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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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 독서가를 풍미하고 ‘OO사회란 유행어를 낳은 유명한 철학책이다. 문고판 크기에 130면이 안 되는 얄팍한 저작, 게다가 원저는 80면에 못 미치고 강연 원고가 2부로 추가된 구성이니 문고 또는 소책자라고 하는 편이 적당하다. 분량상으로는 얄팍하나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깊이 있는 논의 거리를 담고 있다.

 

저자 주장의 요지는 간결하고 논거는 일목요연하다. 핵심적 주장을 변용하여 반복하고 있으므로 저자의 의견을 이해하는데 큰 무리는 없다. 개인적으로 이해한 수준 내에서 거칠게 정리하자면,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하였고 사람도 성과주체가 되었다.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외부로부터의 강제 없이 자유의사에 따라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할 수 있음의 과도한 긍정성은 신경성 폭력 현상을 낳는데, 그게 현대사회의 특징인 우울증, 주의력결핍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과거의 면역학적 도식으로 파악하면 안 된다. 성과사회의 함정을 개인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자아 피로, 분열적인 피로에 빠진 개인은 창조적 역할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활동 과잉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우리-피로, 근본적 피로, 즉 무위의 피로를 회복해야 하며, 이러한 미래사회가 피로사회다.

 

근본적 피로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탈진 상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근본적 피로는 오히려 특별한 능력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영감을 준다. 그것은 정신이 태어나게 한다. (P.68-69)

 

무위를 향해 영감을 불어넣는 저 오순절의 모임은 활동사회의 반대편에 놓여 있다. 한트케는 거기 모인 사람들이 언제나 피로한 상태라고 상상한다. 그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피로한 자들의 사회이다. “오순절-사회가 미래사회의 동의어라고 한다면, 도래할 사회 또한 피로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P.73)

 

이 책이 획기적인 이유는 현대사회의 고질적 본질을 명쾌하게 분석하고 정리하였다는 점이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역자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P.7)라고 밝혔다. 분초 단위로 쪼개서 쉼 없는 자기계발, 멀티태스킹과 시테크, 다이어트와 아름다운 외모 가꾸기 등 사회적 인정을 향한 무한 질주를 하도록 스스로를 옭아매는 긍정성의 과잉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우리는 모두 암암리에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항상 뭔가를 하지 않으면 세상에 뒤처지고 낙오될 것 같은 심리적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는 게 현대인들이다.

 

역설적이게도 활동과잉은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형태의 행위로서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 그것은 긍정적 힘의 일방적 절대화가 낳은 결과이다. (P.54)

 

현대사회에서 자기 긍정, 활동적 삶, 세계를 향한 재빠른 주의는 모두가 높은 평가를 받는 개념들이다. 그래야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자신의 성과를 극대화하고 소위 성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자발적 강제, 활동 과잉이 후기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특성이라고 간주한다. 외부적 규율은 효율성이 일정 단계에 도달하면 무용지물이 된다. 효율성을 한층 극대화하려면 주체의 자발성에 기대야 한다. 스스로의 자발적 의사로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자유의지는 실은 강제하도록 규정지어진 성과사회의 산물이므로 사실상 진정한 자유가 아닌 셈인 것이다.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그것은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P.103)

 

언뜻 볼 때 피로사회는 현대사회의 병리적 증상을 상징하는, 다소간 부정적 뉘앙스의 표제로 생각하였다. 결론을 보니 완전히 오해한 셈이다. 현대의 성과사회가 부정적이고, 피로사회는 미래에 지향해야 할 긍정적 의미로 저자는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긍정성과 부정성은 이 책에서 어감과 실제 의미가 배치된 채 계속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흔히 긍정성은 바람직하고, 부정성은 바람직하지 않은 걸로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저자의 주장처럼 현대사회의 병리현상의 기저에 과도한 긍정성이 개입되어 있음을 우리는 미처 알지 못한다. 현대사회의 사고구조는 개인의 선택에 따른 정신적, 육체적 노력을 착취보다는 발전의 개념으로 수용한다.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P.29)

 

2부에 실린 <우울사회>의 주장도 원저와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저자는 나르시시즘과 우울증의 현상과 본질을 분석하여 성과사회의 주권자는 호모 리베르를 자처하지만 사실은 호모 사케르라고 분석한다.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가 살아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죽지도 않는 존재라는 게 더욱 암울하다.

