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와 훈 - 서기전 3세기부터 서기 6세기까지, 유라시아 세계의 지배자들
김현진 지음, 최하늘 옮김 / 책과함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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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 유목제국사>를 읽으면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중국사와의 관계 속에서만 흉노를 다루었다는 사실이다. 북흉노의 쇠망과 이후 남흉노의 점진적 소멸로 동양의 흉노 세력은 실체를 상실하였다고 보며, 흉노와 훈의 동일성에 대해 유보적인 견해를 취하는 저자의 관점으로서는 당연한 귀결이라고 하겠다.

 

흉노와 훈은 동질적인 집단인가 아니면 전혀 무관한 관계인가. 이때 눈에 들어온 책이 바로 이것이다. 올해 출간된 따끈따끈한 신간이며, 외국에서 교육받고 활동하며 영어로 쓴 저서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내놓았다. 무엇보다 흉노와 훈을 타이틀로 내걸지 않았는가. 간단히 표현하면 이 책은 무지하게 흥미진진하고 매혹적인 역사서다. 역사의 숨겨진 비밀을 탐험하며 어둠에 감춰졌던 사실에 환한 빛을 비추어 세상 밖으로 드러낸 역작이다.

 

흉노와 훈의 관련성에 대하여 저자의 입장은 명백하다. 흉노와 훈은 동질적인 집단이다. 우선 최신 연구 결과를 반영하여 훈이라는 이름 자체가 흉노에서 연원하였다고 단언한다. 또 하나, 소위 200년의 공백은 어찌 볼 것인가. 역사 기록이 부실하여 공백으로 인식하게 되었을 뿐 역시 과거 사료와 최근 연구를 토대로 볼 때 지정학적, 기후적 요인 등으로 흉노는 점차 서진하여 훈으로 등장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밝힌다.

 

서양사에서 훈족의 이동은 게르만족의 이동을 촉발해 서로마제국을 멸망의 길에 이르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아틸라의 야만족 대제국이 유럽 중앙에 딱 버티고 앉아 문명 세계를 파괴한 것으로도 인식되고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유럽의 뿌리가 깊은 편견이 자리를 잡고 있음을 비판하며 훈족은 게르만의 저항 때문에 붕괴한 게 아니라 내홍으로 무너졌으며 상당 기간 세력을 유지하였음을 주장한다. 무엇보다 훈족 세력이 무지한 야만 세력이 아니라 발달한 중앙아시아 문명을 경험하고 받아들여 고도의 국가 체제를 완비한 제국이었음도 역설한다.

 

인력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고 피정복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능력은 행정 효율과 국가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핵심 지표다. 훈은 두 능력 모두를 보유했고, 따라서 이들의 제국은 유럽에서 명백히 국가로서 존재했다. (P.155)

 

이 책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대목 중 하나는 바로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훈족이다. 우리는 그동안 흉노와 흉노의 서진, 즉 유럽 훈과의 관련성에만 주목하였다. 저자는 훈족 일파는 유럽으로 서진하였고, 다른 일파는 남진 및 남서진하였음을 보여준다. 아시아 훈은 백훈이라고 불리는데, 키다라 왕조와 뒤를 이은 에프탈 왕조가 훈계 집단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6세기 중반 돌궐 제국이 나타나기 이전에 중앙아시아, 이란, 북인도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다. 아래의 표를 통해 훈계 집단의 확산과 기나긴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저자는 훈의 기원으로서 흉노 제국의 역사를 죽 훑어본 후 북흉노의 패망 이후 남흉노를 제외한 잔여 흉노 세력이 어떻게 집단 정체성을 유지한 채 이동하면서 서서히 발전하여 유럽 훈과 아시아 훈으로 변모하였는지를 차근차근, 하지만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중국의 흉노 역사에서 저자는 서진을 멸망시키고 남북조 시대를 개창한 유연과 이후 그들의 후손, 그리고 혁련발발과 저거씨의 왕국도 모두 흉노의 틀에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이 역시 다른 학자들과 차별점이다. 그에 따르면 흉노는 동과 서 양쪽에서 모두 당대의 대제국을 무너뜨린 역사의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서양사에서 훈의 역사는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서로마의 멸망이라는 크나큰 사건이 더욱 주목받기 때문이다. 훈족은 그저 태풍과도 같은 일종의 재해로만 여겨질 뿐이다. 그들은 난데없이 쳐들어와 유럽을 혼란에 빠뜨렸다가 아틸라 사후 갑자기 소멸하였다는 인식. 저자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과 배치됨을 하나하나 근거를 들어 반박한다. 훈은 재해가 아니라 이후 유럽사를 근본에서 뒤바꿔놓은 하나의 현상이라고 하면서.

 

요컨대 훈 집단의 영향력과 지리적 범위, 그리고 정복은 진정한 유라시아적 현상이었다. 이들은 도달한 모든 곳에 매우 혼종적인 내륙아시아 문화를 도입했고, 방대한 인구의 문화와 운명을 급진적으로 바꾸었다. (P.297)

 

저자가 제시하는 훈의 정치적 유산을 들어보자.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킴으로써 유럽의 정치 구조를 완전히 뒤집었다. 잠깐 서로마를 멸망시킨 게 훈이 아니라 오도아케르라는 용병대장으로 기억하는데, 하는 이견이 있겠지만 저자에 따르면 그는 훈계 집단이다. 이어 중세 유럽의 시초가 되었던 프랑크 왕국의 건설자는 아틸라의 봉신 출신이다. 중세 유럽의 특징적인 정치, 사회 제도인 봉건제 역시 훈족의 유산이다. 강력한 사회 및 군사제도는 게르만족의 각성을 이끌어서 국가 형성을 촉진하였고, 기마 중심의 군대 전통은 중세 유럽의 기사도와 승마 문화로 이어졌다. 이 정도면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다. 기존에 내가 익히 알던 세계사의 지식이 얼마나 얄팍하고 편향적이었는지 새삼 부끄럽다. 게다가 훈계 집단이 남긴 문화적 영향은 또한 어떠한지 간단하게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다.

