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람진 단편집 지만지 고전선집 618
니콜라이 카람진 지음, 김정아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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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가엾은 리자

보른홀름 섬

시에라 모레나

감성적인 사람과 이성적인 사람 - 두 가지 성격

 

카람진은 푸쉬킨 이전 러시아의 대문호로서 어찌 보면 본격적인 러시아문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카람진이 본격적인 문학으로서 단편소설을 쓰면서 푸쉬킨 이후 작가들의 작품이 수용되는 문화적 토양이 구축되었다. 푸쉬킨이 카람진의 감상주의를 발전적으로 극복하면서 러시아문학은 비로소 세계문학의 무대에 편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네 편의 단편은 공통적으로 사랑을 주제로 한다. 사랑은 문학과 예술의 영원한 주제다. 다만 감상주의답게 카람진은 이루어진 사랑보다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그리고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랑에 천착한다. 사람들은 행복한 사랑에는 잠시 흐뭇해하지만, 불행하고 슬픈 사랑에는 감정의 커다란 오르내림을 경험하는 법이다. 카람진을 감상주의로 일컫는 이유는 이들 작품이 독자의 감상에 호소하고 감정을 격발하기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화자의 깊숙한 개입이 눈에 띈다. 화자는 등장인물들을 소개하고, 그들 간에 엮어진 사건과 행동을 기술하고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화자는 주인공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감정과 생각을 표출하고 독자의 호응을 유도한다. 이처럼 감정 표출이 두드러지다 보니 느낌표가 자주 등장하는 점이 이채롭다.

 

그에게 저주를 퍼붓고 싶지만, 혀가 제대로 말을 듣질 않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물만 내 얼굴을 따라 흘러내리는구나! 아아! 차라리 내가 쓰고 있는 게 소설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나는 이토록 가슴 아린 슬픈 실화를 옮겨 적고 있단 말인가! (P.74, <가엾은 리자>)

 

다른 작품의 화자와는 달리 <시에라 모레나>의 화자는 등장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친구의 애인과 사랑에 빠지는 인물이다. 친구가 사고로 죽었다고 믿기에 슬픔에 빠진 연인을 위로하다가 서로 마음을 열게 되는 이야기는 드물지 않은 소재이기도 하다. 자초지종도 알아보지 않고 엘비라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자살하는 알론소도, 사랑과 자책감으로 수녀원에 들어간 엘비라도 모두 딱하다. 이 모두가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누굴 탓하겠는가.

 

냉혹한 세상이여! 나는 너를 떠나노라! 인간이라는 이름의 미쳐 버린 존재들이여! 나는 너희들들을 떠나노라! 인간들이여, 잔혹한 광란 속에 미쳐 날뛰어라, 서로를 갈기갈기 찢고 죽여 버려라! 내 심장은 너희를 위해서는 이미 죽어 버렸고, 너희의 운명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내 심장은 그것에 꿈쩍도 하지 않는다. (P.120, <시에라 모레나>)

 

하늘과 운명의 장난을 원망해야 할 건이 또 하나 있으니 <보른홀름 섬>의 고딕양식 성의 어두컴컴한 감옥에 갇힌 한 여인의 사랑이 그러하다. 사랑은 맹목적이다. 서로가 뜻이 맞고 가족과 사회가 한 쌍을 축복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으련만 때로는 사랑해서 안 될 사람을 마음에 두고 전전긍긍하는 예도 없지 않다. 화자가 보른홀름 섬으로 가는 여정에 마주친 남자와 감옥에 갇힌 여자, 그리고 그들을 가둔 노인의 처절한 울부짖음은 독자에게 자세한 설명을 피한다. 이 역시 누구를 책망할 수 없기에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독자 또한 애달플 뿐이다.

 

인간의 법률이 유죄라 하네. / 나의 사랑의 대상을. / 하지만 오 심장이여! 누가 / 그대를 거스를 수 있겠는가? (P.84, <보른홀름 섬>)

 

대체 무엇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덕을 사랑하고, 그의 성스러운 율법을 존경하는 이 허약하고 백발이 다 된 늙은이에게 그의 분노의 술잔을 모두 퍼부었는지를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보게나. 대체 왜? (P.106, <보른홀름 섬>)

 

<가엾은 리자>의 에라스트와 리자는 푸쉬킨의 유명한 소설 속 오네긴과 타티야나를 연상시킨다. 신분의 차이는 있지만, 둘 다 모두 도시에 물들지 않은 시골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후자에 비하면 리자의 삶은 비극으로 끝났다는 면에서 한층 처절하다. 농부의 딸인 처지에 언감생심 귀족과의 결혼을 꿈꾸었다고 비판하면 할 수 없다. 남자의 삿된 약속을 홀딱 믿을 만큼 그녀는 순진하고 세상 물정에 어두우며, 오직 사랑에만 헌신하는 여인이기에.

