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아 I-II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1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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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별도로 출간한 <멜랑콜리아> 1부와 2부를 한데 모아 수록하였다.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불운한 삶을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에 마땅히 그러하는 게 옳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1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므로 1부와 2부를 연대순으로 재구성한다면, 1853년 뒤셀도르프가 1, 1856년 가우스타 정신 병원이 2, 2부인 1902년 스타방에르가 3, 다시 1부의 마지막인 1991년 오사네가 4장에 해당한다. 1장과 2장의 화자는 라스 헤르테르비그 자신, 3장은 그의 누이인 올리네, 4장은 라스에 관한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작가 비드메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리니까. 그들은 그림을 못 그린다. 그들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P.134)

 

노르웨이의 가난한 집안 출신인 라스는 그의 재능이 눈에 띄어 후원자의 도움으로 독일 뒤셀도르프의 예술 아카데미에 유학 온다. 그는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이 있다. 그의 눈에 다른 아카데미 학생들은 실력이 형편없다. 그가 작중에서 반복적으로 내뱉는 문장이 이를 보여 준다. 상대방 앞에서 거리낌 없이 내뱉는 비난성 발언에 더하여 그의 정신 착란 상태는 술집 말카스텐에 모여든 사람들이 그를 먹잇감처럼 노리고 우롱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라스를 희롱하는 동료 학생들의 행동은 일종의 집단괴롭힘이 분명하기에 독자로서는 분노가 치솟지만 한편 평소 그들을 향한 라스의 멸시적 태도를 알기에 양가적 감정을 갖게 된다.

 

내 사랑 헬레네가 피아노를 치고 있는 것이다. 헬레네 빙켈만과 하타르보그 출신의 라스는 연인이다. 그들은 이미 서로에게 연인이라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연인이다. (P.17)

 

라스가 실제로 그림을 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잘 못 그리는지 우리는 확인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라스의 머리와 입을 통해서만 작중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라스는 하숙집 딸 헬레네와 연인 사이다. 이 역시 작품 속에서 라스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문장이다. 실제로 두 사람이 연인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다. 헬레네는 라스에게 사랑의 말을 하지 않으며, 라스의 애무 행동을 싫어하며 거부한다. 이 작품 속 모든 이야기가 그러하다. 우리는 독자적 관점을 가지지 못하며 오직 라스를 통해서만 알게 되는데, 문제는 라스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점이다. 즉 우리는 진실 여부가 불명확한 진술에 의존하여 소설 전반을 이해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한다.

 

라스의 모든 말과 생각을 뒤집어 해석한다면, 미친 젊은이가 자기 조카딸을 희롱하므로 빙켈만 씨가 그를 하숙집에서 내보내는 행위는 정당하다. 라스와 헬레나가 연인이 아님을 알고 있는 동료 학생들은 잘난 체하는 라스를 골려주기 위해 헬레네가 술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며 그를 속인다. 제 발로 순순히 나가겠다고 한 라스가 다시금 하숙집으로 돌아와서 못 나가겠다고 행패를 부리자 빙켈만 씨는 경찰을 불러 마침내 내쫓는다. 이 과정에서 헬레네는 단 한 번도 라스를 지키기 위한 일체의 발언과 행동을 보여 주지 않는다. 정말 연인이라면 생이별을 하느니 최후의 수단으로 하다못해 그녀와 도망이라도 치는 걸 택할 수도 있을 텐데, 하숙집을 떠나는 순간 영원히 그녀를 보지 못할 것로 자포자기한다. 오히려 자신이 쫓겨나게 된 계기가 헬레네의 부정한 음욕에 있을 거로 비난할 뿐.

 

빙켈만 씨는 헬레네를 방문 앞으로 질질 끌고 갔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빙켈만 씨가 내 사랑 헬레네를 내게서 앗아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빙켈만 씨는 내 사랑 헬레네를 데려갔다. (P.173)

 

라스는 작중에서 완전히 수동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하숙집에서 쫓겨날 때 그는 꿈틀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듯하지만 이내 현실에 순응한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빙켈만 씨와 당당하게 맞서는 온갖 그림이 그려지지만 현실에서 그는 빙켈만 씨의 한마디에 입을 다물고 만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이후 술집에서 수트 케이스를 든 채 바닥만 내려보는 행위에서도 다시 드러난다. 그의 모든 사고와 진술은 결국 그의 머릿속에서만 진행될 뿐 현실에서는 제정신이 아니고, 바보 같은 사람으로 보여질 뿐이다. 독자라면 주인공에 대해 공감과 동정심을 갖기 마련이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것보다는 차라리 답답함과 짜증의 감정을 느끼게 됨은 결국 라스의 이러한 수동성과 무기력함에 유래한다.

 

하지만 내게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될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양손에 수트 케이스를 든 채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말해서도 안 된다. 나는 가만히 서서 어떤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P.213)

 

2장에 해당하는 정신 병원 장면은 두 가지를 확인시켜 준다. 먼저 헬레네를 향한 병적인 사랑의 마음은 그녀를 향한 극도의 원망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망상에 사로잡힌 라스는 헬레네를 창녀, 매춘부라고 욕한다. 이미 앞에서 그녀와 삼촌 빙켈만 씨를 의심하였던 것에서 더 나아간 셈이다. 이어서 세상 여자 모두로 확산한다. 그의 병적인 자위행위는 헬레네를 가질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인 동시에 그녀에 대한 징벌이다.

