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기타맨 지만지 고전선집 386
욘 포세 지음, 정민영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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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욘 포세의 희곡 작품집이다. 데뷔도 소설이고, 근래는 소설가로 더 각광받지만, 포세가 세계적 지명도를 얻게 된 바탕은 극작가로서다. ‘입센의 후계자라는 칭호는 연극 무대에서 포세가 갖는 입지를 알려준다.

 

기존 포세의 작품세계를 소개한 글에서 일관적으로 등장하는 특징으로 반복과 축약, 침묵과 사이의 공간을 언급하였다. 마침표의 부재와 쉼표의 사용, 끝없는 반복은 소설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었지만 전자의 경우 무엇을 가리키는지 와닿지 않았다. 이제 희곡 작품을 읽으니 그게 무엇을 지칭하는지 금방 확인할 수 있다.

 

포세의 희곡은 읽기 위한, 보여주기 위한 작품이 아니다. 철저히 무대 상연을 전제로 하여 무대 위에서 배우가 실제로 발성하고 연기할 때 빛을 발한다. 음악적 요소의 문학화라는 특성도 실제 상연에서 두드러진다. 대사의 반복은 고저장단, 감정이 깃들어 있을 때 리듬이 발생하며, 늘였다가 줄었다가 하는 대사와 대사 사이의 짧은 사이와 침묵을 통해 이어짐과 중단을 통해 긴장과 여운이 어우러진다.

 

청년

(불안해하며)

집을 금방 못 찾았어

(짧은 사이)

하지만 결국 집을 찾아서 / 문을 두드렸는데 / 아무도 열어주지 않았어

(짧게 웃는다)

... (P.25)

 

대사 못지않게 많은 지문은 단지 인물의 행동을 알려주는 범위를 넘는다. 작가는 대사와 함께 지문을 통해 작품의 전반적 분위기와 진행을 이끌고 있다. 유독 많이 등장하는 “(짧은 사이)”는 기나긴 대사가 줄줄 이어지는 고전적 연극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면서, 인물의 사고와 행동이 단편적임을, 독자는 행간의 의미를 찾아야 함을 뜻한다.

 

처녀

(체념한 듯)

넌 귀담아듣는 적이 없어 / 그냥 서 있을 뿐이야 / 내가 뭘 말하면 / 넌 제대로 듣는 적이 없어 (P.34)

 

<이름>에서 독자는 등장인물 간 단절과 불통을 우선하여 발견한다. 처녀는 청년에게, 여동생은 엄마와 아빠 간, 무관심과 소통단절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현상이다. 처녀의 엄마와 아빠는 각각 청년을 처음 만나지만 무관심하다. 후자는 아예 청년의 존재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다.

 

(청년이 일어서지만 아버지는 마치 그를 무시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아버지는 안락의자에 앉기 전에 여동생에게 고개를 끄덕여준다. 아버지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청년을 의식하지 않는다.) (P.57)

 

아버지가 인간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쉽게 비난하지 말자. 그는 온종일 일에 허덕이다 지쳐서 귀가하는 가련한 인물이다. 엄마의 무심함도 마찬가지다. 그는 몸이 아파서 잠시 움직였다 다시 누워야 한다. 예비 처갓집에 와서 주구장창 책만 읽고 있는 청년도 딱하기 그지없다. 처녀와 청년이 결혼을 진정 생각하고 아기를 가진 것도 아니다. 처녀는 어떠한가? 옛 남자친구 비아르네를 맞이하는 그녀의 태도는 결코 훌륭하지 못하다.

 

떠난 청년, 뱃속 아기의 아빠인 청년을 처녀는 그다지 아쉬워하지 않는다. 그가 돌아올까, 그럴 거라고 믿지만 아니어도 어쩔 수 없지. 다른 가족과 마찬가지로 처녀 또한 청년을 진정 사랑하거나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므로. 처녀는 옛 남자친구 이름을 아기 이름으로 삼겠다고 말한다. 비아르네가 과연 달가워하고 동의할지 알 수 없다.

 

<기타맨>은 모놀로그다. 문득 쥐스킨트의 <콘트라베이스>가 떠오른다. 화자가 남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포세의 인물은 아내와 아들 하나가 있는 중년 남성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모놀로그는 오롯이 화자 자신에 집중하는 장르다. 화자의 생각, 화자가 바라보는 세상 모두가 철저하게 화자의 기준에 따른다. 상대역 없이 홀로 극을 이끌어가기에 모놀로그는 내면적으로 고독하다. 대체로 분량이 짧다. 길게 이어갈 극적 요소가 부재해서다.

