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 지만지 희곡선집
데니스 폰비진 지음, 조주관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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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폰비진의 대표작이자 당대 풍자 희극의 걸작으로 일컬어진다. 표제 미성년은 미성년 미트로판을 가리키는 동시에 당대 러시아 사회 수준이 미성년 단계임을 뜻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풍자를 하려면 풍자 대상이 필요한데, 여기서는 프로스타코프 일가가 그 역할을 떠맡는다. 프로스타코프와 그의 아내 프로스타코바 여사, 아들 미트로판, 처남 스코티닌. 작가는 대놓고 비웃기 위해 이들의 성격을 극단적으로 유형화한다. 시골 지주 귀족, 극도로 무식한데다 하인과 농노 착취를 기본권으로 인식할 정도다.

 

(프라브딘) 안 됩니다. 부인, 누구에게도 그들을 학대할 권리는 없소이다.

(프로스타코바 여사) 그럴 권리가 없다고요! 귀족이 하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 그럼 귀족의 특권에 관한 법률은 대체 뭐예요? (P.152, 54)

 

집안의 실권을 틀어쥐고 남편을 때리기도 하며 온갖 횡포를 거리낌 없이 자행하는 프로스타코바 여사는 무식의 극치이자 그것을 오히려 당당하게 여길 정도이며,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가족과 신의도 일고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고아가 된 소피야를 납치하다시피 끌고 와서 남동생과 결혼시키려고 하다가 삼촌 스타로둠이 막대한 유산을 남길 거라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아들 미트로판과 맺어주려고 표변한다. 스타로둠이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자 납치하려는 대담한 범죄행각을 벌일 정도다. 이런 그녀를 손쉽게 좌지우지하면서 기생하는 브랄만이 오히려 대단하게 보일 정도다.

 

그런 그녀가 꼼짝 못 하는 존재가 아들 미트로판인데, 극 중에서 그는 완연한 바보로 행동한다. 가정교사 셋이 달라붙어 수년이 지나도 글쓰기와 셈하기 실력이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아들을 너무나 애지중지하는 프로스타코바 여사는 오히려 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공부할 가치가 없다고 억지 주장이다.

 

(프로스타코바 여사) 학문이란 그런 게 아니야. 너를 힘들게 한다면, 모든 게 필요 없지 뭐. 돈이 없다면 뭘 셀 수 있겠니? 돈이 있다면, 파프누티치 없이도 잘 셀 수 있다. (P.91, 37)

 

어떤 의미에서 미트로판 역시 희생자다. 엄마의 과중한 기대와 풍요로운 지주로서의 삶 속에서 어쩌면 수더분하게 살아갔을 수도 있었을 그는 만사가 실패하고 집안이 몰락하게 되자 결국 엄마에게 폭발한다.

 

(미트로판) 엄마, 따라다니면서 날 귀찮게 좀 하지 마, 젠장...

(프로스타코바 여사) 아니 너도! 너마저 날 버리는구나! ! (기절한다.) (P.163, 58)

 

작품의 가장 마지막 문장으로 희극 전체의 주제를 압축하는, 스타로둠이 이게 바로 악덕의 정당한 결과로다!”(P.164, 58)라고 탄식하는 악덕은 비인간적인 농노제와 잘못된 교육제도이다.

 

누나 못지않게 악독하고 무식한 스코티닌은 프로스타코바 여사와 유사하지만 독특한 행동 패턴을 보이고 있어 흥미롭다. 그는 사람보다도 돼지에 더욱 열광한다. 그가 내뱉는 주요 대사는 항상 돼지와 관련되어 있다. 그가 소피야와 결혼하고자 하는 이유도 그녀 자체보다 그녀 마을의 돼지가 유달리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 폰비진은 노골적으로 그와 돼지를 동격화한다.

 

(스코티닌) 그것도 아니에요. 내가 진짜 바라는 건, 그녀의 마을에 살고 있는 거예요.

