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를 입은 비너스 펭귄클래식 61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지음, 김재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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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소한 작가의 낯선 작품이다. 이 소설은 작품 자체보다 이후 작가의 이름에서 파생된 한 심리학적, 병리학적 용어로 대중에게 더 낯익다. 마조히즘, 즉 피학성애라는 변태성욕에 빠진 남성과 그의 주인으로 군림하는 여성의 이야기다. 작품을 읽다 보면 어쨌거나 적절한 명칭을 붙였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작가로서는 기분 나쁘고 불만을 품겠지만 말이다.

 

그래, 그렇게 해줘요. 아주 거만한 모습을 보여 줘요. 폭군이 되어줘요.” 나는 극히 격앙되어 소리쳤다. (P.54)

 

그렇게 오만해져 봐요.” 나는 소리쳤다. “발로 나를 밟아줘요.” (P.77)

 

나를 때려줘요.” 나는 애원했다. “무자비하게 때려줘요.” (P.81)

 

제베린이라는 한 신사가 반다라는 젊은 여인을 알게 되었는데, 친분을 나누다 보니 그의 독특한 성적 취향을 반다가 거부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이른바 정상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제베린의 되풀이되는 피학 욕구는 그녀에게 잠재된 가학적 본능을 일깨우고 양자는 채찍의 휘두름과, 자발적 노예 학대 행위를 통해 그들만의 사랑을 지속해 간다.

 

나는 당신을 더욱더 깊이 사랑할 겁니다. 당신이 나를 학대하면 학대할수록 나는 더욱더 미친 듯이 당신을 사모하고 숭배할 겁니다. 지금까지 내게 한 당신의 행동은 나의 피에 불을 붙여 주고 온 감각을 도취하게 만들었습니다.” (P.130)

 

이것이 마조히즘의 본질이다.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동물성 또는 야수성으로 인해 가학성애, 즉 사디즘은 어느 정도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고통과 학대에서 쾌감을 얻는 심리상태는 쉽사리 동감하기 어렵지만, 순전한 상상으로 치부하기 어려움도 알고 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다양하므로. 사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제베린을 다분히 일반적 사람과는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 실제 여인이 아니라 돌로 된 비너스상에 애정을 품는다든가, 사춘기 시절 친척 아주머니에게 호되게 매질을 당해 남자다운 태도를 포기한 전례가 있다. 무엇보다 제베린은 남달리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이다.

 

당신도 알겠지만 나는 아주 예민한 사람입니다. 내 경우엔 모든 것이 상상력에 기반하고 있으며 모든 것이 거기서 자양분을 섭취하지요. 나는 조숙했으며 극히 민감했어요.” (P.69)

 

이런 요인들이 한데 섞여 그의 성적 취향을 형성하였지만 이를 실현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피학은 가학을 전제로 하는데, 자신에게 기꺼이 학대를 가할 여성을 찾는다는 건 너무나 어려운 과제다. 여기서의 반다처럼. 더구나 비정상적인 애정 관계에 보수적인 유럽 문화도 한몫하였으리라. 두 사람이 만나고 마조히즘 행위를 실현하는 무대가 카르파티아 산속의 조그만 휴양지”(P.22)로 유럽 본류와는 지리적, 문화적으로 다른 곳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마조히즘과 사디즘의 동전의 양면이다. 한 쌍이 상반되는 성애 감각을 지녀야 행위로 성립 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제베린에 호응하는 반다도 흥미롭다. 미모의 젊고 부유한 과부인 그녀는 제베린의 구혼에 유보적 태도다. 자신이 진정으로 내키지 않는데 굳이 한 남자에게 성적으로 종속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그녀의 애정관은 보면 볼수록 파격적이면서 독자적이다. 당대로서는 이상하고 마뜩잖게 여겨질 의견을 반다는 서슴지 않는다. 아마 이런 점에서 그녀가 쉽게 제베린의 바람을 실현시켜 줄 수 있었으리라.

 

물론 그녀도 처음에는 주저하였음을 작가는 보여준다. 그녀는 거듭해서 제베린에게 경고한다. 그의 피학 욕구가 점차 그녀의 피를 끓어오르게 만들고 있으며, 그녀 또한 억제하지 못할 가학 욕구가 강해지고 있음을 말이다. 전통적 모럴과 배치되는 욕망이므로.

