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
테렌스 지음, 허종 옮김 / 동인(이성모)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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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와 마찬가지로 델피시리즈로 기획되었으므로 작품 분석을 위한 학습 목적의 구성은 다른 책과 동일하다. 이 책은 편집과 교정 면에서 큰 오류 없이 깔끔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다른 책에 비해 차별성을 보인다. 역시 영문판 중역본이다. ‘형제의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을 표기한 것은 데메아와 미키오 형제, 아들들인 아에스키누스와 크테시포 형제를 지칭한다. 데메아는 자신의 장남인 아에스키누스를 자식이 없는 미키오에게 양자로 보냈다. 그래서 아버지 형제가 각각 아들 형제를 맡아 키우게 된 상황이다.

 

기원전 160년에 상연된 이 작품은 집안에서 가장의 역할과 올바른 자녀 교육이 어떤 것인가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P.131)

 

이 희극은 테렌티우스의 대표작으로 가장 최후의 작품이다. 따라서 <내시>에 비해서 구성면에서 보다 세련되고 정교하게 진일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작품 주제는 보통 위와 같이 언급되는데, 확실히 두 형제의 아들 양육 방식이 확연한 대조를 보인다. 자녀 교육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하면서도 예민한 사안이다. 무엇이 최선의 양육 방식인지 여전히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미키오) 나는 자식을 키우는 데에 존경받을 일을 하거나 관용을 베푸는 것이 엄격하게 두려움을 주어 키우는 것보다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바로 이점에서 나와 형님은 의견을 크게 다르게 한단 말이야. [......] 형은 아이들 양육에는 권위를 갖고 두려움을 주는 것이 사랑을 베푸는 것 보다 더 확실하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야. (P.26, 1막 제1)

 

이처럼 데메아와 미키오는 서로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아들들을 키운다. 방식이야 어쨌든 두 아들이 의도처럼 훌륭하게 자란다면 좋겠지만, 2막에서 크테시포가 창기와 사랑에 빠진 모습을 보임으로써 이미 데메아의 기대에 어긋났음을 독자는 알게 된다. 반면 오명을 덮어쓰면서도 동생을 위해 창기를 뚜쟁이에게서 빼돌린 아에스키누스의 행동은 미키오의 교육방식이 더 성공적이라는 데 무게를 실어준다. 미키오에게 쏠린 마음도 오래가지 못한다. 3막에서 아에스키누스가 팜필라와 사랑에 빠져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임신시켰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 상황 만을 볼 때 누구의 손도 섣불리 들어주기 어려운 셈이다.

 

자식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너그럽고 친절한 미키오를 세상 사람들은 존경하고 자식은 공경하고 사랑한다. 미키오는 아에스키누스와 크테시포의 잘못이 드러나도 그들을 탓하고 화내는 대신 원만하게 수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들들이 자신의 여자와 짝을 맺을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평소의 온화한 모습에 이러한 관대함까지 더해졌으니 아들들이 데메아보다 미키오를 더 가까이하고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 시루스는 데메아에게 그의 유익한 말씀이 여기서는 쓸모가 없다고 위로하지만 사실은 비꼬고 있다.

 

(크테시포) 바로 그거야. 내가 바라는 거는 아버지가 큰 병에는 걸리지 않은 채 이번 주에만 한 사나흘쯤 누워 계셨으면 좋겠어. (P.74, 4막 제1)

 

크테시포는 심지어 이렇게 바라기조차 한다. 반면 미키오에 대한 아에스키누스의 심정은 전혀 다르다.

 

(아에스키누스) 아버지란 으레 저래야 하는 걸까? 아들로서의 내 도리가 이래도 되는 걸까? 만일 형제나 친구라면 이렇게까지 친절을 베풀 수 있을까? 그러니 난 아버지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어. 늘 마음속에 고마움을 간직해야 돼. (P.97, 4막 제5)

 

시루스에 의해 이리저리 헤매게 되고, 아들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엄격함과 고지식함으로 존경을 받지 못하는 데메아와 그렇지 않은 미키오, 누가 봐도 미키오의 판정승이다.

 

작가는 이 희극의 진정한 주인공을 미키오가 아니라 데메아로 여긴다. 그는 미키오의 온화함을 데메아의 말처럼 그의 넉넉한 재산과 게으른 성격의 산물로 간주하는 듯하다. 미키오는 데메아처럼 부지런하지도 않고 자식 교육에 노심초사 애쓰지도 않고 자유방임으로 풀어놓는다. 미키오의 방식을 따른다고 모두가 아에스키누스처럼 잘 자란다고 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데메아가 자신의 기본을 유지한 채 조금만 더 미키오처럼 온화해진다면 더욱 바람직하지 않을까? 이 대목에서 데메아의 각성이 펼쳐진다.