 

에라스트, 오네긴, 페초린, 오블로모프. 이들은 모두 러시아문학의 특징인 잉여 인간이다. 카람진은 이처럼 불후의 독자적 인간형의 창시자라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후배들에게 비하면 에라스트는 더욱 순진하면서도 비열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리자! 상황이 달라졌어. 사정이 좀 생겼거든. 나는 이제 약혼한 몸이야. 그러니까 제발 나를 조용히 내버려 둬 줘. 너 자신의 평안을 위해서라도 나를 잊는 편이 나아. 나는 너를 사랑했고, 지금도 그 사랑엔 변함이 없어. 그래서 네가 잘되기만을 바랄 뿐이야.” (P.73-74, <가엾은 리자>)

 

수록작 중 마지막 소설의 주인공 역시 에라스트다. 그는 감성적인 사람의 전형이고, 친구 레오니트는 이성적인 사람으로 분류된다. 작가는 두 친구의 성격과 운명을 양분해서 제시한다. 마치 독자에게 어떤 인물이 될 것인지 선택하라는 듯. 양자택일의 문제는 지나친 극단화에 있다. 세상 누구도 온전한 에라스트, 온전한 레오니트일 수는 없다. 개인적으로 에라스트보다는 레오니트가 보편성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물론 작가를 포함한 예술가의 시각에서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는 에라스트가 더욱더 매력적이겠지만. 옮긴이도 마찬가지 의견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에라스트는 천국의 축복 속에 있거나 지옥의 고통 속에 있거나,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닐 때, 즉 충만한 감정이 없을 때는 참을 수 없는 무료함에 고통스러워했다. 하지만 레오니트는 행복이 뭔지도 몰랐고, 그것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밝고 온화한 영혼의 평화로운 안정에 만족하며 살았다. (P.140, <감성적인 사람과 이성적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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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와 준 펭귄클래식 57
아나이스 닌 지음, 홍성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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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헨리와 준은 작가 헨리 밀러와 그의 아내 준 밀러를 가리킨다. 그렇다 <북회귀선>의 작가로 유명한 헨리 밀러다. 이 작품은 일기체 소설로 분류하는데, 소설이라기보다는 일기에 가깝다. 작가 자신의 일기를 거의 그대로 수록하였으며 작품 속의 인물, 사건, 행동, 대화 및 생각 등의 모든 게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물론 작가가 자신의 일기를 마치 소설처럼 허구로 썼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지만, 어쨌든 작가가 일기에 대하여 진심으로 있으니만치 그럴 가능성은 작다고 봐야 하리라.

 

대단히 솔직한 일기라고 말했고, 성적인 감정에 대한 표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하고 인상적이라고 했다. 나는 일기를 쓸 때 점잔을 빼지 않는다. [헨리]에 대한 칭찬이 많았지만, 진심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준에 대해 쓴 것 역시 모두 사실이었다. (P.186)

 

아나이스는 헨리와 준의 관계에 깊숙이 개입한다. 한쪽으로는 헨리의 애인으로서, 다른 쪽으로는 준의 연인으로서. 준이 헨리를 떠난 기간 동안 아나이스와 헨리의 관계는 너무나 밀접하게 발전하여 부부 사이보다도 더할 지경이다.

 

나는 준의 아름다움과 헨리의 천재성 사이에 끼어 덫에 걸린 것 같다. 두 사람 모두에게, 각각 다른 방법으로 빠져들었다. 내 마음은 두 사람 모두에게 향했다. 헨리는 내게 생명을 주고, 준은 내게 죽음을 준다. 나는 미친 듯이, 비이성적으로 준을 사랑한다.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P.72)

 

아나이스는 은행가 남편을 두고 있고, 그들의 관계도 일반적 시각으로는 그다지 나쁜 편은 아니다. 물론 그녀는 남편 휴고에 대해 불만을 지닌다. 일단 은행가라는 점, 그의 정신세계가 자신에게 미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 개인적으로 휴고의 성적 지향성과 관심도가 아나이스만큼 열렬하지 못하다는 점이 가장 크다고 본다.

