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평화 - 삼국지 이전의 삼국지, 민간전래본
김영문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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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 삼국지 또는 아류작을 제외하고 <삼국지연의>와 같은 고전으로 다른 삼국지류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우연한 기회에 <삼국지평화>라는 작품이 존재하고, 게다가 나관중의 소설보다 무려 170여 년을 앞선 글이라니 삼국지 매니아인 나로서는 도저히 피해갈 수 없었다.

 

이 책은 내용 자체의 감상에 앞서 작품 자체의 소개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나관중의 것보다 앞선 시대의 것이므로 <삼국지연의>가 순전히 나관중의 창작이 아님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으며, 초기작을 통해 삼국지 이야기의 소설화가 발전되는 방식을 비교할 수 있다. 표제의 평화(平話)는 공연 대본을 가리킨다고 하며, 그림과 텍스트를 나란히 수록하여 시각적 이해와 상상을 돕고 있다.

 

<삼국지평화> 원본에는 맨 위 3분의 1 부분이 삽화, 아래 3분의 2 부분이 문자 텍스트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제목 끝에 붙어 있는 평화라는 말은 당시 이야기 공연 장르의 대본이라는 뜻이다. (P.31)

 

원본은 상중하 3권 구성이며, 번역본은 한 권으로 옮길 수 있어 <삼국지연의>에 비하면 매우 간략하다. 따라서 사건과 인물의 다양성, 표현의 풍부함 등은 당연히 기대할 수 없으리라고 짐작하며 사실 그러하다. 대신 빨리 읽는 독자라면 앉은 자리에서 뚝딱 완독할 수 있을 정도니 속도감과 흡인력은 비교작을 능가한다.

 

전체적 구성에서 <연의>와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데, 특히 삼국 정립의 원인과 통일을 언급하는 도입부와 결말부이다. 삼국분열이 후한말 혼란과 부패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한 고조 유방에게 토사구팽당한 한신, 팽월, 영포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한 후속 조치로 설명한다. 매우 황당하며 비현실적이다. 뒷날 나관중이 이런 논리를 배격하고 완전히 새롭게 짜 맞춘 것은 합당한 판단일 것이다.

 

세 사람은 천하를 삼분하려는 게 아니라,

한 고조에 참수된 원한 갚으러 다시 왔네. (P.45)

 

사마중달은 세 나라를 남김없이 평정했고,

유연은 한을 일으켜 황업을 공고히 했네. (P.389)

 

결말부에서 주목할 대목은 516국 중 하나인 전조(前趙)의 창설자 유연이 한나라를 계승하여 훗날 그의 아들이 한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복수를 하였다는 설정이다. 실제로 그렇게 믿었던 건지 아니면 흥미를 끌기 위한 단순한 장치로 도입했는지 알 수 없으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전혀 터무니없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유씨라는 공통점을 내세웠지만 유연은 촉한 황제의 외손”(P.385)가 아니라 엄연히 흉노족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내용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할 말이 많다. 큰 줄기에서는 우리가 아는 삼국지 이야기가 맞지만 세세한 부분에서는 <연의>와 전혀 다르다.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연의>와 비교하여 당혹해하는 나 자신을 보게 되지만, 그냥 완전히 다른 작품이라고 간주하는 게 맘이 편할지 모르겠다. 역사적 기록의 부합 여부는 거의 고려치 않는다는 면에서 나관중보다 작가적 자유분방함의 정도가 훨씬 크다.

 

조조는 여기서도 간웅이다. 후대작의 조조는 여기에 비하면 악독함이 덜하다. 황제의 태자를 때려죽이고 강제로 아들 조비에게 물려주도록 직접 행동의 전면에 나선다. 나관중의 작품에서는 예의를 차리며 관대하게 관우를 보내는 조조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여기에서 조조는 호시탐탐 관우를 죽이려고 한다. 조조 죽음의 계기가 되는 관우의 수급을 보고 놀라는 장면도 여기에는 없다. 옮긴이에 따르면 초한지의 내용을 응용하여 관우를 높이고 조조를 낮추는 의도로 나관중이 지어낸 거로 보인다. 이처럼 초한지와 연결시켜 장면을 추가하는 대목이 많은 게 이 책이다. 반면 훗날 나관중은 무리한 관련성을 배격하고 역사적 흐름을 더욱 중시하고 있으며, 번개처럼 지나가느라 놓친 개개의 사건과 인물에 풍성함을 더하기 위해 다양한 일화와 고사를 추가한다.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적어도 문학적 재미와 흥미로서는 나관중의 압승이다. 그러기에 현대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겠지만.