 

! 당신은 정말이지 여자를 철저하게 타락시킬 남자군요!” (P.67)

 

너는 내 기질 속에 잠들어 있던 위험한 성향을 일깨운 거야.” (P.84)

 

난 너 따위 인간을 조소하고 경멸해. 나같이 돼먹지 못하고 변덕스러운 여자한테 눈이 멀어 자신을 노리갯감으로 내놓다니! 넌 이제 내 애인이 아니야. 생사가 내 기분 여하에 달린, 노예일 뿐이야.” (P.146)

 

반다를 향한 제베린의 애정은 한결같지만, 반다의 태도는 조금씩 달라진다. 제베린은 애정이지만, 반다는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남자에게 애정을 잃는다. 그녀가 진정 바라는 남성상은 제베린 유형이 아니라 나중에 나오는 젊은 그리스 남자다. 여성을 압도하고 지배할 수 있는 거친 수컷으로서의 남성. 자신을 지배할 수 있고 그에게 소유 당하고 싶은 남성. 이른바 나쁜 남자 또는 B형 남자에게 이끌리는 여성의 일면이리라.

 

나는 그 사람을 반드시 소유하고 싶어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죠? 그가 나를 원한다면 나는 그의 아내가 되고 싶어요.” (P.197)

 

여자란 무릇 우러러볼 만한 남자를 원하거든.“ (P.209)

 

제베린에 대한 반다의 감정은 처음엔 분명 진정이었다. 처음엔 부탁을 들어주려는 마음과 일종의 호기심으로 시작하여 일시적 쾌감을 느꼈겠지만, 계속해서 자신에게 무릎 꿇고 노예 취급당하며 채찍 맞기를 소망하는 남자에게 지속 가능한 애정을 품기는 힘들었으리라. 그리스 남자와 합작하여 제베린에게 처절할 정도로 매질을 가한 행위는 훈육적 의도가 아예 없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안점이 아님을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다.

 

돌연 나는 끔찍할 정도로 분명하게 홀로페르네스와 아가멤논 이후로 눈먼 열정과 욕망이 남자들을 어디로 이끌었는지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배반하는 여자의 덫, 그물 속이고, 고난과 예속과 죽음이다.

나는 꼭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P.224)

 

우리는 흔히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변태 성애라 지칭한다. 변태는 올바르고 바람직한 정상적인 성애를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사랑의 감정과 행위에 있어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일까. 단순히 개인적, 사회적 도덕 감정에 저촉하는지 여부를 적용하면 괜찮은가. 이의 위배는 교정과 훈육의 대상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사랑은 미덕이나 이익 같은 것을 따지지 않는다. 사랑은 사랑하고 용서하고 모든 것을 참는다. 그것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우리를 이끄는 것은 달콤하고 멜랑콜리하고 신비로운 힘이다. 그때 우리는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기를 그친다. 우리는 그저 그 신비로운 힘에 이끌려 떠돌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묻지 않는다. (P.104)

 

작가는 사랑의 맹목성을 인정한다. 이성과 도덕률로 사랑을 제어할 수 있었다면 인류 역사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며, 문학과 예술은 무미건조한 장르로 낙후되었으리라. 그렇기에 채찍질에도 황홀감을 느끼며 더 많은 학대를 갈구하는 제베린을 섣불리 비판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녀의 초상화를 그린 독일 화가는 반다를 마녀로 부르는데, 비난보다는 경외와 찬탄,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매혹을 압축한 표현으로 봐야 한다.

 

19세기 후반에 이런 내용의 소설을 썼으니 확실히 센세이셔널하다. 요즘이야 워낙 자극적인 내용이 각종 매체에서 난무하는 시절이지만, 작가의 표현은 전혀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다. 사드 후작과 달리 자허마조흐는 이 작품 하나로 불후의 명성을 얻었다. 비록 자신으로서는 사디즘과 나란히 불리는 것에 불만스럽겠지만 값어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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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 : 생명의 경제학 - 개정판
존 러스킨 지음, 곽계일 옮김 / 아인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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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러스킨은 내가 경애하는 작가다. 예술평론가로서도 탁월하지만 후세에 남긴 그의 영향은 단연 사회사상가로서이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에 소개된 내용을 본 이후 김석희 번역본을 두세 번 읽었는데, 대강의 내용은 어렴풋하게 다가왔지만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 답답함을 느낀 채 방치하였다. 수년이 경과한 시점에 새로운 번역본으로 재차 도전해 본다.