(프로스타코바 여사) 그게 뭐지?

(스코티닌) 누나, 난 돼지를 좋아해요. 이 주변 마을에 돼지들이 얼마나 큰지. (P.18, 15)

 

(스코티닌) 그 돈으로 난 온 세상의 돼지를 다 살 거요. 듣고 있소? 난 모든 사람에게 소문을 낼거요. 그곳에 돼지들만 살고 있다고. (P.41, 23)

 

이들 일가와 반대 측에 놓인 인물들은 스타로둠, 프라브딘, 밀론이다. 소피야와 더불어 이들은 성년러시아를 이루기 위해 갖추어야 할 고결한 정신과 높은 품격, 올바른 양심, 분별력 있는 용기 등 미덕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에서 상당히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스타로둠의 도덕론은 응당하면서도 지루하다. 그는 프라브딘과, 밀론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지혜와 영혼을 알아보고 교감을 한다. 관리로서, 군인으로서 각자의 자리에서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본연의 역할을 다할 것을 기대하는 모습은 단지 스타로둠뿐만 아니라 이 희극을 접하는 모든 독자와 관객이 마찬가지이리라. 나아가 스타로둠은 도덕적이고 계몽적인 군주의 의무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과연 정치적 성격을 지닌 대사다.

 

(스타로둠) 왕관을 쓸 자격이 있는 군주는 국민들의 영혼을 고양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P.142, 51)

 

다만 과도한 설교와 훈계가 이 극을 교훈극 또는 도덕극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음은 분명하다. 해설에 따르면 당대 관객은 오히려 스타로둠의 장광설에 열광하였다고 하는데, 시대적 사회적 환경이 오늘날과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새삼 느끼게 한다.

 

오늘날 이 작품의 가치는 부정적인 인물 군상들의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당당한 자기 옹호와 과시에 있다. 그들이 자부하고 드러내는 말과 행동은 그들 자신에게는 더없이 훌륭하고 뛰어난 것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독자에게 그들 스스로의 결점과 악덕을 한층 두드러지게 보여 줄 뿐이다.

 

작품 자체의 정치적 풍자성을 논외로 한다면 차라리 앞서 읽은 <여단장>이 더욱 흥미롭다. 인물의 과도한 전형화라는 공통점을 지니면서도 보다 인간적이며, 모든 인간이 제각기 약점을 지니고 있음을 만천하에 폭로하는데 독자는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무시하거나 일방적으로 비웃지 못하는 묘한 연민의 감정을 품는다.

 

충실한 작품해설은 역시 높이 평가하고 싶다. 부록의 ‘18세기 러시아 연극 이해<미성년>에 실린 것과 같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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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중세 파블리오 선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장 보델 외 지음, 김찬자 외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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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앞선 중세 소극과 마찬가지로 책[작품]을 읽고 난 감흥보다는 소개 자체에 더 큰 의의를 두고 있다. 내가 참고하는 <세계문학사 작은사전>(김희보/가람기획)파블리오를 이렇게 적고 있다.

 

파블리오는 주로 13세기에 유행한 약 150종 가량의 각각 독립된 운문으로 씌어진 이야기로서, 짧은 것을 그 특색으로 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콩트의 시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P.80)

 

이 책은 프랑스 중세에 유행했던 파블리오 작품을 수록하고 있는 국내 유일한 번역본이다. 해설에 따르면 비교적 잘 알려진 20편을 엄선하였다고 하니 대표적인 파블리오는 모두 수록하고 있다고 봐도 되겠다. 네 명의 옮긴이의 노력뿐만 아니라 전혀 의외로 화려한 표지와 삽화를 채용한 출판사에 감사를 드린다.

