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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와 준 ㅣ 펭귄클래식 57
아나이스 닌 지음, 홍성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5월
평점 :
이 작품에서 헨리와 준은 작가 헨리 밀러와 그의 아내 준 밀러를 가리킨다. 그렇다 <북회귀선>의 작가로 유명한 헨리 밀러다. 이 작품은 일기체 소설로 분류하는데, 소설이라기보다는 일기에 가깝다. 작가 자신의 일기를 거의 그대로 수록하였으며 작품 속의 인물, 사건, 행동, 대화 및 생각 등의 모든 게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물론 작가가 자신의 일기를 마치 소설처럼 허구로 썼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지만, 어쨌든 작가가 일기에 대하여 진심으로 있으니만치 그럴 가능성은 작다고 봐야 하리라.
대단히 솔직한 일기라고 말했고, 성적인 감정에 대한 표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하고 인상적이라고 했다. 나는 일기를 쓸 때 점잔을 빼지 않는다. 그[헨리]에 대한 칭찬이 많았지만, 진심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준에 대해 쓴 것 역시 모두 사실이었다. (P.186)
아나이스는 헨리와 준의 관계에 깊숙이 개입한다. 한쪽으로는 헨리의 애인으로서, 다른 쪽으로는 준의 연인으로서. 준이 헨리를 떠난 기간 동안 아나이스와 헨리의 관계는 너무나 밀접하게 발전하여 부부 사이보다도 더할 지경이다.
나는 준의 아름다움과 헨리의 천재성 사이에 끼어 덫에 걸린 것 같다. 두 사람 모두에게, 각각 다른 방법으로 빠져들었다. 내 마음은 두 사람 모두에게 향했다. 헨리는 내게 생명을 주고, 준은 내게 죽음을 준다. 나는 미친 듯이, 비이성적으로 준을 사랑한다.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P.72)
아나이스는 은행가 남편을 두고 있고, 그들의 관계도 일반적 시각으로는 그다지 나쁜 편은 아니다. 물론 그녀는 남편 휴고에 대해 불만을 지닌다. 일단 은행가라는 점, 그의 정신세계가 자신에게 미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 개인적으로 휴고의 성적 지향성과 관심도가 아나이스만큼 열렬하지 못하다는 점이 가장 크다고 본다.
아나이스는 관능적인 성향을 지닌 여인이다. 여리여리하고 소년 같은 외모이면서도 마치 관능의 늪에 빠진 양 헨리와 성관계에 탐닉하고 즐기고 헤어 나오지 못하며, 헤어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후반부에 가서는 헨리에게 다소 실망하고 생각이 벌어지는 듯하지만 그와의 육체관계는 결국 원점으로 회귀시킨다. 그의 성적 관심 대상은 폭넓다. 헨리 외에도 사촌 에두아르도, 정신분석 상담가 알렌디도 유혹한다. 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레즈비언도 꺼리지 않는다. 일부러 레즈비언 사창가를 찾아갈 정도이니.
그녀는 엘리트 지성인이다. D.H.로렌스에 관한 글을 쓰고, 헨리와의 만남도 같은 작가로서였다. 그런 그녀가 앞뒤 가리지 않고 섹스에 탐닉하는 광경을 보면서 역시 이성은 본능을 이기지 못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아니 어쩌면 로렌스에 관심을 갖고 이를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가능성을 내포하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는 헨리와는 만족감을 느낀다. 우리는 절정에 도달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신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에 그는 다시 나를 채워준다. 예전에는 그렇게 완벽한 것을 알지 못했다. 이제는 헨리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한 여자일 뿐이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라는 감각을 잃어버린다. (P.109)
그녀는 확실히 솔직하다. 비록 은유적 표현을 쓰지만 자신의 감정과 생각은 여과 없이 그대로 토로한다. 남편 생전에 이 작품을 발표하려던 계획을 취소한 것은 그만큼 가명을 쓰더라도 내용 자체가 갖는 주변 사람들에 미칠 파장을 우려해서이다.
이쯤에서 헨리와 준의 관계가 궁금하다. 아나이스는 헨리의 남성성을 사랑한다고 밝힌다. 작가로서 헨리의 문장은 마초적인 특성이 있는 듯하다. 하도 오래전에 <북회귀선>을 읽어서 헨리 밀러의 문학적 특성을 기억하지 못해 안타깝다. 그런 그가 준과 함께 있을 때는 오히려 소심할 정도로 수동적으로 바뀐다고 한다. 그만큼 준은 화려하고 당당한 일면이 있는 듯하다. 이런 준이 아나이스와 만날 때는 도리어 여성적이고 아나이스의 언행이 남성적이라고 하니. 이렇듯이 실생활에서는 상극이라고 봐야 할 헨리와 준의 관계가 헨리의 문학세계에는 자양분이 되어 준으로부터 문학적 창조성과 영감을 얻는다고 하니 기묘하다.