 

이 책은 전통적인 주류 경제학에 대한 반론이다. 그가 보기에 아담 스미스에서 비롯하여 리카도를 거쳐 존 스튜어트 밀에 의해 집대성된 경제학-러스킨은 상업경제학이라고 부르는데-은 학문의 목적 자체를 잘못 지향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인간과 사회를 다루는 학문인데 인간이 아닌 사물과 로봇을 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난 단지 뼈 없는 인간을 가정한 체조학에 관심이 없듯이 영혼 없는 인간을 가정한 경제학에 관심이 없을 뿐이다. (P.27)

 

전통경제학은 수요와 공급에서 출발한다. 보이지 않는 손의 중요성이 이어진다. 판매자는 최고의 가격에 재화를 판매하는 게 당연하고, 구매자는 최저의 가격에 재화를 구매하는 게 합리적이다. 시장 구성원이 각자 최선을 다하려는 노력에 매진하는 와중에 발견하는 사실은 적정한 수준의 가격보다 높거나 낮을수록 일방에게는 커다란 이익이 된다는 점이다. 나의 이익이 상대방에게 어떤 결과를 헤아릴 필요 없이 가능한 가장 큰 이익을 구하는 게 사회적으로 용납되고 오히려 권장되기조차 한다. 따라서 고용주와 고용인은 대립하는 상호 이해관계에서 갈등이 증폭되고 전투적인 관계로 악화되기 마련인데, 러스킨은 이러한 관계를 거부한다.

 

고용주와 고용인이 바람직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에게 최대 이익을 안겨 줄 수 있는 비밀은 바로 정의와 애정이다. (P.32)

 

작가는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앞서 온 노동자들과 동일한 임금을 지불하라고 말한다.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먼저 와서 성실하게 일한 노동자와 게을러서 늦게 온 노동자에게 똑같은 대우를 한다면 누가 성실하게 일하겠는가?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보편적 인식룰이다. 러스킨의 미덕은 여기서 시작한다.

 

싼 가격의 상품이 고품질의 상품을 구축하고, 저렴한 인건비의 노동력이 비싼 노동력을 대체하는 현상을 우리는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소비자로서 한정된 예산으로 값싸게 지출하면 현명하며, 경영자로서 지출을 줄이기 위한 노력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이 모든 게 인간과 무관하다면 말이다. 무한정한 가격 경쟁이 벌어지면 노동자는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입을 얻지 못한다. 인간이 배제된 는 무슨 가치가 있는가? 이것이 러스킨의 질문이다.

 

의 이름 뒤에 감추어진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은 다름 아닌 타인에 대한 지배력이다. (P.72)

 

러스킨은 부를 정의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인간을 죽어가게 하고, 사회를 타락시키는 부는 참다운 부가 아니다. 부는 인간과 사회를 살아가게 하고 생명이 약동하도록 해야 한다. 그게 부의 본질이므로.

 

가치 있다는 말은 곧 생명에 유용하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진실로 가치 있고 유용한 것이란 바로 그 기능을 다해 인간을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란 뜻이다. (P.156)

 

생명이 곧 부다이 생명은 사랑과 환희와 경외가 모두 포함된 총체적인 힘이다. (P.195)

 

이것이 러스킨의 경제학을 생명의 경제학이라 지칭하는 까닭이다. 인간과는 동떨어진 창백한 숫자로 표현되는 경제학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정의로운 부를 구현하기 위한 경제학, 즉 정치경제학이 그의 관심사다. 나중에 온 노동자에게도 동일한 임금이 지불되어야 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노동자로서 품위 있게 살아가야 할 적정 수준의 임금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며, 자신의 생존을 위해 가격경쟁력을 무기로 기존 노동 계층의 삶도 불안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러스킨은 정당한 임금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한다.

 

노동에 대한 공평하고 정당한 보수는 그 일을 하기 원하는 노동자의 숫자에 전혀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P.119)

 

그러면 부의 정당성과 부당성을 판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러스킨은 정의의 역할이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부의 편중을 막고, 인간이 정신적으로 부에 함몰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 그에게 부와 정의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러스킨은 국가와 개인에게 각각 요구한다. 국가는 단순히 노동자의 고용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생명에 유용한 고용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다수의 국민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국가가 부유한 국가라고 하면서. 개인도 마찬가지다. 최저 생존에 급급해하는 삶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 온전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삶이 가능하도록 주장해야 한다.

