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피드의 날 미래의 문학 7
존 윈덤 지음, 박중서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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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도서관에 이 책이 있을 줄 예상 못 했다. 이 소설의 아동용 축약판의 효과 덕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원작이 아동용처럼 흥미진진할 활극일 것이라는 섣부른 판단은 완벽히 오판이다. 이 작품은 진지하다, 그것도 대단히. 서문에서 언급되었듯이 이 작품은 명상적이고 논설적인 특징”(P.9)이 작품 전반을 두드러지게 지배한다.

 

전반기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스페이스 오페라 계열이었지만, 후반기의 작품은 작가 스스로가 논리적 환상소설이라고 지칭한 것처럼 더 진지하고 현실적인 내용을 다루었다. (P.521)

 

작품해설에서는 작가 존 윈덤의 작품세계를 이렇게 정리한다. ‘아늑한 파국의 대가라는 호칭은 그에 대한 비난인 동시에 칭찬이다. 20세기 중반 양 이념 체제 사이에 놓인 영국인의 불안 반영은 중산층이 최적이다. 하류층은 먹고사는 일에 당장 관계없으면 관심 두지 않으며, 상류층은 이따위 고민을 하기엔 너무 고상하고 남의 일에 불과하다. 오직 중산층이야말로 당대 사회의 불안과 모순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이 작품에는 인류에게 치명타를 가하는 위협적 존재가 연달아 세 건이 나타나는데, 혜성(으로 인한 시력상실)과 전염병이 먼저 영향을 미친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괴멸적 파국은 당혹스럽기는 하지만 철저히 절망적이지는 않다. 시력상실에 자포자기하여 목숨을 내던지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살아남은 누군가는 있을 것이며, 그네들이 어떤 식으로든 생존을 영위할 것이기에.

 

저 끔찍하고 낯선 괴물들이야말로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어찌어찌 만들어 낸 것이었고, 또 우리 나머지가 무분별한 탐욕으로 인해 전 세계 각지에서 기르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저놈들의 존재 때문에 자연을 비난할 수조차도 없는 일이었다. 저건 인간이 길러 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P.382)

 

반면 트리피드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내고 활용을 위해 대규모로 인공 재배를 하는 식물이다. 사람은 산업적 목적을 위해 과학기술을 활용하여 그것을 생산했는데 그것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암암리에 외면하였다. 당시에는 충분히 통제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였으므로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인간은 항상 그렇게 오판한다. 자신이 모든 상황을 조절할 수 있다고, 신이 아님에도 신처럼 행동하며 신이 하지 않는 잘못을 저지른다.

 

다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확신하고 있는데, 그건 바로 저놈들이 위험해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는 거야. (P.103)

 

눈멀고 전염병에 겨우 살아난 사람들은 더듬더듬 생존의 길을 모색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들의 눈앞에 트리피드가 등장한다. 작중의 트리피드는 영리하다는 점에서 매우 지능적이다. 그들은 사람의 약점이 어딘지 알며, 공격 기회를 노리며 엄폐할 줄도 안다. 그들이 돌기를 두드리며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 그리고 메이슨네 농장을 포위 공격하는 장면은 충격과 공포를 자아내는 압도적 실체를 드러낸다.

 

우리가 그놈들보다 더 우월한 특징은 단 하나뿐이지. 바로 시력이야.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있지만, 그놈들은 볼 수가 없지. 우리가 시력을 빼앗기고 나면, 그런 우월함도 사라져 버리는 거야. 아니, 오히려 더 나쁜 상황이 되겠지. 우리는 그놈들보다도 더 열등한 신세가 될 거야. 왜냐하면 그놈들은 시력 없는 생활에 적응되어 있는 반면, 우리는 그렇지 않을 테니까. (P.101)

 

전통적 법 규범과 사회체제가 송두리째 무너진다. 평화와 안전의 보장은 더는 불가능하다. 남은 식량을 두고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전개되고, 정상인과 맹인 간 지위의 우열과 역할 분담이 불가피하다. 과거와의 이별. 고통스럽지만 낯선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므로. 이런 당혹감과 자괴감, 고통스러운 현실 인식은 작품 내에서 반복적으로 표현된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본 것들이 모조리 현실임을, 그리고 결정적임을 비로소 시인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었다. 결코 말이다. 내가 이제껏 알던 모든 것이 끝나 버렸던 것이고... (P.125)

 