 

내 사랑 헬레네, 당신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당신은 창녀. 나는 당신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온 힘을 다해서 당신 안으로 나를 밀어 넣어야 한다, 나는 두 다리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자위행위를 하면 안 된다. (P.260)

 

그는 이제 자신이 그림을 못 그리는 화가가 되었다고 자조한다. 병원장은 미술 창작이 그의 정신에 부정적이라고 판단하여 금지한다, 건강해지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겠다며. 반면 그는 그림을 그려야 자신이 건강해진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자신의 건강은 점점 나빠질 뿐이라며. 자위행위에 대한 진단이 두 사람 간 시각차를 대변한다. 라스는 그림으로 자신의 격정을 표출할 수단이 없기에, 병원장은 그 자체가 광기의 표출이라고 보기에.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늙고 치매에 걸린 올리네는 그의 남동생 라스와의 추억을 회상한다. 앞에서 라스의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지만, 올리네의 진술도 마찬가지다. 늙고 가난하며 몸마저 아픈 그녀는 저녁거리를 얻어서 언덕 꼭대기의 집으로 힘겹게 올라가는 처지다. 정신마저 오락가락하여 오랜 과거의 기억은 생생한 반면 엊그제나 방금 전 일은 거의 기억도 못 하며, 대소변을 가리는 일도 이제 힘에 벅찰 지경이다. 그럼에도 어렸을 때 라스의 모습과 행동, 정신 병원에서 퇴원한 후 고향 땅에 돌아와 여전히 광인으로 살아가는 라스를 회상하는 그녀의 기억은 선명하다. 시그네로부터 남동생 쉬버트의 임종에 와달라는 요청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호의를 베푸는 알리다가 도대체 누군지 알지 못하는 올리네.

 

올리네는 이젠 정말 알리다가 누구인지 기억해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올리네는 알리다가 전혀 낯설지 않았고, 심지어 바닷가에 자리한 그녀의 집에도 가 본 적이 있다. 문제는 알리다가 누구인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 솔직히 말하자면 올리네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가물가물했다. 말이 나온 김에, 그녀는 누구일까? (P.442-443)

 

라스는 왜 바위에 앉아 눈물을 흘려야만 했는가. 라스를 하늘과 바다에 비유하는 올리네, 라스의 화풍을 생명을 머금은 어둠, 빛을 발하는 어둠”(P.417)이라고 평했던 올리네. 우리는 라스에 관한 올리네의 진술을 어느 정도 믿어야 할까. 그것은 단편적이지만 라스의 삶을 정확히 알려주는 것인지 아니면 오락가락하는 올리네의 기억에 따라 머릿속에서 창작되고 변조된 기억의 왜곡일 뿐인지.

 

겨우 얻은 생선을 못 쓰게 되어 다시금 끙끙대며 언덕을 내려가 다시 얻는 올리네. 발이 아파 한 번에 못 오르고 중간에 쉬어야지만 간신히 걸을 수 있는 올리네. 화장실에 들르지 않으면 불안감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그게 현실로 드러나는 올리네. 두 번이나 깜빡한 후 시그네에게 끌리다시피 동생 쉬버트에게 갔지만 임종이 늦어버린 올리네. 작가는 왜 늙고 병든 올리네를 등장시켜 하루의 여정을 힘겹게 영위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가.

 

올리네도 자신이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들 모두가 마찬가지 아닌가. 자신이 나이 들어 풍을 맞아 반신불수가 된다거나 치매에 걸려 아무도 못 알아보고 대소변도 가릴 줄 모르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하지만 그게 엄연한 사실이자 인생의 모습이다. 혹자는 벽에 똥칠하더라도 살고 싶다고 하지만, 어디 그게 사람다운 삶이겠는가. 이 작품에서 올리네가 열심히 갈구하는 것, 즉 고통으로 가득한 삶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되고자 하는 바람은 오직 소박할 따름이다. 올리네가 드디어 평온하게 생을 마치게 되었음을 다행으로 여기지만, 솔직히 마지막 대목은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른다.

 

올리네는 자신의 숨결이 차분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갑자기 너무나 피곤해졌다. 온몸이 축 늘어짐과 동시에 너무나 평온해졌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생선 눈알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생선 눈알과 라스의 그림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평온함에 몸을 맡기며 벽에 몸을 기댔다. (P.514)

 

작품 전체에서 마지막 장에 해당하는 1부의 세 번째 장면은 소설가 비드메가 화자다. 이 장은 매우 짤막하며 작품 전체와는 동떨어진 배경과 내용을 담고 있다. 비드메는 라스에 관한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는 점에서 작가 자신의 형상화라고 볼 수 있다. 그가 난데없이 노르웨이 교회 사제와 만나고 싶어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가 대리 사제 마리아를 찾아가서 주고받는 이야기는 무슨 의미일까. 마리아가 설교를 들으러 자신의 교회에 오지 말라고 한 것과 대신에 오늘처럼 집으로 찾아오는 것은 환영한다는 말은 도대체 무엇일지.

 

퀘이커교 신자들도 의자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나? 나는 오리들처럼 땅에 앉아서 술을 마시는 줄 알았지. 퀙퀙.

난 퀘이커교 신자가 아냐.