 

그대여! 먹고 살 권리를 주장하되, 거룩하고 온전하고 순전한 삶을 살 권리를 보다 큰 목소리로 높여 주장하라. (P.201)

 

러스킨의 주장은 일견 사회주의와 유사하게 보인다. 전통경제학에 기반한 자본주의 비판에서는 맥락이 닿아 있지만, 사유재산권의 강화와 개인의 가치에 대한 중시에서는 결이 다르다. 영국 노동당의 정신적 지주가 그의 사상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럴듯하다. 게다가 그는 수동적인 개인이 아니라 개인의 적극적 노력을 강조하며 구체적으로 그가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예시하고 있다. 전혀 생소하지 않고 근년 들어 유행하는 공정무역의 기치와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그의 사상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당초 잡지에 연재하다가 갑작스레 중단된 내용을 정리하여 출판한 게 이 책이다. 하나의 완결된 체계를 갖춘 저작이 아니기에 얼핏 산만해 보이지만 실은 고도로 함축적이고 예언적이다. 낯선 논의에 당황할 수 있지만 그의 문장과 주장에서 느끼는 따스함은 비할 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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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여인과 걷다 삼국유사 시리즈
정진원 지음 / 맑은소리맑은나라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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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사를 다룬 대표적인 두 역사서인 <삼국사기><삼국유사> 중 확실히 후자의 대중적 인기가 월등히 더 높다. 모 출판사는 세계문학전집 목록에 포함할 정도니까. <삼국유사>는 순수한 역사서 외에도 그 안에 수록된 시, 설화 등으로 인한 흥미와 문학사적 가치도 인기를 높이는 일조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삼국유사>의 여러 인물과 이야기 중 여성에 초점을 두고 파헤쳐 소개하고 있다. 여성 대상 불교 잡지에 연재하였던 연유로 불교적 내용과 함께 여성주의적 시각이 있음을 유념하고 읽으면 도움이 된다.

 

전체 개의 장으로 나눠서 첫째 장은 삼국유사 삼대 미녀인 수로부인, 도화녀, 선화공주 소개와 사금갑 고사의 재해석을 다룬다. 둘째 장은 개국시조 어머니들인 유화부인, 알영부인, 허황후를 부각한다. 셋째 장은 성모와 국모 격에 해당하는 선도산 성모, 지소태후와 신라의 세 여왕을 재조명한다. 넷째 장은 고승을 뒷받침한 여인들이며 마지막 장은 관세음보살을 집중 조명한다.

 

두 편의 향가 창작의 배경이 되었던 수로부인의 정체를 추적하면서 그녀와 신적 존재의 접촉은 단순한 납치 행위가 아니라 신령함을 얻기 위한 차원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새롭다. 서동요로 유명한 선화공주도 일방적인 뜬소문과 피해의 운명을 개척하여 당당히 백제 왕비로 거듭나는 모습을 부각한다. 이처럼 저자는 그동안 간과되었던 여성의 이야기를 발굴하여 새로운 관점과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주인공의 지위에 올려놓는다. 스쳐 지나갔던 역사 속에서 새삼 반짝이는 보물을 발견한 기쁨이 크다.

 

유화부인은 단순히 주몽의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역사 속의 대모신이며,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부인은 사실상 신라 건국의 쌍두마차였다고 강조한다.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가 어린 진흥왕의 섭정이었음과 미실을 능가하는 화려한 행적을 통해 신라의 국모였음도 웅변한다. 선덕여왕의 뛰어남에 관한 확인과 함께 무시당하고 폄훼된 진덕여왕과 진성여왕의 실체가 사서 기록과 다를 가능성도 제기한다.

 

많은 여성의 이야기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오며 유실되거나 영웅성을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여성의 역할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바뀌었으니. 이를 역사상의 자연적 흐름으로 이해할 건지 아니면 남성의 고의와 음모가 야기한 날조와 왜곡 행위로 간주할 것인지는 완전히 다른 사안이다. 이 책에서 저자의 견해는 적어도 후자에 가깝다. 저자가 되풀이하는 문구가 있다. “<삼국유사> 속에는 훌륭한 남자 뒤에 항상 열 배 뛰어난 여인이 숨어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상기하실 것.” (P.137). 연재 대상을 지나치게 고려하였던 때문인지 아니면 저자의 원래 성향인지 모르겠으나 저자는 잊히고 무시된 여성 인물의 제자리를 찾는 데서 한발 나아가 역할과 중요성을 더욱 힘주어 말한다, 때로는 무리라고 할 정도로.

 

선덕여왕의 일화인 여근곡과 옥문지 이야기는 역사적 사건과 성적 해석이 결부되어 일반인에게도 제법 알려진 일화다. 저자는 여왕의 탁월한 정치력을 강조하고자 하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어렵다. 이 사건은 수천 명의 백제 군사가 아무도 모르게 신라 국토를 횡단하고 도성 가까이 급습하려고 매복해 있다는 게 핵심이다. 그토록 당시 신라의 국방력은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오죽했으면 자기 능력으로 해결 안 되어 수모를 받으면서도 당나라의 힘을 빌리려고 생각했겠는가. 진덕여왕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즉위하자마자 반란을 평정하고 나당 동맹을 맺은 뛰어난 정치력을 지닌 과소 평가된 여왕으로 힘주어 말하지만, 갑자기 왕위에 오른 일개 여왕이 무슨 대단한 정치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진흥왕의 초반 업적을 모두 지소태후의 것으로 돌리는 것과 비교하면 모순된 태도에 가깝다. 진덕여왕은 역시 허수아비로 보는 게 맞다. 하물며 진성여왕은? 그녀가 능력자라면 쇠망하던 신라를 중흥시켰을 테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음을 이미 보여주었다.

