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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새니얼 호손 단편선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
나사니엘 호손 지음, 천승걸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평점 :
<수록 작품>
1. 나의 친척, 몰리네 소령
2. 로저 맬빈의 매장
3. 젊은 굿맨 브라운
4. 웨이크필드
5. 야망이 큰 손님
6. 메리 마운트의 오월제 기둥
7. 목사의 검은 베일
8. 반점
9. 천국행 철도
10.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
11. 라파치니의 딸
12. 이선 브랜드
<큰 바위 얼굴>과 <주홍 글자>로 유명한 호손의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호손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새삼 모호성, 상징성, 환상성 등의 단어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는 그의 기법의 전형인 알레고리에 기인한다. <라파치니의 딸>에서 스스로 자신의 작품 성향을 “알레고리에 대한 고질적 선호”(P.251)라고 술회하는 점에서 보듯이 그의 단편 작품들에는 양의 정도에서 차이가 있을 뿐 알레고리적 특성이 다소간 반영되어 있다. 알레고리에 대한 선호는 그의 작품 특질을 정신적 또는 형이상학적으로 치우치게 만드는 한편, 당대의 종교, 특히 죄와 선악에 대한 관념, 그리고 초자연적 요소와 결부하여 작품에 음울한 판타지적 분위기를 부여한다.
<나의 친척, 몰리네 소령>의 모호성은 젊은이의 핵심적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으며, 작가 또한 의도적으로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증폭되며,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활용하여 기괴한 연상을 독자와 젊은이에게 불러일으킨다.
호손은 특히 엄격한 청교도주의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애초에 신앙의 자유를 구하기 위해 신대륙에 정착한 이주민들은 자신들의 신앙만을 추구하는 독선적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완고하고 독단적인 믿음은 타협과 관용을 불허하며 비인간적으로 흐르게 되기 쉽다. 호손은 인간 사회에서 악의 존재는 불가피함을 깊이 인식하고 엄연한 진실을 외면하는 종교의 과오를 우회적으로 또는 직설적으로 비판한다. <젊은 굿맨 브라운>, <메리 마운트의 오월제 기둥>, <목사의 검은 베일>, <천국행 철도>, <이선 브랜드>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젊은 굿맨 브라운>에서 굿맨 브라운의 혼란은 선악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전도되는 데 기인한다. 정직하고 독실한 선조는 사실 사악한 짓을 자행하였으며, 주변의 선한 사람들과 아내조차 악마의 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인간 내부의 악마적 속성은 “본성과 운명”(P.83)이며, “악은 인간의 본성”(P.85)임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굿맨 브라운처럼 세상과 단절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메리 마운트의 오월제 기둥>에서도 이러한 갈등은 이어진다. ‘오월제’ 자체가 기독교 이전의 이교적 요소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호손은 메리 마운트 주민을 타락한 것으로, 이웃 청교도 주민을 경건하다고 표현하는데, 조금만 더 들어가 보면 역설적 문구임을 알게 된다. 메리 마운트 주민은 즐겁고 쾌활한 반면, 청교도 주민은 “음울하고 불행한 모습”(P.126) 또는 “엄격하고 냉혹”(P.127)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연의 자태는 무엇일지 생각하게 만든다.
<목사의 검은 베일>에서 후퍼 목사의 검은 베일 한 조각이 던져주는 의미 역시 인간에게 드리어진 선과 악에 대한 질문이다. 단순한 검은 베일로 사람들은 목사를 무서운 존재로 인식하며 두려워하고 꺼린다. 베일에 대한 두려움은 작품 전개의 추동력이다. 검은 베일은 실체적으로는 어둠과 단절을 가리키지만, 상징적으로는 인간의 죄악과 악마성을 의미한다.
“사람의 눈으로 이 베일이 걷히는 것을 보지는 못할 것이오. 이 음산한 베일은 나와 이 세계를 떼어놓아야만 하오.” (P.147)
후퍼 목사는 베일의 숙명적 속성을 선언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검은 베일은 목사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보시오!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검은 베일이 씌워져 있지 않습니까!” (P.156)
<천국행 철도>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차용한 현대적 알레고리다. 과거와 현대, 허영의 도시 대 천국의 도시, 열차 순례자 대 도보 순례자의 대비는 올바른 신앙의 자세를 되돌아보게 한다. 천국행으로의 순례를 수월하게 하는 철도가 있는데, 흙먼지와 땀에 지저분하고 힘들게 도보를 하는 두 순례자(옳은 일 고수하기, 천국 향해 걷기)는 시종 조롱과 폭소의 대상이 된다. 마지막의 반전이 극적인데, 천국행은 안락과 쾌락으로는 닿을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석회 구이 <이선 브랜드>를 사로잡은 관념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집착이다. 하늘이 자비를 베풀 수 없는 유일한 죄악, 즉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탐구와 실행은 곧 신에 대한 도전에 다름 아니다. ‘용서받지 못할 대죄’가 기독교에서 존재할까?
“인간에 대한 우애와 신에 대한 존경의 염을 물리쳐 이기고 자신의 강력한 요구에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그런 지적 죄악이 바로 그것이오. 영원한 고뇌의 응보를 받아 마땅한 유일한 죄악이지!” (P.308)
호손은 인간의 지적 오만을 경고한다. 지식과 과학의 진보에 대한 무조건적이며 무한한 신뢰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한다. 신이 사라진 마당에 신에게서 용서받거나 용서받지 못하는 죄악을 판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선 브랜드는 악마가 되었다.