 

기타맨은 외롭고 가난하다. 가족도 주변에 없다. 길거리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 나날을 버텨나가는 정도다. 조금 전에 아내를 화장한 남성과 기타맨은 본질적으로 동질적이다. 이 작품을 시종 관통하는 독특한 대사가 있다.

 

그런 거야 /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 말하자면 그런 거야 (P.187)

그런 거야 / (사이) / 모든 것을 위한 / 시간이 있지 (P.198)

모든 건 그 자체로 오는 것 / 생길 일은 그냥 그렇게 생기는 거야 (P.202)

 

달관적이면서 조금은 체념하는 듯한 대사. 기타맨의 비감의 정조와 함께 무기력함마저 자아낸다. 여기서 그의 삶이 이렇게 암울하게 스러져갈 것임을 예감하는 독자는 섣부르다. 그는 자신의 삶이 피동적으로 흘러감을 거부한다. 자신의 기타 줄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가는 그에게는 일종의 단호함마저 엿보인다. 내 생은 내가 정한다.

 

끝내는 거야 /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어 / 그것이 가져다준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 이제 가장 멋지게 끝내는 거야 (P.212)

 

살아생전, 이승에서는 행복과 평온을 누리지 못한 그가 이제 자신의 길을 가려고 하며, 자신의 노래를 부르려고 한다. 더 이상 기타는 필요 없고, 기타 케이스도 버린다. 우리는 기타맨의 삶을 불행하다고 일반화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 길을 주도적으로 선택하였기에 삶에 있어 그는 당당하였다. 소시민이지만 그는 비극적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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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작 - 잠 못 드는 사람들 / 올라브의 꿈 / 해질 무렵
욘 포세 지음, 홍재웅 옮김 / 새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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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3(<잠 못 드는 사람들>, <올라브의 꿈>, <해질 무렵>)으로 이루어진 연작소설이다. 주인공은 알리다와 아슬레이다. 두 연인이 고향을 떠나서 벼리빈[베르겐]으로 오기까지의 사연, 생존을 위한 분투 속에 아슬레의 죽음, 이후 홀로 남은 알리다의 삶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포세 소설의 특징인 마침표 없는 문장, 쉼표로 쭉 이어 나가는 문장과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표현 기법도 동일하다. 비교적 중후기에 발표한 작품이니만큼 초기작과는 달리 어색함과 맹목적 집요함을 덜고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훨씬 유연성을 보이고 있어 형식과 문체에 내용이 매몰되지 않고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인다.

 

포세는 많은 것을 묘사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등장인물은 단답에 그치거나 때로는 침묵으로 웅변하기에 시적이고 추상적이며 때로는 신비함마저 자아낸다. 독자는 그 속에서 두 사람의 언어와 행동의 의미를 추론해야 하는데 외형을 좇는 건 어렵지 않지만 내면의 흐름을 파악하는 건 다른 사안이다. 특히나 아슬레의 생각이 그러하다.

 

아슬레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정해졌음을 느낀다, 중요한 건 내가 아냐, 크게 떠오르는 것, 그게 중요한 거야, 바이올린 연주가 내게 가르쳐 주었어, 그걸 아는 게 바로 연주자의 운명이야, 크게 떠오르는 것, 나에게 그것은 알리다야 (P.77)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맥락을 단연 사랑에서 찾고 싶다. 진부한 용어이지만 불멸의 주제임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공간과 시간, 상황을 초월하는 그러면서도 비극적인 사랑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 작품에서 독자는 두 사람의 선택, 특히나 아슬레의 범법적인 행위에는 동조할 수 없다. 아슬레로서는 생존을 위한 불가피함을 우선시했겠지만, 보트하우스의 남자와 산파 노파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 그가 자신의 정체를 아는 노인과 조우하지 않았거나 차라리 노인의 요구대로 맥주 한 잔 사 주었더라면 교수형에 이르는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한편으로 아슬레의 생각과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궁금과도 연결된다.

 

두 사람을 둘러싼 환경은 호의적이지 않다. 두 연인은 거창한 걸 원하지 않았다. 단지 의식주만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지만, 고향의 보트하우스에서도 내쫓기고 알리다의 집에서도 냉대받는다. <잠 못 드는 사람들>의 서두가 비 내리는 밤에 잘 곳을 찾아 헤매는 두 사람과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반복적인 대치는 벼리빈이라는 도시의 비정함을 잘 보여 준다.

