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론 한길그레이트북스 171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지음, 김창성 옮김 / 한길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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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케로의 <국가론>은 기구한 사연을 지닌 저서다. 씌어진 지 2천 년 가까이 지나서야 겨우 실물이 발견되었으며, 그나마도 이중으로 기록된 양피지 문서로 불완전하게 존재한다. 그나마도 원저 전체의 30% 내외만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전 6권 가운데 후반부의 세 권은 누락과 판독 불가가 많아 원저의 본모습을 확인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키케로의 <국가론><법률론>은 명백히 플라톤의 동명의 두 저서에 대한 오마주다. 플라톤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존경의 마음을 키케로는 공개적으로 드러낸다. 혹자는 키케로를 플라톤의 아류로 간주하기도 하는데, 고대 로마의 정치사상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저작이라는 점, 단지 이론이 아니라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정치가이자 사상가가 당대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고대 로마의 정치체제와 인식을 보여준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주목할 가치가 있다.

 

1권의 주된 내용은 이상적인 국가의 형태는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다. 스키피오를 중심으로 여러 인물이 주고받는 대화체 서술인데, 다른 인물들이 질의하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답변하는 방식을 취한다. 독자는 그것이 키케로의 사상임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정체(正體)는 기본적으로 왕정, 귀족정, 민주정의 세 형태로 구분된다. 세 정체는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지닌다. 따라서 어느 하나만의 요소를 따르기보다는 삼자의 적절한 혼합이 보다 이상적인 체제라고 본다.

 

세 가지의 원초적인 국가의 종류 중에서, 내 생각에는 왕정이 훨씬 뛰어난 것이기는 하나, 국가의 세 양식이 평균화되고 적절히 절제된 것이 왕정 그 자체보다 앞설 것입니다. (P.159)

 

2권은 고대 로마의 정치사를 전반적으로 훑고 있다. 로마는 왕정에서 출발하였고, 타르퀴니우스를 마지막으로 공화정으로 전환하였다. 귀족 중심의 지배 체제가 혹심해지고 참주정이 출현하자 평민들이 반발하였고 민회와 호민관의 직위를 인정해 주는 타협안이 허용되어 키케로 당대에까지 이르렀다는 개요다. 키케로가 로마사를 예시로 든 까닭은 앞서 말한 세 정체의 혼합에 이르는 과정이 로마 역사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본 탓이다. 즉 스키피오 당대 로마 정치체제야말로 가장 이상적이고 우월한 체제라는 인식과 자부심이 깃들어 있다.

 

사실 나는 어느 국가도 체제 면에서나 질서의 측면에서나 규율의 면에서 우리 선조들이 조상들로부터 처음부터 받아서 우리에게 물려준 국가와 비교할 수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판단하고 감지하고 있으며 이를 명백히 주장하고자 합니다. (P.160)

 

키케로가 자신의 시대보다 더 이른 시기를 이와 같이 이상으로 생각한 것은 당대의 정치 현실이 이상에서 벗어나서 타락하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귀족 중심 공화정의 안정성이 흔들리며 평민들의 발언권이 확대되고 호민관의 권력이 강해지는 현상을 부정적으로 판단한다. 키케로는 기본적으로 민주정을 우민(愚民) 정치와 동일시하여 배척하는 태도다. 이 작품에서도 계급차별을 정당화하는 의견과, 개혁을 추진하여 귀족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그라쿠스 형제에 대한 적개심 어린 비판을 확인할 수 있다. 평민, 즉 인민은 국가의 필수적 구성 요소이지만 어디까지나 계급 체제의 가장 아래에서 지배를 받으며 국가를 지탱하는 역할에 만족해야 하는 존재다.

 

(라일리우스) 어떻게 대중이 주인노릇하는 상태 속에 국가라는 이름이 생기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오. [......] 오히려 인민이 한 명의 사람처럼 모일 때는 참주나 다름없는데, 이 경우가 더욱 무서운 법이지요. 왜냐하면 인민의 모습과 이름을 흉내 낸 것보다 더 잔인한 짐승은 없기 때문입니다. (P.255-256)

 

근원으로 돌아가 국가의 출현 배경에 대해서도 키케로는 논의를 빠뜨리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국가의 탄생은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유사한 개념에서 비롯한다. 인간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국가라는 결속체를 이루며, 기초 질서로서 법에 대한 동의와 지배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전제 요건이다. 국가 존속에 필수적인 법에 대해서는 <법률론>에서 본격적으로 법철학을 다루고 있지만, 이 책에서도 역시 법은 신의 의지에 따른 것으로 자연에 부합하며 올바른 이성이라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최고의 정치체제가 갖추어졌다고 해서 최상의 정치가 저절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하드웨어가 원활하게 작동될 수 있도록 구현하는 소프트웨어가 바로 정치가의 역할이다. 5권에서 이를 다루고 있다.