 

파블리오에서는 세련된 궁정풍 문학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다양한 계층의 삶이 소개된다. 이문학이 주는 즐거움은 이야기에 산재되어 있는 사실적인 묘사에 있다. (P.258)

 

파블리오에 대해 보충하자면, 8음절 운문체 형식의 웃음을 주는 짧은 이야기라는 점이다. 주로 음유시인들이 지어서 낭송하였기에 운문을 택하였으며, 왕공에서 주로 대중에 이르기까지 청중 앞에서 구술되었으므로 흥미진진함과 재미는 필수 요소라고 하겠다. 작가들은 예외는 있겠지만 서민들과 삶과 호흡을 같이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므로 그들의 작품에는 중세 서민들의 삶의 양태가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따라서 파블리오의 내용은 저속하고 음란하며 감정 곡선이 솔직하다. 인물들의 언행도 품위와는 무관하게 야비하고 노골적이며 본능과 욕구에 충실하다.

 

본능과 욕망 실현을 위해 인물들은 체면과 도덕을 가리지 않는다. 필요하면 상대방을 기만하기 일쑤고 그것은 작품 속에서 상찬받아 마땅한 덕목이 되기도 한다. 남의 재물을 빼앗고 나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불철주야 속임수를 노리며, 남의 여인을 유혹하고 탐하기 위해 야밤 잠행을 무릅쓰는 망신스러운 행동에는 농부는 물론 신학생과 경건한 성직자도 예외는 없다. 수록작 중에는 특히 성직자들의 여색과 물욕에 관련한 내용이 많은데 성직자의 위선에 대한 반감과 함께 실제 성직자들의 행태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남을 속이는 데 특별한 목적 없이 단순히 즐거움과 재미를 노리는 일도 있으며, 구두쇠 상대방의 불친절에 강력한 보복을 날려서 통쾌함을 구하는 이야기도 있다. 언어유희에서 비롯된 착오를 소재로 웃음을 추구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인물들의 면면을 나열하면, 장님, 성직자(신부/주교 등), 푸줏간 주인, 매춘부와 기둥서방, 부르주아 여인, 기사, 도둑, 농부, 영국 왕, 신학생 등 각층이 전부 포함된다.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폭소를 터뜨릴까? 아마도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인물이 위선의 가면을 벗고 까불다가 된통 창피를 당하는 장면에서 시원한 웃음을 쏟아내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성()과 관련한 내용이 많다는 것은 당연하리라. 누구나 원하고 좋아하지만 은밀하게 이루어지며 누구에게는 금단의 영역인 그것. 기독교가 지배하는 엄숙한 중세 사회라고 해서 서민들마저 근엄하게 도덕적이라는 기대는 금물임을 파블리오는 보여 준다. 남녀를 불문하고 인물들은 기회 있을 때면 성적 쾌락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아내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강조하는 일부 작품은 특히 여성의 외도 우려에 전전긍긍하던 남성들의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 없음을 알려 준다. 물론 윤리의식에 철저한 인물도 있기에 아무 데나 들이대면 안될 텐데 일순간의 즐거움을 도모하다가 앞뒤 가리지 않다가 호되게, 심지어 목숨마저 잃는 딱한 처지에 놓인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개별 작품을 유형별로 잠시 살펴보면 <콩피에뉴의 세 장님>은 세 장님과 신부, 그리고 여인숙 주인을 속이는 교활한 성직자를 다룬다. 이처럼 성직자가 사건을 일으키거나 단초가 되는 이야기는 <아베빌의 푸줏간 주인> <염색된 사제> <에스토르미> <사제와 알리송> <바이열의 농부> <브뤼냉, 사제의 암소> <성당 관리 수도사> <당나귀의 유언> <성당을 세 바퀴 돈 부인>이 해당한다. 신학생도 같은 범주로 취급하면 <공베르와 두 신학생> <오를레앙의 부르주아 부인>도 마찬가지다.

 

()을 제재로 한 이야기는 <아베빌의 푸줏간 주인> <프로뱅의 부아뱅> <머리 타래> <염색된 사제> <에스토르미> <사제와 알리송> <바이열의 농부> <공베르와 두 신학생> <오를레앙의 부르주아 부인> <성당 관리 수도사> <성당을 세 바퀴 돈 부인>이다.

