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 - 전예원세계문학선 셰익스피어 전집 14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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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어스 시저>의 속편 격이다. 시저 사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앤토니]의 협력과 반목, 그리고 대결을 다루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안토니우스의 패배와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는 로마제국의 실질적 성립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중요한 분기점이다. 안토니우스 부인이 일으킨 내전, 삼두정치, 아들 폼페이우스와의 전쟁, 그리고 유명한 악티움 해전, 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최후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내용상으로도 분량상으로도 작품의 중추를 이루면서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으므로 당대 로마사를 희곡으로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역사극으로 간주할 만하다.

 

셰익스피어는 굳이 작품명에서 앤토니와 옥타비아누스가 아닌 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를 택하였다. 작가가 이 작품을 단순히 역사극이 아닌 두 사람의 관계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앤토니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는 정치적 동맹이자 연인 관계이다. 클레오파트라가 앤토니와 손을 잡은 이유는 당초 이집트의 보전에 있었다. 그리고 앤토니의 인간적 매력에 사적 관계로 발전할 것이다. 물론 앤토니는 클레오파트라의 여성적 매력에 애초부터 매혹당하였을 것이고.

 

(미시너스) 이제 앤토니 장군은 그 여인을 버려야 할 거요.

(이노바버스) 천만의 말씀. 버릴 수 없지. 나이를 먹어도 시들지 않고 사귀면 사귈수록 익힌 재주가 무궁무진하여 그녀는 항상 새로운 변화를 보이는걸. 다른 여자들은 남자에게 만족을 주고 나면 염증을 받게 마련인데, 여왕은 가장 포식했을 때 더더욱 욕구를 느끼게 하는 거지. 세상에서 가장 야비한 짓도 여왕이 하면 좋게만 보이고, 그래서 거룩한 사제들도 그녀의 방종만은 오히려 축복한다 이 말이지. (P.64, 22)

 

작가는 두 사람의 관계를 완전한 사랑과 화합보다는 다소간 애증의 관점으로 묘사한다. 앤토니는 클레오파트라에게 푹 빠져 있지만, 그녀를 심적으로 진정 사랑하기보다는 애욕적 차원이었음을 곳곳에서 표출한다. 그녀와의 관계와 생활을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어떡하든지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장면이 그러하다. 그가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와 결혼을 생각하면서 한편으론 이참에 클레오파트라와 관계를 정리하고 싶다는 내심도 있었으리라. 앤토니가 마지막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재차 도주에 퍼붓는 욕은 단순한 패전의 실망감 탓은 아닐 것이다.

 

(앤토니) 내 마음을 홀리는 요부 같은 여왕과는 손을 끊어야 해. 나의 이 타락한 생활을 상상도 못할 무수한 해악을 빚어낼 거다. (P.31, 12)

 

(앤토니) 모든 것이 끝장이다! 그 더러운 이집트 년이 날 배반했어. 내 함대는 모두 적에게 투항하고 거기서 모자들을 높이 던지면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처럼 함께 축배를 들며 야단들이다. 세 번씩이나 사내를 갈아치운 화냥년! 저 애송이 놈에게 날 팔아먹었겠다. 내 마음은 너에 대한 증오뿐이다. [......] 난 배신을 당했다. , 이 부정한 이집트 년! 이 지독한 화냥년! 그년의 눈짓 하나로 아군을 전쟁터로 몰아내고 끌어들이고 했잖은가. 그 여자의 가슴은 나의 면류관이요, 나의 목적이었거늘-집시의 본성을 드러내, 술책을 써서 날 속여 죽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처넣었다. (P.160-161, 412)

 

앤토니는 그럼에도 클레오파트라를 놓지 못한다. 그를 향한 그녀의 애정은 한결같았고, 그녀가 없이는 그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에 자살을 감행한 앤토니가 아니었는가.

 

이 작품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여왕으로서 보다는 앤토니의 사랑을 갈구하는 일개 여인으로 비친다. 그녀는 시저에 대한 애정은 풋내기의 것이었고 지금 앤토니와의 사랑이 여인으로서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밝힌다. 클레오파트라가 보기에 앤토니는 더없이 고결하고 용맹하고 이지가 조화된 완벽한 인간이다. 그녀가 앤토니의 부인 펄비어의 사신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앤토니와 새로 결혼한 옥테이비어에 경쟁심과 질투심을 보이는 대목은 역설적으로 앤토니에 대한 그녀의 애정 정도를 보여준다.