 

반지를 사러 서둘러 벼리빈을 향하는 아슬레와, 일말의 불안한 예감을 품는 알리다. 그가 반지를 사고 곧바로 돌아왔다면 어떠했을까. 솔직히 반지조차도 힘겨운 형편에 화려한 팔찌는 무모한 동시에 무의미하다. 반지는 두 사람이 결혼한 사람임을 표시해주며, 특히 임신한 알리다를 위한 방비책이라도 되지만 팔찌는? 나중에 사도 괜찮은 건 바로 팔찌였음을.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무언가 더 귀하고 좋은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은 사랑에 빠진 남성의 공통된 욕망이겠지만, 그것이 자신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음을 모르는 것은 비단 사마귀 수컷만이 아닐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위한 도덕과 법률의 일탈, 눈부신 보화에 대한 현혹, 끝내 벗어나지 못한 금발 여인의 유혹에 대한 소극적 대응 등. 이처럼 <올라브의 꿈>은 근본적으로 두 연인의 사랑이라는 빛과 함께 피할 수 없는 어둠을 동시에 품고 있다.

 

올라브는 춥다고, 덥다고 그리고 모든 것이 공허하다고 느낀다 그는 두 눈을 감고 그저 앞으로 걸으며 비명과 외침을 듣는다 더는 아무것도 없어, 지금 존재하는 것은 떠오르는 것뿐이야,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어, 남은 것은 떠오르는 것뿐, 내가 떠오르고, 알리다가 떠올라, 하고 그는 생각한다 (P.185)

 

그럼에도 독자는 아슬레를 비난할 수 없으며 알리다에 대한 더 없는 연민과 동정을 품게 된다. 두 연인의 운명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숙명으로 여겨지며 알리다도 어쩔 수 없음을 알기에 아슬레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막지 못하였던 것이 아니겠는가. 자신보다 상대방을 더 귀하게 여기고 높이 떠받드는 것, 상대방을 위해 괴롭고 힘들더라도 그것이 고통과 슬픔이 아닌 기쁨과 행복으로 다가오는 것,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내 생명조차 아깝지 않고 세상 전부를 적으로 하더라도 꺼리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아슬레의 사랑을 더없이 깊고 진한 사랑이라고 받아들이게 될 수밖에 없다.

 

아슬레가 나는 당신 안에도 그리고 아기 시그발 안에도 존재하고 있어, 라고 말하고 그러자 알리다가 그래, 당신은 존재하고 있어, 앞으로도 늘 그럴 거야, 라고 말한다, 그리고 알리다는 이제 아슬레는 오직 나와 아기 시그발 안에서 살아 있는 거야, 이제는 내가 살아 있는 아슬레야, 하고 생각한다, 그러자 아슬레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거기 있어, 난 당신과 함께,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어,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 내가 당신 곁에 있을 거야, 라고 아슬레가 말한다, (P.232)

 

사랑은 세월의 경과도 비껴감을 <해질 무렵>은 보여 준다. 알리다가 오슬레이크와 재혼해서 낳은 딸 알레스는 이제 노인이 되었고, 죽은 어머니 알리다의 영혼을 집안에서 자주 맞닥뜨린다. 알리다는 오래전 스스로 바닷물에 들어간 걸로 알려져 있는데, 새삼스럽게 다시 이승과 집안을 떠나지 못함은 무엇일까. 작가는 알레스를 알리다의 현현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바다를 아슬레로 여기고, 아슬레의 품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옛날의 알리다와 현재의 알레스. 여기서 과거는 현재와 연결되어 시간의 개념은 스러지며, 삶과 죽음의 경계 또한 모호해진다.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작품이다. 어둡고 그윽하지만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깜깜하지 않다. 새벽녘 어슴푸레하게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불분명하고 신비로운 시간, 세상 만물이 잠들어 있고 깨어나지 않은 고요함에 휩싸인 시간. 아슬레와 알리다의 사랑과 삶을 통해 작가가 보여 주는 정서는 이것이다, 백야(白夜). 독자는 포세의 글과 문장을 통해 시와 음악의 문학적 발현을 떠올릴 뿐만 아니라 그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자아내는 북구의 지리적, 기후적 특색에 서서히 스며들게 된다. 그 속에서 시시비비를 분별하고 논한다는 짓은 어쩌면 덧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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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리 원정기 - 중세 러시아의 영웅 서사시
최정현 옮김 / 뿌쉬낀하우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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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기회에 <이고리 원정기>를 소개한 강연 영상을 보게 되었다. 중세, 러시아, 영웅 서사시라는 미지의 호기심을 당기는 조합인데다, 비로소 보로딘의 오페라 <이고르 공> 또는 <이고리 공>의 원작임을 알게 되었다.

