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네트 셰익스피어 전집 33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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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트라는 시 형식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있지만 직접 해당 작품은 처음 읽는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엄격한 운율 구성과 특정 구조를 가진 14행의 시”(P.164) 유형이라고 한다. 아마도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보편적인 인기를 끌었던 듯하며 잉글랜드식 소네트의 대표 시인이 바로 셰익스피어다. 그의 소네트는 모두 154편이 전한다.

 

세 개의 4행과 2행으로 귀결되며 abab cdcd efef gg의 운율의 14행 연구시는 16세기에 셰익스피어식 소네트라고 불리며 이탈리아식-페트라르카식과 대별되는 소네트의 대상과 표현방식으로 보급되었다. (P.166)

 

당연히 번역과정을 거치므로 원무의 운율 구성은 눈으로 파악할 수 없으며, 단지 14행의 구조를 외형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내용상으로 볼 때 그의 소네트는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며 주로 시인의 생각과 감정을 토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어 대체로 이해에 어려운 편은 아니다. 순서대로 읽어나가다 보면 개개의 시편이 독립적이기보다는 전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한 미남청년을 향한 시인의 변함없는 사랑을 담고 있다. 중년 남성 시인과 여자 못지않게 아름다운 미남청년의 사랑은 언뜻 동성애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시인의 사랑의 감정 서술과 묘사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애틋하여 남녀 간 사랑의 감정과 밀도를 능가할 정도다. 일방적 사랑이 아니라 양자 간의 사랑은 평탄하지 않게 마련이다. 오해와 서운함이 켜켜이 쌓이면 갈등으로 증폭되며 분노와 미움이 시너지 화하여 회복할 수 없는 다툼과 감정의 벽이 생기는 사례도 빈번하다. 이 소네트집에서는 그러한 감정의 파랑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독자를 더욱 절절히 공감하게끔 하고 있다.

 

시인은 청년의 빼어난 미모가 너무나 아깝다. 그가 나이 들면 미모도 스러지게 마련이며 그가 죽으면 다시는 재생 불가능하다. 시인은 청년에게 결혼하라고 되풀이 권유한다. 청년처럼 우수한 유전자를 지닌 인물의 권리이자 의무는 자손을 후대에 남기는 것이라고. 소네트 1편에서 17편까지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아름다움이라는 장미가 죽지 아니하도록 함은

아주 아름다운 사람들이 번식하도록 소망하는 지라,

그러나 나이든 자가 때가 되어 죽은들,

젊은 자손이 그의 모습을 이어받으리. (P.9, 1)

 

아무래도 미남청년은 결혼에는 아직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결혼 권유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시인은 자신이 직접 글로써 청년의 미모를 증거하여 후대에 남기려는 소망을 품는다. 그래야 후인들도 미남청년 같은 유일무이한 완벽한 아름다움의 소유자가 실존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겠는가. 물론 제아무리 뛰어나게 묘사하더라도 문장은 한계가 있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시인이 그런 노력을 자신의 필생의 의무라고 생각하며, 소네트 18편부터 이후에 해당하는 시편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리석도, 왕후의 금빛 찬란한 기념비도

이 힘찬 시보다 오래 살지 못하리라.

그러나 그대는 오욕된 세월에 더럽혀진,

씻지도 않은 비석보다는, 이 시 속에서 더욱 밝게 빛나리라. (P.63, 55)

 

미남청년을 향한 시인의 일편단심 사랑은 지칠 줄 모르며 그에 대한 찬가는 제아무리 읊어도 지겨워할 줄 모른다. 시인은 그에 대한 사랑을 우상숭배라고 폄하하지 말라고 요청한다. 서양 사회에서 기독교에서 신에 대한 끝없는 종교적 찬미와 여성을 향한 세속적 예찬만이 정상적으로 용납된다고 볼 때 소네트 시인의 미남청년 숭배는 양자의 열정과도 흡사하다.

 

나의 사랑을 우상숭배라 부르지 마오.

나의 애인을 우상시한다고 하지 마오.

나의 노래와 찬사는 한결같이

오직 한 사람에게, 오직 한 사람을 위하여 하는 것이니. (P.113, 105)

 

두 사람의 사랑 관계에 변화가 발생한다. 시인의 시재(詩才)를 능가하는 더욱 뛰어난 새로운 시인이 등장하여 미남청년을 향한 찬미가를 짓기 시작한다. 미남청년도 보다 새로운 시인의 신선미와 작법에 마음이 쏠리는 모양이다. 시인은 분노와 절망이 교차하는 씁쓸한 감정 상태에 놓이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자신이 봐도 새로운 시인은 한층 탁월하므로. 자괴감에 빠진 그는 스스로 물러나고자 한다, 다만 한가지는 밝히고. 자신이야말로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순수하고 진실함에서 우러나는 애정에 바탕을 두고 미남청년을 향한 시를 지었음을 자부한다고. 따라서 자신을 멀리하길 원한다면 근처에 머물지 않을 것이며, 자신을 미워하고 싶다면 마음껏 미워하라고 자신은 결코 그를 원망하지 않고 진실한 마음을 지닐 것이라고 하며.

 

이제는 나의 우아한 시는 쇠퇴하리니,

병든 나의 시신은 다른 자에게 가버렸다오.

사랑하는 임, 그대의 사랑스러움을 주제로 하여

보다 훌륭한 시인이 맡아서 수고할 일이오. (P.87, 79)

 

어디 미남청년에게만 일이 생기랴. 시인에게도 새로운 애인이 생긴다. 그녀는 미남청년과는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의 차이를 논외로 하더라도 하양과 검정, 밝음과 어두움, 정신과 육체, ()과 색() 등 차이가 너무나 뚜렷하다. 검은 여인은 미남청년의 변심에 다소 지친 시인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와 그를 사로잡아 버린다. 시인의 맑은 이성과 올바름을 지향하는 본성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향한 거역할 수 없는 이끌림에 저항도 거부도 하지 못한 채 그는 빠져든다. 타락이라고 하기 어렵지만 분명히 지금껏 시인의 가치관과는 배치되는 그녀의 존재는 시인의 상념에 계속적으로 물결을 일으킴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가 완전히 매혹되었음도.