 

툴리우스는 자신의 <국가론>에서 국가의 통치자는 최상의 위인이며 가장 학식이 많아서 지혜롭고 정의로우며 절제하고 연설을 잘해 평민을 통치하기 위해서 마음에 담은 비밀을 유창한 연설로 쉽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P.285)

 

국내외 정치 상황에서 워낙 형편없고 비정상적인 작태를 많이 보아서인지 이상적인 정치가란 굉장히 낯설고 공허하게 들리지만 어쨌든 필요악이라고 할지라도 정치가란 존재는 필요하다. 정치가가 자신의 역할 수행을 위해 최대로 노력하는 동기는 무엇일까? 권력욕, 금전욕, 유권자에 의한 배척? 아니다. 키케로는 명예라고 주장한다. 이상적인 국가를 이상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키를 잡는 데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라는 것이다. 선조들이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서 하였듯이 참다운 정치가라면 생전뿐만 아니라 사후의 평가도 귀 기울이게 마련이다. 무덤 속에서조차도 세인들이 자신의 정치 업적에 대한 찬사를 듣는다면 더없이 행복함을 느끼리라.

 

(스키피오) 꿈에 관해 언급하면서, 부수적으로 그는 하늘에서 국가들의 선한 통치자들을 위해서 더 안정되고 생기 있는 종류의 보상이 간직되고 있음을 보았다고 했다. (P.304)

 

키케로에게 있어 정치는 고답적 학문의 영역이 아니다. 선과 덕의 이론 전개도 의미가 있지만 이를 직접 실천하는 것은 세계와 사람에 미치는 파급력이 어마어마하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와 달리 그의 <국가론>이 더욱더 실제적이고 절절함이 배어있음은 정치가로서 자신의 이상과 꿈이 배어있기 때문이리라.

 

철학자들이 언변으로 겨우 몇 사람을 설득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 것을 대권과 법률상의 처벌에 의거해 모든 사람에게 강제하는 자야말로 박식한 사람들보다 더욱 귀히 여겨야 할 것이다. 박식한 자들의 언변이 아무리 철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공공의 법과 관습에 의해서 선하게 구성된 국가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인가? (P.102)

 

옮긴이는 원작의 이해를 돕기 위해 충실한 해설 서비스를 제공한다. ‘키케로를 통해 본 고대국가의 이성과 현실이라는 작품 해설과, 로마의 관직·제도 일람이 그것이다. 특히 작품 해설에서 <국가론>의 발견 비사, 키케로의 사상적 기반인 스토아학파와, 그가 이상적인 인물군으로 그렸던 스키피오 서클을 소개한다. 아울러 키케로 정치사상의 한계와, 스키피오 서클의 실체 등 비판적 견해도 서슴지 않는다. 독자가 일방의 시각에 매몰되지 않고 키케로 사상의 비판적 수용을 하기를 옮긴이는 기대한다. 본질적으로 키케로는 혼란스러운 당대에 안정을 희구하는 보수주의자다.

 

[키케로]가 회복하기를 바랐던 것은 권위를 지닌 질서라는 말로 요약되듯이 사회적 안정성이 보장되고 재산과 신분에 대한 존중이 유지되는 국가였다. (P.80)

 

내용(번역과 해설)과 편집, 만듦새가 전반적으로 잘 어우러진 좋은 책이다. 완전한 원본이 아닌 상태에서 자칫하면 난삽함으로 가독성을 저해할 수 있었을 텐데, 옮긴이의 감사 인사에서 알 수 있듯이 편집과 교정에 심혈을 기울였음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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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은 알레스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욘 포세 지음, 정민영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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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욘 포세가 2003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해설을 제외하면 100면이 살짝 안 되는 분량이니 중편소설에 해당한다. 입센의 뒤를 잇는 극작가라는 평가에서 유독 궁금증이 생겼는데 일단 소설부터 읽기 시작한다.