아니에요. 이 세계는 끝장났어요. 그리고 우리만 남았어요...이제는 우리 나름대로의 삶을 도모해야만 해요. 도움의 손길이 결코 오지 않을 거라고 가정하고 계획을 세워야만 해요... (P.436)

 

사람은 어차피 혼자 살 수 없다. 살아남고 세대를 영속하기 위한 집단 형성이 필수다. 과거에 너무나 당연시하던 물자들을 이제는 없이 살거나 하나하나 직접 만들어내야만 한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집단은 서서히 소멸할 것이다. 작품 내에서 윌프레드 코커와 듀런트 여사의 집단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거부한다. 그들은 단지 일정 시간 버티기만 하며 만사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마이클 비들리 일행의 논리는 충격적이고 비도덕, 비윤리적으로 보인다. 그들의 주장은 코커와 빌의 귀에 낯설고 터무니없으며 부정의 하게 들린다. 코커는 이 집단을 깨뜨려버리며(나중에는 자신의 오판을 인정한다.) 빌은 현실적 타당성을 마지못해 받아들인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당신네 무리가 애초부터 옳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거요. 다만 옳지 않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고, 옳지 않은 것처럼 들렸을 뿐이지. (P.309)

 

인간화된 식물과 비인간화된 인간의 접점은 셔닝 농장을 접수하고자 하는 전체주의 집단에게서 확연히 드러난다. 누가 봐도 명백한 군사 독재적이며 봉건적인 농노제 발상은 인류가 기껏 수천 년 동안 힘겹게 쌓아 올린 인간 존중의 정신을 근본에서부터 전복한다. 오죽하면 차라리 트리피드가 낫다고 작중 인물이 토로하겠는가.

 

화자이자 주인공인 빌 메이슨은 틈나는 대로 생각과 사고에 빠져든다. 그는 졸지에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혼자가 되었고 막무가내식 행동을 멈추고 생각을 정리해야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다. 작품의 서두 또한 앞이 안 보이는 그가 주위 상황을 탐지하고 생각하고 추론하는 과정으로 시작한다.

 

빌과 조젤라를 포함한 사람들이 가장 당혹스러워한 사실은 인간이 만들어낸 안정적인 사회체제가 회복할 수 없을 지경으로 일거에 무너져버렸다는 점이다. 만물의 영장이 발달시켜온 수준 높은 문명의 기반은 시력상실이라는 재앙 하나로 존속 여부가 불투명할 정도로 취약하였다는 점. 그래서 트리피드의 창궐에 변변한 대응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그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는 점. 이것들이 겹쳐 드리운 짙은 절망감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번 일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이거예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안전하고 확실해 보였던 세상을 우리가 너무나도 손쉽게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거예요.”

조젤라의 말이 맞았다. 바로 그런 단순성이야말로 이번 일이 준 충격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P.222)

 

이런 처지에 대해 하늘을 원망할 수 없음이 후반부에 빌의 입을 통해 언급된다. 이 모든 게 천재지변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운명이라는 것을. 눈앞에 뻔히 위험이 닥쳐옴에도 모래에 머리를 파묻는 타조와 같이 우리들이 행동 하였음을.

 

정확히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는 이제 아무도 모를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내가 분명히 확신하는 게 하나 있어요. 어떻게 해서이건 간에, 이건 우리가 스스로 자초한 운명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전염병도 있죠. 그건 장티푸스가 아니었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P.472)

 

작품의 결말은 일변 전망적이다. 코젤라와 빌은 전략적 후퇴라는 표현으로 와이트섬으로의 자신들의 퇴각을 정당화한다. 언젠가는 다시 준비를 갖추고 돌아와 빼앗긴 땅을 되찾을 것이기에. 자신들이 못한다면 아이들이 아니면 아이들의 아이들이 대대적인 십자군 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믿는다. 아마 믿고 싶을 것이다. 그래야 살아갈 의미와 희망이 남아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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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 신은 고양이와 10편의 옛이야기 - 논장 전래동화 3, 프랑스편
샤를 페로 지음, 구스타브 도레 그림, 김경온 옮김 / 논장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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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숲 속의 공주, 빨간 모자, 장화 신은 고양이, 신데렐라. 모두가 동화책에서 또는 아동 만화영화로 친숙하게 접하여 이제는 진부하기조차 할 정도의 이야기들이다. 이런 동화들의 원작 원본이 바로 이 책이라고 한다. ‘이솝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후대의 각색된 동화와 원작의 내용과 뉘앙스는 비교해 볼 여지가 충분하다.