 

아틸라 사후 훈의 미래는 노병은 죽지 않는다. 오직 사라질 뿐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저자는 7장에서 이를 집중적으로 탐색하고 있는데, 아틸라 제국은 곧바로 분열과 해체를 겪은 게 아니라 동쪽 절반은 여전히 굳건한 세력을 유지한 채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불가르 훈이라고 불리면서. 그러면 동부 아틸라 제국은 서부 아틸라 제국이 붕괴하는 걸 왜 방관하고 있었느냐는 의문에 대해 동부 초원의 새로운 유목 세력에 대응하느라 여력이 없었다고 저자는 제시한다. 어찌 되었든 불가르 훈은 100여 년을 존속하였고, 다른 지역에서는 캅카스 훈이라는 별개의 지파가 역시 국가를 형성하였다. 훗날 아바르인들의 점령으로 훈족 국가가 무너질 때 이를 훈의 최후로 볼 것인지 저자처럼 훈과 아바르의 결합으로 볼 지는 관점의 차이일 것이다. 양분된 아바르 제국의 한쪽이 나중에 불가리아로 이어졌다는 후일담은 흥미롭다.

 

이 책에서 저자는 기존 훈족에 대한 견해와는 여러모로 다른 참신한 견해를 쏟아놓는다. 이것이 백 퍼센트 사실일지 여부는 누구도 단언하지 못한다. 다만 여태껏 주목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던 훈족에 대해 새로운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만도 큰 공헌이다.

 

훈의 역사를 이해할 때 특히 유의해야 할 점으로 저자가 거듭 강조한 사항이 있다. 흉노와 훈은 이미 자체로서 혼합적 민족과 문화, 종교 집단체다. 따라서 단일한 인종 내지 민족 집단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양자의 연속성은 정치, 문화적 동질성, 즉 흉노식 가마솥과 편두 풍습 등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훈족보다는 훈계 집단이 정확한 표현일 수 있다.

 

훈을 하나의 민족이나 종족 집단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집단은 종족과 민족, 종교적으로 다양한 부류가 함께 소속된 복잡한 정치체로, 그 안에서는 매우 다양한 생활 양식과 관습으로 인한 문화적 융합과 변용이 끝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P.17)

 

흉노와 훈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핵심이 되는 것은 두 집단 사이의 유전적연결고리가 아니라 문화적. 정치적 유산의 전달이다. (P.19)

 

훈계 집단의 문화적 영향력과 관련해서 당대 중앙아시아가 후진적인 지역이 아님을 저자는 역설한다. 아시아와 유럽의 정주민 문화 기준으로 볼 때 유목민은 후진이라는 편견을 지니는데, 그들은 농경과 유목 문화,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두루 체험하면서 두 문명의 혼합과 교류를 통해 한층 빼어난 발달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중앙아시아 예술 연구자나 중앙아시아를 잘 알고 있는 고고학자들 가운데 원시적인훈 사회라는 정의를 받아들일 사람은 없다. 오히려 중앙아시아, 더 나아가 내륙아시아의 고고학은 게르만 시대 유럽의 예술과 물질문화가 초원의 예술과 물질문화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P.291)

 

8백 년 후 몽골이 세계를 뒤흔들어놓기 훨씬 이전에 흉노/훈계 집단은 후대가 이룬 것과 마찬가지 역할을 수행하였으니 고립되었던 유럽과 아시아를 하나의 역사적, 지리적 단위로 묶어놓았다. 그런 면에서 확실히 그들의 등장과 유산은 유라시아적 현상이라 불릴 만하다. 이 책은 흉노/훈의 역사적 소임과 부침을 극적으로 부각시킨 대단한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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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수전 외 시공 제인 오스틴 전집
제인 오스틴 지음, 한애경.이봉지 옮김 / 시공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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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세 편의 작품은 각자 특색이 분명하다. <레이디 수전>은 중편소설로 작가의 초기작이며 미발표작이다. <왓슨 가족><샌디턴>은 미완성작이다. 특히 후자는 작가의 유고작이기도 하다. 두 편 모두 완성되었으면 독자의 라이브러리를 더욱 풍성하게 해줄 수 있는 작품들이기에 한층 안타깝다.

 

<레이디 수전>은 서간체 소설이며 주인공이 악인이라는 점이 이채롭다. 작가의 다른 작품과 차별되는 지점이며 작가가 향후 이러한 유형의 글을 더 이상 쓰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신의 문학적 스타일과 어울리지 않았다는 판단이 든 모양이다.

 

레이디 수전은 젊지 않다. 결혼을 시키려고 하는 딸이 있으며, 얼마 전에 미망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봐서도 당시 사회 기준으로는 중년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녀는 타고난 외모와 교태, 말솜씨 등으로 주위 남성들을 유혹하여 좌지우지할 수 있는 요부에 가깝다. 물론 그런 그녀의 행실은 결코 주변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그녀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목적만 이룰 수 있다면 평판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이랄까.

 

연로한 드 쿠르시 경이 돌아가실 때까지는 당장 결혼해도 크게 득 볼 게 없으니까. 사실 난 그 결혼이 전적으로 내 손에 달려 있다고 자신하고 있어. 그가 내 능력을 알게 만들었지. (P.30)

 

유부남인 맨워링 경의 집안을 뒤흔들어 놓고, 자기 딸과 결혼시킬 속셈으로 제임스 경을 유혹하여 맨워링 경의 딸로부터 떼어놓으며, 자신에게 적대적인 동서의 남동생 레지널드마저 유혹하여 결혼하려고 할 정도다. 이쯤 되면 굉장한 능력자라고 할 만하다. 결혼 추진을 받아들이지 않는 딸을 불편하게 만들기 위해 기숙학교에 강제로 입교시키는 면에서는 비정하기조차 하다. 확실히 동서인 버넌 부인의 말처럼 레이디 수전은 딸에게 무관심하고 오히려 걸리적거리는 존재처럼 행동한다.

