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바트 비룡소 걸작선 16
오트프리트 프로이슬러 지음, 박민수 옮김 / 비룡소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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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문학이라고 틀을 정해 놓기가 애매한 작품이다. 중세를 배경으로 환상 풍의 성장소설이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이 주는 다채로운 의미 부여는 녹록지 않다. 독일 동부 지역, 폴란드와의 인접 지역이라는 지리적 배경, 환상과 마법이 당연한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중세의 시대적 배경. 굉장히 이국적인 동시에 묘한 비현실성을 자아내는데 작가의 서술도 사실성에 얽매이지 않아 한층 그러하다. 작품 전체에 일관된 통일성보다는 각지에 흩어진 마법사와 관계된 신비한 개별 에피소드를 한데 그러모은 듯한 느낌이 강하다.

 

음식은 훌륭하고 풍족하잖아. 게다가 머리 위에 지붕도 있고-예전 같으면 아침에 눈을 뜨면서 저녁에 잘 곳을 걱정해야 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 침대는 따뜻하고 기분 좋게 말라 있고 그런대로 푹신한데다가 빈대나 벼룩도 없고 말야. 이건 거지 소년이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 아니겠어? (P.32)

 

크라바트가 코젤브루흐의 방앗간에 안착하게 된 연유다. 나날의 끼니와 잠자리 걱정을 하는 처지에서 안정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다면 앞뒤 잴 필요조차 없다. 궁핍한 중세의 경제적 상황을 알게끔 해준다.

 

배고픔이 가시면 그때야 비로소 주위를 둘러볼 심적 여유가 생기는 법. 방앗간이 생각만큼 좋은 곳이 아님을 깨닫고 도망칠 생각을 품지만 이미 늦었다. 마법의 서약으로 그는 철저하게 주인 마법사에게 예속된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잇따른 도망 시도가 무위로 돌아감을 첫 번째 꿈속에서 겪게 된다. 작품 말미에 메르텐의 탈주가 실패하고 자살 시도마저 가로막히는 대목에서 독자는 주인 마법사의 절대적 위력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호언장담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이 방앗간에서 누가 죽고 누가 사는지는 내가 결정한다!” 주인이 소리쳤다. “나만이 그걸 결정할 수 있어!” (P.245)

 

주인이 직공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런대로 대우가 나쁘지 않고 마법도 배울 수 있으니 별일 없다면 직공들이 방앗간에 안주할 수 있으련만 하나의 난관이 가로놓여 있다. 그것은 일 년에 한 명씩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는 것인데 이는 인력으로 막을 수도 회피할 수도 없는 엄숙한 법칙과도 같다. 크라바트는 자신에 유달리 친절하고 의지했던 톤다와 미할이 연거푸 죽음을 맞이하자 현상을 용인할 수 없다. 게다가 이들의 죽음은 방앗간 내에서 언급조차 금기시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마냥 나날을 지속해야 한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다.

 

크라바트의 방앗간 생활은 삼 년간 지속되며 매년 비슷한 양식이 반복된다. 누군가의 죽음과 새로운 구성원의 등장, 마법사의 대부가 등장할 때마다 되풀이되는 의문의 방아 찧기, 부활절 의식 등. 작가는 여기서 역사성을 불어넣기 위해 아우구스트 선제후와 귀족으로 변신한 주인의 회담 장면을 삽입한다. 스웨덴과의 전쟁을 계속할지 중단할지의 의사결정에서 마법사는 전쟁을 주창한다. 죽음을 부르는 사악한 편에서 보자면 평화는 불편한 법이므로.

 

매년 반복되는 방앗간의 나날은 크라바트에게 한가지 선택이 불가피함을 알려 준다. 안주와 도전 중에서의 선택. 다소간의 부정과 불의를 감내할 수 있다면 안락하고 평온한 삶이 보장되어 있다. 우정과 정의를 선택하면 불편과 위험을 무릅써야 하고 목숨마저 장담하지 못한다. 우리는 어떤 길을 향해 걸어갈 것인가. 마법의 위력은 강력하며 이를 갖고자 하는 유혹이 커질수록 삶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올바른 방향에서 멀어지게 된다. 톤다의 무덤에서 주기도문을 떠올리지 못하는 크라바트의 모습처럼.

