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 잔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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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1. 피곤한 아이

2. 올드 언더우드

3. 어린 가정교사

4. 늦은 밤에

5. 나는 프랑스어를 못합니다

6. 해와 달

7. 환희

8. 영원한 사랑

9. 낯선 사람

10. 미스 브릴

11. 파커 아주머니의 인생

12. 만에서

13. 인형의 집

14. 차 한 잔

15. 파리

16. 결혼한 남자의 이야기(미완)

 

<가든파티>에 이은 맨스필드 작품집 두 번째 도전이다.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연대순으로 골고루 작품을 선별하였다. 따라서 맨스필드의 작품세계가 변화 발전한 모습을 한눈에 조감할 수 있다. 앞선 책과 중복 수록된 <낯선 사람>, <미스 브릴>, <파커 아주머니의 인생>, <만에서>는 여기서 별도로 언급하지 않으련다.

 

맨스필드는 우아하고 고상한 미를 추구하지 않는다. 독자의 섣부른 예상과 기대에 영합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시각에서 개인의 삶과 세상에 깃들인 냉혹함과 부조리를 담담하게 때로는 입가에 냉소를 머금고 기술한다. 특별히 과장된 묘사와 수사를 동원하지 않으며 서서히 나아가다 일순간에 독자에게 일침을 가하는 작가의 수법은 묘한 뒷맛을 남긴다.

 

<피곤한 아이>는 초기작으로서 모방작이지만 맨스필드 만의 분위기는 여전하다. 어린 하녀 아이는 피곤함에 지쳐 어쩔 줄 모르지만 부인은 인정사정없이 아이를 부려 먹는다. 사생아라는 출생 상의 약점이 아이에 대한 인간적 대우를 망각하는 단초가 되는데, 결말은 다소 충격적이다. 작가의 후기작 같은 은근하고 미묘한 암시는 여기서 나타나지 않는다.

 

소리 없이, 생글거리며, 살금살금, 아이는 부인의 침대에서 분홍색 베개를 가져와 아기의 얼굴 위에 올려놓고, 버둥거리는 아기를 있는 힘껏 눌렀다. ‘대가리가 잘려나간 오리처럼 꿈틀거리네.’ 아이는 생각했다. (P.17)

 

<올드 언더우드>에서 영문을 모르는 독자가 서서히 알게 되는 진실은 올드 언더우드가 살인죄로 복역 후 출소하였으며, 살인 동기는 아내의 불륜이었는데 연놈이 아닌 아내만을 살인하였다는 사실이다. 늙어서 쇠락한 올드 언더우드의 가슴속에서 울리는 쉼 없는 망치질 소리는 무엇일까. 그의 상념의 변화에 따라 울림의 세기와 빠르기는 증폭된다. 선창의 어떤 배에서 자고 있는 건장한 사내의 모습, 환하게 웃으며 사내를 바라보는 아내의 사진. 작가의 글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지만 독자의 상상력은 그칠 줄 모른다.

 

세상사에 깃든 위험과 부조리함은 <어린 가정교사>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어린 여성 홀로, 낯선 땅에서의 여행은 아무래도 위험한 게 현실이다. 사방의 적대자에 둘러싸인 그녀에게 친절을 베푼 늙은 신사는 얼마나 안전하고 믿음직한 존재였을까. 어린 가정교사는 그를 완벽한 할아버지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꿈이다! 현실이 아니야! 노인이 완전히 딴사람으로 변했다. , 끔찍해라! 어린 가정교사는 경악하며 노인을 보았다. (P.42)

 

페미니스트라면 응당 여성의 안전을 담보하지 못하는 사회 현실과 늙은 나이에도 강압적으로 성적 욕망을 추구하는 남성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리라. 물론 어린 가정교사도 잘못은 있다. 타인의 이유 없는 과도한 친절을 무비판적으로 덥석 수용한 결정은 순진하기보다는 어리석음에 가깝다. 물론 어리기에 그러했겠지만.

 

<늦은 밤에>는 짧은 작품이지만 사랑을 갈망하는 여성의 이율배반적으로 갈팡질팡하는 심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호감을 표시하는 듯하지만 자신이 다가서면 물러서 버리는 남성을 향한 불만. 자신에게 보낸 편지가 호감일지 모욕일지 궁금해하면서 부정적인 해석으로 기울어가는 마음을 억지로 붙들려는 애처로움이 인간 심리의 미묘함을 나타낸다.

 

, 됐다그래. 제발 감상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태워버려! 아니, 지금은 안 돼. 불이 꺼졌잖아. 이제 자야지. 정말 일부러 모욕을 주려고 쓴 걸까. , 피곤해. (P.48)

 

<해와 달>은 어른 세계를 향한 아이들의 순수한 시각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아이들의 이름이 해와 달이기에 다소 우화적 느낌도 풍긴다. 뭉개진 아이스크림 푸딩 장식은 즐거운 파티의 정도에 대한 척도기에 어른의 관점에서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해는 그렇지 않다. 아름답고 정교하게 준비된 파티 음식과 디저트는 그에게 순수한 미의 척도에 있어 망가뜨려서는 안 될 존재다. 완벽한 순간과 존재가 어른들의 향락과 욕망을 위해 일순간에 허물어지다니 그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으리라. 그래서 해는 이렇게 외친다.