 

아나이스는 관능적인 성향을 지닌 여인이다. 여리여리하고 소년 같은 외모이면서도 마치 관능의 늪에 빠진 양 헨리와 성관계에 탐닉하고 즐기고 헤어 나오지 못하며, 헤어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후반부에 가서는 헨리에게 다소 실망하고 생각이 벌어지는 듯하지만 그와의 육체관계는 결국 원점으로 회귀시킨다. 그의 성적 관심 대상은 폭넓다. 헨리 외에도 사촌 에두아르도, 정신분석 상담가 알렌디도 유혹한다. 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레즈비언도 꺼리지 않는다. 일부러 레즈비언 사창가를 찾아갈 정도이니.

 

그녀는 엘리트 지성인이다. D.H.로렌스에 관한 글을 쓰고, 헨리와의 만남도 같은 작가로서였다. 그런 그녀가 앞뒤 가리지 않고 섹스에 탐닉하는 광경을 보면서 역시 이성은 본능을 이기지 못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아니 어쩌면 로렌스에 관심을 갖고 이를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가능성을 내포하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는 헨리와는 만족감을 느낀다. 우리는 절정에 도달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신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에 그는 다시 나를 채워준다. 예전에는 그렇게 완벽한 것을 알지 못했다. 이제는 헨리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한 여자일 뿐이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라는 감각을 잃어버린다. (P.109)

 

그녀는 확실히 솔직하다. 비록 은유적 표현을 쓰지만 자신의 감정과 생각은 여과 없이 그대로 토로한다. 남편 생전에 이 작품을 발표하려던 계획을 취소한 것은 그만큼 가명을 쓰더라도 내용 자체가 갖는 주변 사람들에 미칠 파장을 우려해서이다.

 

이쯤에서 헨리와 준의 관계가 궁금하다. 아나이스는 헨리의 남성성을 사랑한다고 밝힌다. 작가로서 헨리의 문장은 마초적인 특성이 있는 듯하다. 하도 오래전에 <북회귀선>을 읽어서 헨리 밀러의 문학적 특성을 기억하지 못해 안타깝다. 그런 그가 준과 함께 있을 때는 오히려 소심할 정도로 수동적으로 바뀐다고 한다. 그만큼 준은 화려하고 당당한 일면이 있는 듯하다. 이런 준이 아나이스와 만날 때는 도리어 여성적이고 아나이스의 언행이 남성적이라고 하니. 이렇듯이 실생활에서는 상극이라고 봐야 할 헨리와 준의 관계가 헨리의 문학세계에는 자양분이 되어 준으로부터 문학적 창조성과 영감을 얻는다고 하니 기묘하다.

 

그녀[]는 남자로서의 헨리를 파괴할지 모르지만, 작가로서의 헨리는 평화보다는 시련과 갈등을 통해 더 풍요로워진다. (P.55)

 

준과 나는 서로를 지워 없애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보완해 준다. 헨리는 우리 두 사람 모두를 필요로 한다. 준은 헨리에게 자극을 주고, 나는 그에게 피난처를 제공한다. (P.265)

 

헨리와 아나이스는 그들의 관계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헨리는 준을 두려워하고 증오하지만 그녀와 헤어질 수 없으며, 아나이스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지만 휴고가 제공하는 경제적 풍족함을 포기하지 못한다. 헨리와 관계를 지탱하는 원동력의 일부도 그녀가 헨리에게 주는 물질적 편의에 기초한다. 나중에 헨리는 준과 이혼했지만, 아나이스는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끝까지 유지했다는 점은 이율배반적이다.

 

개인적으로 헨리와 준, 특히 헨리와 아나이스의 에로틱한 묘사로 점철한 이 작품에서 유달리 안타깝게 느껴진 인물이 휴고다. 그가 아나이스에게 잘못을 저질렀는가, 전혀 아니다. 그는 평범한 남자였고 남편이었다. 그것이 아나이스에게 문제가 되었다. 아나이스는 평범한 삶을 살기에는 너무나 뜨겁고 육체적인 열망을 지닌 여성이다. 그녀가 차라리 남편과 헤어졌다면 모르겠지만 결혼 관계를 유지한 상태에서 끝없는 성적 모험을 펼쳐나가는 것을 볼 때 남편의 입장을 헤아려 본다. 전혀 몰랐다면 딱하고, 알았지만 인내하였다면 역시 딱하다.

