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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ㅣ 셰익스피어 전집 34
윌리엄 셰익스피어, 신정옥 / 전예원 / 2011년 1월
평점 :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 소위 문제극으로 분류되는 작품이다. 전설적인 트로이 전쟁으로 작품 배경으로 삼고 있는 이 희곡은 희극에도 비극에도 속하지 않는다. 사랑에 배반당하는 트로일러스, 아킬레스에게 살해당하는 헥토르를 보면 비극적 색채가 강하지만, 트로일러스는 침몰하지 않으며 헥토르의 죽음은 그를 더욱 빛나게 한다. 이 작품은 참다운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개를 보이고 있는 동시에 뚜렷한 주인공이 부재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표제 그대로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를 주인공으로 보기에는 작품 내 분량과 비중 면에서 취약하다. 헥토르, 율리시즈, 아킬레스, 아가멤논 등 전쟁의 주역이 차지하는 역할이 크다. 앙상블 희곡에 가깝다.
(율리시즈) 대 아킬레스 장군입니다, 장군이야말로 / 우리 군의 원동력이요, 귀감이라고 받들어 모시고 있으나, / 그 허황된 명성에 지나치게 도취하여 / 자만심으로, 군막 안에서 우리의 작전을 / 비웃고 있습니다. (P.46, 1막 3장)
이 작품의 중요한 관전 포인트는 전쟁과 사랑이다. 독자가 흔히 기대하는 트로이 전쟁의 신화화된 전사와 영웅의 이미지는 여기에 없다. 아킬레스는 오만함의 극치이며, 아이잭스, 즉 아이아스는 단순하고 멍청하다. 헥토르는 전쟁에 탐탁해하지 않지만 조국의 명예를 위해 싸움에 나선다. 작가는 아킬레스의 영웅성을 약화시키려고 유명한 서사시의 내용을 수정한다. 아킬레스는 헥토르와 정당한 대결을 벌여 쓰러뜨리지 않는다. 무장을 벗고 쉬고 있는 헥토르를 무참히 살해한다.
(헥토르) 나는 무장을 풀고 있다, 그런데도 네 멋대로 하느냐, 그리스 놈아.
(아킬레스) 내리쳐라, 이 사람들아, 내리쳐. 내가 찾던 그놈이다. / (헥토르를 살해한다) / 자, 다음엔 일리움 성, 네가 쓰러질 차례다. 트로이여, 망해라. / 여기 너의 심장이, 너의 근육이, 너의 뼈가 누워 있다. (P.213-214, 5막 9장)
광대 서사이테스는 그의 특권을 활용하여 등장인물을 마음껏 희롱하고 조롱한다. 광대의 재담 속엔 진실이 숨어 있는 게 셰익스피어 작품의 특징이다. 그의 주된 목소리를 귀기울여 보면 전쟁에 대한 강력한 환멸과 비난, 냉소를 알아차릴 수 있다. 여자 하나 때문에 발발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전쟁. 박진감 넘치는 전투 장면도, 위용을 자랑하는 영웅도 부재하고, 음모와 비열함, 어리석음이 주도하는 전쟁은 누구도 찬성하지 않으리라. 이렇듯이 반전 메시지로 해석하는 게 충분히 타당한 작품이다.
(서사이테스) (방백) 온통 속임수, 사기, 협잡투성이다. 모든 문제가 화냥녀과 오쟁이꾼에서 일어난 일이다-다툰다고 파당을 짓고, 피를 흘리며 죽기 살기를 마다하지 않고 아주 알맞은 명분이군. 자, 그런 명분에 농가진(膿痂疹)이나 걸려라, 전쟁과 색욕으로 모두가 작살나는 거다! (P.82, 2막 3장)
연인의 만남과 밀당, 그리고 약속에 이르는 과정은 흥미로우면서도 유쾌하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은 현실과 상충하여 금방 깨어지기 일쑤다. 크레시다의 마음은 얼마나 절실하고 자신만만했던가.
(크레시다) 하늘이 두 조각나도, 가지 않겠어요. 숙부님. / 전 육친의 정 같은 건 없어요. / 제겐 친척이니, 애정이니, 혈족이니, 영혼도, 사랑하는 / 트로일러스님 만큼 소중한 건 없어요. 오, 신성한 신들이시여. / 제가 트로일러스님을 떠난다면, 크레시다의 이름을 모든 부정한 것의 / 끝장으로 삼아주십시오! (P.143, 4막 2장)
연인의 변심은 누구도 원치 않지만 언제라도 생길 수 있는 법이다. 트로일러스는 크레시다의 배신에 치를 떨지만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으리라. 트로이에서 그리스로 신원이 이관된 마당에 적국의 왕자를 계속 사랑한다는 건 더 이상 현명한 행동은 아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듯이 그녀의 변심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다만 불가피성을 인정하더라도 예상보다 빨랐던 점이 그녀에 대한 한가닥 아쉬움이라고 할까. 트로일러스가 준 정표를 새 애인을 유혹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한다는 점도 부정적 평가를 더한다.
(율리시즈) 아니, 못써요, 저런 여잔! / 눈으로도 말을 하고, 뺨도 입술도 그렇고, / 아니, 발마저도 얘기를 하고 있으니, 음탕한 기질이 / 그 여자의 사지 몸통에 곳곳에 배여 있어요. / 저렇게 어중간한 여잔 입심 좋고, / 상대방보다 먼저 자기가 꼬리를 치고 / 호색적인 자에게는 음탕한 생각에 / 가슴속을 열어 보이고 달려드니 / 기회만 있으면 몸을 내놓고 / 기꺼이 노리갯감이 되는 음탕한 계집들이요. (P.158-159, 4막 5장)
이러한 점 때문에 크레시다는 극중에서 매춘부 또는 화냥년 취급을 받는다. 율리시즈는 대놓고 크레시다를 폄하하는데, 이전까지 그녀에 대한 묘사나 대화에서 일체의 언질도 없는 마당에 갑작스럽게 박한 평가는 편견일지 예지일지 궁금하다. 그나저나 두 연인을 연결시켜 준 판다러스는 무슨 죄인가? 양자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여 추진하였던 정사가 졸지에 어그러지고, 끝내는 뚜쟁이 취급마저 당한 그의 회한은 처절한 울림을 남겨준다. 이래서 중매는 함부로 서는 게 아니라는 교훈이랄까?
(판다러스) 유곽의 문간을 지키는 뚜쟁이 형제자매들, 지금부터 두 달만 기다려라, 내 유언장을 써줄 것이니.
지금 만들어줄 수도 있지만, 이런 골칫거리가 있으니, 윈체스터의 매독에 걸린 창녀들이 왁왁 대면 말이지. 그때까지는 나도 땀을 빼며 매독치료나 하면서 쉬어야겠다.
그때가 되면 여러분에게 나의 병이나 유산으로 주리다. (P.219, 5막 11장)
이 작품을 전후하여 셰익스피어는 4대 비극을 포함한 걸작을 연달아 집필한다. 이 시기에 그가 집중적으로 묻고 파헤치고자 하는 것은 인간성의 본원적 모습이다. 인간의 내면은 획일적이지 않으며, 고귀함과 저열함, 순수함과 더러움, 사랑과 증오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결과에 무관하게 의도의 선함만을 중시할 수 없으며, 의도는 외면하고 결과가 인정해서도 안 된다. 여기서 작가는 아킬레스를 낮추고 헥토르를 띄우며, 크레시다를 본래부터 화냥끼가 있는 여자로 격하시키는 듯하지만 그것이 결코 그들의 참모습이 아님을 독자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복잡다단한 존재이며, 인간사는 정해진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