 

1. 편집자 해설 - 드미트리 리하쵸프

2. 이고리 원정기초판 간행본(1800)

3. 이고리 원정기대역 번역

4. 이고리 원정기해설 번역

5. 편집자 주

6. 부록

- 키예프 루시 공령과 전체지도

- 이고리 공의 원정도

- 공후 가계도

7. 번역을 마치며

 

이 책은 독특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일반적인 번역본 출판과는 전혀 다른데, 아무래도 처음 소개되는 작품인데다 전문연구자와 일반 독자 모두를 고려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12세기 중세 작품이므로 현대어 편집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옮긴이는 드미트리 리하쵸프의 편집본을 저본으로 삼았기에 작품해설로서 편집자 해설을 수록하고 있다. 이어서 초판 간행본 원문을 영인본 형태로 담고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연구자를 위한 몫이다. 번역문도 대역 번역과 해설 번역이라는 두 가지 번역을 나란히 소개하는데, 대역 번역은 원문과 번역문을 병치하는 방식으로 연구자를 위한 배려인 동시에 원전 번역의 충실성을 선호하는 독자를 위한 것이다. 솔직히 대역 번역만으로는 여러 가지 이해가 어렵기에 해설 번역은 관련 사건의 배경과 보충 설명 등을 곁들여 이해를 제고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부록의 지도와 가계도는 작품의 지리적 배경과, 작품 속에서 언급되는 여러 인물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작품 원문이 길지 않고 해설이 충실하게 되어 있으므로 전반적 이해에 큰 어려움이 없다. 미처 간과했던 초기 러시아 역사를 파악하게 되는 유익한 효과도 있다. 특히 몽골의 침략 이전에 존속했던 키예프 루시국가의 존재, 작품 속에 무수히 표현되는 루시의 의미가 반드시 러시아를 뜻하는 협소한 의미가 아니라는 점 등을 알게 되면 오늘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역사적 배경도 대강이나마 짐작게 한다.

 

공후의 이성은 / 열정으로 흐려졌다. / 위대한 돈 강에 대한 욕망은 / 흉조마저 외면해 버렸다. (P.115)

 

여기 이고리 공은 황금 안장에서 / 노예의 안장으로 옮겨 탔다. / 도시 성벽의 망루에는 좌절감이 흘렀고, / 기쁨은 사라졌다. (P.137)

 

이 작품은 전형적인 영웅 서사시가 아니다. 이고리 공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영웅이 아니다. 무모한 명예심에 매몰되어 자신을 치욕에 빠뜨리고 수많은 병사들을 사지에 몰아넣었으며, 조국을 적국의 말발굽에 휩쓸리게 만든 인물이다. 작가도 이고리 공 자체에 비판적 시각을 보인다. 작가는 이고리 공의 실패를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행위로만 판단하지 않는다. 그것은 서서히 균열되어 왔던 키예프 루시 국가가 결정적으로 분열되었음을 보여주는 증좌로 받아들인다. 이고리의 패배는 어쩌면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다.

 

자신들의 간교한 계약을 위해 / 이교도를 불러들여 / 루시 땅을 공격하도록 하고, 브세슬라브의 유산을 파괴하도록 했소. / 형제들간의 내분 때문에 결국 / 폴로베츠인들의 침략이 시작된 것이오. (P.155)

 

이고리는 굳이 폴로베츠인들을 정복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 이미 전해에 키예프 루스 연합군은 폴로베츠인을 정벌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해설 번역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그와 동생 브세볼로드가 원군 없이 독자적으로 적진 깊숙이 쳐들어 전투를 벌이는 건 무모한 행위일 따름이다. 이 점이 보로딘의 오페라와 차이점이다. 보로딘은 폴로베츠인들이 쳐들어와 이고리 공이 방어전을 벌이다가 포로가 되었다고 설정한다.