 

저자가 인용, 분석 및 비판하는 아렌트, 에랭베르, 아감벤, 벤야민, 한트케 등의 논의는 내게 머나먼 존재이다. 그나마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친근하게 여겨진다. 바틀비처럼 탈진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주체적 삶을 회복해야 하는데, 사색적 능력을 통해서 가능하다. 저자는 깊은 심심함이라는 용어를 통해 과잉 주의에 대비되는 깊은 주의의 의의와 중요성을 강조한다. 깊은 심심함 가운데 사색적 삶을 통해 무조건적 긍정성의 과잉 자극의 흐름을 차단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부정성의 요소, 즉 아니라고 말하는 행위, 머뭇거림, 분노, 부정적 감정 등이 역설적으로 이를 가능케 하는 수단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사색적 삶은 오히려 몰려오는, 또는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며, 시선을 외부의 자극에 내맡기기보다 주체적으로 조종한다.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 행위를 통해 사색적 삶은 어떤 활동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으로 된다. (P.48)

 

오랜만에 철학 서적, 깊이 음미하고 헤아리는 진지한 유형의 독서. 버겁지만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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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사정관의 시간 - 누구나 쉽게 말하지만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대학입시를 둘러싼 미래와 성장 너머의 이야기
김보미 지음 / 책과이음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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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대입은 굉장히 민감한 교육적, 사회적, 정치적 이슈다. 한 사람의 대입 공정성 논란의 후폭풍이 작금의 정권 교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입 사안에 대해서는 누구나 자신의 관점에서 주의 주장을 거침없이 토로하기에 첨예하게 의견이 대립하는 경우도 빈발한다. 그 논란의 중심에 수시모집 학생부종합전형이 자리 잡고 있으며, 깜깜이전형 또는 금수저전형 등으로 온갖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여전히 입학사정관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문제는 늘 여기서 시작한다. 우리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일수록 잘못 알기 쉽고, 오해하기 쉽다. (P.57)

 

입학사정관이 뭐 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가장 용이한 대답은 학생부종합전형에서 학생부를 평가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개는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지만 실은 그들이 하는 구체적인 업무를 다 이해하였다는 뜻은 아니다. 입학사정관도 여러 유형으로 나눌 수 있지만 이 책의 저자처럼 오로지 입학사정관 업무를 수행하는 유형을 전임사정관이라고 한다. 전임사정관은 전국에 수백 명 남짓한 매우 마이너한 직업군이다. 그러기에 더더욱 우리들은 입학사정관을 잘 모른다. 하지만 입학사정관이 올바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기본 자질과 쉼 없는 노력이 필요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대학 입학처는 원서접수 및 합격자발표 시기에만 바쁜 걸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저자는 그렇지 않음을, 일 년 내내 입학처는 입시 준비와 홍보, 시행과 후속 업무로 항상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학마다 규모 및 전형유형에 따라 입학사정관의 필요성과 인원에 차이가 있겠지만 학생부 정성평가가 반영되는 입학전형에서 입학사정관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수능 100%로 신입생을 선발한다면 그때는 입학사정관이라는 직업은 사라지겠지만.

 

기본적으로 학교생활 충실도로 신입생을 선발하자는 주장은 바람직하다. 수능 100% 전형의 문제점은 문제 풀이에 매몰되어 학교생활이 무의미해지고 학교가 학원화되는 경향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공교육 정상화 측면에서 학교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지는 교과와 비교과활동을 장려하고 그것을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한 후 대학진학에 활용한다면 꽤나 그럴듯한 장면을 눈앞에 그릴 수 있다. 반면 학생부위주전형에 비판적인 견해는 학교생활 초반에 방황하는 학생들이 재기회를 얻기가 어렵다는 점을 언급한다. 내신성적이 나쁘면 만회하기 어렵고, 비교과는 고교 시절 내내 꾸준하게 활동하지 않으면 경쟁력에서 뒤처진다고.