 

옛날에는 검은 빛을 아름답게 여기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하여 미라고도 부르지 않았노라.

그러나 지금은 검은 것이 미의 정통 상속자이니,

미는 서자라는 오명으로 비방되노라. (P.135, 127)

 

검은 여인은 미남청년과 시인의 관계에서 새로운 국면을 전환하는 인물인 동시에 양자 관계를 삼자 관계로 심화, 확대, 변질시키는 존재다. 검은 여인은 엄격한 도덕률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녀의 비일상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은 많은 남자를 일거에 매혹할 수 있는 강력한 페로몬과 같은 마력을 지닌다. 거기에 미남청년도 빠져들고 이를 바라보는 시인은 안타까움과 무력감에 좌절한다. 이런 내용이 소네트 127편에서 거의 끝 편에 해당하는 152편까지 담겨있다. 검은 여인에 대한 해석은 여러모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어떤 실체적 여성을 지칭하거나 아니면 이를 상징적 은유로 봐서 인간 내심의 선과 악 개념으로 접근할 수도 있으려니.

 

내게 애인이 둘 있으니, 위안과 절망이오며,

두 요정인 듯 언제나 나에게 소곤거리노라.

더 나은 천사는 수려한 남자요.

더 나쁜 요정은 빛이 검은 여자라. (P.152, 144)

 

영어 원작을 읊조리면 분명 이상의 내용이 운율적 외형과 부합하여 형용할 수 없는 감흥을 일으킬 것이라고 감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번역문에 의지하는 제한된 접근을 통해서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가 갖는 매력의 가치는 절멸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그의 40편에 가까운 희곡이나, 여러 시 작품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현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 제재와 표현을 다루지 않았다. 그의 희곡은 철저히 무대 상연을 전제로 해서 관객들과 소통하기 위한 목적이며, 소네트와 다른 시들도 분명히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이야기체로 풀어놓거나 구술하기 용이한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셰익스피어라는 으리으리한 후광에 지레 겁먹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게 그의 작품 완독을 마치는 소감이다.

 

 

부록

셰익스피어 전집에 따라서는 몇 편의 시를 추가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최종철(민음사)<불사조와 산비둘기>, 신상웅(동서문화사)<연인의 탄식>, <열정의 순례자>, <불사조와 산비둘기>, 이상섭(문학과지성사)<불사조와 비둘기>, <연인의 탄식>, <열정의 순례자>를 각각 수록하고 있다. 간과하기에는 아쉬운 마음에 이상섭 번역본으로 세 편의 시를 읽는다.

 

<불사조와 ()비둘기>는 새를 전면에 내세운 우화시다. 413연의 본문과, 35연의 애가로 구성되었는데, 한 쌍의 연인을 불사조와 비둘기에 비유하여 그들의 죽음을 사랑과 정절의 죽음으로서 애도한다.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진실한 결합의 한 쌍이 후손을 남기지 않은 것조차 고귀한 정절로 기리고 있는데, 작품 전반적으로 셰익스피어로서는 예외적으로 형이상적 뉘앙스를 풍긴다.

 

<연인의 탄식>747연의 제법 긴 분량의 이야기 시다. 미모의 청년에 굴복하여 애정을 바쳤으나 결국 배반당한 처녀가 애인의 변심을 원망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으로 시종일관하고 있어 이해하기 쉽고 흥미롭기조차 하다. 우월한 외모와 절묘한 어조와 그럴듯한 연기로 여러 처녀, 심지어는 수녀의 정조마저 후리는 바람둥이 청년의 거짓된 언행을 비난하고 처녀는 복수를 다짐한다. 압권은 마지막 연의 마지막 단락이다. 아무리 원망하고 미움이 가득하더라도 청년에 대한 연정의 끈을 처녀는 놓지 못한다. 마치 나쁜 남자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여자를 보는 듯하다.

 

그 모든 꾸민 감정, 꾸어온 표정이

한번 속은 여자를 다시 속이고

뉘우치는 처녀를 또다시 망치겠죠.

 

<열정의 순례자>는 셰익스피어 단독의 창작이 아니다. 여러 편의 시들을 수록한 시 선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셰익스피어 자신의 작품은 물론 당대 몇몇 시인의 시들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것도 순전한 창작보다는 소네트 중 일부, 희곡에 등장하는 소네트도 기꺼이 재수록하고 있다. 특히 비너스와 아도니스 이야기를 여러 편의 소네트로 삽입하고 있는데 장시 <비너스와 아도니스>의 관련성과 보완성 측면에서 흥미롭다. 오히려 여기에서 표현의 대담성이 두드러진다.

 

조금 전에 보니까 잘생긴 청년이

이 숲에서 멧돼지한테 허벅지에

깊은 상처를 입었는데 정말 끔찍하더라.

내 허벅지를 쳐다봐. 상처가 이쯤 되었어.

하면서 보여주니, 상처는 하나 이상이었다.

낯 붉힌 소년은 그녈 두고 달아났다.

 

여러 가지 가락에 맞춘 시편들이라는 소제목에 딸린 여러 편의 시들은 해학미가 돋보인다. 여하튼 모두가 사랑을 주제로 삼고 있음은 공통이다. 마지막의 우렁찬 노래를 부르는 새들애가<불사조와 산비둘기>와 전적으로 동일하다. 이 작품집은 수록작의 일관성보다는 다양성의 묘미를 즐기는 데 감상의의를 두어야 할 텐데 여전히 창작 배경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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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와 아도니스 셰익스피어 전집 33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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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리스의 능욕>이 고대 로마의 전설적 역사에 기반하였다면, 이 작품은 그리스 신화의 내용에 바탕을 두고 셰익스피어가 지은 1,194행의 장편 이야기 시다. 비너스[아프로디테]과 그의 젊은 연인 아도니스의 사랑, 그리고 아도니스의 불행한 죽음과 꽃 이야기는 매우 유명한 이야기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점은 시인이 원작에 커다란 변형을 주어 이야기 전체의 틀을 뒤바꿔 놓았다는 사실이다. 애정이 넘치는 연인 사이였던 비너스와 아도니스의 관계가 여기서는 연인이라고 간주하기 어려운 처지다. 비너스는 끊임없이 아도니스에게 구애하지만 아도니스는 비너스의 애정을 거부하고 달아나려고 애쓴다.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는 여신이지만 욕정에 무관심한 아도니스의 눈에는 그저 귀찮은 존재에 불과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냥을 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훼방꾼. 아마 평범한 인간 여성이었다면 분연히 떨치고 가버렸겠지만, 여신이기에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도니스가 딱할 따름이다.