 

(데메아) 이제부터라도 내가 친절한 말을 할 수 있을까? 너그러워질 수 있다면 어디 한번 시험해보고 싶어. 모두들 나를 멸시하고 있어. 그렇지만 나도 아이들에게 호감을 사고 아버지답게 보이고 싶어. 그것을 돈과 친절만으로 살 수 있다면 나라고 못 할 것도 없지. (P.114, 5막 제4)

 

데메아의 변신은 놀랍다. 아들들의 잘못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외로이 지내게 될 팜필라의 어머니와 미키오가 결혼하도록, 미키오의 성문 밖 땅을 가난한 헤기오에게 주도록 주선한다. 미키오의 노예 시루스와 그의 아내를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키고 독립 자금을 빌려주도록 한다. 이 과정에서 미키오의 완강함에 부딪히는데,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모두가 미키오의 신상과 재산에 관련한 사안인데 데메오가 선심 쓰고 있으니 말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작중 인물 네 명 중 심정과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인물은 오직 데메아라는 점이다. 아들들의 변화는 장래에 기대할 수 있는 영역이다. 미키오는 처음부터 긍정적으로 기술되었으니 별로 바뀔 게 없다. 데메아는 180도로 돌아선다, 그것도 매우 급작스럽고 과격하게. 작가가 데메아의 변신을 다소 무모할 정도로 설정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이 정말로 바람직하고 훌륭하다고 믿어서일까. 그게 아니라면 외관상 미키오의 방식에 손을 들어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의 방식도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님을 데메아의 개심을 통해 역설적으로 비추고 있는 건 아닐까. 어쨌든 희극답게 모든 인물이 즐겁고 만족스러운 듯 막을 내리지만 부리나케 극을 끝마치는 작가의 태도가 묘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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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훔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그림으로 만난 세계의 미술가들 외국편 1
염명순 지음 / 미래엔아이세움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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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는 많은 예술가가 그러하듯 생전에 인정받지 못하다가 사후에 더 유명하게 된 화가다. 나처럼 미술에 문외한은 그저 자기 귀를 자른 미치광이 화가 정도로 더 기억한다. 이 책은 그림으로 만난 세계의 미술가들시리즈 중 하나인데. 청소년 대상으로 고흐의 생애와 미술 세계를 안내하고자 기획한 책이다. 일반적인 책보다 판형이 더 큰데, 주요 작품들을 고급용지에 올컬러로 보다 큼지막하게 수록하여 화집의 성격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덕분에 책장을 넘기며 고흐의 대표작들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양면에 걸쳐 수록된 그의 작품들은 이러하다. 감자 먹는 사람들(P.48-49), 별이 빛나는 밤(P.116-117), 빈센트의 방(P.128-129), 실편백나무가 있는 별이 빛나는 밤(P.162-163), 올리브나무(P.164-165), 실편백나무가 서 있는 길(P.170-171), 까마귀가 나는 밀밭(P.186-187). 단면을 차지하는 작품들의 목록은 해바라기, 자화상, 씨 뿌리는 사람, 탕기 영감의 초상, 가셰 의사의 초상 등등 몇 배나 숫자가 많다.

 

고흐 하면 흔히 인상주의를 떠올리는데, 의외로 그가 인상주의에 경도된 기간은 매우 짧음을 알 수 있다. 파리로 오기 전 그의 경력 초기는 책에서도 지적되었듯이 네덜란드 미술의 전통에 따라 어두운 색상으로 일관한다. 소재도 감자 먹는 사람들, 탄광 광부, 옷감 짜는 사람 등 가난한 노동자 계층을 주로 택하였다. 그의 후기작에서도 농부들에 관한 관심을 놓지 않는 걸 보면 그의 성향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빈센트가 즐겨 그린 이러한 그림의 소재를 통해 이 화가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가 사회에서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런 그림은 결코 나올 수 없었을 터입니다. (P.38)

 

