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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골목 고양이 - 진정한 동물 영웅들 ㅣ 시튼의 동물 이야기 5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장석봉 옮김 / 궁리 / 2016년 2월
평점 :
여기에 수록된 여덟 편의 이야기는 전혀 새롭지 않다. 이전에 읽은 논장 판 5권 세트에 전편이 분산 수록되어 있고 당시 이야기 하나마다 적지 않은 즐거움을 누렸다. 오늘 개별적 논평을 다시 읽어보아도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으므로 새삼 하나하나 억지로 반복 기술할 생각은 없다. 다만 밝히고 싶은 점은 여전히 이 책의 이야기가 신선하고 재밌다는 사실이다.
시튼 동물기의 주인공은 대체로 야생동물이다. 순수한 야생동물이라면 이 책에 등장할 이유가 없다. 그네들의 삶과 죽음을 우리가 알 까닭이 없음에서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과 인간이 접촉하였고 인간에 의해 그들의 삶이 영향받고 관찰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가로놓였다, 인간과의 관계가 적대적인가 또는 우호적인가. 모든 동물이 야생은 아니다. 우리 주변의 일상적으로 대면하는 동물들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그네들의 내적인 삶을 정말로 잘 알고 있는지 정말 자신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 책에 나타나는 동물들은 이러한 유형 중의 어느 하나에 속하지만, 작가는 단언한다. 그들은 모두 영웅이라고.
인간과 동물의 접촉 및 갈등은 대개 인간이 자신의 생활 영역을 점차 확장해가는 과정에서 동물의 영역과 중첩되는 데서 발생한다. 아메리카들소가 인간에 의해 멸종하자 먹잇감이 사라진 ‘배드랜즈의 빌리’ 같은 늑대가 목장을 습격하게 되었다. 또는 인간의 간섭으로 먹이사슬 체계가 일거에 무너짐으로써 자연의 균형을 어긋나게 된 데서 문제의 발단이 비롯된 예도 있다. 카스카도 주의 멧토끼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까닭은 인간이 그들의 천적을 학살해 버린 데서 시작하였다. 도대체 “매와 올빼미를 사냥한 사람들에게 보상금을 주는 멍청한 법”(P.211)을 제정한 사람들은 제정신인가?
사람들은 원인을 차근차근 살펴보지 않는다. 당장 눈앞에 목도한 상황만을 문제시할 뿐이다. 늑대가 소를 잡아먹는다고? 그러면 늑대를 다 죽여라! 토끼들이 너무 많아 들판이 황폐해진다고? 그러면 토끼를 학살해라! 매우 단편적이고 즉흥적인 해법을 제시한다. 문제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은 외면한 채.
인간의 사냥과 학살에 대항하여 순전히 자신의 힘과 능력만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동물을 보면 절로 박수가 나온다. 게다가 비열한 수단으로 동물 영웅을 해치려고 하는 야비한 인간에게는 반감이 치솟는다. 정당한 대결의 규칙조차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란.
“페어플레이라고! 이런 게 너희들이 말하는 페어플레이야. 이 더러운 거짓말쟁이들, 이 치사한 겁쟁이들 같으니라고!” (P.230)
미키는 꼬마 워호스를 풀어주었고, 화자는 사냥개들을 몰살시킨 배드랜즈의 빌리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동정심이든 영웅에 대한 외경심이든 확실한 것은 인간 내면 깊숙한 데서 분출하는 감정이다.
늑대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녀석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 고귀하지만 짧은 길을 선택한 것이다. (P.292)
반면 ‘위니펙의 늑대’와 ‘전서구 아녹스’의 주인공에 대한 독자의 감정은 명백한 동정과 안타까움이다. 늑대는 위험을 감수한 채 굳이 위니펙에 머물러야 했을까, 지미가 그리웠다면 가끔씩 몰래 들러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등등. 아녹스도 마찬가지다.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반간지 않는 바람난 배우자밖에 없을 텐데 말이다. 차라리 그냥 주저앉아 편안한 삶을 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를 집으로 강렬하게 잡아당기는 것이 무엇일까, 그리움 아니면 본능?
집으로, 집으로, 즐거운 집으로! 아녹스보다 더 강렬하게 집을 사랑하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아녹스의 강렬한 본능은 옛 비둘기장에서 있었던 시련과 슬픔을 잊게 해 주었다. 창살 안에 갇혀 지낸 세월도, 새로운 사랑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그 힘을 내리누를 수는 없었다. (P.92)
뒷골목 고양이 키티는 다면적 요소를 담고 있다. 초라한 길냥이의 인생 역전 스토리. 길냥이가 왕족 고양이로 대접받는 장면에서 엿보이는 인간의 얄팍함과 우스꽝스러움. 키티의 선택을 통해 되묻게 되는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가에 대한 질문. 위니펙의 늑대, 그리고 전서구 아녹스와 마찬가지로 키티 또한 현재의 안온함과 풍요로움을 거부하고 뒷골목 고양이로 남는 길을 선택한다. 독자로서는 둘 모두의 행로에 다소간 공감하면서도 반드시 그러했어야 하는가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하다.
나머지 이야기는 전반적 분위기가 다르다. 하얀 순록의 이야기는 실화와 전설이 교묘하게 뒤섞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일단 지리적 배경이 미국과 캐나다가 아니라 유럽 대륙의 노르웨이라는 점에서 이질적이다. 그럼에도 썰매 끌이 순록을 비인간적으로 대우하는 처사에 대한 하얀 순록의 분노는 동물 모두의 공통적 감정일 것이다.
‘불테리어 이야기’의 스냅을 영웅으로 부를 것인지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것이다. 이 이야기의 분위기는 해학적인데, 화자가 자칭 개 전문가라고 하면서 첫 상봉 시 쩔쩔매는 대목이 그러하다. 사냥개들이 늑대를 구석에 몰아넣고 마지막 전투를 망설이는 대목에서도 결코 그들이 겁을 내는 게 아니며, 단지 숨을 고를 뿐이라고 강변하는 어절도 마찬가지다. 스냅의 맹목적 용기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유용하지만 개 자신에게는 무모하다. 현명한 사냥개는 늑대 사냥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지 않는다. 그런 개는 바보일 따름이다.
‘소년과 스라소니’의 대결은 진정한 야생의 세계를 보여준다. 인간이 야생동물에게 우위에 있는 것은 강력한 도구를 사용한다는 점에 있다. 노약자나 병약자가 포식자와 마주친다면 상황은 정반대로 진행될 수 있다. 이것이 엄혹한 자연의 법칙이다. 포식자 또한 자기 생명 유지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다. 작가가 스라소니를 물리친 소년이 아닌 죽임을 당한 스라소니를 영웅의 일원으로 취급한 까닭은 새끼의 생존을 위해 먹잇감을 구하려는 어미 스라소니의 처절한 노력에 마음이 쏠려서였을 것이다.
자연의 세계에서는 누구도 영속하지 않는다. 포식자든 피식자든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과정을 반복한다. 개체는 일생을 마치지만 종은 영속한다. 우리는 개체로서 불가피한 삶을 영위하지만 생명 자체의 소중함과 존엄성은 존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