 

박혁거세에 가려 이름만 남아 있던 알영은 단순히 알영부인이 아니라 신라 건국의 이성(二聖), ‘알영여왕으로서 당당히 신라역사를 열었던 그 위상을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이다. (P.62)

 

한 가지 역사적 사실에 다양한 변주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의 염원을 투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애닯게 죽었는데 성모나 신모가 되었으면 좋겠고 망부석이라도 남아 기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P.89)

 

알영부인에 대한 새로운 해석 가능성, 혁거세와 알영을 낳은 선도성모와 서라벌의 선도산 성모, 그리고 지리산 노고단의 주인공의 연관 관계는 흥미롭다. 망부석이 된 줄 알았던 박제상의 부인이 이야기 갈래에 따라 여러 가지 운명으로 달라지는 대목에서는 설화의 속성과 함께 당대인의 바람도 엿볼 수 있어 유익하다. <화랑세기>에 전하는 지소태후의 대단한 행적은 새삼 말할 것도 없고 신라 불국토 프로젝트를 위해 애쓴 미실과 선덕여왕, 그리고 자장율사의 이야기는 새롭다. 의상대사, 원효대사에, 김유신의 남매 이야기는 원래 유명하지만.

 

신라의 본격적인 여왕 제도 시행에는 지소태후의 섭정이라는 막강한 성공 배경이 뒷받침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지소는 신라의 왕과 여왕을 길러낸 명실상부한 신라의 어머니, 신라의 국모인 것이다. (P.99)

 

저자가 <삼국유사> 속의 자잘한 이야기를 발굴하고 다듬어서 세상에 소개하는 까닭은 스스로도 밝혔듯이 풍부한 문화유산 콘텐츠로 자리 잡고 이것이 문화적 한류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의도임은 프롤로그와 본문 속에서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를 읽다보면 지자체의 문화콘텐츠, 그 중에서도 역사문화 콘텐츠를 새롭게 발굴하거나 조성할 수 있고 그 내용을 연관 지을 수 있는 K-Culture 내용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필자는 K-Culture의 바탕이 삼국유사와 같은 K-Classic에 있음을 지속적으로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 (P.21)

 

확실히 이 책을 보면 <삼국유사>에 이런 인물 또는 이야기가 있었나 싶은 소재를 저자가 잘 소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읽은 지 한참 된 <삼국유사>를 다시 정독해 보고 싶은 욕구마저 생길 정도다. 이 책의 미덕이 부차적 요인으로 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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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전 - 중국의 전설
선용 엮음, 홍의남 그림 / 신아출판사(SINA)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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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4대 민간전설의 하나로 유명한 설화다. 일전에 중국 신화와 전설, 지괴소설에 관심을 가졌을 때 언급되었는데 의외로 국내에 번역본을 찾기 어려웠다. 지금도 시중 서점에서 백사전을 검색하면 학습만화를 제외하면 이 책이 유일하다. <중국 민간전설 백사전>은 자세한 정보가 나와 있지 않은데 도서관에서 직접 확인한 바에 따르면 백사전 연구 논문이다. 지금 이 책도 아동문학선의 하나로 출간된 만큼 아쉬움이 있지만 원작을 대강이나마 맛본다는 측면에서 대안이 없다.

 

전생에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은혜를 갚기 위해 여인으로 변신하여 은인의 아내가 되는 천년 묵은 흰 뱀 백소정. 허선은 아내의 도움으로 약국 종업원에서 당당한 약국 주인으로 변신하게 되고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갈 날만 남았다. 정말 그럴까. 중국 설화에서 중대한 금기사항 중 하나는 요괴가 인간 세상에서 인간처럼 사는 일이다. 인간으로 변신한 요괴의 선과 악은 여기에서 중요한 고려사항이 아니다. 서로의 영역이 분명하기에 어울려서는 안 되는 존재들의 교유는 세상 만물의 원리와 질서를 흩뜨리기에 엄한 처벌을 받기 마련이다.

