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 거리의 아이들 비룡소 클래식 17
몰나르 페렌츠 지음, 한경민 옮김 / 비룡소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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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헝가리 청소년 문학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제재, 정신 그리고 내용 전개 등에 있어 다소 의아한 점이 있다. 과연 이것이 청소년 문학으로 추천할 만한 작품인지에 대한 근본적 회의라고나 할까.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오늘 대장을 뽑기로 했다. 우리는 대장을 뽑을 것이다. 대장이 명령하며 모두가 복종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대장을 뽑는다. [......]” (P.44)

 

팔 거리의 아이 중에서 가장 차분하고 이성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보커의 말이다. 강력한 대장, 절대적 복종. 군국주의와 전체주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청소년 무리 사이에서 기대하고 지지받을 만한 주장과 표현이 아니다.

 

모두들 이 작은 땅을 정말로 사랑하는 표정이었다. 만약 필요하다면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울 준비도 되어 있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같은 것이었다. 마치 조국을 지키자.” 하고 외치듯이 그들은 공터를 지키자.” 하고 외쳤다. 모두의 눈이 반짝였고 가슴은 벅찼다. (P.49)

 

아이들은 공터를 조국과 동일시한다. 공터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조국을 지키려는 애국심과 일맥상통한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아이들에게 공터(“거칠고 울퉁불퉁한 황무지, 집 두 채 사이의 이 작은 땅”(P.126))가 갖는 의미가 매우 남다르다고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공터를 지키고자 다른 패거리와 전쟁을 불사하고, 거창하게 선언문마저 낭독한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아이는 배신자로 간주하며, 염탐과 매수 등의 전술이 아무렇지 않게 행해지니 과잉 애국주의의 발로로 여겨질 따름이다

 

지금 우리 모두는 일어나야만 한다! / 우리 땅에 커다란 위협이 다가오고 있다. / 만일 우리가 용감해지지 않는다면 / 땅을 전부 빼앗길 것이다! / 우리 땅이 사라질 수도 있다! (P.148-149)

 

이 작품이 발표된 해인 1906년 당시, 헝가리는 독립 국가가 아니었다. 오랜 독립투쟁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와 이중제국을 형성한 불안정한 정치체제 속에서 민주주의와 제국주의 속성이 공존하며 갈등하는 양상이 여기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공터를 빼앗으려고 하는 붉은색 셔츠 패거리는 작품 초반에 거의 절대 악으로 여겨진다. 부당하게 남의 땅을 빼앗으려고 하는 제국주의 세력처럼. 네메체크의 구슬을 뺏는 파스토르 아이들을 통해 이런 면모가 더욱 부각된다. 보커에 비해 거칠고 무법적인 이미지로 묘사되는 아츠 페리처럼.

 

작가는 파스토르 아이들에게도 벌을 가하며, 물에 빠져 감기에 걸린 네메체크의 안부를 묻는 아츠 페리를 부각함으로써 그들 붉은색 셔츠 패거리가 사악하고 무법적인 존재가 아니며 똑같이 인간적인 청소년들임을 보여준다. 그들 역시 자신만의 공터가 필요했을 뿐이다.


두 패거리의 리더인 보커와 아츠 페리가 외형상 두드러지지만 실제적으로 작품의 핵심 인물인 네메체크는 서서히 비중과 역할을 더해간다. 그는 팔 거리의 아이 중에서 유일하게 사병으로 괄시받고, 정당한 항의조차도 외면받으며 쥐새끼’(P.46) 취급을 받는 처지다. 조그마한 체구에 겁도 많은 그가 무리에서 영웅이 된 것은 오로지 공터에 대한 사랑에서다.

 

더 이상 공터를 볼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는 어린아이였다. 모든 것을 내버릴 수 있지만 공터만은, 공터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공터는 절대 버릴 수가 없었다. (P.278)

 

세 번이나 물에 빠지고 열병에 허덕이는 와중에도 몰래 빠져나와 적의 대장을 쓰러뜨림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니. 보통의 청소년 문학과 달리 쓰러진 네메체크는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가까운 친구의 죽음을 아이들은 목격하지만 이해하지 못한다. 인생에서 처음 겪는 낯선 경험이므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다. 친구가 죽었다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처음 당해 보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아주 이상한 일 앞에서 너무 놀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P.296-297)

 

그들은 당혹해하지만 곧 일상으로 돌아온다. 산 자는 살아야 하는 당장 눈앞의 현실을 자연스레 터득한다. 네메체크의 죽음에도 학교 수업은 계속되므로 그들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그 정도면 차라리 낫다. 보커는 더한 충격을 받게 된다. 친구의 목숨을 바쳐 지켜낸 땅의 배신, 전쟁의 무의미성을. 그리고 어렴풋이 깨닫는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누구나 거칠 수밖에 없는 통과의례다.