 

나는 에로티시즘을 원한다. 밤에 꿈꾸는 그 몽정을 원하고, 헨리가 끊임없이 나를 침대로, 카펫으로, 담쟁이덩굴로 밀어붙이던 그 여름날 같은 많은 날들이 이어지기 바란다. 헨리처럼 너무 나이가 들거나 질리기 전까지는 욕정에 탐닉하고 싶다. (P.350)

 

에로티시즘에 매혹당하고 그 속에서의 탐닉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길 때, 일기든 소설이든 그녀의 글과 생활에서 에로틱함이 넘쳐흐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 없는 양성애자로서 그녀는 차별 없이 사랑을 나누려고 한다. 그녀의 생각과 행위를 실정법적 도덕과 사회윤리의 관점에서 볼 때 비난받아 마땅하겠지만 문학과 예술로만 놓고 보면 이 역시 중요한 속성에 해당한다.

 

내가 여자가 된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흐느껴 울었다. 두 눈으로 현실을 직시했기 때문에 흐느껴 울었다. 헨리의 이기적인 마음, 준의 사랑의 힘, 그 자체로는 충분할 수 없고 다른 것과 연관되어야만 하는 나의 만족할 수 없는 창조성. 더 이상 믿을 수 없으면서도 믿고 싶기 때문에 흐느껴 울었다. 나는 믿지 않고도 여전히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인간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P.363)

 

이 작품의 거의 마지막 단락 대목이다. ‘어젯밤 준이 도착했다.’(P.353)라는 문장은 작품 전체에서 유일하게 볼드체로 표시되어 있다. 그만큼 이 작품에서 갖는 선언적 의미가 강력하다는 뜻이다. 헨리와 아나이스의 연인 같고 부부 같은 쾌락의 시간은 끝났음을 알리는. 이제 다시 그들 세 사람은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몽상과 꿈이 아닌 현실 속에서.

 

아나이스가 여자가 되었음은 중의적이다. 그녀는 헨리와의 육체관계를 통해서 극도의 성적 쾌감을 발견하고 이를 즐기는 여성이 되었다. 준의 복귀를 통해 그녀는 비현실성에 가까운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사랑과 에로티시즘이 함께 하지 못하고, 현실과 꿈이 갈릴 수밖에 없는 현실 세계에서의 여자.

 

아나이스 닌이 주목받는 이유는 보기 드문 에로티시즘 여성작가인 까닭이다. 기존에 있던 에로티시즘 작품은 거의 대다수가 남성 작가에 의한 것인 반면 아나이스는 여성의 시각에서, 여성의 생각과 감성, 그리고 감각을 통해 에로티시즘 문학 이해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녀의 여타 에로티시즘 작품들을 이해하는 단초를 이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에로티시즘 문학에 거부감을 느낀다면 이 작품 역시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점 인정한다. 개인적으로 아나이스의 맹목적 관능, 그리고 헨리의 광기 어린 육체 탐닉에 그다지 공감하지 못한다. 그나마 <북회귀선>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점은 기대하지 않은 소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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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오정환 옮김 / 한길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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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를 나의 친구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시오노 나나미는 멋진 사람이다. 마키아벨리는 이상 정치를 추구하지 않았다. 마키아벨리즘으로 불리는 그의 사상은 현실 정치론이다. 철저히 현실에 정치를 두고 성공할 수 있는 통치체제와 방식을 정리하였다. 그의 말대로 세상 모든 사람이 죄다 선인뿐이라면 그의 사상 내용도 바뀌었을 것이다.

 

이 책은 마키아벨리에 대한 전기이자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역사서이다. 저자는 마키아벨리의 삶을 세 부분- 임용 전, 임용 후, 실직 후 -으로 나뉘어서 각각 그의 삶과 당대 이탈리아 정세를 들여다본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토박이다. 그의 삶은 피렌체를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관료 생활, 저작 목표도 오로지 피렌체가 중심이 된 이탈리아 통일이다. 이 책은 또한 피렌체의 역사서이기도 하다. 특히 1부는 마키아벨리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이전이므로 당대사에 관한 서술이 많아 이채롭다.

 

마키아벨리즘의 냉혹성에 깊은 인상을 받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가 매우 냉혹한 인물일 거라고 지레짐작한다. 나나미는 여러 전거를 들어 그가 매우 유머러스하고 인간적이며, 워커홀릭임을 보여준다. 숱한 출장 동안에 부족한 출장 경비로 전전긍긍하고, 아내의 히스테리에 심란해하면서도 술집에 드나드는 일을 중단하지 않는다. 그의 <군주론>이 메디치가 정부에서 자리를 얻기 위한 용도였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회복된 공화정에서 자신의 복직이 거부당하자 상심하여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딱딱한 정치사상가가 아니라 당대의 인기 희곡 <만드라골라>의 극작가였다는 이력을 헤아린다면 그의 인물됨은 많은 오해와 편견에 가려져 있음을 알게 된다.