 

아무리 작가라도 대놓고 주인공의 해피엔딩을 기술하기는 부담스러웠나 보다. 결국 그녀의 정체는 탄로 나고 레지널드와의 약혼은 취소된다. 그런데 그녀는 문득 제임스 경과 결혼을 발표한다. 그녀 입장에서는 딸과 결혼시키려고 했던 남성을 남편으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당대 도덕률에도 올바른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레이디 수전과 친구 존슨 부인은 죽이 잘 맞는 사이다. 만약 남편의 강력한 제재만 아니라면 친구도 레이디 수전과 신나게 어울렸을 게 분명하다. 제임스 경과 결혼하라고 강력히 권고한 게 존슨 부인이니까.

 

3주 후, 레이디 수전은 제임스 마틴 경과의 결혼 소식을 전했다.

그제서야 버넌 부인은 이전부터 의심하던 바를 비로소 확인하게 되었다. 딸을 치워버리려는 레이디 수전의 수고를 스스로 자처하여 떠맡은 것이었다. 분명 레이디 수전은 처음부터 이렇게 할 작정이었다. (P.106)

 

레이디 존슨의 선택은 성공일까 실패일까? 확실한 건 레지널드보다는 제임스 경이 재산은 물론 오히려 다루기 쉬운 존재다. 둘 다 나이는 본인보다 훨씬 어리고. 게다가 버넌 부인의 뒤늦은 깨달음을 통해 알 수 있듯 재혼에 있어 걸리적거리는 존재인 딸 프레더리카를 손쉽게 치워버리지 않았는가. 이 소설은 한마디로 레이디 수전의 종횡무진 활약 속에 놀아나는 주변인들의 뒤늦은 어벙벙함을 발견하는 즐거움으로 차 있는 기이한 유형의 작품이다.

 

<왓슨 가족>은 전형적인 제인 오스틴의 작품이다. 주인공 이름도 에마다. 아름답고 똑똑하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이라는 그녀 작품 주인공의 일반적 특징도 공유한다. 에마는 일찍부터 부유한 이모 집에서 자랐는데, 이모가 뒤늦게 재혼하면서 상속녀의 지위를 상실하고 본가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녀 오빠의 말처럼 군식구로 전락한 셈이다.

 

매사 아늑하고 우아했던 가정의 생명이자 천사이며, 모두가 순조롭게 독립하리라 기대하던 상속녀였다. 이런 존재에서 벗어나 이제 누구에게나 하찮고, 애정을 기대할 수 없는 부담스런 존재, 가정의 편안함이나 앞으로의 지원을 기대할 가망도 없이 열등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이미 너무 많은 대가족의 군식구가 되었다. (P.182-183)

 

그녀 처지에서 최상의 결과는 무엇일까? 좋은, 즉 부유한 남편을 만나서 자신도 당당히 독립하고 본가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형편이 되는 것. 그래서 언니 엘리자베스를 포함한 자매들이 그렇게 괜찮은 남성을 찾아 헤매는 것 아니겠는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는 유독 이러한 설정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당대 영국 여성들의 사회상을 적확하게 반영하기 위함이다.

 

무도회에 참석하여 좋은 인상과 관심을 끈 에마에게도 주위에 세 명의 남성이 나타난다. 언니들은 쫓아다니지만 그녀 자신은 약간 경멸하는 톰 머스그레이브, 하워드 목사, 그리고 오만한 오스본 경. 아직 인물들 간 본격적인 사건과 행동은 벌어지지 않는다, 장편소설의 서두에 불과하므로.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오스본 경의 태도 변화다. 마을의 지주이자 귀족인 오스본 경은 평소를 여자를 우습게 보고 있었다. 하긴 주변에 어떻게든 자신의 환심을 사려고 안달인 여자들로 넘쳐났을 테니까. 그런데 유달리 자신에게 독립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에마에게 색다른 인상을 받는다.

 

난생처음 여성을 즐겁게 해주고픈 마음이 들었다. 여성에게, 그러니까 에마 같은 상황의 여성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한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지금껏 그는 분별심이나 좋은 성격을 원한 적이 없기에,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P.159)

 

이 작품은 일단 에마의 자아성찰 내지 현실자각 장면에서 중단된다. 알려진 구성대로라면 꽤나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전개되었으리라.

 

<샌디턴>은 작가의 밝고 재기발랄함이 여타 작품에 비하여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주인공도 가난한 집안이 아니라 시골 지주의 딸이다. 물론 주변인들에 비해 똑똑하고 이성적이라는 점에서는 여전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샌디턴의 파커 씨 부부 집에 한동안 방문하게 된 그녀는 아웃사이더의 눈으로 마을 사람들의 여러 모습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파커 씨에게 있어 샌디턴은 제2의 아내이자 제2의 자식이었다. 그만큼 사랑했고, 분명 그 이상으로 열중해 있었다. 그는 샌디턴에 대해 끝없이 얘기할 수 있었다. 그는 샌디턴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P.199)

 

샌디턴을 해변 휴양 마을로 개발하고자 하는 파커 씨 부부의 열의와 주장은 샬롯은 물론 독자에게도 낯설게 다가온다. 파커 씨의 자매와 동생들이 품는 상상병은 한층 이색적이다. 건강에 대해 염려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지만 언제나 안달하며 전전긍긍하는, 게다가 신체적 이상이 없는 상태에서 그네들의 행동은 우스꽝스러우며, 더구나 아서 파커의 꾀병은 해학적이다.

