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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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는 에르퀼 푸아로도, 마플 양도 나오지 않는다. 아니, 탐정 자체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독자는 작가와 함께 전지적 시점으로 등장인물 전체를 관찰하거나 사건 속으로 들어가 인물 각자의 시선으로 타인을 관찰하고 의심하는데 합세해야 한다. 독자는 작중 인물이 파악하는 정보만큼을 헤아릴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탐정과 범인, 독자는 구별되지 않는다. 모두가 범인일 수도 있거나 억울한 피해자일 수 있다.

 

전통적 추리소설의 원칙에서 벗어난 점과 아울러 이 작품은 죄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법률을 위반하는 죄는 응당 법적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반면 법적 기준에는 어긋나지 않거나 증거가 명백하지 않아 처벌할 수 없는 경우 우리는 그 사람의 무죄를 인정해야만 하는가? 병정 섬에 초대받은 열 명의 손님들처럼. 무죄 인정에 동의하지 못한다면 그를 심판할 기준은 무엇이고 심판과 집행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할 것인가?

 

제 말은 그 사실이 이 병정 섬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설명해 준다는 겁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의 범죄는 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겁니다. 예컨대 로저스 부부의 범죄가 그렇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인을 저지른 워그레이브의 경우가 있지요. (P.131)

 

대상자의 처지에서 바라보자. 그들 중에는 목소리의 기소 죄목을 인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도 있다. 인정하지 않는 인물은 혐의 자체를 부인하거나 혐의는 받아들이더라도 그것의 범죄성을 거부하거나 한다. 살인죄를 인정하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행위의 경중, 고의성의 존재 여부 등이 제각각이다. 로저스 부인과 에밀리 브렌트, 그녀와 앤터니 매스턴 간의 간극은 머나멀다.

 

오웬의 의도는 심정적으로 독자의 암묵적 동의를 요구하지만 그것에 다소간의 불쾌함이 섞여 있음은 처벌 기준과 집행 수단이 매우 자의적이라는데 있다. 열 꼬마 병정 자장가 속의 순서에 맞춰 잇따라 손님들의 죽음이 발생하자 나머지 손님들은 불안과 공포에 쫓긴다. 죽음의 자리는 냉혹하다, 대상자는 자기변호를 하거나 집행자가 누구인지 미처 알기도 전에 참혹하게 최후를 맞이한다.

 

법이 처벌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공명정대한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한다는 이 계획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계획을 성공적으로 달성하는 길은 한 가지 밖에 없소. 오웬이라는 자가 직접 이 섬으로 올 수밖에 없는 거요.

결론은 명백하오. 오웬이라는 자는 우리 중의 하나요...... (P.168)

 

고립된 섬, 샅샅이 수색해도 그들 외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곳. 살인자는 미치광이인 동시에 그들 중 일원이라는 판단이 그들 자신을 더욱 괴롭히고 서로 간의 유대와 협력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이성과 인정이 사라진 곳에서 사람은 동물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오직 생존 욕구와 본능에 따르게 된다. 무죄가 증명되고 의심의 눈길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시체가 되는 방법뿐.

 

겉치레 같은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예의상의 대화 같은 것도 없었다. 그들은 자기 보호라는 공통적인 본능으로 묶여 있는 다섯 명의 적일 뿐이었다.

그러자 그들 모두가 갑자기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들의 모습은 동물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P.232)

 

동요 속 예언이 차례차례 실제로 이루어짐에도 사람들은 살인범의 실체를 알 수 없고 섬을 탈출할 희망도 품지 못한다. 오직 압박과 공포 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순서를 기다리며. 불안감에 잠조차 청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 통 아저씨 게임처럼 언제 나의 몸에 칼이 들어올지 모른다. 독자조차도 다음 희생자가 누구인지 살인자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미지수인 가운데 실타래가 조금씩 풀려나가고 흐트러진 구슬이 서서히 꿰매져 나중에는 정교한 자수와 아름다운 세공품이 만들어지는 듯한 효과를 작가는 설계하였으리라. 그만큼 뒤돌아보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떨어지는 가공할 세밀함에 몸을 떨게 된다.

