는 로즈메르의 죽은 아내 비타의 친구이다. 여기서 로즈메르와 비타, 레베카의 묘한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비타는 정신병으로 자살한 것으로 작중에서 처리된다.
로즈메르는 자유인을 지향한다. 사회적 관습과 이념적 억압을 떨치고 순전한 자유의지로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사고와 행동을 하는 인물이 자유인이라고 하겠다. 작중에서 로즈메르는 명석한 두뇌와 굳건한 의지를 지닌 인물로 비쳐지지 않는다. 그는 귀가 얇은 편에 가깝다. 어려서는 가정교사 브랜델에, 성장해서는 학교장인 손위처남 크롤에게 크게 의지한다. 이제 그의 의지처는 레베카다.
로즈메르의 전향과 레베카와의 동거(同居)는 크롤을 필두로 한 보수파로부터 사회적, 도덕적 비난을 받는다. 여기서 비타의 사망 배경에 대한 의혹이 제기된다. 비타의 자살은 순전한 정신적 발작의 소산인가 아니면 발작을 부추긴 계기가 존재했던 것은 아닌가. 이 대목에서 극 전개는 크게 소용돌이친다.
비타의 죽음에서 로즈메르와 레베카는 자유롭지 못하다. 남편 로즈메르와 레베카가 정신적으로 긴밀해질수록, 소외되고 아이마저 갖지 못한 비타의 자괴감은 더해간다. 로즈메르에 대한 레베카의 사랑마저 알아차린다. 자신이 남편에게 걸림돌이 될까 우려한(극중에서는 나중에 레베카의 다음 대사로 구체화된다. “당신은 그런 결혼의 암흑 속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병들어가고 있었지요.”(P.127) 비타의 선택. 이러한 사실이 두 사람의 자유인 노력의 성공 목전에서 드러나게 되며, 로즈메르는 혼란스러워한다.
로즈메르와 레베카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레베카는 애정을 품었지만 로즈메르는 동지애(“레베카와 내가 공통으로 믿는 남녀 간의 순수한 동지애”(P.100)로 받아들인다. 이후 그는 깨닫는다. 그것은 우정을 가장한 사랑이었음을.
“로즈메르: 아니, 어쩌면 레베카 – 우리 두 사람의 결합은 마음으로 맺은 결혼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 – 아마 맨 처음부터. 내가 언제나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건 그 때문인 것 같아.” (P.113)
로즈메르와 레베카의 동반 투신이라는 충격적 결말은 의외였기에 놀라움이 더 컸다. 그들은 도덕적인 죄의식을 지녔지만 한 점 부끄럼 없을 정도로 떳떳하고 결백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스스로의 무죄를 입증할 길도 인정받을 가능도 없다. 그들의 자살은 당대 사회에서 동기, 노력, 행위의 순수성을 인정받는 것이 불가능함과 결국 자유인은 사회, 이념, 그리고 삶으로부터 떠날 수밖에 없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비타가 로즈메르를 놓아주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였듯 레베카도 로즈메르를 자유인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모든 책임을 자신이 감수하기 위하여 투신하고자 한다. 로즈메르는 삶의 주체성을 회복할 결심을 한다. 입센의 희곡에서 <유령>을 제외하면 주인공들이 패배한 적이 있었던가? 로즈메르도 레베카도 패배로 인정하지 않는다.
“로즈메르: 난 우리의 삶의 자유를 되찾을 결심을 했소, 레베카.” (P.155)
“레베카: 그건 패배가 아니에요. 전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아요.” (P.155)
그들은 진정한 부부로서 하나가 되어 함께 가는 길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패배자이면서 승리자이다.
입센은 이 작품에는 숨겨진 차원과 상징들을 빈번하게 구사하고 있다. 비타가 최후를 맞기 전에 행한 일련의 행위들, 로즈메르의 가정교사였던 진보주의자 브랜델의 변모, 그리고 레베카의 출생의 비밀들은 자체로 생각해볼 여지를 남긴다. 백모단원, 저수지와 인도교, 무엇보다 로즈메르솔렘 그 자체는 극중의 사건과 분위기를 미묘하게 암시하고 유도한다. 백모단원의 경우 다른 입센 해설책자에서는 백마의 전설로 풀이하고 있어 약간은 혼란스럽다.
이 책의 특장점은 충실한 작품해설이다. 통상의 일반론적 해설과는 궤를 달리한다. 상징주의 연극 관점에서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 심리에 날카로운 메스를 가하여 세밀히 분석하고 있다. 파헤친 내용은 주인공들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으며, 도출해 낸 결론도 인간은 자연이나 환경에 지배당하는 존재라는 허무주의적이면 자연주의적 시각을 지닌다.
* 이 책도 일찍이 절판되어 구할 길이 없다가 용산도서관에서 겨우 빌려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