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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슈킨 선집 : 희곡.서사시 편 - 보리스 고두노프.집시.폴타바 외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2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최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6월
평점 :
<수록작품>
희곡 편 : 보리스 고두노프, 『파우스트』의 한 장면, 인색한 기사,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석상 손님, 페스트 속의 향연
서사시 편 : 가브릴리아다, 집시, 눌린 백작, 폴타바, 안젤로, 청동 기사, 황금 수탉
푸쉬킨의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무래도 <대위의 딸>과 <예프게니 오네긴>으로 대표되는 소설이다. 이 책에 수록된 희곡과 서사시는 나를 포함한 일반독자에겐 아무래도 생소하다. 그렇기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푸쉬킨의 다른 모습을 찾는 기회이기도 하다.
러시아 음악계는 일찍부터 푸쉬킨의 작품에 주목하였는데 특히 많은 오페라 작품의 대본으로 푸쉬킨을 선택하였다. 차이코프스키(<스페이드 여왕>, <예프게니 오네긴>, <마제파>(폴타바)), 라흐마니노프(<알레코>(집시), <인색한 기사>), 림스키코르사코프(<황금 수탉>,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무소르그스키(<보리스 고두노프>), 큐이(<페스트 속의 향연>) 등의 면면에서 그의 인기를 확인할 수 있다.
푸쉬킨은 러시아 문학계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온 작가가 아니다. 그는 서구의 문학 전통을 충실하게 흡수하고 러시아 특유의 문화를 조화하여 서구와 구별되는 러시아 만의 문학 세계를 창출하였다. 이를 희곡과 서사시에서 특히 찾아볼 수 있는데, 무엇보다 셰익스피어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제재와 형식 모두에서 셰익스피어 사극의 직접적 연관성이 나타난다. <눌린 백작>과 <안젤로>는 셰익스피어의 <루크리스의 능욕>, <자에는 자로>에 대한 패러디다.
전반부는 희곡 편이다. 가장 먼저 장편 희곡 <보리스 고두노프>이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다툼이라는 면에서 일련의 영국 사극과 <맥베스>의 러시아 버전이다. 정통성 면에서 보리스나 참칭자 모두 차이점이 없다. 보리스는 “공포와 사랑, 그리고 명성”(1장)의 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유능한 통치자다. 그가 어린 황태자를 암살하고 황제 추대를 짐짓 사양하는 연출은 희귀한 사례가 전혀 아니다. 그리고리가 참칭자임을 반란 세력은 모두 알고 있다. 그가 진짜 황태자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반 보리스파의 상징일 뿐이다. 귀족들은 그를 내세워 보리스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중에 그를 허수아비로 부려 먹건 폐위시키건 그때 가서 정하면 된다.
여기서 푸쉬킨은 보리스 몰락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그의 정통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통치가 귀족과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반감을 초래하였기에 일개 참칭자에 의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는 것. 출신과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바스마노프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장면과 아들에게 전해주는 긴 유언을 보면 우리는 보리스가 흔한 말로 평범한 폭군이 아니라 비범한 황제였음을 알 수 있다.
보리스가 황태자를 살해했다고 비난하던 세력이 도리어 보리스의 부인과 아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대목은 권력 앞에서 모두가 마찬가지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 와중에 백성들은 생존을 위해서 우는 시늉을 하느라 양파를 문지르거나 침을 바르는 연기를 보여준다. 언뜻 보면 바람에 흔들리는 들풀처럼 마냥 연약한 부류로 보이지만 마지막 장에서 보리스 가족의 살해를 “경악 속에 침묵”(25장)으로 대응하는 그들에게서 진실을 파악할 줄 아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푸쉬킨은 이 작품의 원제에 ‘희극’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무엇이 희극일까, 전혀 희극적 내용이 아닌데. <작품 해설>을 보자.
이 작품은 두 통치자의 유사성과 그들이 이루어 가는, 또 그들과 함께 이루어지는 역사에 대해 아이러니한 웃음을 보내는 푸슈킨의 시선이 담겨 있다. (P.468)
<『파우스트』의 한 장면>은 권태를 제재로 한다. 유독 19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권태가 주요 제재로 나오는 것은 무엇일까. 일각의 주장처럼 사상적 진보를 억누르는 정치적 체제로 충분한 설명이 가능할지 아니면 또 다른 까닭이 있을지 궁금하다. 메피스토펠레스의 말처럼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권태는 가능하다. 한가하든 분주하든.