종교와 신앙에 대한 성찰과 함께 그의 주제 의식은 과학과 예술에 대한 의미 추구로 확대된다. <반점>,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 <라파치니의 딸>이 이에 해당하는 작품군이다.
<반점>은 계몽주의와 근대 과학문명의 발전에 따른 무비판적 과학 추종에 대한 경종이자 과학적 낙관주의와 오만에 대한 강력한 경고다. 에일머는 과학자로서 아내의 뺨에 아로새겨진 진홍빛 손 모양의 반점을 견딜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유한성과 한계를 상징하므로 불안과 두려움을 느껴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신의 손길이 없어도 완벽과 완전을 구현할 수 있다. 에일머의 실패와 아내의 죽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인간은 자신의 불완전성을 부인하지 말고 자체로 수용해야 한다. 그것이 호손이 뜻하는 “좀더 깊은 지혜”(P.184)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에일머의 조수인 아미나다브가 오히려 현명하다.
<라파치니의 딸>의 비극적 결말도 과학적 기술의 실패에 결부되어 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결핍되어 있는 과학의 추구가 가져오는 참혹한 교훈을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깨달은 바 있다. 과학적 실험을 위해 인간 희생을 거리끼지 않는 라파치니 박사. 희대의 독녀가 된 그의 딸. 베아트리체의 절규와 탄식. 그의 아버지는 자식이 과학적 대상을 뛰어넘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인간이 부재한 과학의 무의미성도.
상기 작품에 비하면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의 주인공 오웬은 행복한 인물이다. 그는 기술자로 머물기보다 예술가를 지향한다. 예술가의 작업은 “아름다움의 정신 바로 그것을 형태로 만들어 움직이게 하려는 것”(P.218)이다. 오웬과 댄포스는 작중에서 각기 정신 대 육체, 예술 대 기술을 체현하는 인물이다. 세상은 예술과 예술품은 찬미하지만 예술가와 예술 행위는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예술가의 정신은 높지만 그들의 주위는 아무도 없다. 늙은 시계 제조공과 그의 딸 애니조차도.
오웬의 실패와 방황, 재도전은 예술가의 고뇌를 표상한다. 오웬의 나비는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의 지력과 상상력과 감성과 영혼의 구현”(P.243) 결과다. 회의적인 아기의 손에 소멸당하는 나비의 운명은 차라리 상징적이다. 예술적 상징물은 유한하지만 예술과 창조의 정신은 영속적이다. 그래서 예술가는 “모든 고아한 정신적 행위의 보상이란 다른 데서 구할 수 없고 오직 그 자체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사실”(P.245)을 새겨야 하지 않겠는가.
<나의 친척, 몰리네 소령>과 <로저 맬빈의 매장>, <웨이크필드>, <야망이 큰 손님>은 인간 운명의 초자연적 불가해성에 대한 탐구의 산물이다. 합리와 이성은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에 압도된다. 앞의 두 작품에서는 초기 개척민들 사이에 자리 잡은 이교도적, 미신적 요소가 발견된다. 특히 후자에서 로이벤의 선택은 불가피한 경우이지만 저주를 받게 되고 피갚음의 희생을 요구하는 초자연적 현상이 개입하게 된다.
“같은 운명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의 유대가 단순한 혈육의 그것보다 더 강한 것이 아니겠는가?” (P.107)
이렇게 암시적 성향을 <야망이 큰 손님>은 작품 내내 드러낸다.
“높고 추상적인 야망”(P.107)을 품고 있는 젊은이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삶과 이름 모를 죽음을 견딜 수 없어 한다. 예언적 운명의 결과는 그래서 은근한 조소와 냉소마저 느낄 수 있다. 죽음의 운명을 언제나 삶의 주변을 맴돈다. 죽음은 맹목적이며 개인의 소소한 희구를 유념하지 않는다는 것.
<웨이크필드>는 문제적 인물이다. 립 밴 윙클이 타의에 의해 이십년간을 세상과 떨어진 반면 웨이크필드는 스스로 “세상과 절연하여 사라져버리고, 죽은 사람들 틈에 끼지도 못하면서 산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의 위치나 그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모두 포기해 버리려 한 것이었다.”(P.100). 그의 존재는 살아 있지만 죽은 것이고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현상이 되어 버렸다. 인간이 자신과 사회로부터 떨어져 겉도는 상태를 우리는 인간소외라고 부른다. 소외는 실존의 질문을 던진다. 그런 면에서 호손은 시대를 앞선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라고 하겠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호손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는데, 마냥 외면만 할 수 없어서 이번 기회에 그의 대표작들을 섭렵하려고 한 첫 번째 시도에서 큰 인상을 받았다. 그는 섣부른 선입견과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다. 알레고리 기법, 추상성과 모호성으로 대변되는 분위기, 초자연적 요소, 종교와 신앙의 본질에 대한 질문, 과학과 인간의 관계 설정에 대한 제기 등이 한데 어울려 호손을 우울한 예언자로 만들고 있다. 또한 경쾌하거나 화려하지 않은 차분하고 나직한 문체도 여기에 일조하고 있다. 단번에 확 이끌리는 재미는 없지만 은근하게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묘미를 지닌 작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