 

(클레오파트라) , 어쩌면 그렇게도 균형이 잡힌 성품이실까! 봐라, 차미언, 그게 바로 그분이시다. [......] 하지만 두 가지의 중간이란 참으로 훌륭한 조화시다! , 참으로 신묘한 천품이시다! (P.47-48, 15)

 

(클레오파트라) 하지만 그런 분이 실지로 있다 하더라도 또 과거에 있었다 하더라도 도저히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큰 인물이오. 불가사의한 힘을 창조해내는 힘은 자연이라도 공상을 따를 수는 없는 법, 그래도 앤토니 같은 분은 공상에 도전한 자연의 걸작이며 꿈의 그림자를 압도하고 남는 분이에요. (P.187, 52)

 

문제는 앤토니가 클레오파트라에 푹 빠져 있다는 점에 있다. 앤토니는 명성, 경력, 군사, 재력 등 모든 측면에서 옥타비아누스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모든 역량을 일거에 동원하였다면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는 이름이 바뀌었을 것임에도 앤토니는 이집트에서 미적거리며 벗어나지 않았다. 이집트가 당대 로마의 시각에서 보면 머나먼 변방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정치적으로 치명적인 실수를 한 셈이다.

 

(앤토니) 이집트 여왕이여, 내 마음이 당신 배의 키에 꽁꽁 묶여 있었소. 그래서 끌려갈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오. 내 영혼은 완전히 당신의 종이 되어 당신이 눈짓만 해도 신의 명령이라도 물리치고 당신에게로 달려간다는 걸 당신은 알았을 거요. (P.122, 311)

 

악티움 해전의 결전에서 앤토니 군은 그야말로 대패를 겪는다. 클레오파트라의 후퇴와 잇따른 앤토니의 철수로 제대로 된 대전도 하지 못한 채 불명예스러운 패배를 겪게 되었는데, 후폭풍이 어마어마해서 부하들의 불만과 이탈이 뒤따르게 된다. 군사적 역량과 재능에서 남다른 우위에 있었던 앤토니지만 이제 그의 우위가 소멸하고 만 셈이다.

 

(스캐어러스) 계집이 뱃머리를 바람 부는 쪽으로 돌리자마자 그 계집에게 혼을 뺏긴 앤토니는 돛을 펄럭거리면서 암컷에 반한 수오리처럼 치열한 전투를 팽개치고 여왕을 뒤따라 달아났다구. 이런 수치스런 전쟁은 내 일평생을 두고 본 일이 없소. 전투의 경험과 남자의 기개와 명예를 그렇게 더럽히다니. (P.118, 310)

 

극 중에서는 강점을 지닌 육전을 주장하는 부하 장수의 의견을 무릅쓰고 해전을 감행하는 그의 무모함과, 지나친 공을 세우는 부하의 위험성을 설파하는 수하 벤티디어스의 의견을 통해 그의 결점을 보여주며, 한편으로는 이노바버스의 배반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넓은 아량과, 명예와 고결함에 대한 자신과 타인의 공통된 칭송을 통해 그의 미덕도 알려준다. 특히 이노바버스의 충성과 배반, 그리고 자책에 따른 죽음은 약점과 강점을 고루 갖춘 앤토니의 인간적 면모를 그대로 드러낸다.

 

앤토니와 옥타비아누스의 역사적 대결을 생각하다 보니 중국 역사에서 항우와 유방의 일대 사건이 저절로 비교된다. 양자는 여러 면에서 유사점을 지닌다. 우선 승리자는 후대 제국의 시초가 되었다, 로마제국과 한 제국. 초반 형세와 탁월한 개인적 능력만을 놓고 보면 승리자보다는 패배자가 된 앤토니와 항우가 우세하였다는 점. 시저를 살해한 브루투스 일파를 제거하고 사태를 장악한 인물은 앤토니였고, 용맹, 지위와 세력 모든 면에서 그는 옥타비아누스보다 압도적이었다. 항우는 두말할 나위 없다. 옥타비아누스와 유방은 자신의 개인적 능력보다는 부하들의 역량에 많이 의존하였는데, 이들을 잘 아우르고 부릴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능력이 빼어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 항우와 우미인은 모두 연인과 더불어 죽음으로 최후를 맞이하였다는 점도 그러하다.

 

(시저) 이 세상의 어떤 무덤도 이렇게 고명한 한 쌍을 품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비참한 사건은 그 사건을 일으킨 자에게 큰 감동을 주는 법.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비극을 빚어낸 승리자의 영광이기도 하겠으나 온 세상의 영원한 동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P.200, 52)

 

경쟁자의 최후를 바라보는 승리자의 개인적 소회일 수도 있으며 패배자에 대한 배려가 담긴 발언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시신을 앞에 둔 옥타비아누스의 마음도 복잡다단할 것이다. 홀가분하면서도 허탈한 심경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열 전망에 대한 기대감 등등. 어쨌든 그로서는 이제 승리자의 아량을 보여주지 않을 이유가 없으리라.