 

그의 어린 마음에 처음으로 어떤 느낌이 어른거렸다. 인생은 때로는 아주 어렵고, 때로는 아주 행복한 것이며, 모든 사람은 인생을 이겨내면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P.306)

 

아이들의 단순성과 순수성과 비교할 때 어른들은 오히려 몰이해와 몰인정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들의 정직성을 맹신하고자 다른 아이들을 의심하고 비웃는 게렙의 아버지, 죽어가는 아들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재봉사에게 어쨌든 급하게 옷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는 체트네키 씨, 공터가 곧 사라질 것을 알고 있던 토트 사람.

 

시시해 보이는 본드 동아리가 작중에서 왜 그렇게 큰 비중을 가지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와, 공터와 두 패거리의 대립에 굳이 그래야만 했는지 갸우뚱하는 독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작가는 아이들이 공터 전쟁과 게렙의 배신, 네메체크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친구와의 우정, 삶과 죽음의 공존이 갖는 의미를 직접 겪고 깨닫게 함으로써 성장과 인생이 가지는 굴곡을 드러낸다. 물론 제국주의라는 시대적 한계의 틀을 극복하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 정묘하게 청소년 문학의 틀을 유지하기에 여전히 헝가리에서 평가받는 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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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효 판소리 사설집 - 쉽게 풀어 쓴
최혜진 외 지음 / 민속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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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는 가사가 있는 성악곡이다. 가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반쪽짜리 음악을 감상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지 못할 언어로 노래하는 외국 성악곡을 생각하면 된다. 오늘날 전해지는 판소리 가사, 즉 사설을 최초로 정리한 인물이 신재효다. 과연 판소리 사설을 읽다 보면 현재 공연하는 판소리 다섯 마당의 기본 골격이 이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변강쇠가>는 지금은 사라진 악곡의 흔적이나마 찾아 음미해 볼 수 있게 해준다.

 

굳이 이 사설집을 읽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우리나라 독자들은 전반적 내용을 꿰뚫고 있다. 옛날이야기, 동화책, 판소리계 고전소설, 영화 등을 통해 너무나 익숙한 작품들이다. 특히 판소리계 소설과는 쌍둥이라고 할 정도로 친연성이 높다. 따라서 사설과 소설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더욱 흥미로우리라. 오늘날 다섯 마당이 살아남은 것은 무엇보다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사랑, , , 우애 등과 같이 사회의 기본 윤리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변강쇠가>의 소멸은 이것을 은연중에 알려준다.

 

머리말에 따르면 수록된 사설의 판본은 아래와 같다.

 

가람본 : 춘향가(동창)

성두본A : 박타령

성두본B : 춘향가(남창), 적벽가, 변강쇠가

신씨가장본 : 심청가, 토별가

 

춘향가 남창(男唱)

현전 판소리와는 분위기, 줄거리 및 사설이 제법 차이 난다. 여기서 춘향은 퇴기 월매의 딸로서 대비를 넣어 기생 신분을 면했다고 한다. 자신의 신분상 한계를 알고 있으므로 이도령과 연분은 어디까지나 사랑받는 첩”(P.16)으로서임을 자각한다. 광한루에 놀러 가고, 그네 타는 춘향에게 매혹되어 유혹하며, 춘향과 사랑가를 벌이는 장면 등이 오늘날 판소리 사설과는 다르다. 좀 딱딱하고 밋밋하여 아기자기한 멋이 부족한 게 남창인 연유이리라.

 

춘향은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도 절망하지 않는다. 꿈속에서 선녀가 밝은 미래를 약속해 주었기에 걸인 꼴인 이도령을 옥중상봉 해도 오히려 이도령이 당황할 정도다. 신관 사또의 죄명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기생이 아닌 춘향을 강제로 수청들도록 강요하여 불응하자 감옥에 가둔 죄. 그리고 어사또가 남원 민심을 살피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 고리대금과 송사로 농민을 수탈하는 죄다. 만약 동창에서와 같이 기생 신분임에도 신관 사또의 수청을 거절하였다면 춘향의 처벌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조치였을뿐더러 사또를 모욕한 죄목이 훨씬 더 중하였을 것이다.

 

춘향가 동창(童唱)

동창은 춘향과 이도령이 오리정에서 이별하는 대목으로 끝을 맺는다. 어찌 보면 미완결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설은 오히려 현대에 가깝다. 보다 섬세하고 감정에 충실하며 해학성도 더 짙다. 현대 판소리는 남창과 동창을 결합한 구조에 해당한다.