 

학생부위주전형, 특기자전형, 논술전형 및 수능위주전형 등 모두가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 해당 전형은 각각의 대상자를 타게팅하고 있다. 수험생 자신이 가진 강점을 토대로 전형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현실은 많은 학생이 자신의 강점을 확신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이 모든 전형을 다 준비하려고 하니 벅차기 그지없다. 게다가 대학별로 자유롭게 전형 구성을 하지도 못하고 정부 정책 방향에 따라 전형이 쏠린다. 이른바 상위권 대학진학을 계획하는 수험생은 거의 무조건 학생부위주전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평가에서 지원학과와 전공적합성을 중시하는 경우 일찌감치 진로 방향을 잡지 못한 학생들은 불안해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학생부에서 꾸준하게 지원학과 관련 수업과 비교과활동을 꾸준히 할수록 유리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자신의 꿈을 고등학생 때 명확하게 설정하고 매진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학생이 되어서도 졸업을 앞두고 여전히 갈 길을 몰라 갈팡질팡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학생부종합전형도 궁극의 지향점은 아니라는 게 개인적 견해다. 당초 학생부 자체가 교육용으로 기재와 관리가 이루어진 것으로서 대입 진학용으로 의도한 게 아니다. 따라서 기재항목 자체가 진학용으로 적합하지 않은 예도 있으며 입학사정관이 서류평가에서 보고 싶은 내용이 전부 들어있지도 않다. 고등학교 시기는 그 자체 독자적으로 교육목적이 있으며 완결된 교육 경험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고교생활의 모든 것, 즉 교과와 비교과 활동 일체가 대입 진학을 위해 평가받는 구조라면, 결국 고등학교는 대학진학을 위한 중간다리 기능에 불과한 셈이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수업, 수행평가, 정기고사, 동아리 활동 및 봉사 활동이 모두 대입의 목적으로 관찰되고 평가된다는 걸 알 때 학생들은 얼마나 심리적으로 피곤할 것이며 순수한 교육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저자는 현행 대입정책의 문제도 언급한다. 대표적으로 블라인드평가이다. 출신학교의 후광효과를 배제한다는 취지로 도입되었지만, 불리한 교육 환경에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학생들을 이해하고 감안하는 걸 원척적으로 차단하는 역효과를 낳았다. 자기소개서의 폐지도 대입 제출서류 중 유일하게 학생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다고 아쉬워한다. 우리네 입시정책은 부정적 이슈가 발생하면 무조건 금지시키기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앞으로 상당 시일이 흘러도 대입은 계속 논란을 낳을 전망이다. 모두를 만족하고 동의할 묘안은 솔로몬도 내놓지 못할 테니까. 더군다나 대입에 엄청난 사회적, 경제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우리네 현실에서 대입은 수험생 본인의 것만이 아닌 온 가족 전체의 사안이다. 특히 극성스러운 많은 학부모의 과도한 참여와 개입은 문제해결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저자가 반복하여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것도 대학진학 노력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다. 고교와 대학에서도 여러 노력을 기울이지만, 사회도 학부모도 아닌 학생 자체가 탐색하고 선택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그저 이 책을 통해서 입학사정관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으며, 왜 그런 일을 해나가는지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P.212)

 

이 책이 갖는 의의는 입학사정관의 정체성과 그들의 역할과 책무를 세상에 알리는 데 있다. 입학사정관이 대입 현장에서 마주친 경험과 생각을 대중과 공유하고, 입학처에서 일하는 그들도 사회인이자 직업인이기에 갖는 애환을 세상에 풀어놓는다. 시중에 입학사정관이라는 명칭을 이용한 상업적 도서가 즐비한 가운데 이 책처럼 결이 다른 책은 더욱 뜻깊고 흥미롭다. 옆자리에서 나직한 어조로 차근차근 들려주는 듯한 저자의 이야기에 빠져들면 멀게만 느껴졌던 입학사정관이 친근한 존재로 다가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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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나의 두 신사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종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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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에 따르면 일부 연구자들은 이 희곡을 셰익스피어의 첫 작품이라고 간주한다고 한다.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구성상의 미숙성이나 개연성의 부족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면 다른 의견이다. 상기 근거는 비단 셰익스피어뿐만 아니라 당대 작가들에도 상당히 많이 나타나는 특징이므로 이것만으로 주장하기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를 탈피한 게 우리가 아는 중기 이후의 셰익스피어이다.

