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컨 수사와 번게이 수사
로버트 그린 지음, 이영주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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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구분 없이 총 16장의 구성으로 당대로서는 독특한 작품이다. 내용에서도 마법 대결을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 역시 이색적이다. 표제는 이 희곡의 주요 플롯 중 마거릿과 레이시 간의 사랑의 시련을 담고 있지 못하다. 마법과 사랑은 낭만주의 사조의 전형적 제재에 해당하는데, 르네상스 시기 작품이 이를 전적으로 다루고 있으니 흥미롭다.

 

베이컨 수사는 번게이 수사는 물론 독일 마법사인 밴더마스트마저 악마를 동원하여 가볍게 물리친다. 그가 악마를 부리는 사례는 번게이 수사 납치와 밴더마스트의 귀국, 그리고 조수 마일스의 추격 장면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베이컨 수사가 다년간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놋쇠 머리가 어이없게 부서지는 대목은 매우 시사적이다. 잉글랜드의 방어 내지 지혜의 경구 등 인간의 정당한 노력과 신을 향한 참다운 믿음이 없다면 바람직하지 않으며 가능하지도 않다는. 그의 마법 거울 또한 좋지 않은 비극적 결과를 초래하였음을 제13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종교적 가치관과 새로운 인간본위의 정신의 병립을 찾아볼 수 있다.

 

마거릿과 레이시 경의 신분을 초월한 사랑은 이 희곡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슴 뭉클한 사건이다. 레이시는 왕자와의 우정 대신에 진실한 사랑을 선택하였고, 마거릿 또한 자신의 사랑을 지조로 지켜냈다. 왕자는 결정적 순간에 욕정에 굴복하지 않고 왕자다운 위엄과 이성을 회복한다. 사랑과 우정의 행복한 결말, 그리고 무모한 열정에 대비되는 이성의 가치 등 역시 새로운 시대정신을 보여준다.

 

마거릿을 둘러싸고 친구사이였던 시골지주 램버트와 설스비는 서로를 죽이는 참극을 벌인다. 마거릿이 평범한 외모였다면 이런 비극은 물론 왕자와 레이시 또한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젊은 여인에게 있어 외모의 가치가 매우 중요함이 노골적으로 나타나 있음을 레이시와 설스비의 대사로 확인할 수 있는데 당대적 상황으로 치부하기에는 씁쓸하다.

 

극중 분위기를 밝게 만들고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하기 위한 배역으로 광대 레이프와 베이컨 수사의 조수인 마일스가 한몫을 담당한다. 특히 마일스는 엉터리 라틴어를 시종일관 떠벌리며 현학적인 바보 역할에 충실한데, 희망에 부푼 채 악마 등에 올라타고 지옥으로 향하는 장면은 어처구니없기만 하다.

 

마지막 장은 영국 왕실과 엘리자베스 여왕(“다이애나의 장미”)에 대한 찬미로 장식한다. 아울러 독일과 스페인의 군주들과 나란히 행진함으로써 영국의 위엄을 한층 돋보이게 하면서 대단원을 내린다. 놋쇠 방벽과 함께 작가의 애국주의를 드러내는 동시에 영국 왕실의 호감과 지원을 바라는 내심이 반영되어 있음을 쉽사리 파악할 수 있다.

 

주요인물의 행복한 결말과 조커들의 활약으로 대체적으로 희극으로 분류되지만, 램버트와 설스비 부자의 참극 장면은 결코 섣불리 간과할 수 없다. 또한 작품해설에서 언급되었듯이 베이컨 수사의 실패는 일종의 경고라고 하겠는데, 맹목적 지식과 능력의 추구가 제어되지 않을 경우의 사례를 독자는 조만간 파우스트 박사를 통해 확실히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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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디미언
존 릴리 지음, 임성균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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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신화에서 제재를 가져온 판타지풍의 동화 스타일의 희곡이다. 원작은 달의 여신이 엔디미언을 사랑하지만, 작가는 엔디미언이 달의 여신을 일편단심 사랑하는 것으로 전개를 달리하였다. 달의 여신 신시아는 그리스신화의 아르테미스, 로마신화의 다이애나와 동일하다.