 

이 작품에서 크라바트의 꿈은 작품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현실에서 체험하지 못하는 방앗간의 진상을 경험하게 해주기도 하며, 톤다의 도움을 구하고 자신에 닥칠 앞날을 예시하여 대비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네 번째 꿈에서 크라바트는 꿈속에서 칸토르카의 도움으로 마법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칸토르카는 마치 크라바트에게서 그 어떤 오점을 지워 주고 있는 것 같았다. 크라바트는 한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칸토르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리고 칸토르카가 자신을 마주보고 있다는 사실이 한없이 고맙게 느껴졌다. (P.263)

 

칸토르카는 크라바트에게 구원의 여신의 의미를 지닌다. 주인의 마법에 씐 방앗간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여인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힘이라는 상투적이고 진부하지만 설득력 있는 설정이라면, 이를 실현하기 위해 크라바트가 칸토르카를 연상하고 환상 속에서 대화를 주고받으며 꿈속에서 교감을 갖는 대목은 플라토닉한 사랑의 순수성을 나타낸다. 오로지 그런 사랑이라야 마법사의 시험을 거치고 사랑하는 사람을 굴레에서 구출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칸토르카가 말했다.

나를 걱정하기 때문에 두려워한다는 걸 말이에요. 그 때문에 당신을 알아본 거예요.” (P.337)

 

주인은 크라바트가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을 알아차리고 그에게 대담한 제안을 한다. 자신의 후계자가 되라는. 마법으로 세상을 지배할 수 있으며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매혹적인 유혹의 자리. 우정과 사랑의 복수를 굳게 다짐하지 않았다면 흔들릴 수도 있지만 크라바트는 단호하다.

 

그리고 유로를 잊을 수 없다. 바보스러운 유로야말로 참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임을 크라바트는 나중에서야 알게 된다. 현실적으로 주인에게 대항할 힘이 없는 유로로서는 그것이 자신을 보전하는 최상의 방책일 수밖에. 크라바트는 주인의 함정에서도 유로를 향해 빈 총을 쏘면서 마법에 굴하지 않고 우정을 중시하는 참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크라바트가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된 분기점이라고 하겠다.

 

이색적이며 흥미롭지만 의외로 읽기가 만만치 않은 작품. 작가의 다른 작품도 경험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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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놀 청소년문학 28
바바라 오코너 지음, 신선해 옮김 / 다산책방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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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보기엔 유쾌 발랄하기 그지없는 이 책은 사실 매우 씁쓸한 현실을 품고 있는 작품이다. 표면상 줄거리는 가난해진 조지나가 개를 훔쳐 그 사례금으로 집을 구하는 데 보태고자 한다는 것이다. 초등학생답지 않은 치밀한 작전과 방법 모색은 독자에게 감탄을 주지만, 어쩔 수 없는 경험과 사고의 한계도 드러낸다. 훔친 개를 어디에다 둘지 또는 훔친 개의 먹이는 어떻게 조달할지 등등의 중요한 사항들을 깜빡 놓쳐버리는 것이다.

 

조지나의 아빠는 가족을 버리고 가출한 무책임한 인물이다. 작중에 부부간의 심각한 갈등이 있었음을 암시하지만 구체적 이유에 대해서는 별도로 언급하지 않는다. 조지나 엄마에 따르면 모든 게 지긋지긋해져서라고 추정될 따름이다. 졸지에 거리에 나앉은 조지나 입장에서 아빠는 모든 사태의 원인이므로 당연히 원망의 대상이다. 조지나는 아빠에 대한 원망을 감추지 않는다.

