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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와 실황임을 감안하고 들었는데 기대를 뛰어넘는 음질을 들려주었다.  

아직 말년 번스타인 특유의 거대하게 확장된 음의 세계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지만 자체로서도 수준급의 연주라고 생각한다. 장대하게 폭발하는 힘은 오히려 이때가 더 낫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논리적으로 구축되고 정제된 말러가 아니라 생명력이 살아 숨쉬고 꿈틀거리는 말러의 8번을 원한다면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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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뜻깊은 음반이다. 내가 제일 처음으로 구입한 발레 음악이자 <백조의 호수> 음반이다. 당시 서울음반에서 내놓은 라이센스 LP 음반이었는데, 아직 CD로는 국내에 나오지 않은 듯하다. 매우 아쉽다. 이렇게 탁월한 연주가 묻히다니.

주연 여자무용수가 전면에 나와 양팔을 벌리고 그 뒤를 남자무용수가 받쳐 주는 아름다운 음반 재킷은 고전 발레에 대한 나의 환상을 한껏 충족시켜 주었으며 선곡과 연주 또한 뛰어나서 참 많이도 듣고는 하였다.

모든 발레 음악과 마찬가지로 <백조의 호수> 연주는 발레 음악으로 연주할 것인가 아니면 귀에 쏙쏙 감기는 아름다운 관현악곡으로 접근할 것인가하는 분기점이 존재한다. 작품의 인지도에 비해 발레 지휘와 감상 경험을 갖기란 실제로 어렵기 마련이므로 대개의 지휘자와 청자는 관현악 작품으로 받아들인다. 확실히 이 편이 해석의 제약을 벗고 템포와 극성의 자재한 조절이 가능하다.

한편 정통 발레 스타일의 연주는 작품의 진면모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소중하며, 더욱이 여기에 연주마저 뛰어나다면 금상첨화다.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연주자가 바로 알기스 주라이티스와 볼쇼이 오케스트라다. 이들의 <백조의 호수>는 요약하면 서정과 극성을 절묘한 융합이다. 연주와 녹음이 환상의 조화를 이룬 소위 명반의 필요충분조건을 지닌 셈이다.

이들의 대단함은 1막 왈츠의 피치카토 개시부만 들어도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다. 이어지는 바리에씨옹과 코다를 통해 우아하고 세련되며 역동적인 매력에 흠뻑 취할 수밖에 없다. 아, 이게 바로 정통 고전 발레이구나. 1막 정경의 클라이막스에서 한껏 기대하였던 팀파니(큰북?)의 쿵 쿵 하는 타격감이 부재하여 처음에 실망하였던 기억이 떠오른다. 순전한 관현악곡 해석의 연주에 길들여진 탓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가장 압권은 역시 '파 드 되' 부분이다. 독주 바이올린의 섬세하면서도 애잔한 선율은 다른 연주에서는 결코 느껴보지 못하였다. 한껏 물기를 머금은 소리는 다소 느린 템포로 청자의 가슴을 후벼파는데 왜 이리 짧게 느껴지는, 그냥 이대로 한없이 지속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들을 때마다 남긴다. 연주자의 숨소리가 배어나오는 게 이채로우면서 거슬림이 없다.

2막에서 스페인 춤, 나폴리 춤 등의 장면에서는 너무나 흥겨운 나머지 콧노래가 나오며 무릎을 들썩들썩, 고개를 까딱까딱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장면에서 무심한 사람의 감수성에는 절대 동의하지 못한다.

1983년 당시, 멜로디야와 일본 빅터의 협력으로 만든 이 연주가 완전한 전곡판으로 다시 출반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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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러의 제9번을 듣다보면 은연 중에 쓸쓸한 체념의 정서가 다가온다. 지상에서의 삶이 스러지는 데 대한 어찌할 수 없는 회한 말이다. 브루크너의 제9번과 차이코프스키의 제6번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공통은 바로 전 악장이 요란한 스케르초나 론도로 후에 이어지는 악장과 극히 대비가 된다는 점에도 있다.