 

의형제 삼인방에서 세인과 후인의 추앙을 받는 사람은 단연 관우다. 안량과 문추를 베는 용맹, 유비를 찾아가려고 조조를 떠나는 엄중한 의리, 죽어서도 굴하지 않는 기개 등 그가 민간에서 신으로 승격된 까닭이다. 그런데 의외로 이 작품에서는 장비가 더욱 돋보인다. 의병 창설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는 이는 장비다. 황건적을 무찌르고 유비를 푸대접한 환관에게 주먹을 날리고 태수와 그의 아내 및 병졸 수십 명을 거리낌 없이 죽이고 독우를 매질하여 죽인 후 토막 내 버릴 정도로 용맹과 흉포함, 잔인성이 결합한 캐릭터는 나관중의 것보다 훨씬 강렬하다. 삼국지 이야기에서 자타공인 최강의 무사는 여포다. 그런 여포가 여기서는 장비에게 꼼짝 못 한다. 장비는 여포의 일기토에서 승리를 거두고, 소패성을 포위한 여포를 무려 세 번이나 뚫고 나온다. 마지막에서 여포를 잡아 가둔 것도 장비니 그야말로 천하무적 여포의 유일한 천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포의 이야기를 덧붙인다면 그와 동탁의 만남은 다른 방식이었으며, 여포와 초선은 원래 부부 사이였다고 한다. 하후돈을 애꾸눈으로 만든 인물도 여포이다.

 

제갈량은 본래 신선인데, 어려서부터 학업을 닦았으므로 중년에 이르러서는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천지의 기미에 통달하여 귀신도 헤아리기 어려운 뜻을 품고 있었다. 바람을 부르고 비를 내리게 할 수 있었으며, 콩을 뿌려 군사를 만들 수 있었고, 칼을 휘둘러 강을 만들 수도 있었다. (P.203-204)

 

<연의>에서도 제갈공명의 능력은 초인적인데, <평화>에서는 아예 대놓고 그를 신선이라고 칭한다. 초능력자 제갈량을 너무 높인 나머지 한편으로는 그렇게 뛰어난 능력자가 어째서 삼국통일의 대업에 실패하였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민간전래본이다 보니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체계성과 일관성이 부족한 게 약점이다. 공명의 신통력과 도술을 강조하는 대목은 남만 정벌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 제갈량은 하늘을 운행하는 풍륜(風輪)을 제작하여 맹획을 정복해낸다.

 

봉추선생 방통의 역할은 <연의>에서 제한적이어서 그의 참 면모를 알기 어렵다. 여기서는 방통과 주유가 호형호제하는 사이며, 유비에게 인정받지 못한 방통이 형주 4군의 반란을 부추기는 등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물로 나온다. 다만 죽은 방통의 도움으로 승리를 거두고 유비가 서천을 얻게 되는 장면은 황당한데, 죽은 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물리친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평화>에서 죽은 공명이 수레에 타고 의젓하게 나서는 장면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제갈량의 북벌 실패의 가장 결정적인 대목은 마속이 가정을 잃은 데 있다. 훗날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유명한 고사성어의 유래인데, 전투의 상세 원인이 전혀 다르다. 마속은 술에 취해서 수비에 실패하였으며, 그에게 충언했던 왕평은 <평화>에서 남만 정벌에서 일찌감치 제갈량에게 참수당하여 등장할 기회조차 없었다. 언제나 느끼는 점이지만 촉과 제갈량의 북벌 실패 제일 원인은 제갈량 일인의 역량에 대한 과도한 의존 탓이다. 그는 승상이자 총사령관이므로 내정과 국방을 총괄해야 했는데, 전시상황에서 내정을 전담할 수 있도록 후주가 믿고 맡길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하는 만약의 가설이 여전하다.

 

조조의 후손이 그러했듯 사마의의 후손이 조조의 후손에게 황권을 빼앗은 걸 보면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수십 년을 지속한 삼국 정립을 끝내고 통일,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을 이루어낸 것은 사마의의 후손이다. <연의>는 제갈량의 사후 통일까지를 다루고 있는 반면 <평화>는 공명의 죽음으로 대단원을 내리고 이후는 간단한 해설로 마무리한다.

 

옮긴이가 누차 강조했듯이 <평화><초한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나관중은 그것이 지나친 대목은 깎아내고 없던 장면은 덧붙여서 모방이 아닌 창작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연의>에서는 희석되어 두드러지지 않지만 <평화>에 앞서 <초한지>를 읽으면 두 작품의 관계가 더욱 강하게 의식될 것이다.

 

<연의><평화>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며 우월의 격차는 명확하다. <연의>를 먼저 읽은 독자라면 <평화>의 전개와 서술에 이질감을 느낄 것이다. 역으로 <평화>를 접한 후 <연의>를 펼친다면 <연의>의 뛰어남과 나관중의 재능에 새삼 경탄하게 된다. 이는 <연의>가 수준 낮고 일독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두 작품은 소위 삼국지 이야기를 공통의 배경으로 삼았기에 여러 면에서 겹칠 수 있지만, 별개의 독자적 작품으로 접근해야 한다. <연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평화> 자체로도 감상하고 묘미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옛사람들은 나관중 이전에 이 작품 속 이야기에 일희일비하지 않았겠는가. 나아가 우리는 <평화>를 통해서 민간에 전승된 삼국지 이야기가 어떻게 기록으로 정착하고 방대한 소설로 발전해 나갔는지를 이 작품을 통해 비로소 비교하고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연의>도 비견할 수 없는 이 작품만의 독특한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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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환타지소설의 원조, 습유기
김영지 지음 / 한국출판협동조합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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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지괴소설집의 하나다. 저자는 도교의 방사(方士)인 왕가라고 하는데, 훗날 소기가 잔존한 판본을 오늘날의 형태로 편집하였다. 소기는 단순히 편집에 그치지 않고 주요 고사 또는 각 권의 마지막에 록()이라고 하여 자신의 비평을 추가하고 있다. 사실상 저자가 두 명이라고 할 수 있기에 도가와 유가의 분위기가 묘하게 혼재되어 있다.

