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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부제 :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작가의 무게 방점은 부제에 놓여 있다. 언론의 선정적 보도의 결과가 개인의 명예를 실추시켰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오늘날의 폭력은 반드시 물리적 힘에 의존하지 않는다. 대중의 입방아에 올릴 수 있다면 진위 여부는 중요치 않다. 대중은 흥미 욕구만 충족시킨다면 보도의 진실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언론과 대중의 야합이 카타리나 블룸에게 폭력을 가한 셈이다.
이 소설은 작가의 목적성이 뚜렷하다. 실제 사건의 바탕에 작가적 상상력이 일부 가미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럼으로써 독자는 논픽션으로 이 작품을 심정적으로 인정한다. 여기에는 작가 자신의 모호한 태도로 일조한다. 그는 후기에서 이 작품의 소설적 성격을 부정하거나 제한적으로만 인정한다.
이것은 하나의 팸플릿이자 논쟁의 글로, 그 자체로 생각했고 계획했으며 그대로 실행에 옮긴 것이다......내가 바로 이 테러리스트 소설(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소설도 아니고 테러리스트도 등장하지 않는다.)을 썼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지만 않았다면 (P.147)
제목, 부제, 모토라는, 얼핏 보기에는 사소한 것 같은 이 세 가지가 이 이야기의 중요한 구성 요소다. 이것들은 이야기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이것들이 없다면 이 이야기의 팸플릿 같은 성향-이것은 사실 경향 소설이다!-이 이해되지 않는다. (P.151)
이것의 소설 여부를 떠나 중요한 점은 ‘언론의 자유’라는 무소불위의 방패에 의지하여 본질을 저버리고 타락한 언론매체에 의해 인권이 무자비하게 유린당하는 현실을 문학적 형식을 통해 적나라하게 까발렸다는 데 있다.
죽음을 맞은 베르너 퇴트게스와 아돌프 쇠너 기자는 개인적으로 억울하게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이 도대체 죽어야 할 당위성을 인정할 수 없을 테니. 대중의 알권리를 충족하기 위해 헌신한 대가가 고작 죽음이라니. 자신과 비슷하거나 훨씬 심한 기자들도 세상에 널려 있고 오늘날에도 여전한데 말이다. 퇴트게스의 후임자인 에긴하르트 템플러의 기사도 전임자와 차이점을 보이지 않는다.
<차이퉁>에 헤드라인과 센세이션을 제공하고 다른 신문에까지 ’진짜‘ 이야기를 제공하려 함으로써 그저 자신의 의무를 다했을 뿐인, 신문 기자의 이런 끔찍한 ’무지‘, 그렇다, 거의 아무것도 알지도 생각하지도 못하는 그의 무지함 (P.150)
요는 이러한 선정성과 센세이션을 도구 삼아 언론의 본질보다는 상업적 효과에 치중하는 상업 언론이 무자비하게 등장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이 상업성에 치중하다 보니 매출 증대에 도움이 된다면 진실 여부는 중시하지 않고 따라서 무수한 기레기들을 양산하게 되었다. 오늘날 언론은 기자와 기레기를 구분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혼재되어 있다.
진상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이 <차이퉁>의 모든 비방, 거짓말, 왜곡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도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 (P.122)
일개 젊은 여성 카타리나 블룸이 그렇게 화제가 되고 속속들이 파헤쳐진 연유가 오로지 미모가 결부된 상업성에 있다고 보기에는 지나치다. 언론의 입맛에 꼭 들어맞는 다른 사유가 있기 때문일 텐데, 빨갱이 투르데로 명확해진다. 카타리나가 일하는 블로르나 댁에서 부인이 좌파라는 점이 핵심이다. 까닭은 이 작품의 배경이 1970년대 초, 독일이라는 점을 유념하면 충분하다. 이데올로기가 사회의 지배적 가치구조를 이루던 당시, 좌파 세력이 사회의 유력인사가 되고 그들이 범죄자의 은닉과 부도덕한 여성을 후원하여 사회의 근간을 흔든다고 선동할 때 대중의 관심과 반응은 격렬해진다. 더욱이 그 여성이 정직한 노동의 가치를 무시하고 보다 손쉬운 수단으로 부를 축적하며 일말의 회개 없이 뻔뻔한 태도를 보인다고 한다면 그에 대한 대중의 반감과 분노는 한층 치솟게 마련이다. 이 모든 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언론의 과도한 작태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텐데 오로지 조작, 날조 그리고 선동으로 이루어낸 결과라고 할 때 그들에 면책을 부여하는 게 마땅할지 심히 의심스럽다.
그는 다음 면을 읽고, <차이퉁>지가 카타리나는 영리하고 이성적이라는 자신의 표현에서 “얼음처럼 차고 계산적이다”라는 말을 만들어 냈고, 범죄성에 대한 일반적인 입장을 표명한 말에서는 그녀가 “전적으로 범죄를 일으킬 수 있다”라는 말을 만들어 냈음을 알게 되었다. (P.38)
잔잔한 연못에 누군가 돌멩이를 던지면 한동안 파문이 일고 난 후 다시금 잔잔해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정말 그럴까? 나중에 나는 몰랐다, 의도는 순수했다, 단지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외쳐본들 정당화될 수 있겠는가. 블로르나 부인은 일자리를 잃었고 남편은 중심적 업무 대신 시답잖은 일거리만 주어졌다. 사업상 긴밀한 친구이자 동지는 그와 거리가 멀어졌다. 이쯤에서 되묻는다. 그들 부부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이 쓰레기를, 한 사람을 세상 끝까지 추적하는 이 빌어먹을 쓰레기’(P.87)가 빚어낸 결과다
이런 소재는 자칫 감정에 휩쓸리기 쉽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가 분명한 사안에서 글쓴이와 읽는이가 똑같이 흥분하면 역시 선동적 글쓰기에 지나지 않게 마련이다. 작가는 객관적이고 건조한 문체를 구성한다. 때로는 조소와 냉소를 날리지만 결코 감정의 고조를 용납지 않는다. 작가가 냉정할 때 독자가 더욱 몸이 단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작가는 배수 작업에 비유한다. 자신의 역할이 물빼기가 원활하게 되도록 하는 데 있다고 한정한다. 배수구의 물이 막히거나 고임 없이 안정적으로 흐를 수 있도록 정체된 웅덩이를 뚫는 일. 반복되는 작가의 차분한 배수 작업 비유는 언론의 과도한 흥분과 선동에 대조적이다. 그래서 더욱 ‘논쟁의 글’로서 성공적으로 되었다.
여기서 의도하는 바는 다름 아닌 일종의 배수 혹은 물 빼기 작업이다. 명명백백한 정리 과정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때때로 수면 차이나 수면 조절이 필요한 흐름을 타게 되더라도, 관대히 이해해 주길 바란다. (P.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