 

아내가 남편을 속이는 내용도 제법 있는데, <아베빌의 푸줏간 주인> <머리 타래> <> <바이열의 농부> <오를레앙의 부르주아 부인> <성당을 세 바퀴 돈 부인> <의사가 된 농부>가 그것이다. 남성 지배 구조를 뒤엎는 전복의 미학이 여기에 있다.

 

속임수, 사기, 기만 요소가 담긴 작품은 수록작 거의 모두라고 할 만하다. 이런 요소가 없는 드문 이야기가 <에튀라> <옹트의 가방> <당나귀를 모는 농부>. 언어유희가 두드러지는 작품은 <에튀라><옹트의 가방>을 들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인상에 남은 파블리오로, <아베빌의 푸줏간 주인>은 선량한 푸줏간 주인이 욕심 많은 사제에게 철저한 복수로 되갚으며, <에스토르미>는 유부녀를 넘보던 세 사제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가운데 에스토르미가 고군분투하며, <성당 관리 수도사>도 비슷하다. <에메와 바라>는 도둑 형제와 정직한 농부 간 치열한 두뇌 대결이 펼쳐진다. <의사가 된 농부>는 아내를 지키기 위해 무리수를 둔 농부가 아내의 꾀에 넘어가 위기를 겪고 부유하게 되고 마침내 아내를 부드럽게 사랑하게 된다는 드물게 보는 부부의 해피엔딩을 보여 준다.

 

파블리오 작가들의 진정한 의도는 <콩피에뉴의 세 장님>이 밝힌 것처럼, 교훈을 주는 것보다는 삶에 대한 즐거움을 주고 실존의 불행을 잊게 만드는 것이다. (P.262)

 

이 점을 고려한다면, 파블리오 작품이 문학성이 부족하다는 비판과 더불어 중세 서민 사회 이해를 향한 열린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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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단장 지만지 희곡선집
데니스 폰비진 지음, 조주관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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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킨이 러시아 문학을 세계무대에 등장시킨 최초의 문호이지만, 그가 맨땅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다. 폰비진은 푸쉬킨에 앞서 희곡으로 가장 큰 명성을 얻은 18세기 러시아 작가다. 폰비진의 대표작은 <여단장><미성년>이라고 하는데, 두 편 모두 희극이라는 점이 독특하며 푸쉬킨과 다른 면이다.

 

특이한 표제는 이 작품이 여단장 가족과 고문관 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되기에 붙인 것처럼 보인다. 여단장 부부와 고문관 부부는 시골에서 비슷한 신분으로서 교류하며 자신들의 아들과 딸을 결혼시키려고 한다. 딸은 사랑하는 남자가 있지만, 가난하기에 청혼을 거절당한 처지다. 흔한 관계의 구성으로 보이지만, 작가가 힘주고 있는 대목은 극적 구성과 대사의 깊이가 아니다. 고문관의 딸 소피야와 도브롤류보프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은 죄다 전형화된 희극적 속성을 띠고 있다. 다소 인위적이고 기계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희화화는 어쩌면 이 작품을 읽는 묘미가 될 수 있다.

 

가부장적 여단장과 금전 지상주의를 신봉하는 아내, 프랑스풍에 매몰된 아들. 이해타산에 재빠른 고문관과 생활 무능력이며 우아하고 고상함을 추구하는 아내. 이들이 벌이는 대조적인 대사와 행동의 교차와 맞부딪힘이 흥미롭다. 이런 유형의 작품을 탐탁잖아 하는 일부 독자를 제외하면 말이다.

 

(아들) 내 불행은 단지 당신이 러시아인이라는 거예요.