 

돌연 해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끔찍해요-끔찍해요-끔찍해요!” 해가 흐느꼈다. (P.99)

 

이 책의 표제작인 <차 한 잔><환희>는 묘하게 닮은꼴이다. 우선 주인공이 유부녀이며 상류층에 가까운 환경에서 자신의 처지에 매우 만족함을 표명하고 있다. 후자에서 버사가 보여주는 삶에 대한 만족과 환희는 눈부실 만큼 싱그럽고 흐뭇하기조차 하다. 기쁨과 사랑과 행복에 휩싸인 그녀만큼 행복한 여성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전자의 로즈메리는 결을 달리하지만 삶에 별다른 불만이 없는 점은 똑같다. 그녀는 대신 자신의 마음대로 호화와 사치를 누릴 수 있으므로.

 

두 사람의 완벽한 세계가 무너진 계기는 사소하다. 버사는 파티에 어울리지 못하며 남편에게 미움받는 미스 풀턴에게 동정과 애정을 함께 느낀다. 차 한 잔을 구걸하는 가난한 여자를 기어코 자신의 저택으로 데려오는 로즈메리 또한 동정과 자부심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을 것이다. 우월자의 지위에서 열등한 사람을 내려다보는 그네들의 시선은 -의도의 선악에 무관하게- 현상의 뒤바뀜으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이제 버사는 사랑과 행복에 젖은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미스 풀턴임을, 로즈메리는 거지 여인의 빼어난 미모에 남편의 관심이 쏠리자 돌연 위기감을 느낀다. 독자는 버사와 로즈메리의 섣부른 도취를 손쉽게 비판할 수 있지만, 기실 그네들에게 진정 잘못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 확실치 않다. 그런 면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남편의 관심을 회복하려는 로즈메리의 노력이 딱할 따름이다.

 

로즈메리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필립.” 로즈메리는 속삭이고, 그의 머리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예뻐?” (P.252)

 

<인형의 집><가든파티>와 비슷하다. 버넬가를 배경으로 키지어와 베럴 이모가 등장할 뿐 아니라 주제 의식 역시 유사하다. 빈부격차에 기반한 사회계급의 명확한 구별은 바로 이웃에서 사망사고가 발생해도 가든파티 개최에 지장을 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인형의 집을 구경할 수 있는 자격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켈비네 아이들이 따돌림당하는 까닭은 단지 그들이 가난하고 신분상 천하다는 이유다.

 

독자는 키지어의 용감한 행동에 박수를 보내는 한편 베럴 이모를 비롯한 어른들의 편협한 사고에 심한 불편함을 느낀다. 특히 대놓고 모욕적 언사를 퍼붓는 베럴 이모에게는 적개심이 생길 정도다. 한편 내쫓기는 찰나의 순간에 인형의 집의 조그만 램프를 본 것에 기뻐하며 미소 짓는 엘스를 바라보는 우리네 마음은 따스함과 안타까움 그 어디쯤이리라.

 

<영원한 사랑><결혼한 남자의 이야기(미완)>은 부부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 함께 다루어봄 직하다. 전자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건 병든 아내를 간호하기 위하여 함께 요양 온 남자의 이야기다. 쇠잔하고 연약한 아내는 남편의 도움을 전적으로 필요로 한다. 남자는 분명 아내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어찌 보면 눈물겨울 정도로 아름다운 부부의 사랑이다. 한데 이상하다. 아무리 해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그것은 부부의 사랑을 다루는 맨스필드의 필치가 극히 담담하고 건조하기 때문이리라.

 

후자는 미완작이지만, 완성된 부분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여기서 부부는 이미 서로 간에 마음이 떠났다. 남성 화자는 아내를 가리켜 마음이 산산조각 난 여자라고 칭한다. 한때의 사랑과 아름다운 부부애는 한순간에 시들고 이제 그들은 남남과 같은, 어쩌면 남남보다도 못한 관계에 처해 있다. 그렇게 남처럼 살 거라면 헤어지지 않고 뭐 하는가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한다.

 

사람들이 서로를 떠나지 않는 이유를 파헤쳐보면 미스터리를 발견한다. 단순히 그들은 못 떠나는 것이다. 묶여 있다. 그들을 옭아맨 굴레가 무엇인지는 자신들만 안다. 내 말이 모호한가? 글쎄, 이 문제가 애초에 대낮처럼 명백하지 않지 않은가? (P.267)

 

결혼 관계는 하나의 사회적 약속이자 굴레이기에 애정의 소멸에도 상관없이 관계가 유지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들 부부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특별히 이상하지 않다. 화자는 양자의 관계가 어그러지기 시작한 연유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화자의 유년 시절이 부부의 현재 애매한 상황에 어떤 빛을 던져줄지 독자는 알 수 없다. 이 작품이 미완성작이기에, 우리는 작가의 의도를 모른다.

