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The Complete Maus 합본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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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한 개인의 자서전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처절한 체험을. 그것은 과거에 국한되지 않고 현재에도 개인에게 아픔을 주는 상흔으로 남아 있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책은 많이 나왔고 개인의 체험을 수록한 책도 역시 많이 출간되었다. 어찌 보면 히틀러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도 서서히 역사 속의 사건으로 묻혀간다고 볼 수 있다. 전혀 새롭지 않고 상당히 익숙한 소재를 다룬 책임에도 불구하고 1992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것은 이 책이 완전히 새로운 접근을, 그것도 아주 뛰어나게 성취했기 때문이다. 만화로의 접근이라는.

 

이 책은 만화책이다. 여느 만화와는 닮지 않았다. 이 안에는 유머, 즐거움, 공상처럼 흔히 떠올리는 만화의 요소가 일체 들어있지 않다. 유익함을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학습만화와 일부 공통점을 지니지만 이 책은 학습만화도 아니다. 게다가 어떤 유형의 만화에도 항상 들어가 있는 코믹적 요소가 여기에는 없다. 이 만화를 보고 읽는 과정은 어쩌면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만일 내 작품이 독자들에게 많은 충격을 준다면, 그건 만화에 실릴 수 없다고 생각되던 내용이 실려 있기 때문일 거예요. 만화라는 장르에 포용할 수 없다고 간주되던 사고방식 말이에요. 그리고 독자를 즐겁게 만드는 재미있는 이야기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는 사실 역시 일종의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거예요. (P.307-308)

 

글을 통한 경험은 머릿속에서 재구성을 하는 과정에 상상이 추가되어야 하므로 직접적이지 못하다는 한계가 있다. 반면 만화 같은 시각 매체는 보는 즉시 직접적으로 작가의 메시지가 머릿속에 들어오므로 한결 강렬한 호소력을 지닌다는 장점을 지닌다. 이 책이 대중과 독자에게 미친 충격과 파급력은 만화였기에 이례적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아버지인 블라덱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나치와 히틀러의 폭압을 오롯이 맨몸으로 맞닥뜨리고 헤쳐나간 블라덱의 뛰어난 생존력에는 감탄할 따름이다. 물론 그의 생존은 많은 부분 행운 덕분이지만 그의 준비력과 적응력, 맹렬한 삶의 의지가 없었다면 그 역시 아우슈비츠를 극복하기는커녕 이전에 진작 스러졌으리라.

 

그렇다고 블라덱을 존경할 만한 인물로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그의 현재의 삶의 모습, 즉 그와 말라의 관계, 그와 아들 슈피겔만의 관계를 볼 때 전쟁이 남긴 상흔이 그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을 갉아먹은 정도를 짐작케 한다. 그에게 나치와 아우슈비츠는 여전히 진행형이며, 그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해소될 것이므로. 그런 그를 아들은 이해하지 못하며, 그런 아들을 그도 이해하지 못한다. 각자가 겪은 역사 체험이 다르기에 서로 간에 공감이 불가능할 수밖에. 같은 아우슈비츠 체험을 하였다 하더라도 생존자가 모두 블라덱과 같게 행동하지는 않는다. 아냐처럼 끝내 자살을 하는 사람, 블라덱처럼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 반면 적어도 겉으로는 상흔을 극복하고 비교적 무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으니.

 

이 만화는 특이하게 인물을 사람이 아닌 동물로 표현한다. 유대인은 쥐, 독일인은 고양이, 폴란드인은 돼지, 미국인은 개 등으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끔찍한 상황과 장면을 사람으로 그리기보다는 동물로 묘사하는 게 훨씬 부담감이 덜하고 덜 직접적일 수 있다는 점도 있다. 또한 제2권 첫머리에 인용된 독일의 신문 기사 내용처럼 당시 독일인은 미키 마우스로 상징되는 가장 저열한 동물인 쥐를 유대인과 동일시하도록 선동하고 있으므로 유대인=쥐는 자연스럽게 연결 가능하다. ‘톰과 제리처럼 쥐를 괴롭히는 동물은 당연히 고양이이므로 독일인=고양이도 저절로 성립한다.