 

페로가 쓴 11편의 이야기 중 전반부 8편은 산문, 후반부 3편은 운문이다. 작가는 산문 동화의 각 이야기를 교훈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동화 장르의 세속적 필요성에 부합하는 태도인데, 그 교훈이 항상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일치하지는 않음이 흥미롭다. 예컨대 푸른 수염에서 작가는 이 동화에 나오는 무서운 남편은 현실 세계에는 불가능하다, 지금은 오히려 부인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밝힌다. ‘신데렐라에서는 신데렐라의 매력을 마법으로 현실화하는 은인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빨간 모자의 내용이 일반적인 결말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어 의외다. 비극으로 끝나는 빨간 모자도 그렇지만,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식인귀 출현이라는 전혀 뜻밖의 상황으로 흘러가 우리는 기껏 전반부에 밖에 알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아 물론 공주를 잠에서 깨우는 왕자의 입맞춤도 없다.

 

내용의 신비성, 다의성 못지않은 잔혹성으로 주목받은 푸른 수염은 여러 의문을 제기한다. 푸른 수염이 자신의 전처들을 죽인 이유는 무엇인지? 부인에게 열쇠를 주면서도 열어보지 말라는 푸른 수염의 의도는 무엇인지? 이브와 판도라를 상기시키는 유혹에 약한 여성에게 다시 유혹의 시험을 통해 그는 무엇을 기대하는가?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와 마찬가지로 장화 신은 고양이에서 우리는 당대의 엄격한 계급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공주가 잠에서 깨면 외로울까 염려되어 성안의 모든 사람을 거리낌 없이 함께 잠재우는 요정. 막내아들을 드카라바 후작으로 만들기 위해 농부들에게 무서운 위협을 자행하는 고양이. 양자 모두 사회적 하층민에 대한 경시 풍조가 암암리에 배어 있다. 그들이 아무 잘못도 없는데.

 

백 년 후에 공주가 깨어날 때 낡은 성 안에서 홀로 얼마나 놀랄까 하고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요정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아세요?

요정은 마법의 요술봉으로 성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건드려서 마술을 걸었답니다. (P.18)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분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내 손에 조각조각 토막날 줄로 아시오. (P.73)

 

똑똑하지만 못생긴 리케가 잘 생기게 변하고, 아름답지만 멍청한 공주가 똑똑해지면서 이른바 흠잡을 데 없는 한 쌍으로 결합하는 고수머리 리케의 결론에 모두가 흡족하지는 않다. 사랑의 힘의 위대함을 찬미할 수 있지만 껄끄러움이 남는다. 왜 우리는 동생 공주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가? 동생 공주는 애초 리케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지만, 언니 공주의 극적인 변모와 행복한 미래가 두드러질수록 동생 공주의 존재감은 왜소해지고 이내 사라져버린다. 현실 세계의 독자 시각에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 흘리고 있을 동생 공주의 슬픔과 원망이 더욱 커다랗게 다가온다.

 

꼬마 엄지의 전반부는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와 유사하다. 원래 비슷한 이야기인지 그림 형제가 이 이야기를 모방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자식을 죽이려는 꼬마 엄지네 부모와 꼬마 엄지 형제를 잡아먹으려는 식인귀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생존이라는 절실한 문제에 직면할 때 더 이상 가식은 불필요하다. 꼬마 엄지가 꾀로써 식인귀의 재산을 훔쳐 오는 장면 또한 윤리적으로 바람직하지만 이것 또한 현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젤리디스당나귀 가죽은 모두 고통받는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고통을 가하는 주체가 남편 임금과 아빠 임금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그리젤리디스를 괴롭히는 남편의 태도는 이율배반적이다. 요새로 보면 전형적인 의처증에 해당하는데, 이를 묵묵히 견뎌내는 그녀의 모습은 보는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그리델리디스의 순수하고 변함없는 마음은 물론 감탄스럽지만 사랑과 미움, 행복과 고통은 언제라도 한순간에 표변될 수 있다는 씁쓸한 진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당나귀 가죽신데렐라와 비슷한 전개 구조를 지닌다. 여주인공의 어려운 생활, 지저분하고 더러운 취급을 받는 외모, 그녀를 애타게 찾는 왕자, 그들의 사랑을 매개하는 유리 구두와 운명의 반지. 여기에는 가족관계의 근본적 결함도 내포한다. 전자는 계모와 전처소생 자녀의 갈등, 후자는 아빠의 딸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망. 그나저나 그렇게나 사랑하던 아내를 잃자마자 무슨 연유로 미친 듯이 재혼에 목매었던 아빠 임금의 속내가 궁금하다.