 

(엔디미언) 내 다정한 신시아가 바로 그렇다네. 신성한 존재이기에 시간이 건드리지도 못하고, 섬세하기에 해를 끼치지도 못하지. [1막 제1]

 

(엔디미언) 나는 온전히 겸허하게 신시아를 흠모하오. 아무도 그분을 감히 사랑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아니 되오. 그분의 사랑은 불멸이고 그분의 미덕은 끝이 없다오. 그러니 내가 달을 쳐다보게 놔두시오. [2막 제1]

 

이 작품에서 신시아는 중의적으로 사용되었는데 물리적 존재로서 달 자체인 동시에 달의 여신을 지칭한다. 엔디미언은 유한한 인간을 초월한 천상의 또는 신비적 존재를 사랑한다. 그의 사랑은 인간적 의미의 사랑이 아닌 존경과 숭배에 가깝다. 그래서 텔러스가 질투하고 분개하자 시녀 플로스큘라는 오히려 분노하지 말고 경탄하라고 조언한다. 엔디미언을 사랑하는 텔러스는 대지의 정령이다. 마녀 딥서스가 텔러스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텔러스의 권능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지상의 산물을 생존케 하고 살찌우게 할 수 있는 그녀의 권능과 미모에도 불구하고 엔디미언의 마음을 얻지 못하자 텔러스의 사랑은 증오와 원한으로 변한다. 신시아와 텔러스에 대한 엔디미언의 감정과 태도를 통해 독자는 주인공이 지상이 아닌 천상을 지향하며, 현실보다는 이상에 더 가치를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사랑 못지않게 유메니디스와 엔디미언의 우정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특히 마법의 샘물에서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유메니디스와 그에게 조언하는 게론을 통해 사랑의 변덕과 대비되는 우정의 영원성을 예찬하고 있기도 하다.

 

엔디미언에 대한 신시아의 입맞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계는 사랑으로 진전되지 않는다. 엔디미언의 사랑은 지극히 관념적 속성이라는 점 외에도 양자의 지위상 차이는 극복하기에 너무 크다는 점도 있겠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당대의 작품들에서 신시아는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를 지칭한다. 여왕 앞에서 공연하는 작품이니만치 임의적으로 연인으로 결합시키기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에서 작가는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엔디미언) 신시아 말고는 누구도 제 눈을 즐겁게 하지 못하고, 신시아 말고는 누구도 제 귀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며, 신시아 말고는 누구도 제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신들이 우리의 지위에 차이를 두었기 때문에 모든 것은 의무요, 충성이요, 존경이어야만 하지요. [5막 제3]

 

한편 작품 내에서 서브플롯을 배역하는 토파즈 경은 지극히 희극적인 인물이다. 아둔하며 우직한 그는 극적 긴장을 완화하며 관객에게 여유와 웃음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는. 마녀 딥서스에 대한 연모의 감정을 표현하는 그로부터 독자는 사랑의 맹목성과 변덕성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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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엄의 비극 지만지 희곡선집
엘리자베스 탠필드 케리 지음, 최영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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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읽고 있는 영국 르네상스 시기의 희곡 중 이 작품은 외형적으로 가장 고전적이다, 코러스의 등장과 삼일치 기법 등 그리스 고전극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더구나 다른 작품과는 달리 당대가 아닌 고대 유대 왕국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점 또한 예스러움을 더해준다. 헤롯왕과 메리엄 왕비의 비극적 이야기는 꽤 유명한 듯 한데 우리로서는 작품해설의 역사적 일화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전체적 맥락 이해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메리엄의 비극은 결국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 메리엄은 헤롯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헤롯이 자신의 남편이며 아이들의 아버지라는 점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자신의 조부와 남동생을 죽였다는 사실과 함께 자신과 헤롯의 종족적 신분차이에 대한 우월감이 양자의 진정한 결합을 가로막는다. 1막 제3장에서 메리엄이 살로메에게 퍼붓는 비난은 출신 우월감에서 기인한 것이다. 자신이야말로 순수한 유대인이며, 헤롯과 살로메는 잡종이라는 인식. 죽음에 이르러서야 메리엄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자신에게 겸허함이 부족하였다는 것, 즉 자부심이 지나쳐 오만함에 이르렀다는 점 말이다.

 

개인적으로 헤롯에게 일말의 동정과 공감을 느낀다. 클레오파트라를 능가하는 미모를 지닌 왕비에 대한 사랑과 집착, 한편으로는 순결함에 대한 불안감. 미천한 출신과 왕권 강화를 위해 감행할 수밖에 없던 행동들. 진부하지만 사랑과 야망 사이에 줄타기를 해야 할 운명에 처한 왕의 고뇌. 한 사내가 아닌 왕으로서 그는 야망을 선택하고 그것은 메리엄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메리엄의 처형 이후 헤롯의 슬픔과 방황은 제5막 제1장에서 절정에 달한다. 장대한 독백에서 헤롯은 갈등을 유발한 살로메는 물론 자기 자신을 저주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의 명에 의해 사랑하는 메리엄을 잃었기 때문이다. 자포자기 한 광인처럼 한없는 자책과 저주를 되뇌는 헤롯에게서 일말의 광기마저 엿보이는 것은 그만큼 처절함이 극에 달한 탓이리라.