젠장, 자네도 퀘이커교 신자잖아. 방금 자네 입으로 그렇게 말했으면서. (P.95)

 

집 안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이웃집 사람들마저 우리 집에 돌을 던지는구나. 정말 해도 너무해. (P.411)

 

그러고 보면 라스의 부모는 퀘이커 교도였다. 라스는 이로 인해 미술 아카데미 동료들에게 놀림을 받는다. 그가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퀘이커 의식에 참석한 기술도 나온다. 3장에서 외딴 섬에 살던 라스 부모 일가가 이웃 사람들의 박대에 참다못해 집을 허물고 육지로 이사를 감행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모든 게 4장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라스가 일찍부터 종교적 소수자, 계층적 소수자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리라. 이것이 라스의 마음과 의식에 형언할 수 없는 어떤 심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일까. 항상 세상을 향해 등을 돌리고 껍데기 속에 몸을 웅크리는 달팽이처럼, 그는 고개를 들고 세상을 바라보기보다는 언제나 땅바닥만 내려다보며 속으로만 무수히 말을 되씹는. 이러한 해석을 확대하면 결국 다수의 가해자와 소수의 피해자의 구도로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단지 종교적 영역을 넘어 병리학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라스의 정신이상은 배려와 치료의 관점에서 바라볼 사안이지만 작중 인물들에게 그것은 희롱과 배척, 감금의 대상일 뿐이다.

 

읽기 어려운 소설을 아니지만 결코 읽기 편한 작품도 아니다. 욘 포세로서는 이례적으로 상당한 분량을 자랑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전체 4부작 구성이라고 이해하면 편하다. 역시나 어둑어둑한 분위기에 늘어지면서도 긴박감을 놓치지 않고 있어 책에서 쉽게 손을 떼기 어렵다. 다만 특이한 점은 포세 특유의 구두법이 여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문장은 일반적인 맞춤법으로 끝맺는다. 이제껏 읽은 작품 중에서는 유일하기에 오히려 인상적이다. 그의 특징인 반복은 여전한데, 분량이 긴 만큼 반복의 정도도 한층 더하다. 집요하기에 차라리 집착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정도로 반복의 작품 진행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하나 더 반복의 대상이 주인공의 생각이며 반복과 심화가 상승 작용을 일으켜 화자의 자의식 과잉으로 비쳐질 정도라는 점에서 포세의 다른 작품과 다름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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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의 꿈 외
욘 포세 지음, 정민영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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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 포세의 희곡 작품집이다. 수록된 세 편의 공통점은 표제에 계절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계절이 작품의 성격을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희곡집 <이름/기타맨>과는 달리 이 책의 수록작은 사랑을 공통 요소로 한다. 언제나 따뜻하고 아름다우며 서로에게 보탬이 되는 게 사랑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면 작가는 여기서 궤를 달리한다. 사랑의 합이 맞는다면야 물론 좋겠지만 현실의 사랑은 엇갈리고 변화무쌍하다. 역사상 수많은 불화와 다툼, 웃음과 울음, 분노의 원인이 바로 사랑이 아니었던가.

 

<어느 여름날>

 

소설 <저 사람은 알레스>의 희곡판이자 상호 보완적인 작품이다. 사라진 남편의 이름이 어슬레라는 데서 소설과 연결된다. 소설은 어슬레의 떠남을 그의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시원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어슬레와 아내의 거리두기는 작중에서 항상 노출되지만 직접 언급되지는 않는데, 이 점은 희곡에서도 마찬가지다. 희곡은 중년에 이른 어슬레의 아내가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구성이며, 중년 여자가 젊은 여자와 한 공간에서 서로 교차한다. 여기에 아내의 친구와 남편이 조역으로 등장한다.

 

어슬레 부부는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로 왔다. 어슬레는 여전히 정착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며 틈만 나면 바다로 나간다. 소설과 달리 여기서 그는 아내에게 한마디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녀가 자신을 이해하고 동참해주지 않는다는데. 무엇보다도 아내는 남편과 함께 물에 나가려 하지 않는다. 매번은 아니더라도 어쩌다 한번은 같이 나가기를 남편은 희망하였다.

 

(젊은 여자) 왜 그래? / 도대체 무슨 일이야? / 항상 불안해하고 / 안정도 못 찾고 / 늘 물에만 나가려 하고

(어슬레) 그런데 당신은 / 함께 물에 나가려 하지 않잖아 (P.37-38)

 

작품 전체에서 특이한 점은 남편의 부재를 바라보는 아내의 태도다. 남편이 바다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아내는 걱정하면서도 집안 창가에서 서서 오로지 밖을 내다볼 뿐이다. 소설에서는 나가볼까 하는 의사라도 비치지만, 희곡에서는 단지 바라볼 뿐이다. 그녀의 태도는 친구조차도 의아해할 정도다.

 

(젊은 여자 친구) 어쨌든 / 이상한 일이야 / 그리고 쟤도 / (현관 쪽을 향해 턱짓을 한다) / 아무 말 안 하고 / 그냥 앉아 있거나 / 아니면 저기 / 창가에 서서 / 열린 창문으로 / 내다보기만 하고 (P.95-96)

 

아내의 태도와 사고는 초월적, 운명 순응에 가깝다. 남편의 사고는 어쩔 수 없는 것, 어차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예정된 일, 연연해하고 노심초사한들 무의미하다. 우주와 운명의 커다란 이치와 본질로 바라볼 때 생명은 스러지고 마는 존재. 어둠 속에 고요함을 유지한 채 희극도 비극도 담담하고 초연하게 받아들이리라.

