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피가로의 결혼
보마르셰 지음, 이선화 옮김 / 비(도서출판b) / 2020년 8월
평점 :
<세비야의 이발사>가 단편소설에 비긴다면 <피가로의 결혼>은 장편소설이다. 4막 42장에서 5막 92장으로 분량도 증가하여 스케일이 커졌으며 줄거리도 복잡해졌지만 무엇보다도 단층적 플롯에서 다층적 플롯으로 작품구조가 현격히 변화하였다.
중심 플롯은 표제와 같이 피가로와 쉬잔의 결혼이다. 문제는 두 사람의 결혼이 순탄하게 이루어지기에는 장애물이 많다는 점이다. 초야권을 부활하고 쉬잔을 차지하려는 알마비바 백작, 채무를 이유로 피가로와 결혼을 도모하는 마르슬린이 대표적이다. 후자는 졸지에 모자 관계로 확정되면서 해소되지만 백작과 쉬잔의 관계는 종막까지 이어진다. 전작에 이어지는 백작과 백작부인의 관계도 종막에 이르러서야 긍정적으로 회복되는 등 주요 등장인물 간 얽히고설킨 애정과 이해관계의 대립이 작품 추진의 원동력이다. 후속작에서 증폭되는 백작부인과 셰뤼뱅의 복선도 미리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전작에서 백작과 피가로는 동지로서 마르슬린 및 바질과 대립하는 처지라면 여기서 백작과 피가로는 외양상 한편이지만 이면으로는 치열한 암투를 전개하는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백작에 대한 피가로의 사고와 언행은 자연스레 비판적이며 하인의 태도치고는 오만불손하기조차 하다.
이 작품의 초연이 금지되었던 까닭 중 하나이자 중요한 특징은 사회비판적 메시지가 대사 곳곳에 반영되어 있다는 데 있다. 그것도 매우 노골적이고 직설적으로. 작품해설에서는 이렇게 분류하고 있다.
그가 작품 속에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은 크게 보아 네 가지이다. 불평등한 신분제도, 여성에 대한 차별 문제, 불공정한 사법체계, 언론출판에 대한 검열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노골적으로 조롱과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귀족의 습속과 신분제도이다. (P.267)
(피가로) ......대 영주랍시고 당신이 뭐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줄 아나본데! ... 귀족, 재산, 혈통, 지위, 뭐 이런 것들로 기고만장해진 거지! [제5막 제3장]
제3막 제15장에서는 변호사에 대한 피가로의 날 선 비판이 이어지고, 바로 제16장에서는 마르슬린이 여성 차별의 부당성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 작품의 제재가 영주의 초야권이라는 점 자체가 당대 사회체제의 반동성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품의 주제와 성격이 변모함에 따라 주요 인물도 변화를 겪는다. 백작은 오로지 자신의 정욕을 채우는 데 급급한 전형적 귀족의 대변자가 되며, 백작부인의 정절을 의심하며 극도로 질투하는 이중성의 체현자다. 백작부인은 전작의 당차고 생기발랄한 아가씨에서 소심하고 나약한 귀족부인으로 전락한다. 물론 후반부에는 다소간 회복되지만.
(백작부인) 난 이제 당신이 옛날에 그토록 열렬히 쫓아다닌 그 로진이 아니에요. 난 그저 불행하기 짝이 없는 알마비바 백작부인, 당신의 사랑을 잃고 버림받은 가련한 여인일 뿐이라고요. [제2막 제19장]
쉬잔이야말로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할 만하다. 피가로조차도 쉬잔에 속아 넘어가 의심하고 분노하며 한계를 보여준다고 할 때 시종일관 백작의 유혹을 거부하고 백작부인에게 충실하며 피가로에 대한 애정을 견지하는 다채로운 매력을 선사한다.