 

여기서 춘향의 신분은 명확하게 기생(“퇴기 월매 딸 춘향이란 기생”(P.79))으로 제시된다. 기생인만큼 춘향의 성격도 남창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희로애락이 분명하며 직설적이고 화끈하다. 춘향이가 방자에게 쏘아붙이는 말투를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사랑가 장면에서도 동창은 사랑가 전에 춘향의 옷을 벗기는데, 남창은 사랑가 후에 옷을 벗기는 차이가 있고, 이별 통보에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춘향의 행동은 더 사실적이며 인간적이다. 동창 춘향가의 마지막 대목은 오리정 이별인데, 담담한 남창과 달리 매우 정서적이어서 읽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할 정도다.

 

심청가

심청가의 묘미는 극적인 신분 상승의 대조에 있다. 전반부는 온통 슬프고 애달프며 딱하기 그지없는 내용이 주저리주저리 이어지다가 인당수 이후 심청의 처지는 일거에 뒤바뀌어 황후가 된다. 맹인 잔치에서 심봉사가 눈을 뜨는 장면은 확실히 비현실적이지만 청중의 소망이 반영된 결과이다.

 

전반적 작품 기조에서 분위기의 균형과 대비를 유지하는 역할이 심봉사와 뺑덕어미에게 맡겨진다. 사설 초반에 심봉사는 비록 맹인이지만 양반의 후예로서 행실이 청검하고 지조가 경개하여 모든 행동을 경솔히 아니 하니 사람이 다 일컫더라”(P.111)일 정도로 품위 있는 인물이지만 우리가 보는 심봉사는 차라리 해학적 인물이다. 심청가에서 전혀 뜻밖일 정도로 걸쭉한 육담과 해학미가 역시 이 장르가 대중적 취향임을 드러낸다. 방아타령이 전형적이다.

 

어디, 하여 볼까? 뒷소리를 잘 맞추렸다! 이내 몸이 방아 되고 주장군이 고가 되어 각씨님네 옥문관을 밤낮으로 찧으면, 다른 물 아니 쳐도 보리방아 절로 익제.” (P.165)

 

토별가

해학미 하면 별주부와 토끼가 벌이는 한판 지략 대결도 놓칠 수 없다. 등장인물이 사람이 아니다 보니 표현상에 한껏 자유분방함과 환상성이 배어있다. 육담이 주는 골계미도 만만치 않다. 물개가 별주부에게 자신이 친척 아저씨라고 주장하는 대목은 피식 웃음을 유발한다. 한편 오늘날 판소리와 소설과는 결말이 다른데, 창자가 들려주는 도덕적 교훈은 결국 창작의 방패막이에 불과하다.

 

자라와 토끼란 게 모두 미물로서 장한 충성 많은 의사 사람하고 같은 고로 타령을 만들어서 세상에 남겨 전하니 사람이라 명색하고 토끼와 자라만 못하면 그 아니 무색한가? 부디부디 조심하오. (P.216)

 

박타령

흥부와 놀부는 너무나 유명한 전래동화 캐릭터다. 어찌 된 일인지 요즘은 놀부[놀보]가 현대인의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흥보는 착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전형적인 무기력한 소시민에 가깝다. 게다가 자기 능력은 생각지도 않고 자식만 스물다섯을 낳아서 무책임할 정도로 가난에 방치한다. 요즘이라면 아동학대로 고발당할 수준이다. 이러니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흥보가 마뜩잖은 것이다.

 

불쌍한 이것들이 울어도 앉아 울고, 자도 앉아 자고, 똥이나 오줌이 마려우면 덕석을 쓴 채로 앉아 누어, 세상에 난 연후에 실오라기 하나라도 몸에 걸쳐 본 일이 없고, 한 번도 문턱 밖에 발을 디뎌본 일이 없다. (P.230-231)

 

유명한 박 타는 대목에서 전혀 의외의 대목이 나오는데, 셋째 박에서 양귀비가 나타나서 흥보의 첩이 되는 장면이다. 현전 판소리와 소설에서는 일체 이러한 내용이 없다. 당대 청자의 솔직한 욕망을 반영하였으리라고 추정되지만, 가치관의 변화에 발맞추어 부적합하다고 여겨 언제부터인가 제외된 것이리라.

 

놀보 집안의 결정적 패가는 놀보의 상전 노인의 등장에서 시작한다. 요점은 놀보가 천민 출신이라는 점이고 놀보는 속량을 위해 전 재산을 바치다시피 한다. 당시 신분사회에서 계급의 구별은 엄격한 점이었기에 놀보가 사색이 될 수밖에 없음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런데 놀보가 천민이면, 흥보도 마찬가지일 텐데. 주인공을 천민으로 만들어 놓으면 자가당착이 아닐는지.