그의 삶에서 중요한 두 사람이 있다. 한 명은 그의 동생 테오인데, 동생이 아니었다면 고흐의 예술가 생활은 단명했으리라. 형이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박봉을 쪼개 생활비를 보내준 테오. 형이 죽자 얼마 지나지 않아 갓난아기를 남긴 채 역시 세상을 떠난 테오. 죽어서나마 세상의 갈채를 받게 된 형의 뒤늦은 인정에 저승에서나마 기뻐했으리라. 그리고 고갱. 예술가들의 공동생활이라는 고흐의 꿈은 비현실적이다. 일반인들조차도 남들과 함께 생활하기 힘든데, 개성 강하고 유아독존적인 예술가들이 순수한 공동생활 공동작업을 한다? 그들의 짧은 동거는 고흐의 자해라는 비극으로 끝나게 되었으니, 차라리 함께하지 않는 편이 양자에게 나았을 텐데.

 

이 책은 고흐를 태양을 훔친 화가라고 평하지만 내게는 격정과 광기의 화가로 비친다. 그의 격정은 비단 후반부뿐만 아니라 삶의 전반부에서도 이미 드러난다. 탄광촌에서의 극단적인 전도사의 모습은 일반적인 사례가 아니다. 사촌 누이에 대한 사랑을 인정받지 못하자 램프 불에 손가락을 태우는 고흐의 태도 또한 범상하지 않다. 격정적이고 극단적인 그의 행동은 결국 자신의 귀를 자르는 상황으로 악화한다.

 

빈센트는 초록색과 붉은색으로 인간의 무시무시한 열정을 표현하려고 했다고 말합니다. 그냥 열정이 아닌 무시무시한 열정은 무슨 뜻일까요? 아마 앞에서 말한 인간을 파멸시키고, 미치게 하고, 범죄를 저지르게 하는 열정일 성싶습니다. 빈센트는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어두운 열정을 허름하고 쓸쓸한 밤의 카페 내부에 빗대어 이 그림처럼 표현했습니다. (P.108)

 

<밤의 카페>에 대한 화가 자신의 해석이다. 아를르의 한밤중 몇 명의 손님만 자리를 지키는 카페에서 화가는 어떠한 무시무시한 열정을 발견하였을까. 혹 그것은 화가 자신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환상의 연상일지도 모른다.

 

파리로 건너온 이후 그의 화풍은 강렬한 원색과 밝은 색채를 띠게 되었다. 인상주의와 들라크루아의 영향이라고 하는데, 한낮의 그림은 확실히 과감한 색의 사용과 색상의 강렬한 대비가 두드러진다. 반면 밤을 소재로 한 그림은 어둡고 기괴하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소용돌이치는 대기와 하늘, 똑바로 서 있지 못하고 꿈틀거리며 비틀린 나무들은 스스로 온전히 서 있지 못하게 된 화가의 몸과 마음을 반영한 게 아닐는지. 유명한 해바라기의 꿈틀거림조차도 왕성한 생명력의 뻗침보다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것 같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생레미 요양원 시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실편백나무가 있는 별이 빛나는 밤>입니다. 이 무렵 그가 그린 실편백나무는 그의 혼란스러운 마음 상태를 그대로 보여 줍니다. 그리고 전에 비해 하늘에는 구름이 많이 끼여 있거나, 여기에서 보듯 소요돌이치고 있습니다. 앞의 <추수하는 사람>에서도 보았듯이 일정한 방향으로 소용돌이치는 형태는 이 시기의 큰 특징입니다. (P.160)

 

고흐는 극히 내성적이어서 타인과의 교류를 거의 갖지 못하였다. 가정도 없는 그가 타지에서 온종일 그림만 그려내는 장면은 성실한 화가의 이미지보다도 외로움에 갇혀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오로지 그림그리기로만 일관하는 슬픈 자화상을 떠올리게 된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가운데 자신의 그림은 전혀 이해받지 못한 채로 남과의 대화는 단절되었고 한 가닥 기대하였던 고갱과의 공동생활도 처참한 실패로 판명되었다. 이제 그에게는 더는 버텨낼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음을 그의 마지막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마지막 편지였습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아 정말이지 우리는 오직 그림으로만 말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림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 그리고 세상과 이야기하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는 그림에 내 삶을 걸었건만 내 이성은 반쯤은 허물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 무렵에 발걸음마저 휘청거린다는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황금빛 밀밭 속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P.184)

 