 

15년간의 관료 생활을 통해 그는 정치와 외교를 보는 안목과 경험을 쌓았고, 실직 후 14년간 그것을 자신의 독자적 사상과 글로 구체화하였다. 흔히 실직 후 그가 산장에 틀어박혀 우울한 나날을 보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나나미는 그와 베트리의 왕복 서한, ‘오리첼라리의 정원의 젊은이들과의 교류, 구이차르디니와의 만남과 동행 등 그가 결코 행동을 멈추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공화국 제2 서기국 서기관의 직책에 있었는데, 실질적 외교관으로서 수많은 출장, 국민군 창설 주도 등 표면상 권한보다 역할의 중대성이 매우 컸음을 저자는 밝히고 있다. 대학 출신이 아니기에 외교 대사로 임명되지 못하고 비공식적으로 외교 업무를 수행한 사례는 그의 유명한 저작에 나오는 여러 정치 사례를 경험하게 된 바탕이 되었다. 국민군 창설로 피사를 정복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에 대한 실례도 적용할 수 있었다. <군주론>은 난데없이 세상에 던져진 저서가 아니다.

 

처녀작에 한 작가의 장래가 모두 내포되어 있다면, 피사 문제에 관한 논고에서도 마키아벨리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특색을 완벽하게 발견할 수 있다. (P.229)

 

<군주론>으로 인해 마키아벨리를 군주정 옹호자로 오해하고는 하지만, 기실 그는 굳이 나누자면 공화정에 심정적으로 가까운 인물이다. 그의 성장 시기와 직업관료로서 보낸 시절 모두 피렌체의 공화정 체제였다. 그는 군주정과 공화정 중 무엇이 최선인가에 관심이 없었다. 당대 현실에서 가장 뛰어난 역할을 수행하는 체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최고의 효율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설계할 것인가가 그의 관심사다. 그가 살펴볼 때 당대 이탈리아의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군주정이 낫다고 보았기에 그런 글을 쓴 것뿐이다. 이렇게 보면 그는 일종의 정치공학자라고 하겠다. 차라리 테크노크라트로 간주해도 좋다.

 

그는 단 한 번도 어떤 하나의 정체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그로서는 왕정이건 귀족 정체건, 혹은 민주 정체건 아무 상관도 없었던 것이다. [......] 그런 그가 끈질기게 추구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면 정체로 하여금 효율적으로 그 기능을 발휘시킬 수 있느냐는 것 한 가지였다. (P.374)

 

<군주론> 하면 으레 체사레 보르자가 연상된다. 그가 가장 애정을 갖고 이상적인 군주상으로 대놓고 추켜세웠던 인물이다. 저자도 언급하였듯이 체사레는 당대로서는 매우 독특하면서 혁신적인 인물이다. 포르투나의 변덕이 아니었다면 이탈리아 역사는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가 피렌체의 황금 시기를 이끌었던 로렌초 데 메디치가 아니라 체사레를 전면에 내세웠던 것은 시대적 환경이 바뀌었음을 고려해서이다.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인물 유형은 로렌초가 아니라 체사레처럼 강력한 힘을 지닌 국가를 수립 운영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마키아벨리는 판단하였다. 즉 체사레라는 인물은 마키아벨리에게 영감을 준 인물이다.

 

발렌티노 공작 체사레 보르자가 마키아벨리의 생각을 일변시킨 것은 아니다. 마키아벨리가 막연하게나마 이미 품고 있던 생각에 뚜렷한 형태를 준 것뿐이다. 다시 말해 마키아벨리의 상상력을 누구보다도 자극한 인물인 것이다. (P.261)

 

마키아벨리의 만년은 피렌체와 로마의 몰락과 궤를 같이한다. 로마 교황이 메디치 가문 출신이기에 그들은 운명 공동체가 되고 만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에게 완패당하고 로마가 대약탈을 당한 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피렌체 공화정은 메디치가의 군주정으로 소멸하였다. 마키아벨리의 삶은 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 이탈리아 르네상스시기와 운명을 같이 하고 만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창작 뒷이야기에서 자신이 마키아벨리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책을 쓴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에서는 또 한쪽의 웅이었던 피렌체공화국을 그리는 것이 내 목적이었던 거예요. 마키아벨리를 충분히 묘사하면 피렌체공화국의, 그리고 그 피렌체에서 태어난 르네상스의 쇠퇴를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P.589)