 

앞서 읽은 몇 권의 지괴소설집과 비교할 때 이 책은 서술 체계가 독특하다. 언뜻 보면 역사서에 가깝다. 10권 중 1권에서 9권까지는 복희, 신농, 황제에서 시작하여 삼국시대를 거쳐 서진 당대까지의 고사를 담고 있다. 이처럼 시대순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주로 임금과 관련된 고사를 기록하고 있어서 정사를 보완하는 비사(祕史)로서의 성격을 포함한다. 표제조차도 빠뜨린 이야기를 주워서 전한다는 의미가 아니던가. 이런 연유로 과거에는 역사서로 분류하기도 했다고 한다. 마지막 10권은 고대와 당대의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8대 명산을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비사와 지괴, 박물지가 혼재된 특이한 지괴소설류로 간주할 수 있다.

 

저자의 서술과 관련한 특색을 추가로 언급하자면 시대순으로 기술하지만 인물과 고사의 선별 기준은 도가에 가깝다는 점이다. 주나라의 목왕, 춘추전국시대의 노나라 희공과 연나라 소왕을 다룬 것은 이들이 신선도에 빠져있던 걸로 정평이 난 군주들이어서다. 8대 명산도 소위 오악(五嶽)과는 무관하게 도가에서 중시하는 산들이다.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은 진시황이 불사약을 구하러 보낸 삼신산이다. 곤륜산은 서왕모가 산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거리에는 붉은 풀들이 가득하고 무성한 수풀 위로는 상서로운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하늘에 제사모시는 흙 단을 쌓아서 아침 해에게 제사를 드리고, 옥섬돌을 꾸며서 달빛을 담아낸다. 구천의 조화로운 음악을 연주하노라니 온갖 동물들이 춤을 추었고 여덟 가지 음색도 잘 어우러지니 나무와 돌에도 윤기가 흘렀다. (P.32, 염제 신농)

 

위의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수록된 고사의 서술 내용 자체가 비교적 세밀하고 때로는 장식적, 낭만적 묘사도 주저하지 않는다. 다른 작품집의 간략하고 사실 전달에 중점을 둔 서술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그만큼 저자의 집필 의도와 필력이 중시된다는 점에서 소설로서 한층 진일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이 쓰인 때가 서진 시기였으므로 삼국시대와 당대의 고사를 다룰 때면 은연중 자국의 정통성을 표출하는 문구가 자주 보인다. 시대적 상황에 따른 불가피성을 감안하더라도 무리한 견강부회라는 생각을 숨길 수 없다.

 

예컨대 위에서 진으로 넘어가던 무렵 궁궐 문에 작은 참새만한 하얀 빛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를 금덕(金德)의 길조라고 해석하여 진의 성립을 천명으로 풀이하는 대목(P.233)이 그러하다. 옮긴이에 따르면,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위는 불에 속하며, 진은 금()에 속한다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위, , 오의 역사를 왜곡하거나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장면도 엿볼 수 있다. 유비를 헌신적으로 도왔던 거부 미축의 사망 원인을 촉이 망하는 바람에 잃어버린 재물이 아까워 한이 되어 죽었다(P.268)고 하는데, 미축은 촉이 멸망하기 이전에 죽었으며 동생 미방이 촉을 배신하여 화병으로 죽은 것이라고 옮긴이가 의미읽기에서 바로잡고 있다. 악의적 왜곡의 전형이다.

 

이국원인(異國遠人)에 관한 관심은 <산해경>, <신이경> 등에서처럼 여전하다. 지리와 교통이 원활하지 않아 정보가 부족한 시절 호기심과 상상력이 결부된 각종 먼 나라 기이한 물산의 이야기는 한낱 터무니없는 걸로 치부하기에는 무척이나 흥미롭다. 너무나 멀어서 조공을 오는 데 수십 년이나 걸려 어린 사람이 노인이 된다는 연구국(P.87), 선녀가 변신한 무희를 바쳤다는 광연국(P.137), 자유자재로 도술을 부리는 목서국=신독국(P.141), 수명이 삼백 세인 기륜국(P.174) 등은 당대인들의 호기심 충족에 그만이었으리라. 어쩌면 지리적 발달에 다소는 공헌하였을지도 모르겠다.

 

신선에 관한 고사가 많은 경우를 점하는데, 넓게 보면 삼황오제가 모두 신선이라고 할 수 있다. 서왕모를 만났다는 주나라 목왕의 서방 여행, 그리고 서왕모에게서 단약 재료를 얻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만 연나라 소왕 고사(P.141)는 서왕모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심 정도를 보여준다. 신화적 인물만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도 신비화하는데 괴력난신과 무관한 공자의 탄생 장면도 신비롭게 미화하고 있어 과연 공자가 이를 알았다면 어떻게 생각했으려나 궁금하다.