 

(프랑소와즈) 말도 안돼요! 어떻게 아버님이 인종차별을 하실 수 있죠? 마치 나치가 유태인 얘기하듯 흑인을 대하시는군요.

(블라덱) 난 네가 이럴 줄은 정말 몰랐다. 검둥이는 유태인과 비교할 수도 없어! (P.263)

 

나치의 인종주의로 비극을 겪은 유대인. 직접 원인제공은 물론 나치지만, 이 책 속에 나오는 폴란드인도 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나치의 선동이 잠재되어 있던 반유대주의 감정을 촉발했던 것이다. 온갖 고통을 겪은 블라덱이라면 이러한 인종주의에 극심한 혐오를 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우리는 그가 드러내는 흑인 비하 사고와 발언에 충격을 받는다. 나치에게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 그의 시각에 그래도 자신들이 흑인보다는 우월하다고 여긴다면, 우리가 나치를 비판할 윤리적 토대는 너무나 취약하기 그지없다. 블라덱의 관점은 오늘날 미국과 유럽 사회에 뿌리 깊은 유색인종에 대한 혐오와 반감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치의 망령은 아직 전세계에서 사라지지 않고 자신의 지분을 계속 요구하는 셈이다.

 

부록으로 조엘 개릭에 의한 작품 해설이 있어 아트 슈피겔만의 작품세계와 그가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노력한 과정 및 사용 기법을 세부적으로 알 수 있어 도움이 된다. 쉽게 쉽게 그린 만화가 아니라 내용, 표현 및 크기, 배치 등 세심하게 고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래 1부와 2부로 각각 출판된 두 권의 책을 하나로 합권하였다. 튼튼한 양장본, 좋은 종이로 만듦새에 별 불만은 없다. 유일한 아쉬움은 다만 판형이 좀만 더 컸으면 하는 것, 그림과 글자가 작고 보기에 답답하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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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야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심지영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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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낭만 희극의 마지막 작품으로 분류되는 작품이다. 이후의 희극은 문제극 또는 로맨스극으로 구분된다. 이 작품 또한 문제극의 하나에 포함될 수 있다는 개인적 생각이다. 진정한 낭만 희극이 성립하려면 등장인물 간 갈등이 모두 해결되고 모두-악인은 제외하고-가 행복한 결말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

 

올리비아는 얼떨결에 바이올라의 오빠인 세바스찬과 결혼식을 올려 되돌릴 수 없다. 불행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진정으로 원하던 상대와 결합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최소한 행복하다고 평하기는 곤란하다. 말볼리오는 어떤가. 그는 마지막 장에서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퇴장한다. 그는 대화합의 장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이 희극은 작품해설에서 제시한 것처럼 문제극이나 블랙코미디로 평가해야 옳다고 본다.

 

(말볼리오) 네놈들 모두에게 복수를 해 주고 말테다! [퇴장]

(올리비아) 말볼리오는 가장 악독하게 학대를 당했구나. (P.225, 5막 제1)

 

여기에 한층 더 그럴듯한 분위기를 더해 주는 게 광대의 마지막 노래다. 5절로 이루어진 광대의 노래는 연극의 폐막을 알리는 역할을 하지만 노래 가사 자체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밝고 즐거운 내용이라고 결코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침울한 어조이다. 희극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노래라고 할 수 없다.

 

작품의 설정 자체는 새삼스럽지 않다. 인물을 헷갈리는 데서 오는 꼬이는 상황, 엇갈린 사랑의 대상, 여기에 인물들의 말장난 등은 셰익스피어 희극의 전매특허라고 할 만하다. 여기서도 공작은 올리비아를 사랑하는데, 올리비아는 남장한 바이올라를, 바이올라는 공작을 사랑하는 것으로 작가는 상황을 설계한다. 그리고 바이올라가 자신의 본심과는 반대로 공작과 올리비아 간 구애의 사자 역할을 맡는다. 자신의 숨은 감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바이올라의 처지에 동정을 하면서도, 그에게 급작스러운 사랑을 품게 되는 올리비아는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그녀의 이런 성급함은 후에 세바스찬과 급하게 결혼을 올리게 되는 걸로 이어지므로 어쨌든 그녀 자신도 애매한 결혼에 부분적으로 책임을 공유한다.