 

시인은 비너스와 아도니스를 통해 사랑의 본질을 되묻고자 한다. 아도니스가 아직 어려서 사랑을 모른다고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 명확히 이해하고 있다. 그가 비너스의 애정을 거부하는 까닭은 자신이 추구하는 사랑과 비너스가 요구하는 사랑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해서다.

 

비너스는 미의 여신인 동시에 사랑의 여신인데, 여신이 대변하는 사랑은 순수한 정신적 사랑이 아니라 육체적 사랑에 가깝다. 비너스는 남녀의 짝을 짓고 성욕을 통해 출산을 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으므로 여신에게 있어 고매한 정신적 사랑은 무의미하다. 육체적 교접으로 이어지는 사랑이 비너스의 본질이다. 비너스가 집요할 정도로 아도니스를 쓰다듬고 껴안으며 열렬한 키스를 갈구하는 연유가 이 때문이다.

 

그녀는 아도니스의 뺨을 어루만지고, 그는 얼굴을 찡그려 / 꾸짖기 시작하나, 그녀는 곧 입술을 포개고 / 키스로 사이사이에 욕정에 허덕이며 말하니, (P.14)

 

참을 수 없는 격정은 그녀의 하소연을 막으며, / 끓어오르는 욕정이 그녀의 입을 다물게 하오. (P.29)

 

여신이 아도니스에 하는 말에 귀 기울여 보면, 사랑은 가벼운 것이고 아름다움의 때를 놓치지 말라고 하는 등 정신적 교감보다는 육체적 의미를 중시한다. 특히 아도니스를 사슴에, 자신을 사슴동산에 비유하는 대목에서는 에로티시즘의 미학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도 거침없이 구사한다.

 

여신과 아도니스의 극명한 시각 차이는 고삐를 끊고 발정 난 암말을 쫓아 달려 나간 준마를 바라보는 장면에 있다. 말을 잃어버려 친구들과 사냥에 나설 수 없게 된 아도니스는 짜증이 날 뿐이다. 반면 본능으로서 욕정의 힘의 위력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므로 비너스의 눈에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여신은 아도니스에게 오히려 준마에게서 배우라고 간청할 정도다. 이에 대한 소년은 반응은 냉담할 따름이다. 여신의 뜨거운 구애에 그는 차갑고 멸시하듯 응대하며 경멸의 웃음을 짓는다. 여기서 비너스의 사랑과 아도니스의 사랑은 서로 다른 곳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입술은 정복자며, 소년의 입술은 굴복하니, / 승리로 오만한 자가 바라는 바 몸값을 치르네. / 그녀의 독수리 같은 탐욕은 한껏 몸값을 높이며, / 그의 입술의 풍요한 보화를 바닥까지 빨아들이네. (P.56)

 

비너스의 연기에 깜빡 속아 마음이 약해진 틈을 타 여신은 소년을 품에 안고 입술을 탐닉하는 데 성공한다. 정복의 기쁨에 한껏 오만해진 여신을 묘사하는 시구에서 문득 남녀의 성관계에서 여성을 정복하였다는 우쭐함을 과시하는 남성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정신적 교감에 바탕을 두지 않은 육체적 교합은 양자 간의 불평등한 관계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하면 억측일까.

 

아도니스는 끝내 비너스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신의 위력에 복종할 뿐 그녀에게 진정한 사랑을 품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여신을 모욕하는 듯한 말을 할 정도이다. 이어서 아도니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참다운 사랑을 설파한다. 독자는 이 대목에서 비너스와 아도니스가 결코 화합할 수 없는 관계임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

 

그걸 사랑이라 부르지 마오, 사랑은 천상으로 사라졌으니, / 이 땅에서 땀으로 얼룩진 육욕이 그 이름을 빼앗은 때문이라오. / 사랑이라는 수수한 모습으로 차리고, / 음욕은 신선한 아름다움을 먹어치워, 추한 죄로 더럽혔소. (P.77)

 

사랑은 포식하지 않으나, 욕정은 과식해서 죽는 것이라. / 사랑은 온통 진실이나, 욕정은 허위로 차있으니. (P.77)

 

여신의 무서운 예언에 무신경하게 아도니스는 멧돼지 사냥을 떠나고 불행한 예견은 적중한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은 탄식과 절망으로 다가오고 결실을 보지 못한 사랑의 여신은 사랑 전체에 저주의 씨앗을 뿌린다. 앞으로 사랑의 기쁨은 더 큰 슬픔을 동반하며, 사랑은 불화와 불평불만을 조성하리라고.

 

시인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비너스의 과도한 애욕을 비판하는가 아니면 아도니스의 사랑의 무지함에 한숨짓고자 함인가. 흔히들 완전한 사랑은 정신과 육체의 완전한 결합에 있다고 한다. 이 시에서도 비너스가 좀만 덜 아도니스에게 추근거리고 은근한 애정을 표현했더라면, 아도니스가 고삐 끊은 준마의 사례에서 육체적 욕정이 추잡하고 거부할 본능이 아니며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할 것으로 깨달았더라면.