 

이 차가 싫었다. 구석구석 다 지겨웠다. 나는 핸들에 두 손을 얹고는 운전하는 척해보았다. 부릉, 부릉, 부릉, 운전 시늉을 하는 내내, 아빠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모든 게 다 지긋지긋해졌다고 우릴 차에서 살게 만든 나쁜 사람. (P.50)

 

반면 조지나 엄마는 어떻게든 가족이 살 집을 구하기 위해 말 그대로 고군분투한다. 상황에 분개하지만 절망하지는 않는 모습, 가족을 위해 자신의 한 몸을 헌신하고 희생하는 자세. 조지나에게 아빠는 부정적 인물, 엄마는 긍정적이고 지향해야 할 인물로 인식됨은 당연하다. 작중에서는 이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지만 조지나의 생에 있어 중요한 변곡점이다.

 

땅이 갈라져서 날 집어삼켰으면 하고 바랐다. 뒤를 돌아보고서, 나와 토비와 자동차, 그 모든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루앤 고드프리를 발견하자마자, 루앤의 표정에서 그 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박에 알아낼 수 있었다. (P.11)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인식의 태도는 가난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집안이 멀쩡할 때 조지나는 루앤과 단짝친구로 지냈다. 조지나의 처지를 알아차린 후 루앤은 조지나로부터 서서히 멀어진다. 복장도 외모도 점점 지저분해지는 아이, 공부도 숙제도 점점 나빠지는 아이. 아이도 부모도 결코 친하게 지내라는 말을 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이를 깨달은 조지나의 태도 역시 스스로 루앤과 거리를 둔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 아이들에게 가난이란 표피에 불과함을 아무리 역설해 본들 그들에겐 역시 씻을 수 없는 수치임에 불과하다. 한편 조지나가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솔직히 교사에게 털어놓았다면 좀 더 나아졌겠지만 자신의 비참함을 타인에게 밝히는 용기를 내기도 쉽지 않다.

 

후반부에 잠깐 등장하지만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무키 아저씨를 보자. 그는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토비의 말마따나 부랑자로 분류된다. 집도 절도 없이 나날이 떠돌아다니며, 변변한 차도 없이 자전거에 의존해 초라한 침낭으로 유숙하는 인물. 속절없는 떠돌이 부랑자다. 작가는 팻시 아줌마의 시선으로 그가 매우 행복해 보임을 보여준다. 흔한 선입견과 달리 그는 낙관적이며 사려 깊고 오히려 지혜롭다고 할 정도다. 그에게 있어 물질적 부는 선택적 요인에 불과하다. 조지나와 윌리의 진실을 알아차렸음에도 그는 이를 전적으로 조지나의 판단에 맡긴다. 그는 단지 자신의 신조를 말해줄 뿐이다. 그것이 조지나에게 던진 의미는 의외로 깊고 오래간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지금껏 무키 아저씨를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잘못 안 것은 아니지만). 그 아저씨는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다. 그렇지만 나쁜 사람도 아니다. 게다가 똑똑하다. 그리고 좋은 발자취를 남기는 사람이다. (P.236)

 

카멜라 아줌마의 말처럼 힘든 일을 겪다 보면 나쁜 짓을 하게 될 수도 있다. 힘든 일을 겪는 모든 사람이 나쁜 짓을 저지르는 건 아니다. 힘든 일을 헤쳐나가기 위한 손쉬운 해결책을 찾다 보면 나쁜 유혹에 빠지기 쉽다. 제아무리 동기와 배경을 참작하더라도 나쁜 짓이 잘못이라는 근원적인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조지나는 개를 훔치고 사례금을 받은 후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단순한 교환의 방식에만 주목하였다. 훔친 개의 딱한 처지, 졸지에 애정이 어린 개를 잃은 주인의 심정, 게다가 사례금에 갈등하는 주인네의 고민 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조지나의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에 그런 정의(情意)적인 요소는 포함되지 않는다. 이론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을 때 일은 꼬이기 마련이며, 무키 아저씨의 신조처럼 휘저으면 휘저을수록 더 고약한 냄새가 나는 법”(P.203)이다.