 

백소정은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너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야. 우리에게는 우리들만의 세계가 따로 있는데 와서는 안 될 인간 세상으로 와서 괜한 근심거리를 만든 거야.” (P.135)

 

백소정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허선과 결혼하고 의원과 약방을 차려 병자를 구제하는 일체의 행위는 오로지 세상을 구제하려는 자비심의 소산이다. 그녀가 비록 요괴라고 하지만 세상에 해를 끼치는 사례를 여기서는 찾아볼 수 없다. 허선과 백소정은 이 이야기에서 오로지 선한 캐릭터로 존재한다. 백소정이 딱 한 번 세상을 뒤흔든 경우가 있는데, 법해 선사로부터 자신의 남편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의 일환이었다. 그녀로서는 자신의 존재의의가 사라지는 것이므로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기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서 법해 선사와 천신들과, 백소정과 소청의 무리 사이에서 중재에 나섰던 것이다.

 

이 전설의 기본 바탕은 매우 불교적이다. 백사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천년 동안 수행을 한다는 설정 외에 법해 선사라는 지극히 도력이 높은 스님의 존재, 그것도 모자라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하는 관세음보살 등. 한편 도가적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 백소정의 정체를 처음으로 허선에게 일깨우는 도사, 의식을 잃은 허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백소정이 영약을 구하려고 찾아가는 신선들이 사는 선산 등.

 

허선과 백소정이 대체로 점잖고 온화하며 수동적인 인물인 데 비해, 소청은 이야기에 활력과 생기를 불어넣는 인물이다. 푸른 뱀이 변신한 소청은 비록 도력에서는 백소정에 딸리지만 호수의 물과 바람을 자유자재로 부릴 줄 아는 능력자다. 그녀가 허선과 백소정을 엮어주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은 지극정성이다. 성격이 직설적이고 자유로우면서도 화려한 언변에 뛰어난 재치를 겸비한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하겠다.

 

언니, 설마 우리에게 며칠 더 함께 살 수 있는 인연이 없는 것은 아니겠죠?”

물론 있지. 그러나 인연이란 영원히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야. 만나야 하는 인연이 있다면 우리는 언제인가 또 만나게 될 거야!” (P.36)

 

편자도 그렇고 작중 인물들도 그러하고 인연의 의미를 강조한다. 인연은 불법의 종교적 의미로서도 중요하지만, 세속적 관점에서도 깊은 중요성을 지닌다. 허선과 백소정의 만남은 전생에서부터 예정된 인연이었고, 백소정과 소청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허선과 백소정의 결합은 인연의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무리하게 앞당긴 부작용으로 인해 법해 선사가 상황 정리에 나서게끔 하는 빌미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연분이 없다는 것입니까?”

있지요. 분명 연분은 있습니다만 그녀가 수행을 다 끝내고 진정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 두 사람은 서로 만나 함께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은 때가 아니랍니다.” (P.157)

 

자체로서는 종교, 사랑, 그리고 환상이 결합한 흥미로운 전설이지만 납득이 가지 않는 설정으로 설득력이 떨어지는 대목도 있다. 관세음보살과 법해 선사는 시종일관 백소정의 잘못을 지적한다. 천년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데 수행을 도중에 파하고 인간 세상에 침입하였다고 말이다. 여기서 묻고 싶다. 흰 뱀인 백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천년이란 긴긴 시간을 엄격한 수행을 해야 하는가를. 수행 끝의 깨달음은 백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이 책에서 관련하여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다. 다만 수행은 무조건적이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며, 이를 중도에 깨는 것은 금기이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되어야 한다. 백소정이 남편과 아이와 영원히 헤어지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단오절에 소청은 산속으로 들어가 숨는다. 그 덕분에 허선은 백소정에게 웅황주를 마시게 할 기회를 얻는데, 소청이 숨어야 하는 연유는 이 책에서 알려주지 않는다.

 

관세음보살은 영단 한 알을 꺼내주며 말했다.

너희들이 이미 부부의 연을 맺었으니 어쩔 수 없구나. 내가 한 번만 도와주지. 이 영단을 그에게 먹이면 바로 깨어날 것이다. 그리고 너는 인간 세상에 오래 머물면 안 된다. 빨리 산속으로 되돌아가서 하던 수행을 계속 하여라.” (P.149)

 

백사전 전설은 불교적 관점에서는 해피엔딩이다. 백사도 원래 수행으로 돌아가고, 청사 역시 수행의 길에 나선다. 법해 선사는 허선을 출가승으로 만들 계획을 품고 있다. 모두가 불도의 세계에 들어서니 참으로 좋은 일이다. 인간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전혀 다르다. 요괴와 인간이라는 존재의 형태를 떠나 부부간의 사랑, 부모와 자식의 천륜을 냉혹하게 끊어버리는 종교의 냉혹함이 두드러진다. 천년 수행이 과연 백사의 자발적 의사인지 알 수 없다. 인간 세상에서 숨어버리려는 청사는 법해 선사에 잡혀 반강제적으로 수행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허선의 의사에 관계없이 선사는 허선을 출가승으로 만들 생각을 품고 있다.