 

이상은 이상에 그칠 뿐 그렇기에 현실에서 이상은 오히려 불가능에 가깝다. 비너스와 아도니스의 팽팽한 대치와 끝내 아도니스의 떠남과 죽음으로 귀결되었듯이 말이다. 다만 이로써 후대 인간 세상은 사랑의 불씨가 빚어내는 온갖 변덕과 기만, 인색과 의심, 불안과 비참의 파노라마로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니 가엾은 인간은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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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리스의 능욕 셰익스피어 전집 3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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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가 아닌 시인 셰익스피어가 고대 로마의 여인 루크리스[루크레티아]에 관한 유명한 사건을 다룬 총 1,855행의 장편시다. 옮긴이에 따라 <루크리스의 겁탈>, <루크리스의 강간> 또는 <루크레티아의 능욕>으로 표제가 조금씩 차이 난다. 표현을 달리하지만 가리키는 내용은 동일하니 루크리스가 어떤 사람에게 강간을 당한다는 점이다. 그 어떤 이는 바로 왕자 타퀸[타르퀴니어스]이다. 역사적으로 권력자에게 아름다운 여성이 겁탈을 당하는 사례가 적지 않지만, 이 사건이 역사적으로 남달리 의의를 가지는 까닭은 고대 로마의 정치체제가 이를 계기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이런 유형의 시를 이야기 시라고 한다. 시의 분류 체계에 이야기 시가 따로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서사시와 같이 어떤 사건 또는 이야기를 시 형식으로 풀어낸 성격이라고 보면 무방하리라. 시인은 친절하게도 사건의 줄거리도 작품 서두에 따로 마련하여 작품 배경에 낯선 이들을 배려하고 있다. 시는 내용상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반은 욕정에 눈먼 왕자 타퀸이 장군 콜라타인의 집을 방문하여 부인 루크리스를 겁탈하기까지의 경과를, 후반은 능욕당한 루크리스가 정신적 방황을 겪는 모습과 남편에 복수를 요구하며 자결하는 장면을 그린다.

 

사건 자체가 워낙 단순하고 분명하기에 시인으로서는 배경 묘사 또는 쓸데없는 주변 인물의 행동을 등장하여 시를 길게 이끌어갈 수 유혹에 빠질 수 있었으련만 셰익스피어는 주인공의 내면 묘사와 행동에 집중한다. 외관상 명명백백한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을 때 인물의 사고와 심경은 어떠하였을까를 상상하고 독자에게 펼쳐 보인다. 그로 인해 단순한 드라마는 더할 나위 없이 극적인 격정을 품게 된다.

 

욕정에 눈이 먼 타퀸은 이런 위험을 범하려 하니, / 욕정을 치르려고 그의 명예를 걸어야하고. / 자기의 욕망을 위하여 자신도 버려야만 하오. (P.24)

 

그의 마음은 욕정과 공포 사이에서 크게 동요하오. / 한쪽은 달콤하게 아첨하고, 다른 쪽은 무섭게 겁을 주고, / 정직한 공포는 추잡한 욕정의 매력에 홀리오니. (P.25)

 

루크리스에게 매혹당한 타퀸은 욕정에 이성을 놓는다. 자신의 신분이 무엇인지, 루크리스가 장군 콜라타인의 아내라는 사실을.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뒷수습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부인이 타인에게 정절을 빼앗긴 사실을 공개하는 치욕을 감내할 것인가, 쉬쉬하면서 드러나지 않도록 전전긍긍하면서 숨길 것이라고 예단했으리라. 그는 루크리스의 외모만 관심을 두었지 그녀의 정절과 지조, 올곧고 대범한 성품까지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제아무리 그렇더라도 막 나가는 폭군이 아닌 이상 평민이나 노예가 아닌 귀족의 부인을 함부로 건드리지는 못한다. 타퀸 또한 막판까지 고민한 대목은 자신의 욕정과 이것이 현실화하였을 때 가져올 파장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결국 욕정이 이성과 공포를 압도하였으니 인간에게 있어 욕정은 개체적 존재의 근원인 본능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의 성립을 위한 통제 대상이기도 하다는 점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욕정에 굴복한 타퀸은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오명의 길로 나아간다.

 

욕정은 나의 키잡이요, 아름다움은 나의 포획물이라. / 이런 보물이 바다에 있다면, 누가 빠지기를 겁내랴? (P.32)

 

나도 알거니와 이 행위 뒤에 후회의 눈물이 계속되는 것도, / 비방과 경멸, 그리고 무서운 증오가 뒤따르리라. / 그러나 나의 악명을 가슴속에 껴안고자 노력할 것이요. (P.48)

 

타퀸의 급습에 놀란 루크리스의 항변은 은근하지만 집요하다. 어지간한 침입자라면 제풀에 자책하고 사과하며 물러났을 것이지만, 이미 제정신이 아닌 타퀸에게는 역부족이다. 게다가 타퀸은 비열하게도 루크리스의 명예 손상을 위협 도구로 사용한다. 자칫하면 부정한 여자로서 죽음을 맞게 되고, 명예를 잃은 채 남편과 세상의 오해를 되돌릴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녀로서는 빠져나갈 출구가 없었기에 그의 겁탈을 무릅쓸 수밖에 없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시인은 강제로 여인을 취한 왕자의 허망함과, 정조를 잃고 허탈한 채 쓰러져 있는 여인의 상반되는 모습을 절묘하게 대비하여 보여준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자기가 저지른 죄로 자신을 증오하고. / 그녀는 절망으로 자신의 몸을 손톱으로 찢는다오. / 그는 죄의 두려움에 땀을 흘리며 맥없이 줄행랑이라. / 그녀는 남아서, 무섭던 그 밤을 한탄하며 소리지르고. (P.65)

 

절망에 빠진 그녀는 슬픔과 비탄으로 밤을 지새운다. 그녀의 처참한 심경에는 만사가 모두 원망스럽다. 타퀸의 만행을 가능하게 하였던 을 원망하며, 그의 능욕을 가능케 한 기회를 향해 비난을 퍼붓는다. 마찬가지로 능욕을 허용하도록 악용당한 시간에 대해서도 처절한 원성을 토로한다. 이처럼 비통한 루크리스는 주변의 모든 것에 시비를 걸면서 신화 속의 필로멜[필로멜라]과 자신을 같은 치욕을 당했다는 점에서 동일시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극도의 절망 속에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가 치욕을 감내한 이유가 분명하기에.

