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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좋으면 다 좋아 ㅣ 셰익스피어 전집 2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1999년 11월
평점 :
셰익스피어의 문제극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희극도 비극도 아닌 어중간한 성격의 작품을 문제극으로 분류하는데, 분명 결말은 희극으로 끝남에도 독자에게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작품들이다. 이 희곡 <끝이 좋으면 다 좋아>도 마찬가지다.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짝사랑하던 헬레나가 버트람과의 결혼을 성취한다는 점에서 누가 봐도 희극이라고 할만하나 헬레나와 버트람의 결혼 성사가 정상적인 수단과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과연 정당하게 이루어진 것인지 의구심이 들게 한다. 특히나 버트람의 처지에서 보면 당황스럽고 황당하기 그지없는 결혼이라고 볼 수 있다.
여주인공 헬레나의 개인적 자질에 대해서는 극 중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백작부인은 그녀를 딸처럼 키웠으며 헬레나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을 눈치채고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지원한다. 제5막에서 헬레나가 죽었다고 오인한 왕은 그녀를 보물에 비유하며 애석해한다. 이 모두가 헬레나가 뛰어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평가다.
(헬레나) 그분을 사모하는 건 천상의 빛나는 별을 연모하여 그와 결혼하려는 것과 같아, 그분은 별처럼 그렇게 높은 곳에 계시지 뭐야. 내가 감히 어찌 그 성좌에 오를 수가 있담. 다만 그 별에서 비쳐오는 빛을 받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P.25, 1막 1장)
(헬레나) 오! 이루지 못 할 사랑인 줄 뻔히 알면서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 불쌍한 것을 가엽게 여겨 주세요. 찾을 것을 애써 찾을 수도 없고, 남몰래 사랑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 신음하며 살다가 죽어갈 것이니 말이에요. (P.45-46, 1막 3장)
헬레나는 자신의 신분상 한계를 자각한다. 그녀가 버트람을 연모하지만 현실에서는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명확하게 자각한다. 그저 마음속에만 품을 생각이라고 다짐하던 그녀는 왕의 병을 치료하는 조건으로 버트람과의 결혼을 요구한다. 버트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과연 그가 자신을 아내로 받아들일지 여부 등에 대해서는 한 치의 고민도 없다. 어떤 수를 써서든 쟁취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는 판단인 것이다. 이렇듯 그녀는 상반되는 행동 변화를 일으키며 버트람이 그걸 받아주길 무리하게 기대한다.
(헬레나) 전 제가 얻은 이 부귀를 받아들일 가치도 없는 여자고, 또 감히 제것이라고 주장할 생각도 없지만... 역시 제것은 제것이에요. (P.87, 2막 5장)
버트람의 생각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결혼은 당사자의 의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양가의 부모가 합의하면 충분하고, 혹여 남성이 자신이 마음에 둔 여성과 결혼하려고 부모를 설득하는 사례는 있지만, 여성이 전면에 나서서 결혼을 추진하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버트람은 헬레나를 결혼 상대로 전혀 생각조차도 해 본 적이 없다. 그의 눈에 헬레나는 하녀에 가까운 존재일 뿐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아내 지위를 차지하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일 것이다. 그로서는 거부할 수 없다. 거부는 곧 왕명을 거역하는 셈이므로.
(버트람) 신은 저 처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선친께서 거둬 교육시킨 빈한한 의사의 딸인데, 그런 여잘 신의 아내로 삼으라는 말씀이십니까? (혼자말로) 차라리 멸시로 영원히 파멸하는 것이 오히려 낳겠다! (P.72, 2막 3장)
(버트람) 난 강제로 결혼 당한 거요, (P.124, 4막 2장)
헬레나는 버트람을 확실한 자기 남편으로 만들기 위한 계책을 꾸민다. 이른바 침대 속이기를 통해 남편의 반지를 가로채고 동침하여 임신한다. 이런 책략에 대해서 자신이 그의 법적인 아내이므로 정당화하는데, 여기서 표제의 문구가 등장한다.
(헬레나) 자, 그럼 출발해요, 마차 준비도 돼있어요, 세월이 가면 우리도 되살아 날 거예요. “끝이 좋으면 다 좋아”예요. 그리고 끝은 면류관이죠. 어떤 험한 길을 가고 나면 명예가 있어요. (P.144, 4막 4장)
나중에 왕도 헬레나와 버트람의 재회 장면을 바라보면서 비슷한 논평을 한다.
(왕) 차차 모든 전말이 세세히 밝혀질 테지. 어쨌든 만사 끝이 좋으면 다 좋게 되는 법이니 좋은 일이 아니냐. 씁쓸한 지난 일은 다 흘려버리고, 앞으로 달콤한 일들만이 반갑게 찾아올 것이다. (P.174, 5막 3장)
‘끝이 좋으면 다 좋아’는 철저한 결과 지상주의적 표현이다. 현대사회의 우리네 가치관과는 전혀 배치되는데, 결과가 제아무리 좋아도 과정과 절차에서 비도덕적이거나 하자가 있다면 결과 자체도 인정받지 못하는 게 지금이다. 즉 표제의 지향점은 전근대적인 사고를 내포하고 있는데, 셰익스피어가 이를 표제로 삼은 게 긍정적 의미인지 아니면 역설적 의미로 사용했는지 미묘하다.