 

이 작품을 진정으로 문제작으로 만드는 인물은 말볼리오다. 그는 토비 경과 마리아가 주축이 된 일당들에게 완전히 속임을 당하고 놀림감으로 전락한다. 올리비아의 집사인 그가 그들에게 미움을 받는 이유는 딱 한 가지, 그가 집사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고상한 척하고, 원칙을 준수하여 업무처리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가해자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억지로 쥐어 짜낸 논리라고 하겠다. 그를 향한 비난은 그의 악덕 자체가 아니라 말볼리오-올리비아의 신임을 받는-를 향한 시기심과 질투심의 발로에 가깝다.

 

(토비 경) [말볼리오에게] 네놈은 일개 집사에 불과하잖아? 그런데도 네가 도덕군자인척하고 있단 것만으로 더 이상 케익과 맥주를 맛볼 수 없다는 거야? (P.93, 2막 제3)

 

(마리아) 그저 기회주의자에 잘난 체 하는 바보랍니다. 높은 분들한테나 어울릴 표현들을 달달 외워서는, 엄청 쓰고 다니구요. 자신에 대한 자부심도 어찌나 강한지, 자기한텐 탁월한 점들이 꽉꽉 들어차 있어서 자기를 쳐다보는 모든 사람들이 자길 사랑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니까요. 그자의 그런 악덕이 제 복수심의 그럴싸한 이유인 셈이죠. (P.96, 2막 제3)

 

말볼리오를 속여서 조롱거리로 만드는 계책을 주도하는 마리아와 말볼리오를 비교해 보면 적나라한 대비를 보임을 알 수 있다. 마리아는 말볼리오 괴롭히기에 토비 경과 합류하여 주도한 덕분으로 그와 결혼에 성공한다. 일개 시녀에서 귀족의 부인으로 신분 상승에 도달하였는데, 이에 대해 극 중에서는 어떠한 촌평도 없다. 반면 마리아의 속임수에 빠져 올리비아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착각에 빠져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되는 말볼리오에 대해서는 온갖 비난과 조롱이 가해지고, 심지어 미친 사람 취급받아 어두운 방에 감금되기조차 한다.

 

마리아의 신분 상승 욕망은 허락되지만, 말볼리오의 그것은 철저히 부정당하는 까닭은 그것이 지배체제의 안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젊은 여성이 결혼으로 상류층에 편입되는 것은 용납되지만, 반대의 경우는 금기시됐다는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극 중에서도 노란 스타킹과 십자대님에 대한 말볼리오의 오해는 애매하게 처리되어 있다. 말볼리오의 대사에 따르면 올리비아가 최근에 이걸 칭찬했다고 하는 반면, 마리아는 올리비아가 두 스타일을 혐오한다고 발언한다.

 

(말볼리오) 그래, 모든 것이 다 들어맞는구나. 일말의 의심의 여지도 없어, 눈곱만큼도 의심할 수가 없다니까. 방해물도 없고 믿을 수 없거나 불확실한 상황도 아니야.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와 내 간절한 바람이 성취될거란 전망 사이에 끼어들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군. 어쨌든, 내가 아닌 조우브 신이 하신 일이니 감사를 드려야겠어. (P.155, 3막 제4)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올리비아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을 품게 된 말볼리오와 같은 처지에 놓인 누구라도 당연히 그와 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말볼리오의 신분 상승 욕망은 도덕적 비난 대상이 아니다. 그의 개인적 역량이 희극에 등장하는 어떤 귀족 못지않음을 독자는 충분히 인정할 것이다. 그가 악의적 수단이 아니라 정당한 방식으로 멋진 사랑과 신분 상승을 쟁취하였다면 오히려 박수를 쳐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말볼리오는 철저한 희생양이다. 마지막 장에서 말볼리오 놀리기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는 것은 동기와 수단 모두가 억지스럽고 과도함에서 비롯한다. 말볼리오가 누구에게 피해를 주었는지 독자는 도무지 알지 못한다.

 

(패비언) 그 속임수에 익살스런 악의가 뒤따랐던 방식은 / 아마도 복수보다는 웃음을 조장할 것입니다, / 만약에 그것이 양측에게 / 똑같은 정도의 피해를 줬다면 말이죠. (P.224, 5막 제1)

 

셰익스피어는 이 희극에 이중 장치를 심어 놓았다. 낭만 희극으로 보기를 원하는 무리를 위해서 표면적으로 전형성을 따라갔지만, 심층부에는 토비 경으로 대변되는 귀족사회의 어리석음과 함께 귀족 체제의 불합리성을 비판하였다.