 

마법의 요정우스꽝스러운 소원들역시 그림 동화집에 볼 수 있는 해학적 소재의 얘기로서 양자 모두 말의 소중함과 신중함을 강조하는 공통점을 지닌다.

 

옮긴이의 말처럼 페로 동화들은 친밀함과 생소함의 상반되는 느낌을 독자에게 안겨준다. 대중적 동화와 만화의 서사의 원형으로서 오늘날은 자칫 진부하고 전근대적-특히 페미니즘 시각에서는-이지만 17세기 페로가 쓸 당시의 관점에서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작가 자신의 서문은 재미와 교훈이라는 동화의 기본 정신을 강조한다. 요즘은 후자를 많이 경시하지만 전자만 가지고 오래 살아남는 동화는 없다. 부모의 입장에서 그런 동화는 필요가 없으므로.

 

구스타브 도레는 서사의 기저에 드리워진 어둡고 뒤틀린, 그러나 진실에 가까운 핵심을 본능적으로 파악하는 재주를 지녔다. ‘꼬마 엄지에서 실수로 자기 자식을 죽이려는 순간의 식인귀의 얼굴은 압권이다. 다만 그의 음산하고 충격적인 삽화는 이게 과연 동화책에 적합한지 근본적 의문점을 제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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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 연발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종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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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The Comedy of Errors

 

번역본의 표제는 다채롭다. ‘실수 연발또는 실수연발외에 헷갈려 코미디’, ‘착오 희극’, ‘오해 연발 코미디’, ‘실수연발의 희극등을 확인할 수 있다. 극의 내용을 반영하면 실수보다는 오해 또는 착오가 더 적확한 표현이지만, 이로 인한 실수가 빚어내는 해프닝을 염두에 둔다면 실수라는 표현도 무난하다.

 

셰익스피어의 가장 초기작에 속한다. 전성기의 작가에게 발견할 수 있는 잘 짜인 구성과 개성 넘치는 인물, 긴장감 높은 극적 전개와 같은 요소를 동일하게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 작품을 무대에서 상연하면 쉴 새 없이 뒤바뀌는 인물들의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는 모습에 관객마저 머리가 얼얼해지고 말 것이다. 게다가 말장난과 더불어 때를 가리지 않고 지나칠 정도로 기다란(무려 5면에 걸친다!) 농담을 주고받는, 특히 제2막 제2장에서 시라쿠사의 안티폴러스와 드로미오가 그러한데, 대목은 이 작품의 본질적 요소로서의 희극과 해학을 맛보게 된다.

 

엄밀히 말하면 착오의 희극은 성립할 수 없다. 안티폴러스와 드로미오가 각각 쌍둥이라서 외모가 똑같다고 하지만, 살아온 지역과 환경이 다르므로 옷차림, 말투 및 태도 등이 분명히 구별될 터이므로 이렇게 등장인물들이 헷갈린다는 것은 지나친 설정이다. 다만 이 작품은 comedy. 표제에 대놓고 희극 또는 소극이라고 적시했으므로 작품도 장르에 충실하다. 여기서 독자는 희극 정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웃음을 자아내는 희극에서 팔짱을 끼고 지나치게 까탈스럽게 굴면 웃음은 사라지고 만다. 코미디는 어디까지나 코미디로 너그럽게 봐주고 웃을 심신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시라쿠사의 안티폴러스) 저분들은 /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모르겠어. / 저분들 말에 맞장구치면서 참아 보자. / 위험을 감수하고 안개 속으로 들어가 보자. (P.52, 2막 제2)

 

주변 인물들의 착오와 오해에 대해 두 명의 안티폴러스는 벌어지는 상황을 파악할 수 없어 어리둥절할 뿐이다. 특히 타지에 와서 모두가 아는 체하는 당혹스러움 가운데서도 혼돈을 부추기는 것은 시라쿠사의 안티폴러스의 모호한 태도다. 그는 아드리아나에 이끌려 함께 식사하며, 앤젤로가 전해주는 목걸이를 주저함 없이 받아든다. 그의 판단은 일단 상황에 따라가면서 지켜보자는 것인데.

