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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 외 ㅣ 세계문학의 숲 5
다자이 오사무 지음, 양윤옥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수록 작품>
1. 인간실격 (1948)
2. 물고기비늘 옷 (1933)
3. 로마네스크 (1934)
4. 새잎 돋은 벚나무와 마술 휘파람 (1939)
5. 개 이야기 (1939)
6. 화폐 (1946)
드물게 보는 치열한 사소설이다. 그동안 읽었던 일본 근현대 문학작품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한다. 작중에 배어있는 극도의 암울함, 처참함은 작가 고유의 것인지 또는 시대적 상황에 힘입은 것인지 궁금하다. 후자라면 태평양전쟁 시기 광란으로 치달아가는 당대 일본 사회에서 의식을 가진 이가 감내할 수밖에 없는 괴로움으로 해석하고 싶다.
타인, 불가해한 타인, 비밀투성이의 타인. (P.91)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타인과의 교류는 불가피하다. 타인이 내게 적대적인지 우호적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나의 전모를 공개하는 행위는 위험을 자초하므로 우리는 적당한 가면을 뒤집어쓴다. 대다수 우리는 이를 범상하고 일상적으로 받아들이지만 누군가는 다르게 반응한다. 특히 소심하고 예민한 요조같은 이는. 자칫하면 가정과 사회로부터 공격을 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 항상 바들바들 떨면서, 또한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의 말과 행동에 털끝만큼도 자신감을 갖지 못한 채, 그리고 나만의 깊은 고뇌는 가슴속 작은 상자에 감춰두고서, 그 우울과 긴장을 꼭꼭 감추고 또 감추며...... (P.19)
주인공의 위악과 일탈에 눈살을 찌푸리는 게 당연하다. 폭음, 흡연, 약물 그리고 여색. 요조의 심정을 너그러이 이해해주고 싶다고 하더라도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던 당위성에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더욱이 자살까지 시도할 정도로. 인간이란 존재는 연약하다. 누군들 살면서 한 번도 절망과 자포의 경험을 가지지 못한 이는 없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 반응의 차이가 있을 뿐 그때 무언가에 기대하고 의지하고픈 마음은 허물어져 가는 자신을 지탱하려는 최후의 방어선이다. 이를 국외자의 눈으로, 사후 평가자의 엄혹한 기준으로 재단하는 게 온당한가.
죽고 싶다. 아예 죽어버리고 싶다. 이제는 어떻게도 내 인생을 돌이킬 수 없다. 어떤 짓을 해봐도, 무슨 짓을 해봐도 나는 점점 더 나빠질 뿐이다. 부끄럽고 또 부끄러운 짓을 쌓아갈 뿐이다. (P.129)
사방을 둘러봐도 헤쳐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을 때 사람은 극단의 선택을 한다. 물론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실제 자살은 바닥이 아니라 바닥을 찍은 이후에 실행된다고 하지만. 일본 문화가 독특하여 자살을 일종의 미덕으로 간주하는 사례가 있지만, 어쨌든 생명을 담보로 하는 행위는 진지할 수밖에 없다. 그 동기와 과정에 대해서는 당사자 외에는 누구도 섣불리 왈가왈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표제어 ‘인간실격’은 주인공 요조가 주변 사람들에 의해 정신병원에 갇히면서 비로소 등장한다. 인간의 지위에서 실격당한 존재. 자신의 내적 진실을 향한 고뇌와 방황을 세상 사람들은 단순히 미친 것으로 판단한다는 사실. 미치지 않은 자신이 미친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다시 세상 사람들로부터 정상적인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리라는 사실. 이것이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절망감을 안겨준다.
이곳을 나가더라도 나의 이마에는 미친 사람, 아니, 폐인이라는 낙인이 찍히겠지요.
인간실격.
이제 나는 완전하게, 인간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P.132)
그리고 다자이 오사무와 요조가 이 대목에서 갈라진다. 현실의 다자이는 좌절하지 않고 어쨌든 사회로 복귀하여 작가로서의 이름을 후세에 전하지만, 작중의 요조는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갑니다.”(P.135)라고 체념하며 읊조릴 뿐이다. 철저한 패배라고 할 텐데 한 명의 광인을 바라보는 독자의 심경은 전혀 편치 않다.
후반부에 수록된 다섯 편의 단편은 신비적 요소가 두드러진 유형과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유형으로 양분된다. <물고기비늘 옷>과 <새잎 돋은 벚나무와 마술 휘파람>이 전자에 속하며, 후자로는 <개 이야기>와 <화폐>가 해당한다. 전자에서 작가는 일본 고유의 신화적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현대판 전설이라고 하겠다. 한편 <화폐>는 전후 일본 사회에 대한 현실 비판적 성격이 강하다. <개 이야기>와 <로마네스크>는 해학적 묘미가 뛰어난데, 내심과 외양의 불일치가 빚어내는 역설적 효과가 돋보인다. 개를 싫어하는 주인공이 맘에 들지 않는 개를 키울 수밖에 없도록 내몰리고 마침내는 응원하게 되는 상황이 작가 특유의 이율배반적 전개와 잘 어울린다. <로마네스크>는 선술, 싸움, 거짓말의 달인인 세 인물의 이야기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기술을 연마하지만 이루어낸 결과는 좋지 못하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반평생을 헌신한 성과가 이렇듯 허무하다면 그들의 삶의 가치는 무엇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인간실격>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매우 암울하고 빽빽함에도 의외로 웃음을 주는 대목이 곳곳에 있다. 실소(失笑) 또는 고소(苦笑)일 수도 있으나 결코 슬픔과 좌절에 매몰되지 않는 미덕을 작가는 지니고 있다. 덕분에 독자는 긴장감과 중압감에 벗어나 숨쉴 여지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수록된 단편에서는 그런 면모가 더욱 두드러진다. <인간실격>에 대한 작품해설의 평은 작품에 대한 평가를 압축하여 보여준다.
다자이 오사무는 자신의 내적 진실에 한없이 충실하고, 자신의 결여감을 한없이 깊이 파들어 가며, 일절 타협하는 일 없이 자신을 거짓으로 위장하지 않고 또한 인간의 진실과 사랑과 정의와 미를 추구하는 주인공을 설정하여 그가 좌절하고 패배하는 과정을 통해 세속의 위선에 가득 찬 악을, 추악함을, 비인간성을 비로소 겉으로 드러냈다. (P.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