 

편집자 일러두기는 이 작품에 마침표가 없다고 밝힌다. 독자들이 편집상의 실수로 오해할까 봐 친절히 알려주는 셈이다. 이것이 욘 포세의 글쓰기 스타일인지 지켜봐야 하겠지만 어쨌든 이 작품에는 마침표가 없다. 모든 문장은 오로지 쉼표로만 진행되며 가끔 물음표 정도는 허용한다. 문장 구조상 불가피하게 마침표가 등장해야 순간에는 아예 문장부호를 넣지 않는다. 이러한 철저하고 의식적인 행위는 작가가 분명 무엇인가 의도하는 것인데 과연 무엇일까?

 

필립 그래스라는 현대음악 작곡가가 떠오르는 까닭은 그의 미니멀리즘 작법과 욘 포세의 글쓰기가 유사해서다. 이 작품에서 반복을 생략한다면 무엇이 남을까 생각이 들 정도다.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본다, 그녀는 의자에 누워 있다. 남편 어슬레가 영원히 떠났고 오랜 시절이 흘렀어도 그녀는 여전히 남편을 생각한다. 싱네의 생각 속에 어슬레는 계속 살아 있다. 항상 보트를 타고 피오르드에 나가기를 좋아하던 남편, 창가에 서서 밖의 어둠을 응시하던 남편, 파도가 거칠어 배를 타지 않겠다고 했던 남편은 어디로 갔을까.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창문을 바라본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는 자신을 본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는 자신을 본다, 그리고 그녀는 장작을 하나 들고, 허리를 굽히고 그것을 난로에 집어넣는 자신을 본다, 그리고 그녀는 몸을 일으키고 현관문 쪽을 바라보는 자신을 본다, 현관문이 열리고, 문에는 그가 서 있다, 그리고 그가 방으로 들어와 등 뒤로 문을 닫는다. (P.19)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미소 짓는다, 그녀는 그가 현관문으로 나가 등 뒤에서 문을 닫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녀는 의자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방 한가운데 서 있는 자신을 본다, 그녀는 왜 항상 자기 모습을 보아야 하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P.54)

 

작품의 시선은 싱네에서 어슬레로 다시 싱네로 계속 옮겨 다닌다. 어슬레는 언제나 밝은 불빛을 배경으로 창가에 서 있던 아내를 떠올린다. 사라지던 밤 그는 집으로 돌아갔으나 이내 다시 집 밖으로 나온다. 다시 돌아가려고 생각을 하지만 결국 돌아가지 않았다. 싱네와 집에 안주하지 못하는 어슬레의 생각은 무엇인가. 싱네의 생각 속에 어슬레는 자신만의 생각으로 싱네를 생각하고, 싱네는 그런 어슬레를 생각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단순히 잃어버린 남편을 그리는 아내의 회상, 그리고 상실 전 부부간의 고독한 모습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작가는 알레스를 등장시킨다. 그는 누구인가? 어슬레의 고조할머니. 알레스를 필두로 싱네와 어슬레의 회상은 머나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바다에 빠진 증조할아버지 크리스토페르, 그의 아들이자 만에 빠져 익사한 할아버지 어슬레로 이어진다. 어슬레 집안은 바다와의 친연성 못지않게 익사의 가능성을 항상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어슬레의 사라짐은 집안의 내력이려나. 회상 속에서 선조들을 바라보며 엇갈리고 때로는 마주치는 싱네와 어슬레. 이로써 과거와 현재는 단절되지 않고 더불어 굴러가며, 어슬레의 익사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다.

 

저 사람은 알레스, 그는 생각한다, 그는 본다, 그는 안다, 저 사람은 알레스, 저 여자는 알레스야, 그는 생각한다, 그는 안다, 자기 고조할머니라는 것을, 저 여자는 알레스, 그의 이름은 그녀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더 정확히 다시 말하면 일곱 살 때 죽은, 여기 만에서 익사한 그녀의 손자 어슬레의 이름을 딴 것이다, (P.39)

 

싱네는 수십 년을 홀로 빈집을 지키며 남편을 회상한다. 아이가 있었다면 아내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도 꼬리에 꼬리를 물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싱네는 다만 떠나간 남편의 부재와, 그를 향한 끈을 놓지 못하는 자신을 반복하여 의식한다. 언뜻 보면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못한 게 아닐까 생각되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사랑이 삶의 전부를 차지하고 해결할 수는 없는 법. 어슬레는 바다로 향하는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고, 싱네는 어두운 창밖을 늘 바라보는 남편에게 어찌할 수 없는 불안감을 지닌다.