(고문관 아내) 나의 천사여, 물론 그것은 내게도 무서운 파멸이지요. (P.53, 26)

 

일차적으로 프랑스에 영혼을 팔린 아들이 말끝마다 불어를 사용하고 잘 이해하지 못하는 주위 사람을 살짝 무시하는 태도, 불어를 모르는 여자랑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은 작가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명백하다. 이것은 단순한 애호의 수준이 아니라 자신이 러시아인이라는 사실을 불행시하고 있을 정도다. 여기에 프랑스를 무조건 숭상하는 고문관 아내의 짝짜꿍이 이어지다 보니 예비 사위와 예비 장모가 오히려 눈이 맞는 지경에 이른다.

 

(고문관) 당신 부인보다 더 현명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여단장) 조금 안타깝기는 하지만, 당신 부인이 가장 현명하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소. (P.105, 47)

 

여단장은 우아하고 고상한 고문관의 아내에게 마음이 끌리니 졸지에 아버지와 아들의 삼각관계가 형성되는 막장 구조다. 고문관은 자기와 생활 코드를 맞아떨어지는 여단장 아내에게 마음이 끌린다. 그녀에게 구애하나 문제는 여단장 아내는 금전 관련 사안이 아니면 도무지 이해 못하는 형국. 이렇게 비틀린 사랑의 엇갈림이 난무하기에 도덕적 기준으로는 썩 마뜩잖다. 그런 면에서 소피야와 도브롤류보프는 작품 내에서 둘뿐인 긍정적인 인물군이지만, 흥미 측면에서만 보면 별로 흡인력이 없다.

 

그 외에도 여단장의 거친 폭력성이 반복되어 나타남을 비판할 수 있고, 고문관의 입을 빌어 누구도 해독하지 못할 글을 쓰는 서기라든지 판사와 친해지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는 등의 당대 러시아의 치부를 사정없이 까발린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너무나 전형적이고 상투적이기에 당혹스럽다. 등장인물은 첫 막부터 끝 막에 이르기까지 한 표정의 가면을 쓴 채 획일적으로 무대를 돌아다닌다. 무대 밖 관객의 역할은 극작가가 원하는 대로 어리숙하고 희극적인 인물을 마음껏 웃어주면 그걸로 족하다. 폰비진은 혹시 관객에게도 등장인물 못지않은 전형적인 역할을 배정한 것이 아닐까.

 

고전극의 전형성에도 불구하고 <여단장>이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인물의 성격화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P.142-143, 해설)

 

낯선 작가, 낯선 작품이므로 해설이 풍부하다. 작품해설과 작가소개는 대부분 책에 있기에 새삼스럽지 않지만 작품해설의 양과 질은 상당하다. 이에 따르면 프랑스풍에 맹목적으로 빠져드는 세태에 대한 풍자, 그리고 인간의 속물성에 대한 비웃음이 작품에서 두드러진다고 한다. 서로들 흠결이 있음에도 자신은 잘난 체하고 타인을 마음껏 비웃는 등장인물들을 보면서 독자는 이전투구 내지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 나무라는 사례를 여기서 확인하게 된다.

 

부록으로 <18세기 러시아 연극 이해>는 러시아 연극의 발전과정을 개술하고 18세기에 수마로코프를 시작으로 크냐지닌, 폰비진을 위시하여 러시아 연극이 어떻게 근대화하였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서술하고 있어 작품 배경 이해에 매우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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헵타메론 : 열 번째 이야기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 지음, 이다희 옮김, 이다혜 해설 / frame/page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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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메론>은 원체 유명하고 여러 번역본이 나와 있지만, 이것의 형식을 모방한 16세기의 <헵타메론>은 문학사에서나 등장할 뿐 그동안 번역본이 없기에 실체를 알 수 없는 작품이었다. 수년 전 번역본이 나왔는데, 뜬금없이 달랑 10번째 이야기만 싣고 있다. 옮긴이도 중세 문학의 전공자가 아니라 기획 의도가 궁금하였기에 기획자의 글을 확인해본다.