 

이 책의 작품 중 가장 문제작이라면 단연 <나는 프랑스어를 못합니다><파리>를 꼽고 싶다. 그만큼 두 작품은 독자인 내게 당혹감과 충격을 주었다. 철저한 악행과 무자비한 잔인함으로. 후자에서 사장은 양면적 상황에 놓인다. 하나는 죽은 아들의 무덤 소식을 통해 잊고 싶었던 과거의 아픈 기억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아파하는 아버지의 모습. 다른 하나는 잉크병에 빠진 파리에게 희망 고문을 선사하는 잔인한 인간의 모습. 존재는 분명 하나이련만 비극과 아픔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 변모를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사장은 비단 유별난 인물은 아니리라. 압권은 가해와 살육의 즐거움에 빠져 자신이 조금 전 왜 눈물 흘릴 뻔했는지 기억 못 하는 대목이다.

 

조용히 걸어가는 늙은 개 뒤에서 사장은 조금 전에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려 했다. 무엇이었지? 그건.... 사장은 손수건을 꺼내 목깃 아래를 훔쳤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그는 기억할 수 없었다. (P.260-261)

 

전자의 주인공은 단연코 위선자다. 신사이자 작가로 자처하는 그는 게으르지만 안락한 생활을 누리기 위해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 몸을 파는 일조차도. 그런 그가 파리의 한 카페에서 마주친 글귀-Je ne parle pas francais(나는 프랑스어를 못합니다)-를 통해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과거의 사건을 떠올리는 것이다. 프랑스어를 할 줄 모르며, 연인에게 버림받아 곤경에 처한 여성 마우스. 그녀에게 주인공은 어떤 행동을 하였던가. 이 작품에서 맨스필드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지 자못 궁금하다. 사회 밑바닥, 그리고 양심의 구렁텅이에까지 영락한 인간성의 한계를 확인해 보고 싶었을까. 또는 사회적 타락은 주인공 개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일반의 현상이기에 그 부조리함은 일개인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

 

<가든파티>를 통해 맨스필드 문학에 입문한 내게 이 책은 또 다른 의미에서 당혹감을 안겨준다. <가든파티> 수록작이 그나마 작가 후기의 완성되고 정제된 작품이라면 이 책에는 날 것, 미숙한 것, 원숙한 것 듯이 혼재되어 있다. 그렇게 보면 작가 맨스필드의 생소하면서도 온전한 실체를 단번에 알아차리기엔 이 책이 더욱 유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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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든파티 (양장)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한은경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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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록작>

만에서

가든파티

죽은 대령의 딸들

비둘기 씨와 비둘기 부인

어린 소녀

마 파커의 일생

현대식 결혼

항해

브릴 양

첫 번째 무도회

노래 수업

낯선 사람

은행 휴일

이상적인 가족

하녀

 

<가든파티>로 유명한 작가의 단편 소설집이다. 짙은 연둣빛의 양장본 표지를 보면서 떠올렸던 이미지는 로나 세이지의 <서문>을 읽으면서 불길함에 휩싸였고 하필 작가의 가장 긴 작품인 <만에서>를 읽을 때 이미 산산이 부서졌다. , ‘가든파티캐서린 맨스필드의 어감과는 전혀 상극으로 작가는 전혀 호락호락하지 않은 스타일의 작품을 썼던 것이다. 이 소설집은 그녀의 마지막 단편집이다. 그녀만의 작풍을 확립한 그녀의 농익은 작품세계를 한껏 풀어놓았으니 나처럼 어설픈 독자가 당혹감을 느끼는 건 당연지사다. 그럼에도 수박 겉핥기지만 생소하면서도 뇌리를 살짝 건드리는 뭔가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맨스필드 작품의 매혹 포인트라면 정말 좋겠지만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른 작가와 구별되는 맨스필드 문학의 특징은 무엇일까. 우선적으로 두드러지는 점은 남성(아빠, 남편)의 배제 또는 약화다. 그녀의 세계에서 남성은 항상 주변적이다. 가계를 꾸리기 위해 존재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있거나 없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있으면 다른 데 눈을 돌려 여성 주인공을 심란하게 만들 뿐이다. 이것은 작가가 자신의 가족인 보샹 가를 탈출한 계기가 되었다고 하며, 그녀가 평생 헤매었던 결혼 생활과도 관련 있으리라. <만에서>의 가장 스탠리는 아무도 그에게 공감하지 않음을 이해할 수 없다. 처제 베릴은 한층 더하다.

 

베릴은 하고 싶은 것을 이제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축하하고 싶었다. 그들을 방해할 남자가 없었다. 이 완벽한 하루가 그들의 것이었다. (P.44)

 

<죽은 대령의 딸들>에서 대령은 죽어서도 서랍장 안에서 딸들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부정적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상적인 가족>의 니브 씨는 늙은 스탠리와 다를 바 없다. 거미처럼 비쩍 마른 채 정작 가족에서 잊히고 소외당하는 가장의 모습. <항해>는 언뜻 이와 관계없어 보이지만, 페넬라는 할머니와 함께 아빠를 떠나 할아버지에게 간다. 할아버지처럼 나이 든 노인은 부정적 인식의 남성과 차이가 있을 것 같지만, 작가는 냉혹하다. 그녀는 다른 작품에서 늙은 노인이 젊은 가정교사 아가씨에게 치근덕대는 장면을 교묘하게 다룬다.