 

작가는 문장부호, 문장 반복, 남편과 아내 간 시점의 전환 외에도 메타 관찰자를 의도적으로 추가한다. 싱네는 회상 속에서 남편만을 관찰하지 않는다. 남편을 바라보는 과거의 싱네를 지금의 싱네가 지켜본다. 과거의 싱네는 자신이 스스로에게 관찰당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과거의 어슬레와 지금의 싱네가 함께 과거의 싱네를 바라보며, 지금의 싱네는 그러한 어슬레와 싱네를 동시에 의식한다. 그리고 는 그러한 싱네를 보고 듣는다. ‘가 등장하는 게 작품의 가장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점이 시사적이다.

 

나는 방의 그곳 의자에 누워 있는 싱네를 본다, (P.3)

 

그리고 그녀는 그를 바라본다, 그녀는 그에게서 눈을 떼고 허공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는 양손을 배로 가져간다, 그리고 그녀는 양손을 모은다, 그리고 나는 싱네가 말하는 걸 듣는다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P.101)

 

이 작품은 철저하게 고독하다. 현실의 싱네는 외롭고, 회상 속 싱네와 어슬레도 서로에게 근원적으로 다가서지 못한다. 어둠과 빛 속에서. 남편의 조상들 사이에 간혹 드러나는 흐뭇한 장면도 짙은 구름 속 순간적 햇살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과 회상으로 일관할 뿐 현실은 아무런 사건을 담고 있지 않다. 작품을 이끌고 지탱하는 힘은 전적으로 생각의 끈질김에 있다. 이 끈을 놓치면 큰일 난다는 듯 작가는 인물에게 생각을 밀어붙인다. 우리네 인생은 불안정하고 모호하며 애매함에 휩싸여 있지만, 그럼에도 의식은 단절되지 않으며 시공간을 넘어서 무한히 계속되며 절대 끝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쉼표로만 문장을 이어가고 마침표를 사용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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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유치하지만 매우 자연스러운 쏜살 문고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박소현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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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맨스필드 사후에 작가의 남편이 편집하여 발간한 동명의 단편집이다. 25편 중 13편을 수록하였는데, 이 단편집은 작가의 초기부터 후기까지 쓴 글을 모은 것이다.

 

<뭔가 유치하지만 매우 자연스러운>의 표제명은 콜리지의 시에서 따왔다고 한다. 고전적인 또는 영화적인 사랑의 장면은 자연적이며 운명적인 조우에 있다. 어린 시절의 풋풋한 첫사랑은 미숙하고 유치하지만 그렇기에 항상 마음속 깊은 여운을 드리운다. 남녀의 사랑이 이성으로서 자각될 때 더 이상 천연스러움은 없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남들과는 떨어져 둘만의 은밀한 공간을 찾게 될 때 말이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우리가 그런 일을 하고 나면 그러니까 서로의 손을 잡거나 키스를 하고 나면 모든 것들이 달라질 듯 느껴져 그러면 우리는 지금처럼 당당하고 자유롭지 않을 것 같아. 우리는 뭔가 비밀스러운 짓을 하게 되는 거겠지. 우리가 더는 천진난만한 어린애들이 아니게 될 거잖아. (P.29)

 

헨리의 손길을 항상 피하던 에드나가 문득 그에게 키스를 원하는 감정을 고백했을 때 헨리와 그녀의 관계는 크게 한 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게 마련이다. 작가는 분명한 길을 보여 주지 않는다. 헨리는 어둠 속에서 전보를 손에 든 채 움직이지 않을 뿐이다.

 

<새 드레스들>의 두 딸 로즈와 헬렌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각은 상반된다. 부모인 앤과 헨리는 헬렌을 구박하며 문제아 취급한다. 할머니와 의사 맬컴 선생은 헬렌에 동정적이다. 특히 맬컴 선생은 오히려 로즈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들여다보면 앤과 헨리 관계는 매끄럽지 못하다. 할머니의 정신은 오락가락하여 설득력이 없다. 맬컴 선생은 할머니와 연합 전선을 구축하려 하지만, 이내 실망하고 만다. 그런데 말이다, 내게는 맬컴 선생이 썩 호의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마치 꿍꿍이를 품은 듯한 느낌이.