 

(중년 여자) 이제 난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어 / 이제 난 텅 빈 커다란 고요였어 / 이제 난 어둠이었어 / 검은 어둠이었어 / 이제 난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어 / 그리고 동시에 내가 / 내 내면 깊은 곳을 밝게 비추고 있음을 느꼈지 / 텅 빈 어둠 속을 / 그리고 텅 빈 어둠이 / 조용히 빛나고 있음을 느꼈지 (P.84-85)

 

<가을날의 꿈>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결혼이란 남녀가 상대방을 자신과 어울리는 최고의 이성이라고 믿는 데서 출발한다. 상투적 주례사는 두 사람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해로하기를 축원한다. 만약 운명적 이성이 자신의 배우자가 아님을 불현듯 깨달았다면 그 사람의 결혼 생활은 어찌 될 것인가.

 

이 희곡의 남자와 여자는 아마도 옛 연인이었을 텐데 우연히 묘지에서 마주친다. 서로가 묘지의 고요하고 적적한 분위기를 좋아하였음을 마음에 새기고 이따금 와보았다는 데서 그들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오랜만에 만나서 감정이 일렁인 탓일까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사랑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여자) 하지만 우린 이미 / 사랑 / 그것이 존재한다는 걸 느끼고 있어 / 우리가 여기 / 단둘이 / 함께 있는 것처럼 / 우린 사랑 속에 있어 / 우리 둘은 그걸 알아 / 우린 그걸 알아 / 어쩌면 그게 사랑일지 몰라 / 어쩌면 죽은 이들까지 / 구원해 주는 (P.150)

 

남자는 이미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는 처지다. 여자에게 끌리는 마음을 억제하려고 하지만 끝내 그는 여자를 포옹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나란히 퇴장한다. 생명을 마감하는 장소인 묘지에서 생명의 시작을 기약하는 사랑이 이루어진다니 아이러니하지만 그렇다고 생뚱맞지는 않다. 문제는 그 사랑은 희생자를 전제로 하고 있으니 남자의 아내와 아이, 그리고 남자의 부모다.

 

이 작품은 묘지를 배경으로 남자와 여자의 재회와 이후의 삶이 한 축을 이루고, 아버지와 어머니, 전처가 다른 축을 이룬 채 시간의 흐름과 함께 양자가 교차하면서 삶과 죽음의 진행을 보여준다. 남자와 여자의 결합은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 어머니는 노골적으로 남자와 여자를 비난한다. 할머니의 장례식, 그리고 아버지의 장례식, 아이의 죽음이 연달아 이어지는데, 동시에 두 사람의 사랑도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부침이 생긴다. 그들은 사랑으로 많은 것을 얻었지만 더불어 다른 많은 것을 잃었다. 이제는 서로 간 사랑 못지않게 증오도 생기지 않았는가.

 

(어머니) (불안해하며) / 그 앤 죽을 거예요 / 난 알아요 / 그 애가 죽는다고요 / 그 애가 가 버렸어요 / 난 그 애가 죽음으로 들어간 걸 알아요 / 그 애, 그리고 저기 그 여자 / 그건 죽음이에요 / 그 여자는 죽음이에요 (P.233-234)

 

여자를 향한 어머니의 불안과 부정적 인식의 근원이 무엇일지 궁금하다. 어머니는 무슨 연유로 여자가 아들을 죽음으로 이끌 거라고 단언하는가. 우리가 보기에 여자는 평범한 여자에 불과하다. 유부남을 유혹하였으니 선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더라도 유달리 나쁜 여자라고 비난할 정도는 아니다. 사랑은 맹목적이기에 도덕적 가치 기준으로 섣불리 재단하기 어렵다.

 

갑작스럽게 남자가 숨을 거둔다. 작품의 결말은 매우 상징적이다. 어머니, 전처, 여자. 껄끄럽고 적대적이기조차 했던 그들은 나란히 팔짱을 낀 채 퇴장한다. 그들의 공통점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것이다, 아버지, 아이, 남자. 모두가 사랑의 대상을 잃었기에 그네들끼리 더는 다투어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그네들은 동병상련의 처지이므로.

 

<겨울>

 

이 희곡은 등장인물이 남자와 여자, 단 두 명이다. 배경도 1장과 3장은 공원, 2장과 4장은 호텔로 단순하다. 주제는 남녀 사이의 사랑. 예상과는 달리 의외로 흥미롭다. 남녀 관계는 우열을 가리기 어렵고 복잡미묘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듯이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뒤바뀐다.

 

아마도 과거 연인사이었던 듯, 하지만 남자는 이미 결혼하였고 출장차 이 도시에 들렀다가 여자와 우연히 마주치게 된 설정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당황스럽고 난감한 대목은 여자의 지나친 성적 솔직성이다. 성적인 표현을 매우 걸게 내뱉는 여자를 보면 교양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으리라 추정하게 된다. 그리고 남자를 향해 적극적으로 유혹한다. 두 번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마뜩잖아하던 남자는 서서히 여자에게 이끌리고 힘주어 끌어안는다.