 

(헤롯) 물러나라, 흉측한 괴물아, 순결한 대지를 형제의 피로 더럽힌 그자보다 더 사악한 자여. 어느 지하 감옥이나 굴 안에 조용히 틀어박혀 있거라, 그곳에서 너의 눈물로 홍수를 만들고, 때가 되면 그 홍수가 너를 물에 잠겨 죽게 하라. [5막 제1]

 

작품의 핵심적 인물은 물론 메리엄과 헤롯이지만, 주연급 조연으로서 살로메의 개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메리엄이 햄릿형이라면 살로메는 돈키호테형이다. 메리엄은 헤롯에 대한 자신의 행동을 고민하지만 소극적 저항에 그친다. 반면 살로메는 과감하다. 그는 자신의 마음쏠림과 선택에 주저함이 없다. 장애물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제거한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종족과 종교의 차이도 거침없다.

 

(살로메) 난 관습을 깨뜨리는 자가 되겠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자유의 문으로 가는 길을 보여 줄 것이며, 제물을 바쳐 내 죄를 정결케 할 것이다. [1막 제4]

 

위와 같이 전례 없이 콘스타바루스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대목이 압권이다. 살로메야말로 극중에서 전형적인 악녀로 취급받겠지만 현대적 관점에서는 충분히 주체적 여성상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바람직한 의미여부에 상관없이.

 

각 막의 마지막 대목은 코러스가 장식한다. 코러스는 극중 인물이 예견하지 못한 앞일을 관객에게 미리 알려주어 극의 전개를 예감케 할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통해 작가가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명확히 한다. 그것은 작품 내적 당위뿐만 아니라 작품 외적인 메시지로서 안전을 도모하는 목적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2막 제4장에서 소문만 듣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 것을 조언하며, 4막 제8장에서 복수에 반대하며 용서의 미덕을 강조한다. 마지막 제5장 제1장의 코러스는 주요 인물의 행동에 대한 최종적 평가를 담아 극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맡는다.

 

작가인 엘리자베스 케리는 자기 자신을 메리엄과 살로메에 투영한다. 당대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와 자신의 내면적 가치가 상충할 때의 괴로움을 메리엄에게, 자신이 그러했듯 외압에 굴복하지 않는 꿋꿋한 독자적 선택의 과감함은 살로메에게 말이다. 작가는 자신의 처지를 작품에 깊이 투영하며 고대에서 제재를 따오는데 자신의 고전 지식에 대한 역량의 표출일 수도 있지만 당대의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고차원적 목적도 다분히 반영하고 있음 또한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고전극의 외형을 띠지만 내용적으로는 지극히 근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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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그녀가 창녀라니
존 퍼드 지음, 임도현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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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가 지나치게 자극적이므로 바로잡고 간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whore’라는 단어는 그 당시에는 매춘을 직업으로 하는 여성이 아니라 혼외 성관계를 가진 여성을 가리켰다고 한다.”(P.212). 창녀라기 보다는 간음녀로 보는 게 더 정확한 의미다. 참고로 <네덜란드 매춘부>의 경우 ‘courtesan’을 사용한다.

 

이 작품은 남매간의 근친상간을 제재로 삼았다는 측면에서 확실히 센세이셔널하다. 지오바니는 여동생에 대한 사랑에 고뇌하고 수사에게 조언도 구하지만 사랑을 멈출 수 없다. 지오바니는 아나벨라를 사랑하는 게 자신의 운명이라고 깨닫고 기필코 그녀에 대한 사랑을 이루리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지오바니와 아나벨라는 서로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육체관계를 맺는다.

 

아나벨라의 법적인 남편 소렌조는 아나벨라의 간음에 극도로 분노한다. 그는 아내를 창녀, 매춘부라고 욕하며 자신을 불명예스럽게 만든 장본인에게 복수하겠다고 펄펄 뛴다. 이런 그의 태도는 매우 모순적이다. 그와 히폴리타 간의 부도덕한 관계가 작품 속에서 생생하게 폭로되는 장면을 목도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히폴리타가 그를 위선자라고 비난하며 자신의 가정을 파괴한 그에게 목숨을 건 복수를 감행하는 대목을 보라. 남녀 불평등 인식에 근거하든 또는 순전히 이기심의 발로이든 그는 자신의 일은 가볍게 넘기며 그와 하인 바스케스는 끝내 히폴리타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바스케스) 연민이 당신을 배반하게 하지 마세요, 제가 돌아올 때까지. 근친상간과 서방질에 대해 생각하세요.

