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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의 타이먼 ㅣ 지만지 희곡선집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강태경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셰익스피어의 비극으로서도 이례적으로 처절할 정도의 강렬함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처절함에서는 <리어왕>과, 강렬함에서는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과 맞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무나도 선명한 주제의식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성까지 굉장히 목적 지향적 작품으로 비치는 이 작품은 배금주의 비판과 인간 혐오 사상을 바닥에 짙게 깔고 있다.
(타이먼) 과연 돈이란 신과도 같구나! 이런 돼지우리만도 못한 육신도 금을 가지고 있으니 숭배를 받는구나! 범선의 돛을 올리고 망망대해의 거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게 하는 것도 황금이요, 일확천금한 노예가 만인의 존경을 받게 하는 것도 돈이라. 돈이여, 영원히 경배받아라! 그대를 보고 환호하며 오직 그대만을 섬기는 신도들에게 역병의 면류관을 씌워 주어라! (P.151-152, 5막 1장)
작품 전반부에서 보여주는 타이먼은 성인의 모습과도 같다. 국가와 사회에 헌신하며,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날마다 연회를 베풀어 사람들을 대접하는, 그러면서도 남에게 보답을 바라지 않고 자체로서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은 그를 기리고 그와 친구가 되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그의 베풂에 무한한 감사를 표하며 때가 되면 반드시 갚을 것을 항상 표현한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하여 그의 재력이 고갈되자 타이먼은 표변하는 세상인심을 절감하게 된다.
이 대목에서 우리네 범인과 타이먼의 선택은 달라진다. 우정을 저버린 사람들을 향한 비난과 저주는 공통적이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재기를 기약하며 재기 후에는 등 돌린 자들을 외면할 뿐이다. 타이먼은 전혀 다르다. 그는 인간과 사회 자체에 혐오를 느끼며 저주를 퍼붓고는 아테네를 떠나 숲으로 은거해버린다. 3막 후반부터 독자가 대하는 타이먼의 육성은 인간 혐오의 메시지를 매우 거칠고 반복적으로 담고 있다. 염세주의자의 극단적인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타이먼을 소개해주면 충분할 정도다.
(타이먼) 이놈의 집을 불태워라! 썩어 빠진 아테네는 와르르 무너져라! 지금부터 이 타이먼은 인간과 인류 전체를 증오하며 살겠다! (P.102, 3막 6장)
(타이먼) 오, 친절한 신들이여 들으소서. 이 성 안팎의 모든 아테네인들을 멸하소서! 타이먼의 가슴속에 싹튼 이 증오심이 모든 종류의 인간, 전 인류를 향한 증오심으로 자라나도록 해 주소서! 아멘! (P.109, 4막 1장)
독자는 여전히 마뜩잖은 뒷맛을 느끼는데, 제아무리 큰 실망과 배신을 겪었다고 하더라도 전 인류에 대한 타이먼의 증오와 혐오가 과도하며 온당치 않다는 생각에서 비롯한다. 타이먼은 절대적으로 옳고, 아무런 잘못이 없었는가. 세상은 타이먼의 외침처럼 무너져 망해버려야 할 정도로 부패하고 타락한 곳이며, 세상 사람 모두는 그런 대가를 받아 마땅한지를.
(플라비어스) 그래도 말씀드려야 해. 재산을 탕진하고 나서야 후회하시겠냐고, 그땐 후회해도 아무 소용 없다고 말이야. 선심이라는 것은 자신의 곳간을 들여다보는 눈이 없으니 한탄할 노릇이지. 남에게 선심을 베풀다가 자신이 망하는 것도 알지 못하니 말이야. (P.35-36, 1막 2장)
(애피멘터스) 타이먼, 자네의 무절제한 적선 행위는 너무 오래 계속되어 왔어.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자네 자신마저 기부금 약정서가 되어 사라지고 말걸. 도대체 허영과 사치로 가득한 이따위 연회를 왜 열어야 한단 말인가? (P.41, 1막 2장)
작품 곳곳에 타이먼의 소위 자선 행위에 대한 경고와 조언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집사 플라비어스는 충직한 마음에서, 애피멘터스는 철학적 견지에서 타이먼에게 그의 행위가 무절제하고 과도함을 지적하지만 타이먼은 이를 간단히 무시해버린다. 그는 오히려 집사의 직무 태만을 언급하며 책임회피의 태도마저 드러낸다. 1막에서 시인의 시상이 나타내는바 또한 행운의 여신이 그를 내치면 앞날이 달라질 것을 암시하고 있다.
타이먼은 제4막에서 자신이 세상을 ‘과자 가게’로 만들려고 했었다며 변명한다. 타이먼의 바람처럼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세상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다면 타이먼의 행위도 변호 받을 만하다. 이에 대한 반증을 독자는 제3막의 시민 1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시민 1은 타이먼에게서 은혜를 받거나 그의 식객이 된 적이 없다고 한다. 여기서 타이먼의 연회에 초대받은 사람은 원로원 의원, 귀족과 부유한 상인, 그에게 대가를 바라는 예술가들임을 극의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타이먼의 베풂은 처음부터 대상의 한계가 분명하여 일반 시민은 직접적으로 혜택받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나중에 모든 아테네 시민과 세상 사람 모두를 저주한다.
