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셀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셀로>를 읽다 보면 연약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표출되어 가슴 한쪽이 시리다.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의 파멸은 오로지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며, 그들 주변에 이야고 같은 악인이 존재한다는 사실 외에는 달리 설명이 불가능하다. 혹자는 말한다. 굳건하고 진정한 사랑은 어떤 유혹도 이겨낼 수 있다고. 그만큼 오셀로의 사랑이 견고하지 못하였다는 뜻일까. 오죽하면 삼인성호(三人成虎)와 증삼살인(曾參殺人)라는 한자 성어가 있을지 새겨볼 필요가 있다.

 

옮긴이는 오셀로의 비극이 사랑과 질투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방식 때문에 발생했다고 작품해설에서 밝힌다. 어디 오셀로뿐이겠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과 질투에 극단적으로 반응한다. 애증은 동전의 양면이기에 애정이 깊을수록 증오도 커질 수밖에 없다. 이를 초월할 수 있는 사람은 성인이다. 이 작품에서 데스데모나가 그러하듯이. 불행하게도 오셀로는 우리네 같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이야고) 무어인은 내가 그를 아무리 못 참아도 / 변함없고 고귀하며 애정어린 본성을 가졌고 / 내 감히 생각건대 데스데모나에게는 / 정말로 소중한 남편이 될 것이다. (2막 제1, P.75)

 

오셀로라는 인물 자체의 내적 탁월함은 이야고조차 인정할 정도다. 몬타노는 그를 훌륭한 총독, 완벽한 군인으로 상찬한다. 4막 제1장에서 로도비코의 탄식은 오셀로에 대한 베니스 정부의 평가가 어떠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비극은 외견상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결합에 내재한 것으로 봐야 한다. 오셀로가 무어인이 아니라면 이런 결과로 이어졌을까에 대해 의문스럽다. 작중에 무수히 반복되는 오셀로에 대한 무어인이라는 호칭. 직접적인 비난이 아니더라도 호칭 자체가 이미 비하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하물며 이야고와 브라반시오는 각각 그를 검은 숫양, 시커먼 악마로, 숯검정으로 대놓고 경멸적으로 모욕적 언사를 내뱉는다.

 

(오셀로) 아마도 내가 검고 안방 출입 한량들의 / 능숙한 사교술이 없기 때문이거나 / 내 나이가 황혼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 하지만 깊이 들어간 건 아닌데- / 그녀는 떠나갔어. 난 속았고 내 위안은 / 그녀를 증오하는 것이야. 오 결혼의 저주여, (3막 제3, P.114)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의 사랑은 공인받고 떳떳한 부부 관계로 이어지지만, 오셀로조차 인정한 자신의 약점이라는 내재적 불안이 완전히 해소된 것이 아니라 단지 수면 아래로 잠복하였을 뿐이며, 이야고에 의해 의식 세계로 끌어올려 진다. 이제 그는 데스데모나에 대한 의심 앞에서 왜소하고 초라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이 불안이 고귀한 오셀로를 서서히 좀먹고 그는 이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단연 문제적 인간은 이야고다. 그는 전형적 악인으로 소임을 다하는데 그 악행은 특별한 계기가 없다는 점이 이채롭다. 모두에게는 정직한 이야고로 불리지만 사실 이야고는 타고난 악인이다. 그는 서두에서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다.

 

(이야고) 그들은 복종하는 태도와 안색을 보이지만 / 속마음은 자기네 자신들만 보살피며 / 높으신 분들에게 봉사하는 척하지만 / 그들을 이용하여 착실히 번성하고 / 자기네 실속을 두둑하게 차렸을 땐 / 자기 자신들에게 충성을 맹세한단 말입니다. / 그런 친구들은 기백이 살아 있고 / 전 제 자신이 그런 사람임을 공언합니다... (1막 제1, P.26)

 

극 중에서 이야고는 자신이 오셀로를 파멸시키려는 이유를 자신의 부관 승진 실패와 오셀로가 자신의 부인과 부정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의심에 대한 복수로 설명한다. 이것이 전혀 근거가 없음은 독자가 누구보다 잘 안다. 특히 후자는 완벽한 망상이다.

