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이닝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욘 포세 읽기의 마지막 책이다. 최신작이자 최신 번역작이면서 이때 아니면 앞으로 다시 읽을 기회가 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집어 든다. 원서 제목 <Kvitleik>순백색을 가리킨다고 한다. 번역본 제목 <샤이닝>은 직역과 의역 중간쯤에 해당한다. 표제에 욘 포세 장편소설이라고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는데, 여기서 장편소설이란 자구가 내가 아는 의미와 같은 개념인지 궁금하다. 이 책은 120면이 채 되지 않는데, 소설 본문은 80면 미만이며, 나머지는 부록이다.

 

이 소설의 플롯은 매우 단순하다. 한 남자가 어스름한 저녁에 외딴 숲길로 차를 몰다가 숲속에 갇힌다. 그는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찾아 나서 눈 내리는 와중에 숲속으로 계속 걸어들어가고 거기서 순백색의 형체와 마주한다. 작가는 한 남자의 죽음을 단순하고 함축적인 문장을 표현한다. 작가 특유의 압축과 반복이 작품의 긴장감과 심화 효과를 가져오지만 결말이 명료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작가가 이 짤막한 소설에서 그리고자 하는 바는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젊은 남자인 화자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시골 도로를 배회하고 갈림길에서 좌우를 번갈아 갈아타다 막다른 숲길로 들어온다. 그를 압도한 심리 상태는 지루함과 공허함이다. 그가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알아줄 이 하나 없는 외로운 사람이며, 부모와도 만난 지 오래된 사이임을 독자는 소설 속에서 알게 된다.

 

나를 덮친 것은 지루함이었다, 평소 지루함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내가 지루함에 압도당한 것이다. 내가 하려고 한 어떤 일들도 내게 기쁨을 주지 못했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무언가를 했을 뿐이다. (P.7)

 

화자는 언제든 선택을 되돌릴 기회가 있었음에도 스스로 극단의 길로 나아간다. 숲길 도중에 되돌릴 수 있지만 하지 않았고, 안전하고 따뜻한 차 안에 머물 수 있었음에도 굳이 눈 오는 저녁에 차 밖으로 나선다. 상식적이라면 구원을 청하러 숲 밖으로 나가야 함에도 그는 오히려 숲속으로 들어간다. 뭔가 행동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앉아 있든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 차가운 바위에 앉아 쉬려는 유혹에 굴복한다.

 

화자가 숲속에서 마주치는 존재들, 즉 부모님, 검은색 양복 남자, 순백색의 형체가 실체인지 환상인지 화자는 판단하지 못한다. 그에게 이것들은 실체이자 환상을 오가는 존재이다. 그것은 늦가을, 북구의, 눈 내리는, 저녁의, 숲속이라는 올바른 행동과 판단을 내리기에는 불리한 상황에서 화자의 신체와 정신 상태마저 오락가락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정말 화자의 부모님이 맞기나 한 건지 알 수 없다. 화자는 초반에 목소리가 전혀 다르다고 부모님을 인정하지 않다가 문득 당연한 듯 받아들인다. 나중에 그는 자신이 한 번도 어머니와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다고 토로한다.

 

나는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 아무도 나를 저지할 수 없다. 아무도. 그런데 나는 왜 여기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가. 나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P.67)

 

화자는 아니라고 일견 부인하지만 그의 언행은 내심 죽음을 맞이하기를 고대한다. 죽음을 향한 충동과 이에 대한 두려움이 반복적으로 그를 압도한다. 그가 움직였다가 멍하니 서 있기를 되풀이하는 것 역시 이에 기인한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죽음에 대한 충동을 억누르지 못한다. 그는 이대로라면 죽음을 면하지 못할 줄 알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죽음의 수렁으로 나아간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와 순백색의 형체는 과연 무엇일까. 괜히 신비하고 환상적이고 상징적으로 해석을 하고 싶지 않다. 그저 단순하게 저승사자와 죽음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지 않는가.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는 화자의 손을 잡고 죽음으로 친절하게 안내하는 역할이다. 후반부에서 화자는 자신이 맨발임을 깨닫는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도, 그의 부모님도 모두 맨발이다.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이 단계에서 이들은 모두 육신의 존재가 아님을 독자에게 보여주려는 설정 아니겠는가.