(타이먼) 그만! 더 이상 설교는 그만두게. 칭찬을 받으려고 베푼 것이 아니야. 그런 마음 품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그저 주고자 해서 베푼 것이 현명하진 못했다 하더라도 비열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P.58-59, 2막 2장)
타이먼은 자신의 베풂이 칭찬과 대가를 바라고 한 게 아니라 베풂 자체의 미덕을 좋아해서라고 밝힌다. 집사와 철학자는 연회의 흥청망청함과 선물의 과도함을 지적하지만 그는 귀도 기울이지 않는다. 소위 친구들을 향한 보은 요청이 거부당하였을 때 어차피 베풂에 방점을 둔 행위였다면 그로서는 그렇게 극도로 절망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다소간 실망을 할 테고 자신의 자선 행위를 근본적으로 반성하는 정도였으리라. 타이먼의 반응이 정반대이다. 그는 우정의 배신자들을 증오하고 악담을 퍼붓는다. 나아가 배금주의로 타락한 사회와 세상 전체를 저주한다. 남녀노소조차도 구분없이 모두를 죽여버리라고 촉구한다. 극단적으로 지나친 반응이랄까? 타이먼에 그다지 공감되지 않는 게 나만은 아닐 것이다.
(타이먼) 어서 가서 신들이 타락한 도시에 쏟아붓는 역병과도 같이 아테네를 휩쓸어벼려. 그 칼로 단 한 명도 살려 두지 마. [......] 닥치는 대로 저주하고 파괴해. 어머니들의 호소도 처녀들의 애원도 아이들의 울음소리도 듣지 않도록 투구를 귀밑까지 뒤집어쓰고 피범벅 된 사제들의 흰옷을 보지 않도록 방패로 눈을 가리는 거야. (P.121-122, 4막 3장)
타이먼은 자신의 행위를 오해하고 있다. 자신은 자선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를 제외한 누구도 자선으로 여기지 않는다. 애피멘터스의 말마따나 두툼한 고기를 뜯어 먹고 있을 뿐이며, 잔칫상에 몰려드는 파리 떼일 뿐이다. 그는 세상의 배금주의를 비난하지만 그 또한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돈의 위력을 마음껏, 아낌없이 휘두르면서 고귀하고 위대한 타이먼으로 찬미 받는 것을 은근히 즐기고 있던 게 아닐까.
(애피멘터스) 오, 신들이여! 수많은 무리가 타이먼이라는 두툼한 고기를 뜯어먹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그걸 모르다니요! 수많은 사람들이 발기발기 찢은 고기 조각들을 죄다 한 사람의 피에 찍어 먹고 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요! 정말 미친 짓은, 피 흘리는 본인이 그러라고 모두를 북돋우고 있답니다. (P.27-28, 1막 2장)
장군 알시바이어데스의 행보는 타이먼과 비교된다. 타락한 아테네의 권력층에 의해 추방당한 그는 숲속에 들어가 맨몸으로 광인처럼 울부짖는 대신 군대를 모아서 아테네로 쳐들어간다. 그가 원로원 의원을 향한 그의 일갈은 피지배층의 지배층에 대한 시원한 사이다에 다름 아니다. 다만 그는 조국을 무너뜨리는 대신에 아테네의 개혁 약속에 동의한다.
(알시바이어데스) 지금까지 당신들은 국가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 당신들 마음대로 휘둘러 왔소. 당신들 뜻대로 정의를 조작하고 전횡을 일삼아 왔소. 지금까지 나와 같이 당신들이 휘두르는 권력의 그늘 아래 잠들어 있던 자들은 두 팔을 꽁꽁 묶인 채 고통의 한숨만 헛되이 내쉬며 무기력하게 방황해 왔소. (P.166, 5막 4장)
작가도 타이먼의 길이 옳지 않음을 알고 있다. 타이먼은 시민 1과 플라비어스처럼 올곧은 마음씨를 지닌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간과하고 있다. 애피멘터스도 제4막에서 타이먼이 “인간성의 양극단만 알지 중용”을 모른다고 비판한다. 그럼에도 이쯤에서 눈에 뻔히 보이는 오류를 품고 있는 타이먼을 전면에 내세운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다. 배금주의에 물들어 잠식되고 있는 사회에 대한 경고라면, 작가는 적당한 수준의 비난은 별로 효과가 없으리라 판단한 모양이다. 극약 처방을 해야지 그나마 약발이 먹힌다고 생각했던 듯, 타이먼의 발언 강도와 양은 시종 극단적이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결코 중단하지 않는다. 그의 묘비명을 보라.
‘여기 나 타이먼이 잠들다. 내 살아서는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을 증오했고 죽어서도 영원한 저주만을 남기노라. 그러니 내 무덤 앞에 그대의 발걸음을 멈추지 말라.’ (P.170, 5막 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