 

셰익스피어는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보다 앤토니에게 더욱 깊은 관심과 연민을 보인다. 결점과 미덕을 골고루 보여주어 그를 일방적으로 매도하지도 않으며, 전설적인 패배자로서 영웅화하지도 않는다. 그저 권력과 사랑 사이에서 죽음에 이르러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 한 인물을 가감 없이 묘사한다. 스스로의 말마따나 앤토니는 시저에게 패배당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정복당하였다. 보기 드문 영웅이 지닌 유일한 결점, 즉 한 여인을 향한 깊은 사랑 때문에. 독자는 그런 앤토니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 그의 약점은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회피할 수 없는 근원적인 것이며, 그것이 인간 사회를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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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올라누스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셰익스피어 전집 1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조덕희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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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코리올란 서곡으로 내게 익숙한 코리올라누스는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소개된 인물이라고 한다. 그만큼 고대 로마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긴 장군인데, 이 희곡을 통해 살펴본 그의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어렵게 군주정을 종식하고 얻은 공화정인데 로마에서 추방당하자 오히려 외적을 이끌고 조국을 쳐들어온 인물에 대한 평가가 좋을 리가 없으리라.

 

이 작품은 역사극이자 한층 정치극이다. <작품 해설>에 이 희곡의 특징이 요약되어 있어 인용한다.

 

민중들의 반란, 민중들에 대한 귀족들의 혐오감, 민중들의 이중성과 가벼움, 그러한 민중의 속성을 이용하려는 세력, 그 세력과 귀족들의 대립, 민중과 대립했던 귀족의 몰락, 그 귀족이 취한 적과의 동맹, 그 동맹 안에서 다시 벌어지는 계략과 그로 인한 죽음 등 이 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적인 톤을 유지한다. (P.268)

 

공화정이 곧 민주정을 지칭하지 않는다. 로마 공화정은 형식적으로 민중의 지지를 받아 실제로 귀족이 통치하는 체제다. 최고 통치자인 집정관이 되려면 민중 앞에서 유세하고 표를 줄 것을 호소하는 모습이 흡사 오늘날의 선거와 유사하다. 시장이나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전통시장을 돌아다니며 상인들 각자에게 깊은 관심과 동정을 기울이는 체한다. 실제로 관심 없고 하기 싫어도 겉으로 보여주는 효과를 위해서라도 필수적인 코스다. 고대 로마의 귀족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뭐 민중들의 안위와 생활에 큰 관심이 있겠는가. 그랬다면 기근으로 고통받는 민중들의 구제를 위해 식량을 풀었을 테지만, 그들은 이를 거부하였고 여기에 앞장선 이가 바로 마르티우스, 훗날 코리올라누스다.

 

마르티우스에 대한 평가는 내외가 일치한다. 고결하고 도도하며 지극히 오만하다는 점. 전자는 귀족들 내부의 평가이며 후자는 호민관의 생각이다. 그는 민중들을 대놓고 혐오하며, 이것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 그는 다른 귀족보다 솔직한 셈이다.

 

(마르티우스) 전쟁은 두려워하면서도 평화롭게 살게 해 주니 몸이 근질근질한 것이냐 이 미천한 똥개 같은 놈아. (P.27, 11)

 

(마르티우스) 목매달아 죽여도 시원치 않은 놈들 같으니! (P.29, 11)

 

(코리올라누스) 이 똥개 같은 놈들! 나는 너희가 숨 쉴 때마다 풍기는 악취를 혐오한다. (P.169, 33)

 

그의 반민중관의 가장 압권은 31장에서 나타난다.

 

(코리올라누스) 내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저 변덕스럽고 시궁창 내 풍기는 종자들에게 똑똑히 들려주어서 제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똑똑히 알게 해줘야겠습니다. 내 다시 말하지만 저딴 놈들에게 알랑방귀를 뀌어대며 우리 귀족들과 어우러져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마치 우리가 애써 일군 땅에 폭동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P.129, 31)

 

(코리올라누스) 또다시 민중들에게 양보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정의는 그 가치를 잃고 말 것이요, 로마는 건전한 원칙과는 거리가 멀어질 것입니다. (P.134, 31)

 

이 희곡에서 코리올라누스가 내뱉는 대사의 대부분은 이렇듯 민중을 폄하하고 혐오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귀족들의 속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는 솔직하지만, 집정관이 되기 위해서는 낙제점이다. 모름지기 정치의 요체는 가면을 쓰는 데 있지 않은가. 그의 어머니 블룸니아의 말처럼 말이다. 그의 명예와 고결은 철저히 개인 중심주의에 근거하였다고 보는 게 맞다. 그토록 모친에게 순종적이던 그가 여기서는 그의 어머니 말을 좇는 데 실패하였으니.