 

그것은 완전히 순백색의 알 수 없는 형체다. 순백색의 형체.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그 윤곽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난다. 밝고 하얀 형체. 반짝이는 순백색의 형체. (P.27)

 

죽음을 색으로 구체화할 때 대체로 하얀색과 검정색으로 양분할 수 있다. 영원한 침묵과 소멸이라고 볼 때 검정색이 지배적이지만, 성인과 천사는 또한 눈부신 흰색이 아니던가. 거기엔 육신의 소멸을 초월하는 영혼의 존재와 불멸성에 대한 믿음이 상존한다. 기독교적 가치관은 이에 대해 더더욱 확실하다. 죽음이란 확실히 두려운 현상이지만, 죽음을 자연스럽고 친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인식도 분명 존재한다. 작가는 화자가 목도한 현상과 죽음을 통해 이것을 말하고자 함인가. 죽음은 단지 소멸이 아니라 세계와 하나가 된다는 것임을.

 

반짝인다는 말, 순백색이라는 말, 빛을 발한다는 말의 의미도 사라진 것 같다, 마치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진 것 같다, 의미라는 것, 그렇다, 의미라는 것 자체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모든 것은 단지 거기 있을 뿐이고, 그것들은 모두 의미 그 자체다, (P.79-80)

 

욘 포세의 기존 작품들의 전형적인 특징은 표현의 압축과 무서울 정도의 반복이다. 기법상으로는 마침표의 거의 부재와 쉼표로의 대치가 두드러진다. 이 점에서 <샤이닝>은 비교적 온건하다. 짧은 분량 탓일 수도 있겠지만 종전의 강박적일 정도의 집착이 여기서는 많이 온화해졌음을 보게 된다.

 

부록으로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연설문>을 수록하였다. 작가는 이 연설에서 자기 작품의 큰 특징인 희곡에서의 사이, 소설의 반복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목적을 지향하고 있음을 천명한다. 문장과 문장 사이, 말과 말 사이의 공간에서 드러나는 실체보다 더욱 커다란 드러나지 않는 실체, 즉 침묵의 의미를. 그리고 작가가 하나의 흐름, 하나의 움직임으로 글이 계속 이어지기를 원하기에 마침표를 사용하지 않음도 알려준다. 이 연설문은 초심자에게 생경할 수도 있는 욘 포세의 독특한 문학세계에 접근하는 비밀 코드와 같다. 아디오스, 욘 포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칸초니에레 - 나남소네트 2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이상엽 옮김 / 나남출판 / 200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페트라르카는 <신곡>을 쓴 단테의 후배이자, <데카메론> 작가인 보카치오의 동년배 시인이다. 중세 말 르네상스 초기 인물의 시가 현대에까지 절창으로서 지속적인 생명력을 지니고 있음은 놀라운 일이다. 이 책은 페트라르카 탄생 700주년을 기념하여 시집 <칸초니에레> 100편의 소네트를 발췌하여 번역하였다.

 

<칸초니에레>366편의 시로 이루어졌는데, 몇 가지 유형의 시도 있지만 대다수를 차지한 시는 소네트다. 소네트 하면 셰익스피어가 떠오르지만, 기실 소네트 형식을 완성한 인물은 바로 페트라르카라고 한다. 4, 4, 3, 3행의 총 14행 형식의 정형시인 소네트의 참모습은 번역시로는 알기 어렵다. 역시나 원문을 봐야 할 테지만 이러한 한계를 유념하고라도 페트라르카에 도전한다.

 

366편은 내용상 서시와 365편의 본편으로 나눌 수 있어 구성상 1년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책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1부와 2부의 구성이 시인이 연모하던 라우라의 삶과 죽음을 경계로 구분한 점도 있어 시인이 시집 구성에 만전을 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페트라르카는 죽음을 목전에 둔 평생을 이 시집을 다듬는 데 틈틈이 할애했다고 하니 <칸초니에레>야말로 페트라르카의 삶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대의 아름다운 두 눈이 나를 사로잡았으니, / 여인이여, 나는 사랑의 포로가 되어, 정신을 잃고 말았다오. (P.36, 3)

 

시인의 눈과 마음을 한 번에 사로잡은 여성은 라우라(Laura). 이 시집은 그녀를 향한 시인의 구구절절한 사랑의 심정을 오롯이 바치고 있다. 시인에게 라우라는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닮은꼴이자, 영원의 여성상이라는 점에서 파우스트와 그레트헨, 베르테르와 샤를로테와도 멀지 않다. 다만 라우라에 대한 시인의 사랑은 쌍방보다는 일방에 가깝다고 해야 하리라. 작중에서 라우라가 시인의 존재를 진지하게 알고 교감을 가졌다는 어떠한 추측도 어렵다.