 

그저 날 이 지경까지 몰고 온 사람이 바로 나라는 생각만 하며, 아주 끔찍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그 모든 것을 엉망진창으로 휘저어버렸기 때문에, 그것도 너무도 많이 휘저어버렸기 때문에, 이제 고약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하는 것만 같았다. (P.215)

 

여러 성공한 아동문학처럼 역시 결말은 훈훈하다. 조지나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개를 돌려주며 카멜라 아줌마는 조지나를 용서한다. 조지나의 엄마는 온 가족이 그토록 염원하던 집을 얻는 데 성공한다. 이제 서서히 조지나의 일상도 회복될 것이다. 학교생활도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조지나는 윌리와 카멜라 아줌마를 만났고, 무키 아저씨의 지혜를 얻었다. 고약한 냄새가 아닌 좋은 냄새가 나는 삶의 방식을 알게 되었으며, 살면서 뒤에 남겨놓은 자취가 앞에 놓인 길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누나 진짜 못됐다.”

이런 제기랄. 꼭 지금 그 말을 내뱉어야 해?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는데. 왜냐하면 나 자신도 지금 딱 그런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난 정말 못됐다. (P.114)

 

앞으로의 조지나는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이제 더는 동생으로부터 못된 사람이라는 비난을 듣지 않아도 될 정도로. 솔직히 말해서 카멜라 아줌마가 사례금을 마련하도록 열심히 부추길 때의 조지나는 참으로 못된 아이였으니까. 다만 끝까지 못된 길을 걷지 않았다는 사실은 조지나의 심성이 근본적으로 어떠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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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의 토토
구로야나기 테츠코 지음 / 프로메테우스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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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모에 학원은 요즘 말로 대안학교이다. 토토처럼 일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한 대안 수업과 체험학습 위주의 학교다. 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에 대안학교를 모색한 고바야시 선생님과 같은 분이 계셨다는 점은 전혀 의외다. 게다가 철저한 군국주의 체제에서. 한편 고작 초등학교 저학년임에도 퇴학을 요구하는 점은 매우 비교육적인 당시 사회상을 반영한다. 토토의 부모가 당시로서는 서구적으로 열린 사고를 지닌 사람이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토토의 장래는 암울해졌을 것이다.

 

도모에 학원에서 행복한 학교생활을 누리는 토토를 보면서 이 책을 읽는 아이들은 어떤 심정일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토토를 부러워할까 아니면 이상한 나라의 별세계를 바라보듯 무심하게 받아들일까.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우리 아이가 학교에 가는 걸 손꼽아 고대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의문이 들지만 도모에 학원이라면 가능하겠다 싶다.

 

자기가 좋아하는 과목부터 공부하면 되는 곳. 일과가 정상적으로 마무리되면 자연 산책이 날마다 가능한 곳, ‘산과 들과 바다에서 나는 것으로 식사가 재밌어지는 곳, 스스로 음식을 만들고 농부가 일일교사로 직접 농사 수업을 가르치는 곳, 아이가 화장실 용변을 뒤엎어도 스스로 처리하게끔 하는 곳, 다리가 불편한 아이도 운동회에서 뒤처지지 않을 수 있는 곳. 도모에 학원은 이런 곳이다. 이 학교를 운영하는 고바야시 교장의 교육관이기도 하다. 여기에 생소하기 이를 데 없는 리드미크 수업은 확실히 시대를 앞서나간다.

 

리드미크는 이런 식으로 몸과 마음에 리듬을 이해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이것이 정신과 육체와의 조화를 도와, 이윽고 상상력을 깨우치고 창조력을 발달시키게 되었으면 하는 발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P.96)

 

도모에 학원이 초등학교니까 가능하다는 생각도 든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안학교가 필요하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지만 그나마 수업 진도에 대한 요구가 상대적으로 덜할 테니. 중학교나 고등학교라면 상상도 할 수 없다. 아직까지 대안학교는 일반 학교의 낙오자들이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일반적인 경로로는 대학진학을 도모하기 어려운 곳도 사실이다. 사회적 인식도 당사자 자신의 생각도 비슷하리라.