5막 제1장에서 공작과 광대의 대사 표기에 일부 오류가 있다. 교정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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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으실 대로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셰익스피어 전집 4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윤주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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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에 따르면 5대 희극작품 중 하나라고 하는데, 그것보다는 목가적 낭만희극라는 평가가 더욱 와닿는다. 장소가 숲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극 중 분위기는 시종 우아하고 여유로우며 평온함으로 일관한다. 그나마 긴박하고 흥미로운 장면이라고 할 만한 올리버와 올란도의 상봉(4막 제3), 공작 형제의 무력 충돌 위험성(5막 제4)도 무대 위 실제 상황이 아니라 대사로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방법으로 손쉽게 넘어간다.

 

이렇게 복잡하고 골치 아픈 사건을 설명하게 되면 무대 연출은 용이하겠지만, 그만큼 극적 현실성은 감소하게 되고 연극은 평면적으로 흐르게 될 우려가 있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작가는 관객의 마음을 쏠리게 할 다양한 수단을 사용한다. 여러 연인 간 다채로운 사랑 이야기, 어릿광대의 재치, 독특한 철학을 지닌 인물의 배치, 등장인물 간 일견 지루하면서도 흥미진진한 대화와 수다 등.

 

(찰스) 많은 부하들과 함께 아든 숲에서 즐겁게 사신다고 합니다. 마치 옛날 영국의 로빈 후드처럼요. 여러 젊은 귀족들이 날마다 그 분에게 몰려들어 마치 무릉도원에서 사는 것 마냥 아무런 걱정 없이 지내고 계시다고 합니다. (P.30, 1막 제1)

 

권좌에서 쫓겨난 전임 공작의 태도를 보면 솔직히 통치자로서 제대로 구실을 했을까 의구심이 든다. 추방당해 깊은 숲에서 사는 생활에 오히려 즐거움과 만족감을 나타내는 그의 대사는 작품의 목가성에 기여할지 몰라도 내게는 무기력함을 연상시킬 뿐이다. 동생 프레데릭 공작이 삶의 현실성을 직시하고 치열하게 꾸려나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의 긍정성과 부정성 여부를 막론하고. 같은 맥락에서 올란도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심을 드러내는 올리버가 보다 사실적이다. 자신보다 여러 면에서 우월하고 외부의 평판도 좋은 동생을 바라보는 형의 속내는 다양한 층위를 보이기 마련이다.

 

제이키즈와 어릿광대는 유사하면서도 대비되는 인물이다. 재치와 독설로 남들을 마음껏 찔러대고 헤집지만 당연한 것으로 인정받지만, 그들이 주창하는 방향은 정반대다. 제이키즈는 우울과 내향적 사고를 보이지만 어릿광대는 철저히 외향적이다. 그것이 어릿광대의 본질적 역할이며, 모두가 행복한 결말에 기뻐하는 가운데 제이키즈가 현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연유이기도 하다. 그는 어릿광대가 아니므로.

 

(전임공작) 사냥꾼이 말 뒤에 숨어 사냥감에 접근하듯이 이 사람은 바보인척 하면서 자신의 재치를 쏟아놓는군. (P.209, 5막 제4)

 

로잘린드와 올란도가 벌이는 구애의 상담과 대행은 이 희극에서 중핵을 이루는 일화다. 남장한 로잘린드, 즉 개니미드에게 로잘린드를 향한 절절한 사랑과 구애의 심경을 토로하는 올란도와 치료라는 명목으로 날마다 이를 즐기는 로잘린드. 관객은 어차피 연인이 될 남녀 사이임을 알지만 로잘린드를 철석같이 남자로 믿는 올리버의 시각에서 보면 로잘린드는 예쁘장한 남자다. 올리버의 구애가 절실할수록 오늘날의 독자는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심정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지켜보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기존 작품에서도 여주인공의 남장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토록 구애와 연결 짓지 않았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로잘린드) 치료해 드리고 싶은데요. 만약 나를 로잘린드라고 부르고, 날마다 오두막으로 와서 내게 구애를 한다면 말입니다. (P.131-132, 3막 제2)

 

(올란도) 하지만 나의 로잘린드가 과연 그렇게 할까요?

