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0일간의 세계 일주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47
쥘 베른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평점 :
문명의 발달로 지금은 이야깃거리도 안 되는 소재다. 만 하루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읽는 내내 흥미로움과 박진감을 지속적으로 선사하니 역시 뛰어난 소설임이 틀림없다. 특히 구글맵으로 일행의 여정을 시각적으로 확인하면 흥미로움이 배가된다. 미국이야 작가가 방문했으니 그렇다 쳐도 인도의 지리적 정보는 순전히 문헌을 통해 획득했을 텐데 마치 현장에 가본 듯한 생생함이 느껴진다.
작가는 하필 영국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같은 프랑스사람을 하인으로 설정했을까? 역할에 맞는 그네들의 국민성을 감안하였음을 소설이 전개되면서 독자는 차츰 깨닫게 된다. 정확하고 침착하며 무감동한 포그와 즉흥적이며 감정에 치우치며 격정적인 파스파르투. 포그를 뒤쫓는 픽스 형사의 집요함 역시 포그와 본질에서 유사하다. 그는 자신의 직분에 철저하였을 따름이니까.
필리어스 포그는 수학적인 정확함이 몸에 밴 사람답게 절대 서두르지 않고 늘 준비된 상태며, 걸음이나 동작을 낭비하는 법이 없었다. 한 걸음도 불필요하게 내딛지 않았고 언제나 지름길로 다녔다. 천장을 보며 시선을 분산시키지도 않았고 불필요한 동작은 절대 보이지 않았다. 감동에 젖거나 동요된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19)
언제나 평정심을 잃지 않았고, 리폼 클럽에서 무슨 일이 생기든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어떤 사건이나 사고가 생겨도 놀라는 일이 없었다. 항해용 정밀 시계만큼이나 무감동한 사람이었다. (P.65)
포그의 성격 묘사는 칭찬보다는 비판조에 가깝다. 사람이지만 기계와 같다는. 오죽하면 파스파르투는 기계의 시중을 든다고 간주해버릴 정도다.
이 작품의 우선적 재미는 세계 일주를 통해서 포그 일행이 맞닥뜨리는 아슬아슬한 상황, 즉 기한을 지키기 어렵게 만드는 온갖 사건과 사고들을 헤치며 포그가 자신의 여정을 진행하는 상황 자체가 주는 긴박감이다. 자고로 모험이 흥미로우려면 독자가 잘 모르는 환경에 처해 있어야 한다. 작가는 유럽 통과는 간략히 지나가는 반면 인도 아대륙의 횡단과, 홍콩에서 상하이를 거쳐 요코하마에 이르는 항로, 북미대륙을 관통하는 모험에 상당한 노력과 분량을 아끼지 않는다. 집필 당시의 세계관에서 이곳이 아직은 덜 알려진 곳이기 때문이리라.
단순히 세계 일주 모험기에 그쳤다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잊히고 말았을 텐데, 이 소설에는 무엇보다 입체적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여행의 경과에 따라 점차 발전하고 성숙한 면모를 보이는데 이것이 독자의 가슴을 제법 흐뭇하게 한다. 무뚝뚝하고 젠체하며 오만하게 비치는 포그는 진정한 신사임을, 아우다 부인의 탈출과, 인디언에 사로잡힌 하인을 구출하기 위해 위험과 재산과 생명을 주저함 없이 무릅쓰는 장면으로 여실히 보여 준다. 그것도 너무나 사소하여 마치 별일 아닌 간단한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아! 당신도 심장을 가진 남자로군요!」 프랜시스 크로마티 경이 말했다.
「가끔은요.」 필리어스 포그가 간단히 대답했다. 「시간이 있을 때 말입니다.」 (P.99)
「살아 있다면,」 포그 씨가 덧붙였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결심하며, 필리어스 포그는 모든 것을 희생했다.
막 파산을 선고한 셈이었다. 하루만 늦어도 뉴욕에서 배를 탈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내기에 지고 말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내 의무다!>라는 생각 앞에서, 그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P.257)
이러한 그를 지켜보면서 아우다 부인의 마음은 그에게 쏠리게 된다. 자신의 생명의 은인인 동시에 과묵함 속에 따스한 인정을 품고 있는 포그의 참된 면모를 발견한 것이다. 파스파르투는 어떠한가? 포그의 하인인 그가 처음부터 포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포그의 시중을 들면서 같이 세계 일주를 하면서 그는 포그의 언행을 통해 그가 참된 인물임을, 재산에 앞서 사람을 중시하는 가치관의 소유자임을 깨닫고 진정으로 그를 존경하게 되는 단계를 독자는 차근차근 눈여겨보게 된다. 그래서 픽스 형사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파스파르투는 여자를 구하겠다는 주인의 생각에 흥분했다. 이렇게 얼음처럼 차가운 주인의 겉모습 아래에 있는 심장과 영혼을 느꼈다. 그러자 필리어스 포그에 대한 애정이 싹텄다. (P.100)
이 성실한 청년은 이제 주인을 무조건 신봉했다. 필리어스 포그의 정직함과 관대함과 헌신을 침이 마르도록 찬양했다. (P.204)
이 모험소설의 다른 묘미는 풍자에 있다. 세계 각지에서 맞닥뜨린 문화와 풍습의 비합리적이고 반인륜적 측면을 직설적으로 때로는 시니컬하게 건드린다. 홍콩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아편 중독자들의 처참한 모습은 작가가 프랑스인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추레한 꼴에 얼이 빠지고 비쩍 마른 몸으로 아편을 빨고 있는 이들에게 돈벌이에 혈안이 된 영국 상인은 매년 천만 파운드도 넘는 죽음의 마약, 아편을 팔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성 중 가장 해로운 악덕을 이용한 서글픈 벌이였다. (P.156)
무법적인 난투극으로 이어진 거리의 정치 집회가 사실은 치안 판사를 뽑는 선거였다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당혹스러움이란! 물론 작중 묘사에는 작자 자신이 속한 문화의 근원적 한계도 존재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르몬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아메리카 인디언의 막무가내의 폭력성 묘사가 이에 해당한다.
필리어스 포그 씨는 결과적으로 주어진 기한 내 세계 일주에 성공하였다. 여행을 위해 그는 자신의 재산 절반을 소진하였지만, 반대급부로 비교할 수 없이 더 크고 소중한 존재를 얻었다. 자신을 영웅처럼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아내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훌륭한 하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