 

두 신사가 두 여인과 맺어지는 <말괄량이 길들이기>와 비슷한 패턴의 희극이다. 여기서 관건은 배신이다. 사랑의 배신과 우정의 배신이 동시에 발생하지만, 다시금 원래 상태를 회복하며 행복한 결말이 성립된다. 배신자의 악역은 두 신사 중 한 명인 프로테우스가 담당한다. 그의 본디 성품은 더할 나위 없는 신사임이 친구 발렌타인의 대사로 알 수 있다. 그런 그가 배신하게 된 계기는 사랑이다. 사랑의 정표를 주고받은 연인 줄리아가 있음에도 그는 발렌타인의 연인인 실비아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바람직하진 않지만 전혀 터무니없지는 않다. 본시 사랑은 맹목적인 현상이므로.

 

문제는 사랑과 더불어 양심마저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는 실비아를 차지하기 위해 우정을 배신한다. 친구를 추방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그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으며 이전 연인에게서 받은 반지를 그녀에게 선물로 주려고까지 한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 실비아를 구한 대가로 그녀의 사랑을 요구하고 거부당하자 폭력으로라도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획책한다.

 

(프로테우스) 사랑의 본질에는 위배되지만 / 폭력을 써서라도 당신을 사랑하겠어요!

(실비아) , 하늘이시여!

(프로테우스) 폭력을 써서라도 / 당신을 내 욕망에 굴복시키겠소. (P.160-161, 5막 제4)

 

실비아를 강제하는 프로테우스의 눈앞에 발렌타인이 나타나고 그의 배신행위가 일거에 드러난다. 그러자 갑자기 프로테우스는 잘못을 사죄하고 용서를 빈다. 발렌타인은 곧바로 그를 용서하고 우정을 회복하는 증거로 실비아에 대한 사랑을 친구에게 양도하려고 한다. 사랑보다 우정? 실비아의 마음은 어떻게 하려고? 극 중에 프로테우스의 배신을 격렬히 비난했던 실비아가 갑자기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발렌타인) 네놈이 친구라고? / 우정도 사랑도 저버린 비겁한 놈! / 그런 네가 친구라고? 배신자! (P.161, 5막 제4)

 

(발렌타인) 그럼 나도 받아들이지. 다시 한번 / 자네를 진실한 친구로 받아들이겠네. / [......] / 그럼 내 우정이 분명하고 솔직하다는 걸 / 보여 주기 위해, 실비아에 대한 / 내 모든 애정을 자네에게 양도하겠네. (P.162, 5막 제4)

 

다른 황당함 중에서도 최고 압권은 딸과 발렌타인에 대한 공작의 태도 변화다. 둘의 사랑을 인정 못 하고 발렌타인을 맹비난하며 추방령을 내린 게 공작 자신이다. 인제 와서 돌연 발렌타인의 훌륭함을 칭찬하고 실비아와 결혼을 대찬성한다. 산적의 두목이 된 발렌타인이 무슨 큰 공을 세웠다는 건지?