 

요즘 교육의 본질을 되짚어보는 일이 많다. 대학진학, 그것도 상위권 대학에 가는 게 삶의 목표가 되는 게 마땅한 건지. 정상적인 학교 수업이란 미명 하에 수행평가와 과제평가의 짊에 허덕이며 학교생활기록부에 안 좋은 내용이 기록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생활. 대학진학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자신의 진로를 발견하지 못한 아이에게 참다운 학창 생활의 방향은 무엇이 올바를까. 다수가 따라가는 길을 맹목적으로 좇아가도록 요구하는 게 사회와 부모의 바람직한 역할이 맞는지 등등. 그 과정에서 아이의 행복과 즐거움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무조건 대학진학 이후로 넘기고 꾹꾹 참으라고 하는 게 타당한가.

 

토토는 지갑은 찾지 못했어도 만족스러웠다. 제 힘으로 이렇게까지 찾아보았으니까. 실은 그 만족스러움 속에는 교장선생님이 자기가 한 행동을 야단치기는커녕 신뢰해 주었으며, 또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주었다는 충족감이 포함되어 있었겠지만, 당시의 토토로서는 그렇게 어려운 내용은 아직 알 수가 없었다. (P.58)

 

토토를 비롯한 도모에 학원 출신 아이들이 훗날 어른이 되어서도 그 시절을 잊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어린아이를 아이로 간주하지 않고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북돋아 주는 것을 아이들 자신이 누구보다 먼저 깨닫는다. 그런 선생님과 학교를 사랑하고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도모에 학원은 너무 일찍 핀 꽃이었다. 일찍 핀 꽃은 찬란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이런 아픔과 희생의 과정이 반복되어야 비로소 참된 봄이 다가오는 법이다. 아쉽게도 고바야시 선생님은 화재 이후 제2의 도모에 학원을 재건하지 못하였다. 그만큼 주류 사회에서 인정받기 어려운 학교 모델이라고 하겠으니 도모에 학원을 운영하는 교장으로서 노심초사가 컸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였으리라.

 

작가는 후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부족하나마 고바야시 선생님이란 존재, 그가 아이들을 얼마나 큰 사랑으로 대했는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아이들을 교육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전하고 싶었습니다. (P.230)

 

그렇다. 아이들이 더 큰 존재로 쑥쑥 커나가기 위해서는 곁에서 물을 주고 가꾸는 정성이 필요하다. 부모와 교사의 관심과 칭찬은 아이가 어떤 곤경에도 굴하지 않고 난관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준다. 미혹과 갈등의 순간에도 올바른 방향을 놓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방향타를 제공해 준다. 도모에 학원의 다채로운 교육방식은 물론이지만, 토토가 무엇보다도 강하게 받아들인 것은 바로 이 사실, 인정과 존중이었다.

 

저로서는 <, 정말은 착한 아이>라고 끊임없이 말씀해 주셨던, 이 한 마디가 얼마나 큰 버팀목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만약 도모에 학원에 다니지 않았고, 고바야시 선생님도 못 만났더라면 저는 아마 무엇을 하든 못된 아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콤플렉스에 고뇌하며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채 어른이 되었을 것입니다. (P.230)

 

나의 학창 시절을 돌이켜볼 때 토토와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훗날 떠올려보면 뭐 특별하고 대단한 교육철학을 전개한 게 아님에도 아, 나를 믿어주시는구나 하는 그 느낌이 학교에 정을 붙이고 안착할 수 있던 계기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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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일간의 세계 일주 열린책들 세계문학 147
쥘 베른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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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발달로 지금은 이야깃거리도 안 되는 소재다. 만 하루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읽는 내내 흥미로움과 박진감을 지속적으로 선사하니 역시 뛰어난 소설임이 틀림없다. 특히 구글맵으로 일행의 여정을 시각적으로 확인하면 흥미로움이 배가된다. 미국이야 작가가 방문했으니 그렇다 쳐도 인도의 지리적 정보는 순전히 문헌을 통해 획득했을 텐데 마치 현장에 가본 듯한 생생함이 느껴진다.