 

모든 범죄자는 완전범죄를 꿈꾼다. 제아무리 많은 인력이 투입되고 오랜 시간이 경과해도 결코 풀어낼 수 없는 범죄의 실체. 해커와 화이트 해커는 동전의 양면이자 종이 한 끗 차이에 불과하다. 미궁에 빠진 병정 섬 사건의 범인을 보면 문득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한자 성어를 떠올리게 된다. 자신의 말마따나 범죄에 예술성을 논할 수 있다면 매우 높은 예술점수를 획득하였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직접 사람을 죽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예술가의 욕망과 다름없을 터! 나는 범죄의 예술가라고 할 수 있었다! 내 직업적 요구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된 내 상상력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무섭게 자라나고 있었다. (P.314)

 

작가는 이 사건과 살인자에 어떠한 도덕적 재단도 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묘사하고 기술할 뿐이다. 범죄란 행위는 목적의 정당성 여하와 관계없이 태생적으로 비도덕성을 내포하고 있는 법이다. 어떤 사안의 옳고 그름은 겉과 속이 다를 수 있으며 법적 판단에 따른 진실이 후에 뒤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워그레이브 판사의 사례에서 볼 수 있지 않은가. 게다가 열 명의 희생자들에 동정심을 갖게 할 요소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도 있다. 독자는 희생자와 살인자 모두에게 절반의 동정과 미움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재밌고 흥미진진하다. 점층적으로 강화되는 긴장과 흥분과 스릴감이란! 정교하게 짜 맞춘 퍼즐처럼 극도로 정교하게 세공한 작가의 솜씨는 과연 추리소설의 걸작이라고 불릴만한지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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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의 상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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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관점에서 셰익스피어의 가장 문제작이다. 작가 당대에는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을 텐데 이것을 보면 문학 해석에 있어 시대와 가치관의 변화가 갖는 의미를 한층 생생하게 다가온다. 더불어 예술의 외양을 한 꺼풀 벗길 때 내면에 드리워진 인간성의 진정한 의의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원제보다는 <베니스의 유대인>이 표제명으로 보다 적합하다. 아마 말로의 작품명과 유사성을 꺼리려는 조치일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작품 내에서 사건의 핵심인 동시에 유이하게 살아 숨 쉬는 캐릭터로서 샤일록의 압도적 영향력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바사니오와 안토니오는 유감스럽게도 그다지 매력적인 주인공이 못 된다. 샤일록과 포셔에 비교하면.

 

극 중에서 샤일록은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로 나온다. 샤일록에 대한 안토니오의 미움은 그가 우선 유대인이라는 사실이다.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유대인은 종교적으로 불구대천의 원수다. 이들을 향한 탄압의 결정판이 나치 히틀러임은 자명하지만 역사적 배척은 뿌리 깊다. 일상적인 생업을 가질 수 없게 된 그들이 금융업에 매진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극 중에서 샤일록은 고리대금업자로 비난받지만 그의 구체적 영업 행태는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에 대한 안토니오의 비난 대사만 등장할 뿐이다. 안토니오의 비난이 당대에는 정당하지만 현대의 시각에서는 터무니없는 비난에 불과함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 시각이라면 금융업은 존재의 의의를 상실한다. 결국 안토니오의 비난은 근본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차별적 인식의 소산이다.

 

(샤일록) 저자는 우리의 신성한 나라를 미워하고 / 상인들이 운집한 곳에서도 나와 내 장사와 / 정당한 내 소득을 이자라고 부르면서 / 욕을 했어. 내 민족이 저주를 받더라도 그를 용서 않으리라! (1막 제3, P.28)

 

(샤일록) 당신은 날 오신자, 무자비한 개라 하고 / 내 유대인 저고리에 가래침을 뱉었는데 / 그 모두가 내 것을 사용하는 대가였죠. (1막 제3, P.31)

 

(샤일록) 이유가 뭐냐고요? 내가 / 유대인이란 겁니다. 유대인은 눈 없어요? 유대인은 / 손도 기관도 신체도 감각도 감정도 정열도 없냐고요? (3막 제1, P.69)

 

작품 곳곳에는 유대인 차별과 멸시에 대한 샤일록의 억압되고 축적된 분노를 표출하는 대사가 등장한다. 누구라도 샤일록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분개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결국 안토니오를 향한 샤일록의 증오를 유발한 사람은 안토니오 자신이다. 그를 파멸시킬 욕심에 샤일록은 무리수를 감행하였고 그것은 포셔의 판결 덕분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 작품에서 유대인 차별을 강화하는 설정은 더 있는데, 샤일록의 딸 제시카다. 그녀는 기독교도 남자와 사랑에 빠져 가출한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재물을 갖고 도망치며 이에 대한 죄의식은 없다. 게다가 유대인으로서의 아버지를 부인하고 오히려 비난한다.