그녀[준]는 남자로서의 헨리를 파괴할지 모르지만, 작가로서의 헨리는 평화보다는 시련과 갈등을 통해 더 풍요로워진다. (P.55)
준과 나는 서로를 지워 없애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보완해 준다. 헨리는 우리 두 사람 모두를 필요로 한다. 준은 헨리에게 자극을 주고, 나는 그에게 피난처를 제공한다. (P.265)
헨리와 아나이스는 그들의 관계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헨리는 준을 두려워하고 증오하지만 그녀와 헤어질 수 없으며, 아나이스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지만 휴고가 제공하는 경제적 풍족함을 포기하지 못한다. 헨리와 관계를 지탱하는 원동력의 일부도 그녀가 헨리에게 주는 물질적 편의에 기초한다. 나중에 헨리는 준과 이혼했지만, 아나이스는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끝까지 유지했다는 점은 이율배반적이다.
개인적으로 헨리와 준, 특히 헨리와 아나이스의 에로틱한 묘사로 점철한 이 작품에서 유달리 안타깝게 느껴진 인물이 휴고다. 그가 아나이스에게 잘못을 저질렀는가, 전혀 아니다. 그는 평범한 남자였고 남편이었다. 그것이 아나이스에게 문제가 되었다. 아나이스는 평범한 삶을 살기에는 너무나 뜨겁고 육체적인 열망을 지닌 여성이다. 그녀가 차라리 남편과 헤어졌다면 모르겠지만 결혼 관계를 유지한 상태에서 끝없는 성적 모험을 펼쳐나가는 것을 볼 때 남편의 입장을 헤아려 본다. 전혀 몰랐다면 딱하고, 알았지만 인내하였다면 역시 딱하다.
나는 에로티시즘을 원한다. 밤에 꿈꾸는 그 몽정을 원하고, 헨리가 끊임없이 나를 침대로, 카펫으로, 담쟁이덩굴로 밀어붙이던 그 여름날 같은 많은 날들이 이어지기 바란다. 헨리처럼 너무 나이가 들거나 질리기 전까지는 욕정에 탐닉하고 싶다. (P.350)
에로티시즘에 매혹당하고 그 속에서의 탐닉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길 때, 일기든 소설이든 그녀의 글과 생활에서 에로틱함이 넘쳐흐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 없는 양성애자로서 그녀는 차별 없이 사랑을 나누려고 한다. 그녀의 생각과 행위를 실정법적 도덕과 사회윤리의 관점에서 볼 때 비난받아 마땅하겠지만 문학과 예술로만 놓고 보면 이 역시 중요한 속성에 해당한다.
내가 여자가 된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흐느껴 울었다. 두 눈으로 현실을 직시했기 때문에 흐느껴 울었다. 헨리의 이기적인 마음, 준의 사랑의 힘, 그 자체로는 충분할 수 없고 다른 것과 연관되어야만 하는 나의 만족할 수 없는 창조성. 더 이상 믿을 수 없으면서도 믿고 싶기 때문에 흐느껴 울었다. 나는 믿지 않고도 여전히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인간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P.363)
이 작품의 거의 마지막 단락 대목이다. ‘어젯밤 준이 도착했다.’(P.353)라는 문장은 작품 전체에서 유일하게 볼드체로 표시되어 있다. 그만큼 이 작품에서 갖는 선언적 의미가 강력하다는 뜻이다. 헨리와 아나이스의 연인 같고 부부 같은 쾌락의 시간은 끝났음을 알리는. 이제 다시 그들 세 사람은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몽상과 꿈이 아닌 현실 속에서.
아나이스가 여자가 되었음은 중의적이다. 그녀는 헨리와의 육체관계를 통해서 극도의 성적 쾌감을 발견하고 이를 즐기는 여성이 되었다. 준의 복귀를 통해 그녀는 비현실성에 가까운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사랑과 에로티시즘이 함께 하지 못하고, 현실과 꿈이 갈릴 수밖에 없는 현실 세계에서의 여자.
아나이스 닌이 주목받는 이유는 보기 드문 에로티시즘 여성작가인 까닭이다. 기존에 있던 에로티시즘 작품은 거의 대다수가 남성 작가에 의한 것인 반면 아나이스는 여성의 시각에서, 여성의 생각과 감성, 그리고 감각을 통해 에로티시즘 문학 이해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녀의 여타 에로티시즘 작품들을 이해하는 단초를 이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에로티시즘 문학에 거부감을 느낀다면 이 작품 역시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점 인정한다. 개인적으로 아나이스의 맹목적 관능, 그리고 헨리의 광기 어린 육체 탐닉에 그다지 공감하지 못한다. 그나마 <북회귀선>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점은 기대하지 않은 소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