 

샬럿은 다이애나 양의 심상치 않은 건강 상태라는 것이 상당 부분 엄살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병과 치유는 모두 상식과는 너무 달라서 진짜 질환과 회복이라기보다는 열정적 정신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낸 상상의 질병에 가까운 것 같았다. (P.256)

 

파커 씨 가족과 더불어 한 축을 이루는 게 데넘 부인이다. 그녀는 결혼으로 재산과 신분을 일군 사람답게 샬럿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그것을 무기로 주변 사람은 물론 마을 사람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듯한. 데넘 부인의 저택에서 발견한 첫 번째 남편 홀리스 씨의 초상화가 받는 대접은 샬럿의 감정을 독자에게 공감시킨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부분은 전적으로 샬롯의 관찰에 국한한다. 에드워드 경은 데넘 부인의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클라라에게 접근하는데, 결과가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마을은 파커 씨가 의도했던 대로 개발의 성공을 이룰 것인지, 데넘 부인의 상속자는 누가 될 것인지, 상상병자 식구들의 건강은 회복될 것인지, 샬럿은 샌디턴 마을에서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인지 등등.

 

분명한 건 이 작품이 완성되었다면 제인 오스틴의 기존 소설과는 성격이 다른 새로운 시기로의 전환점을 이루는 작품이 되었으리라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미완성으로 그친 게 아쉽다.

 

10여 년 전에 제인 오스틴의 전체 작품을 집중적으로 읽었다. 이후 제인 오스틴 전집이 출판된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보니 국내 초역 작품이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삭줍기 차원이랄지 작가에 대한 예우랄까 뒤늦게 이 책을 집어 들었는데, 역시나 제인 오스틴은 제인 오스틴이라는 점을 새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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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이야기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4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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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실종

늙은 보모 이야기

대지주 이야기

빈자 클라라 수녀회

그리피스 가문의 최후

굽은 나뭇가지

궁금하다, 사실인지

 

<회색 여인>에 이어 개스켈의 다른 고딕 소설책을 읽는데. 수록작 중 <늙은 보모 이야기>만 중복될 뿐, 나머지는 모두 새로운 작품이다. 전자는 여기서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수록작 중 <빈자 클라라 수녀회>, <그리피스 가문의 최후>, <굽은 나뭇가지>가 제법 분량이 길다.

 

<실종>은 옛날에 발생했던 수수께끼 같은 실종의 몇 사례를 소개하고 작가 당대에서는 이런 실종의 두려움을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을 개진한다. ‘형사 경찰의 시대에서는 개인의 거의 모든 정보를 당국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기에 그렇다고 하는데, 작가의 어투는 다소간 희화적이다. 가벼운 고딕 정도에 가깝다.

 

<궁금하다, 사실인지>도 역시 고딕보다는 환상 소설 유형이다. 서두는 그럴듯하다. 칼뱅의 누이가 잉글랜드의 사제와 결혼하였고, 후손 중 한 명이 족보의 진실성을 확인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간다. 낯선 땅에 길을 잃다가 한밤에 우연히 어떤 성에 들어가게 된다. 우연과 오해가 낳은 묘한 경험을 화자뿐만 아니라 독자도 함께할 수 있는데, 서양 동화 애독자라면 등장인물들이 암시하는 신분을 추리할 수 있다. 장화 신은 고양이, 신데렐라 등등. 공포보다는 호기심을 유발하는 설정이라고 하겠다.

 

많은 재산을 지닌 젊고 잘생긴 신사. 영화나 드라마라면 분명히 재벌집 상속자 정도의 신분일 것이기에 뭇 여성의 시선을 끄는 건 당연지사다. <대지주 이야기>에서 지주 노인의 딸이 캐서린이 야반도주한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작가는 독자에게 찝찝한 뒷맛을 계속 풍기는데, 그 신사의 외모에서 사악한 냉정함이 풍긴다든지, 그에 대한 프랫 부인의 이유 모를 반감과 의심이 그러하다. 어쨌든 당대에는 노상에서 임대료를 수금하는 신사가 드물지 않았던 모양이다.

 

부모 양자가 선량하고 존경할 만한 사람임에도 자식들이 반드시 부모를 닮는다는 보장은 없다. 꼿꼿한 거목에도 굽은 나뭇가지는 생겨나기 마련이다. 많은 부모는 자신들의 육아와 훈육의 잘못을 탓하지만 그게 어디 반드시 부모 탓이겠는가. <굽은 나뭇가지>의 네이선과 헤스터 부부도 마찬가지다.

 

소박하고 순박하며 선량한 농부로서 나날의 삶에 감사하며 아들 벤저민과 친척 아가씨 베시가 결혼하여 자신들을 잇는다면 더없이 만족스럽게 노년을 보낼 수 있으리라. 아들을 지주학교에 보내지 않았다면, 일자리를 구하러 런던으로 가도록 허락하지 않았다면 벤저민이 선량한 아들로 남아있었을까. 부모의 전 재산을 거리낌 없이 요구하고 일말의 가책도 받지 않는 아들. 어차피 상속받을 거니까 미리 받아서 어떻게 쓰든 자기 권리라고 생각하는 자식. 오늘날 많은 부모도 자식에 대한 사랑에 눈멀어서 그것이 잘못된 길이라고 여기지 않고 자식을 수렁으로 밀어 넣는 데 한몫한다. 한 가닥 희망에 의존하면서.

 

물론 이 소설에서 벤저민은 너무 나아갔다. 그는 패륜에 해당하는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죄악임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가 보고 겪고 배우고 본받은 세계는 정정당당한 노력과 성실한 땀의 가치와는 무관한 곳이었으므로. 자기 집에 든 강도 중에서 아들의 모습을 발견한 부모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지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내 아들이었어요. 하나밖에 없는 내 자식이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쳤어요. 이 늙은 여인이 조카에게 도와달라 외치니까 소리 지르는 걸 멈추지 않으면 목을 잡으라고 소리치더라고요. , 이제 진실을 알았네요, 진실을. 그러니 이제 당신이 어떻게 할지는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겠습니다.” (P.328)

 

옮긴이에 따르면 이 작품은 사투리의 비중이 높다고 한다. 아무래도 시골 농부 가족의 지역성과 순박성을 두드러지기 위한 작가의 의도라고 하겠다. 이 경우 번역을 통해서는 묘미의 체득이 한층 어렵다.