 

(공작) 머리 위에 별이 반짝인다고 / 감히 그 별에 가까이 가려 하다니! / 썩 물러가라, 천한 침입자! / 오만한 노예 놈! 아양 떠는 그런 웃음은 / 너처럼 천한 여인들에게 보여라. (P.92-93, 3막 제1)

 

(공작) 이제 내 선조들의 명예를 걸고 말하네. / 발렌타인, 자네를 여제의 사랑도 / 받을 수 있을 만한 훌륭한 인물로 생각하네. / [......] / 자네의 큰 공에 어울릴 새 작위를 내리겠네. / 자네는 신사요 좋은 가문 출신이야. / 내 딸아이를 가질 자격이 충분해. / 그러니 실비아를 아내로 삼아 데려가게. (P.165-166, 5막 제4)

 

결말의 이런 부분들이 개연성을 확보하지 못하였다는 비판의 근거이다. 긴장감을 점층적으로 고조시키는 방향으로 잘 짜인 극은 제5막에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실비아의 도망을 알아차린 후 뒤를 쫓아가는 세 사람 투리오, 프로테우스, 줄리아. 그들의 대상은 하나이지만 그들의 목적은 서로 전혀 다르다, 복수와 사랑, 그리고 방해. 그리고 마지막 장의 프로테우스와 실비아의 대결 장면은 절정인 동시에 대단원이다. 그런데 대단원에 접어들면서 극은 일거에 무너진다. 갑작스럽고 어이없고 황당한 끝맺음은 누가 봐도 희극을 빨리 종결시키고자 하는 애매한 조급함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용서와 화해와 행복한 결말을 향한 무조건적인 종결!

 

이 작품에서 두 신사보다는 두 숙녀가 더욱 돋보인다. 프로테우스와의 헤어짐을 견디지 못해 남장을 한 채 그를 찾아 나서는 줄리아. 자신의 눈앞에서 사랑의 배신을 목격하면서 너무나 비참함에 어이없어할 뿐인 그녀는 적어도 연인을 향한 사랑의 간절함에서 아름답다. 실비아는 어떤가. 발렌타인과 비밀 약혼한 그녀는 프로테우스의 비열함과 교활함에 굴하지 않으며, 아버지 공작의 결혼 명령도 거부한 채 가출을 감행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연인에 대한 사랑에 충실한 그야말로 사랑의 순결함의 표본이라고 할 만하다.

 

(스피드) 우리 도련님이 굉장한 러버’(lover, 연인)/ 되셨는데, 어떻게 생각해?

(룬체) 언제는 그렇지 않았나?

(스피드) 늘 그렇다고?

(룬체) 네 말처럼 굉장한 러버’(lubber, 바보)란 말일세. (P.70, 2막 제5)

 

두 신사의 하인인 스피드와 룬체의 존재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어찌 보면 기쁨과 즐거움보다 슬픔과 아픔이 지배적으로 되기 쉬운 극 중 상황에서 두 사람이 벌이는 온갖 언어유희와 재담은 긴장을 완화하는 동시에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는 희극으로서의 필수적 인물이다. 어릿광대와도 같은 그들의 재치와 해학이 없었다면 이 작품을 희극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확실히 셰익스피어는 말장난에 능숙하다. 말꼬리 잡기처럼 이어지는 언어유희와 더불어 엉뚱하게 이어지는 대화는 초기작부터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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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메내크무스 형제 : 메내크미 - 로마편 1 델피시리즈 1
플라우투스 지음, 심미현 옮김 / 동인(이성모)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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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플라우투스의 대표작인 동시에 셰익스피어의 <실수 연발>의 원전으로 유명하다. 나도 <실수 연발> 작품 해설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읽다 보면 정말로 셰익스피어가 구성과 내용의 많은 부분을 차용했음에 놀라게 된다. 1,800년 전 옛 희극을 당대에 맞게 손보고 정교하게 다듬어낸 것이다. 그나마 원전에서는 하인은 쌍둥이가 아닌데 셰익스피어는 쌍둥이로 설정하여 혼란을 더욱 부추기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

 

동생 메내크무스는 원래 이름이 소시클레스인데, 어릴 때 헤어진 형을 찾으러 노예 메세니오와 각지를 헤매고 다니는 중 에피담누스에 도착한다. 에피담누스는 꽤나 번화한 도시이며 메세니오에 따르면 악명도 높다. 동생 메내크무스가 도시에서 매우 방어적이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은 메세니오의 경고 때문이지만 이로 인해서 정체성의 혼란을 더해주고 있다.