 

코리올라누스가 진정으로 고결한 사람이라면 로마를 증오하고, 로마에 복수하고자 하는 반역 행위를 해서는 아니 되었다. 그는 유아독존적인 독선주의에 매몰되어 스스로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며 반사회적인 행위조차도 서슴없이 자행하였으니 그에게 있어 고결함이란 목적이 아닌 도구 또는 수단에 불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코리올라누스) 난 단지 나를 내쫓은 자들에게 내 이 고통을 그대로 되돌려주고자 이곳에 왔소. 허니 만약 그대가 그동안 그대의 원한을 풀고 조국의 치욕을 씻고 싶은 복수심을 키워왔다면, 나의 이 비참한 처지를 이용하여 나를 그대의 편에 서게 하시오. 나는 지옥 불처럼 끓는 분노심을 가지고 나의 조국과의 싸움에 임할 것이니, 조국에 대한 나의 증오는 그대에겐 이득이 될 터. (P.193, 45)

 

앞서 읽은 <줄리어스 시저>가 군주정과 공화정의 대립을 다룬다면, 이 작품은 귀족정과 민주정의 갈등을 제재로 한다. 민중의 표변성과 우매성은 새삼스럽지 않다. 전작에서 이미 폼페이를 잊은 민중에 대한 비난이 있었듯이, 수백 년 더 이전을 다룬 여기에서도 민중은 코리올라누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하지만 곧 그를 민중의 적으로 내쫓는다. 내놓고 자신들을 무시하고 깎아내리는 사람을 제아무리 바보라도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두 사람의 호민관, 시씨니우스와 브루투스는 민중과 코리올라누스의 관계 설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들은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지만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정적을 제거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물론 여기서 작가는 그렇게 노골적으로 그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지만 호민관의 입김에 휘둘리기 쉬운 민중의 작태를 보면 민주정이 중우정으로 타락하는 것은 한순간임을 알 수 있다. 정상적인 선거로 집권한 후 독재와 전체주의를 강화한 역사적 사례를 우리는 잊을 수 없다.

 

오늘날 영국 사회에 여전히 명목상의 귀족 신분이 존재하지만 실질이 없다면 당대는 명백한 신분제 사회였다. 군주-귀족-평민으로 구분되는 신분 질서에서 귀족과 평민이 단합하여 군주의 권력을 약화시켰지만, 귀족과 평민의 이해관계는 근본적으로 불 속에 던져진 숯처럼”(P.181, 43)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양 계급의 대치가 빚어내는 잠재적 위험과 비극을 코리올라누스의 행적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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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어스 시저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셰익스피어 전집 11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박우수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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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투스 일파에 의한 시저의 암살은 (의도와는 정반대로) 로마 제정의 서막을 연 중대한 사건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 사건을 셰익스피어의 글자 그대로 힘차고 극적이며 웅변적인 대사를 통해 생생한 현장감을 얻는 느낌은 색다르다. 연극 무대에서 실제 공연을 봤다면 감동은 배가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시저는 표제와는 달리 주변적 인물이다. 시저의 존재감은 자신보다는 주변의 말과 평에 의해 두드러진다. 그의 행동과 대사로 판단하는 시저는 오만함과 고결함, 그리고 자신감이 한데 어우러진 인물이고, 작가 자신도 그를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4막에서 그의 유령이 나타나고 브루투스가 그의 혼령을 의식하고 있음을 통해 억울한 죽임을 당한 고결한 위인으로서 시저를 바라본다.

 

시저를 살해한 두 주인공 카시우스와 브루투스. 처남 매부 사이인 그들의 시저 살해는 상당히 다른 동기에서 비롯되었음이 드러난다. 브루투스는 시저를 사랑하고 시저도 그를 아끼는, 즉 그의 행위에 있어 사적인 감정은 개입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오직 로마 시민과 인민들을 위해, 로마의 미래를 염려하는 마음에서 시저를 칼로 찌른 것이다. 로마가 다시 군주정으로 퇴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

 

(브루투스) 내가 시저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시저가 죽어서 자유 시민으로 살기보다 시저가 살아서 노예로 죽는 편을 탁하시겠습니까? (P.99, 32)

 

카시우스는 어떤가? 시저 살해의 주범은 바로 그다. 그는 동지들을 포섭하고 브루투스를 한패로 끌어들이는데, 시저에 대한 그의 반감은 개인적 측면이 강하게 드리워져 있다. 자신이 보기에는 자기와 별 차이가 없는 그가 신적인 영웅으로 추앙받고 왕으로 추대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다. 게다가 그는 시저의 눈 밖에 난 처지다.