 

그러나 나는 죽지 않으리라, 불시에 죽는 이유를 / 콜라타인이 알게 되기까지는. / 나의 슬픈 임종시에, 이 목숨을 끊게 한 그자에게 / 복수하겠다는 맹세를 남편이 하기까지는, (P.97)

 

남편과 아버지와 귀족들 앞에서 자신이 당한 일을 공개하고 복수를 약속받은 루크리스의 자결은 일대 파란을 일으킨다. 여기에서 시인은 충격과 슬픔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남편 콜라타인과, 그녀의 피 묻은 칼을 들면서 복수를 외치는 브루터스를 대조적으로 묘사한다. 남편은 마지막 장면에서 아무런 주도적 역할도 하지 못한 채 주변부로 밀려난다.

 

시인은 루크리스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써 귀족들이 합심하여 만행을 저지른 타퀸을 쫓아내도록 브루터스의 숨겼던 영웅성을 일시에 드러내고 있으니 여기서 그에 대한 시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참고로 브루터스의 후손이 훗날 공화정을 지키고자 카이사르를 암살한 그 브루터스[브루투스]라고 한다.

 

타퀸의 사악한 죄를 세상에 공개하기로 결정하며, / 그 일이 바로 신속하게 실행되오니, / 로마 시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찬동하는지라, / 타퀸을 영원히 국외로 추방하기로. (P.145)

 

다만 마지막 장면에서 시인은 줄거리에서 설명하였던 역사적 의의를 슬며시 외면하고 오로지 루크리스를 위한 사적인 복수에만 국한한다. 왕자 타퀸이 중죄를 저질렀다면 그를 내쫓으면 되며, 나아가 타퀸의 아버지인 왕도 추방하면 그뿐이다. 다시 새 왕을 추대하여 정체(政體)를 이어가면 됨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들은 아예 왕정을 폐지하는 기회로 삼아버렸다. 이 말은 타퀸의 루크리스에 대한 능욕은 단지 방아쇠였을 뿐이라는 점이다. 오랜 기간 누적되었던 왕정의 폐해에 분노를 삼켜오던 귀족과 대중의 분노가 루크리스의 죽음을 계기로 화산처럼 분출하였기에 정체(政體)의 변경에까지 이르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에서 어디까지나 루크리스의 능욕을 개인적 복수로 해결할 뿐, 사회적 폭압으로까지 해석하지 않는 제한적 태도를 보여준다. 아마도 시인이 처한 당대의 정치 현실에 대한 고려가 작용하였으리라.

 

이 작품에서 이채로운 부분이 있는데, 겁탈당한 루크리스가 날이 밝아오기를 불안하게 기다릴 때 트로이의 이야기를 담은 명화에 눈을 돌리는 대목이다. 그녀는 그동안 무심하게 넘겼던 그림 속 내용을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전설적인 고대 왕국의 멸망을 이끈 인물 헬렌과 패리스를 비판한다. 그들의 무절제하고 무책임한 욕정은 타퀸의 그것과 근원적으로 동일하다. 더욱이 트로이인을 기만한 시논은 순진한 외양을 한 채 다가와서 순수한 천성의 상대방을 속였다는 사실에서 타퀸과 흡사하다. 그에게 향한 그녀의 극도의 분노와 적개심 분출은 시논이 아닌 타퀸을 대상으로 한 것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이 전쟁을 일으키게 한 창부 헬렌을 보여다오. / 내 손톱으로 그 고운 얼굴을 찢어줄 것이니. / 어리석은 패리스, 불타는 트로이가 짊어진 이 분노의 짐은 / 그대의 격한 욕정이 초래한 것이라.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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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선화유사
천대진 옮김 / 학고방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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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수호지>의 원형을 담고 있어 문학사적 의의가 있는 역사소설집이어서다. 확실히 <수호지>의 주요 인명이 이야기에 나오고 어렴풋하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딱 거기까지다. 이 책의 여러 이야기 중에 송강의 반란 이야기98쪽에서 107쪽으로 다른 산발적인 일화에 비하여 주요 이야기에 해당하지만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 분량 면에서는 오히려 휘종과 이사사의 이야기115쪽에서 141쪽으로 훨씬 길고 흥미로운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이 책은 중국 선화(宣和) 시절의 남겨진 이야기라는 뜻이다. 선화는 북송 휘종 시절에 쓰던 연호 중 하나다. 왜 하필 선화 연호를 언급하였을까. 휘종의 마지막 연호이어서다. 그는 중국사에서 매우 유명한 사건, 즉 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고 상황 휘종과 황제 흠종을 포로로 잡아간 치욕적인 정강의 변의 주인공이다. 이로써 송나라는 멸망하고 살아남은 왕족이 양자강 이남으로 도주하여 재건한 나라가 바로 남송이다. 멀쩡히 잘 나가던 송나라가 졸지에 망국이 된 게 아니다. 미술사에서 명성 높은 황제이지만 위정자로서는 매우 형편없던 암군, 혼군이 휘종이다. 그가 재위하는 동안 송나라는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

 

무릇 선화 때의 환란은 희녕 때부터 선화 때까지 소인배가 60여 년 동안 권력을 장악하여 간사하게 아첨한 것이 오래토록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P.163)

 

이 책의 작자는 미상이지만 휘종을 향한 울분과 직설적 비난을 보면 그가 휘종 치세를 얼마나 암담하게 인식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송강의 반란 이야기는 이런 혼란기의 한 자취일 뿐이다.