 

주 영왕 21, 공자는 노나라 양공 통치 시절에 태어났다. 그날밤 푸른 용 두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어머니 징재 방으로 들어갔는데 그 꿈을 꾸고 공자를 낳았다. 두 명의 신녀가 하늘에서 향기로운 이슬을 받들고 내려와 어머니를 목욕시켜 주었다. 천제가 내려와 하늘의 음악을 연주하여 징재인 안씨 방에 베풀어놓았다. (P.107)

 

도가에서 숭상하는 노자 또한 그만둘 리가 없다. <도덕경> 저술과 관련한 신화화 사례(P.121)를 보자. 부제국에서 선서에 신통한 두 사람이 노자를 도와 저술 작업에 참여하여 골수와 피로 먹물과 등불 기름을 대신하였고, 경전이 완성되자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도덕경>이 최초에는 10만 자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고 하며, 노자가 간소하게 정리해서 5천 자로 줄였다고 하는 점도 기억하자. 서방으로 떠나면서 관윤 윤희의 부탁으로 글을 남겼다는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신화와 전설 속의 제왕과 군주, 성인이 수록한 고사들의 주된 인물임에 반해 가까운 시기의 문인으로는 한나라 유향(P.210)이 유일하다. 이는 지괴소설의 선배에게 바치는 후배의 찬사다. 마찬가지로 소위 중원인을 제외하면 오랑캐로는 유일하게 등장하는 인물이 석호다. 그는 516국 중 후조(後趙)의 황제인데, 짐작하겠지만 폭정과 사치를 일삼은 안 좋은 본보기로 취급된다.

 

소기가 유학자이다 보니 원전의 내용에 본인의 가치관과 부합하지 않은 고사가 많이 있게 마련이다. 편집자는 이에 대해 두 가지로 반응을 보인다. 우선 지나치게 황당무계한 내용의 고사들에 대해서는 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아득히 멀리서 아련히 흘러온 글들은 백가(百家)가 현실과 유리되어 각자 그 기억함을 숭상했을 뿐, 뜻이 깊이 배인 도리는 아니다. (P.63)

 

중원과 외지는 기운부터 달라 이상한 기운이 각기 생겨나 구름과 강물, 초목도 괴이하고 아름다운 여러 형태를 취하나 서적들을 살펴보면 그 유형이 동일하다. 지역이 멀고 변형이 심해서가 아니라 허망하고 괴탄함에 웃을 것이다. 널리 두루 살려 신령하고 기이함이 증험되길 바란다. (P.321)

 

그리고 유가적 가치에 부합하는 고사를 선별하거나 내용을 다듬는다. 주나라 영왕 때 위나라 영공의 악사였던 사연(師涓)이 작곡한 사계를 묘사한 음악에 군주가 미혹되어 정사를 돌보지 않을 지경이 되니 신하가 그 음악이 유해하다고 끊기를 간언하고 임금이 이를 수용하였다는 고사(P.124)를 보면 유가가 지향하는 참된 음악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악사는 부끄러움에 종적을 감추었다고 하는데, 은나라 폭군 주의 악사였던 사연(師延)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음탕한 음악을 연주하였던 고사(P.79)를 함께 비교하면 음악이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건 결국 사람의 마음임을 알 수 있다.

 

일반적 한문 고전 번역본과 비교할 때 산뜻하고 현대적인 인상을 주는데 차별되는 점은 체재에 있다. 번역문과 원문, 주석, 그리고 해설로 이루어지는 게 통상적인데, 여기서는 번역문, 원문 그리고 의미읽기라고 하여 해설과 옮긴이의 감상 및 의견을 한군데 묶어놓았다. 주석은 매우 적어서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고리타분한 고전이 아닌 현대의 젊은 독자층에 다가서기 위한 캐주얼한 접근으로 볼 수 있다. 표제도 원제 앞에 중국 환타지소설의 원조라고 수식구를 넣었듯이. 보다 현실적인 사유인데, 적당한 분량의 한 권으로 편집하기 위한 목적일 텐데 상세한 주석을 넣으면 분량이 대폭 늘어나 두꺼운 학술서적이 될 우려가 있어서이리라.

 

다른 지괴소설집과 비교할 때 별로 중첩되는 내용이 없다는 점, 체재와 서술방식이 역사서와 유사하여 신선하며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점, 기술과 묘사가 세밀하고 낭만적이어서 이야기 자체로서 상대적으로 완결도가 높다는 점, 그리고 편집자의 날카롭고 비판적 평이 추가되어 있다는 점 등에서 이채로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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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기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조충지 지음, 김장환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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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충지의 <술이기>는 위진남북조시대 남제의 대표적인 지괴소설(P.159)이다. 시기적으로는 앞서 읽은 <열이전><수신기>보다는 후대에 지어졌으며, 작품해설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수록된 총 95조의 고사 중 거의 대부분이 다른 책과 중복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은 <수신기>를 시기적으로 보완하는 장점이 있다.

 

초반부의 고사는 신기한 지역을 소개하는 등 박물지 성격을 띠고 있으며, 중반부에 이르러서 비로소 위진남북조시대를 다루고 있는데 대체로 연도와 인물을 명기하고 있어 지괴라기보다는 당해 시기의 비사와 일화를 읽는 기분이다.