 

나머지 두 작품 <빈자 클라라 수녀회><그리피스 가문의 최후>는 모두 저주를 다루고 있다. 양자 모두 서두에서 역사적 일화를 연계하고 있는데 서사의 사실성 여부는 알 수 없다. 전자는 저주의 극복, 후자는 저주의 실현으로 상반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고딕 장르에서 저주는 비극과 공포를 자아내는 중요한 장치로 사용된다. 여기서는 조상이 저지른 잘못으로 죄 없는 후손이 당하는 비극이 전개된다. 저주의 연좌제는 적법성을 인정받게 마련인가.

 

역사상의 위인이 내린 저주의 영험은 과연 극복 불가능한 것인가. 여러 대가 지난 후에도 당사자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발현되는 저주를 우리는 숙명으로 체념해야만 할지 애매하다. 여기서 인간 이성은 아무런 역할도 발휘하지 못한다. 오언의 아버지가 재혼을 하지 않았다면, 계모가 현명하고 훌륭한 인물이었다면, 오언의 비밀 결혼에 대해 오언의 아버지가 맹목적 분노를 퍼붓지 않았다면. 수많은 가정이 필연처럼 외줄타기로 중첩되어야만 실현되는 저주.

 

오언이 조용히 말했다.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운명의 결정을 빠져나갈 순 없습니다. 저는 수백 년도 더 전부터 제 일을 하게 되어 있었어요. 시간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저를 기다렸습니다. 저는 대를 이어 내려온 예언을 행했을 뿐입니다!” (P.245)

 

안타까운 건 귀여운 아기와, 개심한 네스트, 그리고 오언이 이룬 단란한 가족의 한때가 무참하게 깨져버린 비극이다. 아기를 잃고 아버지를 죽음에 빠뜨린 오언. 한 무덤에 누이고자 하는 화해의 바람은 비웃듯 스러지고. 그의 운명은 비바람 치는 바닷속에서 사라져간다. 저주가 실현되었으니 앞으로 더는 비극이 없으리라. 그리피스 가문은 대가 끊어졌다.

 

<빈자 클라라 수녀회>는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된 복잡한 이야기다. 지주 부인의 유모인 브리짓과 딸, 그리고 손녀로 이어진 저주의 흐름이 작품의 핵심이다. 첫째 장, 퇴락한 지주 집안에서 홀로 궁핍한 삶을 버티며 오매불망 딸을 기다리는 늙은 브리짓. 그에게 있어 딸이 키우던 강아지는 유일한 위안이자 가족이요 친구이다. 그래서일까 강아지를 죽인 신사를 향한 그녀의 저주는 혹심하기 이를 데 없다.

 

당신은 살아가면서 당신이 가장 사랑하고, 당신을 유일하게 사랑하는 생명체가, , 인간이, 죽어버린 내 불쌍한 아가만큼 순수하고 다정한 그 인간이, 차라리 죽음이 행복한 것일 정도로 모두에게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을 보게 되리라. 바로 이 피의 이름으로!” (P.114)

 

작품의 화자는 둘째 장에서 비로소 등장한다. 잘나가는 청년 변호사가 우연히 시골에서 낯설면서 아름다운 루시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조용히 은둔하며 지내는 아가씨.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 화자는 마음이 끌린다. 그리고 알게 되는 끔찍한 진실.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나타나는 악마의 형상을 한 루시의 몸서리칠 정도로 사악한 육신. 그것은 바로 저주다.

 

모름지기 저주를 풀려면 원인 제공자와 저주 당사자가 만나야 한다. 화자의 활약 덕택으로 사실 관계가 밝혀진다. 그리고 브리짓과 루시 아가씨도 상면한다. 자신이 건 저주에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피붙이임을! 저주의 중도 해지는 어렵다. 저주는 끝장이 나야만 끝나기 마련이다. 브리짓은 클라라 수녀회에 들어가 속죄와 참회의 세월을 보낸다. 브리짓의 기도와 노력에도 루시의 저주는 계속된다. 성직자는 그 이유를 설명한다. 브리짓의 저주를 실현해 준 이는 진실한 성자가 아니라 악마의 힘이었음을. 그리고 브리짓에게 깃든 악마가 그녀의 참회와 고해성사를 계속 방해하고 있어서임을.

 

분노에 찬 어휘들과 복수의 다짐, 그런 식의 신성하지 못한 기도는 결코 성자들의 귀에 가 닿을 수 없는 법이죠! 다른 힘이 그 말들을 차단하고, 하늘을 향해 던진 저주들이 그녀의 피붙이에게 떨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그녀의 사랑의 힘이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멍들게 하고 으스러뜨린 겁니다. (P.176-177)

 

결말은 장엄하고 감동적이다. 저주를 건 당사자의 뼈아픈 고통과 헌신과 희생이 있고 난 뒤에야 루시 아가씨는 저주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작품을 단순히 고딕 문학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함의가 매우 깊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과 영혼의 다양하고 복잡하여 심원한 층위를 확인할 수 있어서다.

 

두 권의 책을 통해서 작가 개스켈의 고딕 문학을 향한 관심이 상당히 진지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은 표면상 이성을 벗어나 조그마한 계기와 상황에 처하기만 해도 감추어진 비이성과 환상에 매혹된다. 고딕 같은 환상 문학은 이성과 비이성의 양면을 파악하여 인간성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장르 문학으로 폄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나 개스켈처럼 뛰어난 글쓰기 솜씨를 발휘하는 작가의 경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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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여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이리나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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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회색 여인

마녀 로이스

늙은 보모 이야기

 

개스켈은 일찍이 <크랜포드>를 읽었다. 언젠가 시간을 내서 <남과 북>(또는 <북과 남>)을 읽어볼 생각인데, 고딕 작품을 여러 편 썼다고 들어서 호기심 충족을 위해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고딕 소설은 요즘으로 치면 장르문학이다. 미스터리, 공포, 환상소설의 요소를 모두 품고 있기에 특히나 19세기 독자는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을 지니고 책장을 넘기기 마련이다. 고딕 소설의 관건은 역설적이지만 내용의 사실 근접성에 있다. 허구이지만 사실에 가까운 인상을 풍길수록 독자는 더욱 전율할 것이다.

