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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참으로 오랜만에 <햄릿>을 다시 읽는다. 몇가지 스치는 생각을 두서없이 나열해 본다.
‘To be or not to be’의 해석
‘죽느냐 사느냐’라는 해석으로 워낙에 친숙하다. 엄밀히 말하면 순서를 바꾸어 ‘사느냐 죽느냐’가 올바르겠지만. 옮긴이는 다르게 해석한다, ‘있음이냐 없음이냐’(제3막 제1장, P.94)로. 주석을 통해 자신이 왜 존재론적 해석을 하게 되었는지 상세하게 부기한다.
이 대사를 읊조릴 당시의 햄릿의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유령이 알려준 덕분에 햄릿은 부왕 사망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은폐하기 위해 미친 척한다. 그럼에도 한가닥 의혹이 여전한데 유령의 말이 진실성에 대한 확신이다. 햄릿은 연극을 통해 왕의 반응을 알아보려고 준비한다. 그리고 제3막에서 이러한 대사를 내뱉는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도 엉뚱한 해석은 아니다. 바로 이어지는 장문의 대사는 죽음을 가벼이 여겨야 함에도 죽음의 두려움으로 그러하지 못함에 대한 비판과 자기 각오를 담고 있다. 햄릿은 철학자가 아니다. 극중 대사와 행동을 보면 그는 매우 재기발랄하고 해학적이며 연극에도 조예가 깊으며 오필리아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다정다감한 성격의 인물에 가깝다. 그런 그가 갑자기 생뚱맞게 존재론적 철학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위 대목을 존재론이 아니라 행동론으로 시각을 보는 게 현실적이다. 계획한 연극으로 유령의 증언의 진실을 확인했을 때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진실을 알면서도 그대로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고 행동으로 나설 것인가의 문제. 가만히 있으면 자신은 왕자의 지위를 유지하고, 다음 왕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다. 오필리아와의 사랑도 결실을 이룰 수 있다. 반면 행동에 나서면 이 모든 걸 잃게 되며 자신의 목숨도 버려야 한다. 즉 이 대목이 포함된 햄릿의 전체 대사는 자신의 행동 선택에 대한 갈등을 내포한다.
2. 햄릿은 우유부단한 인물인가
흔히들 햄릿형과 돈키호테형으로 인물의 성격을 양분할 때 햄릿형은 신중하지만 우유부단하다고 인식한다. 이 작품에서 과연 햄릿은 우유부단한 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초반부터 햄릿은 우울하게 등장한다. 부왕을 잃고 어머니가 삼촌에게 재혼한 그의 처지에서는 기쁠 일이 없으리라. 행동파라면 유령의 말만 믿고 바로 왕을 살인할 수도 있다.
햄릿은 보다 확실한 증거를 갖길 바란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걸어야 하는데 섣불리 유령의 말만 신뢰할 수 없다. 유령이 악마의 변신일지도 모르니. 연극의 반응으로 햄릿은 왕의 불의를 확신한다. 마침 왕이 홀로 기도할 때 그를 죽일 수는 기회가 찾아왔지만 햄릿은 실행하지 않는다. 기도 중에 죽이면 그가 천당으로 가게 될까 우려해서다. 그가 결코 구원받지 못할 때를 노려서 죽여야 비명에 가서 저승을 헤매는 부왕의 복수에 적합하다. 매우 신중하고 사려깊고 주도면밀하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너무 앞뒤를 잰다고 여길 수도 있다. 햄릿 또한 스스로를 책망한다.
(햄릿) 잔인하고 음탕한 악당! 아니, 이 무슨 못난이란 말이가! 거, 참으로 장하다. 고귀한 부친이 살해당한 아들, 천국과 지옥으로부터 복수를 재촉받은 내가 창녀처럼 말로만 내 가슴을 비우고, 순 잡년 잡놈처럼 저주를 퍼붓다니! 역겹구나! 퉤! (제2막 제2장, P.87)
(햄릿) 헌데 이 무슨 짐승 같은 망각인지, 혹은 결과를 너무 꼼꼼하게 생각하는 비겁한 망설임인지 – 그 생각을 쪼개봤자, 반에 반만 지혜이고 나머지는 비겁함이겠지만 – 난 내가 왜 이건 하리라고 살아 말하는지 모르겠다, 해치울 명분과 의지, 힘과 수단이 있음에도. (제4막 제4장, P.149)
햄릿과 반대적 인물은 레어티즈다. 그는 자신의 부친 폴로니어스가 죽음을 당하자 추종자들을 이끌고 성을 급습한다. 왕에게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하고 허튼수작하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부친을 죽인 인물이 햄릿을 알게 되자 그를 죽이기 위해 수단의 정당성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 레어티즈가 극중에서 마구 날뛰는 인물이 아니므로 그의 이런 과감성 내지 저돌성은 햄릿과 대비된다.