 

(루시아나) 신과 같은 남자들은 여성들의 주인이요 / 지배자라는 걸 몰라? 만물의 영장으로 / 이 광활한 세상과 거친 바다의 지배자이며 / 물고기나 새보다 뛰어난 지성과 / 영혼을 타고난 인간이야. / 그러니 남자들 뜻에 따르는 게 좋아. (P.30, 2막 제1)

 

주인공들의 오인된 정체성에 기름을 붓는 것은 에베소의 안티폴러스와 아내 아드리아나 간의 불화다. 남편의 부정에 대한 의심에, 오해 연발로 인한 인물들의 배배 꼬이는 사건들로 부부 간 갈등은 증폭되고 서로는 상대방에 대한 불평과 원망을 품게 된다. 여기서 아드리아나의 비교적 평등주의적 부부관에 맞서 봉건주의적 부부 윤리가 강조되고 있는데 루시아나와 수녀원장은 여성의 복종을 강조한다.

 

시라쿠사의 드로미오의 희극 정신이 작중에서 유달리 돋보인다. 그는 안티폴러스와 틈날 때마다 농담을 주고받으며 주인으로부터 농담이 지나치다고 핀잔을 들을 정도이다. 4막 제3장에서 보여주는 경관에 대한 풍자는 풍자가, 해학가로서 드로미오의 일면을 잘 드러낸다.

 

(시라쿠사의 드로미오) 지친 사람들을 쉬게 해 주겠다고 속여 구속하고 / 쇠약한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긴다면서 / 죄수복을 입히고, 더 많은 것을 착취하기 위해 / 무어인들이 쓰는 창을 휘두르진 않지만, / 곤봉을 휘둘러 사기를 치면서 / 온갖 못된 짓을 하는 잡놈 말입니다. (P.97, 4막 제3)

 

마지막 막에서 헤어졌던 부부와 부자, 형제들이 모두 상봉하며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 이지언은 사면을 받는다. 이렇게 모든 오해와 갈등이 해소되는 것은 전형적인 희극답다. 게다가 이 모든 소동이 단 하루 동안 벌어지는 것 역시 전통적 미덕의 수용이다.

 

작품해설은 이 작품의 특성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 작품은 가치관의 갈등이나 인물 대립보다는 착오와 오해를 기반으로 사건을 이끌어 간다. 그러므로 인물의 개성이나 가치관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인물들의 성격이 아니라 정체성 오인과 착오에서 생겨난 소동이 희극성의 근거로 작용하는 소극(笑劇)이란 말이다. (P.151)

 

어릴 때 집에 십여 권의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다. 출판사는 동서문화사였는데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다수 수록되어 있어 나름 열심히 읽은 기억이 있다. 이제는 읽었는지 아닌지도 가물가물해졌기에 올해 상반기에 셰익스피어를 본격적으로 탐독하자는 큰 목표를 정했다. 최종철 번역본으로 주요 작품을 읽고 이제 미번역본은 시기순으로 출판사, 번역자별로 선별하여 차근차근 나아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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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캐럴 네버랜드 클래식 16
찰스 디킨스 지음, 퀸틴 블레이크 그림, 김난령 옮김 / 시공주니어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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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보다도 주인공 이름으로 더 기억되는 작품이다.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두고서는 한층 인기가 높다. 스크루지 영감이 크리스마스 유령을 만나서 개과천선하게 된다는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그런 명작을 이제 새삼스레 읽어볼 필요가 있을까 살짝 의구심이 들었지만, 역시 읽어볼 가치는 충분했다. 소설과 타 장르 간의 차이점은 물론이고, 표피적인 줄거리가 아닌 원작의 의도와 표현을 음미할 수 있다.