(소렌조) 복수가 내가 갈망하는 모든 야망이다. 그것으로 올라가든지 떨어지든지 할 것이다. 피가 거꾸로 솟는구나. [5막 제2]

 

소렌조의 하인 바스케스는 통상적 하인의 역할을 뛰어넘는다. 그는 주인을 섬길 뿐만 아니라 주인을 이끌고 독려하며 주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자신의 판단에 따라 일을 처리한다. 주인을 대신하여 그리말디와 결투를 벌이며, 히폴리타와 푸타나의 건은 독자적으로 처리한 후 사후에 보고하는 형식을 취한다. 게다가 그의 처리 방식은 무자비하며 잔인하기 그지없다. 그는 오로지 폭력적으로 감행한다. 그에 비하면 소렌조는 수동적이며 존재감이 약하다.

 

지오바니와 아나벨라가 사는 사회는 정의롭지 못하다. 작가는 추기경을 통해 노골적으로 부정의를 폭로한다. 살인죄를 저지른 그리말디를 추기경은 대놓고 비호한다. 이유는 단지 그가 귀족 태생이라는 것. 신분질서 앞에서 도덕과 법질서는 무력하다. 자식을 잃은 도나도는 절규하지만 무력하기 그지없다.

 

지오바니와 아나벨라의 사랑은 변함이 없지만 수사의 설득과 종교적 두려움으로 아나벨라는 지오바니와 관계 유지를 두려워한다. 따라서 지오바니가 헤어져야 한다고 하자 반색을 하며 받아들인다. 여기서 양자의 인식에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지오바니의 칼에 쓰러지며 아나벨라는 오빠를 무정하다고 지칭하며 그를 용서해 달라고 하늘에 기도한다. 이어 아나벨라의 심장을 칼끝에 꽂고 무대에 등장하는 지오바니를 보면 과연 지오바니의 사랑이 순수한 사랑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지오바니) 소렌조, 너는 이로써 목적을 잃었다! 나는 이제 다가오는 너의 음모를 막고, 하나의 사랑을 죽였다, 나의 심장을 저당 잡힌 그 각각의 핏방울을 위해서. 사랑스러운 아나벨라, 너는 상처를 입고도 얼마나 과하게 영광스러운지, 불명예와 증오를 이겨 내면서! [5막 제5]

 

지오바니의 아나벨라에 대한 사랑은 자신의 주장과는 달리 정욕의 반영이다. 그는 소렌조와 결혼으로 아나벨라가 변심했을까 질투 섞인 비난을 한다. 그는 소렌조의 복수를 막고 아나벨라를 자신에게서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여인의 목숨을 빼앗고 심장을 꺼낸다. 독자는 그의 행동에서 일종의 광기를 발견할 뿐이다. 광기의 지오바니!

 

작품해설은 남매간의 근친상간적 사랑과 외형적으로 도덕적인 사회의 부정의를 대비하며 오히려 전자의 고결한 순수성을 강조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사랑이 정말로 고귀하고 순수하여 상찬 받을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특히 오빠인 지오바니를 보면 아나벨라에 대한 사랑은 거의 광기에 가까운 집착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가 여동생을 죽이고 칼끝에 꽂은 심장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아나벨라는 영원히 자신의 것이라는 세상을 향한 선언? 그 결과로 부친의 목숨마저 빼앗는 결과를 빚은 그의 행동은 정당하고 고결한 것인지 계속 의문이 생긴다.

 

나로서는 이 작품에서 근친상간적 사랑의 비극적 결과와 아울러 당대 사회의 만연한 부도덕을 동시에 폭로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로밖에 도저히 인식되지 않는다. 사회를 지탱하던 윤리적 규범이 철저히 무너지고 있는 현상의 사실적 반영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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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자의 비극 지만지 희곡선집
토머스 미들턴 지음, 오수진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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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희곡은 주요 등장인물이 모두 복수와 관련하여 죽음을 맞게 되는 복수극이다. 작품해설에는 복수극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성서의 내용과 세네카 복수극의 중요 요소인 무모한 권력 추구와 현명하지 못한 군주, 그로 인한 국가의 파국에 대한 우려와 복수에 관한 주제는 여러 영국 극작가들에 의해 계승되어 엘리자베스 시대 복수 비극에 잘 나타난다. (P.226)

 

복수를 감행하는 인물은 빈디체와 히폴리토 형제이며, 특히 빈디체가 핵심적 역할을 맡는다. 복수의 대상은 공국의 지배자인 늙은 공작과 그 가족이다. 이 작품에서는 특히 지배층의 부정의와 부도덕이 두드러지는데, 권력을 무기로 온갖 비행을 저지르고 이에 대한 죄의식을 갖지 않는 그들의 언행을 통해 독자는 복수의 정당성을 인정하게 된다.