 

3장은 1장과 반대로 남자가 공원에서 헤매다가 여자와 조우한다. 이번에는 여자가 남자와의 만남을 피하려다 어쩔 수 없이 마주한다. 여자에게 빠진 남자는 극단적이다. 아내와 헤어지고, 직장에는 사표를 내버렸다. 완전히 여자 하나에 올인한 형국이고 이런 남자를 여자는 꺼리지만 2장에서의 남자와 마찬가지로 매정하게 내치지 못한다.

 

남자와 여자, 아주 남남이라면 모를까 한때 연인이었고 미련을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사이였다면 칼로 무 베듯 관계를 정리하기 쉽지 않다. 사랑의 열정은 차디찬 재 속에 스러진 듯 보이나 조금의 틈만 보이면 이 희곡의 남자처럼 활활 타오르게 된다. 제아무리 이성과 상식을 가지고 잠재우려 해도 소용이 없으니 이것은 본능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4장의 마지막 대화는 의미하는 바가 깊다. 사랑이란 원래 그러하니까.

 

(여자) (그의 옆에 눕는다. 남자가 여자를 껴안는다. 여자가 남자를 껴안는다) / 이건 아냐

(남자) 모든 건 다 그런 거야 (P.379, 4)

 

 

이 책은 부록이 충실하다. 작품해설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작가소개(<지은이에 대해>)와 인터뷰 자료는 욘 포세의 문학적 특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의 희곡 등장인물은 별다른 이름을 지니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작가의 진지한 의도를 반영한 결과인데, 작품 주제와 인물, 사건의 특수성보다는 보편성을 강조하고 싶어서라고 한다.

 

인물들은 항상 단순한 일반인들이며, 그들의 관계는 한눈에 파악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평범함과 보편성을 통해 우리의 삶을 다시 한번 성찰하게 만든다. 포세가 만들어 내는 인간관계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는 그 관계를 철저하게 관찰하고 파악해 낸다. (P.395)

 

인간이란 존재와 그 삶의 본원적 질문을 성찰하고 여기에 천착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보면 확실히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

 

또 하나 그의 희곡 대사의 간결성과 압축성, 대사와 사이의 침묵, 그리고 번역본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원문의 리듬감은 실제 무대 상연을 염두에 두는 연출자와 배우에게는 커다란 도전이라는 점도. 고전 희곡처럼 상세한 무대 설정, 행동 지문, 구체적이고 충분한 대사는 오히려 작가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기만 해도 기본은 하기에 어찌 보면 안정적이다. 반면 포세의 희곡은 최소한의 것만 제시하기에 나머지는 모두 연출자와 배우가 형상화해야 한다. 매우 어렵고 도전적인 과제지만 그만큼 문학과 다른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을 터놓고 있다는 점에서 자유로운 공연예술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무대에서 실제로 욘 포세의 희곡을 볼 수 있다면 굉장히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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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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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쥐스킨트의 대표작 <좀머 씨 이야기>의 좀머 씨와 이 작품의 조나단 조엘 씨의 공통점은 양자가 전쟁 트라우마를 겪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조나단의 유년 시절 전쟁 체험을 별일 아닌 듯 가볍게 물론 부모님이 모두 끌려가 사라진 사실이 가볍지는 않지만 - 다루는데, 말미에서 다시 한번 이번에는 무겁게 다룬다. 지하실에 갇혔던 기억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조나단이 집의 지하실에 갇힌 것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는 점은 그의 심리 속에 깃들인 강한 영향을 외면할 수 없게 한다.

 

아니, 그것은 어렸을 때 쓰던 방이 아니라 지하실, 정말 부모님이 살던 집의 지하실 같았다. 어른으로 성장했다는 것과 파리에서 늙어빠진 경비원이 된 것은 다 꿈이고, 어린아이가 되어서 집의 지하실에 갇혀 있는 것이 사실 같았다. 밖에는 전쟁이 나서 집은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P.105)

 

솔직히 처음엔 조나단의 행동이 와닿지 않는다. 일찍 부모를 잃고 친척 집에서 자랐으며, 부정한 아내가 가출해버렸다는 사실은 동정할 법하다. 그렇다고 조나단처럼 세상과 사회를 단절하고 멀리하는 게 일반적이지는 않다. 허름한 아파트의 조그만 자기 방을 안식처와 도피처로 삼고 애인처럼 간주하는 조나단처럼.

 

비둘기 사건은 분명 조나단에게 생경하고 충격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결말을 통해 거슬러 올라가면 차라리 그에게 긍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회를 거부하고 폐쇄적인 그만의 세계의 문을 열고 사회 속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두 마디 인사 외에는 대화 자체를 꺼리던 로카르 부인에게 당당히 불만을 토로하는 조나단의 용기와 변화를 주목한다. 옷이 찢기자 원인 제공의 우유 팩을 꽉 구겨서 잔디밭이든 모랫길이든 상관도 안 하고 아무 곳으로나 휙 집어던지는행동은 이전의 그라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을 떠나 그가 비로소 실제, 현실에 눈뜨고 있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그가 고대해 마지않는 스핑크스적 관용을 마음속에 불러들이려는 노력이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수레바퀴는 자꾸만 다시 궤도를 벗어났다. 눈을 깜짝거릴 때마다 그 괘씸한 모서리는 시야에서 사라졌고, 다른 것들만이 눈에 들어왔다. 인도에 나뒹구는 찢겨진 신문 조각이라든가, [......] (P.53)

 

조나단이 갈구하는 평화와 안온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에 불과하다. 20년이 넘는 경비원 생활을 하면서도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거리의 광경이 이제야 비로소 그에게 실체로서 다가왔다. 잇단 불운에 평온하였던 그의 심경은 불안과 자기혐오로 싹 트고 이어 자신과 세상을 향한 분노로 흔들리고 일그러지는데, 겉보기와는 다르게 위험한 현상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관용과 평온으로 위장한 채 거짓 삶을 살던 조나단의 가면이 벗겨지고 맨얼굴과 정신으로 실제 세상의 풍파를 마주친 놀라움과 두려움의 반응이 적절하다.