 

노인네랑 대화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니까.’ 그는 생각했다. ‘내 말의 의미를 반만큼도 못 알아듣고 있잖아. 그저 헬렌에게 인형을 못 사 주게 된 일만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야! 저러니까 도대체 발전이라곤 없지.’ (P.112-113)

 

맨스필드는 삶을 단순하게 보지 않는다. 우리네 삶은 참과 거짓, 선의와 악의가 뒤섞여 있다. 이러다 보니 겉보기와 실질이 합치 안 한다거나 가까운 과거와 미래에 감정과 태도가 표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것도 중차대한 사안 보다는 한낱 하찮기 그지없는 사소한 건으로 말이다. 사랑과 미움 역시 마찬가지다. 부부간, 연인 간 사랑과 행복이 넘칠 것 같지만 실상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가. 그것을 일부 극소수의 사람들에 국한한 것으로 간주하지 말라. 보통의 사람들 누구나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이렇게 작가는 주장한다. 인생은 모순이자 역설로 점철되어 있다.

 

<검은 모자>에서 여자는 남편에게 요양 간다며 거짓말하고 서둘러 애인을 만나고자 하는 여자의 열망이 전반부에 두드러진다. 어쨌든 불륜 남녀는 즐겁게 만남을 가졌을까? 아니다. 여자는 애인이 쓴 검은 모자가 못마땅하고 그 흉측한 모습에 치를 떤다. 자신이 어떻게 이렇게 한심한 외모의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인정 못 한다. 문득 남편이 그리워진다. 제정신을 차리고 남편을 향해 마차를 되돌린다.

 

<진실한 모험>의 화자는 브뤼주에 홀로 여행하면서 낯설고 불친절한 경험에 마주친다. 조각배를 타고 뱃길을 관광하는데 별다른 이유 없이 안내원에게 미움을 받기조차 한다. 우연히 만나게 된 친구와 남편이 런던과 다른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브뤼주 관광을 제의하자 화자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브뤼주로 향하는 여행>의 화자 역시 기차와 선박을 이용하여 여행하는 와중에 만나게 되는 인간 군상 짐꾼, 두더지, 남녀 커플, 노부인 - 을 보면서 인간성의 실체를 발견한다. 남녀 커플을 보면서 사랑의 힘을 찬미하다가 거만한 노부인의 아양을 보면서 악몽 같은 연애에 치를 떤다.

 

<>의 연인은 사랑하지만 결혼 관계는 아니다. 여자는 법률 계약에 얽매이기를 꺼린다. 여자는 절대적 자유를 희구하고 남자는 그 공허함, 허무함을 덜 수 있기를 바란다. 뉴스에 실린 아내를 독살한 남편 사건에 대해 두 사람은 시각이 엇갈린다. 누구나 내심에 배우자의 독살을 상상할 거라며, 다만 남자는 심약해서 그렇게 하지 못할 거라는 여자의 말에 남자는 마음에 상처를 받는다. 그러면 여자는? 문득 와인에서 씁쓸한 맛이 느껴진다.

 

하나님 맙소사! 혹시 내 상상이었을까? 아니, 상상이 아니었다. 그 음료에서는 분명히 싸늘하고, 씁쓸하고, 기묘한 맛이 났다. (P.195)

 

<로자벨의 피로><시소>도 위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소소한 부조화를 그리고 있다. 가난한 로자벨의 실감 나는 상상의 허무한 뒷맛, 늙은 두 아기와 어린 두 아기가 각자 벌이는 인생의 소꿉놀이는 별 차이가 없다. <밀리>는 어떠한가. 밀리 에반스는 사람을 죽였다는 아이에게 연민과 보호 감정을 느낀다. 그녀는 자신의 인도주의적 감상에 흐뭇함마저 느낀다. 새벽녘 말을 훔쳐 도망가는 아이와 추격하는 남편 일행을 바라보며 밀리의 마음에 싹튼 감정은 무엇일지? 그녀의 감정이 일순간에 표변한 까닭은 무엇일지 알 수 없다.