 

여보시오, 주인님, 이 동네가 반촌, 양반의 고을이요, 아비의 가세가 요부키로 갓을 쓰고 지내오니 이 고을, 온 동네에 모모한 양반 댁이 모두다 사돈이오. 이 소문이 나게 되면 소인은 고사하고 그 양반들 꼴이 우스우니 사정을 봐서 아무 말씀 마옵시고, 속량으로 바칠 테니 면천이나 하여 주요.” (P.273-274)

 

적벽가

나관중의 작품에 뿌리를 둔 <적벽가>는 현대 판소리의 사설과 거의 차이가 없다. 여전히 제갈공명은 지략이 뛰어나며, 주유는 한 방 먹으며 애석해한다. 조조는 안하무인에, 깐족거리는 입 때문에 화를 자초한다. 유명한 소설 속 인물이 대중에게 각인된 이미지를 그대로 소리에 담아내고 있다. 원작 소설에 없는 군사 설움 대목이 중시되는 까닭은 전쟁이라 결국 지배층의 이익을 위함이요, 힘없는 민초에게는 오직 고통과 슬픔을 안겨줄 뿐임을 토로하고 있어서다.

 

변강쇠가

변강쇠와 옹녀는 개성적인 B급 캐릭터로 단단히 자리 잡아서 그네들의 이름만 언급해도 대부분 민망한 웃음을 자아낼 정도다. 확실히 작품 초반에는 음란물의 한 장면과도 같은 노골적이며 해학적인 성기 묘사(P.355-356)가 존재하지만 이후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를 달리 보면 성적인 기준에서 전통적 보수성을 탈피하고 현대적 성 관점에 가깝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강쇠의 평생 행세 일하여 본 놈이냐. 낮이면 잠만 자고, 밤이면 배만 타니, 여인이 할 수 없어 애긍히 말한다. (P.359)

 

변강쇠는 사설 내내 확실하고 고정적인 캐릭터를 보여주는데, 바로 음남이자 잡놈이라는 것이다. 반면 옹녀는 우리가 아는 바와 많이 다르다. 즉 우리가 아는 음녀옹녀는 없다.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가고자 애쓰는 대목에서 옹녀와 변강쇠의 행동은 대비된다. 옹녀는 어떻게든 살림을 유지하여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만 강쇠는 음주, 도박, 계집질 등으로 전혀 보탬이 안 된다.

 

후반부에서 장승을 베어 땔감으로 썼다가 저주받아 시체가 된 강쇠의 뒤끝은 더욱 남다르다. 유언조차 옹녀보고 자진하라고 요구하고 송장을 수습하려고 온 뭇 남성들은 모두 급살맞게 해버린다. 그야말로 시체의 저주라고 할밖에.

 

입관하기 자네가 손수하고 출상할 제 상여 배행도 하고, 시묘 살아 조석 상식 삼년상을 지낸 후에 비단 수건 목을 졸라 저승으로 찾아오면 이생에 미진한 연분, 끊어진 줄을 잇는 것이 되려니와, 내가 지금 죽은 후에 사나이라 명색하고 십 세 전 아이라도 자네 몸에 손 대거나, 집 근처에 어른거리면 즉각 급살할 것이니 부디 부디 그리하소.” (P.375)

 

우여곡절 끝에 강쇠의 시체는 동강 나고 남자들은 떠나가고 옹녀 홀로 남는다. 사설은 더 이상 옹녀의 장래를 언급하지 않는다. 혼자는 살 수 없기에 개가를 할 수밖에 없고 해야만 하는 여성 옹녀에게 동정심이 쏠리는 것은 아마 인지상정일 것이다.

 

예전에 문고본으로 신재효 판소리 사설집을 읽은 적이 있다. 당시에 비하면 사설의 여러 대목이 더욱 잘 이해되고, 입속으로 읽다 보면 저절로 리듬감이 생겨남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사설 내용 자체는 백 년도 더 전 옛 시기의 것이어서 요즘 어휘와 문화로서는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부지기수다. 특히나 고전을 인용하는 사례는 더더욱 그러하다. 이 책은 순전히 사설만 수록하였을 뿐 일체의 주석은 달지 않고 있어 철저하게 독자의 손에 맡기고 있다. 독자들이 사설의 세부 내용을 얼마나 속속들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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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이 건강해야 나도 건강하다고요? - 신종 감염병 시대, 비인간 동물과의 공존 이야기, 2021년 11월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사서추천도서, 2022년 (사)행복한아침독서 추천도서 곰곰문고 5
이항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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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바이러스로 온 세계가 팬데믹을 경험하고, 중국 우한지역의 박쥐에게서 바이러스가 인간에게로 옮겨왔다는 게 점차 정설이 되어가는 현재. 인수 공통 감염병을 예방하려면 우리가 동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동물과 인간의 건강이 별개가 아닌 하나라는 원 헬스(one health) 개념의 접근이다.