 

그녀의 작품에서 등장인물은 죽음과 친연성을 지닌다. 사람에게 있어 죽음은 멀리하고 싶지만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유독 맨스필드의 서사와 인물은 죽음을 달고 다닌다. 작가의 소설들에서 죽음의 올가미를 벗어나 진정으로 밝고 화창한 작품이 있을지 회의적이다. 이는 가족사에서 남동생의 사고사 영향이라고 귀인 하기에는 곤란하다. 그녀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관이 투영된 것이라고 봐야 하리라. <가든파티>에서 파티를 망칠 뻔한 사건은 대문 밖 한 남자의 사고로 인한 죽음이다. <죽은 대령의 딸들>은 당연하고, <마 파커의 일생> 역시 마 파커는 사랑하는 손자의 죽음에 맞닥뜨린다. <항해>의 페넬라는 엄마를 잃었다. 죽음이 작품의 주제 의식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역할을 맡은 소설이 바로 <낯선 사람>이다. 배를 타고 오는 아내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해먼드는 이제 더는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을 수 없다. 아내의 팔에서 죽은 한 남자로 인해 그는 아내를 죽음에게 빼앗겨 버렸다.

 

그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두 팔로 그녀를 안았다.

그들의 저녁을 망쳤다! 둘만의 시간을 망쳤다! 그들은 다시는 둘만 있을 수 없을 것이다. (P.263)

 

맨스필드 소설의 결말은 항상 모호하다. 좋게 말하면 열린 결말이지만, 달리 말하면 작가는 독자에게 명확한 길 또는 자신의 생각을 제시하지 않는다. 등장인물 간에는 모호한 문구로도 공감대가 통할지 모르지만 독자의 관점에서는 작가가, 주인공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머리를 굴려 추론해야 하는 고달픔이 따른다. <만에서>에서 케지어와 페어필드 노부인은 절대로 안 하겠다고 한 게 무엇인지 두 사람 모두 잊는다. 헤리 켐버가 베릴에게 던진 질문은 공허하게 울린다.

 

인생이, 인생이...”

그녀가 더듬었다. 하지만 인생이 어떤 것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로리는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정말 그렇지?

로리가 말했다. (P.114)

 

<가든파티>에서 인생을 설명하려고 헛되이 애쓰는 로라를 오빠 로리는 이심전심으로 이해한다. 독자만이 글밖에서 당혹스러울 뿐이다.

 

진리는 원래 모호하다고 옹호할 수 있지만, 이는 진실을, 또는 자신의 진심을 말하기 두려워하는 사람의 태도에 대한 묘사라고 바라볼 수 있다. <죽은 대령의 딸들>의 조세핀과 콘스탄티아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주체적인 삶을 걸어갈 기회를 얻지만, 무슨 말을 할지 서로 잊는다. <마 파커의 일생>에서 고된 인생을 살아온 마 파커는 울고 싶지만 억지로 울음을 참는다. 감정을 여과 없이 배출해냄으로써 카타르시스를 얻을 기회를 마 파커는 스스로 놓치고 있다. 그만큼 삶에 진솔하지 못하다.

 

나는, 나는 그들과 같이 나갈 거야. 윌리엄에게는 나중에 편지를 쓰지 뭐. 다음에, 나중에. 지금은 아니야. 하지만 분명히 쓸 거야.” (P.203)

 

<현대식 결혼>의 이사벨은 어떤가. 그녀는 남편과 소원해진 관계를 복구할 절호의 순간을 맞이하지만, 나중에 다음으로 미룬다. 사람 간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진실의 순간에 침묵하거나 망설이는 인물들.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가든파티>의 로라 역시 파티 취소 의견이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나중에 생각하는 게 가장 적절하다고 회피해 버린다. 이 작품집에서 유일하게 진심을 토로하는 인물은 <비둘기 씨와 비둘기 부인>의 앤이다.

 

이 모든 것을 맨스필드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거칠게 말하자면 삶이란 모호하고 다층적이어서 사람을 전적으로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네 삶에는 항상 모순과 역설이 가득 차 있고 개인적 좋고 싫음과 무관하게 삶은 이렇게 굴러간다. 빛과 어둠처럼 삶과 죽음이 한데 어울린 삶은 한바탕의 연극 무대와도 같다. 사람들은 모두 제각기 연극의 등장인물처럼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다. <브릴 양>의 브릴 양이 깨달았듯이. 그렇게 보면 <노래 수업>에서 전보를 받기 이전의 메도스 양과 이후의 메도스 양의 표변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 <첫 번째 무도회>에서 기대와 기쁨에 부풀어 있던 라일라가 늙고 뚱뚱한 남자로 인해 의기소침하였지만 이내 청춘답게 다른 파트너와 신나게 춤추면서 늙은 남자를 잊는 것 역시 마땅한 이치다.