 

그의 몸속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자기 혐오가 모자챙 밖으로 점점 더 험악하게 노려보던 눈을 통하여 그의 몸 밖으로 빠져나가 완벽한 증오가 되어 바깥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시선 안에 들어오는 것들을 그는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의 추악한 찌꺼기로 덮어씌웠다. (P.85)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장면은 조나단과 거지의 비교에 있다. 힘들게 세상을 버텨나가는 자신에 비해 너무나 무위도식하는 거지를 향한 시기와 분노를 갖던 조나단은 어느 날 거지의 똥 누는 모습을 목격한 후 부러워하는 일말의 마음이 사라졌다. 그런 그가 공원에서 거지와 자신의 점심 식사를 비교한 후 다시금 자괴감에 빠진다. 퇴근길에 잡화상에 들러 산 저녁 식사 메뉴는 거지의 점심과 똑같다. 그리고 그는 자살을 결심한다.

 

사실 비둘기는 바퀴벌레와 쥐처럼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물은 아니다. 그저 평범한 새에 불과한 존재에게 조나단이 갖는 형언할 수 없는 공포는 왜 그럴까 하는 의아심만을 줄 뿐이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미신과 약점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타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지만 자신에게는 굉장히 중대하고 유의미한 그 무엇. 그것이 조나단에게 있어 비둘기로 촉발된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다행하게도 조나단은 자살하지 않는다. 다음 날 새벽 자기 집 아파트 복도는 말끔하게 치워졌고 비둘기는 사라졌다. 이웃과 세상과 단절하고 소외된 채 살아오던 조나단의 코와 귀에 처음으로 사람 사는 냄새와 소리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가 더는 홀로 된 존재가 아님을, 세상의 일원이 되었음을 감각적으로 일깨워주는 발견이다. 아마 그는 다시는 비둘기를 무서워하지 않으리라.

 

아래층 세대들이 있는 곳에서 일찍 깬 사람들이 내는 소리가 들렸다. 찻잔 부딪치는 소리, 냉장고 문이 닫히는 둔한 소리, 낮게 틀어 놓은 라디오 음악 소리. 그리고 그에게 아주 친숙한 냄새가 갑자기 코를 찔러 왔다. 라살 부인의 커피 향기였다. 숨을 몇 번 깊게 들이마시자 마치 직접 커피를 마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는 가방을 들고 길을 재촉했다. 갑자기 공포가 사라져 버렸다. (P.109)

 

조나단은 주변인이다. 앞서 읽은 소설을 포함하여 쥐스킨트의 작품 속 주인공은 언제나 그러하다. 그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항상 따뜻하다. 외면하고 무시하고 지나치기 쉬운 그네들의 미묘하고 연약한 행동과 감정선의 떨림을 절묘하게 포착하고 그것을 세상에 무심히 툭 던진다. 우리는 조나단과 같은 이들의 존재를 문득 깨닫는다, 마치 이전에 없었던 현상을 처음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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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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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면 정도의 길지 않은 소설인데, 짧은 1부와 긴 2부의 구성이다. 1부는 요한네스의 탄생을, 2부는 요한네스의 죽음을 다룬다. 표제는 탄생을 아침, 죽음을 저녁에 비유한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탄생이 짧고 죽음이 길다는 것은 인생이란 어차피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흘러가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듯. 삶은 죽음에의 전주곡이다.

 

모든 것이 지나가, 그의 때가 되면, 스러져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다, (P.15)

 

이 작품에서도 포세의 문학적 스타일은 여전하다. 짧고 압축적 문장, 반복적 문구, 마침표 대신 마침표의 생략 또는 쉼표의 사용 등. 그의 작품을 읽어나가면 자연스레 리듬감을 느낀다. 문장은 완결되지 않고 계속 이어져 나가는데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거야라고 말하는 듯하다.

 

아 아 저기 저기 아 아 아 저기 아 그리고 아 우 그렇게 아 에 아에 에 아 쏴쏴 아 윙윙 [......] (P.18-19)

 

우우 오 희고 우 그리고 부드러운 오 단단하고 오 오 희고 거의 뜨거운 그리고 오 오 고요한 아이는 요한네스라고 부를 것이다 (P.20)

 

이 고요하고 고요한 소리들 쉬쉬 그래그래 쉬 아 쉬 에 쉬쉬 우 오 우 그리고 스스로 느끼며 쉬 그렇지 그리고 그 고요함 (P.25)

 

어둠, 부드러움, 평온과 적막, 그리고 고요함은 태아의 세계다. 엄마 뱃속의 세상이다. 따뜻함에서 벗어나 혼자 고요히 고요히 앞으로 나아갈 때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1부에서 특징적인 대목은 의성어의 사용이다. 작품 전체에서 아이의 탄생 장면에만 등장하는 의성어는 생명 탄생의 신비로움을 일반적인 언어로는 형언할 수 없다는 뜻일까.