 

(메세니오) 에피담누스에는 온갖 못된 술주정뱅이와 난봉꾼들이 있어요. 고리대금업자와 사기꾼들도 들끓는다고요. 게다가 매춘부들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제가 들었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유혹적이래요. (P.45)

 

형 메내크무스는 이곳에서 정착하여 살고 있는데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않은 듯하다. 그가 아내의 옷을 몰래 훔쳐 나오는 첫 장면은 제법 의기양양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공처가로서는 대단한 모험을 한 셈이다. 그러기에 영웅적 투쟁이니 전리품이니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다.

 

(메내크무스) 친애하는 모든 남편들이여...그대들은 저의 영웅적 투쟁에 대해 포상과 축하인사를 잔뜩 해주시지 않으렵니까? [......] , 그러니까, 제가 동지들을 위해 적으로부터 전리품을 쓱싹 훔쳐두었다고 해둡시다. (P.29)

 

후대 작가와 두드러진 차이점은 식객의 존재와 역할이다. 페니쿨루스는 메내크무스와 동등한 신분이지만 동시에 그의 식객으로 상하관계이기도 하다. 부유한 메내크무스에게 빌붙어 이익을 탐하는 존재라고 하겠는데 완전한 예속관계가 아니기에 이후 분란을 부추기는 역할을 담당한다. 메내크무스에 대한 그의 추종은 철저히 이익에 따른다. 나중에 자신이 기대하던 수혜를 그에게서 기대하기 어려워지자 태도를 돌변하여 공유하던 비밀을 그의 아내에게 폭로하는 일은 그로서는 배신이라고 하기조차 어렵다. 그의 아내로부터도 봉사의 대가를 얻어내지 못하자 페니쿨루스는 서방님, 아씨처럼 공손한 태도에서 다시금 등을 돌려 악담을 퍼부으니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페니쿨루스) 저는 지금 막 제 친구 메내크무스에게 가는 길이랍니다. 저는 지금 꽤 오랫동안 그의 노예로 지내왔습니다. 그리고 전 여전히 저를 옭아매도록 자발적으로 몸을 맡길 겁니다. (P.26)

 

(페니쿨루스) 에라 마누라하고 남편; 두 사람 모두 뒈져버려라! 난 시내에나 가버려야지; 난 이 놈의 집구석하곤 더 이상 한 패가 아닌 것이 분명해. (P.87)

 

쌍둥이 형제의 혼동에 따른 사건 사고의 피해자는 물론 형 메내크무스다. 고대하던 점심 식사도 놓치고, 훔친 옷을 다시 찾지도 못하고 정부 집에서도 쫓겨나며 나중에는 미친 사람으로 오인된다. 의도 여부와 무관하게 동생 메내크무스의 존재가 이런 결과를 낳는 셈이다. 여기에 동생의 모호한 태도가 혼란을 부추긴다. 형을 사랑하는 정도만큼은 윤리적으로 엄격하지 못한 동생은 형의 정부 에로티움의 식사 대접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에로티움이 수선해달라고 맡긴 옷과 금팔찌를 몽땅 팔아치우고 떠날 생각에 흐뭇해한다.

 

(소시클레스) 모든 신들이 날 어지간히 사랑하시고, 도와주시고, 승승장구하게 만드시네! 하지만 난 여기서 멈추어선 안 돼. 내가 할 수 있을 때 이 악의 동굴에서 빠져나가야 해. 메내크무스야, 서두르자! 뒤로 돌아, 속보로. (P.71-72)

 

오인된 정체성의 파장은 결국 당사자의 자기 정체성의 혼란으로 이어진다. 메내크무스가 메내크무스인 동시에 메내크무스가 아니며, 메내크무스의 정상성을 타인들은 비정상성으로 판단한다. 내가 나를 확신할 수 없고, 내가 나의 올바름을 입증할 수 없는 상황. 그 상황에서 누구인들 좌절과 혼란에 빠지지 않겠는가. 그것이 플라우투스와 셰익스피어가 의도한 효과이다.