 

자연보호, 환경 보전, 생태계 유지 등으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인식은 정복과 개발의 대상에서 지속가능성에 바탕을 둔 보전과 개발의 조화로 변화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큰 틀에서는 여전히 미흡하지만 조금씩이나마 개선을 기대할 수 있는 반면, 저자들이 지적하듯이 동물에 대한 우리네 인식은 과거에 여전히 묶여 있다. 즉 이용과 착취의 대상이다.

 

일부 반려동물을 제외하면 대다수 동물은 일상 환경에서 사라진 상태이며 자연 속에 사는 동물들의 서식지도 지속적으로 파괴되고 있어 조만간 멸종이 임박한 동물도 많다. 어디 그뿐이랴, 육식에 대한 선호로 식육 동물의 사육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데다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돌림병으로 떼죽음을 겪는 게 일상화되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하는 실험동물과 동물원의 동물에도 저자들은 주의를 환기한다. 인간의 안녕과 편의를 위하여 숱한 동물이 죽어 가며 열악한 환경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불편하고 단순한 일상을 맞이해야 합니다. 이는 결코 즐겁거나 재미있는 변화가 아닐 것입니다. (P.35)

 

이 모든 사실은 부분적으로 알고 있는 예도 있지만, 대체로 관심 밖에 있던 사항이므로 각성과 자기반성을 하게끔 한다. 벤담의 의견처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동물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전제가 인정된다면, 참으로 많은 것들이 변화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동물의 생명을 끊거나 고통을 줄 만한 행위가 금지되어야 하는데, 현실적 가능성은 매우 부정적이다. 모두가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하며, 천연가죽 옷이나 제품을 사용하지 않아야 하며,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파괴하는 일체의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게다가 실험동물은 어찌할 것인가. 저자들은 이렇게 반문한다.

 

인류는 생물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이러한 것들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크게 줄여 나가기라도 할 수 있을까요? 인류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과연 그럴 준비가 되었을까요? (P.41)

 

근본적 변화가 어렵다면 현실적, 실용적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 소위 동물 복지에 힘을 쏟는 것이다. 야생동물 서식지를 최대한 보전하도록 노력하며, 식용동물의 사육 환경을 개선하는 운동에 동참하며, 동물실험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최대한 인도적으로 처우하는 등이다. 반려동물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애완용이 아니라 가족의 구성원으로 책임감을 지니고 돌봐야 할 것이다.

 

여러 유형의 동물 복지를 주장하지만 저자들의 의견은 결국 하나로 합일한다. 동물을 상품이 아닌 생명으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야생동물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터전을 유지하고 인간이 개입하지 않으면 동물도 건강하고 인간도 건강해질 것이라는 점, 인간과 관계를 맺고 사는 동물의 삶의 질을 향상하도록 노력하는 게 결국 인간 자신의 복지와도 긴밀히 연결된다는 점이다.

 

사람과 동물을 가르지 않고 사회적 약자의 삶의 질을 두루 걱정할수록, 주어진 상황과 문제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어 갈수록 모두의 삶의 질이 나아질 거예요. ‘동물 복지와 사람 복지가 하나라는 의미로 원 웰페어라는 말이 주목받는 까닭입니다. (P.114)

 

실험동물과 동물원 동물의 현황은 당혹스럽다. 그렇게나 많은 동물이 각종 연구 개발의 목적으로 생명을 잃는다니 게다가 그들의 거주 환경의 열악성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사실도. 그나마 동물실험에 대한 기준과 절차가 정립되기 시작하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할까. 동물원이 결코 동물을 위한 시설이 아님은 조금만 생각해도 분명한데 우리는 외면해 왔다. 아무나 동물을 사서 동물원을 차려 수익사업을 벌일 수 있다는 점에 놀랍다. 우리네는 동물을 정면으로 바라보는데 그토록 무관심했고 윤리적 기반마저 이토록 허술했다니,

 

저는 대다수의 동물원을 생추어리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물원은 동물을 이용하는 곳이 아니라 보호하는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동물원의 기능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전시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차순위로 하더라도 동물원이 생추어리로 바뀌면 동물을 보호하는 곳이 될 수 있습니다. (P.157)

 