 

브루투스를 교묘하게 꼬드겨 시저 살해의 실리와 명분을 얻고자 하는 그 의도의 비순수성은 극 중에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시저가 폭군이 되어 로마인들을 도탄에 빠뜨릴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지나친 비약을 담고 있음에도 군주제를 반대하는 브루투스의 내심을 크게 흔들리게 만든다.

 

브루투스가 시저를 죽여야만 한다고 다짐하는 장면에서 그의 논법도 가정과 비약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진정으로 왕이 되고자 하는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시저는 이미 죽어야만 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브루투스) 지금으로서는 / 시저에 대한 불만의 원인을 찾을 수 없으니 / 이렇게 생각해보자. 지금의 시저가 힘이 / 더 강해지면 이러이러한 전제군주의 권력을 / 행사할 것이다. 그러니 그를 독사의 알로 / 간주하자. 그 알이 깨어나면 본성대로 / 위험해질 것이니 미리 알일 때 죽이자. (P.50, 21)

 

카시우스와 브루투스의 차이점은 시저 사후 카시우스의 언행을 통해 분명해지는데, 4막에서 카시우스의 관직 매매 행위를 둘러싼 정당성 여부에 대한 양자 간의 언쟁이 길게 이어져 독자에게 확실히 인식하게끔 한다. 시저가 죽었으므로 카시우스는 자신의 행동에 거리낌이 없다. 브루투스는 한치의 흠결이라도 허용한다면 간신히 확보한 자신들의 행위 정당성을 흔들릴 것을 우려한다.

 

브루투스 일파는 시저 죽음 이후를 대비하지 못하였다. 시저가 죽고 나면 만사가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품은 데 그쳤을 뿐이다. 안토니[안토니우스]의 역량을 오판한 대가는 참혹하였으니, 두 사람의 유명한 연설은 안토니가 대중을 휘어잡는 능력이 출중함을 보여준다. 브루투스는 대중의 이성에 호소한 반면, 안토니는 그들의 감정에 호소하였다.

 

(안토니) 시저는 로마로 수많은 포로들을 데려왔고 / 그 보석금으로 국고를 가득 채웠습니다. / 이것이 시저의 야심이었습니까? / 가난한 사람들이 울 때 시저도 울었습니다. / 야심가는 더 모진 사람이어야지요. / 그러나 브루투스는 시저가 야심가였다고 합니다. / 그런데 브루투스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P.103, 2)

 

공화제를 지키려는 브루투스 일파의 시도는 시저 살해를 계기로 오히려 세력을 잃고 말게 되었다. 안토니와 옥타비우스는 이를 반시저파를 제거하는 명분으로 삼아 철저하게 궤멸시켰고, 양자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이가 결국 로마의 일인자가 되었음을 역사는 보여준다.

 

셰익스피어 당대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스리는 군주제 시절이므로 시저와 브루투스는 먼 옛날의 한 일화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셰익스피어는 군주제와 공화제의 대립, 시민의 자유를 향한 브루투스의 고고한 외침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의 사후 30년도 지나지 않아 청교도 혁명이 발발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심히 넘기기는 곤란하다.

 

물론 셰익스피어는 군주제와 공화제에 대한 명시적 견해 표명을 하지 않는다. 그의 펜으로 묘사된 시저와 브루투스는 양자 모두 위대하고 고결한 인물이다. 시저는 왕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고, 왕이 되더라도 브루투스의 추측대로 폭군이 또는 폭군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다만 작가는 고상한 의도를 품은 한 인물이 사적인 친분 관계를 뛰어넘어 보다 고결한 목적을 위해 희생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비록 브루투스는 역사의 패자가 되었지만, 카시우스와는 다른 평가를 받고 있음이 이를 말해준다.

 

이 작품의 표제는 줄리어스 시저이지만 진정한 주인공은 브루투스이기에 마지막 대목에서 안토니의 대사는 그를 향한 작가 자신의 평가나 다름없다.