평생 말러를 사로잡았던 죽음에 대한 의식이 이제 보다 구체성과 직접성을 띠고 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내가 즐겨보던 <교향곡 명곡 해설(일신서적공사)>에는 '말러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각 곡의 성격을 해설하면서 이 제9번에는 '고별에 관해서'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 말러는 이제 죽음을 외면하고 거부하고 도망치는 데서 벗어나 이를 받아들이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말러 작품의 해석에 보면 세가지 유형이 있다. 순음악적 연주, 노이만과 쿠벨릭, 스튜디오의 텐슈테트가 이에 해당되려나. 주정적 해석, 자칫하면 감정과잉이 될 수도 있다. 번스타인(특히 신반), 실황의 텐슈테트. 그리고 기능적 접근법, 솔티가 대표적이다.

번스타인은 공식 음반으로 말러 시리즈를 두 번에 걸쳐 남기고 있다. 장년기의 말러를 통해서 말러에 대한 재인식의 계기를 마련하였고, 노년기의 말러를 통해서 말러 해석의 일대 지평을 넓혀 놓았다.

번스타인의 연주는 자칫 감정과다로 평가될 수 있다. 감정이입과 감정과잉, 여기에는 미묘하나 상당한 차이가 있다. 감정이입이 없으면 지휘자는 악보를 보고 팔만 흔드는 나무토막이 된다. 악보를 매개로 한 지휘자와 작곡가의 소통, 여기에서 진정한 음악 해석이 나온다.

번스타인의 해석은 지극히 탐미적이면서 곡의 구조와 악상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필요할 때는 충분히 감정을 불어넣어 깊은 정서미를 보이다가도 단호하게 매듭지을 줄도 안다. 그것이 말년의 번스타인의 음악 미학이다. 이 제9번도 '고별'이라고 첫악장부터 오버하지 않는다. 오히려 1악장 중간의 금관의 통렬한 울림은 고뇌와 고독의 절규가 아니라 운명에 당당히 맞서는 인상마저 자아낸다. 그렇다. 내 죽음에 무너지지 않으리라. 죽음이 인간의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라면 차라리 의연하고 당당하게 이겨내리라. 시인의 말처럼 한 세상 즐겁게 놀다가 소풍 끝내는 날, 하늘로 올라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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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러의 제7번은 말러 전성기를 맞이한 현대에도 제3번과 더불어 여전히 비인기곡이다. 예술성이 떨어지기 보다는 청중의 귀에 단번에 쏙 다가서는 요소가 드러나 있지 않은 연유가 크다. 제1번은 4악장의 거대한 폭발, 제2번은 역동적 선율과 합창의 어우러짐, 제4번은 서정성, 제5번은 서두의 트럼펫 독주로 시작하는 장쾌한 관현악과 4악장 아다지에토의 감상성, 제6번은 마지막 악장 해머 타격의 충격, 제8번은 천인이라는 미증유의 스케일, 제9번은 끝모를 깊이로 빠져드는 고별의 미학, <대지의 노래>는 남녀 성악이 주도하는 형식의 특이성과 중국 시에서 끌어온 가사 내용의 달관의 정서 등등.

제7번은 이런 요소가 부족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선입견이자 편견이다. 1악장과 마지막 5악장을 보면 여전히 말러의 거대한 오케스트레이션의 울림을 즐길 수 있다. 특히 마지막 피날레는 압도적이다. 또한 2악장과 4악장의 야곡(夜曲)은 자체로 독특한 데다 후자에는 기타와 만돌린이 밤의 세레나데를 부르고 있다. 로맨틱한 정감을 자아내며.

오늘 레너드 번스타인 지휘, 뉴욕필의 신음반으로 이 곡을 듣는다. 역시 말년의 번스타인답게 거대하게 확장된 스케일로 하지만 음 하나, 소절 하나도 철저하게 자신만의 주정적인 해석으로 들려준다. 이 연주를 들으면 제7번이 덜 주목받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실황이지만 매우 뛰어난 녹음에 힘입어 마이너가 아닌 메이저로서의 제7번을 웅변적으로 표현한다. 이는 말러 연주에서 거대한 성곽을 구축한 번스타인이나 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세레나데 풍은 조금 더 밤의 정서를 풍겼으면 하는 일말의 바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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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 탓인지 다소 평면적으로 들리나 음악의 흐름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4악장 초반부에 바이올린 선율을 부각시켜 기분좋은 생경한 효과를 주고 있다. 성부 간 울림이 투명하며 전체적으로 극적인 효과보다는 말러 본연의 순음악을 표현하고자 노력한 연주로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노이만과 안체를의 말러는 저평가되었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음향 구조에 열광하는 세태에 이들의 순음악적 접근방식은 귀에 차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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