 

독서 대상을 아동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엮었기에 원작 전설의 풍요로운 원형이 얼마만큼 유지되었는지 알기 어렵다. 백사전 전설의 줄거리와 중요 사건들이 대강이나마 들어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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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 밖을 나서다 역사지리학자와 함께 떠나는 걷기여행 특강 2
이현군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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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가 <옛 지도를 들고 떠나는 걷기 여행 특강 2>라고 되어 있다. 전작인 <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의 후속작임을 강조하는 뜻이다. 이 책이 여타 답사 서적과 차별되는 지점은 지은이가 역사지리학자라는 데 있다. 역사와 지리, 내가 깊은 관심을 두고 있는 대표적인 두 영역이다. 양자의 결합이라면 매우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저자는 후속작에서 서울 도성 밖을 나선다. 경계가 사대문을 벗어나 주변으로 확산하는 과정은 한양이 서울로 변하는 근현대사와 일맥상통한다. 오늘날 서울의 근원이 사대문 안쪽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지만, 서울의 실질적 중심부는 더는 아니다. 도성 밖의 면적과 거주하는 인구만 헤아려 보아도 서울 사람 대부분은 성 밖 주민들이다. 성 밖의 서울을 살펴볼 이유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서울은 넓다라는 관점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서울의 역사적 변화과정은 공간적으로 넓어지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넓어지면서 한양과 달라진 도시가 서울특별시입니다. (P.11)

 

천만 인구가 서울에 거주한다. 수도권이라 지칭하는 서울에 기대어 사는 인구까지 합치면 어마어마한 숫자다. 이들은 서울의 역사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가. 조선 시대 사대궁궐을 열거하고, 사대문의 이름을 언급할 줄 안다면 박식한 축이다. 자신이 사는 지역-서울에는 25개 구가 있다-에 대해서는 아마 거의 모를 것이다.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의 이미지라기보다 단순 거주와 재테크의 관점에서 자신이 사는 집을 바라보는 게 요즘 세태다. 자신이 임시로 머무는 공간에 굳이 관심을 기울일 까닭이 없다.

 

지리학의 관점, 공간과 장소의 맥락에서 서울을 나누어 봅시다. 저는 서울을 네 영역으로 나눕니다. 사대문을 기준으로 한 도성 안, 한성부에 포함되었지만 도성 밖에 해당하는 지역, 한강, 현재 서울특별시에 포함되는 조선시대 경기도 지역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P.20)

 

서울을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독자에게 친밀하게 소개해주는 게 이 책의 미덕이다. 내가 사는 동네가 조선 시대에는 어떤 이름으로 불렸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합집산하다가 현재의 모습이 되었는가를 저자는 차분한 어조로 들려준다. 일종의 향토사적 접근이 될 수도 있겠다. 여하튼 조선 시대의 한양과 비교하면 오늘날의 서울은 매우 거대한 도시다. 서울의 팽창과 함께 경기도는 계속 축소되었다. 그게 아주 오래전이라 아니라 좀 멀게는 1960년대에서 가깝게는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서울 끄트머리의 동네는 대부분 최근에야 특별시에 편입된 곳이다. 한 끗 차이의 운이 서울과 서울 아닌 곳의 경계가 되었다.

 

25개구 이름이 서울의 모든 역사를 담고 있지는 못하지만, 서울이 어디에서 유래하였고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이 되었는지를 보는 데는 구 명칭과, 언제 이 구가 생겼는지, 서울의 어느 방향에 있는지, 그 구에 어떤 건물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P.26-27)

 

단순히 말로만 설명하면 와닿지도 않고 지루하기 마련이다. 저자는 지도를 활용한다. 해당 지역을 소개할 때면 서두에 남아있는 대동여지도, 도성도, 지방 지도 등을 활용하여 옛날의 지역 모습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 현대 지도와 사진 자료를 곁들여 시대적 간극을 비교하여 독자의 머릿속에 공간적 인식을 일깨운다.

 

아무래도 지명에 얽힌 유래를 비로소 알게 되고 새삼 머리를 끄덕이며 당대와 현재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비교할 때 흥미로움이 더 커진다. 몇 가지를 언급하면 경마장이 과천으로 옮겨지기 전에 뚝섬에 있었던 까닭이 우선 그러하다.