동물 보호에 대한 관심은 모두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저자들은 동물에 대한 사랑과 보호 의식이 명확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찬반은 물론 찬성조차도 정도의 차이를 보일 것이다. 요즘 사회에 문제가 되고 있는 반려동물의 에티켓, 길고양이에 대한 먹이 주기는 격론이 벌어질 수 있는 사안이다. 동물 보호와 복지는 관심을 기울이고 개선해야 할 중요한 사안이지만, 기준과 한계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럼에도 이 책이 담고 있는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종으로서 동물의 안녕과 생존은 말할 나위도 없고, 궁극적으로 우리네 자신의 건강한 삶과 생존 자체를 위해서도 동물 복지를 더는 외면할 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우리도 결국 동물의 일원이므로. 곳곳에서 부르짖는 저자들의 외침이 뼈아프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인간과 똑같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에게 독을 시험하고, 새로운 외과술을 시험하고, 백신을 시험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한 일일까요? 이렇게 많은 동물이 인간을 위해 고통스럽게 죽어 가도 괜찮은 것일까요? (P.135)

 

인간을 물리적으로 동물원에 전시하는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겠지만, 인간은 가두면 안 되고 동물은 가둬도 된다는 명쾌한 윤리적 근거를 우리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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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장원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8
윌리엄 허드슨 지음, 김선형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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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아동 청소년 문학으로 소개되던 작품이다. 원제는 <Green Mansions>인데, 화자가 나중에 리마와 조우하게 될 울창한 원시림을 산마루에서 조망하며 감탄하는 대목(P.77)에서 따왔다. 다만 자연미에 대한 순수한 예찬과 함께 소유의 욕망을 엿볼 수 있다면 나의 기우일까.

 

표면적으로 이 작품은 이국적 배경의 로맨스 소설이다. 한 젊은이가 황금을 찾으러 당대로서는 낯선 지역인 베네수엘라 남부의 아마존을 배경으로 원주민들과 맞닥뜨려 겪게 되는 모험이 작품 내내 이어진다. 화자 아벨과 신비한 처녀 리마와의 아름답고 슬픈 사랑을 중시한다면 이 소설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추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모험과 사랑, 흥미진진한?

 

작품 전개에서 손에 땀을 흘릴 정도로 극적이고 박진감 넘치는 장면은 의외로 드물다. 노다지를 향한 주인공의 기대감은 이미 전반부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중반 이후부터는 그와 리마, 그리고 야만인 루니 일족 간의 적대적 삼각관계가 주를 이룬다. 전형적인 모험소설과는 달리 주인공은 사랑과 모험에서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한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환멸뿐.

 

작가가 중점을 두어 강조하는 대목은 자연 묘사에 있다. 서양인의 손길이 미처 닿지 않은 아마존의 오지. 오직 자연 그대로만 있을 뿐으로 기후와 지형, 숲과 동식물이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모습을 작가는 꾸밈없이 솔직하게 담백한 문체로 묘사하고 있다. 미사여구로 장식하지 않았음에도 아마존 오지의 온화함과 강렬함을 과부족 없이 잘 살리고 있는데, 박물학자로서의 이력을 새삼 깨닫게 한다.

 

폭풍 같은 움직임과 혼란스러운 소음이 지나고 나자 숲의 적막이 굉장히 깊게 느껴지더군. 얼마 쉬지도 못했는데 금세 기막히게 아름다운 새의 선율이 나지막하게 들려왔네. 환상적으로 순수하고 표현이 풍부해서 이전에 들어본 그 어떤 음악 소리와도 달랐지. (P.50)

 

작품의 핵심적 내용은 아벨과 리마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헤어짐과 죽음이다. 리마는 작품 내에서 신비하게 등장한다. 새가 지저귀는 듯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 리마의 정체는 끝내 애매하게 마무리된다. 그녀의 고향인 리올라마가 어디에 있는지, 그녀와 같은 언어를 구사하는 종족들의 운명은 어찌 된 것인지도 안개에 잠긴 채 말이다.

 

리마가 아벨을 만나지 않았다면, 숲의 파괴와 리마의 죽음 모두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숲의 여신으로서 자신의 순수한 힘을 통해 숲과 숲속 생물과 더불어 이전의 삶을 영위해 나갔을 것을. 누플로는 리마의 생활방식을 따를 순 없어도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

 

그 아이가 꽃 피우고 노래하는 그 넓은 숲에서는, 그 아이의 집이자 정원이고 그 아이가 만물을 관장하는 그 숲에서는, 색칠한 날개를 지닌 작은 나비 한 마리조차 그 애의 말을 듣는 그 숲에서는 난 동물을 한 마리도 잡지 않소이다. [......] 그 숲에서 법은 하나뿐이거든. 리마가 정하는 법. 그 숲 밖에서는 다른 법이 적용되고. (P.154)

 

물론 리마는 동의하지 않았으리라. 자신의 감정이 아벨에게 이해되고 응답받고 교감을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행복은 본디 찰나라고 했던가. 높은 나무 꼭대기에서 화염에 휩싸인 채 추락해 떨어지는 순간 아벨을 외친 그녀의 심정은 사랑과 그리움, 두려움과 원망의 중간 어디쯤이었을까.