 

순진한 아가씨가 대지주와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남편이 악명 높은 산적의 우두머리. 무작정 남편으로부터 달아나는데, 철저하게 가면으로 위장했기에 아무도 그녀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없다. 한시라도 주의를 소홀히 하면 남편의 추격에 붙잡혀 저세상으로 갈 운명에 처한 그녀. 이것이 <회색 여인>의 이야기다.

 

새 남편은 내게 더는 염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어. 실은 그럴 필요도 없었지. 내 금발은 회색이 됐고, 얼굴색은 어느새 잿빛이 돼버렸거든. (P.90-91)

 

남편의 마수를 피해 프랑스와 독일 등지를 겁에 질려 아슬아슬하게 떠도는 여인과 하녀 아망테, 악인 남편의 아이를 출산하고 키우는 여인과 남편으로 위장한 아망테 두 사람이 불안하지만 단란하게 꾸리는 생활. 항상 두려움 속에 지내다 보니 여인의 아름답던 외모는 시들어서 회색 여인으로 불릴 정도가 되었다. 자신의 쓰라린 과거를 여인은 성년이 되어 이제 결혼하려고 하는 딸에게 들려준다. 영원히 자기 가슴 속에 묻은 채 살아갈 수 없었던 것인가. 그 암울하고 잔혹한 과거를 딸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더구나 사랑하는 남자와 자신이 철천지원수 관계라는 끔찍한 진실을.

 

옮긴이는 작품해설에서 개스켈의 고딕 작품을 여성 고딕으로 칭하면서 여성주의 의미를 부여한다. 여인과 아망테의 동거 생활을 새로운 형태의 부부 관계 내지 동성애 코드를 강조하여 풀이하는데 과도하고 부적절한 해석으로 생각한다.

 

<늙은 보모 이야기>는 고딕 소설의 전형적 유형에 충실하다. 장중하지만 어둡고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오래된 성이 배경이므로. 뭔가 어두운 비밀을 품고 있는 듯 괴이한 현상이 발생하고, 이어서 거기다 유령마저 등장한다. 현실과 환상이 한 시공간에 드러날 때 사람은 기이함과 두려움을 품게 된다.

 

한 남자를 둘러싼 자매의 사랑과 질투, 그리고 증오. 일순간의 감정 폭발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가족을 끔찍한 죽음으로 내몰게 된다. 그리고 매년 되풀이되는 섬뜩하고 괴기한 현상들. 이제는 늙은 퍼니벌 부인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유령들에 의해 잔혹한 과거사는 차갑게 재현된다. 유령이 이승을 헤매는 까닭은 이처럼 깊은 한을 품어서일 것이리라.

 

맙소사! 맙소사! 어릴 때 한 짓은 세월이 지나도 절대 되돌릴 수 없구나! 어릴 때 했던 짓이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러도 풀리지 않다니!” (P.271)

 

아서 밀러의 <시련>17세기 미국 식민지 시대에 실제 있었던 세일럼의 마녀재판 사건을 다루고 있다. 갈등과 증오가 광기와 결합하면 얼마나 인간 이성을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일을 벌일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사례다. <마녀 로이스>가 제재로 삼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중편 소설에 해당하는 이 소설은 크게 3부로 구성하였다. 그만큼 작가가 하고 싶고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많다는 뜻이리라.

 

로이스 버클리. 부모의 죽음으로 가까운 친척에게 의탁하기 위해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고아 소녀. 외삼촌네 식구들 아무도 그녀를 환영하지 않는 군식구. 청교도 신앙이 강력한 세일럼에서 그녀는 외톨이 영국 국교회 신자.

 

로이스가 마녀로 지목된 이유는 무엇보다 그녀가 타자라는 점이다. 외삼촌네 식구 아무도 그녀를 변호하지 않고, 그나마 머내시는 광기에 사로잡혀 오히려 그의 변호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나란 존재를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내가 나임을, 내가 정상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한다. 자신이 마녀가 아니라는 로이스의 외침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마녀가 마녀임을 인정할 리 없으며, 혹 마녀임을 자인한다면 당연하고 확고한 증거가 될 뿐.

 

비겁함은 모두를 잔인하게 만들었고, 흠잡을 데 없는 사람들이나 심지어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들조차 미신에 사로잡힌 잔인한 박해자가 되어 사악한 세력과 동맹을 맺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조금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P.131)

 

작가는 로이스를 둘러싼 인물들에게 맹목적 비난이 덧씌워지는 걸 피하기 위해서 당대 사람들이 목사를 포함하여 마법과 마녀의 존재를 믿고 있었음을 언급한다. 원주민 하녀 네이티는 이러한 믿음에 부채질한다. 놀런 목사를 짝사랑하는 페이스의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주문을 외고 의식을 행함으로써. 로이스조차도 어릴 때 목격했던 마녀로 누명에 씐 노파의 저주를 떠올리면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로이스는 속이 울렁거리고 몸이 떨렸다. 사람들의 어리석은 행동과 미신을 이해할 수 없었고, 죄 지은 사람에게 보이는 엄청난 증오와 혐오가 무서웠다. (P.175)

 

그럼에도 광란이 물결이 사라진 후의 세일럼 사람들과 이 작품을 읽는 독자는 여전히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이 이렇게 얄팍할 수 있단 말인가. 로이스의 진술은 차라리 장엄하다. 사방에 인간이 부재한 상황에서 그녀는 죽음으로써 오롯이 인간이기를 지향한다. 온 세상이 술에 취한 곳에서 맨정신인 사람은 살아갈 수 없는 법이므로.