 

이 책은 72편의 단편이 담겨있는 <헵타메론> 중 열 번째 이야기만을 새롭게 엮은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루카 구아다니노, 2017)과 영화의 원작인 소설 <그해, 여름 손님>(안드레 애치먼, 2007)에서 중요한 소재로 언급됩니다. (P.7, 기획자의 글)

 

영화 개봉에 맞추어 원작의 소개 차원에서 출판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쨌든 단편적이나마 원작의 내용을 접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이 책을 읽는다. 솔직히 말해서 내용 자체는 그다지 독특하거나 새롭지 않다. 중세 배경으로, 귀부인과 기사의 궁정식 사랑을 다루고 있다고나 할까. 다만 부분적인 일화가 아니라 주인공 아마두르와 플로리다의 슬픈 사랑과 생을 오롯이 담고 있는 점에서 차별점이 있다.

 

아마두르는 플로리다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고 추후 남편이 아닌 연인의 자리를 얻고 싶었다. (P.30-31)

 

아마두르는 플로리다를 사랑하지만, 신분상 차이로 결혼을 꿈꿀 수는 없기에 연인으로 남기를 꿈꾼다. 플로리다 가까이에 머물며 그녀의 얼굴을 날마다 볼 수 있고, 그녀와 스스럼 없이 친밀하게 대화하며 정서적 교감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자체로서 충분히 만족스럽고 행복하겠다는 아마두르. 신붓감도 그런 까닭에 플로리다와 가까운 아반투라다를 고르는 대목에서는 대단한 노력에 감탄하면서도 치밀함과 집착의 실마리마저 엿보인다.

 

서두에서 아마두르는 빼어난 인품과 태도, 외모를 지닌 젊은이로 소개되는데,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독자는 그가 선행과 악행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게 되는 장면을 마주치게 된다. 사랑의 집착은 이렇게 훌륭한 영혼마저 변질시키는 마력을 지님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아내의 죽음으로 더 이상 플로리다 가까이 머물 수 없게 되자 그는 이성을 잃는다.

 

플로리다에 대해 숨겨온 욕망, 그리고 더는 그와 교제할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에 휩싸인 아마두르는 승부수를 던져보기로 결심했다. 플로리다를 아주 잃어버릴 각오를 하고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P.59)

 

원치 않는 결혼에 대한 실망감으로 아마두르와 명예로운 사랑으로 상실감을 채우려던 플로리다로서는 아마두르와의 육체적 관계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처럼 사랑을 둘러싼 영과 육의 대조성은 대립과 갈등으로 이어지기 쉽다. 플로리다는 아마두르에게 실망하고 그와 냉랭하게 거리를 둔다.

 

아무튼 이제 됐습니다. 당신에게 약간의 선의라도 있다고 생각했던 내가 너무 경솔했다면, 이제는 진실을 알 때가 되었지요. 그 덕분에 당신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고요. (P.67)

 

사랑의 실패는 집착을 유발하고 이는 이성과 도덕의 제어를 벗어난다. 아마두르는 이후 플로리다를 갖기 위해 여러 수단을 쓰고 강제로라도 그녀를 범하려고 하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고 기독교 기사로서 이슬람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는다. 남편과 연인을 동시에 잃은 플로리다는 수녀가 되고 만다는 슬픈 결말.

 

마지막 장면은 이야기를 들은 참견인들의 논평이다. 무엇보다 아마두르를 어떤 인물로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 각자 의견을 개진한다. 플로리다를 강제로 겁박한 점은 옳지 않기에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 혹자는 아마두르에게 매정한 플로리다를 비판하기도 한다. 그처럼 자신에게 성실하게 봉사한 기사에게 가혹하다는 것이다. 당대 많은 귀부인이 기사 연인을 두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한편 플로리다가 아닌 스페인의 기독교 기사로서 프랑스와, 그리고 이슬람과 전투에서 용맹을 떨치고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한 행동에서 높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원작을 언급한 소설과 영화를 보지 않았기에 어떻게 변용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개인적으로 플라토닉 러브는 남녀 사이에 일반화할 수 없다는 의견이다. 더군다나 한창 청춘인 선남선녀는 정신과 육체가 하나일 때 진정한 사랑을 이룰 수 있기에, 아마두르와 플로리다는 애초에 불가능한 길을 택한 것이다. 사랑의 호르몬이 분출되는 순간 이성은 마비되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그 뛰어난 아마두르가 타락하는 과정을 지켜봐라.