<인색한 기사>는 인색한 부자인 알베르와 아버지 남작의 상반되는 행태에서 인색함의 본질을 되새긴다. 남작은 재물 축적을 숭배하며, 자식에 대한 사랑은 인색하다. 알베르는 재물 낭비를 숭배하며, 아버지에 대한 존경은 인색하다. 아버지를 고발하는 아들, 아들에게 누명을 씌우는 아버지. 결투를 제안하는 아버지, 결투를 수락하는 아들. 이쯤 되면 막장 집안이다. 영주의 분노로 결투는 성사되지 않지만, 과도한 정신적 흥분으로 늙은 아버지는 숨을 거둔다. 행복과 명예와 영광을 품고 있는 황금을 그대로 놓아둔 채. 진부한 표현이지만 죽고 난 다음에 수북하게 쌓인 보화는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는 알베르의 불효를 비난할 수 있지만, 애당초 그렇게 자식을 키운 책임에서 아버지 남작은 자유롭지 못하다. 작가가 굳이 ‘인색한 기사’라고 표제를 단 이유 역시 같은 의미리라. “끔찍한 시대, 끔찍한 마음이여!” (P.164, 3장)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내용은 영화 <아마데우스>와 비슷하다. 성공한 음악가이지만 재능 면에서는 모차르트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알고 있는 살리에리. 그의 뿌리 깊은 시기는 천재를 향한 범인(凡人)의 공통적 감정이다. 자신의 끊임없는 노력과 헌신을 무색하게 만드는 게으른 방탕아. 존경할만한 구석은 털끝만큼도 없건만 그가 만들어낸 음악은 천상의 경지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은 과연 살리에리의 말대로 세상에 헛된 희망만을 일으킬 뿐 소용없는 존재일까. 그나마 소수의 선택받은 “한가한 운 좋은 사람들.”(P.180, 2장)의 덕택으로 우리는 ‘천국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게 되었고,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이데아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지 않은가.
(살리에리) 그리고 내가 옳았다! 드디어 나는 / 나의 적을 발견했고, 새로운 하이든은 / 나를 열광으로 경이롭게 취하게 한다! (P.175, 1장)
위 대목에서 ‘새로운 하이든’이 베토벤을 지칭하는 거라면, 살리에리는 하이든에서 자신을 거쳐 베토벤으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음악의 정통성을 찾으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석상 손님>의 주인공은 난봉꾼 돈 환. 이 책에서는 돈 구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돈 환의 러시아식 명칭인 듯하지만 매우 낯설다. 푸쉬킨은 돈 환의 이야기 중에서 그의 최후 장면을 선택하였다. 자신이 죽인 기사단장의 미망인 돈나 안나를 유혹하는 데 성공하는 돈 환. 그는 기사단장 석상에게 나중에 와서 문간의 파수나 보라고 조롱하는 만용을 부린다. 석상과 함께 땅속으로 가라앉는 돈 환은 권선징악의 전형이다. 다만 여기 불쌍한 돈나 안나가 남는다. 그런데 돈나 안나를 향해 돈 환이 내뱉은 말, 즉 자신은 진정한 사랑을 해보지 못하였다는 고백은 단지 거짓과 유혹일까 아니면 진심의 토로일까?
<페스트 속의 향연>은 자칫 불건전하고 비윤리적인 사상을 옹호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수많은 인명을 빼앗고 마을을 황폐화한 페스트를 찬양하다니. 이런 말이 있다, 삶의 진정한 가치와 행복을 실감할 수 있는 존재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불멸의 존재는 삶에 대해 절박함이 없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만이 삶을 찬양할 수 있다. 페스트는 인간 삶의 절대적 위협이기에 역설적으로 그만큼 삶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의 크기는 커질 수밖에. 작가는 이렇게 의장의 입을 빌려 주장한다.