 

이고리 군의 궤멸 이후 폴로베츠인들은 국경 수비가 무너진 키예프 루시의 일대를 침략하고 약탈한다. 다른 공후들은 자신들의 성을 굳게 지키고 방관만 할 뿐 합심하여 유목민족을 퇴치할 방도를 세우지 않는다. 오로지 힘없는 민중들만 피해와 고초를 겪을 뿐. 여기서 시인은 격분하고 호소한다. 제발 힘을 합쳐서 외침을 물리치자고 말이다.

 

지나간 과거를 현재와 비교하며 이고리 공의 원정 만을 이야기하며 그를 일방적으로 칭송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이고리 공의 원정에 대한이야기를 하며 루시 땅과 역사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이다. (P.22)

 

시인은 이고리 공의 실패한 원정을 일종의 반면교사로 삼는다. 그가 영웅이기에 그를 주인공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의 실패가 담고 있는 의미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시의 형식으로 민중과 공후들에 호소하기 위한 것이다. 반목과 불화의 결과가 개선되지 못한다면 폴로베츠인들의 침입은 감기에 불과하지만, 후일 치명적인 전염병이 들이닥친다면 그때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로. 역사는 몽골 제국의 실례를 보여준다.

 

이 작품을 대하는 인식의 차이는 러시아와 다른 나라 간 입장이 극명하게 갈릴 수 있다. 러시아에서 보자면 이 시는 민중주의와 애국주의가 결합한 더없이 위대한 중세 고전이라고 칭할 수 있다. 이 작품이 지닌 언어적, 문화적 가치는 논외로 치고 말이다. 반면 12세기 전 세계적 시각으로 볼 때 과연 이 시가 편집자와 번역자가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듯이 대단한 예술성을 지닌 작품인지 문외한으로서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화려한 표지와 고급 용지의 사용, 충실한 내용과 번역, 부록 등 책 자체만 놓고 보면 잘 만든 책이다. 대중성 관점에서는 일반 독자가 접근하기 어렵고 크게 흥미를 느낄 만한 작품이 아니라는 점도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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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하우스
욘 포세 지음, 홍재웅 옮김 / 새움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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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 포세의 초기 소설이다. 앞서 읽은 <저 사람은 알레스>보다 먼저 시기의 작품임에도 포세의 특징적 작품 요소는 여기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집요할 정도로 반복적 문장의 사용, 마침표 대신 쉼표의 선호, 화자의 계속적 변화. 반면 자주 보이는 마침표의 존재, 마침표 없는 문장의 부재, 화자 교체의 느슨함에서 아직 그의 글쓰기 스타일이 확립되지 않았음도 엿볼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밖에 나가지 않는다. 불안감이 엄습하여 나는 밖에 나가지 않는다. 이 불안감이 엄습해 온 것은 바로 지난 여름이었다. 나는 적어도 10년은 보지 못했던 크누텐과 다시 마주쳤다. 크누텐과 나, 우리는 늘 함께였다. 내게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불안 증세로 내 왼팔, 내 손가락이 쑤신다. 난 더 이상 밖에 나가지 않는다. (P.8)

 

2백 면 남짓한 작품에서 위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문장의 반복이 몇 회나 이루어졌을까. 작품의 전반적 분위기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읽는 이를 시종일관 움츠리고 불안하게 만드는 소설은 함순의 <굶주림> 이후 처음이다. 독자는 화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원인에 궁금증을 품게 되며, 작가는 쉽사리 독자에게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는다. 마치 되풀이되는 문장들의 폭격을 감내하며 버틸 수 있는 독자에게만 찔끔 조금씩만 풀어놓겠다는 듯이.

 

언뜻 매우 재미없고 따분하며 지겨울 것 같지만 의외로 독서는 제법 속도감을 지니며 술술 진행된다. 그것은 독자가 곧 화자의 불안감에 전염되며 그와 자신을 동일화하기에 가능하다. 나는 10년 만에 고향 친구를 만나지만 반갑지 않다. 오히려 그로 인해 내게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사회 부적응자인 화자의 오롯한 개인적 문제일까? 아니면 그와 나 사이에 독자는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던 영향일까? 독자는 궁금하다. 이 궁금증의 일단을 아내의 언행을 향한 크누텐의 생각을 통해 드러낸다.