 

저는 거짓말로 목숨을 구하느니 양심의 거리낌 없이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저는 마녀가 아닙니다. 절 마녀라 하시는데 전 그게 무슨 뜻인지조차 모르겠습니다. 살면서 나쁜 짓을 많이 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 용서받을 만한 것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P.221)

 

로이스의 단말마의 비명은 단 한 마디, “엄마!”(P.230)였다. 그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인간은 극단의 순간에 원초적인 상태로 되돌아간다고 한다. 가장 무섭고 두려워 어쩔 수 없는 무력한 상황에서 로이스가 내뱉을 수 있는 다른 말은 무엇이 남아 있었을까.

 

그들이 아무리 참회한들 로이스는 살아 돌아오지 않습니다.” (P.231)

 

로이스와 결혼하기 위해 영국에서 건너온 휴 루시는 위의 말을 세 번 반복한다. 광기가 스러지고 재판의 당사자들은 장문의 참회문을 남기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그의 말마따나 로이스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쉽게 말한다, 자기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왜 자기 잘못을 엄히 벌해 달라고 하지 않는가. 상대방이, 국가가, 종교가 그걸 용서해 준다고 하면 그 잘못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치부될 수 있는가. 아서 밀러의 희곡을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의 가슴 답답함이 이 작품을 읽으면서 차오른다.

 

이 작품을 고딕 소설로 분류하는 게 마땅한가. 여기에 고딕 장르의 특성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오로지 인간의 비이성과 광기만 가득할 뿐. 아니다, 전혀 사실 같지 않고 차라리 꿈과 환상이었기를 바라는 무시무시한 현실, 그 자체는 가장 커다란 두려움을 야기한다는 측면에서 지독히 씁쓸하지만 고딕 문학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크랜포드>의 자잘하고 소박하고 안온한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다. 작가 개스켈의 본령은 어디에 있는가. 가볍게 펼쳐 들었던 책에서 의외로 섬찟함과 묵직함을 발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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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 유목제국사 - 기원전 209~216 유목제국사
정재훈 지음 / 사계절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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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라고 하면 세계사와 관련하여 대체로 두 가지가 떠오른다. 중국사에서 진시황의 만리장성 축성과, 한고조의 굴욕과 한무제의 대대적 공격이 하나요, 서양사에서 소위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진 훈족의 침입. 물론 후자에서 훈족과 흉노를 동일시할 수 있는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어쨌든 중국사만 놓고 보면 흉노는 한나라 시기 이후로는 존재감이 없기에 자연스레 소멸한 것으로 이해하기 마련이다.

 

이 책은 중국 한족의 역사와 구별하여 흉노 자체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은 역사서다. 솔직히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거의 해본 적이 없다. 그만큼 중국 정통-이것도 편향적인 시각이겠지만-을 벗어난 주변사는 관심과 사료 자체가 빈약하다. 저자는 비단 이 책뿐만 아니라, 돌궐과 위구르를 다룬 삼부작 유목제국 역사서를 완성하였으니 일단 그 사실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저자는 중국 사서의 기록을 토대로 흉노의 기원과 본격적 대두 이전부터 흉노의 건국과 전성기, 한나라와의 대결과 패배에 이은 제국의 분열, 그리고 해체와 소멸에 이르기까지 유목제국으로서 흉노의 전모를 꼼꼼히 살핀다. 부제가 기원전 209 ~ 216’으로 되어 있는데, 유목국가로서 정체성을 지닌 기간이 4백 년에 가깝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인 듯하다. 저자도 강조하고 있듯이 유목민족이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는 사례가 빈번하지만 대개 단명에 그치는데 흉노는 매우 장기간에 걸쳐 중화 세력과 대결을 벌였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흉노 유목제국사를 복원하는 작업은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한 북아시아의 유목 세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사, 나아가 세계사에서 흉노의 위상과 의미를 곱씹어보는 과정이다. (P.34)

 

몇 가지 인상적인 대목 또는 새삼 주목하고 싶은 역사적 사실을 복기하고 싶다. 먼저 흉노의 원주지는 현재의 만리장성 이남이라는 점이다. 흉노는 몽골 초원이 아니라 고비사막 남쪽의 초원과 삼림이 혼합된 지역에 자리 잡았으며, 자신들과 같은 유목민뿐만 아니라 융과 같은 목축민들까지도 한데 아울렀다. 중원과 매우 인접한 지역이니만큼 전국시대뿐만 아니라 진, 한나라도 흉노에 굉장히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던 지리적 요인이 있었다.

 

이에 따라 시황제의 만리장성 축조가 갖는 의미도 달리 봐야 한다. 우리는 보통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라고 배웠다. 저자는 이것이 침입 방지와 자국민의 이탈 방지, 그리고 유목민의 동선을 강제로 북으로 이동시키려는 조치라고 한다. 주거에 용이한 땅을 잃고 내몰린 흉노로서는 생존 차원에서라도 잃어버린 고토를 회복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으리라. 이후 흉노와 중화의 갈등과 대결은 바로 이 지역의 공고화와 회복의 다툼에 아니다.

 

흉노의 최대 전성기는 명백히 묵특 대선우 시기일 것이다. 그는 한고조와의 일전에서 압승을 거두어 치욕적인 화친을 맺도록 강요하였으며, 막남 지역뿐만 아니라 동서로 확장하여 중화와 대등한 거대한 유목제국을 형성하여 흉노의 번영을 구가하였다.

 

묵특은 이제 과거 융과 호의 일부를 통합한 수준이 아니라, 중국에서 온 반한 세력과 서쪽에 있던 월지 및 월지의 통제를 받던 오아시스와 유목민 모두를 통제하는 명실상부한 유목제국의 대선우가 되었다. (P.143)

 

중국 역사의 후대에 보면 유목민은 단순히 중원에 침입하여 약탈과 조공을 기대하는 차원을 떠나 중원에 터를 잡고 아예 점령하려고 시도한다. 반면 흉노는 고비사막 남쪽, 오늘날 오르도스 지역 외에 중원 본토에 대해서는 별다른 영토적 욕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대 중국으로서는 천만다행이겠지만, 만약 그랬다면 중국사, 나아가 세계사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으리라. 흉노로서는 자신들의 생활 습속을 굳이 바꾸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필요한 물자와 인력은 언제든 인근에서 해결할 수 있으니까.

