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말괄량이 길들이기 ㅣ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셰익스피어 전집 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도해자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18년 11월
평점 :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한바탕 우당탕하는 셰익스피어 초기의 희극이다. 한 성질 사나운 여성을 바람직한 사회 질서의 틀 내로 교화하는 내용은 당대에 지극히 당연하고 정당한 의미로 수용되었을 것이다. 문학작품은 시대 풍조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부여받는다. 이 희극은 오늘날 변화된 인권 및 페미니즘 관점에서 전혀 새로운 의미로 논의되고 있다. 이 책의 ‘옮긴이의 말’과 ‘작품 해설’은 변화된 의미 부여를 잘 나타낸다.
비단 페미니즘이 아니더라도 이 작품의 몇 가지 내용은 비판받기에 충분하다. 당사자가 원치 않는 결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사회의 보편적 결혼관습이기에 그렇다 하자. 페트루치오가 밝힌 결혼의 목적은 비단 개인 차원에 그치는 게 아니라 사회적 담론이 필요한 사안이다.
(페트루치오) 돈만 많으면 페트루치오의 / 신붓감으로 충분해. 내 구애의 춤에서 / 장단을 맞춰 줄 수 있는 건 재산이지. (P.49, 1막 2장)
페트루치오에게 결혼은 순전히 재산 증식의 수단일 뿐이다. 여기에 남녀 간의 진정한 사랑이라는 오늘날 통용되는 보편적 의미가 개입될 여지는 없다. 2막 1장에서 그가 카테리나의 아버지에게 결혼 지참금의 액수를 요구하는 장면 또한 이를 명확히 한다.
페트루치오가 아내 카테리나를 이른바 길들이는 방식 또한 논란이 될 만하다. 그는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신체적, 정신적 학대를 자행한다. 음식 안 주고, 잠 못 자게 하며 친정에 못 가게 하는 등 일련의 행위는 요즘이라면 제아무리 가정 내라고 할지라도 가정폭력으로 고발당하기에 십상이다. 페트루치오가 카테리나를 길들이는 방식은 그가 스스로 내뱉듯이 매를 길들이는 방식이다. 동물을 대하는 방식을 자신의 아내에게 스스럼없이 적용했다는 점에서 그가 아내를 바라보는 시각이 드러난다.
(페트루치오) 나는 내 소유물의 / 주인 노릇을 할 거니까. 신부는 내 물건이자 재산이죠. / 신부는 내 집, 내 가재도구, 내 들판, 내 창고, 내 말, / 내 황소, 내 당나귀, 그 무엇이 되었든 내 것이죠. / 이런 신부가 여기 있는데, 누구든 건드려 봐요. (P.101, 3막 2장)
남편이 아내에 대한 절대적 소유권을 주장하고 이 주장이 인정되는 분위기가 바로 당대 사회이다.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이자 일개 재산에 불과하다. 아내가 남편과 대등하게 맞선다는 생각은 용납될 수 없기에 교화가 필요하고 교화의 궁극적 목적은 차라리 본능이라고 할 정도의 절대적 복종이다.
(카테리나) 당신이 / 저것을 뭐라고 부르든 옳은 말이에요. / 카테리나에게도 항상 옳은 말일 거예요.
(호르텐시오) 페트루치오, 하고픈 대로 하게. 자네가 승리했군. (P.141, 4막 5장)
지적으로 뛰어나고 자존심 강하고 고집 센 카테리나는 남자를 우습게 여기며 비혼주의자임을 선언한다. 그런 그녀가 별다른 저항 없이 페트루치오가 결혼하게 되는 까닭이 궁금하다. 그녀의 고집 정도라면 아버지의 강요쯤은 가뿐히 물리쳤을 텐데. ‘작품 해설’에서는 페트루치오의 능력이 다른 남자들보다 그나마 우수하기 때문에 그녀가 타협책으로 받아들였다고 해석하는데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건 이미 카테리나의 주체성에 한계가 있음을 자인하는 꼴에 불과하다. 그녀의 능력이라면 페트루치오와 결혼하면 앞날이 평탄하지 않을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며, 어차피 결혼할 거라면 한때나마 성질을 죽여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더욱 뛰어난 인물을 고르는 전략을 택할 수도 있다.
동생인 비앙카를 보라. 그녀는 극 중에서 여러모로 비앙카와 대비되는 빼어난 신붓감으로 칭송되며 여러 남자의 구혼을 받고 자신이 남편감을 선택한다. 비앙카는 환경을 직시하고 결혼 시장에서 자신이 우위에 설 수 있는 방안을 완벽히 실현한 얌전한 고양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자매 중 더 성공적 결혼에 도달한 사람은 비앙카이며, 이 점에서 그녀는 카테리나보다 뛰어나다.
남편에게 순종하게 길들여진 카테리나가 다른 여성들에게 남편에 대한 도리를 장문의 대사로 설파하는 5막 2장은 이 희극의 일대 하이라이트다. 1막 1장과 5막 2장의 카테리나는 전혀 다른 여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대목을 두고 옮긴이는 카테리나의 표면적 복종이 전략적 선택이므로 페트루치오의 외견상 승리도 환상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표면적 굴복 후 카테리나의 대사들에서 드러나는 과장과 익살, 그리고 남성 인물들을 겨냥한 조롱 때문이다. 카테리나의 복종은 오히려 전략적 선택으로 보인다. (P.5)
따라서 이 작품은 여성의 복종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절대적 순종은 남성의 환상에 불과한 허구임을 보여준다. (P.6)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초기작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가 페미니스트가 아님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옮긴이의 말’과 ‘작품 해설’은 기본적으로 이 희극을 심오한 후기작과 동일하게 해석하고 있다.
셰익스피어 극작품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인간 내면의 복합적 성격을 보여주며 사건과 인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다는 것이다. (P.173)
이 작품을 <맥베스>와 <햄릿> 등과 동등한 수준에서 해석하는 데 동의할 수 없다. 복합적 성격과 다양한 해석이라는 심화된 의미 부여는 과잉 해석의 우려가 크다. 카테리나의 불복종의 근거로 제시되는 마지막 대사의 과장과 익살은 당대 희곡의 전형적 특징이다. 이를 두고 내심 조롱한다고 볼 근거는 미미하다. 외형적 꾸밈이든 내면적 순종이든 카테리나가 페트루치오에게 굴복하였음은 사실이다.
‘작품 해설’에서 슬라이와 카테리나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한 대목에서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양자 모두 당대의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니며, 이들에 대한 사회적 교화 역시 정당하다. 교화의 주체는 당연히 각각 영주와 남편이 될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당시 청교도들처럼 자신의 연극에 엄격한 윤리적 잣대를 대거나 심각한 교훈이나 삶의 진리를 찾으려 하지 말고, 트라니오가 루첸티오에게 충고하듯, 지치고 긴장된 일상 삶에서 기분 전환을 위해 그리고 활기를 되찾기 위해 연극이 필요하며, 그런 마음으로 자신의 극을 즐겨 주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P.178)
옮긴이는 ‘작품 해설’ 결말에 가서 갑자기 기존의 견해와 상치되는 해석을 내놓는다. 너무 심각하고 진지하게 따지지 말고 희극으로서 극 자체를 즐기라는 게 작가의 의도일 수 있다고. 서막의 슬라이가 재등장하지 않는 이유 또한 작품의 희극성에 충실한 작가의 의도적 설정이라는 해석을 다른 곳에서 인용하여 기술하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