 

, 그러나 스크루지는 맷돌 봉을 움켜쥔 손아귀처럼 그악스럽고 인색하기 짝이 없는 수전노였다. 스크루지! 언제나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남 등쳐먹기 좋아하고, 교활하고, 악랄하고, 치사하고, 탐욕스럽고, 추잡한 늙은이! 무정하고 냉정하기로는 쇠망치로 두들겨 대도 불똥 하나 튀기지 않을 부싯돌 같고, 음험하고, 제 생각만 하기로 치자면 꽉 다문 굴 껍데기 같다. 내면에 들어앉은 냉혹함 탓에 스크루지의 생김새는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P.11-12)

 

자신이 쓴 작품의 주인공을 이렇게 혹평한 작가가 달리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업에만 매달려 사랑과 이별하고 일체의 인간적 감정과 교우를 단절하는 스크루지. 가난한 이웃에 대한 동정과 관심을 거부하고 조카의 초대를 차갑게 거절하는 스크루지.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을까 의구심마저 들면서도 문득 요즘 이른바 성공한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스크루지와 대동소이할 거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게 세속적으로 성공의 왕도라고 인정받고 있으므로. 그렇기에 스크루지 영감은 평생을 그 길을 따른 것이리라.

 

스크루지가 바랐던 삶은 바로 그런 삶이었던 것을! 복잡한 인생의 길에서 이리 비집고 저리 비집고 해서 제 갈 길을 헤치고 살아가려면 인간적인 동정심 따위는 얼씬도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세상 이치에 밝은 이들이 이야기하는 이른바 실속이라고 스크루지는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P.13)

 

대다수 우리네에게 크리스마스는 단지 공휴일로 인식될 뿐이나 서구사회는 의미와 분위기가 이 작품에서처럼 확연하게 다르다. 예수 탄생의 의미, 그리스도가 세상에 설파한 교훈은 사랑과 자비, 그리고 용서이다. 일 년 내내, 평생을 이를 실천하면서 살면 최선이겠지만 최소한 크리스마스 무렵만이라도 그 정신을 되새기자는 생각이다. 작중에서 이는 스크루지 조카의 말로 명료하게 표현된다.

 

세상에는 굳이 그 덕을 보지 않아도 그냥 행복감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참 많아요. 크리스마스가 특히 그렇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요, 크리스마스가 갖는 어느 한 가지 의미를 따로 떼 놓고 생각할 수 있다고 치고요, 크리스마스라는 신성한 이름이나 크리스마스의 유래에서 절로 우러나는 친절과 용서와 자비와 기쁨이 가득한 때라고 생각해 왔어요.” (P.18)

 

그래도 스크루지는 운이 좋았다. 개심 여부는 최종적으로 본인에게 달렸지만,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주어졌다는 것 자체가 매우 드문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만과 타성에 물들어 주변의 관심과 조언을 곡해하고 거부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그것은

외로움에 젖은 스크루지의 어린 시절, 그리고 가족의 온기를 유일하게 남겨준 여동생과의 추억이 남겨준 한 가닥 희망의 끈이 아니었을까.

 

과거 크리스마스의 유령을 따라다니면서 그가 발견한 것은 잊고 있던 젊은 시절의 즐거웠던 추억과 교훈, 사랑하는 여인이 떠나가게 만든 그의 잘못된 선택이다. 현재 크리스마스의 유령이 보여준 서기 가족과 조카네 가족의 행복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바라보면서, 여러 면에 걸쳐 작가가 길게 서술하고 묘사한 크리스마스의 유쾌한 분위기와 장면들. 일상적인 냉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아닌 감사와 축복을 보여주는 그들. 약했던 여동생을 연상시키는 가냘프고 연약한 꼬맹이 팀을 바라보는 스크루지. 그리고 스크루지를 향한 유령의 통렬하기 그지없는 비판.

 

하느님의 눈에는, 저 아이처럼 수백 만의 가난한 자의 아이들보다 네가 더욱더 쓸모없고 살리기에 적당치 않은 인간이니. , 신이시요! 나뭇잎에 붙은 벌레 같은 인간이, 굶주리고 있는 제 형제들 가운데에 쓸데없이 남아도는 인구가 있다는 소리를 하다니!” (P.120)

 

의외였던 점은 스크루지의 개심이 겉으로 표출된 시점이 현재 크리스마스의 유령과의 만남 이후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초라하게 죽음을 맞이하며 아무에게도 좋은 사람으로 회상되지 않는 미래의 불쌍한 인간의 실체를 아직 목격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반복해서 자신이 변할 준비가 되었음을 강조한다. 유령들이 잇따라 그에 출몰하여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목적을 이해하고, 심지어 미래 크리스마스의 유령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따르겠다고 할 정도다.