 

1백 년 가까이 수세에 몰렸던 한-흉노 관계가 역전된 계기는 한무제의 등장부터다. 흉노의 기동력을 따라잡기 위해 한무제는 기병을 대거 양성하여 흉노 본거지를 급습하였고, 흉노의 양팔을 자르기 위해 서역과 제휴 내지 지배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한국사에서 등장하는 고조선의 멸망을 이끌어낸다. 국사 시간은 고조선의 멸망이라는 사건 자체에 주목하는데, 저자는 한무제의 큰 그림을 고조선과 흉노의 동맹을 방지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전쟁의 목적을 밝힌다. 어찌 보면 우리 역사는 한과 흉노의 대결에서 유탄을 맞은 셈이다.

 

한은 흉노와 외부 세력이 연합해 한을 공격하는 일을 막기 위해 하서(이후에 하서사군 설치)와 조선(이후에 한사군 설치)을 공격해 차지했다. 이렇게 해서 한은 흉노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며 포위할 수 있었다. (P.371)

 

특히 한나라와 관심을 기울인 곳은 서역이다. 흉노는 서역 제국에서 정기적으로 공물을 받았으며 사막 교통로를 지배하여 교역 수입을 독점할 수 있었다. 한나라는 장건의 모험 이후 서역의 중요성을 깨닫고 하서회랑을 거쳐 오늘날 신강위구르자치구로 이어지는 서역 경영에 역점을 두게 되었음은 흉노와 대결을 통한 의외의 소득일 것이다.

 

순전한 외침만으로 패망에 이르는 나라와 민족은 드물다. 대개는 내우외환이 겹치기 마련이다. 가뜩이나 한나라의 압박으로 흉노 국가가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다섯 선우 쟁립이니 남북 흉노 분열과 같은 내부 요인으로 흉노는 자체 역량을 오롯이 결집하는 데 실패하였다. 이것이 최종적으로 북흉노의 소멸과, 남흉노의 중국 내 편입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과제다.

 

한과 흉노가 함께 이루던 이원적 질서는 흉노의 분열로 인해 한이 주도하는 일원적 질서로 바뀌었다. 이제 흉노는 스스로 아무리 자존을 지키려 해도 한에 종속된 여러 변수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처지가 되었다. 이런 양상은 남북 대결 국도가 심화되면서 더 확고해졌다. 흉노는 이제 각자 생존을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P.331)

 

중국사를 훑어보면 일시적으로 중국과 맞먹거나 우위를 보이는 세력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십중팔구는 정복당하거나 패망하는 수순에 이르는데, 단기전으로는 가능하지만 장기전으로 접어들면 중국의 막대한 자원과 인력의 힘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비슷한 피해를 입더라도 회복력의 수준이 다른 것이다. 전장이 중원이 아닌 경우에는 한층 더하다. 우리는 대표적 사례를 고구려를 통해 볼 수 있다. 수나라와 당나라에 팽팽하게 맞섰던 고구려는 지속된 전쟁으로 약화된 데다가 지배층의 분열로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저자는 조조에 의한 남흉노의 해체 이후 병주 흉노와 남북조 시대의 흉노를 짤막하게 다룬다. 그가 남흉노까지만 집중적으로 탐구한 까닭은 이후 흉노는 유목제국으로서의 의의보다는 군소 세력으로의 잔존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만약 국가로서의 흉노 외에 흉노 백성의 자취에도 관심을 지녔더라면 더 많은 이야기가 등장했을 것이다. 남북조 시대의 유연도 분명 흉노의 후예임을 여러 사서에서 인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저자의 서술 방식은 약간 딱딱하고 건조한 편이다. 본격 학술서와 대중서의 중간에 가깝지만 일반 대중이 흥미롭게 읽어나가기에는 쉽지 않다. 하지만 중국 역사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다면 간과하였던 역사의 조각을 맞춰나가는 재미는 쏠쏠하다. 책의 부록으로 실은 대선우의 계승과 분열연표와 대선우의 계보도를 함께 참고하면 어지러운 흉노 지배층의 분열과 다툼도 한결 체계가 잡힌다.

 

이 책이 흉노에 관한 모든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지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세계사적으로 흥미로운 주제인 흉노와 훈의 관계에 대해 저자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학술적 논란이 있다고 언급할 따름이다. 저자는 애초 이 책을 중국사의 범위 내로 제한한다. 기존 중화 세력 위주 역사서술의 편향을 벗어나 중화 세력과 유목 세력이 이원적 구도로 역사를 펼쳐나갔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야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고 한다.

 

이후 북중국을 무대로 전개된 분열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호와 한의 대결융합에만 초점을 맞춘 기존의 이분법적 설명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장성 안쪽으로 한정된 중국의 범위와는 다른, 초원과 북중국이 하나로 연결된 새로운 판도에서 비한(非漢) 세력들이 서로 얽혀 다원적성격을 보여주었다는 부분에 초점을 두고 역사의 전개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P.396)

 

흉노와 우리 역사와 관련하여 일각에서 신라 왕족의 흉노 기원설을 제기하고 있다. 문무대왕비를 비롯한 일부 자료에 근거를 두고 있다. 주류 사학계는 부정적이지만, 혹시라도 그렇다면 흉노의 역사는 더 이상 우리와는 무관한 남의 것이 아닐 수 있다. 진위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이를 계기로 농경 문화권 중심의 편향된 역사관을 탈피할 필요성은 충분하다. 과거 유목과 방랑은 부정적으로 치부되었지만 오늘날은 디지털 노마드라 하여 안주하지 않는 자유로움이 더욱 각광받는 세상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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