 

전대의 지괴소설과 뚜렷이 구별되는 점은 불교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순괴 고사(P.126)처럼 종래의 신선, 선인 및 도사 등도 소수 등장하지만 법사, 부처님, 불경 등에 대한 언급 및 신통력이 더욱 강력하다. 백도유 고사(P.15)에서 자신이 머무는 산에 자리 잡은 법사를 쫓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산신은 방법이 통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그 산을 법사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슬퍼하며 다른 지역으로 떠나간다. 호비지 고사(P.89)를 보면 소란을 피우는 귀신에게 맞대응한 게 무례했다고 지적받고 부처에게 귀의해야 무사할 수 있다고 한다. 나여의 부인 비씨 고사(P.155)에서 죽을병에 걸린 비씨는 오랫동안 법화경을 열심히 독송하였으니 부처의 가호로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신령과 부처가 공존하는 현실 속에서 도교보다 불교의 위력이 큼을 가시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불법의 능력과 정당성을 알리려는 의도가 드러난다.

 

산신이 직접 그를 찾아가서 말했다.

법사님의 위덕이 이토록 높으시니 지금 이 산을 당신께 드리고 이 제자는 달리 의탁할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백도유, P.15)

 

이 책은 착한 귀신과 올바른 저승 세계에 대한 묘사가 많지 않다. 황묘 고사(P.60)를 보면 신령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황묘에게 벌을 주는 것은 그렇다 해도 괜히 30명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게 만들고 황묘는 목숨을 부지하게 하는 신령의 처사는 납득 불가이다. 진민 고사(P.133)처럼 진민에게만 피해를 주는 게 그나마 깔끔한 조처라는 생각이다. 어쨌든 자신에 대한 약속 위반자에게 무자비한 벌칙을 내리는 궁정묘 신령은 사람들과 가까이하기 어려운 존재다. 이런 귀신이라면 굴복하기보다는 맞서 싸우고 물리치는 자세도 나쁘지 않다. 부양 사람 왕 아무개 고사(P.68)에서 귀신 산소는 자신을 풀어달라고 애원하고 이름을 알려달라고 간청해도 소용없이 불에 타죽는다. 잡귀의 출몰을 목도하고 자신을 위협하는 귀신을 끝내 물리친 박소지 고사(P.78)도 귀신에 겁먹지 않고 의연함을 잃지 않는 전형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저승은 이승과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생전의 잘못이 드러나고 처벌받는 사후세계라면 응당 엄정해야 하겠지만, 비경백 고사(P.99)에 따르면 저승사자도 인정과 대접에 약한 면모를 보이며, 뇌물도 유효적절하게 통하는 모습(영천 사람 유 아무개 고사, P.102)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이승에서 유능한 관리를 저승 세계도 탐을 내 관리로 데려가고자 하는 대목(조종지 고사, P.83)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과 귀신 간에는 엄격한 구별이 있으니 유막의 연인이었던 죽은 여인 곽응의 대답을 통해 알게 한다.

 

사람과 귀신은 길이 다르니 날 생각하는 수고는 하지 마세요.” (유막, P.136)

 

귀신, 사람, 동물 구분할 것 없이 자신에게 잘해주는 상대에게 선을, 괴롭히는 상대에게 악을 베풀고자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충견인 황이 고사(P.23)가 전자라면, 석현도 고사(P.71)와 오고지 고사(P.146)는 후자의 사례다. 잡아먹힌 새끼를 그리워하며 울부짖는 어미 개의 모성애를 생각하며 석현도의 병이 나을 수 없는 까닭을 짐작게 하며, 새끼 밴 어미 원숭이를 잔혹하게 죽인 오고지가 신령의 노여움을 사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사필귀정이다. 호랑이가 된 태수(봉소 고사, P.20)에서 봉사군이 호랑이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어쨌든 봉소에 대한 평가가 세인에게 좋지 않았음을 당시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봉사군은 되지 말지니, 살아서는 백성을 다스리지 않고 죽어서는 백성을 잡아먹는다.” (봉소, P.20)

 

마지막으로 흐뭇하고 긍정적인 내용도 하나 덧붙인다면, 비견인 고사(P.21)가 그러하다. 비견인(比肩人)은 비익조와 연리지와 같은 의미로 애정 깊은 부부를 지칭한다.

 

이 책이 더욱 특징적으로 인식되는 사유는 지은이의 독특한 배경 때문이다. 조충지는 단순한 문인이 아니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그는 당대의 저명한 수학자, 천문학자, 과학자이자 발명가라고 한다. 원주율을 소수점 7자리 이하까지 계산하고 전문 수학 서적을 썼으며, 새로운 역법인 대명력을 제작하였고, 지남거(나침반 수레), 수대마(물레방아), 천리선(쾌속선) 등을 발명하였다고 하니 보통 능력자가 아니다. 이러한 작자가 지괴 작품을 지었으니 허투루 넘길 게 아니다. 귀신 세계의 실존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바탕에 깔린 게 아니었을까?