 

(제시카) , 아버지의 자식임을 부끄러워하다니 / 내게는 이 얼마나 가증스런 죄인가! / 하지만 내가 비록 혈연으론 딸이지만 / 성향은 물려받지 않았어. , 로렌초, / 당신이 약속을 지키면 이 갈등을 끝내고 / 기독교인, 당신 아내, 둘 다 될 거예요! (2막 제3, P.47)

 

재판에서 진 샤일록의 전 재산은 몰수당한다. 베니스 시민의 정당한 생명을 노린 범법자로 취급받은 것이다. 이 혐의의 적법성 여부는 극 중에서 시비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어쨌든 샤일록이 그나마 일부 재산이나마 보전할 방법을 안토니오는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안토니오) 그 조건은 둘인데, 우선 이 호의의 대가로 / 그가 곧장 기독교 신자가 될 것이며 / 또 하나는 죽었을 때 소유한 모든 것을 / 사위인 로렌초와 딸에게 선물한단 기록을 / 여기 이 법정에서 남기는 것입니다. (4막 제1, P.114)

 

여기서 안토니오는 변함없는 유대인 혐오를 보여준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 안토니오와 바사니오 등은 인간미 없고 박제된 성격을 꾸준히 유지한다. 바사니오가 포셔와의 결혼을 추진하는 의도의 순수성을 확인해 보자. 작품의 주인공이 그들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샤일록과 다른 의미에서 매력적인 주인공인 포셔는 양면적인 모습을 지닌다. 남편에게 순종적인 전통적 여성으로서의 포셔와, 남편 친구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변신한 법학자 발타자르로. 발타자르는 샤일록의 계약서 맹신주의에서 약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빌미로 재판을 뒤집는 데 성공한다. 샤일록의 과도한 욕심이 부른 일대 참사라고 할 수 있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흠결을 찾아낸 발타자르, 즉 포셔의 날카로운 지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샤일록과 그라티아노 모두 발타자르를 공정하고 박식한 판관으로 거듭 평가한다, 전혀 다른 의미에서지만.

 

(샤일록) 계약서에 그렇게 지정돼 있습니까?

(포셔) 명시되지 않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오? / 그쯤은 자선으로 하는 게 좋을 거요.

(샤일록) 그런 건 못 찾겠소, 계약서엔 없소이다. (4막 제1, P.108)

 

바사니오는 재판 도중에 감정에 북받쳐서 해서는 안 될 발언을 하고야 만다. 제아무리 목숨이 경각에 달린 우정이 소중하다고 해도 아내와 사랑보다도 더 우위에 두는 발언은 예나 지금이나 금물이다. 이를 듣게 된 포셔가 발끈하는 건 무리가 아니다. 이후에 벌어지는 결혼반지를 둘러싼 우스꽝스러운 후일담은 결혼 생활에서 바사니오에 대한 포셔의 우위를 예고하는 서막이다.

 

이 작품은 단지 희극이라고 하기에는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작품 해설에서도 역자가 언급하였듯이 샤일록이라는 인물을 향한 우리의 평가는 다면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악인임은 분명하지만 비난보다는 오히려 동정의 마음을 갖게 되는. 유대인이라는 자리에 지금의 시점에서 흑인, 이슬람인 등 주류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지위에 놓인 사람을 대치하면, 세상을 향한 샤일록의 외침은 안토니오와 포셔 부부, 그라티아노 부부, 로렌초와 제시카의 유쾌하고 행복한 장면보다 독자에게 더욱 진한 인상과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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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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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었을 때는 못 느꼈던 절절한 감정을 가지는 걸 보면 역시 인생의 경험이 크게 작용함을 알 수 있다. 남녀 간의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을 공감하기엔 그 당시 나는 너무 어렸나 보다. 그들을 자신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파국으로 몰고 가는 무정한 운명의 의지도 너무나 크게 다가온다.