성실한 화가 고흐가 남긴 그림은 모두 이천여 점이나 된다고 한다. 그의 수많은 그림이 그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후대에 불후의 명성을 남기게 되었으니 인간 고흐가 아닌 예술가로서의 그는 성공한 셈인가. 그의 그림 못지않은 평판을 받은 게 그가 동생 테오를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보낸 편지라고 한다. 기회가 닿으면 그가 남긴 편지글들을 통해 그의 내면을 좀 더 가까이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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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베토벤을 선물합니다
임현정 지음 / 페이스메이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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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에 관한 비교적 가벼운 책을 찾던 중 이 책을 읽게 되었다. 큰 부담 없이 읽어나갈 수 있으며 다소나마 지적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는 책으로서. 저자는 피아니스트다. 수년 전 화제를 일으켰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의 연주자다. 그런 저자가 연주자로서 베토벤에 대해 어떤 얘기를 풀어놓을지 궁금해서다. 저자의 글 쓴 의도 또한 내 기대를 부풀리기에 충분하였다.

 

나는 그의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자, 그러니까 피아니스트로서 베토벤을 논하고 싶었다. 더 나아가 그가 어떻게 영감을 주었는지, 삶 전반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는지 이야기하고 싶었다. 음악학자의 시선에서 베토벤을 사유하는 책은 많았지만 연주자의 입장에서 그를 조명한 책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P.4-5, 프롤로그)

 

이 책에서 가장 지적, 음악적으로 흥미로운 대목은 그의 피아노 소나타 작품들을 사랑, 인생, 자연과 같은 테마로 분류하여 몇몇 작품을 딱딱하지 않게 풀어 설명한 부분에 있다. 저자는 소나타 14, 24, 27번을 사랑에, 소나타 16~18번을 영웅의 부활 암시로, 소나타 15, 21번을 자연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한다.

 

필자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사이클이야말로 한 천재가 스스로의 삶의 모든 양상을 표현하고 거의 회화적으로 묘사한 내밀한 일기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피아노 소나타를 통해 때로는 숭고하게, 때로는 이상화되어, 그리고 자주 가슴에 사무치도록 현실적으로 삶의 모든 양상을 표현했다. (P.57)

 

물론 피아노 소나타 전체를 대상으로 삼은 게 아니므로 한계는 있지만, 확실한 점은 베토벤의 음악을 절대 고전으로 신격화하고, 엄숙하고 딱딱하여 일반인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존재처럼 떠받드는데 저자가 반대하는 모습이다. 저자는 이들 작품을 작곡가가 자신의 삶을 음악에 투영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기존의 감성과 형식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기에 베토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한 것이다.

 

피아니스트 임현정이 연주하는 베토벤 소나타 연주를 듣는다. 낯설면서 신선하다. 다소 급하게 느껴지는 건 그녀가 이 책에서도 말했던 템포 설정이 적용되어서이리라. 익숙하게 들어왔던 기존 대가들의 해석과는 방향이 다르다. 솔직히 나의 취향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개성적임은 인정하며, 과감한 시도는 좋게 생각한다. 예술을 위해 진지하게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게 연주자의 자세라면, 그 노력을 호오와 상관없이 열린 마음으로 대우하는 건 감상자의 몫이리라. 저자도 청자에게 이런 부분을 희망한다.

 

어떤 예술인을 평가할 때는 마음에 든다, 들지 않는다.’가 아니라 그가 최선을 다했는지, 정말 할 수 있는 만큼 탐구하고 파고 들어갔는지가 중요하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음악을 만들었다면 취향을 떠나서 진심으로 존중하고 인정할 수 있다. (P.107)

 

직전에 읽은 전기의 영향 탓인지 예술 영역이 아닌 베토벤의 인성 영역을 예찬하고 높이 평가하는 대목에서는 공감도가 떨어진다. 그가 개인적 난관을 극복하고 위대한 예술적 성취를 이룬 사실과 예술가로서의 평범하지 않은 말과 행동도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인다. 다만 예술가가 아닌 인간으로서 그가 타인에게 보여준 잘못 - 특히 조카의 양육권을 둘러싼 은 변호의 여지가 없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 바로 베토벤에 대해서 오로지 긍정적 면으로 시종일관하였다는 점이다. 글쓴이가 베토벤에게서 받은 커다란 영향, 그리고 애초의 저작 의도가 달라서라는 점을 알면서도 한번 언급해 본다.