 

당시에는 대체로 명계(冥界)와 인간 세계가 비록 그 존재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사람이나 귀신이 모두 실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이한 일을 서술하는 것과 인간세계의 일상사를 기록하는 것에 대해서 진실과 허망함의 구별이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P.168)

 

인용한 루쉰의 발언처럼 당대인들은 귀신 세계 또는 저승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를 유치하고 야만적이며 비이성적이라고 매도할 수 없다. 현대의 우리도 꿈과 환상, 이성과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많은 영역을 알고 있지 않은가. 차라리 그네들의 생각을 그대로 인정할 때 우리가 위진남북조시대 지괴소설의 참된 즐거움과 매력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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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이전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조비 지음, 김장환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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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수록한 내용보다도 책 자체가 흥미를 끈다. 실린 고사의 수도 많지 않고 그나마 대체로 짤막한 이야기라서 후대의 것과 비교하면 부족한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위진남북조 시대 최초의 지괴소설집이라는 문학사적 의의를 참작하면 납득할 만하다. 게다가 내용 자체도 별다른 꾸밈이나 과장 없이 진솔하게 사건을 전달하고 있어 오히려 질박한 감흥을 준다. 지은이도 유명한 조조의 아들인 조비다. 동생을 괴롭히는 악역 군주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조조와 함께 당대의 유명한 문인이다. 반대 의견도 있는데, <박물지>로 유명한 장화라는 설도 있다. 옮긴이의 의견에 따르면 원작은 조비이고, 장화가 속작한 걸로 추정할 수 있다.

 

<열이전>에는 귀신, 요괴, 신선, 도술, 저승, 유혼(幽婚), 기이한 물건, 재생, 변신, 민간전설 등의 다양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위진남북조 지괴소설의 전형적인 내용이 된다. (P.107)

 

기억에 남는 몇 편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요괴가 등장하는 고사인데, 초왕의 딸을 치료한 노소천 고사(P.16)에서 뱀 요괴가 노소천에게 대접한 음식과 돈은 모두 관청에서 훔친 것임이 나중에 드러난다. 노소천이 뱀 요괴의 제안에 응하였다면 골치 아프게 되었을 것이다.

 

주류를 이루는 유형은 귀신과 저승이 나오는 고사들이다. 죽어서 누명을 쓰자 귀신으로 나타나 자신의 누명을 벗긴 선우기 고사(P.23)는 오죽 억울했으면 대낮에 귀신이 나타나서 장부를 확인하고 상소를 올릴까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장제의 아들 고사(P.49)<수신기>에도 나온 이야기인데, 저승에서도 지위 고하가 있고, 청탁의 효력이 여전하여 저승도 이승과 별 차이가 없음을 알게 해준다. 역시 사람들의 상상력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유명한 담생 고사(P.77)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부인이 마른 뼈만 있는 하체로 어떻게 부부 관계를 하였고 아들을 낳았는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우연히 신계에 들어가고 마침내 죽은 아내를 되살린 채지 고사 (P.81)도 흥미롭다.

 

신선에 대한 호기심은 당대에 널리 퍼진 듯하다. 비장방 고사가 3, 진절방 고사가 2, 채경 고사 2편이 실려있다. 초월적 존재로서 신선보다는 인간적 면모에 가까운 선인들인데, 비장방 같은 경우 주석에 따르면 스스로 신선이 된 것이 아니라 신선의 부적을 얻어서 귀신을 제압했다고 한다. 다만 나중에 부적을 잃어버려 귀신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하니 딱하다.

 

사슴으로 변한 팽씨 고사(P.63)에서 아버지는 갑자기 땅에 쓰러지더니 문득 흰 사슴으로 변신한다. 아버지는 무슨 까닭으로 사슴으로 변신했을까? 사슴으로 변신은 본인의 의사였을까? 아버지에게 이미 사슴의 본성이 내재한 것은 아니었을까? 사슴으로 변한 아버지는 행복하였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이야기다.

 

생사의 일은 쉽게 말할 수 없고, 귀신의 일은 사람이 알 바가 아니다.” (P.19)

 

죽었다가 되살아난 공손달의 혼령이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인간은 귀신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 산자는 이승에서, 죽은자는 저승에서 각기 맡은 소임을 수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죽은자에게 정성을 다하고 떳떳한 마음을 지닌 포선과 자손의 영달 고사(P.31)은 이것을 보여준다. 쥐가 아무리 왕주남에게 저주를 반복해서 말해도 미동도 하지 않자 결국 쥐 자신이 거꾸러져 죽는 왕주남 고사(P.92)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이 중요함을 알려준다.

 

<열이전>은 위진남북조 최초의 지괴소설로서 후대 지괴소설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동진 간보의 <수신기>. 현재 <수신기>에는 <열이전>의 고사 25조가 채록되어 있는데, 일부 고사는 그대로 전록되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본래 고사보다 훨씬 편폭이 길고 구성이 짜임새 있으며 문학성이 높게 묘사되어 있다. (P.108)

 