 

(메내크무스) 난 전혀 미치지 않았어. 또한 그 누구와도 싸움이나 언쟁을 할 생각도 없는데. 난 내가 본 다른 모든 멀쩡한 사람처럼 멀쩡하다구; 내 친구들을 보면 알아볼 수 있고, 그들과 정상적으로 말도 해.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은 내가 미쳤다고 이해하는 걸까-정작 미친 사람은 바로 자기들이 아니라면 말이야? (P.114-115)

 

이 작품은 희극이므로 만사가 원만하게 해결되므로 다행이지만, 현실 세계가 항상 그렇지는 않다. 내가 미치지 않았음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과연 나는 미치지 않았는가 아니면 스스로 미친 상태임을 인지 못 하는 것인가를 누가 명확히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근대 이전에 정신병원에 감금된 수많은 광인 중에 진짜 광인이 아닌 사람이 포함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자신 있게 주장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여러 관련 서적 및 영화, 드라마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상봉한 형제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고향 시칠리아로 떠날 준비를 한다. 동생이야 당연하지만 형 메내크무스는 삶의 기반이 이곳에 있다. 자신의 집, 가족, 재산, 친구 등등. 게다가 그의 신분은 귀족-예속평민의 재판 건으로 점심 식사를 놓쳤다는 장면에서 언급(P.76)된다-이다. 고향은 정서상으로 친밀하지만 막상 타향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자신의 소유물 일체, 심지어 아내까지도 포함하여 경매에 부치겠다는 그의 선택은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하다.

 

이 작품은 막 구분이 없다는 특징을 지닌다. 번역본은 별표()로 장면 구분을 하는데 이것을 막과 장 중 어느 것으로 보아야 할지는 명확하지 않다.

 

책 자체도 만듦새가 흥미롭다. 여타 번역본과는 달리 로마 연극, 등장인물 분석, 내용분석과 해설, 작품이해를 위한 질문 및 모범답안 등을 부록으로 싣고 있다. 이 시리즈가 고전 희곡을 위한 안내서이자 학습서의 목적을 띠고 있는 특징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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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피트리온
플라우투스 지음, 신경수 옮김 / 예니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셰익스피어의 <실수 연발>에게 영향을 준 작가로 플라우투스가 언급되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국내에는 <암피트뤼온><메내크미> 번역본이 나왔는데, 이 작품을 먼저 읽게 되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 신이 암피트뤼온의 모습을 하고 아내 알크메나와 동침하여 헤라클레스를 낳았다고 한다. 바로 이 내용을 토대로 인간의 자아 정체성, 신과 인간의 관계 등을 해학적인 문체로 그려낸 게 이 희극이다.

 

알크메나에게 흑심이 생긴 주피터가 암피트뤼온이 전쟁으로 부재중인 틈을 타 머큐리와 함께 각각 암피트뤼온과 하인 소시아로 감쪽같이 변신한다. 알크메나로서는 도저히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남편의 귀가에 기뻐할 따름이다. 소시아로 변한 머큐리의 역할은 주피터가 알크메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암피트뤼온 일행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 여기서 진짜 소시아와 진짜로 변신한 소시아 간에 익살스러운 장면이 펼쳐진다. 관객이야 흥미롭겠지만 진짜 소시아로서는 죽을 맛이다.

 

(소시아) 그럼, 내가 소시아가 아니라면, 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말씀 좀 해 보십시오. (P.55, 1막 제1)

 

(소시아) , 불멸의 신들이시여, 도대체, 내가 어디에서 내 자신을 잃어버린 겁니까? 어디서 내가 바뀐 것입니까? 어디서 내가 내 형상을 떨쳐놓고 온 것입니까? (P.57, 1막 제1)

 

똑같은 소시아를 앞에 두고 헷갈리는 소시아의 탄식은 진정한 자아 정체성의 본질을 되묻는 근원적 질문에 다름 아니다. 사실 이 작품의 핵심적 메시지는 이것이다. 암피트뤼온과 암피트뤼온, 소시아와 소시아. 진정한 자신은 오로지 하나만 존재하는데, 너무나 똑같아서 도저히 구별할 수 없을 때 우리가 진정한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나를 나로서 인정하고 받아주는 것은 나로써 충분하지 않다. 나를 둘러싼 사회적 확인과 수용이 요구되는데, 그들이 나 아닌 나와 똑같은 남을 나로 인정한다면, 그때 나는 진정으로 나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나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나 아닌 남으로 살아가야 하는 게 온당한가.