 

밀리의 마음 속에서는 낯설고 광적인 기쁨이 피어나며 그 밖의 모든 것들을 짓눌러 버렸다. 밀리는 맨발인 채 길 위로 황급히 내달렸다. -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고 악을 쓰며 비명을 질렀고 흙먼지 속에서 손전등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아하! 그 녀석을 쫓아가, 시드! 아아아! 그놈을 잡아, 윌리! 얼른 가! 그렇지, 시드! 총으로 쏴 버려. 총으로 쏴 버리라고!” (P.124)

 

한편 인생의 아이러니를 보여 주는 전형적 작품이 <펄 버튼이 어떻게 유괴되었는지에 관하여><잘못 찾아온 집>이다. 전자에서 어린 펄 버튼은 유괴를 당한다. 집시일까 방랑유람단일까 유괴자들의 정체는 분명치 않지만, 천만다행히도 오래 지나지 않아 펄 버튼을 찾는 일행이 등장한다. 이제 펄 버튼은 행복을 되찾을 수 있겠지. 어찌 된 일일까, 그녀는 비명을 지른다. 생각해보니 어린아이는 유괴된 곳에서 기쁘고 신이 나서 즐겁게 놀고 있었으며, 유괴자 여자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지. 반면 펄 버튼을 구출하러 오는 무리에 대한 그의 인상은 이러하다.

 

작고 푸른 남자들이 달려온다, 그를 향해, 고함과 호루라기 소리를 삑삑 내며 상자처럼 일렬로 똑같이 늘어선 집으로 그 애를 다시 데려가려는 작고 푸른 남자들 한 무리가,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P.64)

 

후자의 노부인의 평온한 삶은 잘못 찾아온 장의 마차로 완전히 틀어진다. 일순간 그는 삶이 종지부를 찍었음을 절절하게 체험한다. 비록 그것이 잘못 찾아온 것이었음을 알게 되지만, 앞선 놀란 심정이 저절로 없어지는 건 아니다. 그것은 언제든 자신에게 다시 찾아올 수 있으므로. 죽음 앞에 아무 준비 없이 노출된 노부인이 쥐어짜서 죽음을 거부하는 손짓은 일체의 과장이 없으므로 더더욱 우리네 현실과 부합한다.

 

이게 뭐지? 무슨 일이야? 이 소리의 의미는 대체? 사람 살려, 신이시여! 그의 나이 든 심장이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정신없이 벌떡거리다 아래로 쿵 떨어지고 말았다. (P.181)

 

<무모한 여행><><이 꽃>과 결을 같이한다. 화자는 홀로 군대가 통제하는 전방의 마을로 찾아간다. 욕구에 충만한 군인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에. 굳이 그 시기에 그녀는 이모와 삼촌을 만나려고 가야만 했을까.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마을에 도착하는 데 성공한다. 그 뒤를 키 작은 상등병이 뒤따른다. 후반부는 술집을 배경으로 한다. 화자와 키 작은 상등병은 어느덧 커플이 된다. 일행은 푸른 눈의 군인이 말한 -월한위스키를 맛보려고 야간통금령도 어기며 몰래 다른 술집으로 가서 들이킨다. ‘무모한 여행은 전반부의 여행을 지칭하는지 또는 후반부의 무모한 술집 탐방을 뜻하는가. 또는 전후반부 모두에서 그녀가 보이는 행보를?

 

<이 꽃>은 워낙 은근하고 미묘하게 묘사하여 도대체 어떤 사건 또는 행위를 기술하는지 한참 생각했으나 역시 단서는 있었다. 의사, 은밀한 처치, “삶의 흐름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것”(P.173), “그것은 그녀를 태() 안으로 받아들였다”(P.174), 하마터면 끝장났을 거라는 그의 탄식. 그렇다, 이 작품은 은유적으로 낙태를 기술한다. 남녀 간 열렬한 사랑, 그런데 사랑의 결실은 이렇게 거부당한다. 무슨 이유인가? 결혼 준비가 안 되어서? 드러낼 수 없는 불륜의 관계이기에? 요즘에도 낙태는 완전한 자유권이 주어지지 않는데, 하물며 작가 당대에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으리라. 그럼에도 암암리에 빈번히 벌어지는 현상. 원하는 사랑의 원치 않는 생채기라고밖에는.

 

여전히 맨스필드의 글쓰기는 독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이슬처럼 깨끗하고 보석처럼 영롱한 빛을 독자의 눈과 마음에 던져주지 않는다. 이슬이 쉽게 오염될 수 있음을,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에는 피의 강물이 흐르고 있음을 우리는 의식적으로 외면하려고 한다. 작가는 굳이 우리의 눈과 귀에 현상과 다른 실체가 엄연히 실재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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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론 한길그레이트북스 172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지음, 성염 옮김 / 한길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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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읽은 책은 <국가론>이지만, 불가피한 사정상 <법률론>의 후기를 먼저 쓰게 되었다. <노년론/우정론>에 이어 순차적으로 키케로의 주요 저작을 차근차근 살펴볼 예정이다.