 

작가는 하필 영국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같은 프랑스사람을 하인으로 설정했을까? 역할에 맞는 그네들의 국민성을 감안하였음을 소설이 전개되면서 독자는 차츰 깨닫게 된다. 정확하고 침착하며 무감동한 포그와 즉흥적이며 감정에 치우치며 격정적인 파스파르투. 포그를 뒤쫓는 픽스 형사의 집요함 역시 포그와 본질에서 유사하다. 그는 자신의 직분에 철저하였을 따름이니까.

 

필리어스 포그는 수학적인 정확함이 몸에 밴 사람답게 절대 서두르지 않고 늘 준비된 상태며, 걸음이나 동작을 낭비하는 법이 없었다. 한 걸음도 불필요하게 내딛지 않았고 언제나 지름길로 다녔다. 천장을 보며 시선을 분산시키지도 않았고 불필요한 동작은 절대 보이지 않았다. 감동에 젖거나 동요된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19)

 

언제나 평정심을 잃지 않았고, 리폼 클럽에서 무슨 일이 생기든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어떤 사건이나 사고가 생겨도 놀라는 일이 없었다. 항해용 정밀 시계만큼이나 무감동한 사람이었다. (P.65)

 

포그의 성격 묘사는 칭찬보다는 비판조에 가깝다. 사람이지만 기계와 같다는. 오죽하면 파스파르투는 기계의 시중을 든다고 간주해버릴 정도다.

 

이 작품의 우선적 재미는 세계 일주를 통해서 포그 일행이 맞닥뜨리는 아슬아슬한 상황, 즉 기한을 지키기 어렵게 만드는 온갖 사건과 사고들을 헤치며 포그가 자신의 여정을 진행하는 상황 자체가 주는 긴박감이다. 자고로 모험이 흥미로우려면 독자가 잘 모르는 환경에 처해 있어야 한다. 작가는 유럽 통과는 간략히 지나가는 반면 인도 아대륙의 횡단과, 홍콩에서 상하이를 거쳐 요코하마에 이르는 항로, 북미대륙을 관통하는 모험에 상당한 노력과 분량을 아끼지 않는다. 집필 당시의 세계관에서 이곳이 아직은 덜 알려진 곳이기 때문이리라.

 

단순히 세계 일주 모험기에 그쳤다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잊히고 말았을 텐데, 이 소설에는 무엇보다 입체적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여행의 경과에 따라 점차 발전하고 성숙한 면모를 보이는데 이것이 독자의 가슴을 제법 흐뭇하게 한다. 무뚝뚝하고 젠체하며 오만하게 비치는 포그는 진정한 신사임을, 아우다 부인의 탈출과, 인디언에 사로잡힌 하인을 구출하기 위해 위험과 재산과 생명을 주저함 없이 무릅쓰는 장면으로 여실히 보여 준다. 그것도 너무나 사소하여 마치 별일 아닌 간단한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 당신도 심장을 가진 남자로군요!프랜시스 크로마티 경이 말했다.

가끔은요.필리어스 포그가 간단히 대답했다. 시간이 있을 때 말입니다.(P.99)

 

살아 있다면,포그 씨가 덧붙였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결심하며, 필리어스 포그는 모든 것을 희생했다.

막 파산을 선고한 셈이었다. 하루만 늦어도 뉴욕에서 배를 탈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내기에 지고 말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내 의무다!>라는 생각 앞에서, 그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P.257)

 

이러한 그를 지켜보면서 아우다 부인의 마음은 그에게 쏠리게 된다. 자신의 생명의 은인인 동시에 과묵함 속에 따스한 인정을 품고 있는 포그의 참된 면모를 발견한 것이다. 파스파르투는 어떠한가? 포그의 하인인 그가 처음부터 포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포그의 시중을 들면서 같이 세계 일주를 하면서 그는 포그의 언행을 통해 그가 참된 인물임을, 재산에 앞서 사람을 중시하는 가치관의 소유자임을 깨닫고 진정으로 그를 존경하게 되는 단계를 독자는 차근차근 눈여겨보게 된다. 그래서 픽스 형사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파스파르투는 여자를 구하겠다는 주인의 생각에 흥분했다. 이렇게 얼음처럼 차가운 주인의 겉모습 아래에 있는 심장과 영혼을 느꼈다. 그러자 필리어스 포그에 대한 애정이 싹텄다. (P.100)