(레어티즈) 허튼수작 마라고. 충성 따윈 지옥으로! 맹세는 흑마왕에게! 양심과 은총, 저 끝없이 깊은 구덩이로! 저주도 불사하리. 내 입장은 이렇다. 이승 저승 상관않고 무슨 일이 닥치든지, 철두철미 아버님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 그 말이다. (제4막 제5장, P.157)
3. 왕비가 시동생과 재혼한 까닭은 무엇일까
부왕의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 햄릿을 더욱 비통하게 만든 것은 어머니 왕비가 불과 두 달만에 시동생인 왕과 재혼한 행위다. 원시부족의 형사취수제도 아닌데 이러한 선택은 기독교 국가에서는 인정받기 어려운 근친상간 행위다. 햄릿의 통렬한 비난도 무리는 아니다.
(햄릿) 아니, 그녀가 - 오 하느님, 이성 없는 동물이라 할지라도 더 오래 슬퍼했으련만 – 헤르쿨레스와 내가 다르듯이, 아버지완 생판 다른 내 삼촌 – 아버지의 동생과 결혼했어. 한 달 안에, 쓰라려 불그레한 그녀의 눈에서 가장 부정한 눈물의 소금기가 가시기도 전에 결혼했어 – 오 최악의 속도로다! 그렇게 민첩하게 상피붙을 이불 속에 뛰어들어! (제1막 제1장, P.25)
여기서 왕비의 선택을 헤아려 보자. 극중 햄릿의 나이는 이십대 초반으로 보인다. 제5막 묘지 장면에서 유추할 수 있는 나이는 삼십인데 이는 지나치게 많아 보인다. 어쨌든 햄릿의 나이로 보건대 왕비는 사십대 후반 정도일 텐데 미모로만 보자면 클로디어스가 굳이 형수와 결혼을 추진할 이유가 없다. 왕비 또한 새삼 정욕에 불타오라 도덕률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재혼을 감행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당시 덴마크의 왕위는 세습제가 아니라 선출제였다고 한다. 제5막 제2장에서 햄릿은 자신이 국왕 선출에서 낙마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햄릿이 삼촌을 더욱 싫어했는지도 모르겠다.
(햄릿) 자네 생각엔 내가 이제 내 임무로서 – 선왕을 시해하고 어머닐 더럽혔으며, 내가 희망했던 국왕 선출에 불쑥 끼고, 내 목숨을 노리고 그 따위 속임수로 낚시를 던진 놈을 – 이 손으로 빚갚음이 양심상 떳떳하지 않겠어? (제5막 제2장, P.192)
덴마크 국민과 신하가 그를 정당한 왕으로 인정하여 충성을 바치는 모습, 그리고 극중에 보이는 그의 올바른 국정 판단을 보건대 햄릿과 유령이 말한 대로 클로디어스가 그렇게 형편없지는 않다. 어쨌든 햄릿의 세력은 미미했고 클로디어스가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여 왕으로 선출되었다. 왕비 입장에서는 통탄할 일이다. 가족이 따로 언급되지 않는 걸 보면 클로디어스는 홀몸이다. 햄릿을 그의 유일한 아들로 만들면 다음 후계자 자리는 확고해진다. 클로디어스 처지에서도 전왕의 아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면 지위가 한층 공고해진다. 왕이 자신의 후계자가 햄릿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행위가 이를 입증한다. 왕이 햄릿을 제거하려고 계책을 꾸민 것은 햄릿이 자신의 지위를 불안하게 하는 행동을 하면서부터다. 한편 햄릿으로서도 슬픔과 불만은 있지만 이미 짜여진 판을 차마 뒤집지는 못하였다. 유령의 개입이 없었다면.
(왕) 바라건대, 무익한 비통을 땅에 던져버리고 나를 아버지로 생각해라. 왜냐하면 온 천하에 알리노니, 왕자가 내 왕위 계승자요,......내 격려와 위안 속에 나의 최고가는 중신이요 조카이며, 내 아들로서 여기에 머물기 바란다. (제1막 제1장, P.23)
4. 오역 ?
아래 문장에 따르면 부왕은 그리 훌륭한 왕이 아님을 햄릿 자신이 인정하는 꼴이 된다.
(햄릿) 아니, 이건 청부 살인이지 복수가 아냐.
놈은 아버지를 그가 육욕에 푹 빠지고
모든 죄악이 활짝 핀 오월처럼
싱싱할 때 앗아갔다. 그리고 하늘말고
그의 벌이 어떨지 누가 아랴? (제3막 제3장, P.125)
인터넷에서 찾아 본 원문은 이러하다.
O, this is hire and salary, not revenge.
He took my father grossly, full of bread,
With all his crimes broad blown, as flush as May;
And how his audit stands, who knows save heav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