 

(암피트뤼온) 그래, 그래, 알았어! 조우브 신이라면 마누라를 함께 나눈다 해도 불평할 일이 아니지. (P.143, 5막 제1)

 

암피트뤼온은 테베의 영웅이지만 이 작품에서 그는 철저히 신에게 농락당한다. 전장에서 분투하는 동안 신은 그의 모습으로 아내와 재미를 보며, 그가 집에 돌아올 때 신의 훼방을 받아 어쩔 줄 모르며 아내의 부정에 괴로워한다. 영웅적 면모로서 암피트뤼온은 여기에 없다. 오로지 신의 횡포에 휘둘리며 신의 처분을 숙명으로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는 연약한 인간만이 있을 따름이다.

 

(머큐리) 저기 지붕 높이 올라가서는 돌아오는 우리의 영웅을 기가 막히게 쫓아버리겠습니다. 멀쩡히 눈을 뜨고,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하인 소시아가 호되게 혼이 나겠지요. 내가 여기서 한 짓을 소시아가 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우리 아버지 기분만 맞추어드리면 그만이니까요.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드리는 것이 내 의무니까요. (P.125, 3막 제4)

 

인간을 농락하는 자신들의 행위에 신은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인간은 하찮은 완구에 불과하다. 인간을 속이고 욕정이 발하면 강제로 동침하면 그뿐이다. 한술 더 떠 주피터는 자신이 알크메나와 동침한 대가로 불후의 영광을 암피트뤼온에게 가져다줄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마치 대단한 은혜라도 베푼 양 거들먹거린다. 글쎄, 누구도 헤라클레스의 아버지를 제우스[주피터]로 알지 암피트뤼온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의 아버지를 목수 요셉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희극에서 알크메나의 고결함은 단연 돋보인다. 어찌 보면 최대의 피해자는 바로 그녀다. 남편에 대한 정숙한 사랑을 유지한 그녀임에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남편 아닌 인물과 정을 통한 셈이 되었으니.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부정을 의심하는 암피트뤼온에게 항변하는 그녀의 차분하면서도 당당한 항변은 과연 주피터가 헤라클레스의 생모로 점찍을 만큼 미모뿐만 아니라 미덕도 뛰어남을 드러낸다.

 

(알크메나) (조용하게) 제 진정한 지참금은 순결과 명예, 자제력, 신에 대한 경외심, 부모에 대한 효도, 동기간의 우애, 그리고 당신에게 착한 아내로서 무한한 사랑과 충실한 봉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P.107, 2)

 

소시아의 역할도 눈에 띄는데, 그와 가짜 소시아, 그와 암피트뤼온 간에 벌어지는 짧고 속도감 있는 대사의 교환은 극의 긴박성을 고조시키며, 해학적인 대사는 관객의 웃음을 유발시켜 극의 희극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데 일조한다. 이 희극의 웃음 담당은 단연 소시아와 머큐리라고 할만하다.

 

한편 이 작품은 제4막 제2장 중간 이후부터 해당 장의 끝까지 원문상에 탈문이 존재하여 정확한 내용 이해가 불가한 흠결이 있어 아쉽다.

 

작가 플라우투스는 고대 로마의 희극 작가인데 고대 그리스 희극을 이어받아 주로 개작 또는 번안 작품을 통해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옮긴이의 글에 그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 글이 있는데 매우 적절하므로 인용한다.

 

플라우투스의 목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관객을 사로잡는 것이었다......극의 구성이나 문학성 같은 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따라서 현대 독자들의 세련된 심미안으로 보면, 연극적 결함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이 발견된다. 희랍적인 것과 로마적인 것을 혼합하여 플라우투스는 익살맞으면서도 따뜻한 희극을 만들었다.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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