 

선의의 피해자도 생기게 마련이니, 아반투라다의 삶은 과연 행복하였을까. 아내의 사랑을 얻지 못한 카르도나 공작은 어떠하였을지.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열 번째 이야기는 남녀 사이의 엇갈린 사랑의 귀결을 이야기함을 깨닫게 된다.

 

덧붙인다면 아무쪼록 <헵타메론>의 온전한 번역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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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중세 소극집
김찬자 지음 / 연극과인간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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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 작품>

빨래통

파테와 타르트

메트르 미멩 학생

누구의 아들도 아닌 쥬냉

피에르 파틀랭 선생

악마가 지옥으로 영혼을 가져간 방앗간 주인의 소극

 

내친 김에 또 다른 프랑스 중세 소극집을 읽는다. 수록작 6편 중 2편은 앞서 읽은 책과 중복이다. 앞선 책은 운문 형식을 살리려고 노력한 반면, 이 책의 옮긴이는 구어적이고 산문적인 번역”(P.8)을 택하였다. 가급적 원문을 존중하여 운문체가 낫겠지만 어설프면 오히려 못하니 순전히 내용 전달의 측면에서는 장단점이 있으니 선택의 사안이리라.

 

이 책에 실린 소극을 통해서 현대의 일반 독자가 기대하는 건 물론 예술적 감흥은 아닐 것이다. 현대에도 통용되는 통시대적 보편성도 당연히 아니다. 소극을 읽으면서 정제되지 않고 날것 그대로의 중세 서민들의 삶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사서를 통해 활자화되고 박제화된 기술 방식으로서는 도저히 얻기 어려운 미덕이다.

 

중세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유추해 보자면, 음탕함과 속임수가 노골적이며 의외로 매 맞는 남편이 자주 등장한다. 오쟁이 진 남자는 단골 소재이며, 신부와 변호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함도 알 수 있다. 악마조차도 두려움보다는 우스갯거리로 전락할 정도다. 어쩌면 이들은 모두 중세 민중에 국한할 것 없이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 본연의 거짓 없는 민낯일 것이다.

 

중세 기독교적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매 맞는 남편의 장면은 오히려 신선하다. 이것이 실제의 반영인지 아니면 현실에 대한 보상 심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소극 내에서는 흥미로운 설정이다. <빨래통>이 대표적이지만, <악마가 지옥으로 영혼을 가져간 방앗간 주인의 소극>에서도 병든 주인은 신부와 외도를 즐기려는 부인에게 애처롭게 두들겨 맞는다.

 

음탕, 음란과 외설은 사실 한 끗 차이다. 적당한 음담이 대화와 문학에서 분위기를 흥미롭게 끌어가는 효과는 무시할 수 없다. 서민들의 언행에서는 종교적 엄숙주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만큼 성에 솔직하다는 평도 가능하다. <빨래통>에서 아내는 남편 자끼노에게 적어도 하룻밤에 대여섯 번”(P.17, 2)의 봉사를 요구한다.

 

(미멩) 아버지! 엉덩이가 몰랑몰랑한데요.

(라울 마쉬) 어쨌든 그 아이가 숫처녀라는 것은 내가 보증하지.