후반부는 서사시 편이다. 모두 7편을 담고 있다. <가브릴리아다>는 기독교적 기준으로 매우 불온한 작품이다. 동정녀 마리아가 여호와의 은총을 받아 예수를 낳았다는 성서의 기록에 완전히 배치된다. 신에 앞서 사탄과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품에 안았으며, 마리아는 이를 전혀 이상하거나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시는 젊은 시절의 시인답게 육체적 쾌락의 가치를 역설한다. 아담과 이브의 권태를 즐거움과 행복으로 바꿔준 게 뱀, 즉 사탄이며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육체적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는 주장은 참신하다. 미남 가브리엘이 신도 탐낸 미인 마리아에게 매혹을 느낀 것 또한 당연하다. 신을 “오쟁이 진 남편들의 옹호자”(P.256)로 지칭하는 시인은 자신의 미래를 예감했던 것일까.
<집시>는 비극이다. 알레코와 젬피라의 사랑은 <카르멘>의 호세와 카르멘의 그것과 동질적이다. 집시와 더불어 살고 사랑하지만, 집시의 가치 기준을 지니지 않은 남자. 자유로운 영혼과 더불어 자유로운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는 여자. 남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문명사회를 떠나 집시와 합류하였지만 끝끝내 집시를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오늘날 연인도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지만 그것이 깨질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한다. 결혼에 이르러도 이혼하는 사례가 빈발하는 현실이다. 하물며 젬피라처럼 젊고 아름다우며 자유로운 영혼에게 그것을 강제할 수 있겠는가. 노인의 충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알레코에게 남은 것은 오직 비극적 선택일뿐.
<눌린 백작>은 패러디다. 루크리스[루크레티아]는 타킨의 능욕 시도를 정말로 거부할 수 없었는가. 루크리스의 능욕으로 로마 왕정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게 사실일까. 눌린 백작은 권태에 지친 안주인 나탈리야의 마음을 잘못 읽고 밤에 몰래 들어갔다가 뺨을 얻어맞은 채 나오고 만다. 이틀 아침 동안에 이 작품을 쓰면서 푸쉬킨은 무척 즐거웠으리라. 독자는 루크리스의 소극성에 대비되는 나탈리야의 적극적 저항과 정조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꼬리를 만 채 도망치듯 떠나는 눌린 백작과 뒤늦게 이 사실을 전해 듣고 펄펄 뛰는 지주 남편, 여기까지는 모양이 좋다. 잠깐, 가장 크게 웃는 스물세 살의 이웃 지주는? 여기서 푸쉬킨이 단지 패러디만 시도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앞부분 나탈리야의 생활 모습과, 눌린 백작과 안주인 간 식탁 대화와 함께 그가 정작 노린 것은 다른 데 있음을 깨닫게 된다.
<폴타바>를 맨 나중으로 미루고 다른 시들을 먼저 살펴보련다. <안젤로> 역시 셰익스피어 작품에 대한 패러디다. <눌린 백작>에 비하면 패러디성은 약하고, 극 작품을 단순화한 구조의 시 작품으로 변용하였다. 사랑과 애정의 자연스러운 표출을 억지로 막는 인위적 법 규범은 실행 불가능하다. 법률 집행의 수호자인 안젤로조차 비난받아 마땅한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의 욕정을 채우려고 하지 않는가. 원작에 비해서 더 마음에 드는 점은 순결한 이사벨라가 공작과 난데없이 결혼하는 이상한 설정이 없어서다.
<청동 기사>는 ‘페테르부르크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페테르부르크, 페트로그라드, 레닌그라드,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다양한 이력을 자랑하는 도시. 표트르대제가 유럽을 향한 창으로 네바강 하구에 설계한 계획도시이자 러시아 제2의 도시. 러시아인에게, 그리고 시인에게 있어 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라는 거인의 당당함과 제정 러시아의 위대한 힘을 내비치는 자랑스러운 상징물이리라.
찬미는 여기까지다. 시인은 곧바로 1824년의 대홍수를 꺼내 든다. 거센 역풍으로 바다로 빠져나가지 못한 채 도시를 완전히 침수시킨 강의 어마어마한 위력. 사랑하는 여인 파라샤와 소박한 미래를 꿈꾸는 예브게니, 높이 솟은 청동 기사상에 매달려 겨우 목숨을 구한 예브게니. 그의 여인이 살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의 꿈은 대홍수로 산산조각이 난다. 절망에 빠진 채 방황하던 그의 눈앞에 불쑥 나타난 청동 기사상.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그에게 감사해야 하는지, 자연을 거스르고 ‘바다 밑에 도시를 세운’ 그 사람의 파멸적 의지를 비난해야 할지. 연약한 예브게니는 다만 세상을 살아갈 의미를 잃는다.