 

지상에서 대자연과 하늘을 보고자 하는 자는 / 가능한 한 와서 그녀를 찬미하시라, / 내 두 눈에만이 아니라, 미덕을 괘념치 않는 / 눈 먼 세상을 위해 홀로 태양인 그녀를, (P.190, 248)

 

라우라는 자연의 경이로서 시인에 의해 모든 여성 중 최고의 지위에 오르며, 사후 세계에서마저 그곳의 감탄과 찬사를 불러일으키는 극상의 존재다. 그녀의 외모, , 행동 등 일체의 모든 것이 시인에게는 아름답고 사랑스럽기에 그지없다. 라우라는 작중에서 여러 시적 표현으로 변용되는데, 월계수(lauro), 바람(l’aura), 라우레타 등이 그러하다. 특히 월계수는 용법을 확장하여 아폴로 신까지 연계하여 활용한다.

 

나는 고통을 먹고, 울면서 웃는다, / 하니 죽음과 생명이 내게는 똑같이 기쁘지 않네, / 여인이여, 당신 때문에, 나는 이 처지에 있다오. (P.145, 134)

 

사랑은 아름답고 기쁘고 행복한 감정인 동시에 슬픔과 고통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사랑하는 연인이 자신의 마음을 몰라 주거나 무심하게 군다면 이로 인한 상처는 한층 깊은 법이다. 이 책에서 시인은 라우라를 때로 적이라 부르며 투정을 부리는 듯한 어감이지만,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에 극단의 사랑이 증오로 변질되는 경우는 역사에서 간혹 볼 수 있다.

 

시집 전반부의 어느 시편을 들추어도 라우라를 그리는 시인의 애절한 심정을 절절히 느낄 수 있다. 그것이 비록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의 어쩔 수 없는 한탄의 반복일지라도. 그럼에도 독자가 지루함과 포만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표현의 다채로움, 감정의 유동적 변화 등이 적절한 시구의 배치와 잘 어우러져 있기에 시로 쓴 내밀한 일기랄까 편지글을 읽는 경험을 독자가 갖게끔 해서이다.

 

이 시집이 라우라와 사랑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비록 수효는 적더라도 다른 제재의 시작품도 이따금 볼 수 있다. 시인 치노의 죽음을 애달파하거나(92) 특히 당대 교황청의 타락을 비판하는 시편(136, 138)이 눈에 띈다.

 

시인의 삶과 창작의 원동력인 라우라가 세상을 떠나자 이후의 소네트는 그녀를 향한 애탄과 찬미, 그리고 회상이 주 제재로 바뀐다. 이승을 떠나 저승에 가버린 라우라, 생전에 그녀는 시인의 사랑을 몰라준 잔인하고 인색한 주인’(320)이지만 그로 인해 행과 불행의 모든 감정을 경험하게 된 시인은 눈물 속에서 그녀의 천상에서의 사후를 기원하고 축복한다. 이 모든 것은 오로지 라우라를 향한 시인의 순수하고 헌신적이며 필생의 사랑이기에 가능하다.

 

이제 여기가 내 사랑 노래의 끝이로다, / 늘 쓰던 재주의 영감이 말라 버렸고, / 나의 체트라는 통곡하네. (P.215, 292)

 

슬픔도 언젠가는 끝이 있는 법, 늙고 지친 시인은 더 이상 펜을 들 수 없다. 시상의 영감이 말라버렸기에. 인생을 달관하고 체념한 시인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니 부끄럽고 창피하다. 한 여성을 향한 사랑에 빠져 신이 부여한 소중한 의무를 소홀히 하였음에. 그는 고해하고 회개한다, 신의 자비를 청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시를 덧붙인다.