 

공작의 막내아들 주니어는 고결한 귀족 부인을 겁탈하여 자살하게 만드는데, 다음에도 기회가 있다면 다시 저지르겠다고 법정에서 뻔뻔하게 말한다. 공작부인은 아들의 죄는 외면한 채 그를 방면하지 않는 공작에 대한 원망을 토로하고 자신의 불륜 정당성을 옹호한다. 그녀에게 있어 법은 권력층에 적용되지 않는 장치다.

 

(공작부인) 공작이 한마디만 해 줬어도 내 귀염둥이 막내아들이 사형이나 투옥을 면했을 텐데. 가시투성이 법을 대담한 발로 짓밟았을 거라고. 법의 가시가 그 애 밑에서 머리를 숙여야 하잖아. 하지만 공작은 말하지 않았어. 그러니 나도 결혼의 맹세 따위는 잊어버리겠어. [1막 제2]

 

공작과 그의 적장자인 루수리오소 역시 권력의 횡포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수많은 처녀를 유혹하고 응하지 않는 자는 독살해 버리는 공작의 무자비한 정욕과 냉혹함은 빈디체의 복수를 유발하는 직접적 계기가 된다. 루수리오소 또한 빈디체의 여동생을 유혹하고자 한다. 공작의 서자인 스푸리오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으로 계모인 공작부인과 정을 통한다. 이복동생인 앰비티오소와 수퍼바쿠오는 루수리오소를 제거하고 후계자 자리를 차지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한마디로 공작 가족은 비윤리의 총체적 난맥상을 통해 몰락의 불가피함을 극 중에서 노정하고 있는 것이다.

 

빈디체와 히폴리타의 복수는 치밀한 계략과 우연의 덕택으로 대성공을 거둔다. 그럼에도 독자는 그들의 성공을 무턱대고 기뻐하기 어렵다. 특히 빈디체가 변장을 한 채 어머니 그라티아나와 여동생 카스티자를 시험해보는 장면은 여동생의 굳은 정절을 돋보이게 하는 반면 어머니의 연약한 마음을 비참할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놓는 결과를 낳았다. 그라티아나 뿐만 아니라 현대의 그 어떤 여성도 변장한 빈디체의 탁월한 논리와 언변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 이 장면을 통해서 독자는 당대 사회에서 순결을 부와 지위로 교환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그것이 매우 설득력이 강하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깨닫게 된다.

 

더불어 작품해설의 지적과 같이 빈디체의 남성중심적 사고와 마키아벨리언적 냉혹성의 두드러짐이 나중에 빈디체의 죽음에 별다른 동정심이 생기지 않는 연유이기도 하다. 작품해설은 새로운 통치자가 된 안토니오 경에게도 비판적 전망을 하고 있는데 굳이 그렇게 볼 까닭은 없다고 본다. 그로서는 늙은 공작 살해와 자신의 관련 없음을 밝히고 군주를 시해한 인물을 처벌해야 할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 빈디체는 어쨌든 반역행위를 저지른 셈이고, 안토니오 경은 빈디체와 같은 체제 전복자가 아니다. 따라서 그는 빈디체를 신속하게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의도치 않은 토사구팽이 되고 만 것이지만. 빈디체 또한 현실을 재빨리 깨닫고 담담히 받아들인다.

 

(안토니오) 노 공작의 살인은 정말 교묘하게 은폐되었군! 저 비극적인 시체들을 들어 올려라. 지금은 무거운 시간이다. 신의 가호로 저들의 피가 모든 반역을 씻어 내길! [5막 제3]

 

이 작품은 부도덕과 패륜과 기만과 살인의 잔혹한 장면으로 가득하지만 정작 처절한 비극성은 별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것은 등장인물, 특히 공작 가족들과 변장한 빈디체의 대사와 행동이 해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 사건의 세세한 묘사보다는 진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 등에 힘입는다. 인물들의 방백이 매우 많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무대 위에서 주요 장면이 전개되는데 한쪽에서 참견, 비판, 조롱하는 따위의 방백은 자연스레 긴장감과 집중도를 분산시키는 효과가 크다. 일부에서 이 작품을 전형적인 복수극으로 간주하지 않는 사유도 나름 타당성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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