이 책의 원서는 일찌감치 잃어버렸고, 현재는 다른 책에서 실린 이야기를 수집하여 재구성된 것으로 총 51조만 전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 책 자체만의 독자적인 이야기는 없으며 다른 책과 중첩되는 이야기들이다. 주로 <태평광기>가 출전이며, 그 외 앞서 읽은 <수신기><열선전> 등이 언급된다. 특히 <수신기><열이전>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데, 확실히 <수신기>에 실린 내용이 이야기로서 세부적 구성과 완결성을 지니고 있어 지괴의 발전을 비교해 볼 수 있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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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기 - 신화란 무엇인가 인문플러스 동양고전 100선
간보 지음, 임대근 외 옮김 / 동아일보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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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위진남북조시대의 대표적인 지괴소설집이다. 지괴 설화가 다루고 있는 귀신, 신선, 도사, 초자연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거의 모든 유형의 이야기가 이 책에 수록되어 있다. 원래 <수신기> 전체를 다 읽어볼 의도는 없었고, <수신기, 괴담의 문화사> 정도의 개략과 해설로 만족하려는 생각이었다. 막상 그 책을 읽고 나니 전체 이야기가 궁금해져 다소간 반복적이고 지루한 내용이 있을 것을 각오하고 결국 이 책을 펼치게 되었다. 시중에는 <수신기>의 네 가지 번역본이 나와 있다. 전병구(자유문고), 임동석(동문선/동서문화사), 도경일(세계사), 그리고 이 책이다. 전병구 판과 도경일 판은 나온 지 오래되었고, 임동석(동서문화사) 판은 이야기 내용보다는 원문과 주석 등 한문 번역과 해석에 관심 있는 이에게 적합한 유형으로 판단되어 이 책을 선택하였다. 이 책은 원문을 수록하지 않고 있으며, <수신기> 내용 자체를 현대 독자들에게 흥미롭게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초심자를 배려하고 있다.

 

이 책의 이야기는 신기한 일이 허황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말해준다. (P.9)

 

당대의 저명한 유학자가 신기한 이야기 모음’(P.5) 책을 만들어 낸 까닭에 대해서는 <서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간보는 기이하고 신기한 이야기에 열린 자세를 보인다. 신기한 일이 반드시 터무니없고 근거 없는 것으로 일방적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견해다. 당시의 상식과 문명 수준에서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먼 훗날 현실화하고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사례는 역사적으로 적지 않다. 따라서 지은이가 이 책에 실린 모든 이야기를 개연성이 있다고 믿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완전히 허무맹랑하다고 간주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그 당시 식자층의 일반적 견해에 해당할 것이다.

 

20권에 기록한 수백 편의 이야기는 역사적 인물과 관련된 일화도 제법 많다. 조조와 좌자(P.31), 조조와 원소(P.441) 설화가 그러하다. 죽은 원소가 도삭군이라는 신령이 되었는데, 조조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보면 살아서와 죽어서 모두 조조에게 패배하는 원소가 딱할 지경이다. 공자의 이야기도 있다. 공자가 사후 수백 년 뒤에 일어날 일을 상세하게 예언(P.70, P.231)하는 사례는 공자의 권위에 기대려는 마음일 것이다. 괴력난신을 언급하지 않은 공자가 설화에서 천연덕스럽게 귀신과 도깨비의 이치를 설파하는 대목(P.318, P.488)은 일종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육축(六畜)과 거북, , 물고기, 자라, , 나무 등은 오래되면 신령이 붙어 요괴로 변한다. 그래서 오유(五酉)라고 했다. 오유는 오행의 다섯 방위마다 그에 상응하는 요괴가 있다는 것이다. ()는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P.488)

 

신기한 자연현상은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일식과 월식을 군주의 품행에 결부시킨다거나 가뭄과 폭우에 대해 임금 또는 지방관이 하늘에 빌거나 하는 등, 사람 또는 가축이 기형을 출산하거나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고 남자와 여자의 성이 바뀌는 사례의 함의를 찾으려는 노력 등은 그것이 자연이 인간에게 보여주려는 어떤 행동에 대한 징조로 해석하고 있음을 이 책의 이야기는 잘 보여준다. 자연과 인간은 별개가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관된 존재이어서다. 따라서 자연의 변괴는 인간 세상의 재앙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니 어찌 허투루 넘길 수 있겠는가. 또한 남녀관계, 신분질서, 하다못해 패션에 있어서 인간 사회의 기존 질서에 어긋나는 현상도 역시 재앙을 가져온다. 이것이 당대인의 전통적 해석이다.

 

여러 제후와 패악한 수장들이 천자의 권위를 침탈하거나 나눠 가지면 수말이 망아지를 낳는 해괴한 일이 일어난다. 위에 천자가 없고 제후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면 말이 사람을 낳는 괴변이 생긴다.” (P.149)

 

음기가 극에 달해 양기로 변했으니, 이는 신분이 낮은 이가 높은 자리에 오를 징조다.”