 

그는 르네상스의 꽃이었던 피렌체의 몰락을, 마키아벨리의 삶을 통해 비추었다. 이는 시오노의 저작 관심이 훗날 <로마인 이야기>로 고대 로마로 거슬러 올라가기 전에, 중세르네상스 시기에 집중하였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서양문명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가장 화려하고 찬란한 개화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수명을 다하고 수백 년간 고통과 혼란의 시절이 도래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 시오노는 친구 마키아벨리를 역사 속에서 소환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직접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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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의 유대인 지만지 희곡선집
크리스토퍼 말로 지음, 이희원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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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막에 난데없이 마키아벨리가 등장해서 놀랐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출판된 지 50년 정도 지났을까 대중을 상대로 하는 연극 무대에서 거리낌 없이 그가 등장한다니 새삼 마키아벨리즘의 전파력이 대단하다.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과 어쩔 수 없이 비교된다. 유대인 상인, 그들의 탐욕과 파멸, 기독교인의 유대인 박해 등에서 여러 공통점을 지닌다. 셰익스피어가 말로에게서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해야 하리라.

 

돈을 위해서라면 딸도 죽일 수 있는 탐욕의 화신 바라바스는 무한한 정복욕의 소유자 탬벌레인이나 무한한 지식을 추구하는 파우스터스와 같은 말로의 다른 비극적 주인공들과 함께 인간적인 욕망을 극한으로 추구하다가 파멸을 맞이하는 새로운 비극적 인물이며, 르네상스적 인간의 전형이다. (P.208-209)

 

몰타의 유대인 바라바스를 해석하는 관점이 여럿 있다. 통상적으로 그를 물욕의 화신으로 르네상스적 비극의 전형으로 이해한다. 이 책의 작품해설도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본다. 여기서 바라바스의 파행을 단순히 재물을 향한 탐욕으로 평가해야 하는지 의구심이 있다. 몰타 총독의 재산 몰수 행위를 전후한 그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이후의 그는 철저한 복수에 모든 관심과 역량을 기울인다.

 

(마키아벨리)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이것뿐, 즉 그 유대인에게 / 합당한 호의를 베풀어 달라는 것뿐이다. / 그리고 그가 나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 더 나쁜 대우를 받지 않게 해 주시길. (P.8, 서막)

 

마키아벨리의 변호를 의례적이라고 치부하고 싶지 않다. 바라바스는 몰타에서 성실한 상인으로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모았다. 적어도 그에게 고리대금업은 주된 사업이 아니다. 그런 그를 벼랑으로 밀어낸 것은 몰타 총독 페르네즈다. 터키인에게 바치는 공물을 무조건 유대인에게서 그것도 재산의 절반을 빼앗는 만행에 기독교인은 아무런 반대가 없다. 그들의 눈에 유대인은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놓은 최초의 저주를 받은 족속일 뿐이다. 바라바스의 항변은 이런 대답으로 돌아온다.

 

(페르네즈) 진정하라, 바라바스. 너에게 정의가 행해진 것뿐이다.

(바라바스) 각하의 지나친 정의가 제게 지나치게 부당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P.35, 12)

 

역지사지라고 바라바스 같은 억울하고 부당한 처지- 총독의 결정에 항의하였다고 전 재산을 빼앗긴다 -에 놓이면 누군들 복수를 맹세하지 않겠는가. 이런 그에게 도덕과 윤리를 고려하고 수단 방법의 정당성을 요구한다면 가당키나 하겠는가. 착한 아비게일조차 아버지의 복수 행위는 정당하다고 생각할 정도이다. 그의 행위를 판단하는 데 여기에 인종 차별과 종교 갈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그는 스스로 악당으로 변모한다.

 

이 희곡에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모두 등장한다. 다만 신도이든 종교인이든 올바른 신앙을 지닌 인물은 찾기 어렵다. 기독교인은 유대인을 박해하고 탄압하는 걸 정당하게 여긴다. 유대교인 바라바스와 이슬람교인 이타모아는 악인을 자처한다. 자코모 수사와 베르나딘 수사는 바라바스의 재산을 노리고 서로 다투는 치졸함을 보인다. 바라바스가 아비게일을 죽인 행위는 흔히 비난받기 쉽지만, 처자식보다 종교와 가문을 더 우위에 두는 사례를 봉건시대에서는 생각보다 자주 볼 수 있다. 그로서는 도저히 배교와 배신한 아비게일을 용납할 수 없다.