 

오늘 이야기할 것도 무도한 한 군왕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는) 소인을 믿고 황음무도하였으며 조종(祖宗)의 혼란스러웠던 세상을 아예 망쳐서 부자가 북쪽 땅으로 가게 되었다. 조종이 나라의 기반을 세울 때 실로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전혀 생각지도 않았구나! (P.45)

 

전체적 구성은 연대에 따른 역사 형식을 따르고 있다. 중심은 송 휘종과 그 아들 흠종이지만, 멀리 요순 시기부터 휘종 이전의 송나라 임금까지를 가볍게 훑고 있다. 여기서 작자가 주목한 것은 나라를 망친 임금들이다. 걸주와 당 태종, 그리고 신종 때의 왕안석이 등장한다. ‘왕안석에 관한 이야기는 이 책의 주요 이야기 중 하나에 해당한다. 전자의 임금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왕안석을 특히 다룬 것은 왕안석의 신법 개혁이 불러일으킨 파장과 사회적 혼란에 작자가 매우 부정적 견해를 지녔음을 보여준다. 왕안석이 휘종 때의 대표적 간신 채경과 깊은 관련이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왕안석의 아들 왕방(王雱)은 사람됨이 잔인하고 살인을 좋아하였다. 그는 종양이 나서 죽었는데 향년 33세였다. 왕안석은 애통하였으나 위로할 길이 없었다. 한 번은 왕방이 몸에 쇠칼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는데, 왕방이 왕안석에게 말하였다.

아버지께서 나쁜 일을 하셔서 제가 이런 중벌을 받게 되었답니다.” (P.52)

 

작자는 휘종에게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그가 이 작품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하지만, 멀쩡한 나라를 졸지에 패망시킨 한심스럽기 그지없는 왕의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후대에 남겨 경계와 교훈으로 삼고자 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표출한다. 작중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휘종의 태도는 한마디로 정치에는 관심 없고 풍류와 여색에만 홀딱 빠져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유능한 신하라도 잘 등용하여 믿고 맡기면 좋았겠지만 올곧은 신하는 배척하고 아첨에만 능한 간신에게 전권을 맡겼으니 앞날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작중에서 통치자 휘종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주요 이야기 중 도교에 심취한 휘종 이야기휘종과 이사사의 이야기는 그가 군주의 자질이 결여되어 있음을, ‘간신 채경과 휘종의 이야기는 그가 얼마나 무능했는지 보여준다. 자신을 장생대제군의 강림이라는 아첨에 솔깃하여 스스로 도교 황제의 존호를 책봉하고, 오죽하면 양위하고 난 후의 존호마저 도군황제(道君皇帝)를 사용하였으니. 이 정도면 도교를 애호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흠뻑 심취하여 제정신마저 잃은 수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간신 채경은 항상 휘종에게 권한다. 황제로서 골치 아픈 정사에 굳이 신경 쓸 필요 없다. 짧은 세월 그저 마음껏 즐기고 놀아야 한다고. 이런 말을 한다고 덥석 받아들이는 휘종은 백성의 고초가 어떠한지 일말의 눈길도 주지 않는다. 송강과 방랍의 난이 발생하여도 전혀 걱정과 관심도 보이지 않고 오직 풍악을 울리며 자신의 환락과 쾌락에만 골몰하는 것이다. 충신의 충언을 오히려 희롱으로 응대하는 군주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간신이 횡행하는 조정과 백성이 죽어 나자빠지고 원망과 고통의 원성이 천지에 자자한 세상을 만들고도 현실을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은 임금이라니. 소인배가 권력을 장악하여 나라를 망치도록 내버려 둔 책임은 결국 군주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백성들로 하여금 만세산을 짓게 하고 태호의 돌을 다시 운반해오게 하였으며, 소주와 항주로부터 변경에 이르는 여정에서 민가에서 장정이 1명 있으면 1명이 부역을 했고, 둘이 있으면 둘 다 부역을 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두 강의 연안에는 죽은 장정들이 즐비했고 원망과 고통의 원성이 온 들판에 자자했다. 천자는 뜻밖에 이를 알지 못했다. (P.144-145)

 

휘종과 이사사의 관계는 일종의 러브 스토리로 회자될 수 있었을 소재다. 그가 군주가 아니라 귀족이나 평민이었다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으리라. 이사사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저 창기로서 미색이 뛰어나고 가무에 능하여 황제의 눈에 띄었다는 점 외에. 망국의 책임을 그녀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가혹하다. 오히려 그녀야말로 민간에서 제일의 기생으로 연인과 자유로운 사랑을 누리는 행복을 빼앗긴 셈이 아니겠는가.

 

휘종의 무능함의 극단은 난데없이 황제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준 점이다. 금나라가 쳐들어오자 혼비백산한 그는 갑자기 선양을 하고 상황으로 물러난다. 중국 역사에서 멀쩡히 생존한 황제가 선양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금나라와의 전쟁 처리는 골치 아프니 아들에게 책임을 떠넘긴 셈이다. 평시도 아닌 전시에 아무 준비 없이 떠밀려 황제가 된 흠종이 무엇을 할 수 있었으랴. 아버지를 잘못 만난 운명을 탓할밖에.

 

좌우에 명하여 황제를 땅에 패대기치고 버드나무 채찍으로 열다섯 대 넘게 때렸다. 황제는 비 오듯 눈물을 흘렸고 한참 동안 고초를 당하고 나서야 벗어날 수 있었으며, (지군은) 감시원에게 당부를 하고 가버렸다. 날이 저물어서 문을 나설 때 황제의 몸에는 상처가 생겨서 고통스러웠고, 일어나서 걸을 수도 없었다. 태상황도 여름 더위 때문에 병이 생겨서 그야말로 난감했다. (P.214-215)

 

작품 후반부는 포로가 되어 금나라로 끌려간 휘종과 흠종이 겪는 고초와 모멸의 이야기다. 일국의 황제로서 부러울 것 없이 향락을 누렸던 휘종이 오랑캐, 그것도 하급 관리들에게 구박과 학대를 받는 대목에서 문득 그가 자신의 미래를 미리 알 수 있었다면 그토록 무도하고 방탕하였을 것인가 궁금하다. 각각 비참하게 목숨을 잃게 되는 두 황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자의 의중은 나라를 망친 군주의 최후를 보여주고자 함이리라. 오죽하면 금나라 황제가 그에게 혼덕공(昏德公)이라는 작위를 내렸을까. 두 포로 황제에 대한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는 역사상의 사실과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다고 하니, 분노와 적개심을 고양하려는 의도로 지어낸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래도 작자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강왕이 세력을 규합하여 남경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여러 장수들의 분투로 금나라의 공격을 물리친 것은 희망의 전조다. 상실한 중원 회복을 이루지 못한 데 대한 작자의 한탄은 그저 아쉬움의 토로라고 이해해줄 수 있다.