<황금 수탉>은 일종의 우화다. 거세된 현자의 지혜로 평화를 이루었지만, 샤마한 공주의 마술은 현자보다 강력하다. 왕자들은 서로 다투다 죽고, 매혹에 압도된 황제는 슬픔도 지혜도 모두 잊는다. 그렇다, 이것은 사랑의 마술이자 주문이다. 그것 앞에서는 제아무리 현명하고 뛰어난 인물도 암컷을 욕망하는 한 마리 수컷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의 본능은 강력하지만, 이것에 빠진 채 인간의 기본적 본성을 잃는다면 비극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그때 가서 사랑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평화를 지키던 황금 수탉의 공격으로 비극은 완성되고 공주는 사라지고 상황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종료된다, 교훈적으로. 시사적이다.
이제 <폴타바>다. 수록된 서사시 중 가장 장편인 동시에 역사적 사건을 제재로 삼은 역사시다. 때문인지 상당히 많은 시인의 주석이 덧붙여 있다. 러시아와 스웨덴 간 북방전쟁을 다루었는데,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우크라이나 카자흐 족장인 마제파가 주인공이다. 이 인물은 후대에 이르러 매우 유명해졌는데, 러시아 제국에 정면 도전한 실패한 영웅으로서 여러 시인과 작곡가들이 작품을 썼다.
러시아 사람인 푸쉬킨은 마제파를 달리 본다. 여기서 마제파는 늙은 족장으로서 친우로 여겼던 코추베이를 배신하고 그녀의 딸이자 자신에게는 대녀인 마리야를 꾀어낸다. 마제파를 가리키는 시인의 표현은 부정적이다. 악당, 교활, 거짓, 사악, 범죄, 냉혹, 뻔뻔함 등. 러시아로서는 저항 세력의 대장이었으니 서구 측과는 관점의 차이가 있는 게 당연하다.
코추베이와 이스크라의 어찌 보면 억울한 죽음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음을 인정한다. 다만 코추베이를 고문하면서 숨긴 재물을 요구하는 오를릭을 통해 시인은 마제파 세력의 비도덕성을 강조한다. 카자흐의 시각에서 볼 때 마제파는 민족의 독립 투쟁을 이끈 영웅이다. 오랜 기간 머리를 숙이고 복종하는 채 은인자중하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스웨덴 국왕과의 연합이 성공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은 채. 스웨덴 국왕 카를과 카자흐 마제파의 연합 세력과 표트르 대제의 러시아 간 일대 회전이 바로 폴타바 전투다. 여기서의 승전을 계기로 북방전쟁은 결정적으로 러시아 우위로 넘어서는데, 이 서사시의 두 주인공, 마제파와 마리야 역시 비극으로 치닫는다.
역사는 영웅을 기억한다. 푸쉬킨의 의도와는 반대로 마제파는 시인과 음악가들의 덕택으로 역사적, 예술적 영웅으로 영생을 누리게 되었다. 불쌍한 마리야는? 가족을 버린 채 남자 하나만을 보고 따라왔건만 사랑하는 이에 의해 아버지는 목이 잘려버렸다. 사랑과 미움 사이에서 제정신을 잃은 그녀에게 시인은 더없는 동정을 표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침략국보다는 피침략국이자 약소국인 우크라이나에 마음이 쏠림은 당연하다. 우리도 같은 처지에 있으므로. 그래서일까, 우크라이나 독립을 위해 봉기하는 마제파의 외침이 남다르게 다가옴이.
(마제파) 사랑스러운 자유와 명예 없이 / 우리는 바르샤바의 보호 아래 / 모스크바의 전제 군주 아래 / 오랫동안 고개를 숙였소. 하나 이미 / 우크라이나가 독립할 / 시기가 온 거요. / 피 흘리는 자유의 깃발을 / 표트르를 향해 쳐드오. (P.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