 

(바라바스) (아비게일에게 방백) 기독교인을 속이는 것은 죄가 아니란다. / 그들 자신이 속임수를 신념으로 삼고 있는데다가, / 이단자들과의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P.90-91, 23)

 

어딘가 익숙한 대사가 아닌가. 바로 <탬벌레인 대왕 제2>에서 헝가리 왕이 신 앞에서의 맹세를 어기고 나톨리아의 왕의 배후를 공격하는 논리도 위와 유사하다. 이처럼 부도덕하다는 점에서 모든 종교가 동일하다.

 

(페르네즈) 저주받은 바라바스, 천한 바라바스, 내가 / 너나 너의 불행에 측은함을 느껴야 하느냐? / 아니, 나는 이렇게 너의 반역의 대가를 지켜볼 것이다. / 넌 그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P.200, 55)

 

이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주인공인 바라바스는 물론이고 딸 아비게일, 로도윅과 마티아스, 두 명의 수사, 이타모어, 벨라미라와 필리아-보르자가 비참하게 목숨을 잃는다. 수녀원의 수녀들, 많은 터키 병사들도 몽땅 죽는다. 유일하게 생존하는 인물이 몰타 총독 페르네즈다. 그의 생명 부지는 천행인데, 단지 그가 바라바스 못지않은, 차라리 그보다 더 간교한 인물인 탓이다. 그는 자만심에 빠진 바라바스의 뒤통수를 친다. 결국 생사와 성패는 선악이 아니라 언제든 타인을 배신할 수 있는 교활함의 미덕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말로는 오직 바라바스만 비판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작품 속 모든 인물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이 극의 대다수 인물들은 계급, 인종, 종교와 관계없이 마키아벨리즘을 자신들의 삶의 방식으로 채택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말로는 탐욕적인 인간들의 위선을 가차 없이 풍자한다. (P.208, 작품해설)

 

작품의 대단원은 생뚱맞다. 몰타 총독은 터키 왕자 칼리마스를 포로로 잡고 선언한다. 터키가 다시 쳐들어와도 당당하게 맞서 물리치겠다고. 전반부의 굴종적 자세와는 천양지차다. 실제로 몰타를 방어한 기독교 세계의 자신감을 반영하는 장면이리라.

 

(페르네즈) 온 세계가 당신을 구하러 오겠다면 오라 하시오. 우린 우리를 지켜 낼 테니. / 몰타를 정복해 우리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보다 / 바닷물을 마셔 마르게 하는 것이 더 빠를 것이오. (P.203,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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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이야기
폴린 레아주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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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발표된 화제작이자 문제작이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충격을 주었을 작품인데, 어찌 보면 당대의 시각에서 오늘날의 야설로 여겨졌을 것이다. 야설과의 차이점은 성적 행위에 적나라한 직접 묘사가 덜하다는 점과, 심리묘사의 비중이 매우 높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성기를 지칭하는 묘사가 중립적이거나 완곡하다는 점이 더욱 그러하다.

 

현대 에로티시즘 문학의 걸작으로 간주되는 <O 이야기>의 주된 성적 행위는 사도-마조히즘이 차지한다. O는 애인 르네를 따라 루아시로 들어가고 그 일원이 되며, 스티븐 경에게 양도된다. 루아시와 스티븐 경이 주창하는 성적 판타지는 무조건적 강간, 채찍질로 대표되는 고문, 항문 성교 등이다. O는 여기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며, 오히려 쾌감을 느낀다. 또한 O와 자클린 간 여성 동성애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이 작품에서 소개되고 묘사되는 여러 성적 행위의 실제성을 절대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저자 자신의 의견처럼 연인에게 보내는 연애 편지’”로 이해하는 게 온당하다. 현실 세계에서 이를 실현하는 것은 당대나 현대 모두 쉽지 않은 일이며 현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날 개연성도 충분하다. 사랑하는 남성에게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싶어 하는 한 여성의 성적 환상이라면 그 무엇을 꿈꾸어도 비난할 수는 없는 법이다. 따라서 페미니즘 관점에서 이 작품을 가타부타하는 건 실체 없는 허상에 대한 논평이라 생각한다.

 

무수한 음란물에 노출되고 있는 현대인의 시각에서 볼 때 이 소설의 내용은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성적 묘사보다는 성 심리 자체가 더욱 흥미롭다. O는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가학적 행동에 관대하며 오히려 감미로움과 흐뭇함을 느낀다. 전형적인 피학적 속성이다.