 

여러분, 이제 그대들은 산만한 시들 속에서 / 내가 지금과는 다소 다른 사람이었던 시절 / 빗나가던 내 젊디젊은 그 시절에 / 내 가슴을 가득 채우던 그 탄성들을 들으리오. (P.32, 1)

 

시인의 평생에 걸친 사랑의 대상이었던 라우라는 어떠한 여인이었을까. 그가 찬미를 아끼지 않을 만큼 모든 면에서 그렇게 대단한 여인이었는가. 천사와도 같이 완전한 존재인가. 아니면 사랑의 콩깍지에 씌인 것인가. 실제의 라우라와 시인의 라우라가 동일한 인물인가. <칸초니에레>의 라우라는 시인 자신이 빚은 상상 속의 이상형이 아닐까. 그가 부러워하였던 피그말리온의 갈라테이아처럼.

 

기대보다 훨씬 더 깊고 강렬하며 애절하다. 페트라르카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 당분간 페트라르카를 천착하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Neighbour Rosicky kyung Moon Reading Classic 6
Willa Cather 지음, 박윤기 옮김 / 경문사(경문북스)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윌라 캐더의 작품들을 거의 다 읽었지만, 애매한 책이 한 권 눈에 들어왔다. 표제는 <Neighbour Rosicky>인데, 국내 도서로 분류되어 있고 옮긴이 이름도 있다. 영어독해 교재인 듯싶은데 관련 정보는 찾아볼 수 없다. 결국 도서관에 가서 직접 확인해 보았더니 영어 원문과 번역문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어쨌든 윌라 캐더의 미독서 작품이므로 마무리하는 심정으로 책을 펼친다.

 

원제에도 없는 좋은 이웃을 옮긴이는 굳이 덧붙여 적는다. 사실 이 문구에 짤막한 단편 내지 중편 소설의 핵심이 담겨 있다. 평범한 농부, 가난하지도 부유하지도 않으며, 다섯 아들과 딸 하나를 두고 오순도순 살아가는 노인. 농장 일에 매진하느라 심장에 무리가 가서 의사한테 경고를 들은 체코 이민자 출신의 노인. 작가는 그를 좋은 이웃이라고 부른다. 어디 작가뿐인가, 의사 에드 벌레이는 그를 이렇게 추억한다.

 

그에게 로시츠키 영감의 삶은 완전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보였다. (P.120)

 

의사의 주의를 받았지만 장남 루돌프를 돕기 위해 무리하게 잡초 제거 작업을 강행하다 쓰러지고 얼마 후 죽음을 맞이하는 로시츠키 영감. 그는 루돌프와 폴리 부부가 농장에서 안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무리를 하게 된다. 도시 출신인 며느리가 시골에 정을 붙이지 못하자 은근슬쩍 챙겨주고 마음을 다독이는 좋은 시아버지, 큰 욕심 부리지 않고 먹고살 만한 수준에서 자신과 주변에 따뜻하게 마음을 쓰는 영감. 돈벌이보다는 올바르고 너그럽게 사는 것을 중시하는 노인네.

 

며느리의 요청으로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 빈곤했던 이야기를 꺼낸다. 런던의 비참한 삶, 뉴욕의 물질적으로 여유롭지만 정신적으로 공허한 삶. 그가 멀리 서부 평원으로 이주한 이유가 비로소 밝혀진다.

 

대도시는 건축물을 지으면서 사람들을 대지로부터 격리시키고, 사방을 시멘트로 처발라 땅과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시키고 있군. (P.92)

 

도시는 죽은 자들이 사는 곳이었고, 망각된 자들이 사는 곳이었고, “버려진 자들이 사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사방이 열려져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었고, (P.119)

 