 

신생아 요한네스는 2부에서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다. 사랑하는 아내 에르나도, 서로 머리를 잘라주던 페테르도 이미 죽었다. 자녀와 손주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 살고, 막내딸 싱네만 근처에 살아서 가끔 들러준다.

 

2부는 늙은 요한네스가 환상과 회상 속을 넘나드는 하루의 여정을 담고 있다. 어느 날 하루를 시작한 요한네스는 뭔가 평상시와 다른 점을 느낀다. 몸이 유달리 가뿐하며, 사물도 낯설고 새롭게 보인다. 날마다 아침이면 게우던 것도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페테르와 함께 낚시하는데 루어가 물속 깊이 들어가지 않고 둥둥 떠 있기만 한다.

 

페테르, 이미 오래전에 죽은 그가 눈앞에 살아있다. 의아해하면서도 요한네스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단지 그의 몸이 여위고 머리가 희고 덥수룩한 게 마음에 걸릴 뿐이다. 그와 페테르가 자신들의 아내와 처음 만나는 장면의 환상, 집을 향해 가는 길에 죽은 아내 에르나의 발소리와 목소리를 듣고 행복감을 느끼는 요한네스, 무엇보다 막내딸 싱네가 자신과 마주 오면서도 알아보지 못한 것에 이상함과 서운함을 품는다.

 

자네도 이제 죽었네 요한네스, 페테르가 말한다

그리고 요한네스는 페테르를 바라본다, 그런 말을 하다니, 고약하게도, 내가 죽었다니

내가 죽었다고? 요한네스가 묻는다

자네도 이제 죽은 거라네 요한네스 그래, 페테르가 말한다 (P.128)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태어나서 삶을 누리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은 무엇이며 어떤 느낌과 의미를 갖는가? 인류의 영원한 숙제다. 이 소설에서 단테를 인도하는 베르길리우스처럼 페테르는 요한네스를 죽음의 세계로 안내한다. 죽음을 충격으로 받아들이게끔 여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여기게끔 서서히. 그럼에도 요한네스는 여전히 당혹스럽다. 마치 산 사람이 여행 떠나는 것처럼 이것저것 질문하니까, 페테르는 그가 아직 산 사람처럼 말한다고 할 정도로.

 

작가는 많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에게 죽음 또한 일상과 다르지 않다. 영혼이 육체에서 이탈할 때 날개가 돋은 듯 가볍고 자유롭다고 한다. 이날 아침 요한네스의 공기와도 같은 투명한 가벼움은 그래서 비인간적이고 비현실적이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본인은 모르지만 예리한 독자라면 벌써 알아차렸을 법하다.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점은 요한네스가 페테르와 함께 보내는 하루의 나날을 범상하게 여긴다는 데 있다. 그는 분명 오래전 페테르가 죽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페테르의 변해버린 외모를 딱하게 여길 뿐 그의 존재 자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가 노처녀 페테르센을 기다리는 것, 안내 페테르센이 요한네스의 팔짱을 끼는 장면, 일순간 그들이 환복한 채 마르타와 에르나와 첫 만남을 갖는 대목 등. 단순히 젊었던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의 회상이라고 치부하기엔 애매한 부분조차도 그는 일말의 의구심도 품지 않는다. 심지어는 에르나의 출현 자체도.

 

작품의 결말부는 요한네스와 싱네의 시선이 교차한다. 그들이 길에서 마주 지나치는 순간의 섬찟한 온기와 냉기의 대조. 싱네는 침대에 누운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요한네스는 페테르와 함께 길을 떠난다. 목적지도, 어떤 장소도 아니고 이름도 없는 그 어딘가로. 삶이란 원래 그러하다, 무에서 태어나 무로 사라지는 것. 모든 생명의 피할 수 없는 숙명.

 

페테르와 그는 그 자신이면서 동시에 아니기도 하다, 모든 것이 하나이며 서로 다르고, 하나이면서 정확히 바로, 그 자신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르면서 차이가 없고 모든 것이 고요하다 그리고 요한네스는 몸을 돌려 저멀리 뒤편, 저 아래 멀리, 싱네가 서 있는 모습을 본다, (P.134)

 

포세의 글은 대체로 모노톤이다. 화자의 목소리는 나직하게 침잠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그는 말수가 적으며 그나마도 눌변이다. 독자는 인물의 말보다도 그의 침묵과, 말과 말 사이에 오히려 주목하게 된다. 그의 독특한 글쓰기 스타일과 더불어 첫인상은 생경하지만, 일단 그의 글에 맛을 들이면 저절로 몰입하게 되는 묘한 맛이 있다. 말할 수 없는 것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한 작품을 썼다는 노벨문학상 선정 사유는 그런 면에서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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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린 - 낭만주의 시대를 물들인 프리마돈나의 사랑
빌헬미네 슈뢰더 데브리엔트 지음, 홍문우 옮김 / 파람북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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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존재를 무슨 계기로 알게 되고 읽게 되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점점 단기 기억력이 감퇴하는 징조이리라. 무엇보다 베토벤, 베를리오즈와 동시대 프리마돈나의 자서전이라는 점, ‘카사노바의 회상록에 버금갈 유일한 여성의 자서전이라는 아폴리네르의 말을 인용한 선전 문구 등이 끌렸다. 얼마나 짜릿하게 썼길래 19세기 중반에 센세이셔널을 일으켰을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내가 평생 고고하게 살아왔으리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 이런 고백은 힘겨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내가 스스로 쾌감을 즐기려 했고, 또 즐겨왔던 모든 순간에 대해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P.85)