 

(안토니) 브루투스는 로마인들 중에서 가장 고결한 인물이었소. / 그를 제외한 모든 음모론자들은 위대한 시저를 / 시기해서 살인에 가담한 자들이오. / 오직 브루투스만이 로마 시민들의 복지와 / 사심 없는 명예심에서 음모에 가담했소. (P.166,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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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의 집 창비청소년문학 34
윌리엄 슬레이터 지음, 최세진 옮김 / 창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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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막혀 있고 오로지 계단만 존재하는 공간. 크기도 위치도 확인할 수 없으며, 인공조명에 의해 밝혀져 시간조차도 알 수 없는 곳. 영문도 모른 채 그곳에 끌려온 아이들은 보편적 인간 성격과 행동 유형의 전형적 인물형이다. 그곳의 환경과 방식에 적응하고 대응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뚜렷한 차별성을 드러낸다.

 

독자는 소설 내내 그리고 끝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궁금해하게 된다. 원체 독립심 강하고 반항주의자인 롤라야 그렇다 하더라도 제일 소심하고 약골인 피터가 아닌 나머지 아이들이 기계의 조작에 길들여지는 까닭을. 유쾌한 올리버는 깊은 생각이 없으며 지배욕이 강하고, 블라썸은 음식을 중시하는 물욕주의자인 동시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들의 험담과 이간질도 서슴지 않는다. 이 두 사람은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앞서 나가기 위해 권장되는 인물형이다. 상냥한 애비게일이 제일 안타까운데, 그녀는 기계의 작동 원리를 언뜻 예감하였지만 더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였다. 진실을 마주 대하는 두려움과 용기 부족. 이것은 전형적인 현대 사회의 대다수 소시민의 모습이리라. 결국 이런 것들이 그들의 타락을 가져왔다.

 

그녀는 직전에 느꼈던 소름 끼치는 예감이 떠올랐다. 그리고 잠시 동안 답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애비게일은 돌연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게 무서워졌다. 그녀는 춤추는 일에만 몰두하고 싶었다. 춤추고, 또 춤추고, 먹고, 잊어버렸다. (P.144)

 

가장 소심하고 나약한 피터의 반전은 놀랍다. 롤라의 의견에 자발적으로 동참하고, 유혹에 빠지려고 하는 롤라를 오히려 올바로 이끄는 인내와 단호함. 끝내는 롤라를 저버릴 수 없어 기계와의 싸움에서 기꺼이 패배를 감수하려는 용기를 보여준다. 굶주림으로 육체가 약해질수록 그의 내면은 더욱 강건하게 성장하였음을 우리는 에필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책이라고?”

올리버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왜 책을 봐? 너무 느리잖아. 게다가 대부분 프로그램화도 안 돼 있고 말이야.” (P.115)

 

그의 반전의 근원은 바로 남들과 달리 그가 책을 본다는 사실에 있다.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당대가 아닌 알지 못할 미래를 설정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시대가 더는 책의 가치를 중시하지 않음을 피터의 말에 대한 올리버와 애비게일의 반응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프로그램 화면과 실시간 홀로그램의 효율성과 편안함에 비할 때 독서는 느리고 고통스러운 노력을 요구한다. 따라서 독서를 통해 스스로 상상하며 주체적 사고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게 그와 다른 아이들의 차이점이다. 다른 아이들은 소리와 불빛의 메시지에 수동적으로 반응하고, 음식을 얻기 위해 변덕스러운 기계의 취향에 맞추려고 노력한다. 수렁에 빠지듯이 그들은 서서히 기계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감옥에 있는 거야, 알겠니? 감옥, 이건 그냥 평범한 감옥도 아냐. 고문실이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고문실. 하지만 우리 몸을 고문하는 건 아냐. 팔다리를 뽑는다는가 벌겋게 달군 칼을 손톱 밑에 쑤셔 넣는 것처럼 간단하고 직접적인 게 아니라고. 절대 아니지, 이건 더 지독해. 우리를 미치게 하려는 거야. 알겠니?” (롤라, P.70)

 

그곳의 본질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롤라다. 피터도 롤라의 생각에 동의한다. 기계가 하라는 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존엄과 가치를 포기하고 욕망에 굴복하는 동물로 전락하는 것임을 두 아이는 알아차린다. 다른 아이들은 하지만 욕망의 노예가 되기를 선택한다. 눈앞의 배고픔과 두려움을 거부할 용기와 판단이 결핍된 탓이다. 롤라의 너무나도 명료한 설명에도 그들은 자신들만의 껍질 속에 틀어박힌다.