 

크누텐은 확실히 의처증이 심한 인물이다. 아내가 화자와 처음 인사하는 장면에서조차 그는 아내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본다. 아내가 배를 타고 나가서 협만에서 화자와 함께 낚시하는 걸 바라보는 크누텐은 초조하고 안절부절못한다. 이처럼 그는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을 화자와 부정한 만남을 가지려는 의도로 해석한다. 아내는 다른 남자에게 항상 그렇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크누텐의 아내가 전적으로 정숙하다고 하기에도 찝찝하다. 그녀는 분명히 크누텐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행동을 한다. 화자에게 접근하고 신체적 접근을 하는 건 그녀의 직접적이고 의도적인 행동이다. 남편이 그것을 의식하고 의심하며 불안한 심리에 빠지리라는 것을 알면서 말이다. 도대체 이 부부는 어떤 관계인 걸까.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크누텐은 곧장 길을 따라 걸어가 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크누텐은 지금은, 이러는 건 아니야, 그냥 가는 게 좋겠어, 모든 걸 아니까, 분명 우릴 봤을 거야, 이건, 지금은 반드시 자리를 떠야 해, 어디든 떠나 버리는 거야, 그냥 그럴 수는, 반드시 그럴 수 있어야 해, 그런 모든 것은, (P.136-137)

 

화자는 크누텐이 자신을 만나는 걸 두려워하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확실히 크누텐은 화자를 만나는 걸 탐탁지 않아 한다. 아니 고향에 방문하는 걸 꺼린다. 무도회의 밤에 크누텐의 아내는 집에 가길 내키지 않아 하고 화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 크누텐은 어둠 속에서 이것을 지켜보며 다음 날 아침 일찍 떠나 버린다. 화자를 보았지만 외면한 채. 화자와 크누텐, 그리고 독자는 혼란과 불안에 휩싸인 채 두 사람의 헤어짐을 지켜볼 뿐이다.

 

오늘 아내가 그 친구를 바라보던 눈빛, 내가 알았어야 했는데, 늘 이런 식이지, 크누텐은 길가에 서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그때, 그 무도회에서, 그 여자아이한테, 난 아무런 뜻도 없었어,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몰랐다고, 그건 그냥 그렇게 됐던 거지, 아무것도 아니었어, 하고 그는 생각한다. (P.153)

 

1부에서 포세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더 깊숙하고 은밀한 이야기를 펼쳐 보이는 건 2부에서다. 2부는 주로 크누텐이 화자 역할을 담당하는데, 그와 의 만남부터 무도회를 거쳐 떠남에 이르기까지를 크누텐의 시선과 생각으로 독자에게 들려준다. 비로소 독자는 보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와 크누텐의 사이를 헤아려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와 서로 호감을 느끼고 있던 여자아이, 그 여자아이와 크누텐 사이에 모종의 사건이 벌어졌고 그것이 크누텐과 사이를 멀어지게 하고, 크누텐이 고향을 떠나 돌아오길 꺼리는 까닭임을.

 

독자는 문득 의문을 품게 된다. 작중에서 는 약간은 사회 부적응자지만, 크누텐을 만난 때부터는 아예 자폐아처럼 집 밖에 나가기를 거부하며 틀어박혀 지낸다. ‘가 하는 유일한 행위는 글쓰기며, 그것은 자신에게 엄습하는 불안감을 달래기 위한 급박한 조치다. 우리는 를 동정하고 딱하게 여겨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제 누가 더 불쌍하고 가련한 삶을 살고 있는가 반추해보면 크누텐이 더 낫다는 확신이 없다. 그는 외견상 정상적인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와 그의 아내의 관계, 아내를 향한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 이를 못 견뎌 하고 오히려 엇나가는 아내의 행동을 종합해 볼 때 그가 보다 더욱 심한 사회 부적응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가 당신 그렇게 모든 일을 꺼려 하면 안 돼, 그러면 안 된다고, 당신이 오랜 세월 보지 못한 사람들을 마주친들 아무런 문제 될 게 없어, 어째서 그 사람들과 말을 섞게 되는 걸 걱정하는 거야, 어떤 사람도 그 일을 그렇게나 걱정스러워하진 않아, 라고 말한다, 크누텐은 대답을 하지 않는다, (P.179)

 

엄습하는 불안감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는 사회로 향한 문을 닫아걸고 글쓰기에 매진하지만, 크누텐은 평온과 평화를 찾아 떠나고 도망간다, 자신이 영원히 편안함을 누릴 수 있는 집으로. 그리고 크누텐의 아내는 죽음을 선택한다.