 

그럼에도 인생의 종착지는 죽음이기에 삶은 결코 눈부시게 화창할 수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게 <브릴 양>이라면 지나칠까. <가든파티>의 화려함은 일말의 그림자도 없다고 해야 할까. <만에서>의 스탠리 못지않게 린다의 무기력함은 어떻게 바라봐야 좋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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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Q대학교 입학처입니다 - 제2회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우수상 수상작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권제훈 지음 / &(앤드)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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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입시는 국민 모두 초미의 관심사다. 수능시험이 치러지는 날은 수험생 이동에 온갖 교통수단이 총동원되며, 고사 중에는 일체의 소음 유발 활동이 중단된다. 시험의 난이도와 문항 오류 관련 논란도 여전하며 작금은 킬러 문항 배제가 이슈가 되고 있다. 입시 자체는 어떠한가. 수시와 정시로 나눠진 데다 내신 위주 전형, 학생부종합 전형, 논술 전형, 특기자 전형 등등의 유불리에 따른 수험생과 학부모의 민감도는 극도에 달한다. 대학별 평가에서도 서류평가와 면접평가 등 정성평가의 공정성에 대한 의구심, 자기 자녀가 내신성적이 더 우수함에도 서류평가를 통과하지 못한 것에 대한 학부모의 울분에 찬 항의 전화와 심지어는 국민신문고를 통한 투서 등 모든 이해당사자가 본인이 원하는 대학과 학과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게 이 세계다.

 

이 소설은 대학입시를 업무로 삼고 있는 대학 입학처의 실제와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민낯을 제대로 보여준다. 대개의 수험생과 학부모에게 입학처는 블랙박스 같은 존재다. 원서접수를 받고 합격자발표를 하기까지 내부에서 뭔가가 이루어지지만 내용을 알 수 없고, 사람이 하는지 기계가 하는지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조직이랄까. 작가는 이 작품에서 입학처도 인간미 물씬 풍기는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며,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희로애락에 반응하는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직위 체계와 친소, 시기와 질투 관계가 엄연히 존재하며 정규직과 비정규직, 보직과 승진 등을 둘러싼 암투도 들여다볼 수 있다.

 

대학입시를 겪어보지 않거나 최근의 입시에 무심한 독자는 이 책을 통해 대학입시가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하며 경우의 수도 많다는 것에 놀랄 것이다. 신입생과 재외국민은 물론 여기서 다루지 않지만 편입학까지. 가장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고자 하는 대학들의 바람과 노력은 동일하지만, 수험생 역시 가장 우수한 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므로 선발한 합격자가 그대로 등록할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소위 대학 서열에 따라 연쇄적으로 합격자 이동이 일어나고 추가합격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니 어떤 수험생은 수시 6장의 카드에 모두 통과하여 어디를 갈까 행복한 고민에 빠지는 반면 다른 수험생은 6장의 카드에 전부 실패하고 추가합격의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까지 절망과 희망의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이 작품은 소설일까 다큐일까. 한때 동종 업계에서 일한 경험으로 판단컨대 작중에서 언급된 대학입시의 내용은 모두가 사실이다. 작가는 한덕수 입학처장을 다소 극단적으로 희화하였을 뿐 대다수 입학처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 그들과 학부모, 교사의 관계 모두가 사실에 입각하고 있다. 다큐의 무미건조함을 피하기 위해 입학처 사람들의 개인적 생각과 삶을 좀 더 투영하여 사람 냄새 나는 방향으로 작가는 덧붙였다고 본다.

 

입학업무를 전문적으로 담당하고 있으니까 그들 자녀의 대입 교육은 남들과 다르지 않을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거대한 대하의 흐름에서 홀로 버티기 쉽지 않을뿐더러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학입시는 일개인으로 풀 수 있는 사안이 아닐뿐더러 제도, 인식, 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꼬인 문제라고 할 때 그네들의 이중적인 행태를 비난할 수 없다.

 

너 완전 양아치다. Q대가 좋다고 동네방네 다 떠들고 다니면서 네 딸은 못 보내겠다? 다른 사람 자녀 인생은 망쳐도 네 딸 인생은 망칠 수 없다 이거냐?”

, 못 보내. 죽어도 못 보내.” (P.117)

 

경지혜 책임사정관과 장대현 차장이 나누는 대화는 솔직하기에 오히려 현실적이다. 이상은 저 멀리 있지만, 자식의 미래라는 현실은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다. 김지민 과장의 고민은 상대적으로 소수만 고려하였겠지만, 이 세계를 잘 알고 있는 학부모라면 충분히 고민했을 수도 있는 건이다. 3년 특례 또는 12년 특례를 잘만 활용하면 훨씬 더 쉽게 명문대학에 입학시킬 기회가 생기는데 어떤 부모라도 배척하겠는가. 기회균형 특별전형 또는 사회통합전형 중 농어촌전형 역시 마찬가지다. 도시와 농촌의 경계가 모호한 수도권에서 조금만 외곽으로 이사 가면 훨씬 유리한 기회를 얻을 수 있기에 알만한 학부모들은 일찌감치 선제적으로 행동한다.

 

김지민도 그런 자신이 싫었다. 비교하면 끝이 없다는 걸 잘 알지만 애들이 자랄수록 욕심도 함께 부풀어 올랐다. 극성인 엄마 밑에서 자란 김지민은 절대 그런 엄마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마음을 비우고 자식을 키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P.162)

 

이렇게까지 하는 게 맞느냐 반문할 수 있지만, 부모의 책임감은 무한하다. 홍지원 입학사정관을 괴롭히는 열성 의대 엄마를 허구적이라고, 있더라도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더구나 요즘 같은 의대 열풍이 부는 시절이라면 한층 더하다. 초등학생 대상 의대입시반이 개설되는 게 현실 아닌가.