 

두 연인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역시나 양 집안의 근본적인 적대감이다. 단지 상대가 몬터규 가문이기에, 캐풀렛 가문이기에 미워하고 칼을 겨누는 척박한 환경에서 싹 튼 사랑의 가치를 로렌스 수사는 바로 알아차린다. 이들의 결합이 공인받는다면 베로나 시민들을 불안하게 했던 근심이 일거에 사라질 테니. 하지만 운명의 힘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머큐쇼의 죽음과 줄리엣의 가짜 죽음으로 촉발된 운명의 엇갈림은 그들에게 지상의 행복 대신 천상의 자리를 선사한다. 이 숨 가쁘게 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사건의 흐름은 로렌스 수사의 말처럼 가히 거역할 수 없는 힘의 작용이리라.

 

(로렌스 수사) 우리가 거역 못할 커다란 힘 때문에 / 우리 뜻이 좌절됐다. 자 여길 떠나자. (5막 제3, P.150)

 

<로미오와 줄리엣>의 가장 유명한 대목인 발코니 장면과 첫날 밤 대목은 사랑에 눈뜬 젊은 연인의 거짓 없고 열렬한 사랑의 언어가 가슴에 저며 온다. 이들이 원하는 건 단지 사랑뿐인데. 두 사람의 이름 자체는 허울에 불과한데. 오직 그들 자신이 진정한 본질인 것을.

 

(줄리엣) 로미오도 마찬가지, 로미오라 안 불러도 / 호칭 없이 소유했던 그 귀중한 완벽성을 / 유지할 거예요. 로미오, 그 이름을 벗어요. / 그대와 상관없는 그 이름 대신에 / 나를 다 가지세요. (2막 제2, P.53)

 

사랑했기에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 죽어서야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었던 두 사람. 비극임에도 더없이 아름다우며, 슬픔이 북받치는 가운데 평온한 기쁨이 스며드는 양가의 감정. 사랑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가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깨닫는다면 새삼스럽지는 않다.

 

우리는 작품 속 인물의 행동과 선택에 이러쿵저러쿵 촌평할 수 있다. 덜 성급하고 조금만 이성적 사고를 하였다면. 특히 티볼트와 머큐쇼에 대해서. 머큐쇼는 본인이 싸움을 촉발한 당사자임에도 칼에 찔려 죽어갈 때 양 집안에 여러 차례 저주를 퍼붓는다. 티볼트는 로미오를 향한 맹렬한 적개심으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다. 캐풀렛 노인조차도 로미오에 대한 세간의 평판을 인정하고 자제를 지시했건만. 친구 머큐쇼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한 로미오로서는 아마도 다른 선택은 온당치 않게 여겼으리라. 어쨌든 이들은 두 사람의 사랑과 비극을 더욱 극적으로 몰고 가고 빛나게 하기 위한 조역일 뿐이었다. 어찌 보면 극 중에서 억울하게 무덤에 묻히게 되는 파리스마저도.

 

이 작품에서 낮과 밤이 갖는 기능적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처음 만나는 때를 포함하여 그들의 사랑 고백, 첫날밤 그리고 무덤에서 사랑의 완성, 이 모든 게 밤에 이루어진다. 그들에게 밤은 둘만의 시간, 사랑이 지배하는 때라고 하겠다. 반면 낮은 미움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두 가문의 다툼은 낮에 벌어진다. 머큐쇼와 티볼트, 티볼트와 로미오의 결투도 낮에 발생한다. 캐풀렛 노인이 딸에게 결혼을 강요하는 때도 밤이 지난 후다. 이러한 밤의 의미에 대해 작품해설은 이렇게 설명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에게 사랑과 이별과 삶과 죽음은 주로 밤에 벌어지는 꿈 같은 생시이고 생시 같은 꿈으로 다가온다. (P.165)

 