 

어두운 환경을 디딤돌 삼아 운명을 극복한 베토벤을 보면서, 나 또한 스스로 더 강해지고 성숙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P.87)

 

베토벤의 당당함은 나에게 인생의 방향을 가리켜주는 나침반이 되었다. 내가 베토벤을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조건없는 양심덕분이다. (P.205)

 

나는 베토벤의 끊임없는 투쟁을 보며 과연 행복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있는 그대로, 갖고 있는 그대로, 생긴 그대로 서로 사랑하고 존중한다면 행복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P.207)

 

베토벤의 삶과 음악 세계의 전부를 이 책에서 알게 되기를 기대했다면, 결과적으로 실망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지식 전달 위주의 목적으로 쓴 책이 아니다. 클래식 음악의 초심자를 대상으로 특히 베토벤이라는 인물의 삶을 음악과 연결하여 소개한다. 아울러 저자가 힘들었던 개인사를 극복하는 데 있어 베토벤이 미친 영향, 베토벤의 삶에서 저자가 찾아낸 장점 및 깨달음, 베토벤 음악의 성격과 올바른 해석 방법 및 연주자의 올바른 태도 등등을 군데군데 피력한다. 어찌 보면 베토벤이라는 인물을 매개로 한 저자의 수상록에 가까우며, 끝 대목은 거의 인생론과 유사하다. 베토벤을 통해 행복의 본질을 깨우쳤으니.

 

제아무리 구구절절하고 정묘하게 서술해 봤자 음악의 참된 아름다움은 직접 듣는 것만 못하다. 악곡의 주요 설명 대목마다 해당 음악을 직접 들어볼 수 있도록 연결되는 QR코드를 마련해 둔 점은 좋은 아이디어다. 베토벤의 음악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독자라면 매우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베토벤의 곡이 아닌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도 저자의 연주로 접할 수 있게 하였음을 언급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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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 - 로마편 3 델피시리즈 3
테렌스 지음, 최영주 옮김 / 동인(이성모)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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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은 <쌍둥이 메내크무스 형제 : 메내크미>와 같은 델피 시리즈의 하나다. 일반적인 번역본이 대체로 작품 본문과 작품해설, 작가 소개로 구성된 것과는 달리 작품해설을 작품 배경, 작품의 주제와 플롯, 작품 내용과 에피소드, 주요 등장인물 분석, 작품이해를 위한 질문 및 모범답안과 같이 세부적으로 나누어 수록하고 있다. 이 시리즈의 목적이 고전 희곡을 위한 안내서이자 학습서를 지향하고 있어서다.

 

테렌스는 그리스 원전을 보다 자유롭게 번안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희극관에 맞지 않을 경우 주제마저도 바꾸었다. 그는 그리스극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리스 원전에 필적할 만한 순수한 라틴 스타일을 창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P.13)

 

테렌티우스[영문명: 테렌스]는 플라우투스와 함께 로마 희극을 대표하는 작가다. 그의 희극은 순전한 창작이 아니라 그리스 신희극 작가인 메난드로스의 작품을 번안하는 방식인데 자신만의 독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자유롭게 번안하였다고 한다. 해설에 따르면 그의 작품 성향은 지적이며 우아하고, 도덕적인 어조에 주제 의식이 명확”(P.122)하지만, 이 작품은 오히려 플라우투스와 같은 소극 색채가 강한 게 특징이라고 한다.

 

희극은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자신의 작품을 비난하는 경쟁자에게 항의 및 경고하는 내용이며, 자신이 선대 작가의 글을 사용했지만 경쟁자처럼 글솜씨를 형편없지는 않다고 자부한다.

 

각설하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그 말입니다. 이 말을 잘 생각해보시고, 신인 작가가 옛 것을 갖다 쓰더라도 용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 이제 조용히 관극을 할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내시>의 의미를 한번 배워보시지요. (P.22, 프롤로그)

 

작품은 파이드리아와 카이리아 형제의 연애 사건을 소재로 한다. 파이드리아는 매춘부 여기서는 기생이라고 용어를 순화한다 타이스를 사랑하는데, 군인 쓰라소와 연적 관계이다. 파이드리아는 타이스에게 노예와 내시를 선물로 주고, 쓰라소 역시 타이스에게 팸필리아를 노예로 준다. 카이리아는 팸필리아의 미모에 우연히 매혹되어 자신이 내시인 척 변장하여 타이스의 집에 들어간 후 빈틈을 노려 팸필리아를 범한다. 여기까지만 보더라도 셰익스피어의 초기 희극 또는 플라우투스의 희극과도 분위기와 내용 전개가 다소간 차이를 보임을 알 수 있다.