여러 사람이 로시츠키 영감과 작가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다. 도시는 도시 나름대로, 시골은 시골 나름대로 장단점을 지닌다고. 하지만 적어도 작가와 영감은 그렇게 받아들인다. 대지에 뿌리내리는 삶이 가장 건강하고 튼튼한 삶의 모습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로시츠키 영감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농장 옆 무덤에서 가족과 이웃의 삶을 함께 호흡하고 먼저 떠난 낯익은 친구들과 땅속에서 편안한 사후를 누릴 것을 기대한다.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은근하며 따스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소설을 읽으면 괜스레 마음이 느긋해지고 기분이 흐뭇해진다. 작가는 굳이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담담하게 로시츠키 영감의 일상을 묘사하고 그의 생각을 기술하면 그 자체로 충분할 뿐이다. 그럼에도 독자는 웅변과 화려한 수사를 능가하는 기쁨과 여운을 느낄 수 있다. 모든 게 좋은 이웃, 로시츠키 영감 덕분이다. 그리고 그의 세상과 삶을 사랑하는 방식 덕분이기도 하다. 며느리 폴리가 시아버지를 향한 호칭이 어르신에서 아버님으로 바뀐다든지, 의사 에드가 영감의 심장 이상을 진단하고 착잡한 심정에 사로잡힌다든지 하는 게 이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로시츠키 영감의 사람을 사랑하는 특별한 재능, 이를테면 음악이나 색상에 대한 감식력과 같은 타고난 능력이리라. 시아버지의 사랑은 은근한 것이지, 유별나게 도드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존재하는 것이었다. (P.116)

 

원문이 약 70, 번역문이 약 50면을 차지한다. 잠시 원문을 읽어봤는데, 영어독해를 위한 각주와 설명이 상세하게 달려 있다. 확실히 번역문과는 다른 뉘앙스를 보이는데, 작가는 로시츠키 영감이 원어민이 아님과, 대초원 시골 지역임을 어투와 어휘에서 잘 나타낸다. 문장 자체도 아주 어려운 편이 아니라서 학습 목적으로 접근해도 나쁘지 않다. 서두의 작가 소개와 로시츠키 영감의 공감적 사랑이라는 제목의 작품 해설도 유익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을 통해 작가 한강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이후 한강의 책들을 몇 권 집중적으로 읽었다. 동화, 에세이, 시를 제외하고 본격 소설만 꼽자면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여수의 사랑>, <소년이 온다>. 한동안 시들하다가 다시 읽을 생각에 안 읽은 책들을 중고 도서로 차근차근 준비하던 즈음 한강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분명 크게 기뻐할 소식이지만 나만의 숨겨둔 애호 작가가 사라지는 서운함도 어찌할 수 없다.

 

어찌 되었든 금년도 노벨문학상 작가 독서를 시작한다. 발표 연대 역순으로 첫 번째가 <작별하지 않는다>. <소년이 온다>가 광주 민주화 항쟁을 제재로 하였다면, 이 소설은 제주 4.3 사건을 제재로 삼는다. 두 편 모두 우리 현대사의 묵직한 아픔을 다루고 있으며, 동시에 정치적으로 이념적으로 예민한 사안임에도 작가의 용기를 높이 사고 싶다.

 

<소년이 온다>와 달리 여기서 작가는 직접 사건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지 않는다. 화자 경하와, 친구 인선은 아픔을 겪은 당사자가 아니다. 인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당대의 참상을 겪은 인물이다. 작가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이것이 4.3 사건을 다루고 있음을 사전 지식 없는 독자라면 한동안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다. 심지어 사건에 대한 직접적 언급조차도 작품이 한참 전개된 후에야 비로소 기술된다.

 

홀연히 제주로 낙향한 인선은 병든 노모를 돌보면서 점차로 사건의 세세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하자.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상한 언행의 근원이 고문과 고통의 산물임을 인선이 깨닫게 되었다 하자. 이 모든 것이 인선에게는 깊은 충격과 각성을 주었음은 어쩌면 당연하다. 여기서 우리 독자는 경하를 의아하게 여긴다. 소설가인 듯한데, 광주 항쟁의 여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며 세상과의 말 그대로 단절을 시도하기도 한 그는 작가 한강의 분신인가.

 

한강의 문체상 특징으로 시적 산문이라는 표현을 쓴다. 엄밀하고 상세한 사실적 묘사는 작가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다. 시적 여운과 울림, 그리고 압축과 생략을 통해 작가는 산문 문체의 고유한 개인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그에게 있어 사회적, 역사적 사건은 자체로서 그대로 작가에게 투영되지 않는다. 개인적 체현이라는 필터를 거치기에 거대한 스케일의 대하소설과 사회소설을 작가에게 기대하기 어렵지만, 반면 역사성의 내밀한 개인적 감성을 통해 우리는 사건의 본질에 한층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한다.