 

한덕수 처장의 말대로 입시는 전쟁이다. 상위권 대학은 우수 학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입결 하락을 막으려고 전전긍긍한다. 자기 학교는 대학서 열을 추월당하지 않으면서 경쟁대학을 뛰어넘길 바란다. 중하위권 대학으로서는 부럽기 그지없다. 그들은 어떻게든 충원하려고 미달을 막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뛴다. 학생의 우수성은 다른 나라 얘기다, 무조건 뽑아서 등록시키는 게 지상과제다. Q대학교 입학처는 한덕수 처장과 오현종 팀장이 떠나면서 새로운 도전에 놓였다. 새 처장과 팀장이 누가 될지 알 수 없으나 Q대학교 입학처가 획기적으로 바뀔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울 것이다. 대입을 둘러싼 법적, 제도적, ·재정적, 사회적 규제가 너무나 강력하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Q대학교 입학처 사람들은 이 소설 속 인물들처럼 똑같이 정신없이 압박감을 받으면서 피로에 지친 채 한 해를 보낼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래도 그렇지 못한 대학의 입학처보다는 낫다고 위안 삼은 채.

 

안수현과 이원석의 행복을 바란다. 그들은 생활인으로서 쳇바퀴 탈출을 선택했다. 오현종 팀장과 한덕수 처장이 평안한기를 바란다. 그들은 방식을 다를지언정 입학업무와 학교를 향한 사랑은 동일하다. 그리고 장대현 차장과 경지혜 책임사정관 이하 Q대학교 입학처 사람들이 성공하길 바란다. 부서든 개인이든, 입학업무를 어떻게 바라보든.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입학사정관을 지낸 경험을 토대로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작품 속 내용이 매우 사실적인 건 그래서이다. 다만 2020년에 취재한 내용이므로 매년 조금씩 변해가는 입시 상황에는 세부적으로 부합하지 않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당장 작중에서 빈번하게 언급되는 자기소개서는 더 이상 제출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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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1837년판 초판본 표지 디자인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박형규 옮김 / 써네스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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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킨은 소설가, 극작가이기에 앞서 시인이다. 어쩌면 푸쉬킨의 본령은 시인이라고 좋다. 소설 <예프게니 오네긴>은 운문체이며, <보리스 고두노프>를 비롯한 주요 희곡들도 모두 운문체로 쓰였으니 말이다. 이 책은 푸쉬킨의 주요 서정시를 수록하였다. 서정시인으로서 푸쉬킨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서사시인으로서 푸쉬킨은 앞서 읽은 책에 나타나 있다.

 

애국, 사랑, 시골(유배지 포함), 자유. 그의 시를 읽다 보면 머릿속에 떠오른 일관된 주제어다. 초창기의 시에는 애국 의식이 엿보이는데, <싸르스코예 셀로에서의 회상>은 최초로 인정받은 작품으로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가 전면에 나와 있는 시다.

 

시인의 애국심은 곧바로 현실 정치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충돌하며 이후 체제 비판적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 대가로 시인은 러시아 남부 카프카즈 및 크림반도 지역으로 유배당한다. 간혹 보이는 러시아 남부의 이국적 풍광을 다룬 작품의 이것과 관련되어 있다. <기다랗게 늘어선 흐르는 구름 엷어지고>는 유배지 크림 지방의 인상을 떠올리며, <바다에 부쳐>는 흑해 바다를 추억한다.

 

이때 접하는 카자크 민족과의 만남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니, 단순한 이국적 호기심에 그치지 않고 <스첸카 라진의 노래> 같은 시는 물론이고, <푸가초프 반란사><대위의 딸> 등 카자크 반란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스첸카 라진과 푸가초프 등 러시아 정부 시각에서는 사악한 반란 수괴가 그의 작품에서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인물로 그려지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마을>의 전반부는 시골, 전원의 아름다움을 잘 묘사하여 독자는 상쾌한 마음을 품는데, 후반부는 완전히 일변하여 전후의 극적 대비가 인상적이다. 시인은 시골 마을의 지주와 귀족들이 가하는 압제 광경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며 농노 제도가 사라진 이상적인 시골 마을을 꿈꾼다.

 

무엇보다 자유, 그리고 사랑은 아마도 푸쉬킨이 가장 중점을 둔 주제가 아닐는지. 행복과 불행이 교차한 시인의 짧은 삶을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동시에 그의 문학세계를 이해하려면 중요한 키워드다. 푸쉬킨의 유배로 점철된 삶은 그의 반체제적, 반정부적 태도와 문학세계와 관련되어 있다. 특히 데카브리스트와의 친분은 결국 그의 삶을 앞당긴 계기가 되었다.