 

그래서 피터와 난...... 우리는 기계를 따르지 않기로 결심했어. 이건 피터의 생각이기도 해. 우리가 모두 함께 기계에 맞서 싸우면, 그들도 우리를 조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야. 그들은 포기하고 우리는 승자가 되는 거지. 하지만 누구라도, 단 한 명이라도 그들 편에 서서 기계를 따른다면 그들은 우리 모두를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할 거야. 그러면 우리가 가진 기회는 거의 사라지겠지. 그러니까 제발 함께 맞서 싸우자.” (롤라, P.173)

 

이 모든 게 거대한 실험이었음이 에필로그에서 드러난다. 로런스 박사는 행동의 조건화 이론을 토대로 국가의 지원을 받아 최고지도자가 원하는 유형의 인간을 양성하고자 하는 의도를 밝힌다. “언뜻 부당하거나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어떤 명령에든...... 의심 없이 따를 수 있는”(P.239) 인간이라! 명령에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하는 군대라든지 일체의 독자적 사고기능이 없는 기계를 연상하게 된다. 그것은 히틀러의 나치가 제3 제국 신민들에게 요구한 가치관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다수의 보통의, 평범한 독일 국민들이 홀로코스트의 만행을 거부함 없이 따랐던 것이다.

 

로런스 박사는 고아원 출신 아이들만을 실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혹시 모를 사회적 저항을 방지하려고 하였다. 박사의 실험은 부분적으로 실패하였지만 - 롤라와 피터는 한층 성장한 모습으로 더 나은 곳으로”(P.244) 떠난다. - 세 명의 아이들은 신호등 불빛에도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을 보인다.

 

이 소설은 스키너와 밀그램의 심리학 이론에 근거를 두고 씌어졌다. 엄청난 재앙을 가져올 수 있는 불합리한 제도와 명령에 기꺼이 순응하는 인간 행동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심리학 이론의 소설화다. 체제에 무조건 순응하고 복종하는 인간은 정치권력자로서 흐뭇한 유형이다. 전체주의 체제 또는 독재정치라면 더더욱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나치와 파시스트가 권력의 강제에 의해서만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을 열렬히 지지하고 헌신하는 평범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그들의 권력 기반을 탄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들이 혁명이나 쿠데타가 아닌 민주적 선거 수단으로 권력을 쟁취하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명시적으로든, 묵시적으로든 사회의 부당한 지배 가치에 대항하여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용기 있는 행동으로 반대 의사를 밝히지 않는 한 전체주의 체제는 계속해서 순응적 인간을 길러내고자 할 것이다. 인간 본성의 약점을 노리는 로런스 박사의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작가는 소설 속에서 분명히 알리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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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
멜빈 버지스 지음, 정해영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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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영화에 바탕을 두고 소설화한 작품이다. 이 경우든지 또는 반대의 경우든지 성공한 원작의 유명세가 개작의 성공을 담보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장르에는 각기 고유한 예술 미학이 있기 마련이므로 원작의 오리지낼리티를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개작의 독자성을 확립할 것인가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에 국한하여 평한다면, 원작을 관람하지 못한 나로서는 소설에서도 나름의 감동과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궁벽한 탄광촌, 가난한 살림살이, 엄마의 죽음으로 인한 편부 가정, ‘상류층의 계집애나 하는발레에 관심과 재능을 보이는 아들, 편견과 반대를 극복하고 발레단의 주연 남자무용수가 되는 아들. 줄거리의 요점을 대강 짚으면 이렇다, 매우 진부하면서도 감동을 심어주는 설정이자 구성이다.

 

자칫 상투적이기 쉬운 이 작품에 다른 읽을거리를 부여한 점은 탄광의 파업이다. 소위 영국병을 치료하기 위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접근방식을 도입한 대처 총리가 강경하게 밀어붙인 곳이 탄광이다. 자본과 효율성의 논리로 보자면 당연한 조치라고 하겠고, 그것이 당대 및 후대에 좋은 평가를 얻었다는 점도 원리적으로 보면 마땅하다. 문제는 그것이 단순히 수익성과 효율성의 관점으로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제아무리 사양산업이지만 광부들과 그들의 가족들의 생계가 달려있으므로 그들에게는 생사가 달린 절박하고 절실한 사안인 것이다.