셰뤼뱅은 어찌 보면 숨은 주인공이다. 백작부인에 대한 연모를 품고 있는 미소년의 미숙함과 순수성. 그리고 한창 이성에 눈뜰 나이의 분출하는 에너지를 품은 그는 자신이 어째서 후속작과의 연결고리가 되는지 잘 보여준다. 이선화 번역본에서는 셰뤼뱅의 신분과 지위가 단순 시동이 아니라 하층 귀족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참고로 모차르트의 오페라에서는 케루비노로 불린다.
앞선 책들과 마찬가지로 읽다 보면 문맥상의 난점이 간혹 드러난다. 이경의 번역본과 비교가 필요한 대목들이다.
제1막 제2장을 본다. 피가로의 대사 어의가 후자에서 더 분명하다.
(피가로) 내가 당신 가문의 명예를 위해 진흙탕 속을 뒹굴며, 등골 빠지게 일하고 있을 때, 당신은 내 여자의 기량을 키우는 데 집중하시겠다고요! 정말이지 더할 나위 없는 상부상조로군요 [이선화 번역본]
(피가로) 나리 가문의 영광을 위해 제가 진흙을 뒤집어쓰고 등골 빠지게 고생하는 동안, 나리께선 쉬잔을 농락해 자식을 만들어 주시겠다니 참으로 상조하는 관계가 아닐 수 없군요. [이경의 번역본]
제1막 제10장에서 피가로와 쉬잔의 대화는 두 번역본의 해석이 전혀 다르다. 전자는 백작이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고 옮긴이가 주석을 덧붙이고 있다.
(피가로) 우리가 제대로 나리 눈을 속인 건가?
(쉬잔) 눈치하고는! [이선화 번역본]
(피가로) 나리가 제대로 걸렸지?
(쉬잔) 당신은 정말 멋져요! [이경의 번역본]
제2막 제2장의 백작부인과 피가로의 대화도 후자가 더욱 명료하다.
(백작부인) 정숙한 여인을 두고 어떻게 그런 장난질을?
(피가로) 그럴 리가요. 마님, 만약 그랬다가, 탄로 나면 큰일나게요!
(백작부인) 그러니까 내가 당신한테 고마워해야 한단 말이군요. [이선화 번역본]
(백작부인) 나처럼 명예를 중시하는 여자를 상대로 진실 게임을 하겠다는 거예요?
(피가로) 감히 이런 속임수를 쓸 수 있는 여자는 마님 말고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 정말 명예를 지키지 못하는 여성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요.
(백작부인) 그럼 내가 감사해야겠군요. [이경의 번역본]
제5막 제7장이다.
(백작) 녀석의 키스를 가로채려고 그 녀석 입술과 부딪힌 게 아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한다.)
(백작부인) 제멋대로시네요! [이선화 번역본]
(백작) 조금 전에 내가 셰뤼뱅의 키스를 받았다고 해서 너한테 키스를 안 할 수 없지. (부인 이마에 키스한다.)
(백작부인) 저를 함부로 다루지 마세요! [이경의 번역본]
대단원의 제5막 제19장을 마지막으로 보겠다.
(백작) 자네였다고? 하하하, 사랑하는 부인, 어찌 생각하시오?
(백작부인) (멍해 있다가 정신이 들어 다정하게 말한다.) 아! 그래요, 단언컨대, 평생, 재밋거리는 없을 것 같군요. [이선화 번역본]
(백작) 피가로가 따귀를 맞았다고? 허허, 부인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백작부인) (딴생각을 하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며 다정한 말투로) 아, 예! 맹세하건대 실수하는 일은 평생 없어야겠지요. [이경의 번역본]
원래 삼부작을 한꺼번에 쭉 읽은 후 다른 번역으로 개별 작품을 하나씩 음미해 보려는 시도였다. 재독에도 불구하고 도중에 의미가 와닿지 않은 대목을 비교해보면 어떨까 하다 의외로 여러 군데서 번역상의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 두 번역본 모두 양자가 애매한 대목이 혼재하여 우열을 가리기 어려우니 상보적 관계라고 해두겠다. 새삼 번역의 중요성과 아울러 어려움도 우연히 깨닫게 된 계기였다.