 

키케로는 플라톤을 무척 존경하였다. 그는 플라톤을 따라서 <국가론><법률론>을 지었다. 좋게 보면 오마쥬, 나쁘게 보자면 아류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고대 그리스와 로마라는 시기적, 지리적 차이는 물론 정체(政體)에도 차이가 있으므로 독자적 가치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키케로의 <법률론>은 제1권만이 완전한 편이며, 2권과 제3권은 누락이 제법 많이 있다고 하며, 나머지는 현존하지 않는다. 법철학을 담고 있는 제1권이 여러모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마르쿠스) 무릇 법률이란 자연본성의 위력이고 현명한 인간의 지성이자 이성이며, 정의와 불의의 척도네. (P.74)

 

키케로는 법의 탄생을 인간 본성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간주한다. 자연법사상이다. 신이 자기 모습을 따서 만든 유일한 존재인 만큼 인간의 영혼은 신적인 것이며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성을 지닌 존재이다. 인간은 스스로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그러하지 않은지 알 수 있다. 이것을 사회적으로 정리하고 공표한 게 바로 법이다. 인간은 법의 준수를 통해 영혼과 이성을 갈고 닦아 자연 본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키케로 법철학의 대강이라 할 수 있다.

 

(마르쿠스) 무릇 덕이란 완결된 이성이며, 그런 것이라면 분명히 자연본성 속에 존재하네. 그래서 모든 도덕적 선도 같은 방식으로 자연본성 속에 존재하네. (P.95)

 

키케로의 법철학은 성선설에 기반한다. 영혼의 타고난 순수성과 선의가 반드시 존재하며 그것에 대한 믿음에서 자신의 의논을 전개하는데, 강제적 필요에 의해 법이 탄생하였고 사람들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마지못해 법을 준수한다는 실정법 사상과는 거리가 멀다. , 자연, 영혼, 본성이라는 고차원의 기준에서 출발하므로 작위적이거나 무리한 면이 없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법의 탄생을 정당화한다.

 

법철학과 실제 법률과는 다르다. 전자는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논의가 가능하지만 후자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실질적 내용을 담고 있어 대립하는 사건과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보다 명확한 의견과 판단이 이루어져야 한다. 2권은 종교 관련 법률, 3권은 정무직 관련 법률을 다룬다. 두 권 모두 동일한 구조를 취하는데 우선 해당 법조문을 일괄 기술하고 이후 법조문의 문구별로 세부 해설을 하고 있다.

 

종교 관련 법률은 현대와는 다른 종교관이어서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는 내용이어서 흥미가 떨어진다. 키케로는 자신의 자발적 유배를 언급하면서 그것을 종교와 연관하여 정적을 맹렬히 비판하고 있어 이채롭다. 상속자의 제의 거행 의무를 다루면서 유산 상속은 받더라도 제사 의무를 회피하는 것을 법적으로 용인해주는 세태도 개탄한다.

 

(마르쿠스) 법률이 정무직을 감독하듯이 정무직이 인민을 감독하지. 정말 정무직은 말하는 법률이고, 법률은 말없는 정무직이라 할 수 있네. 사실 통치권만큼 자연의 법도와 체계에 부합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네. (P.192)

 

일반 독자에게 흥미로운 장면은 아무래도 제3권의 정무직 관련 법률 설명이다. <국가론>에서 다룬 왕정, 귀족정, 민주정 등 여러 정체(政體)와 연관되는 내용인데, 통치 형태와 법의 긴밀한 관계는 고금을 막론하고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기에 너나 할 것 없이 정치 현상에 일희일비하며 열의와 분노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는 과잉 정치 관심인 동시에 인간사에서 정치가 갖는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를 입증한다. 실제로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제왕적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있기에 키케로의 의견에 동의하게 된다.

 

퀸투스는 호민관 제도에 대한 격렬한 증오와 반감을 적나라하게 표출한다. 이 대목은 법률론의 내용을 넘어서는 영역인데, 법률이 인정하는 정치 제도 자체에 대한 근본적 의문 제기라고 하겠다. 호민관이 원로원의 권력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귀족으로서는 당연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아티쿠스도 퀸투스와 같은 의견이다.