이 작품은 매우 진지하고 열렬한 사랑과 그 슬픔을 다루면서도 분위기가 의외로 축 가라앉지 않고 반짝거리는 아름다움과 때로는 경쾌함마저 떠올리게 한다. 작가가 도처에 삽입한 재치와 해학이 넘치는 대목의 효과라고 하겠다. 비극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적나라한 유머는 독자 또는 관객이 극에 몰입하여 심리적으로 지치게 하는 걸 막는 의도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줄리엣의 유모, 머큐쇼, 그리고 하인 피터가 큰 몫을 맡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줄리엣을 통해 진정한 사랑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된다. 대상의 겉모습에 휘둘리지 않고 상황과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올곧게 자신의 사랑을 지켜가는 태도. 사랑에 지고지순한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미처 열네 살이 안 된 어린 아가씨가 성숙해지고 사랑의 본질을 발견한 것 역시 그들이 이루어낸 사랑의 효과라고 하겠다.

 

(줄리엣) 너그러운 마음으로 또다시 주려고요. / 하지만 가진 것을 주고 싶을 뿐이에요. / 아낌없는 내 마음은 바다처럼 끝이 없고 / 사랑 또한 같이 깊어 더 많이 줄수록 / 더 많이 생겨나요. 둘 다 무한하니까. (2막 제2,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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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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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연달아 읽다 보니 가슴 한쪽이 묵직하였는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다시금 가벼워짐을 느낀다. 이 희극을 쓸 때 셰익스피어의 심정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비슷한 시기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절절한 사연을 집필 중이었다고 하니. 이 작품의 주제어는 사랑이다. 라이샌더와 허미어, 드미트리우스와 헬레나의 두 쌍을 중심으로 테세우스 공작과 히폴리토 여왕, 오베론과 티타니아의 사랑이 곁들여진다. 극중극인 피라무스와 디스비도 사랑 얘기에 다름 아니다.

 

이 작품은 사랑의 다채로운 양태를 골고루 탐구하고 있다. 사랑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작가의 관심은 먼저 엇갈린 사랑의 바로잡기에 있다. 사실 남녀 간의 애정사에 있어 양쪽이 모두 진실한 사랑을 품고 있다면 가장 바람직하다. 라이샌더와 허미어의 사랑이 그러하다. 두 사람은 가족과 사회의 반대를 극복하기 위해 아테네를 탈출할 결심마저 품는다. 사랑의 힘은 이렇게 강력하다.

 

서로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데서 일은 꼬인다. 드미트리우스와 헬레나의 사례를 보자. 외모 등의 조건에서 헬레나는 허미아에 못지않음에도 드미트리우스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한때 헬레나를 향하던 그의 마음은 이제 허미아만을 향한다. 그것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다. 독자는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안간힘 쓰는 헬레나의 노력에서 애처로움을 느낀다. 오죽하면 헬레나가 이렇게 토로할 것인가!

 

(헬레나) 아이 참, 드미트리우스! / 당신의 잘못은 여성을 욕보이는 겁니다. / 우리는 남자처럼 사랑 놓고 못 싸워요. / 구애를 받아야지 하라고 만든 게 아니에요. (2막 제1, P.38)

 

사랑은 독점을 요구한다. 사랑은 공유하지 못한다. 따라서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의 비애는 커다랄 수밖에 없다. 묘약의 효과로 드미트리우스와 라이샌더가 오히려 자신에게 구애하자 헬레나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작당하여 불쌍한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하며 분개한다. 이 장면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독자는 감성지수를 확인해봐야 하리라. 그것은 우스움을 가장한 극한의 슬픔이다.

 

사랑의 결실을 이룬 부부간의 애정도 요정의 왕과 여왕의 냉전을 보면 순탄치는 않다. 극 중에서 벌어지는 온갖 해프닝의 발단은 결국 오베론이 퍽을 시켜 눈에 바르게 하는 사랑의 묘약 때문이 아니겠는가.

 

남녀가 모두 참된 사랑을 품고 있다고 해도 이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다. 라이샌더와 허미어는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달리 생각한다. 그는 딸이 자신의 결혼에 끝내 동의하지 않으면 죽음을 내릴 것도 불사할 정도로 강경하다. 피라무스와 디스비의 사랑도 행복한 결말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라이샌더도 극 중에서 참사랑의 길이 순탄치 않음을 탄식할 정도다.