 

피오르가 뿜어내는 적막한 자연의 분위기, 외진 시골 마을의 토속적이며 폐쇄적인 마을의 분위기, 청소년 시절 우정과 사랑의 공간이었던 보트하우스는 훗날 관능과 불륜의 위험스러운 공간으로 변모한다. 포세의 메시지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가 들려주는 방식, 즉 독특한 문장 기법과 지속적 반복 기법은 독자에게 삶은 쉼 없이 계속되며 우리네 삶은 새롭기보다는 반복이 본질임을, 그 속에서 삶의 실체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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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렐류드 - 찬란한 추억의 정원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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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1. 어린 소녀

2. 딜 피클

3. 비둘기 씨와 비둘기 부인

4. 오락가락하는 마음

5. 프렐류드

6. 독일인들과의 식사

7. 피곤한 로저벨

8. 레지널드 피콕 씨의 하루

9. 최신 유행 결혼생활

10. 가든파티

11. 미묘한 마음

12. 항해

13. 죽은 대령의 딸들

14. 첫 무도회

15. 카나리아

16. 6년 뒤(미완)

 

<차 한 잔>에 이은 코호북스의 맨스필드 단편선 두 번째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맨스필드의 주요 작품을 연대순으로 골고루 수록하였다. 이 두 권의 책이면 맨스필드의 작품세계를 일목요연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마찬가지로 이미 읽은 작품인 <비둘기 씨와 비둘기 부인>, <피곤한 로저벨>, <최신 유행 결혼생활>, <가든파티>, <항해>, <죽은 대령의 딸들>, <첫 무도회>는 여기서 별도로 언급하지 않으련다.

 

맨스필드의 작품 속에서 아버지는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그는 가정의 평화롭고 정상적인 생활을 방해하고 깨뜨리는 존재다. 자신은 가족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개인적 역량과 자질을 넘어서 가부장 체제에서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는 것으로 굴레 지운다. 그런 면에서 <어린 소녀>는 아버지를 향한 감정이 두려움에서 긍정(아직 사랑까지는 아니다)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이채롭다.

 

가부장제 속 결혼 생활은 남편과 아내 사이를 불평등하고 상호 소통 불가능하게 악화시키는 측면이 있다. <만에서>와 마찬가지로 쌍둥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프렐류드> 속 린다는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증오한다. 남편의 존재로 자신은 어쩔 수 없이 출산과 육아, 가정의 속박에 갇혀 있어야 하는 본능적 거부감에서다.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모든 것이 극명해졌다. 그녀가 그에게 느끼는 모든 감정이 뚜렷하고 명백하고 진실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 증오심은 다른 감정들과 마찬가지로 진짜였다. 이 감정들을 조그만 주머니에 담아서 스탠리에게 건네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마지막 감정은 깜짝 선물로 주고 싶었다. (P.109)

 

결혼 생활이 행복한 것인가 설문조사 해보면 의외로 압도적인 긍정 답변을 거두지 못할 것이다. 마땅히 행복해야 하고 실제로 행복할 것을 기대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부부간이 원수 사이로 전락하는 예도 드물지 않다. <레지널드 피콕 씨의 하루>에서 레지널드가 날마다 고민하고 번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차라리 남이었다면, “친애하는 숙녀분이라고 부르면서 비즈니스적으로 행동할 수라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러한 결혼 생활의 일 극단의 모습을 바로 <최신 유형 결혼생활>에서 엿볼 수 있다. <독일인들과의 식사>에서 화자가 끝내 서둘러 식사 자리를 떠난 이유도 비슷하다. 영국과 독일이라는 긴장된 국가 정세뿐만 아니라 여성에게 요구되는 가정주부의 역할 인식 강요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젊은 남녀는 항상 짝을 갈구한다. 호르몬 작용이라는 생물학적 원인 외에 사회적, 경제적 이유도 결코 간과하지 못한다. 여러 면에서 더 우수한 짝을 고르려는 본능과 현실과의 부정합, 사랑과 사랑의 엇갈림, 사랑의 성취에 대한 이성 간의 접근 차이 등 연인 관계는 삐거덕거릴 개연성을 항상 품고 있다. <오락가락하는 마음>의 바이올라는 미혼여성의 한 경향을 대변한다. 그녀의 마음 태도를 뭐라고 할 필요 없다. 그녀는 결국 연인 캐시미어를 이해하지 않는가. 그녀가 캐시미어를 떠났다면 어느 순간 문득 자신의 선택에 회한의 탄식을 내뱉었을지 모른다. <딜 피클>의 그녀처럼.