 

이 극의 관전 포인트는 우선 타이스를 둘러싼 파이드리아와 쓰라소의 대치 구도이다. 타이스를 독점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쓰라소는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팸필리아를 다시 빼앗으려 드는 인물이다. 우직하지만 멍청하고, 군인이라고 하지만 의외로 비겁하다. 파이드리아는 순수하지만 소심한 성격인데 그의 진면모는 희극의 마지막 대목에서 드러난다.

 

(카이리아) (독백) 여기 아무도 없나? 없네! 누구 날 따라 오는 사람은 없어요? 그림자도 없네. 아휴 재미있어 죽겠다. 그래 죽을 수는 없지, 저승 간 사이 누가 요 재미를 망치면 어떻게 해. (P.66, 3막 제5)

 

카이리아는 형과 달리 적극적이며 실행력이 있다. 그의 과단성은 팸필리아를 범하는 나쁜 방향에서 먼저 발휘되는데 이때 떠벌리는 위의 대사를 통해 그의 경박한 면모를 알 수 있다. 다만 나중에 팸필리아와 약혼함으로써 단순한 욕정의 충족만이 아닌 사랑으로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팸필리아의 마음의 상처와 의사가 전혀 고려되지 않는 까닭은 그녀의 신분이 노예 나중에 아테네 시민임이 확인되지만 라는 시대적 배경이 작용해서다. 현대적 시각에서는 정당화하기 어려운 행위이자 해법이라고 하겠다.

 

<내시>의 희극성은 쓰라소와 그나소의 콤비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나소는 아첨꾼으로 쓰라소의 식객 노릇을 하고 있는데, 본인의 이해득실에 따라 잽싸게 쓰라소에서 파이드리아로 대상을 갈아타는 기민함을 보여준다.

 

파르미노와 피시아스는 시종 성실하고 주인에게 충직하다. 두 사람은 제법 재치도 있고 나름 정의감도 지니고 있다. 파르미노는 쓰라소와 그나소에 비판적이고, 피시아스는 카이리아를 용서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원인 제공을 한 파르미노를 골탕먹인다. 두 사람에 대한 주인의 태도가 천양지차인 점이 뜻밖이다. 파이드리아는 파르미노를 신뢰하고 존중하는 반면 타이스는 피시아스를 함부로 대한다.

 

(타이스) 왜 그렇게 꾸물거려, 건방진 여편네! (피시아스는 집으로 들어간다.) (P.86, 4막 제6)

(타이스) 나쁜 년, 왜 내게 얼버무리지? (P.95, 5막 제1)

(타이스) 못된 년 같으니, 넌 늑대에게 양을 지키라고 한 거야. (P.96, 5막 제1)

(타이스) 저리가, 미친 년! (P.99, 5막 제2)

(타이스) 입 닥쳐. (P.100, 5막 제2)

 

이 작품에서 가장 난해한 인물이 타이스다. 그녀는 매춘부답게 쓰라소와 파이드리아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데 능숙하다. 마음으로는 파이드리아를 사랑하지만 쓰라소의 넉넉한 재산도 놓칠 수 없기에. 충실한 피시아스를 항상 욕하며 무시하는 대목을 보면 직업에 걸맞은 그녀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팸필리아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라든가 쓰라소의 무력 시위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한 태도는 반전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은 다소 충격적이다. 쓰라소는 타이스를 단념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그녀 곁에 남아있을 수 있기를 바란다. 파이드리아는 이에 동의하는데, 낭비벽 있는 파이드리아와 타이스의 생활 자금을 쓰라소에게서 뜯어내자는 그나소의 꼬드김이 유효했다. 그러면서 그나소는 파이드리아와 한 편이 된다. 이쯤 되면 타이스를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이 파이드리아인지 쓰라소인지 헷갈릴 정도다. 개인적으로 쓰라소의 순박한 일편단심에 더 끌린다.

 

이 책이 원전 번역이 아니라 영문판 번역임은 척박한 학계 사정을 고려하면 불가피함을 인정할 수 있다. 그렇게라도 해서 좋은 고전이 출판될 수 있다는 게 어디겠는가. 하지만 편집과 교정의 미비는 참을 수 없다. 무엇보다 파이드리아와 카이리아 간 혼동이 난무하는 오류(P.124, P.132)를 버젓이 방치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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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서의 베토벤 - 퓰리처상 수상 작가가 바라본 베토벤의 삶과 음악
에드먼드 모리스 지음, 이석호 옮김 / 프시케의숲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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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은 바흐와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 작곡가다. 오래전부터 그의 주요 작품들을 다양한 연주로 반복하여 감상하지만, 그때마다 새록새록 듣는 재미를 안겨준다. 확실히 음악가로서의 그의 역량은 대단하여 괜히 최고의 음악가로 평가받는 게 아니다.