 

유럽 에로티카 문학의 걸작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적나라한 장면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의 젊은 시절, 28세 이전의 성적 편력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노골적이고 세밀한 성적 묘사는 일체 없다. 저자가 관심을 두는 부분은 자신의 성적 호기심이 어떻게 발현되었고 이를 충족하기 위한 여정과 노력, 양태가 어떤 식으로 행해졌는지를 기술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당대 숙녀에게 요구되는 성적 정숙을 표면적으로 위장한 채 암암리에 동성애와 이성애를 즐기는 저자의 욕구는 솔직하기에 당당한 면도 있다. 지금이야 여성의 성욕을 인정하는 추세지만 2백 년 전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나는 방탕에 대해서 대다수 사람과 다른 입장이다. 누구나 남녀 가릴 것 없이 자기 몸을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신체의 자유가 있다. 그렇지만 타인의 자유를 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P.223)

 

성의 향유에 대한 저자의 태도는 이렇다. 다소 위험할 수 있는 견해지만, 자유의사에 따르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성에 대해서 관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린 소녀였던 저자는 부모님의 은밀한 부부관계를 엿보면서 성에 눈뜨게 된다. 놀라움과 호기심이 뒤섞인 채 소녀는 자신이 본 것의 실체를 알려고 애쓴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임에도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행위. 소녀는 훗날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것의 올바름과 아름다움을 비로소 인식한다.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나도 어머니처럼 살고 싶었다. 항상 남편에게 참신해 보이려 애쓰면서 말이다. 남편의 공상에 응하면서 한편 욕망을 감추려 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삶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열쇠 아닐까. 아무것도 아닌 듯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것을 숨기는 것 말이다. (P.98)

 

데브리엔트는 동성애를 꺼리지 않는다. 사실 그녀가 가장 먼저 쾌락을 알게 된 것 자체가 동성애를 통해서다. 마르그리트, 루돌핀, 로즈로 이어지는 관계에서 그녀는 여성에게 있어 성의 의미와 자세를 배웠으며 남성과의 사랑과는 다른 의미에서 사랑의 즐거움을 얻고 정서적 만족도가 높았다고 밝힌다. 확실히 이성 간에는 모종의 긴장이 흐른다면 동성 간에는 훨씬 더 자유롭고 느슨한 분위기가 허용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그녀는 동성애의 부도덕성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참다운 성은 더럽고 추잡한 개념이 없으므로.

 

저자는 오페라 가수로 성공을 거두고 대중의 주목을 받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항상 처신에 신경 써야 했다. 겉으로는 고고하고 정숙하되, 속으로는 욕망을 거리낌 없이 추구하는 그녀는 다양한 성적 모험을 경험한다. 일찍이 청년을 유혹하고, 이탈리아 왕자와 루돌핀과 함께 쓰리섬을 한다든지 마조히즘을 구경하거나 사형 장면을 지켜보고,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헝가리 산적들과 막무가내식 관계를 갖는다든지, 영국에서는 화제가 된 시간(屍姦) 소문을 듣고 경악하기도 한다. 도중에 상드와 뮈세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진진하게 반영되어 있다.

 

누군가 주장했지만, 성과 윤리는 사랑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특별한 여건에 의해 좌우된다. 이제부터 나는 이런 경험들을 모두 솔직하게 털어놓으려 한다. (P.11, <글을 시작하며>)

 

애정행각과 성적 탐닉의 모험담을 자랑하고자 아님을 저자는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그녀는 당대 사회에서 성에 대해 쉬쉬하는 분위기를 비판한다. 그토록 중요하고 성에 대해 무지하기에 많은 처녀들이 구렁텅이로 빠져든다고 주장한다. 남성의 성적 일탈에는 관대하지만 여성에게는 냉혹한 사회,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지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인 여성들에게 올바른 성 이해는 더욱 중요하다.

 

인간의 역사가 이브의 호기심으로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은 것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선,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은 것으로 낙원의 문은 닫히는 것이 아니라, 활짝 열리기도 한다. (P.73)

 

저자는 원죄를 거부한다. 성을 통해서 인간은 더욱 즐거움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강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덕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정숙의 가면을 쓸 필요가 없고 솔직해야 한다. 연인 내지 부부관계에서 정념과 욕정에 휩싸여 황홀을 맛보지 못한다면 누구에게서 구할 수 있을 것인가.

 

개인적으로 저자의 모험과 편력에 그다지 동의하고 싶지 않다. 자유로운 성적 탐닉은 일개인으로서는 무해하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사회 전체에 만연될 때 그것은 사회질서의 문란으로 이어짐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정당하고 떳떳한 법적 관계에서 인정받는 이성과의 성행위라면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그거야말로 외설, 퇴폐, 변태 등과는 거리가 멀다, 두 사람이 자유롭게 동의하였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저자의 회고록은 당대에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하는데, 무엇보다 그 자유로움이 사회적 억압과 금기를 깨뜨리는 해방감을 여성 독자들에게 주었던 데서 연유한다고 본다. 여성들은 이 책을 통해 자신들의 성이 숨기고 움츠려야 하는 부도덕한 존재가 아니라 당당하게 세상에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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