(로잘린드) 내 목숨을 두고 맹세하는데, 그렇게 할 거예요. (P.165, 4막 제1)

 

로잘린드와 올란도, 실리아와 올리버의 사랑이 귀족 간 우아하고 품위 있게 전개되는 사랑의 측면이라면, 실비어스와 피비, 터치스톤과 오드리의 사랑은 그들의 직업-목동, 양치기, 어릿광대, 염소치기-답게 현실적이고 직설적이다. 특히 일방적이며 굴욕적인 사랑의 태도를 보이는 실비어스와 그에 대한 멸시와 구박으로 우월적 지위를 드러내는 피비는 일반적인 연인의 그것과 흡사하여 더욱 공감이 간다.

 

이 희극이 사실주의 극 작품이 아니라 낭만극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특징적 대목이 있다. 네 쌍의 연인을 짝짓기하려 인간 세계에 등장한 결혼의 여신 하이멘의 존재다. 고대 희곡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만능 치트키의 부활은 이 희극을 고대와 연결한다. 그리고 제이키즈 드 보이스의 대사로 전하는 프레데릭 공작의 왕권 포기 소식이다. 숲속에 은거한 전임공작 세력을 일망타진하려고 군대를 이끌고 온 그가 수도사의 설교에 감복하여 갑자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속세를 떠난다는 설정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동시에 말 한마디로 복잡한 사건을 설명해버리는 만사형통 희극의 속성이다.

 

다소 무리하게 여겨지는 설정을 셰익스피어가 감행한 까닭은 이 작품의 주제 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작가는 여기서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불화와 대립, 불안을 극복하고 화합과 안정을 지향하여 모두가 행복을 맞이하는 결말이야말로 진정한 희극정신이 아니겠는가. 네 쌍의 연인이 결혼의 결실을 보고, 반목하던 형제의 우애가 회복되었고 무엇보다 전복되었던 사회질서가 평화롭게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그래서 작가는 여러 인물의 입을 빌어 이렇게나 중차대한 사랑의 의미를 제5막 제2장에서 되풀이하여 제시하고 있다. 이 대목은 마치 돌림노래를 하듯 각자가 엇갈린 사랑의 대상을 향한 애틋한 심정을 탄식하듯 토로하고 있어 애처로운 동시에 희극적이기도 하다.

 

(피비) 착한 양치기야. 이 젊은이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말해줘.

(실비어스) 사랑은 온통 눈물과 한숨이죠. / 피비를 향한 나의 사랑이 그래요.

(피비) 개니미드를 향한 나의 사랑이 그래요.

(올란도) 로잘린드를 향한 나의 사랑이 그래요.

(로잘린드) 여자가 아닌 사람을 향한 나의 사랑이 그래요. (P.194, 5막 제2)

 

이들에 따르면 사랑은 눈물과 한숨, 믿음과 섬김, 환상, 열정과 소망, 존경과 의무와 헌신, 겸손과 인내와 초조, 순결과 시련과 복종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연인 앞에서 영원히 을의 처지에 놓이게 되고 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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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 창비청소년문학 2
루이스 새커 지음, 김영선 옮김 / 창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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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작품을 만났다. 초반부엔 다소 산만해서 시큰둥하게 책장을 넘기었는데, 마지막에 가까울수록 정교하게 퍼즐이 맞춰지는 쾌감을 얻을 수 있다. 청소년 문학이라는 꼬리표를 떼고도 일반독자에게 충분한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스탠리는 못된 아이가 아니었다. 스탠리는 저지르지도 않은 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었다. 스탠리는 단지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을 뿐이다.