그 뒤 조조가 벼슬도 없는 평범한 신분에서 시작해 훗날 결국 왕업을 일으켰다. (P.184)

 

이 책에서 소개하는 거의 모든 이야기는 시대와 등장인물의 이름을 밝히고 있어 상당한 역사적 개연성을 보여준다. 얼핏 읽으면 사실로 받아들이기에 십상이다. 게다가 등장인물은 대부분 역사적 실존 인물이니 우리가 잘 모르는 숨은 일화로 생각하기 딱 좋다. 점을 잘 치는 순우지와 곽박의 고사라든지 유명한 의사인 화타의 고사가 그러하다. 장자문, 즉 장후가 등장하는 5’의 여러 편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박물지>의 저자인 장화에게 도전한 천년 묵은 여우의 비참한 최후(P.460)는 당대에 박학다식으로 유명한 장화의 존재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수신기>에 실린 모든 이야기를 하나하나 언급하거나 소개할 수 없다. 압도적인 분량을 차지하는 게 귀신이 등장하는 소재를 다루고 있는 이야기다. 귀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눈앞의 상대방이 귀신임을 알게 되는 이야기는 귀신의 존재 여부가 과거부터 논란거리였음을 알 수 있다. 참으로 다양한 종류의 귀신이 온갖 사물에 달라붙어 있음을 볼 때 애니미즘의 반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대개의 귀신이 인간을 괴롭히거나 해악을 끼치지만, 간혹 인간에게 도움을 준다든가 하는 예도 있고 때로는 인간이 귀신을 다스리거나 심지어 잡아서 팔아먹는 고사도 있다. 인간과 귀신 간 애틋하거나 아쉬운 사랑 이야기도 전한다. 담생의 고사는 대표적이며, 특히 귀신과 결혼하는 노충(P.419) 이야기는 한편의 잘 구성된 서사를 보여준다. 인간과 귀신의 인연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다른데, 결혼하여 해로가 가능한 경우 결혼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는 사례 아니면 인연을 맺었지만 3일 밤낮이 시한인 경우와 같이 다양하다. 주목할 점은 남자 인간과 여자 귀신만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남자들의 은밀한 욕망과 판타지를 반영한 이야기라고 하겠다. 반대의 사례는 거의 없지만 있더라도 귀신인 줄 알지 못한 채 이루어지며 나중에 이걸 알게 된 여자 인간은 수치심으로 목숨을 끊는 결말로 이어진다. 남성 중심 사회의 전통 봉건적 사고관을 확인할 수 있다.

 

귀신은 육신이 없고 인간을 능가하는 능력을 가지는 게 일반적이지만 자신의 억울함을 이승의 지방관에게 호소하는 귀신도 있는 걸 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종요의 고사(P.426)를 보면 피 흘리는 귀신도 나타나니 사람과 귀신의 경계가 모호하기조차 하다.

 

오래 묵은 동물이 사람으로 변신한다든가 신선과 귀신의 존재, 꿈과 백일몽, 죽은 사람의 부활, 기이한 자연현상, 은혜 갚은 동물 등 세인의 호기심을 끌 만한 온갖 소재의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도 듣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는 건 신기함에 끌리는 것이 인간 본성의 일부임을 알려준다.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인과응보라는 공통점은 있다. 사람, 동물, 귀신 등에 대해 친절과 선의를 베풀면 보답을 받게 된다. 주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개 이야기, 단장(斷腸) 고사를 낳게 한 어미 원숭이와 새끼 원숭이 이야기 등이 그러하다. 이 책에 실린 많은 고사를 통해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주위의 다양한 존재들을 인정하고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자 하는 겸양의 마음가짐을 지닐 수 있다.

 

억울하게 죽어 나무가 된 채 가지와 뿌리가 엉키는 상사수(相思樹)가 된 한빙 부부 고사,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자신의 목을 바친 아들의 처절함이 돋보이는 간장과 막야 고사, 당대의 가치관으로서는 절대적인 하늘도 감동할 만한 효자, 효부 이야기들은 언제나 마음 한구석을 찡하게 만든다.

 

당대에는 우주 현상을 음양오행설로 이해하던 시기였다. 음과 양의 두 정기는 오행의 이치에 따라 형상을 달리한다. , 하늘, 인간, 남자는 양이며, , , 귀신, 여자는 음에 해당한다. 만물의 형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변화한다. 당대인들이 귀신에 대해 긍정적인 연유도 이것에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달이 차면 기울고, 물이 차면 넘치듯이 한쪽 정기가 극에 달하면 다른 쪽으로 넘어갈 수 있으므로. 이렇게 보면 인간과 귀신, 인간과 동물 등은 전혀 다른 존재가 아니라 언제든 다른 형상으로 변화할 수 있는 동질성을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인간 아닌 다른 존재들에게 선의를 가지고 존중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중국 신화와 관련된 고사도 눈에 띄는데, 복희와 여와에게는 용납되었던 남매혼이 인정되지 않아 비극으로 마친 몽쌍씨(蒙雙氏) 고사(P.353)가 안타깝다. 반호 고사는 유명한데, 이 책에서는 반호의 자식들이 만이(蠻夷)임을 밝히고 있다. 그들은 결국 개의 자손이므로 부정적 인식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동명왕 고사(P.356)가 소개되어 있어 우리로서는 흥미로운 대목도 있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지은이의 순전한 창작이 아니다. 이런저런 경로로 듣거나 읽은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다른 설화집이나 지괴소설집의 내용과 중첩되는 이야기도 제법 있을 것이다. 차이점은 지은이가 단순히 이야기 기록자에 그치지 않고 뼈대를 가다듬고 과도하지 않은 수준에서 살을 붙여 훨씬 이야기답게 정리한 것처럼 보이는 대목이 여럿 있다는 데 있다. 아마 이 책 정도라면 위진남북조시대 지괴소설의 진수를 감상하기에 충분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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