 

황제들이여, 이제 배우라- / 형벌과 포상, / 감옥과 제단, 그 어느것도 / 그대들의 믿음직한 방책이 되지 못함을. / 미더운 법의 보호 아래 / 먼저 고개 숙이라, / 민중의 자유와 평안이 / 왕관의 영원한 보초가 되리라. (P.54)

 

남러시아로 추방당하게 된 계기가 된 시 <자유>의 일부다. 민중의 편에 서서 황제를 비롯한 권력층을 맹공하고 있으니 그들의 분노를 사고 위험인물이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리라.

 

하지만 러시아의 지배체제는 견고하고 황제의 권력은 막강하다. 기대를 걸었던 민중은 계몽과 투쟁의 길에 동참하길 망설인다. 견디다 못한 시인은 절망하고 그네들을 향한 실망과 질타를 퍼붓는다(<자유의 외로운 씨를 뿌리는 사람인>). 이 또한 시인의 자유를 향한 염원의 크기를 반증한다. 친구 챠다예프에게 보낸 시(<챠다예프에게>)에서 압제 속에서도 자유의 희망을 놓지 않는 시인의 마음을 여전히 헤아릴 수 있다.

 

푸쉬킨의 삶을 들여다볼 때 그가 나탈리야와 결혼하지 않았으면 그가 요절하지 않았을 거라는 안타까움이 생긴다. 언제나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시(<고백>)를 남긴 시인은 정작 현실에서는 참다운 사랑의 인연을 만나지 못하였다니. 아마도 그의 삶은 평범한 행로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듯하니, 보론쏘바 총독 부인, 안나 케른에게 바치는 시(<불태워진 편지>, <명예의 희구>, <안나 케른에게>)를 보면 아름다운 유부녀를 연모하는 시인에게서 훗날 자신의 상황이 그대로 반영된다. 자기 아내의 부정에 대한 근심과 모욕감, 질투와 분노. <그대는 용서하겠는가, 질투에 찬 내 공상>은 일종의 예언시라고 할 만하다.

 

시인은 다짐하고 결심한다. 삶이 자신을 속이더라도, 사랑의 불길에 자신을 태우지 않도록 경계하고 조심하나 사람의 마음이 어디 마음대로 되는가. 훗날 독자는 이 시들을 되뇌면서 시인의 불행한 역설적 삶을 회상할 따름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퍼하지 마라, 성내지 마라! /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 기쁨의 날이 옴을 믿어라. (P.126, (삶이 그대를 속이지라도))

 

아니다, 아니다, 하지 말아야 한다, 할 수도 없고 감히 해서도 안된다, / 사랑의 흥분에 분별없이 몸을 내맡기는 것을. / 내 마음의 평화를 굳게 지키리라, / 사랑의 불길에 마음을 불태우게 하거나 무아경에 빠지도록 하지 않으리라. (P.219, ...에게)

 

사랑과 자유를 희구하였으나 둘 다로부터 배척받은 시인은 모두를 거부한다. 그의 주위에는 자신과 사상을 같이할 동지도 없으며, 가정에서도 기쁨과 평안을 얻지 못한다. 그는 세상의 주변인, 이방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일찍이 러시아 남부로 유배당하였을 때 겪었던 것처럼. 그때 시인은 자신을 동향으로 유배되었던 오비디우스와 동일시하지 않았던가. 낯선 곳을 정처 없이 방랑하다가 타지에서 숨을 거두고 마는.

 

내 앞에는 목적이 없다- / 가슴을 공허하고 이성은 무위롭다, / 생활의 단조로운 소음이 / 우울함으로 나를 괴롭힌다. (P.176, (1828526))

 

총알이 가슴을 관통하지 않았더라도 푸쉬킨은 제명을 누리지 못하였을지 모른다. 삶의 의미와 사랑을 잃은 시인에게 더 남은 게 무엇이며, 삶을 지탱할 의욕이 어디 있겠는가. 시인은 시와는 다른 삶을 선택한 것이다.

 

이 책은 2009년에 초판, 2020년에 개정판이 나왔다고 하는데, 간간이 고색창연한 표현과 어휘가 보여서 요즘 시대의 산뜻한 느낌은 없다. 1세대 러시아문학 번역자인 옮긴이를 생각하면 예전 번역본을 그대로 재발간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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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아 프랑수아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조르주 상드 지음, 이재희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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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요정 파데트>, <마의 늪>에 이어 계속 읽는 조르주 상드의 전원소설이다. 목가적이니, 전원풍이니 하면 시골과 자연 속 아름답고 낭만적인 정경만 머릿속에 떠오르기 마련이다. 도시와 시골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는 이런저런 성격과 사고, 행동 유형 그리고 관습과 문화가 섞이고 부딪치기 마련이다. 어찌 조화와 평화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작품에서도 시골의 아름다움보다는 환경과 역경을 헤쳐 나가는 한 개인의 뛰어난 자질이 유독 돋보인다. 바로 사생아프랑수아다. 여기서 먼저 정리할 대목이 있는데, ‘사생아란 표현이 버려진 아이 또는 고아를 지칭하며, 통상적 의미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어쨌든 전통 사회에서 사생아는 부정적 존재로 인식되고 취급되기에 온전한 성인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흔치 않다고 한다. 작품 내에서도 사생아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여러 폄하적 발언이 반복된다.