 

이야고는 낮은 신분상 부관 승진을 꿈꾸는 것 자체가 언감생심이다. 후에 부관 카시오가 오셀로의 후임으로 키프로스 총독에 임명되는 점을 상기하자. 한편 이야고의 아내 에밀리아의 정조는 제4막 제3장의 데스데모나와 대화에서 명백하다. 여기서 그녀의 페미니즘에 입각한 남성 비판은 또 다른 흥밋거리다. 데스데모나에 대한 에밀리아의 충심도 주목해야 한다. 최후의 순간 그녀는 불의한 남편을 거스르고 절규와 폭로로 가려질 뻔한 진실을 백일하에 드러내 놓는다.

 

(오셀로) 제발, 저 악마 인간에게 물어봐 주시겠소, / 왜 그렇게 내 영육을 덫에 몰아넣었는지?

(이야고) 나에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마시오, / 당신이 아는 건 알고 있을 테니까. / 난 지금부터 한마디도 안할 거요. (5막 제2, P.195)

 

이야고는 자신의 행위의 진정한 의도에 침묵한다. 이로써 관객은 영원히 진상에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옮긴이는 작품해설에서 이야고의 악행을 존재론적으로 설명한다. 이야고는 태생적으로 악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으며 계속적 악행이야말로 그의 존재 이유라고 한다. 정말 이대로라면 그는 악마 그 자체라고 하겠는데 정말 그럴까?

 

우리는 가련한 희생자 데스데모나를 기억해야 한다. 자칫 그녀의 비극적 운명에 함몰되어 그녀가 가녀린 여성이 아님을 망각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놀랍고도 이질적인 결합”(P.223)을 이루어 냈으며, 이 과정에서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였다.

 

무엇보다 그녀는 오셀로에 대한 사랑을 한순간도 저버린 적이 없다. 비록 그의 손에 죽어 가면서조차도. 지고지순한 데스데모나!

 

(데스데모나) 난 죄 없이 죽는단다.

(에밀리아) , 누가 이런 짓을 했나요?

(데스데모나) 누구도 아니고 내가 했어. 안녕. / 친절한 주인님께 안부나 전해줘. , 안녕! (5막 제2, P.187)

 

다시 오셀로로 돌아가자. “설명과 극찬을 능가하는 아가씨”(2막 제1, P.64) 데스데모나의 사랑을 얻고 결실을 이룬 오셀로의 행복감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데스데모나를 사랑하기에 그녀를 죽여야 하는 오셀로의 슬픔은 제5막 제2장의 절규에서 절정에 이른다.

 

(오셀로) 죽어서도 이렇다면 난 너를 죽여놓고 / 그 후에 사랑하리. 한번 더. 이제 마지막으로. / 이렇게 치명적인 향내는 절대로 없었어. / 난 울어야 하지만 내 눈물은 잔인하다. / 이 슬픔은 진정 사랑하기 때문에 내려치는 / 천벌과 같구나. (5막 제2, P.181)

 

극도의 절망과 분노로 아내를 죽인 오셀로가 자신이 간계에 빠졌고 그녀는 아무 죄도 없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음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오셀로의 슬픔과 회한을 섣불리 짐작할 수 없다. 동일한 수준의 극한 감정을 경험한 자가 아니고서는.

 

(오셀로) ......당신은 / 무분별하게, 너무 많이 사랑한 사람을, / 쉽게 질투하진 않지만 일단 빠지면 / 극도로 혼란되는 사람을, 자기 손으로 / 자기네 부족보다 더 값진 진주를 던져버린 / 비천한 인디언과 같은 사람을, / 부드러운 분위기에 익숙하진 않지만 / 차분히 가라앉은 두 눈에서 눈물을 / 미르라나무가 약용 진액을 흘리듯이 / 줄줄 쏟아내는 사람을 말해야만 할 것이오. (5막 제2, P.197-198)

 

결국 오셀로의 잘못은 너무 많이 사랑한 데 있었나 보다.