이게 다 아무짝에도-쓸모없고-지저분하고-냄새-풀풀-나는-돼지도둑-고조할아버지 탓이다! (P.16)

 

전체적으로 보면 스탠리 옐내츠라는 아이가 누명을 쓰고 소위 못된 아이들이 가는 악덕 캠프에서 고초를 겪는 내용이다. 여기서 그는 제로라는 아이를 친구로 만나게 되고 절체절명의 순간 누명이 풀려 캠프에서 나오게 된다는. 뚱보에 왕따였던 스탠리의 정신적, 육체적 성장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진 데 초점을 맞추면 이 작품은 성장소설이다. 그가 제로를 구하려고 나서기까지 심적 갈등은 절정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스탠리의 마음을 정말로 괴롭히는 것은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아니었다. 스탠리의 마음을 정말 괴롭히는 것, 진짜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너무 늦은 게 아닐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P.206)

 

물론 단지 성장소설로 간주하기에는 작가가 포함하는 사회적, 문학적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먼저 현재적 시점에서 초록호수 캠프의 무법적, 비윤리적 운영이 두드러진다. 사회적 문제아를 감옥 대신 보내서 구덩이를 파는 육체적 고행으로 교정을 한다는 취지부터가 당황스럽다. 캠프가 위치한 지역, 장소, 시설 및 운영 방식은 담장 없는 감옥 또는 수용소와 유사하다. 독재적이고 폭력적인 소장과 강압적인 미스터 선생님의 비민주적 태도는 처음부터 명확하여 새삼스러울 게 없으나 올바른 인성의 인물로 판단한 펜댄스키 선생님마저도 같은 무리임에 독자는 놀라고 실망하게 된다.

 

제로가 스트레스를 받잖아. 너야 좋은 뜻으로 그런 일을 했겠지만, 현실을 봐야지. 제로는 읽는 법을 배우기에는 너무 멍청해. 그래서 피가 끓어오르는 거야. 뙤약볕 때문이 아니라.”

[......]

, 제로, 받아라. 이게 너의 평생 특기 아니냐?”

펜댄스키 선생님이 제로에게 삽을 건넸다. (P.197)

 

그가 제로의 역량에 대해 비웃고 무시하는 위 대목을 보면 제로가 그의 얼굴에 삽을 휘두른 까닭에 의아해하지 않게 된다. 여기에는 인종 문제도 연관되어 있다.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미국답게 인종 간 갈등이 항상 잠재되어 있음도 느낄 수 있다. 이들 측면에서 이 작품은 사회고발 소설이다.

 

머나먼 타지의 수용소에서 온갖 고생을 하는 스탠리, 그가 겪는 수용소 생활, 그리고 제로와 함께 사막이 되어버린 호수를 가로질러 엄지손가락 산에 이르는 여정. 다시 캠프로 돌아가서 구덩이를 파다가 소장 일행에게 잡히는 사건들은 흥미진진한 모험의 연속이다. 스탠리와 제로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년모험 소설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게다가 마지막은 주인공의 승리이자 악인의 패배라는 전형적인 권선징악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두 가족의 행복한 결말.

 

이 작품이 성장소설, 사회고발소설, 그리고 모험소설의 범주를 초월하는 깊고 풍요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스탠리의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이야기, 그리고 초록호수 마을에서 전개된 슬픈 사랑의 전설이다. 우리는 고조할아버지와 마담 제로니에 얽힌 일화를 단순한 옛날이야기로 치부할 수 있다. 케이트 바로우와 양파 장수 간 인종과 계급을 뛰어넘은 사랑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들이 작품 속 당대 및 후손들에게 드리운 영향 및 저주스러운 결과를 보면 오히려 신화적이라고 해야 마땅할 정도다. 정말 신화인가 아니면 희귀한 우연의 일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작가는 전자에 살짝 기울어 있는 모양새다.

 

이 모든 것이 110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그날 이후로 초록호수에는 단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았다.

여러분이 한번 판단해보라. 과연 누가 신의 벌을 받았는가? (P.164)

 

스탠리 식구들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언제나 고조할아버지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그가 저지른 잘못으로 집안이 저주를 받았다고 믿는다. 이 소설을 신화적으로 해석하면 그들의 책임 전가는 마땅하다. 우둔한 독자를 위해 작가가 친절한 서비스 정신으로 덧붙인 아래 문장을 보면 더욱 명확할 테니.