 

법은 무기지만, 우리를 위한 무기가 아니다. 법이 언제 우리 노동자 편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변호사, 판사, 경찰 간부들. 그들은 대개 자본가 편에 선 작자들이 아니던가. (재키, P.79)

 

소설 곳곳에는 정부와 경찰에 대한 비판과 경멸에 가까운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작품의 주인공 가족이 상대적 약자인 광부이므로 그들의 시각에서 파업을 저지하고 노조를 탄압하는 정부를 좋게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정부 조치를 실제로 현장에서 실행하는 경찰도 마찬가지다. 굶느냐 마느냐, 추위에 덜덜 떠느냐 마느냐, 나아가 죽느냐 사느냐가 걸린 투쟁의 현장에서 생계유지와 전혀 무관한, 즉 없어도 하등 아쉬울 것 없는 발레를 한다는 것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따름이다. 이렇듯이 이 작품은 좁게는 한 소년의 꿈의 실현이라는 성장 소설적 관점에서 볼 수 있지만, 넓게 보면 사회계급 간 갈등과 예술의 본질적 가치를 모색한 것이다.

 

작가는 한 가지를 더 추가하였으니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다. 계집애나 하는 발레를 남자아이가 한다고 해서 그 아이의 성향이 곧 계집애는 아니다. 운동은 남자, 예술은 여자로 편 가르기를 하는 것은 편협한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사회적 선입견은 뿌리 깊다. 빌리의 가족이 처음에 펄쩍 뛰었던 것도 그러한 인식과 우려와 무관하지 않다. 작중에서 빌리의 친구 마이클은 서서히 동성애적 성향을 드러내며 이에 대한 빌리의 우정은 변함없다. 물론 이 작품의 핵심이 동성애 사안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런데 중요한 건 집으로 오는 내내 혼자 연습을 하면서, 비로소 나는 내가 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정말 아찔한 기분이었다. (빌리, P.64)

 

자신이 정말 하고자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일찍 알아차릴 수 있다면 행운이다. 게다가 하고 싶은 것이 자신이 남다른 재능이 있으며 그걸 알아차릴 수 있다면 더 큰 행운이다. 빌리는 행운아다. 재능을 지닌 많은 아이가 눈에 띄지 못한 채 서서히 스러지는 게 다반사인 세상이다. 그래서 빌리가 윌킨슨 선생님을 만난 것도 행운이다. 뛰어난 예술가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재능을 알아차리고 이끌어 줄 수 있는 스승이 필요하다. 전문적인 훈련을 쌓기 위한 경제적 지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도. 그게 부모든 아니면 다른 후원자든. 빌리는 제대로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빌리의 학비 일체를 마련하기 위해서 재키가 얼마만큼의 고민과 노력을 감수해야 했는지. 소중히 간직한 결혼반지를 전당포에 넘기고, 파업 동지를 배신하고 탄광에 복귀하려고 하는 참담한 심정. 배신자의 돈을 받아야만 하고, 파업 실패 소식에 오히려 일해서 학비를 벌 수 있다는 안도감 등을.

 

빌리가 발레 수업을 허락받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자신의 용기뿐만 아니라 가족의 반대도 극복해야 했다. 사회적 편견뿐만 아니라 아들의 장래를 염려하는 아버지의 현실적 사유도 반대의 충분한 명분이 된다. 이 과정에서 죽은 엄마 사라는 현실 인물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망설이는 빌리는 꿈에서 엄마의 뜻과 바람을 확인한다. 재키는 죽은 아내의 처지에서 빌리의 사안을 새로이 바라보며 자신의 반대가 올바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사라라면 빌리의 발레를 무조건 지지하고 응원하였을 터이므로. 부모가 원하는 꿈이 아니라 자식이 바라는 꿈을 인정하고 지원하는 게 부모의 참다운 역할임을.

 

나는 정말로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그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자꾸만 사라가 내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재키, P.192)

 

발레는 단지 빌리 엘리어트의 개인적 성공만을 가져오지 않았다. 발레를 통하여 빌리네 가족은 하나가 되었다. 엄마의 죽음과 파업 사태 이후 뿔뿔이 흩어지고 반목하던 재키와 토니, 빌리는 빌리의 발레가 갖는 의미를 깨닫고 이룰 수 있도록 분투하는 과정에서 가족의 가치를 깨닫는다. 재키는 자신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 책임질 수 없음을, 토니는 아빠의 눈물을 보면서 더 만사를 아빠에게 책임 지우고 의존할 수 없음을.

 

그렇다. 파업은 어떤 집을 갈라놓기도 하지만, 또 어떤 집은 단단하게 뭉치게도 한다. 그렇더라도, 나는 재키와 토니가 발레란 것 때문에 또 이렇게 뭉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조지, P.224)


문득 원작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용과 구성에서 소설과는 얼마나 다를 것인지 궁금하다. 무엇보다도 영상 매체를 통한 예술적 느낌이 글자 매체로 읽었을 때의 감흥과 동등한 수준일지 확인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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