 

앞서 읽은 <햄릿>과 마찬가지로 옮긴이는 대사 전체를 운문으로 번역하였다. 원작의 무운시로서의 본질을 상기시키고 작품의 운문적 성격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이다. 그동안 산문으로서의 셰익스피어에 익숙한 독자로서는 처음에 낯설게 다가오지만 점차 묘한 매력과 재미에 빠져듦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도로 읽는다 미스터리 세계사 지도로 읽는다
역사미스터리클럽 지음, 안혜은 옮김, 김태욱 지도 / 이다미디어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호기심을 자극하는 표제에 유혹당해 책장을 펼친 독자라면, 특히 그가 나름대로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면 실망감을 품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모두 43편의 세계사의 미스터리한 대목을 소개하고 있다. 이백삼십여 면 정도의 분량에 채워 넣다 보니 각 사례는 평균 5페이지 남짓의 분량을 할당하는 데 불과하다. 따라서 이 책은 단지 사례를 소개하는데 의의를 지닐 뿐 심화된 내용을 독자에게 풀어주지 못한다. 독자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보다는 살짝 스치는데 만족한다는 뜻이다.

 

지은이는 일본의 역사미스터리클럽인데 소개에 따르면 이 분야의 굉장한 전문가 집단으로 판단되는데, 구체적 정보는 미스터리 자체다. 소개 문구를 신뢰한다면 학회에서도 인정받을 정도의 실력이라고 하는데, 이 책의 성격상 그들의 진정한 솜씨를 확인하기 어렵다.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대륙별로 장을 나누어 미스터리 사례를 배정하고 있는데, 간혹 배정 기준이 모호할 때가 있다. 예컨대 노아의 방주와 카파도키아 사례는 유럽 편에 들어 있는 반면 솔로몬 신전과 시바의 여왕, 소돔과 고모라, 수메르인의 사례는 아프리카 편에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소개하는 미스터리는 대체로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연원이 오래되어 그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한 신비한역사적 현상이다. 다른 하나는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아직 실체에 접근하지 못하는 미스터리로서의 역사적 사건이다. 후자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는 것과 유사한 믿거나 말거나 유형에 가깝다.

 

이 책에 두 가지 면에서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우선 대중적으로 식상한 소재도 있지만 이런 미스터리 사례를 처음 접하는 독자로서는 흥미로운 대목도 제법 있다. 나로서는 프리메이슨, 예카테리나 궁전의 호박방, 적벽대전의 적벽, 타이타닉 호, 링컨 암살 사건, 메인 호 폭발 사건, 소돔과 고모라, 흑인 왕국 쿠시 등이 유달리 관심을 끌었다. 이 책이 내세우는 특징은 바로 지도에 있다. 사례마다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 자료는 물론 공들인 지도 자료를 추가하여 문자만으로는 이해가 어려운 사례를 보다 용이하게 파악하도록 도와준다. 예를 들면 시바의 여왕의 출처와 관련하여 사우디아라비아, 예멘과 에티오피아 지도를 통해 시각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예카테리나 궁전의 호박방의 행방을 다루면서 독일과 소련 지도 위에 추정 이동 경로를 보여준다.