 

독자 여러분이 흥미를 느낄 만한 사실이 하나 있다. 스탠리의 아버지가 발 냄새 없애는 약을 발명한 것은 엘리아 옐내츠의 고손자가 마담 제로니의 고손자를 업고 산으로 간 바로 다음날이었다. (P.322)

 

사실 우리는 잘된 일은 자신에게, 잘못된 일은 남에게 책임을 돌리는 습성을 지닌다. 실패는 나의 잘못으로 인한 게 아니기에 스스로를 안심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는 자신을 교정하고 발전시킬 기회를 버리는 꼴이 된다. 다른 맥락이지만 펜댄스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말했듯이 책임을 져야 할 주체는 자기 자신이므로.

 

마지막으로 의아한 대목 하나. 스탠리가 제로를 들쳐업고 엄지손가락 산을 힘들게 올라갈 때 떨어뜨렸던 삽과 자루가 나중에 멀리 산 아래에 단정하게 놓여 있는 걸 찾게 되는 부분이다. 이에 대한 작가의 언급은 이후에 따로 없지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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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9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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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희극 중에서도 매우 이채로운 유형이다. 그의 일반적 희극은 젊은 연인들의 짝짓기가 주된 제재로 삼는다. 엇갈린 상황과 우여곡절을 극복하고 마침내 사랑에 성공하는 연인들. 여기에 작품 분위기를 쾌활하게 유지하는 해학적인 역할을 맡는 주변 인물이 존재한다. 여기서도 물론 펜튼과 앤 페이지의 결혼이 한 축을 형성하지만 핵심적인 제재는 폴스타프 경과 포드 부인, 페이지 부인 간에 전개되는 일련의 사건이다. 기존 희극에서의 주변부 인물과 사건이 이 작품에서는 중심부를 차지하고 흐드러지게 해학적 묘미를 자랑한다. 이것이 셰익스피어의 희극 작품군 중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는 까닭이다.

 

이 희극에서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폴스타프 경이다. 해학적 인물의 전형인 돈키호테가 사실은 매우 진지한 인물이라면, 폴스타프는 생김새와 대사 및 행동 모두에서 우스꽝스럽고 헛웃음을 자아내어 존재 자체로서 압도적 해학미를 자랑하는 인물이다. 늙고 뚱뚱한 몸에 단순하고 저속하며 일차원적 욕망에 매달리는 그의 모습은 미움보다는 오히려 동정과 연민을 자아낼 정도다. 그에 대한 다른 인물들의 평을 보면 그의 적나라한 현실을 알 수 있다.

 

(페이지 부인) 어떻게 그 악마가 우리를 당신 애완용으로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가 있는 거죠?

(포드) 말도 안 되지, 이런 소시지, 아마포 자루한테?

(페이지 부인) 퉁퉁 부은 뚱보한테?

(페이지) 늙고, 차고, 시든, 그리고 창자가 썩어 문드러진 자한테? (P.143, 5막 제5)

 

이러한 폴스타프 유형의 인물이 기존 희극에서 서민계급으로 등장하는 반면 여기서는 당당한 귀족으로 나타나는 점도 차이점을 보인다. 작품 내 유일한 귀족계급이 가장 희극적이며 이른바 망가지는 인물로 설정된 것 자체가 작가의 의도를 헤아리게끔 한다. 게다가 그의 화법과 행동은 전혀 귀족으로서의 품위는 찾아볼 길 없이 비속하며 분방하다. 오히려 페이지가 더 점잖고 이성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어 대조적이다.

 

(폴스타프) 하 고년, 내 온몸을 훑는데, 어찌나 밝히던지, 그녀 눈의 식욕이 볼록렌즈처럼 햇빛을 모아 내 몸을 태워 버릴 것 같았다니까. (P.24-25, 1막 제3)

 

작품 속 등장인물은 펜튼과 앤 페이지를 제외하고 모두 실패를 맛본다는 점 또한 특징적이다. 두 부인을 유혹하려던 폴스타프는 처참한 실패를 연달아 겪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다. 부인의 외도를 의심하여 함정을 판 포드도 잘못을 부인에게 사과한다. 조카 슬렌더를 앤 페이지와 결혼시키려던 셸로우의 시도도, 역시 앤과 결혼을 시도했던 의사 카이어스도 마찬가지로 실패한다. 카이어스와 에번스의 결투를 회피시킨 여관 주인도 두 사람의 복수로 골탕 먹는다. 극 중에서 비교적 합리적인 인물로 나오는 페이지와, 폴스타프를 망신시킬 정도로 재치가 뛰어난 페이지 부인도 동일하다. 둘 다 각자 딸의 결혼이 자신이 의도한 대로 이루어졌을 거라고 믿었지만 결과는 둘 다 모두 실패다. 이렇게 모든 극중 인물의 행위가 실패로 점철되었다면 어둡고 슬프고 분노로 가득 차야 하지만 그럼에도 극은 화기애애하게 막을 내린다. 바로 희극정신의 반영이다. 망신살로 구겨졌던 폴스타프의 한방이 인상적이다.