 

스크루지는 줄곧 마음 속으로 자신의 인생을 바꾸고야 말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지금 보고 있는 환영 속에서 새 사람이 되겠다는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P.156)

 

이쯤에서 그쳐도 충분할 텐데 디킨스는 스크루지를 왜 끝까지 미래의 유령과 동행시켰을까. 이왕 뺀 칼이니 휘둘러야 한다는 뜻은 아닐 텐데. 그것은 시체의 장면에서 명확해진다. 버림받은 시체의 정체를 예감하지만 인정하길 부인하는 스크루지는 변명하고 회피하고자 애쓴다.

 

유령은 그 흔들리지 않은 손가락으로 여전히 시체의 머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당신의 뜻은 알았습니다. 제가 할 수만 있으면 그 뜻을 실천하겠고요. 허나 제겐 힘이 없습니다. 힘이 없어요.”

그러자 유령이 스크루지를 보는 듯이 느껴졌다. 스크루지는 몹시 고통스러웠다. (P.168)

 

자신의 암울한 과오와 비참하지만 엄연한 진실을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직시하고 인정해야만 한다. 시체의 교훈은 스크루지의 마음을 단단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리라. 굳건한 토대 위에 차곡차곡 쌓은 개심과 신심이야말로 앞으로 어떤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변함없이 초심을 지켜나갈 것이므로.

 

나 혼자만이 아닌 더불어 즐겁고 행복한 삶. 그것은 비단 크리스마스에만 국한된 정신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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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범을 사랑한 군인 - 역사에 남을 위대한 야생 동물들 시튼의 동물 이야기 9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이한중 옮김 / 궁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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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역사에 남을 위대한 야생 동물들

 

궁리에서 발간한 시튼 동물기 시리즈의 가장 마지막 편인 동시에 작가로서도 최 말년의 작품에 해당한다. 수년 후에 그의 자서전이 출간되었으니. 부제에 걸맞은 이야기는 <식인 늑대 라베트><프랑스 늑대 왕 쿠르토> 정도로 봐야 하리라. 이걸 포함해서 절반 정도의 이야기가 늑대를 다루고 있는데, 작가는 서문에 늑대에 대한 나의 연민과 관심이 그만큼 컸기 때문”(P.9)이라고 밝힌다.

 

<식인 늑대 라베트><프랑스 늑대 왕 쿠르토>는 인간 세계를 압도하는 최고 포식자로서의 늑대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둘 다 거대한 크기, 사냥꾼을 따돌리는 명석한 두뇌, 그리고 사람고기에 대한 집착으로 역사적 명성을 남겼다. 인간은 거대한 포식자에 열광하는 습성이 있다. 공룡에 대한 애정은 비단 아이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라베트와 쿠르토의 삶과 영광, 그리고 죽음을 서술하는 작가의 필치에는 흡사 영웅의 생애를 다루는 것과 동일한 찬사와 탄식이 함께 배어 있다.

 

거대한 늑대는 그렇게 쓰러졌다. 끝까지 싸우다 숨을 거둔 것이다. 무쇠 창을 물어뜯으며 저항하면서 당당하게 죽어 갔다.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시체더미 위에 쓰러진 것이다. 그렇다! 이제는 죽었다. 그렇지만 승자는 그였다. 라베트는 그렇게 죽었다. (P.302)

 

라베트가 식인 늑대로 악명을 떨쳤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 개체로서 그러할 뿐이었다. 쿠르토는 스케일이 남다르다. 늑대 무리를 이끌고 파리시를 장기간 포위할 지경이었다고 하니 글을 보면서도 이게 과연 실제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쿠르토가 활약하던 때는 잔 다르크와 동시대라고 하니 시대적 배경을 보면 그러할 수도 있겠다 싶다. 세상과 자연이 모두 어지러우면 자고로 역사상에 언제나 비상식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법.

 

온 땅에 무정부 상태와 기근과 질병이 난무했다. 소작농들은 힘없이 죽어 나갔고 비옥한 농지들 황폐해지기 시작했다.

시절 탓인지 늑대들은 무리 지어 탐욕스러운 약탈을 일삼았다. (P.306)

 

그해 프랑스는 학살의 해였다. 외국의 적들과 도적 떼들이 쓸 만한 땅은 모조리 황폐화시키자고 작정이라도 한 듯했다. (P.318)

 

이 이야기의 흥미로운 대목은 루브르의 어원을 알게 되었으며, 수비대장의 고귀한 희생을 잔 다르크의 그것과 동일시한 점이다.