 

애초에 <수호지>의 원류라는 평가에 궁금하여 책을 읽게 되었지만, <수호지>와의 연관성 자체는 이 책에서 그다지 높지 않다. 이 한 가지에만 주목하여 이 책을 평가한다면 다소간 실망할 수 있을 것이다. ‘송강의 반란 이야기<수호지> 사이는 멀고도 깊다. 조그만 시냇물이 도도한 장강이 되기 위해 얼마만 한 창의와 노력이 더해졌겠는가. 오히려 북송의 패망과 남송의 재건, 그리고 정강의 변에 대한 구체적 원인과 경과 등을 소설의 형태로 새롭고 자세히 알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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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2세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15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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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리처드 2세는 플랜타저넷 왕가의 마지막 왕으로 랭커스터 왕가의 헨리 4세에게 왕위를 뺏기는 비운의 군주다. 이 희곡에서도 리처드 왕은 귀족, 평민들에게 모두 미움을 받는 폭정의 임금으로 지칭된다. 작품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극중에서 리처드 왕의 악정은 등장인물들의 전언에 의존한다. 왕 자신의 말과 행동에서는 별달리 폭군의 징조를 발견할 수 없다. 극중에서 유일하고 가장 큰 잘못은 삼촌 고온트의 존의 사망에 따른 상속권을 추방당한 볼링브루크에 넘기지 않고 몰수하려고 한 행동이다. 이것이 결국 그의 몰락의 계기가 되는데, 깊이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셰익스피어 자신도 헨리 4세의 왕권 찬탈이 그렇게 정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헨리 5세는 훗날 리처드 왕의 무덤에서 부왕의 잘못을 눈물을 흘리며 사죄한다. 솔즈베리 백작, 스크로우프 경, 칼라일 주교가 리처드 왕의 편을 든 것은 그가 단순히 왕이어서가 아니라 왕으로서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보유하고 있음을 인정해서이다. 역으로 볼링브루크는 이 두 가지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볼링브루크는 전적으로 노섬벌랜드를 비롯한 타 귀족들의 도움으로 왕권을 차지할 수 있었고, 자신이 충성을 서약한 왕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왕좌를 차지하였다. 더욱이 엑스터 경을 사주하여 리처드 왕을 살해한다.

 

(칼라일 주교) 여기 고귀한 분들 중 누구든 / 고귀한 리처드를 올바르게 심판하실 만큼/ 참으로 고귀하시다면 좋겠죠. 계시더라도 그분은 스스로의 고귀함으로 / 깨달으실 것이오, 이렇게 더러운 범죄를 저지르면 안 된다는 것을. / 어떤 신하가 자신의 왕에게 언도를 내릴 수 있답니까? / 그리고 여기 앉아 계신 분 중 리처드의 신하 아닌 사람 그 누굽니까? (P.118, 41)

 

리처드 왕은 귀족들간 세력다툼의 희생양이다. 작품 서두는 모브레이와 볼링브루크의 상호 반역 고발로 시작한다. 누가 진정한 반역자인지 리처드 왕은 판정을 내려야 한다. 당대의 관습대로 양자 간 결투를 통해 승자의 정의를 인정할 수 있겠지만, 리처드 왕은 두 사람의 추방으로 처리한다. 모브레이는 영구 추방을, 볼링브루크는 6년 추방을 명한 것을 보면 사촌에 대한 상당한 배려라고 볼 수 있다. 12장 고온트의 존 대사를 통해 이들의 갈등 배경에는 리처드 왕의 또 다른 삼촌 글로스터의 죽음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누가 글로스터를 죽였는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리처드 왕은 왜 고온트의 존의 재산을 몰수하였는가, 단지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리처드 왕) 마치 짐의 잉글랜드가 계약 만료되면 자기[볼링브루크] 것이고, / 자기가 짐의 백성들이 생각하는 왕위 계승자라는 듯이. (P.40, 14)

 

다시 역사를 찾아보면 리처드 왕과 삼촌 간 사이가 좋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온트의 존, 글로스터는 어린 조카를 꼭두각시로 삼고 자신들을 포함한 귀족층의 지위와 세력을 확대하려고 하며, 성인이 된 리처드는 왕권 강화를 시도한다. 이런 해묵은 갈등이 고온트의 존이 죽기 직전에 리처드에게 폭언을 퍼부은 배경인 동시에 리처드가 무리해서라도 볼링브루크의 상속권을 박탈한 이유일 것이다. 볼링브루크가 반기를 들자마자 거의 모든 귀족이 그에게 합류한 까닭을 알 수 있으며, 비교적 중립적인 삼촌 요크 공작조차 후반에는 볼링브루크 편에 은근슬쩍 마지못한 듯 합세한다.