 

(폴스타프) 기분 썩 괜찮구먼, 선생이 날 겨냥해서 특별히 사냥 자세를 취했는데, 화살이 빗나갔으니 말이오. (P.147, 5막 제5)

 

폴스타프의 압도적 존재감을 제외하고 작품에 희극미를 불어넣는 추가적 요소는 언어유희다. 웨일스인 목사 에번스의 불명료한 발음과 프랑스인 카이어스의 부족한 영어 지식을 놓고 다른 사람들은 놀리거나 속임수에 가까운 말장난을 일삼는다. 잠깐씩 끼어드는 이런 대목은 작품의 분위기를 바꾸거나 재미를 더하는 양념 역할을 톡톡히 한다. 슬렌더 역시 부정확한 어휘 사용으로 한몫을 더 하며, 미시즈 퀴클리는 제4막의 에번스의 교육 장면에서 예상치 못한 개입으로 뜻밖의 웃음을 담당한다.

 

(여관 주인) 그가 당신을 완전 개창나게 만들 거야, 골목대장.

(카이어스) 개창? 그게 뭐요?

(여관 주인) 뭣이냐, 그가 사과할 거란 뜻이오.

(카이어스) 맹세코, 그가 내게 개창 하겠죠. 맹세코, 나 그거 받고 말 거거든. (P.60, 2막 제3)

 

펜튼과 앤 페이지를 통해 작가는 다시 한번 사랑과 결혼의 본질을 일깨운다. 앤의 부모가 추진했던 남편감의 재력 대신에 앤은 사람 그 자체를 선택한다. 뜨뜻미지근한 구애 태도를 취하는 슬렌더가 앤에게 자신의 결혼 의사가 삼촌의 뜻에 의한 것임을 밝히는 점에서 작가는 슬렌더에게도 역시 긍정적인 면모를 부여한다.

 

(포드) 그래, 내가 그놈을 덮칠 테다. 그런 다음 내 마누라를 족치고, 페이지 여편네가 빌려 쓴 정숙의 베일을 확 벗기고, 페이지 놈을 멍청하고 제멋에 겨운 악테온, 오쟁이 진 사내로 까발리는 거야. 그러면 온통 벌어지는 난리통에 동네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치겠지. (P.71-72, 3막 제2)

 

압권은 부인의 외도 현장을 덮치려고 안간힘을 쓰는 남편 포드가 우스꽝스러운 차림새의 폴스타프와 대면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도록 설정한 작가의 절묘한 솜씨다. 질투심에 사로잡혀 부인을 한없이 의심하며 광분하는 포드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안을 수색하지만 오히려 조소를 당할 뿐이다. 이성과 사고보다는 본능과 욕망에 사로잡히는 인물로서 폴스타프와 포드는 페이지 부인과 포드 부인과는 대척점에 놓여 있다. 극 중에서 내내 종횡무진한 활약을 전개하는 재치와 정숙을 갖춘 두 부인의 자부심은 페이지 부인의 자평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런 면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표제와 같이 윈저의 두 부인이 맞다.

 

(페이지 부인) 우리가 한 일을 보면 알게 되겠지. / 아낙네들은 유쾌하지만, 정숙하기도 하다는 거. / 툭하면 들까불고 깔깔대지만 못된 짓은 안 한다는 거. / 옛 말 틀린 거 없지. ‘먹은 돼지는 꿀꿀대지 않는다.’ (P.108, 4막 제2)

 

김정한 번역본은 처음 읽는데, 매우 평이하고 희화적인 번역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다만 작품해설은 셰익스피어의 여러 작품에 대한 단편적 인상기에 가까워 미흡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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