왕과 백작부인이 헬레나의 가치를 못 알아보고 떠나버린 버트람을 비난하기에 앞서, 헬레나가 보물임을 알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버트람에게 주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버트람을 속여서 반지를 빼내고 아이를 잉태하였음을 조건으로 제대로 된 결혼을 요구하는 헬레나의 태도, 침대 속이기에서 여인 헬레나라는 사실을 모른 채 열렬한 사랑을 보여준 버트람을 조소하는 듯한 발언 등을 보면 헬레나에 선뜻 호감을 갖기 어렵다.
(헬레나) “내 손가락에서 이 반지를 빼내고, 내 자식을 잉태하였을 때 등”요. 이제 다 이뤄졌어요. 둘 다 말씀대로 됐으니 이젠 당신은 저의 남편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P.173, 5막 3장)
(헬레나) 남자란 이상도 해요. 그토록 미워하던 사람을 그렇게 어여쁘게 대해 줄 수 있다니 말예요.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눈이 멀어서, 암흑도 무색할 정도로 욕정의 불꽃을 튀기니! 색정이란 그런 건가 봐요, 사람이 바뀐 줄도 모르고, 역겨워하던 사람을 그렇게도 애무하다니 이 얘긴 나중에 또 하기로 해요... (P.144, 4막 4장)
버트람은 헬레나의 높은 기대와 평가를 받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이는 인물이다. 그는 극히 평범한 귀족 자제에 불과하다. 패롤리스라는 비열한 허풍쟁이를 친구이자 동료로 믿었으며, 예쁜 여자를 보면 넘보기에 허겁지겁하는 그에게 별다른 미덕을 찾기 어렵다. 게다가 자신의 부끄러운 행위를 숨기기 위해서 정숙한 여성을 미친 여자, 천한 창녀로 모욕적인 언사도 함부로 하는 어리석은 면모까지 보인다. 뻔히 드러날 거짓말을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남용하니 한심스럽기조차 하다. 그렇더라도 그가 헬레나의 속임수에 빠져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되는 사건이 용납된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이 극에서 희극적 역할을 담당하는 배역은 어릿광대와 패롤리스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어릿광대는 무겁고 진지한 분위기에서 유독 제 마음대로 지껄이는 특권을 부여받은 존재인 동시에 아무도 발설하지 못하는 진실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인물이다. 이 작품에서 어릿광대는 희극적 분위기 조성에 기여할 뿐 그리 큰 인상은 남기지 않는다. 오히려 패롤리스가 해학과 악역의 이중적 역할을 맡아서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에 대한 극 중 인물의 평가는 철저히 부정적이다.
(라후) 이제 너의 정체는 다 드러나고 말았어. 그러니까 너 같은 잔 없어져도- 눈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이 말이다. 길바닥에서 주운 넝마밖엔 안 되는 자이니까. 아니 그만한 가치도 없단 말이다. (P.76, 2막 3장)
(백작부인) 아주 치사하고 못난 사람이지. 사악한 간교에 차있고요. 내 아들의 타고난 착한 심성도, 그자의 요살스런 농간으로 타락한 겁니다. (P.97, 3막 2장)
(마리아나) 이 악당아, 콱 뒈졌으면 좋겠다! 패롤리스란 관리인데, 그 젊은 프랑스의 백작에게 추잡한 짓을 시키려는 곱살 낀 쓰레기 같은 뚜쟁이라구요. (P.103, 3막 5장)
(귀족2) 그잔 참으로 비열한이오, 터무니없이 큰 거짓말쟁이입니다. 거기다가 약속을 떡먹듯이 어기는 자죠. 백작께서 신임하시는 그 심덕을 받을만한 점은 전혀 없는 자입니다. (P.108, 3막 6장)
패롤리스는 주위 사람들의 함정에 빠져 버트람의 뒤통수를 치고 자신의 본색이 탄로 난다. 대개 악역은 정체가 드러나면 그것으로 회복할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버리는데 이 작품에서 패롤리스는 그렇지 않은 게 이색적이다. 알고 보면 패롤리스는 극 중 인물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악한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리숙한 버트람을 뜯어먹고 호의호식 하려다가 자충수에 걸려든 미워할 수 없는 악당에 가까울 수도. 겉만 그럴듯하지만 실은 겁 많고 단순한 허풍쟁이로. 라후가 그를 받아주는 까닭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패롤리스) 그저 타고난 그대로 살아가야지. 스스로 허풍쟁이로 아는 자는 조심해야한다. 제가 아무리 허풍을 떨더라도 언젠가는 꼭 들통이 나서 바보가 되고 말 테니까 말이다. 검이여, 속슬어라! 붉어진 뺨이여, 냉정을 찾아라! 패롤리스는 치욕 속에서 편히 살리라! 바보 꼴이 됐다면 바보답게 번창할 것이다! (P.142, 4막 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