 

이 책의 의도는 무엇일까? 역사상 미스터리 사례를 소개하면서 대중 독자들이 미스터리의 존재를 인식하게끔 하는 게 목적일까? 사례 소개로 개별적 사례에 더욱 깊은 관심과 흥미를 느끼고 미스터리 탐구에 동참하기를 기대하는 데 있는 걸까? 무엇이 되었던 의도의 성공 여부는 판단하기 어려운데 대개의 독자는 아 그런 게 있구나 하고 가볍게 넘어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옥에 티는 만리장성 편에서 진한 대의 장성이 한반도에 걸쳐 있게 그린 지도에 있다. 감수자 없이 단순 번역과 지도 제작을 진행하다 보니 발생이 불가피한 오류라고 하겠다. 이 책에 진지한 신뢰성을 부여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식탁 위의 세계사 창비청소년문고 5
이영숙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앞서 읽은 <옷장 속의 세계사>와 마찬가지로 의식주의 세계사기획물 중 음식을 주제로 한 책이다. 순서로는 이 책이 먼저 나왔고, 이 책의 성공으로 후속물이 이어지게 되었으니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느니만큼 흥미 유발이 매우 중요한데, 먹을거리는 분명히 관심을 끌 만한 소재임이 확실하다. 방송과 유튜브 등에서도 소위 먹방이 조회 수가 높듯이.

 

의식주 중 의 중요성은 나머지를 압도한다. 옷과 집은 부족하더라도 생명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의 결핍 내지 부족은 인간의 생존 자체를 위협한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품위와 존엄성 자체와 연결되어 있기에 그만큼 음식에 관련된 세계사의 내용은 처절하며 절박하다.

 

감자 대기근의 역사적 아픔은 아일랜드 사람들의 영국에 대한 원한을 되새기게 할 뿐만 아니라 식민 체제의 잔혹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제국주의 탐욕은 같은 인종조차도 거리낌 없으며, 감자와 나중에 소개되는 옥수수를 통해 동일한 사회에서도 계급적 차별을 분명히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생존이 달린 식량이지만 자본주의 관점으로는 사료이자 원료일 뿐으로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썩어 버릴지언정 고른 배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역사상 빈부의 격차와 비인간적 행위에 대해 오늘날 우리는 응당 비판적 인식을 갖지만 그것이 당대에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하다는 현실 의식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우리가 식량의 세계사적 의의를 새삼 눈여겨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에 소개된 식재료를 살펴보면 콜럼버스와 연관된 품목이 꽤 된다. 감자, 옥수수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으로 건너갔으며, 포도는 거꾸로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넘어갔다. 그리고 후추는 콜럼버스가 대항해를 시작한 목적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이러한 교류의 장을 연 콜럼버스에게 감사를 표해야 마땅하겠지만, 소위 신대륙 탐험 이후 역사 흐름을 보면 결코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 콜럼버스의 날을 폐지해야 한다는 움직임은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제국주의 식민 체제와 긴밀하게 결부된 품목들도 있는데, 소금, 바나나, 차가 그러하다. 간디의 소금 행진을 통하여 인도 사람들은 식민 지배를 벗어날 계기를 찾게 되었지만, 바나나를 포함한 열대작물을 독점하는 다국적 기업의 전횡적 횡포는 여전하기에 가슴 아프다. 인간의 탐욕은 무한하고 맹목적인 게 아편 전쟁의 비극으로 드러난다. 마약을 팔아먹기 위해 전쟁을 벌일 정도이니 과거 제국주의의 무도함이란!

 

이 책은 기존의 잘못 알려진 통설을 바로잡으려는 노력도 보여준다. 프랑스 대혁명의 상징인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세간의 오해, 시대를 잘못 타고난 미국의 후버 대통령은 좀 더 자세히 검토해야겠지만 표면적 사실에 휩쓸릴 경우의 오류를 깨닫게 한다. 한편 흐루쇼프는 굉장히 의외인 것이 스탈린 사후 데탕트의 주역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소련 인민의 삶의 개선과 세계 평화 유지를 위한 노력은 처음 알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리엔트 특급 살인 -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 원작 소설, 공식 출판작,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신영희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소설을 처음으로 읽다. 워낙 명성이 자자했지만 저작이 방대한 만큼 일단 빠졌다가는 헤어나질 못할 걸 우려하여 그동안 주저하였다. 특정 저자의 책을 읽기 시작하면 가능하면 섭렵하려고 하는 개인적 독서 습관의 부작용이다.