 

이렇게 볼 때 모브레이와 볼링브루크의 갈등은 재해석할 여지가 있다. 모브레이가 충신이었음과 볼링브루크의 정체를 꿰뚫어 본 혜안을. 모브레이는 영구 추방이라는 차별적 조치의 치욕과 불명예를 군말 없이 감수한다. 외국에서 왕을 원망하고 반란을 획책하기는커녕 이교도와의 성스러운 전쟁에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모브레이) 만에 하나 내가 반역자였다면, / 영생의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도 좋다, / 여기서 그렇듯 하늘에서 추방되어도 좋고. / 그러나 너의 정체는, 정말, 네가, 그리고 내가 잘 알지, / 너무도 이르게 왕께서 후회하실까 봐 걱정이다. (P.33, 13)

 

여기서 볼링브루크가 왕의 추방령을 어기며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한 상황을 살펴본다. 자신의 상속권이 박탈되었으니 그로서는 당연히 화가 날 것이고 자신의 권리를 회복해야겠다는 동기도 충분히 인정할만하다. 공식적인 거병 사유도 자신의 권리 회복에 있다고 반복해서 주창한다. 23장과 33장에서 자신과 노섬벌랜드의 입을 통해. 이후 리처드 왕에게 확실한 세력적 우위를 확보하게 되자 그 자신과 추종세력의 태도는 완전히 바뀐다. 노섬벌랜드는 실수인 척 리처드 왕의 왕 호칭을 생략하고 말한다. 볼링브루크는 요크 공작이 리처드의 양위 의사를 전달하자마자 일말의 사양도 없이 기다렸다는 듯이 덥석 수용 의사를 밝힌다. 그리고 양위 의사가 리처드 왕의 자발성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뻔뻔스럽게 반문한다.

 

(볼링브루크)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왕의 권좌에 오르겠소. (P.117, 41)

 

(볼링브루크) 자진하여 물려주는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P.121, 41)

 

독자는 볼링브루크의 일련의 언행을 통해 상속권 회복은 표면적 주장에 불과할 뿐 리처드를 무너뜨리고 왕권을 쟁취할 의도를 처음부터 품고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헨리 왕의 이중성과 위선적 면모는 엑스턴을 교사하여 리처드를 살인하도록 한 행위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엑스턴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우리라. 왕의 명령을 좇아 리처드를 죽였건만 돌아온 건 온통 비난뿐. 살인 지시는 했지만 그렇더라도 살인자는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는 무엇인가? 토사구팽인가.

 

(엑스턴) 폐하 자신의 구두 지시를 받고 저는, 폐하, 이 일을 감행한 것입니다.

(헨리 왕) 독약이 필요한 것이지 독약을 사랑하는 것은 아닌 것, / 내가 그대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 비록 그가 죽기를 바랐지만, / 난 살인자를 증오하고, 살해된 그를 사랑한다. (P.162, 56)

 

작가는 귀족들, 리처드 왕의 부하들, 그리고 정원사 같은 평범한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리처드 왕이 학정과 실정을 자행하고 있음을 계속하여 상기시킨다. 정원사의 말대로 리처드가 자신의 나라를 다듬고 재배하지 않은”(P.107, 34) 잘못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것을 리처드 혼자만의 잘못으로 치부하는 건 곤란하다. 그는 실권을 틀어쥔 자신의 반대세력, 잉글랜드와 왕보다는 사욕에 더 매진하는 그들과의 싸움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런 잘못이 헨리 볼링브루크의 찬역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랭커스터 왕가에 장밋빛 미래가 약속되지 않음을 셰익스피어는 리처드 왕과 칼라일 주교의 예언을 통해 똑똑히 보여준다. 헨리 왕의 특등공신인 노섬벌랜드가 고분고분 볼링브루크에게 복종하지 않고 반역을 꾀할 것을, 칼라일 주교는 왕권을 노리는 귀족들의 잇따른 배신과 분열이 훗날 장미전쟁을 초래할 것을 각각 암시한다.

 

(칼라일 주교) 여기 있는 해러포드 경은, 당신들이 왕이라 부르지만, / 더러운 반역자요, 해러포드의 위풍당당한 왕께. / [......] / , 만일 당신들이 이 가문을 키워 이 가문에 맞세우면 / 그건 이 저주받은 대지에 내린 / 가장 비통한 분열로 드러날 거요! (P.119, 41)

 

5막은 요크 공작과 공작부인, 그들의 아들인 오멀 공작의 촌극으로 점철한다. 작가는 굳이 여기서 요크 공작 가족의 일화를 끼워 넣었을까? 요크는 리처드 왕의 신임을 받고 섭정이 되었지만 헨리에게 돌아서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오멀은 시종일관 리처드에게 충성하고자 노력한다. 리처드 왕 복위 시도를 알아차린 요크가 아들을 반역자라고 퍼붓는 대목은 23장에서 볼링브루크와 귀족 일당을 반역자라고 매도하는 장면과 역설적으로 대비된다. 오멀은 자신의 목숨과 가문을 위해 헨리에게 굴복하지만, 반역의 기준이 무엇이고 참다운 정의가 무엇인지 새삼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1년여 전 <햄릿>으로 시작한 셰익스피어 희곡 전 작품 읽기를 이제 마친다. 일생에 한 번은 시간을 들여 셰익스피어 전집을 읽어볼 가치가 있다는 문구를 떠올리며 시작했는데 확실히 그럴만하다고 동의한다. 대중적인 비극과 희극을 새롭게 음미하는 시간이었으며, 무엇보다 생소한 작품을 통해 셰익스피어의 미처 알지 못한 세계를 보는 기쁨도 컸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리처드 2>로 대단원을 끝내는 것도 훨씬 의미가 깊다. 집필 시기적, 연대기적으로 그의 최후 역사극은 <헨리 8>이지만, 강요된 인위적 화해와 밝음의 분위기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헨리 볼링브루크의 찬탈이 야기시킨 장미전쟁의 여파를 감안하면 <리처드 2>의 어둡고 비극적 분위기가 더욱 그럴듯하다.

 

작품해설에서 중대한 오류 하나만 지적하고 끝낸다.

 

헨리 3세의 세 아들 모두 왕에 오르니, 에드워드 1(치세 1272~1307), 에드워드 2(치세 1307~27), 에드워드 3(치세 1327~77)가 그들이고 에드워드 3세는 아들 일곱을 두게 되는데, (P.171-172)

 

헨리 3세의 아들은 에드워드 1세다. 에드워드 2세는 에드워드 1세의 아들이고, 에드워드 3세는 에드워드 2세의 아들이다. 즉 에드워드 3세는 헨리 3세의 증손자이다. 리처드 2세는 다시 에드워드 3세의 장손이다. 혹시나 하여 바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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