 

리마와의 앞날을 꿈꾸던 아벨의 복수는 처절하고 냉혹하며 스스로 인정했듯이 야만적이다. 그가 그토록 경멸하던 야만인보다도 더욱. 지성을 갖춘 계몽된 서구 귀족은 더 없다. 복수에 혈안이 되어 무자비한 칼을 휘두르는 한 남자 외에는. 복수에 성공하였으니 아벨의 심정은 후련하였을까. 루니 일족에 대한 학살은 그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었을까. 이후 전개되는 그의 신체적, 정신적 방황의 삶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그녀를 보금자리인 숲을 떠나게 만든 원인은 자신에게 있었다는 점과, 자신을 향한 사랑으로 리마는 동족을 찾으려는 욕구가 커졌다는 사실을 그는 부정하지 못한다. 원주민 일족의 학살과, 리마의 유골에 대한 집착은 그의 자책감의 정도를 보여줄 뿐이다. 따라서 아벨의 고백은 당대의 관점으로는 충격적이다. 허무주의적인 동시에 비기독교적이므로, 신에게서조차 용서받지 못할뿐더러 용서를 구할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는 아벨이.

 

그녀는 말했네. 천국마저도 내가 한 일을 돌이킬 순 없다고. 또 내가 나를 용서하더라도 천국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을 것이고, 그녀 또한 어떤 말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금까지도 그것이 나의 철학으로 남아 있네. 기도도 금욕도 선행도 전부 아무 소용 없고, 중재 또한 존재하지 않으며, 영혼의 바깥에는 죄를 사하는 천국도, 죄로 가득한 지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P.370-371)

 

이 작품은 모험소설의 외형을 빌리고 있지만 대중소설의 값싼 감상과는 거리가 멀다. 아벨과 리마의 교감은 매우 은은하고 정묘한 정서에 기반하다. 아벨이 쿠아코를 죽이는 장면, 마나가 일족을 꼬드겨 루니 일족을 몰살시키는 대목도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묘사를 통해 대중의 흥미를 돋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탓으로 그는 후대에 잊혀진 작가가 된 것이다.

 

작품해설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곳곳에서 드러나는 인종주의적 견해가 제법 눈에 거슬린다. 이는 그만의 개인적 오류가 아니라 시대적 한계이니 어찌하겠는가. 후대의 우리로서는 작가가 그려낸 환상적인 작품 세계에 빠져들되, 인종주의 결함을 외면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존 골즈워디가 쓴 서문은 이 작품의 진가를 압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어 마지막으로 인용한다.

 

단순한 낭만적 서사가 순수한 아름다움의 빛으로 은은히 채석되어 산문시로 승화되었다. 이 이야기는 질적인 품격에서 한 번도 이탈하지 않으면서, 이승에서 완벽한 사랑과 아름다움을 얻고자 하는 인간 영혼의 갈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P.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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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욱의 과학공부 - 철학하는 과학자, 시를 품은 물리학
김상욱 지음 / 동아시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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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이라는 관점에서 과학과 인문학은 그동안 평등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학을 교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함께 가기 위해 우선 평등해야 한다. 과학은 교양이다. (P.14)

 

인문학에 관심을 지닌 이론물리학자가 쓴 교양 과학서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문제의식은 서문에 해당하는 내용의 바로 아래 문장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속으로 뜨끔하다. 나조차도 제법 독서를 좋아함에도 감히 과학책을 읽어보겠다는 발칙한 생각은 거의 하지 못한다. 이 책도 순전히 나의 자의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읽어보도록 권유하기 위한 학교 추천도서의 하나라서 펼치게 된 것임을 밝힌다.

 

우리는 왜 교양으로서 과학에 등한시하는가?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닿지 않아서일 것이다. 소위 인문학은 첫째, 진입장벽이 낮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알면 극단적인 사례를 빼면 대부분 따라갈 수 있다. 둘째, 우리 주변의 눈에 보이는 현실을 다룬다. , 가족, 사회, 국가, 세계와 같이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 이해와 관계설정이 필수 불가결한 현상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므로 관심도와 집중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타인과 대화에 소외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정확히 반대 사유가 과학에 적용된다. 첫째, 진입장벽이 높다. 수학적 지식을 기본으로 한다. 자연과 현상에 흥미를 갖고 다가서다가도 수학이라는 장벽에 부딪혀 좌절하는 사람이 많다. 많은 학생에게 수학은 공포의 대상이며, 학업을 마친 성인들에게 수학은 학창 시절의 추억일 뿐이다. 둘째, 과학적 지식은 잘 알지 못해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뉴턴의 고전역학은 물론이려니와 저자가 전공하는 양자역학은 다른 세상 얘기다. 일상적 화제에 과학 관련 사안이 오르내리는 때는 사회적 이슈와 연관된 아주 드문 경우뿐이다.