 

지금처럼 철저하게 자신을 벗어난 의지에 내맡겨진 적이 없었고, 지금보다 완벽한 노예상태에 빠진 적도 없었을 뿐더러, 그렇게 된 것 자체를 지금만큼 행복하게 받아들인 적 또한 없었다. (P.84)

 

아무리 능욕을 당한다지만, 아니 오히려 능욕을 당하고 있기에, 바로 그 능욕을 통해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데서 오는 일종의 감미로움이 있는 게 아닐까? 스스로 굴복을 자처하기에 느끼는 기쁨, 자신을 순순히 개방함으로써 얻는 즐거움 같은 것 말이다. (P.114)

 

소설 속에서 되풀이하여 표현되는 O의 피학적 성향은 그녀가 단지 독특한 성적 취향을 지녔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O는 애인 르네를 극도로 사랑한다. 사랑의 정도가 매우 깊기에 그녀는 르네가 원하는 것은 무조건 따르고 순종하려고 한다. 그녀에겐 고통보다 복종의 행복이 더 큰 것이다. 스티븐 경에게 양도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르네가 원하기에 O는 이를 따랐을 뿐이었고, 나중에는 스티븐 경에게서 더욱 철저한 주인-노예 관계를 터득하였다.

 

O는 죽고 싶지 않았지만, 애인의 사랑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치러야 할 고통이라면, 그 고통을 감수하는 자신을 애인이 그저 흐뭇하게 여겨주기만을 바랐다. 오로지 그의 곁으로 데려다 주기만을 말없이 얌전하게 기다릴 뿐이었다. (P.41)

 

르네, 당신을 사랑해,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을 사랑해...... 나를 가지고 얼마든지 당신 원하는 대로 해도 좋아...... 다만, 나를 버리진 말아줘, 제발 부탁이야, 나를 버리지 마......” (P.133)

 

작가는 성적 노예화에 빠지는 O의 모습을 뜻밖에도 장엄하게 묘사한다. 그녀는 성적으로 부도덕하고 타락한 게 아니다. 그녀는 자기 헌신과 복종을 통해 오히려 정신적으로 승화되는 것처럼 비친다. 고대 신전의 무녀와 여사제가 그러한 역할을 맡았던 것처럼 말이다. 자아를 전적으로 바치면 순전한 이타가 되고 영혼은 순결해진다고 보는 것일까. 작가의 펜에서 O는 성녀(聖女)로 화한다.

 

몸을 함부로 내돌림으로써 존엄해진다는 것은 분명 놀랄 현상이나, 거기 존엄한 무언가가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내부로부터 어떤 광채를 일으켜 빛나는 듯했다. 모든 거동에서 침착함이 배어났고, 얼굴에서 알 수 없는 고요함과 더불어 은자들의 눈빛에서나 떠오를 법한 내면의 미소가 은은하게 번지는 것이었다. (P.66)

 

사실 그녀의 입을 범했던 모든 입들, 젖가슴과 음부를 유린했던 모든 손들, 아랫도리를 쑤시면서 그 창녀성을 여지없이 증명해 주었던 모든 성기들은 어떤 의미에서 그녀를 신성한 존재로 만들어준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것도 르네가 보기에 스티븐 경이 증명해 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O가 스티븐 경의 품을 벗어나올 때마다 르네는 그녀에게서 신의 흔적을 찾았다. (P.157)

 

우리는 새로 얻은 링과 인두자국이 말할 수 없이 자랑스러운”(P.238) O의 심리에 대부분 공감하지 못한다. 그토록 피학적인 O가 도리어 자클린과의 관계에서는 주도적 역할을 맡는 것 자체로 보아서도 O의 성향을 일면 화하기 어렵다. 차라리 적당히 이성애와 동성애를 넘나들며 쾌락을 즐기되, 소위 변태적 성적 행위에는 거리를 두려 하는 자클린의 태도가 일반인의 정서에는 더 가깝다.

 

이 소설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적당히 잘 쓴 야설이라도 결국 야설일 뿐이며, 누군가의 판타지를 반영한 글에 불과하다. 현실과 환상은 다르다. 엄격한 종교 윤리 기준으로 보면 성적 환상도 죄악에 속하지만, 그렇다면 대부분 현대인은 모두 죄인일 것이다. 요즘 추세는 오히려 감추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발로를 권장하고 있으므로 읽지 않으면 몰라도 읽는다면 예전의 야설은 이렇구나 하고 가벼운 흥미로 넘어가면 족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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