 

이 성실한 청년은 이제 주인을 무조건 신봉했다. 필리어스 포그의 정직함과 관대함과 헌신을 침이 마르도록 찬양했다. (P.204)

 

이 모험소설의 다른 묘미는 풍자에 있다. 세계 각지에서 맞닥뜨린 문화와 풍습의 비합리적이고 반인륜적 측면을 직설적으로 때로는 시니컬하게 건드린다. 홍콩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아편 중독자들의 처참한 모습은 작가가 프랑스인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추레한 꼴에 얼이 빠지고 비쩍 마른 몸으로 아편을 빨고 있는 이들에게 돈벌이에 혈안이 된 영국 상인은 매년 천만 파운드도 넘는 죽음의 마약, 아편을 팔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성 중 가장 해로운 악덕을 이용한 서글픈 벌이였다. (P.156)

 

무법적인 난투극으로 이어진 거리의 정치 집회가 사실은 치안 판사를 뽑는 선거였다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당혹스러움이란! 물론 작중 묘사에는 작자 자신이 속한 문화의 근원적 한계도 존재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르몬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아메리카 인디언의 막무가내의 폭력성 묘사가 이에 해당한다.

 

필리어스 포그 씨는 결과적으로 주어진 기한 내 세계 일주에 성공하였다. 여행을 위해 그는 자신의 재산 절반을 소진하였지만, 반대급부로 비교할 수 없이 더 크고 소중한 존재를 얻었다. 자신을 영웅처럼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아내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훌륭한 하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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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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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읽은 후 정말 오랜만에 다시 펼친다. 그때 읽은 책은 범우사르비아문고인데, 책 표지가 오른쪽에 있고, 세로쓰기로 편집되어 있다. 옛 생각을 살려 서가를 뒤져보니 누렇게 변색한 책장에 세월의 간극을 느낄 수 있다. 놓아주어야 할 때가 너무 지난 모양이다.


당시 사춘기의 내게 충격이었던 점은 학업에 지친 주인공이 극단적 선택을 감행한다는 점이다. 작품에서는 한스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을 밝히지 않지만 삶에 지치고 목적을 상실한 그가 죽음을 간구하는 대목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영원히 쉬고, 잠들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만큼 낙담했고 비참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이 따끔거렸다. 기운이 없어서 도저히 일어나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다......어렴풋한 상념과 기억들, 수치심과 자책감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한스는 크게 신음하고 풀밭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P.212)

 

예나 지금이나 학업 스트레스는 줄지 않았다. 제아무리 학력 차별을 외치더라도 정작 수험생 처지에서는 공염불에 불과하다.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학업 이외 다른 진로를 선제적으로 모색하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한스가 사는 도시도 마찬가지다. 뛰어난 아이는 신학교와 대학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밟아야 소위 출세하게 된다. 학력의 혜택이 클수록 학력을 향한 경쟁은 치열하게 마련이며, 대다수 학생은 자신이 왜 공부하는지 질문조차 없이 공부 자체에 막무가내로 매진하게 마련이다. 경쟁에서 뒤처지면 곧 낙오자, 패배자가 되는 것이므로.

 

신학교에서도 동급생들을 앞지르려면 더 야심차게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반드시 동급생들을 앞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대체 왜 그래야 할까? 그 이유는 한스 자신도 알지 못했다. (P.53)

 

좋아하던 낚시도 금지되고, 산책도 통제받으며, 토끼 기르기도 막힌 한스는 학교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못한다.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는 한스의 눈에 성적도 우수하지 못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들과 굳이 어울릴 필요를 느끼지 못하며, 사회적으로도 당연한 것으로 용인받는다. 신학교에서 나온 한스가 자신의 동네에서 친구를 찾을 수 없기에 낯섦과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한스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신학교 시절의 유일한 친구인 하일너는 퇴학당한 후 연락이 끊어졌고 신학교와는 더는 볼일이 없다. 고향 도시에서도 학교 교장, 목사, 아버지 모두 그와 공감대가 없다. 소년 시절 내내 공부만 하던 허약한 한스가 기계공이 된다는 게 지난한 선택이라는 점을 소설은 보여 준다.