(교사) 조심해! 정신 나갔어? 젖가슴이 몰랑몰랑할 텐데. (P.55, 8)

 

<메트르 미멩 학생>은 이색적인 소재를 다루는데, 학생이 라틴어 공부에 너무 몰두하다가 그만 모국어를 까먹었다고 하는 설정이다. 그에게 다시 모국어를 되살려주려는 여러 노력이 유머러스하게 전개된다. 마지막 장에서 미멩이 약혼녀를 둘러메면서 이어지는 대목이 성적 골계미를 담고 있다. 현대의 도덕관이 아니라 당대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너그러움이 요구된다.

 

<파테와 타르트>, <피에르 파틀랭 선생>, <악마가 지옥으로 영혼을 가져간 방앗간 주인의 소극>의 공통점은 바로 사기, 즉 속임수에 있다. 전자의 두 편은 사기를 친 당사자가 처음엔 멋지게 성공하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자기가 된통 당한다. 특히 변호사 파틀랭 선생은 만만찮은 옷감 가게 주인을 힘겹게 속여넘기고 득의양양하고, 옷감 가게 주인과 양치기의 소송도 승소를 거둔다. 절정의 순간, 그는 만만하게 보았던 양치기에게 하릴없이 속임을 당하고 만다. 이 작품은 중세 소극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후자의 방앗간 주인 이야기는 가톨릭 신부의 위선적인 음란함을 드러냄과 동시에 소극의 소재로 각종 악마를 등장시킨다. 부인과 신부에게 수세에 몰리고 죽음도 멀지 않게 된 주인의 영혼을 가져오기 위한 어리숙한 악마 배리트의 행동을 어처구니없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출구가 하필이면 항문이기에 생기는 해학적인 장면은 시원하게 용변을 보는 주인과, 기뻐서 신나게 가방에 영혼을 담아가는 악마가 대조적이기에 비롯한다.

 

소극의 내용과 주제가 항상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것만은 아니다. 소극의 작가 중에는 꽤나 높은 지성을 가진 인물도 있는데, <피에르 파틀랭 선생>은 이것에 대한 입증이다. 끈질긴 옷감 가게 주인을 따돌리기 위해 혼수상태에서 헛소리 연기를 하는 파틀랭 선생은 다양한 언어로 문장을 지껄인다. 옷감 가게 주인에게는 헛소리로 들리지만, 일부 지적인 독자에게 작가의 수준을 과시하는 의도도 있다고 하겠다. 5장에서 그가 구사하는 외국어와 사투리는 다음과 같다. 리모주 사투리, 피카르디 사투리, 플랑드르어, 앵글로 노르망어, 브르타뉴어, 로렌 사투리, 라틴어.

 

(쥬냉) 나는 아버지의 아들도 어머니의 아들도 아니라는 거지. 제기랄! 결국 쥬냉이 쥬냉이 아니라는 말인 셈이야.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이야? 어릿광대 자노? 아니지! 나는 아무의 아들도 아닌 쥬냉이야. 내가 존재하는 건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군. (P.72, 9)

 

<누구의 아들도 아닌 쥬냉>은 웃음 속에 작가의 날카로운 질문이 숨어 있어 놀라게 된다.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하는 쥬냉 앞에 가톨릭 신부는 자신이 아버지임을 선언한다. 반면 어머니는 신부는 절대 쥬냉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혼란에 빠진 쥬냉에게 점쟁이는 한술 더 뜬다. “모든 사람이 찬성하려면, 저 아이는 아무의 아들도 아니겠네요.”(P.71, 8) 이렇게 쥬냉은 아무의 아들도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쥬냉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는 존재인가 비존재인가? 굉장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소극이다.

 

중세는 분명 기독교가 지배하는 사회이다. 수준 높고 장엄한 종교극의 상연은 종교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이벤트이지만, 일반 서민에게 종교와는 무관한 소극이 더욱 친숙하고 일상적이라고 한다. 자기네들의 적나라한 삶의 희비, 애환을 담고 있기에 그러하리라. 이로 미루어 볼 때 중세 소극을 통해 우리는 중세인들의 실질적 삶의 모습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고 그것은 중세 소극을 읽는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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