 

다른 사생아들은 그들의 숙명 때문에 거의 항상 굴욕적인 삶을 살아갔고, 사람들은 그들에게 애당초 기독교인으로서의 긍지마저 박탈당한 인생이란 것을 너무나 가혹하게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사생아들을 그들을 낳아 준 사람들에 대한 증오 속에서 자라났다. (P.77-78)

 

주인공 프랑수아는 다르다. 물론 블랑셰 부인의 거둠과 보살핌, 부인 자신의 온후한 인품의 영향을 받은 점에서 유리할 수 있지만 결국 세인의 은연중 괄시와 냉대를 극복하고 멋진 청년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수아 자신의 미덕과 노력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세베르 부인이 그를 유혹하려고 시도했으며, 자네트도 그를 자신의 남편감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냉정한 시어머니, 방앗간 사업에 무심한 데다 드러내놓고 외도까지 하는 남편, 와중에 점점 어려워지는 살림살이를 힘겹게 이끌면서 지탱해가는 블랑셰 부인. 여기서 독자는 당대 시골의 삶이 결코 관념적이거나 이상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마들렌은 놀라서 사생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아이의 두 눈 속에는 가장 현명한 사람들의 눈빛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깃들어 있었다. 더없이 선하면서도 더없이 의연한 그 무엇인가에 이끌려 마들렌은 어안이 벙벙했다. (P.46)

 

블랑셰 부인의 프랑수아를 향한 보살핌과 애정은 매우 순수하고 따뜻한 인간 본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프랑수아의 말과 눈에서 아마 그녀는 프랑수아의 참다운 인간성을 발견하였으리라. 그녀는 프랑수아를 자기 아들처럼 사랑하였다. 하지만 남편과 주변 사람은 그렇게 순수한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물론 블랑셰 부인을 비방하려는 악의적 의도로 한 말이겠지만, 피가 섞이지 않은 남녀 사이, 게다가 훌쩍 멋진 청년으로 성장한 프랑수아와 블랑셰 부인의 나이 차는 십여 세밖에 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발언을 통해 볼 때 십여 세 연상연하의 결혼은 당대에 드물지 않았음을 생각해 보면 그들의 모함과 우려도 결코 허튼소리가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블랑셰 부인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으며, 프랑수아도 결정적 계기에 이르기까지는 어머니로서 사랑한다고 믿는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 순수한 모성애이자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라고 믿었다.

 

제아무리 프랑수아가 뛰어난 청년이라고 하더라도 인위적, 우연적 요소가 추가되지 않았다면 소설은 좋은 방향으로 진행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가 시골 사람으로서는 드물게 읽고 쓸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이 있었다는 점, 나중에 생모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점이다. 프랑수아는 남편의 빚과 죽음으로 몰락한 블랑셰 부인과 방앗간을 되살릴 수 있었고, 이제 그는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블랑셰 부인과 대등한 지위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농민]의 노고, 지주들의 땀 한 방울, 돈 한 푼 들어가지 않은 경작의 대가로, 그 땅의 가치가 두 배로 오르게 되면 그들은 그것을 다시 회수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힘없는 잉어들은 늘 대어의 사냥감이 되고, 우리의 탐욕 때문에 벌을 받는다. (P.186)

 

프랑수아가 세베르 부인의 음모를 파헤치고 블랑셰 부인을 돕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작가는 시골 토지 소유와 관련한 부조리를 고발한다. 시골 농민은 소작농으로 열심히 경작하지만 거의 모든 대가는 토지를 소유한 지주에게 돌아간다는, 어찌 보면 인류사에서 항상 되풀이되지만 근원적 해결이 어려운 현상. 이 작품이 사회고발 소설이라면 이 사안만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집중적으로 조명하겠지만, 작가는 더 이상의 진전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실상 이 작품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대목은 프랑수아와 마들렌, 즉 블랑셰 부인의 결혼이라는 설정이다. 작품 속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시종일관 혈연에 근거한 모자 관계에 준하는 돈독한 가족에 가깝다. 마들렌은 프랑수아를 큰아들로, 프랑수아는 마들렌을 어머니로 여겼다.

 

마침내 마들렌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프랑수아는 그녀가 자기를 남편으로 받아들인 데 대해 무릎을 꿇고 감사했다. (P.246)

 

모자간의 애정이 갑작스럽게 남녀 간의 사랑으로 바뀌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사랑의 성격이 일순간에 완전히 뒤바뀌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인정해야 가능하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가능성은 단 하나, 두 사람의 사랑은 언제부턴가 남녀 간의 사랑이었지만 외관상 모자간의 것으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위장하였다는 것. 후자가 진실에 가깝다면 블랑셰가 우려하고, 세베르와 마리에트가 주고받은 대화는 근거가 있는 셈. 자네트는 프랑수아에게 이 점을 분명하게 깨우쳐 준다.

 

마들렌이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기에 프랑수아의 생각이 그러하였을 수도 있겠지만, 악마에 걸고 부인하던 마들렌의 변심은 놀랍기 그지없다. 이러한 사례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적어도 내 관점으로는 흔쾌히 인정하기 어렵다. 내가 애들이 말하듯 틀딱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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