 

각설하고 푸아로는 특이한 유형의 탐정이다. 셜록 홈즈가 지성과 행동이 조화를 이루었다면 푸아로는 전적으로 지성에 의존한다. 이 작품에서도 의자에 기대앉아 추리만으로 진실을 밝혀낸다”(P.266)는 게 농담의 소재가 되었지만 나중에 이것이 사실임을 스스로 입증하였다. 푸아로도 자신의 특장점을 이렇게 말한다.

 

의사 선생, 보시다시피 난 전문적인 수단에 의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잘하는 것은 사람의 심리 분석이지 지문이나 담뱃재 채취가 아니죠. (P.94)

 

이 작품은 푸아로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될 환경이 조성되었으니, 폭설로 고립된 열차 안에서의 살인사건이다.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고 범인이 빠져나갈 수 없으므로 열차 승객이 모두 용의자가 된다. 범죄 수법을 보건대 범인은 단독범이 아니라 복수라는 것이 확인되는데 승객 모두는 각자가 치밀한 알리바이를 제시한다. 오로지 승객의 진술과 자신의 회색 뇌세포에 의지하여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야 하는 어려운 과업인 동시에 푸아로의 능력을 최대로 드러낼 수 있는 기회.

 

이번 사건의 경우 재미있는 점은 우리에게는 경찰이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이 없다는 겁니다. 우린 사람들의 증언이 진짜인지 조사해 볼 수 없습니다. 추론에 의지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내게는 훨씬 더 흥미롭긴 합니다. 보통의 수사 활동은 전혀 없어요. 오직 추리만 가능하지요. (P.209)

 

작가는 탐정으로서 푸아로의 뛰어난 능력이 저절로 얻어진 게 아님을 보여주는데, 사소한 사항도 놓치지 않으며 일상화된 그의 탁월한 관찰력이다.

 

푸아로도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뒤로 기대어 차분하게 식당차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거기에는 부크의 말대로 각기 다른 국적을 가진 다양한 계층의 열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푸아로는 그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P.41)

 

대개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대중과 독자의 동정을 사기 마련이다. 이 소설의 피해자는 전혀 반대다. 그의 숨겨진 신원이 밝혀지자 푸아로를 비롯한 모든 작중 인물은 오히려 그의 죽음에 긍정적 반응을 보인다. 대놓고 기쁨을 표시하는 승객마저 있을 정도로 그는 악랄한 범죄자였던 것이다. 푸아로조차도 자신을 경호해 달라는 요청을 거부할 정도로 라쳇은 기분 나쁜 악인의 냄새를 풍길 정도이니. 라쳇에 대한 첫인상을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레스토랑에서 그 사람이 날 스쳐 지나갈 때 기묘한 인상을 받았답니다. 마치 야수가, 아주 사나운 동물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P.31)

 

비교적 느슨하게 흘러가던 작품의 전개는 푸아로가 승객 전원과 차례로 면담을 거치면서 후반부에 급격하게 굽이친다. 간과되기 쉬운 미세한 틈을 발견하고 파헤쳐 자그마한 실마리를 찾아내고 이 실마리를 통해 또 다른 허점을 찾아낸다. 이 과정이 도미노처럼 이어지며 흐트러져 있던 퍼즐이 조각조각 맞춰나가는 대목을 읽다 보면 푸아로의 치밀한 추리와 창의적 추론에 감탄하게 된다.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을 바라보듯 그의 지적 매력에 황홀하게 빠져들 정도다. 작가 크리스티의 명성이 허명이 아니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이상한 일입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오늘 밤에 여행하기로 작정한 모양입니다! (P.33)

 

그저 우연일 뿐입니다. 우연히도 많은 사람들이 오늘 밤에 여행하기로 작정했나 봅니다. (P.34)

