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러의 제9번을 듣다보면 은연 중에 쓸쓸한 체념의 정서가 다가온다. 지상에서의 삶이 스러지는 데 대한 어찌할 수 없는 회한 말이다. 브루크너의 제9번과 차이코프스키의 제6번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공통은 바로 전 악장이 요란한 스케르초나 론도로 후에 이어지는 악장과 극히 대비가 된다는 점에도 있다.
평생 말러를 사로잡았던 죽음에 대한 의식이 이제 보다 구체성과 직접성을 띠고 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내가 즐겨보던 <교향곡 명곡 해설(일신서적공사)>에는 '말러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각 곡의 성격을 해설하면서 이 제9번에는 '고별에 관해서'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 말러는 이제 죽음을 외면하고 거부하고 도망치는 데서 벗어나 이를 받아들이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말러 작품의 해석에 보면 세가지 유형이 있다. 순음악적 연주, 노이만과 쿠벨릭, 스튜디오의 텐슈테트가 이에 해당되려나. 주정적 해석, 자칫하면 감정과잉이 될 수도 있다. 번스타인(특히 신반), 실황의 텐슈테트. 그리고 기능적 접근법, 솔티가 대표적이다.
번스타인은 공식 음반으로 말러 시리즈를 두 번에 걸쳐 남기고 있다. 장년기의 말러를 통해서 말러에 대한 재인식의 계기를 마련하였고, 노년기의 말러를 통해서 말러 해석의 일대 지평을 넓혀 놓았다.
번스타인의 연주는 자칫 감정과다로 평가될 수 있다. 감정이입과 감정과잉, 여기에는 미묘하나 상당한 차이가 있다. 감정이입이 없으면 지휘자는 악보를 보고 팔만 흔드는 나무토막이 된다. 악보를 매개로 한 지휘자와 작곡가의 소통, 여기에서 진정한 음악 해석이 나온다.
번스타인의 해석은 지극히 탐미적이면서 곡의 구조와 악상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필요할 때는 충분히 감정을 불어넣어 깊은 정서미를 보이다가도 단호하게 매듭지을 줄도 안다. 그것이 말년의 번스타인의 음악 미학이다. 이 제9번도 '고별'이라고 첫악장부터 오버하지 않는다. 오히려 1악장 중간의 금관의 통렬한 울림은 고뇌와 고독의 절규가 아니라 운명에 당당히 맞서는 인상마저 자아낸다. 그렇다. 내 죽음에 무너지지 않으리라. 죽음이 인간의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라면 차라리 의연하고 당당하게 이겨내리라. 시인의 말처럼 한 세상 즐겁게 놀다가 소풍 끝내는 날, 하늘로 올라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