 

, 세상에!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이런 행복을 감히 내팽개치다니. 세상에서 그녀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을 떠나보내다니. 이제는 너무 늦었나? 영영 기회를 놓친 걸까? 그녀야말로 그가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는 장갑과도 같은 처지였다. (P.22)

 

이처럼 오락가락하고 미묘한 마음은 우정에서 애정과 사랑으로 진전되는 마음에서 항상 나타나는 현상이다. 처음부터 자신의 마음은 물론 상대방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다면 사랑에 싹튼 청춘들이 흘리는 고뇌의 눈물은 훨씬 줄어들었을 테니. <비둘기 씨와 비둘기 부인>은 물론 <미묘한 마음>에서 우정으로 충만했던 두 사람이 문득 거리감을 느끼고 불편함에 어색하며 마음속 아픔을 깨닫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우리는 부자연스러울 뿐이다. 사랑, 갈등, 다툼, 헤어짐, 그리움, 재회의 사이클 속에서 우리는 서서히 상대방을 우리 자신 속에 받아들이게 된다.

 

당신이 내게 상처를 입혔어. 내 가슴을 찢어놓았어.’ 그녀의 심장이 말했다. ‘왜 안 가는 거야? 아니, 가지 마. 여기 있어. 아니야, !’ 그녀는 어둠이 내린 바깥을 내다보았다. (P.192)

 

사랑뿐만 아니라 우리네 인생 자체도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다. <가든파티>는 파티와 죽음이 병치되어 있는 현실을 나직한 씁쓸함으로 그려낸다. 로라를 제외한 다른 식구는 이웃 남자의 죽음을 무관하게 인식하지만, 로라는 뭔가 옳지 않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그녀는 망설이고 현실 타협을 합리화한다. 삶은 참 그렇지. 라는 모호한 인식은 로라 남매뿐만 아니라 맨스필드가 독자에게 던지는 경구다. <첫 무도회>의 레일리가 느끼는 희비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인생에 슬픔이 내재해 있다고 해서 내내 슬퍼만 하고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카나리아>의 아름다운 울음소리에 슬픔이 존재한다고 섣불리 생각할 수 있는가.

 

그 달콤하고 명랑한 노랫소리 아래 결국 이런 것이, 슬픔이 존재한다는 게 놀랍지 않나요? , 무엇이었을까요, 내가 들은 그것은. (P.257)

 

<프렐류드>는 이 책의 수록작 중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한다. 구성과 내용 면에서 <만에서>와 짝을 이루며 서로 보완적 역할을 하고 있다. 린다는 여전히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으며, 베럴은 자신의 처지에 침울하고 조바심을 낸다. 그녀의 불행과 숨겨진 욕망은 훗날 <만에서>에서 행동으로 구체화된다.

 

<6년 뒤>는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그것을 통해 결국 무엇을 작가가 염두에 두고 있는지는 미완작이므로 분명하지 않다. 그들 부부의 항해가 이것과 어떤 관계를 가졌는지도.

 

이제 캐서린 맨스필드 작품의 독서는 여기서 끝낸다. 시중의 몇 권에서 아직 읽지 않은 단편을 산발적으로 찾아볼 수 있지만 주요한 대다수를 읽었기에 아쉬움은 없다. 맨스필드를 읽기 전에 <가든파티>라는 낭만적 표제는 뭔가 여성적이고 가정적인 반짝거리는 재미와 아름다움을 줄 거라고 지레짐작하였다. 생소하고 이질적인 문장의 전개에 잠시 당혹스러웠지만 그녀 특유의 무뚝뚝하지만 미묘하면서도 차갑지는 않은 냉소적인 표현에 매료되었다. 이 책의 옮긴이의 말을 인용하며 그녀 작품세계를 마무리한다.

 

기승전결식 플롯의 부재와 모호한 결말 때문에 맨스필드의 작품은 때론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야기에서 누구나 알아보고 동조할 의미를 찾을 수 없어 당혹스럽거나 어리둥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맨스필드는 플롯을 거부하고 새로운 형태를 찾고자 한 선구자이자 모험가였다.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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