 

중랑천 동쪽의 뚝섬 일대에 많은 목장이 있었습니다. 옛 문헌에 양주 살곶이 목장이라고 적힌 곳이 현재의 중랑천변 뚝섬 일대입니다. 한양대에서 건국대 사이에 옛 목마장이 있었다고 보면 됩니다. 경마장이 과천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경마장은 서울숲에 있었습니다. (P.84)

 

성동구 지역에 응봉이란 지명이 무슨 뜻일까 궁금하게 여긴 적이 있었다. 이 책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뚝섬과 아차산 일대는 조선시대에 왕의 사냥터 역할도 하였습니다. 도성과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고 숲과 산이 있으니, 왕이 매사냥하기에 적합했을 듯합니다. 당시 최고의 전통적인 여가는 매사냥이었습니다. 응봉, 매봉 같은 지명은 매사냥과 관련이 있습니다. (P.86)

 

경기도 시흥시와 서울시 금천구의 시흥동을 계속 헷갈렸다. 무슨 인접한 지명을 혼동하게끔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는지 한심해한 적도 있다. 저자에 따르면 금천과 시흥은 원래 같이 지역이었는데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갈라지면서 비슷한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 동작구에 보라매공원과 보라매병원이 있다. 볼 때마다 이름이 특이하다고 생각하였다. 이 역시도 이 책을 통해서 유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여의도공원의 전신이 국제공항이었다가 공군기지였으며, 보라매공원에 공군사관학교가 있었다는 사실도. 역시 뭐든지 사유는 있게 마련이다. 그것을 알면 흥미롭고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다.

 

지금은 잊힌 옛 서울의 흔적도 지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저자는 저자도(楮子島)를 알려준다. 이름만 섬인 뚝섬의 동남쪽에 있는 진짜 섬이었는데, 강남개발 당시 이 섬의 흙을 퍼서 사용했기에 사라지고 말았다는 비운의 섬이다.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불가피하였겠지만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그 섬이 남아있었다면 어떠했을까 궁금하고 아쉽다.

 

한양 남쪽 7리쯤 되는 곳에 용산호가 있다. 옛날에는 한강의 본줄기가 남쪽 기슭 밑으로 흘러가고 또 한줄기는 북쪽 기슭 밑으로 돌아 들어와서 십리나 되는 긴 호수였다. 서쪽으로는 염창의 모래 언덕이 물을 막아 물이 흐르지 않아 그 안에서 연()이 자랐다.” (P.120)

 

<택리지>의 기록이다. 용산 지역에 길다란 호수가 있었다니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다. 한강의 물길이 이렇게 큰 변화가 있었다니 말이다. 한강도 황하만큼이나 다스리기 어려운 존재였나 보다. 석촌호수가 그걸 알려준다. 나는 석촌호수가 완전한 인공호수인 줄 알고 있었다. 1895년대의 잠실 인근 지도를 보면서 깜짝 놀랐다. 오늘날의 한강 흐름과는 전혀 달라서였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후에는 위쪽으로 더 큰 물길이 지나갑니다. 이 물길이 현재 잠실 북쪽으로 지나는 한강입니다. 옛 물길이었던 곳이 지금의 석촌호수입니다. 옛 물길은 남쪽으로 흘렀기에 잠실은 한강 북쪽의 경기도 양주군에 속한 지역이었습니다. (P.197-198)

 

원래 섬이었던 잠실은 1970년대 한강 개발을 통해 내륙이 되었다고 하며, 그때 막은 물길이 석촌호수였다고 한다. 불과 수십 년 후 잠실과 비교하면 상전벽해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솔직히 이 책을 들고 서울 곳곳을 걷고 답사하기는 무리다. 도성 안과 비교하면 걷기에 광활한 지역이다. 그저 일부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거주하는 주변 정도만 둘러봐도 충분하다. 나머지는 우연히 해당 지역에 갔을 때 그 지역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도 의의가 충분하다고 본다. 저자의 말처럼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돌릴 수 없으며, 옛날의 기억에만 집착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어쩌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동대문 밖이 예전에는 모두 경기도 양주였다는 사실, 오늘날 강남은 경기도 과천과 광주에 속한 지역이었다는 사실 등이다. 한양에서 서울로의 확장은 우리나라에 자본주의가 확산하고 지배이념으로 자리 잡은 시기와 맞물린다. 서울과 비서울, 강남과 비강남으로 첨예하게 이해관계가 엇갈리는데 과거에는 한 지역이었다는 공유 기억이 지역 간 갈등 완화에 이바지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이 옛 지도를 보고 옛 추억에 잠겨 회고적 관념으로 퇴행하지 않는 동시에 서울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도 유의미하리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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