 

이 소설을 줄거리 위주의 서사 구조로 보면 맥락이 닿지 않고 애매모호한 점이 많다. 무엇보다 현실과 환상이 교묘하게 배합되어 있어 독자는 무엇이 현실이고 어디까지 환상인지 분명히 구별하기 쉽지 않다. 화자가 묻은 새는 진짜 죽었는지 아니면 화자의 상상에 불과한가. 화자와 더불어 4.3 사건과 그들의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인선은 현실인가 환상인가. 나아가 인선의 부탁을 받고 제주 중산간 외딴집에 찾아온 화자가 보고 듣고 생각한 모든 건 사실인가 아니면 눈 속에 고꾸라져 묻힌 그녀가 실제인가.

 

인선이 혼으로 찾아왔다면 나는 살아 있고, 인선이 살아 있다면 내가 혼으로 찾아온 것일 텐데. 이 뜨거움이 동시에 우리 몸속에 번질 수 있나. (P.194)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광주 민주화 항쟁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의 실체가 드러났고 희생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정도 이루어졌다. 반면 4.3 사건은 여전히 흐릿한 안개 속에 잠겨 있다. 나조차도 그런 게 있었다는 정도만 알 뿐 사건의 실체는 알지 못한다. 작중에서도 군부 치하에서 일체의 진상 파악 노력이 중단되었다고 언급하였듯이 제주도민의 무차별적 학살은 이념 만능주의와 빨갱이를 향한 적대감, 지역감정 등이 결부되어 희대의 사건으로 확산되었다. 학살의 진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글자 그대로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철저한 발본색원?

 

개인의 존엄성은 집단 속에서 사라지기 마련이다. 평시에 한 개인의 죽음은 슬픔과 위엄을 지닌 채 존중되기 마련이지만, 대량의 죽음에서 개개인은 하나의 물건으로 전락하고야 만다. 수많은 해골과 뼈가 제대로 매장되거나 처치 받지 못한 채 낭자하게 굴러다니는 몰골은 인간성의 민낯이 아니겠는가.

 

작가는 이 작품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P.329)이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어마어마한 죽음을 건드리면서 하필 작가는 사랑을 꿈꾸는가. 누구의 무엇을 향한 사랑인가. 상실한 오빠와 가족을 향한 인선 어머니의 필사적 사랑, 데면데면했던 모녀 간의 관계가 어머니의 무한한 고통을 인식하면서 깨닫게 된 인선의 사랑, 이념과 야만으로 타락하여 소실된 인간성의 회복을 외치는 보편적 사랑. 인선은 자신의 마지막 다큐 영화가 아버지를 위한 것도, 역사에 대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다음에 오자, 눈 그치고 다시.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인선이 말했다.

... 다음이 없을 수도 있잖아. (P.307)

 

인선이 필사적으로 프로젝트에 매달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초조하게 매진하도록 만드는가. 정작 제안자인 화자는 덤덤한데 말이다. 진실과 화해할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기에, 지금 이때가 아니면 다음을 기약할 수 없기에 그러한가. 이제 사라진다면 더는 기회가 없다. 아직은 아픈 역사를 땅속에 묻고 작별할 때가 아니며, 작별해서도 안 된다는 절박함의 발로.

 

미약하고 은근하게 시작되어 독자를 어리둥절하고 당혹케 만드는 작품의 전개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밀물의 물결처럼 우리네 마음과 정신을 계속 밀어붙여 후반부에 이를수록 고조되는 감정과 고양되는 영혼의 아픔에 이르게 한다. <소년이 온다>와 마찬가지로 남는 질문 하나. 도대체 인간에게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안토니아 - 디오네 세계문학 01
윌라 캐더 지음, 윤명옥 옮김 / 디오네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테이블에 두 팔을 디딘 채 창밖을 바라보는 한 젊은 여인. 수수한 옷차림으로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응시하는 옆얼굴. 그녀는 무언으로 웅변한다.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버텨나가리라. 표지 한가운데가 네모지게 파여있고 책날개의 안쪽은 온통 빨간 바탕에 몇 글자가 흰색으로 쓰여있다. 책날개가 한번 접히면서 이 글자가 파여있는 네모 사이로 드러난다. <나의 안토니아>, 아름다운 표지다.