 

기실 초반부에서 작가는 중요한 복선을 깔아둔다. 비수기임에도 만석이 된 오리엔트 특급의 일등실. 호텔 지배인도, 철도회사 중역인 부크도, 그리고 차장조차도 당혹스러운 상황이다. 정말로 보기 드문 우연이라고 할밖에. 그러나 푸아로의 생각은 다르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관련되어 있었던 겁니다. 암스트롱 사건과 관련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연히도 같은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일은 일어나기 힘든 정도가 아니라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우연이 아니라면 꾸민 일이겠지요. (P.328)

 

살인은 분명 범죄다. 살인범은 반드시 체포하여 법의 처벌을 받게 해야 함이 마땅하다. 탐정 푸아로의 역할이 그러하다. 그런데 피살자가 범죄자라면? 그것도 만인의 공분을 사는 악랄하기 이를 데 없는 죄를 저지른 경우. 게다가 교묘하게 법의 심판을 피해 유유히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용서할 수 있는가. 무엇이 정의이며, 무엇이 불의인가에 대한 판단의 기준은 분명한가. 이 소설은 독자에게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독자는 푸아로와 부크, 그리고 의사 콘스탄틴의 선택에 공감한다. 사람과 동떨어진 법은 존재 의의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방인 을유세계문학전집 105
알베르 카뮈 지음, 김진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읽는다. 아련한 기억에 따르면 당시 나는 이 작품을 옳게 이해하지 못하였다. 아직은 세상사를 이해하기 위한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여 이름값에 휩쓸린 매우 표피적인 감상에 불과하였다. 지금은....? 의외로 생소하거나 이질적인 요소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뫼르소의 사고와 행동, 그에 대한 사형판결이 대체로 이해된다고나 할까.

 

나는 그렇기는 하지만 실상은 그런 게 나한테는 이러나저러나 상관없다고 말했다......나는 결코 인생을 바꾸지는 못하며, 아무튼 모든 인생이 가치있고, 여기서의 내 인생도 전혀 마음에 거슬리지 않는다고 답했다......내 인생을 변화시켜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다. (P.54)

 

뫼르소는 타인과 굳이 관계를 맺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며 자기 자신의 일상생활에만 관심 있다.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발전시키거나 반추하는 모습은 없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그의 덤덤한 태도, 마리의 결혼 의사에 대한 그의 건조한 반응. 그렇다고 그를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할 수 없다. 삶에 특별한 매혹과 애정을 지니지 못한 그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노력이다. 단조롭지만 평온한 일상의 안분지족과 허무주의적 삶의 태도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그는 휘청거리고 있다. 그는 선구적인 현대인이다.

 

타인의 죽음이, 어머니의 죽음이 나한테 뭐가 중요해요? 당신의 하느님이나 사람들이 선택하는 인생, 그들이 고르는 운명이 나한테 뭐가 중요해요? (P.143)

 

뫼르소의 현대인으로서의 특성이 요즘이라면 그런가 하고 수용되겠지만, 이 작품이 발표된 1940년대라면 사정이 다르다. 전통적, 기독교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뫼르소는 별종이자 이단이다. 뫼르소의 생각과 행동은 사회 구성의 근본을 뒤흔드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의 반응에 대해 예심판사와 검사가 예민하게 반응하고 격렬하게 추궁하는 사유는 분명하다. 썩은 싹을 초기에 도려내지 못하면 전체로 퍼져나가 걷잡을 수 없이 되리라는 것을 그들을 본능적으로 예감한다. 아랍인의 살인 자체는 오히려 경미하다. 그의 반사회적, 반기독교적 가치관이 더욱 중죄다. 뫼르소에 대한 사형판결은 이로써 정당하다.