 

나도 호민관의 저런 권한에 나쁜 면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하네. 그러나 저 제도에서 시도하는 선은 저런 악이 없이는 달성하지 못할 것이네. (P.216)

 

키케로 또한 큰 틀에서는 그들과 마찬가지지만 그라쿠스 형제에 대한 그의 평가에서 알 수 있듯이 , 유보적 내지 중도적 의견을 제시한다. 통령직도 장단점이 있듯이 순전히 장점만 있는 좋은 제도는 없다면서. 키케로에 따르면 호민관직은 필요악이다. 최선량들이 다스리는 체제가 성공할 수 있다면, 그래서 평민들이 그들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순종한다면 호민관직은 불필요하다. 호민관직은 평민들을 귀족정 틀에 끌어들이기 위한 불가피한 타협이다.

 

<국가론>과 마찬가지로 고대 로마의 고전인 이 책을 펼칠 때 난해하거나 따분하면 어떻나 하는 우려가 있었다. 키케로는 현학적이지 않다. 전형적인 로마인답게 그는 어디까지나 현실 정치와 제도에 기반하여 자신의 논의를 전개한다. 게다가 대화체라는 형식을 통해 딱딱한 구성을 피하고 있어 평범한 독자의 이해에 더욱 도움을 주고 있다. 흥미로운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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썅년의 미학, 플러스 썅년의 미학
민서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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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의 광고문구를 보면 전작보다 더 시원하고 더 강력함을 강조한다. 전작 자체도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남녀차별과 남성우월 사고를 통렬히 신나게 비판했는데 이보다 더하다니 작가의 주장에 매료된 독자로서는 기쁘게 속편의 책장을 넘길 것이다.

 

요즘 온라인에서 보면 일부 여성주의는 극단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네들의 극단성은 성취되지 않는 남녀평등에 대한 분노의 표출을 넘어 자신들의 주장에 호응하지 않는 남성 일반과 일부 여성에 대한 혐오까지도 거리낌없이 표출한다. 이의 반작용으로 일부 남성은 오히려 극단적 여성주의자를 향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극단과 극단의 대립 속에서 온건하고 중도적이며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의견은 설 자리를 잃는다. 섣부른 의견은 박쥐처럼 회색분자 취급을 받아 비난의 대상으로 집중포화 받기 일쑤이므로.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본성은 결코 동일할 수 없다. 제아무리 부정해도 수컷과 암컷의 본능은 불변한다. 반려견처럼 인간 모두가 중성화수술을 받지 않는 한. 남성이 여성의 생물학적 속성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성 역할을 바꾸자고 한다면, 그것은 상대방 성을 자신의 성보다 우월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암암리에 드러낸다. 여성으로서 자신의 여성성을 올바로 인식하고 자긍심을 지니고 있다면 굳이 남자들보고 여자처럼 화장하고 미니스커트와 하이힐을 착용하며 월경을 겪어보라고 할 요구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평등을 추구하는 요소는 가정 내에서, 사회 속에서 남녀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동등한 인식과 취급이다. 남성 일반은 무채색을 선호하고 자신을 예쁘게 꾸미는 데 무심하다. 여성 일반이 화려한 복장과 예쁜 외모를 가꾸는데 관심 많은 것 또한 본성이다. 동물 프로그램을 보면 수컷이 화려하고 암컷이 수수한데 인간에게는 반대가 되었을 뿐 치장과 유혹, 선택의 과정은 별반 다를 바 없다.

 

사회의 보편 문화가 바뀌는 데 오랜 시간이 소요됨을 인정하자. 유치원과 초등학교 단계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남녀평등 인식의 토대를 쌓으며 그들이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자. 당장 성인에 대해서는 작가가 주장하고, 작가의 전 남친과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차별의 현장에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지적하여 반복되지 않도록 하자.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고 불평할 수 있지만 성급하면 극단으로 빠지기 마련이다.

 

전작보다 나은 속편은 없다는 말을 이 책에도 적용할 수 있다. 굳이 동어반복의 비슷한 내용의 책을 서둘러 낼 필요가 있었을까. 아무리 봐도 순전한 상업적 동기 외에 근거를 찾기 어렵다. 전편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편집상의 실수-예컨대 카풀을 car poll로 표기(P.93)하는 등-가 여러 군데 나타나는데 무관하지 않다.

 

여성들이여, 계속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라. 남성들의 허위와 위선을 사정없이 까발려라. 단지 그들을 미워하지 마라. 증오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이 외로운 행성에서 함께 보듬고 더불어 살아가야 할 유일한 같은 종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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