 

진퇴양난이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은 에마와 만남이다. 갑자기 눈부시게 아름답게 변모한 세계를 인식하는 한스를 바라보며, 풋내기 한스가 노련한 에마 앞에서 쩔쩔매는 순진한 모습을 보며 독자는 안타까움과 순수함의 양가의 감정을 동시에 갖게 된다. 에마와 잘 풀렸다면 이른바 사랑의 힘으로 난관을 극복할 수도 있었겠지만 에마는 떠나고 한스는 마지막 기대도 허물어진다.

 

작가는 전반부에서 자연과 교감하고 자연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한스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아름답고 세심한 자연묘사가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어 후반부의 자연과 유리된 한스와 대비를 이룬다. 그리고 인생의 가장 활기찬 시기를 보내는 한스가 뼈마디가 앙상할 정도로 여위고 두통에 시달리며 창백한 낯빛을 지닌 채 허우적거리는 장면은 그로테스크하기조차 하다. 그의 모습은 광인 또는 좀비를 연상시킨다.

 

한스는 자신이 원해서, 공부가 너무나 좋아서 그런 길을 택한 것일까. 아니다, 그는 그저 부모와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진실한 자신을 억누르려고 애쓴 딱한 아이일 뿐이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 평범한 소년이었기에 스스로 파멸의 길을 따른 것이다. 지적 탐구심을 올바르게 삶의 여유와 조화할 수 있었다면 한스도, 다른 이들도 결과적으로 나았을 텐데. 아니 그가 만약 하일너 같이 개성 강하거나 고집이 셌다면 이렇게 비극으로 치닫지도 않았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하일너의 마지막 소식은 아래와 같이 전해진다.

 

하일너는 떠났고, 소식이 끊어졌다. 하일너라는 인물과 그의 도주는 점차 이야기가 되었고 마침내 전설이 되었다. 훗날 이 열정적인 소년은 갖가지 어리석은 기행을 더 저지르고 더 방황한 끝에 삶의 고뇌를 엄격하게 다스려 위대한 영웅은 아니지만 어엿한 한 남자가 되었다. (P.137)

 

한스 기벤라트와 헤르만 하일너는 작가 헤르만 헤세의 분신이다. 작가 자신 소년 시절의 체험을 짙게 반영한 이 작품에서 작가는 하일너처럼 용케 질곡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작가가 조금만 더 소심하고 나약했더라면 한스의 길을 따르지 않았을 거라고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아무도 소년의 여윈 얼굴에 나타난 당혹스러운 미소 뒤에 물에 빠져 가라앉는 영혼이 아파하고 있으며, 그 영혼이 두려움과 절망에 차 죽어가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도 아버지와 몇몇 교사의 야만적인 공명심과 학교가 이 연약한 존재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고 가장 위태로운 소년 시절에 왜 한스는 날마다 밤늦게까지 공부해야 했을까? 왜 그의 토끼를 빼앗고, 왜 라틴어 학교에서 동급생들을 일부러 멀리하게 만들고, 왜 낚시를 금지하고, 왜 어슬렁거리며 거리를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고, 왜 하찮고 소모적인 명예욕을 추구하겠다는 공허하고 세속적인 이상을 그에게 심어주었을까? 왜 시험이 끝나고 힘들게 얻은 방학 때조차 푹 쉬게 하지 않았을까?

무지막지하게 몰아댄 망아지는 길에 쓰러져 이제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P.141)

 

스러져 가는 한스를 향한 작가의 안타까운 심경과 사회를 향한 분노는 작품 속에서 이렇게 직설적으로 절절하게 표현되고 있다. 또한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었음에도 한스에 대한 아픔이 내게 여전함은 내 아이의 처지가 과거의 나, 소설 속 한스와 별다른 차이가 없음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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