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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 - 로마편 3 ㅣ 델피시리즈 3
테렌스 지음, 최영주 옮김 / 동인(이성모) / 2007년 4월
평점 :
앞서 읽은 <쌍둥이 메내크무스 형제 : 메내크미>와 같은 ‘델피 시리즈’의 하나다. 일반적인 번역본이 대체로 작품 본문과 작품해설, 작가 소개로 구성된 것과는 달리 작품해설을 작품 배경, 작품의 주제와 플롯, 작품 내용과 에피소드, 주요 등장인물 분석, 작품이해를 위한 질문 및 모범답안과 같이 세부적으로 나누어 수록하고 있다. 이 시리즈의 목적이 고전 희곡을 위한 안내서이자 학습서를 지향하고 있어서다.
테렌스는 그리스 원전을 보다 자유롭게 번안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희극관에 맞지 않을 경우 주제마저도 바꾸었다. 그는 그리스극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리스 원전에 필적할 만한 순수한 라틴 스타일을 창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P.13)
테렌티우스[영문명: 테렌스]는 플라우투스와 함께 로마 희극을 대표하는 작가다. 그의 희극은 순전한 창작이 아니라 그리스 신희극 작가인 메난드로스의 작품을 번안하는 방식인데 자신만의 독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자유롭게 번안하였다고 한다. 해설에 따르면 그의 작품 성향은 “지적이며 우아하고, 도덕적인 어조에 주제 의식이 명확”(P.122)하지만, 이 작품은 오히려 플라우투스와 같은 소극 색채가 강한 게 특징이라고 한다.
희극은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자신의 작품을 비난하는 경쟁자에게 항의 및 경고하는 내용이며, 자신이 선대 작가의 글을 사용했지만 경쟁자처럼 글솜씨를 형편없지는 않다고 자부한다.
각설하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그 말입니다. 이 말을 잘 생각해보시고, 신인 작가가 옛 것을 갖다 쓰더라도 용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자, 이제 조용히 관극을 할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내시>의 의미를 한번 배워보시지요. (P.22, 프롤로그)
작품은 파이드리아와 카이리아 형제의 연애 사건을 소재로 한다. 파이드리아는 매춘부 – 여기서는 기생이라고 용어를 순화한다 – 타이스를 사랑하는데, 군인 쓰라소와 연적 관계이다. 파이드리아는 타이스에게 노예와 내시를 선물로 주고, 쓰라소 역시 타이스에게 팸필리아를 노예로 준다. 카이리아는 팸필리아의 미모에 우연히 매혹되어 자신이 내시인 척 변장하여 타이스의 집에 들어간 후 빈틈을 노려 팸필리아를 범한다. 여기까지만 보더라도 셰익스피어의 초기 희극 또는 플라우투스의 희극과도 분위기와 내용 전개가 다소간 차이를 보임을 알 수 있다.
이 극의 관전 포인트는 우선 타이스를 둘러싼 파이드리아와 쓰라소의 대치 구도이다. 타이스를 독점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쓰라소는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팸필리아를 다시 빼앗으려 드는 인물이다. 우직하지만 멍청하고, 군인이라고 하지만 의외로 비겁하다. 파이드리아는 순수하지만 소심한 성격인데 그의 진면모는 희극의 마지막 대목에서 드러난다.
(카이리아) (독백) 여기 아무도 없나? 없네! 누구 날 따라 오는 사람은 없어요? 그림자도 없네. 아휴 재미있어 죽겠다. 그래 죽을 수는 없지, 저승 간 사이 누가 요 재미를 망치면 어떻게 해. (P.66, 제3막 제5장)
카이리아는 형과 달리 적극적이며 실행력이 있다. 그의 과단성은 팸필리아를 범하는 나쁜 방향에서 먼저 발휘되는데 이때 떠벌리는 위의 대사를 통해 그의 경박한 면모를 알 수 있다. 다만 나중에 팸필리아와 약혼함으로써 단순한 욕정의 충족만이 아닌 사랑으로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팸필리아의 마음의 상처와 의사가 전혀 고려되지 않는 까닭은 그녀의 신분이 노예 – 나중에 아테네 시민임이 확인되지만 – 라는 시대적 배경이 작용해서다. 현대적 시각에서는 정당화하기 어려운 행위이자 해법이라고 하겠다.
<내시>의 희극성은 쓰라소와 그나소의 콤비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나소는 아첨꾼으로 쓰라소의 식객 노릇을 하고 있는데, 본인의 이해득실에 따라 잽싸게 쓰라소에서 파이드리아로 대상을 갈아타는 기민함을 보여준다.
파르미노와 피시아스는 시종 성실하고 주인에게 충직하다. 두 사람은 제법 재치도 있고 나름 정의감도 지니고 있다. 파르미노는 쓰라소와 그나소에 비판적이고, 피시아스는 카이리아를 용서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원인 제공을 한 파르미노를 골탕먹인다. 두 사람에 대한 주인의 태도가 천양지차인 점이 뜻밖이다. 파이드리아는 파르미노를 신뢰하고 존중하는 반면 타이스는 피시아스를 함부로 대한다.
(타이스) 왜 그렇게 꾸물거려, 건방진 여편네! (피시아스는 집으로 들어간다.) (P.86, 제4막 제6장)
(타이스) 나쁜 년, 왜 내게 얼버무리지? (P.95, 제5막 제1장)
(타이스) 못된 년 같으니, 넌 늑대에게 양을 지키라고 한 거야. (P.96, 제5막 제1장)
(타이스) 저리가, 미친 년! (P.99, 제5막 제2장)
(타이스) 입 닥쳐. (P.100, 제5막 제2장)
이 작품에서 가장 난해한 인물이 타이스다. 그녀는 매춘부답게 쓰라소와 파이드리아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데 능숙하다. 마음으로는 파이드리아를 사랑하지만 쓰라소의 넉넉한 재산도 놓칠 수 없기에. 충실한 피시아스를 항상 욕하며 무시하는 대목을 보면 직업에 걸맞은 그녀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팸필리아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라든가 쓰라소의 무력 시위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한 태도는 반전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은 다소 충격적이다. 쓰라소는 타이스를 단념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그녀 곁에 남아있을 수 있기를 바란다. 파이드리아는 이에 동의하는데, 낭비벽 있는 파이드리아와 타이스의 생활 자금을 쓰라소에게서 뜯어내자는 그나소의 꼬드김이 유효했다. 그러면서 그나소는 파이드리아와 한 편이 된다. 이쯤 되면 타이스를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이 파이드리아인지 쓰라소인지 헷갈릴 정도다. 개인적으로 쓰라소의 순박한 일편단심에 더 끌린다.
이 책이 원전 번역이 아니라 영문판 번역임은 척박한 학계 사정을 고려하면 불가피함을 인정할 수 있다. 그렇게라도 해서 좋은 고전이 출판될 수 있다는 게 어디겠는가. 하지만 편집과 교정의 미비는 참을 수 없다. 무엇보다 파이드리아와 카이리아 간 혼동이 난무하는 오류(P.124, P.132)를 버젓이 방치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