 

(오베론) 잠자는 눈꺼풀에 그 꽃즙을 바르면 / 눈뜨고 처음 보는 생물에게, 남자든 여자든 / 미치도록 혹하게 만들 수 있단다. (2막 제1, P.35)

 

문제는 어렵게 성취한 사랑이 영원하리란 보장도 없다는 점이다. 참사랑의 어려움은 변심의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는 데 있으며, 외물에 의하여 사랑의 감정이 영향받을 수 있음이다. 오베론의 사랑의 묘약은 사랑과 미움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다. 여기서는 약물이지만 외모, 재력, 계급 등의 영향에서 완전히 무관한 사랑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이렇게 사랑의 감정과 대상은 가벼이 바뀔 수 있다. 예전 광고에서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고 했던 게 빈말은 아니다.

 

(라이샌더) 허미아에 만족을? 아뇨. 그녀와 함께 보낸 / 지겨운 순간들을 후회하는 바입니다. / 허미아가 아니라 헬레나를 사랑하오. (2막 제2, P.45)

 

사랑은 맹목적이다. 제삼자의 눈에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사랑도 당사자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오직 자신의 감정이 최우선으로 작용한다. 이 작품의 독자는 나귀가 된 바틈을 향한 티타니아의 사랑을 비웃을 것이다. 티타니아 자신도 묘약의 효과가 사라지자 자신의 행위에 당혹스러워한다. 하지만 그때의 감정 자체는 더없이 순수하였음을 우리는 부정하지 못한다.

 

(티타니아) 고상한 인간이, 다시 한 번 노래해요. / 내 귀는 당신의 가락에 쏙 반했고 / 눈 또한 당신의 형상에 사로잡혔으며 / 당신의 아름다운 미덕은 나에게 강제로 / 첫눈에 사랑을 말하고 맹세케 한답니다. (3막 제1, P.53)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즐거움과 기쁨을 독자에게 안겨준다. 엇갈린 사랑은 모두 제자리를 찾고 세 쌍은 각자의 연인과 결혼에 이른다. 요정의 왕과 여왕은 나란히 손을 잡는다. 장인들의 우스꽝스러운 희비극은 관객에게 웃음을 주며 특히 공작을 만족시킨다. 대단원을 마감하는 오베론과 티타니아의 제5막 제1장의 찬가는 이 작품의 희극적 성격을 잘 나타낸다.

 

모든 게 잘 되었으니 이걸로 충분한가? 눈 부신 빛 속에 한 가닥 그림자가 서려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랑 자체가 정상 상태가 아니라 이상 상태, 나아가 일종의 열병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꿈에서 열병에서 깨어나면 사랑은 여전히 아름답고 행복할지.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베론) 그들이 다음에 깨어나면 이 모든 웃음거리 / 꿈이나 무익한 환영처럼 보일 거고 (3막 제2, P.73)

 

(드미트리우스) 우리가 확실히 / 깨 있긴 한 거야? 난 아직도 우리가 잠자고 / 꿈꾸는 것 같아. (4막 제1,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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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9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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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는 비겁한 인물이 아니다. 반란군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칼에 제압하는 그에 대한 모든 이들의 평가는 왕의 친척으로서 충성스럽고 장군으로서 용감하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의 굽힐 줄 모르는 용기는 마지막 장면까지 이어진다. 예언의 실현으로 자신에게 이미 가망이 없음을 알지만 그는 자신을 포기하거나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맥베스) 던시네인 언덕으로 버남 숲이 오기는 했지만 / 대적하는 네놈이 여자 소생 아니긴 하지만 / 난 끝까지 해보겠다. 이 도전의 방패를 / 내 몸 앞에 던진다. 덤벼라, 맥더프. 그리고 / “멈춰.”라고 하는 놈은 지옥에나 떨어져라! (5막 제8, P.131)

 

충신 맥베스를 반역의 길로 이끄는 것은 마녀들의 예언이다. 그들의 예언이 제아무리 그럴 듯해도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면 맥베스의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두 번째 예언이 사실로 확인되자 맥베스의 잠재된 권력욕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유혹의 속성이 본래 그러하다. 살짝살짝 건드려서 감질나게 만들어 조금만 더 하면 손에 잡을 수 있으리라는 충동에 이성을 놓고 덤벼들게 만드는 것. 도박에 패가망신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줄거리다. 이처럼 유혹에 취약한 인간의 본성, 그중에서도 권력욕을 다룬 게 <맥베스>.