 

그밖에 <아일랜드 늑대의 최후>, <하얀 늑대와 용감한 아들><늑대의 법>은 늑대와 인간의 대결 과정에서 드러나는 늑대의 고귀성과 불굴성, 그리고 인간과 늑대의 교감 등을 두루 다루고 있다. <소녀와 늑대>는 인간을 두려워하는 법을 학습한 현대의 늑대를, <러닝보드의 늑대>는 길들여진 늑대를, <린컨과 밤의 부름>은 야성을 상실하고 가축화된 개에게 남겨진 태곳적의 끈질긴 야성의 편린을 알게 해 준다.

 

시튼이 많은 늑대 이야기를 전한 까닭은 늑대에 대한 애정과 아울러 늑대가 유럽과 미국에 그토록 맹위를 떨쳤던 사실을 반영하였기 때문이다. 두뇌와 야수성을 갖추었고 무엇보다 집단 사냥을 즐겨한 그들에게 대항할 맹수가 없었기에 아마도 인간의 개입이 없었다면 늑대는 여전히 최고의 지위를 누렸을 것이다.

 

인간에게 최고의 친구 동물은 누가 뭐래도 개다. 이 책에서도 <전달병 캐럿><행크와 제프>를 통해 인간과 진실한 유대와 공감을 주고받는 개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개의 도움을 얻어 목숨을 구한 인간의 숫자가 얼마나 많으며, 단지 가축이 아닌 영혼의 동반자에 가까울 정도로 교감을 나누는 사람과 개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서로 떨어져 살아갈 수 없는 행크와 제크의 슬픔에 동감하게 된다.

 

행크는......개였어요. 그러지...말았어야 했는데. 나를 용서한 것처럼...나도 용서를 했어야 하는데. 행크는 내 개였어요. ...내 개였어요.” (P.264)

 

그럼에도 시튼은 야생 동물의 가축화에 부정적 입장을 취한다. 야생 동물의 순수성과 도덕성을 잃는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가 방울뱀과 혈투를 벌이는 쥐(<쥐와 방울뱀의 혈투>)를 옹호하는 건 쥐를 좋아해서가 아니다. 그의 불굴의 용기에 감탄해서다. 경탄 어린 어조로 묘사하는 사막의 요정 캥거루쥐(<사막의 요정>)를 잡아 가두려는 시도가 부질없음을 깨달아서다. 자연을 자연 그대로 놓아둘 때 치커리(<붉은 다람쥐의 모험>)의 야생의 모험담이 의미 있으며, 작가가 환상적으로 그려 내는 숲의 밤(<숲 속의 밤>)의 두려움과 정취가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겠는가? 린컨과 마찬가지로 가축이 된 황소(<칠링햄의 야생 들소>)조차도 내재한 야성의 본능을 결코 상실하지 않음을 보자.

 

표제작 <표범을 사랑한 군인>에서 군인뿐만 아니라 독자는 표범과 군인의 옛 연인을 동일시하게 된다. 아름다움과 표독함, 사랑과 독점욕이 한데 어우러진 치명적인 사랑. 실현되지도 완성할 수도 없는 비극적 운명이 예고된 표범과의 사랑은 팜므 파탈을 연상시킨다. 사랑과 고통이 공존하는 사랑은 오래갈 수 없다. 군인과 옛 연인의 이별이 비극으로 끝났듯이 그가 표범에게서 헤어날 길은 유일할 길만이 남아 있을 따름.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여전히 그녀에게서 벗어날 기회를 간절히 엿보고 있었지만 고통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에게나 나에게나 그것은 끔찍한 고통이리라는 것을, 죽도록 슬픈 고통이 따를 것이라는 생각이 언제나 나를 사로잡았다. (P.355)

 

인간과의 우정과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동물과 얄팍한 이익을 위해 자식을 무자비하게 희생시키는 부모. 인간과 다름없는 사랑을 바친 암표범. 자식에 대한 무한한 기쁨과 헌신을 아낌없이 바치는 엄마 곰(<엄마 곰의 기쁨>)의 모성은 인간 여성이 갖는 감정과 무엇이 다른가?

 

시튼은 말미에 이렇게 묻는다, 어느 쪽이 짐승이냐고. 우리가 시튼의 동물 이야기에 매료되는 것은 표피적 흥미 이상의 것이 담겨 있어서다. 미처 알지 못했던 종이 아닌 개체로서의 동물의 모습을 비로소 알게 되고 그것이 인간과 마찬가지임을 깨닫게 해 주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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