 

그럼에도 과학 없이 우리가 살 수 없다는 점을 모두가 인정한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휴대폰, 컴퓨터, TV, 전기, 가전제품은 물론 의류, 생활용품 등은 모두 과학기술의 혜택이다. 날씨를 예보하고 지진과 태풍을 예측하며,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행위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이해와 연구 없이는 불가능하다. 근년 들어 전 인류를 괴롭힌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머나먼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 <터미네이터>가 그리는 암울한 미래는 과학기술이 갖고 있는 필연적인 귀결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과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할 때 치러야 하는 대가이다. 과학기술이 비관적 미래를 가져올까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보다 더 제대로 과학기술을 해야 한다. (P.59)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과학기술의 편익을 누리면서도 미래에 한 가닥 두려움을 느낀다. 이를 주제로 한 무수한 SF소설과 SF영화도 있다. 과학의 발전 끝에는 어떠한 미래가 있을까. 유토피아 아니면 디스토피아?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의 눈부신 발전이 가져오는 의구심에 저자는 돌직구를 날린다.

 

저자의 이 책이 여타 과학자들의 것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순수한 과학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과학자의 시선으로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데 있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과학적 사고와 과학 정신에 충실하지 못하다. 권위주의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P.127) 과학자로서는 사실을 은폐하고 사실을 추구하는 노력을 방해하고 죄악시하는 불합리한 권위와 여론, 권력을 인정하지 못하리라. 세월호 참사, 국정원 부정선거 의혹, 부조리한 총장선거 등과 함께 국정 교과서의 폐해를 토로하는 저자의 심정이 절절하다.

 

과학에서 올바른 답은 많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생각으로부터 얻어진다. [......] 만약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정부가 결정하는 거라면, 우리는 지금도 천동설을 믿고 있을지 모른다. 노벨상은 이렇게 우리에게서 더 멀어져간다. (P.146)

 

저자가 언뜻 본령을 넘어서는 영역에 시선을 돌리고 관심을 쏟는 이유는 그가 우주에 고립된 한 존재가 아니라 사회와 가족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과학자 이전에 그는 인간이다. 이 사실을 간과하면 과학 지상주의자가 되고 만다. 저자는 과학과 과학적 지식의 중요성을 강변하지만 이의 해악도 놓치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자이기에 잘못될 가능성에 더욱 경각심을 지닐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경고한다.

 

과학적 지식 역시 독점되면 해악을 일으킬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과학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과학이 정말 중요하다는 데에는 동의하면서, 과학에 관심을 갖지 않는 시민사회는 그 중요한 권리와 의무를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P.166)

 

교양 과학서이므로 당연히 과학 지식을 얻는 즐거움도 누리게 되는데, 특히 저자의 전공인 양자역학에 관한 이야기가 주종을 이룬다. 고전물리학조차 낯선 빈약한 독자에게 최첨단 물리학 이론은 접근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저자는 어려운 내용을 어떻게 하면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설명할 것인가에 많은 고민을 한 자취가 역력하다. 어조를 가볍고 편하게 사용한다든지, 중첩 상황은 짜장면 우주와 짜장 우주로 비유한다든지, 확률론적 해석을 동전 던지기로 예시하는 등이다. 이 책에서 양자역학의 깊숙한 내용을 본격적으로 파고들지는 않지만, 양자역학이 발견한 낯설고도 당혹스러운 진실의 세계에 독자를 보다 가까이 이끄는 유인으로서는 충분하다. 카오스계와 프랙털에 대한 소개, 자유의지의 실재에 관한 뇌신경과학자의 관점 등도 흥미로운 주제다.

 

과학이라는 두 글자가 세상만사의 만능 치트키처럼 인식되고 있다. 과학기술의 역할이 확대되고 중요성이 커질수록 인간 자체는 점점 왜소해진다. 과학의 시대에 인간과 인문학에 대한 시대적 요구는 더욱 늘어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과학을 외면하지 않고 교양으로서 소양을 갖추어야 할 필요성이자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그 점에서 이와 같은 교양 과학서의 지속적 대중화 노력의 가치가 있다.

 

인간이 생각하는 중요한 가치는 그 자체로 상상이기에 우리의 상상으로 지켜내야 한다. 인간의 행복이라는 비과학적 대상에 대한 인문학적 고민이 없다면 인간은 불행해질 거다. (P.229-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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