 

(맥베스) 눈앞의 공포보다 / 끔찍한 상상이 더 무서운 법이다. / 살인은 아직도 환상에 지나지 않건만 / 그 생각이 내 온몸을 거세게 뒤흔들어 / 심신의 기능이 억측으로 마비되니 / 없음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1막 제3, P.26)

 

마녀는 그에게 왕이 되실 분이라고 했지 어떻게 왕이 될 수 있는지 방법은 언급하지 않는다. 덩컨 왕과 왕자들이 갑작스럽게 전사하거나 병사할 수도 있다. 그러면 맥베스는 자연스럽게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도 맥베스는 대뜸 살인을 상상한다. 그의 권력욕은 욕망 실현을 인내하지 못한다. 그에게 욕망이란 무조건 당장 실현되어야 하는 성격이며, 즉각적인 권력 쟁취는 곧 피비린내를 뜻한다.

 

(맥베스 부인) 이 일을 감행코자 했을 때 당신은 남자였고 / 전보다 더 과감해져 훨씬 더 큰 남자가 / 되려고 했어요. 당시엔 시간과 장소가 / 안 맞아도 당신이 맞추려고 했는데 / 저절로 맞춰지니 이젠 그 적절함 자체가 / 당신 기를 꺾는군요. (1막 제7, P.39)

 

옛말에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고 하였다. 외부의 유혹이 솔깃해도 내 마음이 평온하다면 물결을 일으키지 못한다. 우리가 유혹에 끌리는 것은 내 마음속 깊이 욕망이 자리 잡고 있으며, 때마침 유혹이 이 욕망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혹의 주체가 초자연적인 존재이며, 주변의 부추김이 더한다면 어지간한 당사자는 초연하게 있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맥베스처럼. 그렇기에 독자는 이 모든 비극의 사단이 맥베스 자신에게 있음을 알면서도 그의 파멸에 한 가닥 안타까움을 품게 되는지 모르겠다.

 

모든 왕위 찬탈자가 비극을 맞이하지 않는다. 맥베스가 왕위에 오른 후 선정을 베풀었다면 그토록 허망하게 권좌를 잃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극 중의 대화 장면을 통해 맥베스가 폭군이 되었고, 대다수 신하와 백성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맬컴이 아닌 누가 와도 그는 버텨내지 못하였으리라. 맥베스는 권력을 탐했지만, 무엇을 위한 권력인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한계다.

 

(모두) 고운 건 더럽고 더러운 건 고웁다. (1막 제1, P.14)

 

(맥베스) 이렇게 더럽고 고운 날은 본 적이 없구려. (1막 제3, P.20)

 

더럽고 곱다라는 역설적인 표현이 되풀이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작가는 이 표현의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며 그것을 제때 제 곳에 정확히 사용한다. 인간의 내면은 완전한 순수와 완전한 불순의 중간 어디쯤이다. 이성과 야만, 아름다움과 추함 등 상반되는 요소들이 혼재된 게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네 자신도 맥베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맥베스의 처지에 있을 때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자신할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네 삶 자체가 모순과 상충의 연속이다. 이것이 조화와 안정을 이룰지 아니면 불화와 불안한 상태로 돌변할지는 자기 자신과 환경에 좌우된다.

 

맥베스는 권력의 욕망에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허약한 인간의 전형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그의 잔인과 비열에도 불구하고 그를 저버리거나 매도할 수 없다. 그것은 스스로를 과신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기에, 맥베스가 그러했듯이.

 

<햄릿>, <오셀로><맥베스>를 연달아 읽어나가면서 셰익스피어가 원숙기에 쓴 일련의 비극은 인간 본성의 불완전한 내재적 본성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다. 햄릿의 유명한 망설임, 오셀로의 죽음에 이르는 사랑, 그리고 맥베스의 치명적 욕망. 독자는 탄식하거나 분개할 수는 있지만 달관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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