 

이상이 201712월에 쓴 문장이다. 거의 7년 가까이 지난 이제 다시금 <나의 안토니아>를 읽었다. 우연한 계기로 촉발된 윌라 캐더 전작 읽기를 미완결된 시작점에 돌아와 마무리하고 싶었다. 예전과 지금,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감상의 관점도 확실히 차이가 있음을 느낀다. 예전에는 오로지 여성 인물 안토니아가 중심적이었다. 낯선 땅에서 풍성한 생명력으로 삶을 긍정하는 여인. 지금은 시골 지역과 도회지에서 살아가는 개척자들의 삶이 안토니아의 삶과 어우러져 그 시절 네브래스카의 향토 속에서 묘한 회고적 추억과 정서를 풍긴다.

 

가장 행복한 날들은.... 가장 빨리 사라진다 - 베르길리우스 (P.5)

 

작가가 소설 첫머리에 인용한 문구다. 짐과 안토니아로 대표되는 네브래스카 시골의 삶이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고 작가는 강조하고 싶었나 보다. 이 작품을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정서는 분명히 추억과 회고다. 현재는 잃어버린,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과거. ‘안토니아는 추억을 상기시키는 마법의 단어다.

 

그 소녀는 우리가 기억하는 어떤 사람보다도 더 우리에게 그 고장, 그때의 상황들, 모험 어린 우리의 어린 시절 전체를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이름은 사람과 장소를 떠올리게 해서 그 이름을 말하면 머릿속에서 한 편의 드라마가 조용히 진행되었다. (P.8-9)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이지만, 엄밀히 살펴보면 최초 이주자인 뉴잉글랜드 주민들과 후에 넘어온 유럽 각국의 개척민들과 구별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후자의 집단인 보헤미안, 러시아, 스웨덴, 덴마크인 이주민들이 등장하여 자기 고유의 문화와 언어, 관습을 유지한 채 사는 모습이 그려진다. 쉬머르다 가족에 대한 묘사, 러시아인 파블과 피터 그리고 늑대 이야기 등은 다양한 민족 집단이 뿜어내는 다채로운 문화 다양성을 잘 보여준다. 새로운 땅에서 힘겨운 적응 노력과 동시에 떠나온 고향을 향한 짙은 향수를 지니며 좌절을 겪으면서도 끝내 정착에 성공하는 모습은 미국 역사의 한 장면에 해당한다. 다르노의 피아노 연주 대목도 흑인 차별과 관련한 흥미로운 일화다.

 

짐은 어릴 적부터 안토니아를 비롯한 시골 처녀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면서 훗날 도시처녀들과는 구분되는 눈부신 생명력과 진실한 성실성의 미덕을 그들에게서 찾게 된다. 짐 역시 어린 나이에 동부에서 서부로 멀리 낯선 곳으로 온 동병상련의 처지 아니던가. 그런 짐과 안토니아는 서로를 친구 이상의 관계, 즉 가족과 남매 같은 존재로 받아들인다. 짐이 방황하고 흔들릴 때, 그가 외롭고 우울할 때 안토니아는 그에게 기운과 위안을 주는 존재로서.

 

안토니아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얼굴, 그녀의 친절한 두 팔, 그녀의 진실한 마음. 그녀는, , 그녀는 여전히 나의 안토니아였다! (P.215)

 

나는 그녀의 얼굴을 열심히 쳐다보았다. 그 얼굴은 내가 항상 간직해야 하고, 모든 여자들의 얼굴이 드리우는 그림자 아래에서 가장 친근하고 가장 생생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을 얼굴이었다. (P.303)

 

작가는 안토니아를 완벽하고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녀의 외모와 품성, 태도를 지나칠 정도로 높이 평가하면서도 인간적 약점을 지닌 젊은 처녀임을 상기시킨다. 즉 암브로쉬와 제이크의 싸움에 엉뚱하게 분개하고, 천막 교습소에 가는 걸 금지하자 발끈하여 주인집에서 나와 커터씨 네에서 큰일을 당할 뻔하며, 형편없는 남자에게 사랑에 빠져 미혼으로 사생아를 낳는 수치를 겪기도 한다. 주위 사람들이 안타까운 심정에서 불쌍한 안토니아로 일컬어질 정도로.