 

로맹 롤랑의 전기로 그의 삶을 대강 훑어보았지만 미진한 느낌이 드는 건 20세기 초에 쓴 글이다 보니 현대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어서다. 메이너드 솔로몬 또는 얀 카이에르스의 두툼한 본격적 평전은 쉽사리 도전하기 부담스러워 적당한 책을 찾은 게 모리스의 전기다. 저자는 전문적인 전기 작가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바 있다고 하니 작가로서의 기본 역량은 인정받은 셈이다. 책 뒤표지의 보통의 독자를 위한 이상적인 베토벤 평전이라는 광고 문구는 이 책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저자는 베토벤이 위대한 예술가인 건 맞지만 위대한 인간은 아님을 여러 자료를 인용하여 보여준다. 번역자도 이 점을 강조하고 싶었는지 원제에 없는 인간으로서의라는 문구를 표제에 추가하였다. 베토벤의 인간으로서의 면모와 음악 해석은 기존에 그의 비서였던 쉰들러가 남긴 글과 자료에 많이 의지하였다. 쉰들러가 사실은 베토벤의 삶을 조작했음이 연구 결과로 밝혀진 게 1970년대였다고 하니, 우리가 아는 베토벤의 모습은 실상과는 거리가 멀었던 셈이다. 음악의 성인으로서 또는 영웅으로서 베토벤을 신성시하는 견해는 오히려 베토벤의 참모습을 이해하는 데 적합하지 않으므로 저자는 베토벤을 성인화하는데 반대하며 쉰들러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성인전 작가라는 단어까지 사용한 마당에 이쯤 해서 안톤 펠릭스 쉰들러를 소개해야 하지 싶다. 쉰들러는 다른 물고기에 붙어 그 피를 빨아먹는 칠성장어처럼 어떻게든 위대한 사람들 가까이에 붙으려 하는 특색 없는 젊은이 가운데 하나였다. (P.304)

 

이 책은 베토벤의 치부까지도 가감 없이 독자에게 드러낸다. 인간 베토벤은 약점이 많은 인물이다. 육체적으로 잘 알려진 난청 외에 근시였고, 각종 질병에 일생토록 시달렸다. 그의 연인들과는 플라토닉한 사랑만 거듭한 채 결실을 이루지 못하고 정욕을 달래기 위해 사창가를 들락거렸다. 후반부에서 상세한 경과를 밝히고 있는 조카의 양육권을 둘러싼 제수씨와의 법정 소송은 치졸함과 추잡함의 극단을 보여준다. 그의 행동과 글을 보면 과연 그가 정신적으로 온전할까 의구심이 들 정도다. <장엄미사> 악보출판을 두고 벌이는 출판업자 간 다중 계약의 음모 또한 제아무리 생활고에 항상 시달린 베토벤이라고 하더라도 금전적으로 타락하였음을 변호하기 힘들 정도다.

 

1813년부터 1820년 사이에 베토벤이 겪었던 개인사에서처럼 병치레와 돈 거래, 가족 간의 알력 다툼, 개인적 기벽 등이 온갖 하나로 범벅이 되는 걸 보고 나면, 당시 그가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과연 정신을 꽉 붙들고 있었을지도 우리로서는 확신할 수 없다. (P.243)

 

그럼에도 우리는 베토벤을 비난하기보다는 그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음악가에 치명적인 난치병을 앓는 것도, 사랑하는 여인과의 행복한 삶 대신 외로움과 쓸쓸함 속에서 삶을 살아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므로. 오죽했으면 유서를 남겼고, 연인에게 보내고 싶은 편지는 부치지 못한 채 서랍 속에 묻었어야 했겠는가. 저자는 불멸의 연인의 정체에 관해 앞선 연구의 내용을 반영하여 소개하고 있으며, 못다 보낸 편지의 내용도 인용한다. 애절한 그의 심경이 참으로 안타깝고 저절로 동정심을 품게 한다.