 

저 인간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은 마음의 공백이 하나의 심연이 되어 사회가 궤멸할 수 있을 때에는 특히 그러합니다. (P.122)

 

내가 한 사회의 가장 본질적인 규칙들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사회와는 아무런 유대가 없으며, 또 내가 인간 심성의 기본적인 반응조차 모르기 때문에 그것에 따를 줄도 모른다고 그는 공언했다. (P.123)

 

뫼르소는 햇빛 때문에 살인을 하게 되었다고 해명한다. 이 무슨 생뚱맞은 터무니 없는 변명이란 말인가? 당대 사람들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그의 주장을 배척한다.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기에. 독자라면 그의 해명에 타당성이 있음을 수긍하게 된다.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한 햇빛은 의식의 명료성, 이성의 합리성을 흐물거리게 한다. 그 순간 무언가에 의한 번뜩임과 충동적인 선택은 사후에 제아무리 뒤돌아봤자 설명은 요령부득이다. 뫼르소로서도 햇빛 외에 다른 사유를 대는 것이 불가능하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빛. 내리쬐는 햇빛은 강렬한 생명의 의지인 동시에 그 작렬하고 파열하는맹렬함으로 인해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자 동시성을 지닌 존재다.

 

2부는 법정 드라마로서 제1부보다는 훨씬 흥미진진한데, 당대 프랑스의 사법제도의 허울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검사와 변호사가 주고받는 공방전을 떨어져서 바라보는 뫼르소의 태도는 청중 및 독자와 다름없다. 법정은 뫼르소와 뫼르소가 저지른 살인 자체에 관심이 없다. 그들이 다투는 뫼르소는 뫼르소에서 타자화된 다른 뫼르소다. 재판에서 중요한 것은 뫼르소의 부도덕성이다. 장례식장에서 카페오레를 마시고 담배를 피운 것처럼 당대의 관습이나 도덕률에 위배된 행동을 한 그 자체가 되돌릴 수 없는 중죄의 증거로 제시된다.

 

나는 엄마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는 담배를 피웠다, 나는 잠을 잤다, 나는 카페오레를 마셨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뭔가가 법정 전체를 술렁이게 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는 내가 유죄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P.108-109)

 

뫼르소는 항소를 포기한다. 항소로 구할지도 모르는 구차한 삶에 큰 의미를 갖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신부의 면담도 거절한다. 종교는 자체의 독선성으로 그에게 특정 가치관을 강요하므로 그는 결코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가 신부의 옷깃을 거머쥐며 목이 터지라고 외치는 대목은 웅변적이다. 이렇게 뫼르소는 사회와도 종교와도 타협을 거부한다. 그에게 남은 길은 오로지 사형집행, 즉 죽음뿐이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이야말로 처절할 정도로 솔직하고 진실한 영혼 아니겠는가.

 

사형 집행보다 더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요컨대 그가 정말로 한 인간의 이해관계가 걸린 유일한 관심사다는 걸 어째서 나는 몰랐단 말인가! (P.131)

 

내게 남은 일은 나의 사형 집행일에 구경꾼이 많이 와 주기를 바라는 것, 그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이해 주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P.145)

 

이 작품에서 유독 주목되는 인물이 있는데 법정 안의 젊은 기자다. 그는 재판 내내 그를 주시하는데 사형판결이 확정되는 순간에 그를 외면한다. 뫼르소는 그 기자에게서 자신의 분신 같은 인상을 받는데, 또한 작가 자신의 분신이기도 하다. 카뮈가 기자 출신이라는 점을 상기해 보자. 법정이 어떻게 흘러가든지 작가는 뫼르소를 이해하고 있음을 기자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 책은 소설 본문 외에 50면에 가까운 방대한 주석을 추가하고 있다. 단순한 부가 설명에 불과한 예도 있지만 작품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깊이 있는 해석을 추가하고 있어 매우 유익하다. 또한 40면에 이르는 풍부한 작품해설도 새삼 독자가 이 작품의 심층적 이해를 할 수 있도록 제공한다. <이방인>같이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라면 매우 유용하다고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