 

그럼에도 독자는 그녀를 구원의 여인상처럼 인식할 수밖에 없는데 이 모든 것은 그녀의 건강한 생명력과 낙담할 줄 모르는 긍정적 정신이다. 짐이 맨 처음 안토니아와 만나는 대목에서 어린 그녀의 외모에 대한 묘사, 프랜시스가 짐의 할머니에게 전달하는 처녀 안토니아의 건강한 모습에서부터 오랜 세월이 흘러 중년 여인이 되어 외모는 사그라들었음에도 꺼지지 않는 내면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안토니아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쿠작네 자녀가 열 명이 넘도록 설정한 것은 그만큼 안토니아의 풍성한 생명력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나는 안토니아가 그동안 잃어버린 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면의 불꽃은 사그라져 버린 많은 여자들을 알고 있다. 다른 무엇이 안토니아에게서 사라져버렸다고 해도 그녀는 생명의 불을 잃지 않고 있었다. (P.315)

 

그녀는 마치 초기 종족의 시조 같은, 생명의 풍요로운 광산이었던 것이다. (P.332)

 

이 작품이 더욱 매력적인 것은 배경인 네브래스카를 향한 작가의 깊은 애정이다. 캐더는 짐의 눈을 통해 언뜻 황량한 시골에 불과하게 여겨질 수 있는 그 지역의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에 경탄한다. 자연은 사람들에게 항상 우호적이지 않다. 타는 듯 뜨거운 햇볕, 도처에 편재한 방울뱀의 위험, 휘몰아치는 폭설과 매서운 한파는 사람을 위협하고 좌절시키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모습조차도 조화롭고 순수하다. 그것은 일종의 찬가다.

 

바람 부는 봄철과 불타는 여름철이 이어지면서 그 고원지대를 풍성하고 농익게 했다. 그 대지 속으로 흘러들어간 인간의 모든 노력이 이제 결실을 맺어 기름진 밭이 줄지어 뻗어 있었다. 그러한 변화는 내게 아름답고 조화로워 보였다. 그것은 위대한 사람 또는 위대한 사상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 같았다. (P.289)

 

캐더는 세월의 흐름과 문명의 발전에 따라 전개되는 야생의 개발과 도시화를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하면서도 사라져 버린 당시의 순수함과 소박함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도 여전히 가치 있음을 되풀이하여 역설한다. 언뜻 보면 시골 배경 이주민들의 소소한 살아가는 모습을 기술하였기에 윌라 캐더를 지방주의 작가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그녀는 산업화하고 문명화된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 본연의 순수한 인간성에 대한 천착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추억과 회고의 감정과 정서가 배어 나오게 된 것이리라.

 

안토니아 못지않게 독자의 관심을 끄는 인물은 타이니 소더볼과 레나 린가르드다. 안토니아에 비해 처녀 시절 품행에 있어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은 그들은 외양적으로는 독보적인 성공 가도를 달린다. 짐과의 애인 관계였던 레나가 더욱 흥미로운데, 부질없는 일이지만 짐과 레나가 결혼했다면 두 사람의 앞날은 어땠을지 궁금하다. 금광 개발로 큰돈을 번 타이니와, 남성 종속적인 결혼 자체에 부정적인 레나는 요즘 관점으로 주체적 삶을 지향하는 여성주의자의 전형에 가깝다.

 

여기에 여러 아이에 둘러싸인 평범한 아줌마가 있다. 그녀는 어릴 때 꽤 고생했고, 평탄하지 못한 삶의 길을 밟아왔지만 꿋꿋이 버텨내고 넉넉하지는 않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그녀와 꼬맹이 시절부터 친한 한 중년 남성이 있다. 변호사로 출세한 인물이지만 현재 행복한지는 확실치 않다. 그의 정신적 토대는 여전히 시골 네브래스카에 두고 있다. 두 사람의 인생은 나란히 때로는 엇갈리고 이따금 멀어져 가기도 했지만 운명의 끈은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도록 단단히 묶고 있다.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 단락에서 짐과 안토니아를 다시금 연결한다. 두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겪어 온 갈림길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습에서, 그리고 두 사람의 평생 여정을 찬찬히 따라온 독자들에게 상기시키는 듯이.

 

이제 나는 바로 이 길이 우리를 다시 연결시켜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놓쳐버린 것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귀중한 과거를 함께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P.3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