 

누구도 베토벤의 육체적·정신적 괴로움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이는 없었다. 남들 몰래 써서 감추어두었다가 그가 죽고 나서야 발견된 두 점의 유명한 문서가 이를 뚜렷이 보여준다. 1802년의 하일리겐슈타트 유서1812년의 불멸의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그것이다. (P.15-16)

 

이 책은 한 유명한 예술가의 사생활을 파헤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 저자는 인간적 약점을 지닌 한 천재 예술가가 시련을 극복하고 시대 정신을 선도하며 예술사에 불멸의 명성을 남기게 되기까지의 여정을 차근차근 짚어나간다. 베토벤의 예술을 향한 저자의 찬미와 탄복은 한결같고 진정이다. 그는 개인적 위기와 사회적 혼란에도 굴하지 않고 그것을 음악으로 통합하고 승화하여 더욱 높은 예술의 지향점을 아로새겼다.

 

대조와 갈등은 베토벤 예술의 본질적 특성이다. 베토벤은 평생에 걸쳐 막대한 역경에 맞서 싸웠고 엄청난 용기를 발휘하여 끝내 이를 이겨냈다. (P.15)

 

베토벤 음악의 거대성이 가지는 역설은 그것을 시간이나 데시벨로 측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에 있다. [......] 한 마디로 베토벤은 현미경과 망원경을 넘나드는 공간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며, 소리의 세포를 빚어내는 솜씨와 소리의 대성당을 지어 올리는 솜씨가 나란히 확고했던 것이다. (P.20)

 

저자는 몇몇 작품에 대해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두고 소개 및 분석한다. <요제프 2세 장송 칸타타>는 처음 알게 된 작품인데 무려 6면에 걸쳐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어 이채롭다. 오페라 <피델리오>는 잇단 참패와 더불어 이를 극복한 마지막 성공까지를 기술하면서 음악의 순수성을 높이 평가한다. <장엄미사><교향곡 제9>의 성공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작곡과 관련한 보다 세부적인 사실을 알 수 있어 작품 이해에 도움을 준다.

 

우리는 왜 베토벤의 음악을 좋아하는가?

 

베토벤의 음악은 모차르트풍의 음악과는 달랐고 언제나 다정하고 즐겁지만도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거기에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다. (P.102)

 

그의 음악 역시 듣는 이를 뜻대로 주무르려는 측면이 강하다. 언제나 서로 대조되는 주제나 화음 덩어리를 강제로 하나로 묶고, 억지로 떼어놓고, 다시 쪼개어 더욱 혼란하게 만들고, 그러고는 다시는 서로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으로 하나로 혼융시키는 음악인 것이다. (P.309)

 

베토벤의 음악이 하이든과 모차르트와 다른 점은 개개의 악곡마다 독자적인 개성이 분명하며 작품에 자신의 의지가 강력히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듣는 이는 누구라도 그의 음악을 들으면 잘 모르는 곡이더라도 아! 이건 베토벤 음악 같은데 하는 느낌을 갖는 게 이런 연유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넘치는 영감에서 샘솟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시종일관 음악 전체에 흘러넘친다.

 

베토벤의 음악은 모차르트만큼 항상 영감이 넘치고 풍요롭지는 않지만, 음악적 영감에 이성적 논리구조를 자연스럽게 결합하고 확장 및 발전시켜 청자로 하여금 음악을 듣는 와중에 사고와 의지를 끊임없이 인식하게끔 하는데 이게 강한 설득력을 발휘한다. 더욱이 중기의 음악이 구상화라면 후기의 그것은 추상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그의 음악은 한자리에 계속 머무르는 게 아니라 계속 변화 발전한다.

 

난청에다 지독한 근시였던 베토벤은 자신의 닫힌 감각 기관들에 대해 불평하곤 했지만, 그의 음악의 음향은 그가 침묵의 저편에서의 삶에 적응한 이후로 오히려 더욱 풍성해진 것이 사실이다. (P.295)

 

베토벤 개인의 삶에 있어 청력 상실은 불행이지만, 그의 음악 세계와 후세 인류에게 그것은 아마 축복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가 보통의 음악가였다면 거친 역경에 맞서기보다 좌절하고 쓰러졌겠지만, 그는 맞서 싸우고 극복해낼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베토벤은 외면의 소리를 잃는 대신 내면의 소리를 얻었다. 구체성이 약해지는 가운데 추상성과 초월성이 뚜렷이 나타나게 되었다. 음에만 집중하였던 것이 음은 물론, 음과 음 사이에 대한 중요성이 인식되었다. 이런 위업을 성취한 음악가는 베토벤 이전에는 없었고, 이후에도 아직 없다. 그가 악성(樂聖)’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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